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우현의 허락을 듣고 따라온 회사는 무척이나 컸다, 하지만 밝지 않았다. 유난히 공기도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거기엔 평소와 다른 우현도 한 몫했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분이기랄까. 표정은 딱딱하고 무서운데, 제 손을 잡은 우현의 손은 따뜻하기 그지 없었다. 특히, 복도를 지날때 제일 심했던 것 같았다. 제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난 우현은 곧 우현의 사무실로 보이는 듯한 곳에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있어, 성규야." "저... 아저씨 화났어요?" 제 손을 꽉 잡고 조심스레 묻는 성규에 우현이 표정을 풀고 웃었다. 아니, 회사니까. 소파에 앉은 성규의 머리를 살살 헝클었다. 사실 우현은 성규를 괜히 데려온 듯 약간 후회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복도를 걸어올 때, 제 손을 꼬옥 붙잡은 성규에게 꽂히는 시선들, 어디선가 들리는 듯한 수군거림,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성규가 이쁜 건 알아가지고, 그렇다고 어딜 쳐다봐? 이쁜 애인때문에 부글부글 끓는 속을 성규가 알아줄 리는 없었다. 책상 위 서류들이 잘 정리되어있는 모습이 오늘따라 현기증을 일으키는 듯 했다. 지금 상태로는 일이 도저히 될것 같지 않아 호원을 호출했다. "왜." "핫초코 하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우현의 주문에 미간을 찌푸린 호원은 작게 욕을 씹고는 나갔다. 투덜거리는 호윈의 모습에 피식 웃고 성규의 옆에 앉았다. 이제야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기다려, 이호원이 사올꺼야." "고마워요, 아저씨." 샐쭉 웃으며 대답하는 성규가 이뻐 입술에 얕게 입을 맞췄다.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진 모습도 여간 귀여운게 아니었다. 그리고, 문득 스치는 생각. "우현이 형이라고 해봐." "에...?" "아저씨 말고 우현이 형 해봐. 우현 오빠도 좋고." 정말 뜬금없고 짖궂은 우현의 말에 성규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끝부터 달아오르는 귀는 덤이었다. 어떻게, 그런 간지러운 말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울상을 짓고 있자, 괜히 우현이 재촉했다. 응? 빨리. 뭐가 재밌는지 능글맞는 웃음으로 재촉해오자 성규는 결심을 한 듯 우현쪽으로 몸의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우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깜찍한 성규의 행동에 우현은 입을 맞추면서도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아까의 끓어오름이 싹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입술만 맞대던 가벼운 입맞춤이 어느새 질척거리는 키스로 변질되었다. 고개를 돌려가며 하는 키스도 우현이 먼저 눕자 더 심화되었다. 우현의 가슴에 작게 손을 올리고 기대 엎드린 성규가 숨이 차 입을 벌리자 우현의 혀가 빠르게 들어왔다. "아, 진짜. 아무리 보스라고 해도 너무... 시발." 두 손에 핫초코와 아메리카노를 들고 팔꿈치로 문고리를 돌렸을 때 보이는 건 두 사람의 키스였다. 회사에서 뭔 짓이야. 못 볼꼴을 봤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빠르게 문 앞에다 커피를 놓고 신경질나게 문을 닫는 호원에 둘은 그제야 입술을 뗐다. 그리고, 서로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두고 동시에 푸흐흐 웃었다. 이호원이 안 들어왔다면 그 자리에서 만리장성이라도 쌓았을지도 몰라. 성규를 앉혀놓고 문 앞에 있는 커피를 가지러간 우현은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우현이 책상 위의 서류를 해결할 동안 성규는 소파에 앉아 어제 산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심심했는지 중간에 먼저 말도 걸면서. 점심시간에는 회사 밖의 한정식으로 유명한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회사 안의 구내식당에서 먹으면, 성규를 향한 직원들의 시선들과 괜한 수군거림이 느껴져 체할 듯 싶었기 때문이었다. 성규 하나로 제가 신경써야 할 것이 많아졌지만, 절대 귀찮거나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했다. 예전엔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삭막함뿐이었던 사무실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저 소파에 앉아서 말 몇 마디 건네는 게 다인데, 존재 자체로 주는 분위기는 확 달라져 있었다. "성규," 바람쐬러 같이 나가자고 말하려 결재 서류를 덮고 고개를 들자, 눈에 비친건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잠이 든 성규였다. 저를 따라오느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을 만들어준 것과, 아까의 점심으로 인한 식곤증이 겹쳤던 것이 뻔했다. 고개 숙이고 자면 불편할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리에 일어나 소파에 앉아있는 성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성규의 머리와 허리에 손을 두르고 조심스레 성규를 눕혔다. 저한테는 조금 부족한 소파 길이가 성규에겐 조금 남았다. 소파에 손을 살짝 올리니 약간 서늘한 기운이 손을 타고 올라왔다. 담요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급한대로 제 정장 자켓을 벗어 성규의 몸을 덮었다. 제 옷을 덮고 새근새근 잘 자는 모습을 보니, 또 입꼬리가 근질근질했다. 대책없이 귀여웠고 사랑스러웠다. 