그 해 여름
w. 민트
백현아, 숙제 다 안했어? 백현아, 부실 비었는데 거기서 잠이라도 자고 가. 백현아, 오늘은 선생님한테 안 혼났어? 다행이다. 저를 향해 쏟아지는 수십가지 말들과 신경써주는 그 모든 단어들이 백현을 감쌌다. 백현아, 이번에는 몇 점이야? 창백하다기보다 색이 없기에 가까운 흰 피부에 어울리는 짙은 하늘색 하복으로 준면이 옷을 갈아입을 때 까지, 그의 챙겨줌은 계속되었다. ' 김 준 면 ' 실로 짙게 새겨진 이름표를 단정히 와이셔츠에 꿰멘 준면의 옷이 여름바람에 나풀거렸다.
" 덥다, 백현아. 벌써 여름인 거 같아. "
준면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축구부원들은 점심도 거르고 축구를 하고 있었고, 같은반인 찬열이 큰 키로 엉성하게 뛰어다니는 것을 집중해서 보던 백현이 결국 찬열이 덩칫값도 못하고 콰당 엎어지자 허리를 접어가며 큭큭대고 웃었다. 아 졸라 웃겨, 박찬열 진짜. 백현이 하는 양을 집중해서 보던 준면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백현아, 너 찬열이랑 친해? 그제야 옆으로 돌아간 시선에 준면이 은은하게 미소지었다. 네, 뭐. 대강요. 대답해준 백현이 다시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 패스! 아 패스하라고! 찬열의 방정맞은 목소리가 다시 허공을 갈랐고, 더운 여름바람이 훅 끼쳐왔다.
" 벌써 덥네요, 선배. "
" 어? 으응.. 그런 거 같다. "
멍하게 허공을 보던 준면이 백현을 보고 흐릿하게 웃었다. 선배, 쓰러질거 같아요 오늘따라. 어제 늦게 잤어요? 아, 부서정리하느라. 뭐.. 이거저거 신경쓸것도 많고. 그렇게 말하는 준면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고단해 보였다. 많이 피곤한가봐요, 선배. 아, 근데 우리 이번에 부서ㅡ. 백현의 머리 위로 준면의 감색 머리카락이 살짝 내려앉았다. 목가로 까실한 가디건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 선배는 이제 여름인데 아직도 가디건 입고 다녀, 덥지도 않나. 생각한 백현이 잠든 준면의 얼굴을 내려보았다. 고삼이라고는 믿지 못할 정도로 깨끗하고 깔끔하게 생긴 준면의 이목구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선배야. 사람 걱정되게. 왜 비실대고 그래 진짜.. 가디건을 입어도 마른 팔다리는 가려지지 않았다.
" 야, 변백현! 너도 할래? 후반부 교체로! "
" 안 해! "
" 뭐? 아 미친놈아 걍 뛰어! "
" 안 한다고! "
저 새끼가 선배 깨게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찬열한테 안 한다는 말로 일관한 백현이 혹시라도 준면이 깼을까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준면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새끼 진짜, 올해부터 축구 안 한다는 이유가 뭔데! 찬열의 말을 가차없이 씹은 백현이 파랗게 펼쳐진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고1때까지 백현은 축구부였다. 축구에 남다른 애정도 있었고, 물론 이쪽으로 갈 건 아니었지만 나름 잘 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일년을 잘 다니다가, 백현은 돌연 축구부를 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었다. 그러고는 들어가겠다는 부서가 학생부. 미친놈 아니냐며 백현의 등짝을 후린 찬열은 니가 거기에 들어갈 수나 있겠냐며 백현에게 으르렁거렸고, 어쩌라고. 엿먹어. 로 일관한 백현은 도대체 어떤 연줄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당히 학생부에 들어갔다. 2학년인데.