이대로 다시 일을 시작하긴 아쉬워, 볼에 깨지 않을 정도의 약한 뽀뽀를 했다. "뭐?" "금방전에 들어왔어, 6백." 소란스런 말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잤던 건가? 시계를 보니 5시 반 정도가 되어있었다. 내가 점심을 2시쯤 다 먹었으니까.. 헐, 한 3시간을 잤네. 낮잠을.. 3시간..? 머릿속에 진행되는 계산에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키자 무릎에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어, 이건.. 우현의 정장 자켓이었다. 덮어준건가.. 정장 자켓에서 우현의 체향과 그의 향수가 섞여 달큰하게 올라왔다. "돌려 막기야?" "확인해 봐야 알아." "... 어디서 꿨는지 확인해봐. 확인하면 거기 바로 인수해." "알았, 어? 성규씨." 성규를 부르는 호원에 우현이 흠칫하고는 급하게 뒤를 돌아 동그랗게 눈을 뜬 성규를 보았다. 자, 잠 깼어? 미안, 시끄러웠지? 들어가자. 말을 더듬거리며 성규를 다시 사무실로 밀고 성규 모르게 호원에게 눈짓을 줬다. 그에 호원은 썩은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며 사라졌다. "무슨 얘기에요?" "으, 응? 아니, 그냥, 회사 일이야. 신경 안 써도 돼." ".. 아빠 얘기 아니였어요?" 성규의 정곡을 찌르는 물음에 우현이 당황하다 이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러고선 성규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구부려 기가 팍 죽어있는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었다. 역시 어려서 그런 아버지를 두고도 잊지 못하는 건가. "너희 아버지가 돈 갚기 시작했대. 그래서," "아빠가 3천 다 갚으면.. 나 다시 보낼거에요?" 갑작스러운 성규의 질문에 우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곧, 안쓰러운 표정으로 이어졌다. 여전히, 불안감이 없지 않아 있구나. 가슴이 쓰릴 정도로 안타까웠다. 이젠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한참 부족한 듯 싶었다. 그것이 제 사랑에 대한 믿음이던, 지금 상황에 대한 확신이던, 결핍되어 있던 진정한 사랑의 의미이던, 제가 다 채워주어야 했다. "성규야, 난 절대 널 보내지 않아. 만약에 너희 아버지가 3천이 아니라, 8천을 다 갚고 널 돌려 달라고 하면 난 할 말이 없어." "..." "지금은 그걸 방지하는거고. 난 너 못 보내." 사랑해. 우현이 말을 마치자마자 두 입술이 맞물렸다. 우현도, 성규도 서로를 절대로 놓치 않겠다는 듯이 모양을 맞춘 입술은 애절하면서도 격정적이었다. 확신을 갖지 못해 휩싸이는 불안감에 하루에 몇번씩 기분이 요동치는 여린 몸이 안쓰러웠다. 며칠도 안되서 느껴버린 이 감정이 우스워 보일수도 있지만, 제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오히려 진심이라서 더 무거울뿐. 입술이 맞물리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의 톱니바퀴 어딘가가 맞물려 지금의 우리에 이르렀을 것이고, 한번 맞물린 그 톱니바퀴들은 절대 깨지지 않으니까. 우리도 절대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님 더 진득하게 맞물리거나. 서로의 혀가 정신없이 서로를 훑었다. 이루어지는 타액의 교환이 마치 서로의 마음을 교환시켜주는 행위를 연상케 했다. 이젠 그 여린 몸이 감당할 수 없었던 과거와 불안감을 떨치기 바라는 마음과 영원한 확신과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의 공유. 이보다 더 완벽한 조합은 없었다. 우현의 주머니에 작은 진동이 짧게 느꼈다. 그에 성규와 우현 모두 입술을 뗐지만, 길게 늘어난 은사가 아쉬웅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한 우현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책상에 있는 서류들을 가방에 쑤셔넣기 시작했다. "집 가자." "벌써요? 아직 6시도 안 됐는데요." "이호원이 키스 그만하고 집이나 가래." 두번째로 들켰다는 거에 충격을 먹었는지 성규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사이 모든 정리를 마치고 겉옷을 챙기던 우현이 손수 그 입을 닫아주고는 실실 웃어댔다. 얼른 집 가자, 성규의 머리를 짧게 헝클어 놓고 성규의 겉옷을 챙겨주었다. 겉옷들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근데 평소에도 이렇게 일찍 끝나요?" "아니." 신발장에서 신발을 꼬울꼬물 벗으며 묻는 성규의 말에 우현이 빠른 속도로 대답했다. 외식하자는 말에 신나했던 성규는 우현이 데려간 곳을 보고 다시 한번 입을 쩍 벌어야했다. 제가 감히 발을 들여놓아도 되는 곳인지 의문점이 들 정도로 심각하게 고급스러웠다. 부담 갖지 말고 많이 먹으라는 우현의 말이 어려웠지만, 결국 식사는 배불리 해결했다. 그렇게 저녁 먹고 집에 와도 8시 20분, 여전히 이른 시각이였다. "그럼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뭐, 그냥. 나 먼저 씻어도 되지?" "네? 아, 네..." 어벙하게 고개를 끄덕인 성규와 달리 우현은 뭐가 그리 급한지 옷을 챙겨들고 욕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정말 빠른 속도로, 샤워를 다 하고 나왔다. "아저씨, 완전 빨라요..." "그런가? 너도 얼른 하고 나와." 별 소득없는 대답에 성규도 옷을 챙겨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샴푸, 린스, 바디클렌저 모두 꼼꼼히 끝내고 머리를 말려야 하나 고민할 때 우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와." 그제까지도 머리 말리고 자야 한다고 말한 그때의 그에 비해서 조금은 어딘가 단호한 말투였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추정되는 그의 방으로 가자 침대에 누워있는 그가 보였다. 일단 누워있는 그의 옆에 따라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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