" ..다 선배때문이잖아요. "
" ... "
" 진짜... "
잠든 준면은 말이 없다. 색색거리는 숨결만 목가에 기분좋게 닿아오고, 백현은 손을 쭉 폈다. 준면선배. 김준면. 김준면 하나 보고 들어가겠다고 그렇게도 떼를 썼던 부서였다. 하얀 피부, 가끔씩 삐져서 삐죽거리는 입술. 친구랑 있을 때는 밝게 웃던 얼굴. 그 모든 걸 가지고 싶었고, 같이 순간을 공유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복병은 있는 법. 마치 남주인공의 길을 막는 여주 옆 오랜친구 서브남주1이라던가 같은 반 쿨워터향 나는 서브남주2라던가ㅡ물론 순전히 백현의 착각이었다ㅡ. 그 중에서도 백현을 가장 엿 먹이던 건 바로 서브남주 1에 해당하는 김종현이었다.
" 선배, 내가 김종현 선배한테서 떼논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
" ... "
" 상관없어요. 지금은 선배가 저랑 더 친하니까. "
말도 안돼는 오글거리는 멘트를 뱉어놓고 백현은 혼자 큭큭거렸다. 김종현, 진짜. 뭐만 하면 사사건건 방해공작에 천성이 착한 준면을 가만두질 않았다. 특히 백현과 있는 걸 가장 눈엣가시처럼 여겼는데... 김종현,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건 김종현한테 남자를 소개시켜줌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남자를 떼는데 남자를 소개시켜주는게 어찌보면 무슨 호모왕국도 아니고 앞집 옆집 뒷집 슈퍼 아저씨도 게이, 뭐 이런 뉘앙스로 느껴진다만, 백현은 감이 왔다. 아 김종현도 나랑 같은 취향이구나 하는 생각.
" 이태민이랑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김종현 선배. "
" ... "
" 저도 선배랑 얼른 잘되야 할텐데. 그죠? "
남자는 박력이야. 첫날부터 제게 말해오던 동그란 인상의 바가지머리는 학원에서 만난 갓고딩 이탬니(17)이었다. 백현이 당황하며 어., 그. 그래. 라고 쪼다처럼 대응하자 태민은 웃어가며 몇살이양? 라는 어조로 물어 봤고, 백현은 박력 좋아하네.. 라는 표정으로 열 여덟. 을 내뱉었다. 십팔 아니야. 부연설명까지 곁들이며. 그러자 태민의 표정이 눈 녹듯 풀어지며 백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 저는 열일곱이에영~ 태민의 얼굴 옆에 ^^;; 이모티콘이 붙은 것만 같았다. 그런 순한 어린양에게 김종현같은 공룡을 소개시켜준게 미안하긴 하지만.. 제 어깨에 머리를 내려놓고 곤히 자고 있는 학생회장님을 위해서라면 그런 희생쯤은 감내해야한다고 결론지은 백현이었다.
" 선배. "
" .... "
" 선배는 알지 모르겠지만, 저 선배 좀 좋아하는 거 같아요. "
" ,... "
" 아, 좀이 아니라 많이 좋아하나? 음.. 많이 좋아하나봐요 그럼."
" ... "
" 그런가봐요, 선배. 선배. 준면선배. "
" ... "
" 준면아. "
" ... 백현아. "
으악, 선배! 백현이 불에 데인 듯 화들짝 놀라며 준면에게서 떨어졌다. 서,서서,선배.. 서, 아니.. 죄, 죄송... 말을 더듬던 백현에게 준면은 환하게 웃었다. 백현아, 아까 했던거 다시 말해봐. 아니, 선배 죄송해요. 당황한 백현의 표정에 웃은 준면이 환하게 웃었다. 백현이, 못하네. 그럼 내가 할게. 큼큼. 목을 가다듬은 준면이 조곤조곤하게 입을 열었다.
" 백현아. "
" ... "
" 나도 많이 좋아하나봐. "
불어온 바람은 더웠으나 기분좋았다. 저를 향해 오롯이 웃고 있는 준면의 눈 안에 백현은 모든 세계가, 우주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선배 뭐야, 진짜 웃겨요.
뭐? 변백현, 야.. 너...
" 내가 더 좋아한다구요. "
시대오류가 난 유치한 로맨스소설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뱉어낸 고2와 고3 두명은 딱 그만큼의 달달함과 풋풋함을 안고 밝게 웃었다.
오랜만에 쓰는 달달물 헹헹ㅋ... 글솜씨 고자에
중간중간 드립치고싶은거 꾹 참느라 고생함 ㅜㅜ 오글터지는데 너네 그냥 사구려.. S2...
여러분 오랜만에 와서 똥글 미아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