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보
화면에 떠있는 그의 이름 다섯 글자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타일러 라쉬.’ 타일러 라쉬, 타일러 라쉬. 타일러 라쉬. 이렇게 저장하면 너무 정없어 보이나, 타일러 - 로 바꿔보기도 하고. 타일러씨. 라고도 바꾸어 보았다가, 결국 다시 ‘타일러 라쉬’ 라고 저장하고선 침대 위를 방방, 어린애가 된 것처럼 뛰었다. 얼굴에 한가득 미소가 머금어진다. 내가, 내가. 번호 교환에 성공했다니.
딱 그가 내 마음에 들어서이기 때문일까. 어느새 나는 ‘그가 마음에 든다’ 라고. 그를 마음에 드는 상대로, 내 마음속에 더욱더 깊숙이 그를 박은 채 그의 이름 속에서 떠오르는듯한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더라. 웃음이 참 예뻤던 남자. 해맑았던 남자. 그리고 또 순수해 보였던 그 남자.
연락을 해 볼까, 베개를 껴안고 카카오톡에 새 친구로 뜨는 그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기만 하며, 1대1 채팅하기 버튼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지, 누르지는 않았다. 대화한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너무 고민스러웠어서. 차라리 대책 없이 대화하기를 눌렀다가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줄 바에야, 지금 미리 이야깃거리를 생각한 후에 대화를 거는 것이 훨씬 나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게 좋을까. 안녕하세요, 아까 보았었던 기욤 패트리입니다? - 번호 교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타일러 라쉬에요!]
같이 고기나 먹으러 갈래요? 사실 처음부터 눈여겨봤어요, 친해져요? - 이건 너무 변태 같으려나. 등등의, 곰곰이 생각을 해가며 턱을 매만졌는데. 휴대폰이 진동과 함께 튀어 오르며, 화면에 [타일러 라쉬]라는 대화명을. 또 그의 프로필사진을. 그의 메시지를 띄웠다. 먼저 연락을 할 줄이야, 차라리 조금 더 일찍 생각하고 먼저 대화를 걸 걸 그랬어. -라는 후회도 잠시. 바로 그와 나의 대화창에 들어가 ‘1’을 없앴을까. 메시지 만으로도, 그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 기욤 패트리에요! 사실 먼저 연락드리려고 했었는데 - ]
[이렇게 연락처를 교환하게 되어 너무 기쁘네요^^,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석사과정으로 재학중입니다 :)]
이 메시지로 하여금 느낀 것은 확실히 라쉬는 나보다 한국어 실력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글씨만으로 느껴지는, 내게 다가오는 똑똑함 이라고 할까 - 그런 비슷한 것이 내게 다가왔었다. 그저 단순히 ‘서울대학생입니다’ 라는게 아닌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석사과정으로 재학중입니다’ 라고 친절하게 자기소개를 해줬으니까. 혹시나 이거 어필하는것일까, 일부러 자신에 대해서 더 알라는 그런것일까, - , 아니 이거 너무 멀리간것같다.
[저는 프로게이머로 예전에 활동했었던 기욤패트리에요. ~ 지금은 포커로 일하고있어요]
[포커요 o0o?]
[불법은 아니에요~^^]
사실 나는 피씨방만 거닐어도, 혹시 기욤패트리 아니냐며 스타그래프트, 스타 스타! - 하며 알아보는 사람이 꽤 많았는데.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석사이니만큼 그는 나에대하여 몰랐나보다. 뭐 그렇다고 서운한건 아니야. 자기가 관심있는 것에한 한가지만 파는거잖아?. 얼마나 그게 좋은거야.
합법적인 장소에서 일하고 있다고. 괜시리 그가 법학부 학생에게 이르기라도 할까, 친절하게 설명해 주니 그는 [아!^^ 이상한 오해는 하지 않았어요~ ] 란다. 괜히 그 때의 그 낭랑한 목소리가 이 글씨로 다시 재생되어 읽어주는 듯 해. [왜요, 신고하려했어요?] 라 약간 짓궃게 직설적으로 물으니. 그는 한동한 대답이 없다가, [기욤씨는 낮에는 게임하시는거구요?^^]라며 새로운 질문을 묻는다. 이거, 대화 주제 돌리는 것 맞지. 괜시리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 내가 타일러씨 컴퓨터를 힐끔, 훔쳐본 것처럼. 타일러씨도 내 컴퓨터. 몰래 봤구나.
[다른종목으로 프로게이머 한번 해보기나 하려고요. 최고령 프로게이머나 해볼까 한번]
[멋있네요!]
타일러씨, 게임 그다기 좋아할것같진 않아보인데. 게임이야기를 계속하는게 싫지만은 않은지 멋있네요! 에 이어 멋있어요 - 라고 조금 말을 바꾸며 그는 또 대답을 해왔다. 타일러씨가 좋아할만한 대화 주제는 뭐가있을지, 핸드폰을 앞에두고 한창을 고민하다가. 채팅방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을까, 읽고 무시하는것도 하면 안되지. 뒤늦게 앗차차, 하면서 대화 주제를 바꾸었었다. 뭐, 급한대로. 주제는 - 타일러씨 애인 있어요?.
[아뇨 요즘은 공부만하느라 ~6_6 기욤씨는요?]
[전 타일러씨와 다르게 게임만 하느라 6_6]
이모티콘까지 따라하니까 그는 한번 기욤씨, 피시방 외의 다른곳에서 보고싶다며 - 뒤이어 ‘ㅎㅎ’까지 덧붙이면서 말을 바꾸었다. 그것도 사람을 꽤나 - 이상한 설래발을 치게 만드는 말을. 이거 뭐야, 이거 타일러씨 나에게 관심 표현한거 맞지. 이게 바로 듣기만 했었던 ‘썸’ 인거야?. 혼자 여러생각을 다 하며 휴대폰만 쥐고, 멀뚱멀뚱. 떨리는 손으로 대답도 못하며 그저 입꼬리만 씨익, 올리면서, 이걸 도대체 어떻게 답장해야 할까. 어떻게하면 나도 타일러씨에게 관심있어요. 라는 속마음을 티안나게 고백할수 있지, 속으로 한창 생각하느라 답을 차마 보내지 못했는데. 뒤이어 타일러씨가, 한번 더 메시지를 보낸다.
[뭐,뭐, 바쁘심 말아요. 저도 약속있어요! ]
아니아니 전혀 안바쁜데,오히려 타일러씨랑 다른곳에서 한번, 보고싶은데!. 아니아니 절대 안바쁘다고 타자를 치니까 또 ‘아닌ㄴ아닌ㄴ’ 이라고 오타가 나버려서. 서울대학교 학생에게 밉보일라, 수정하며 또다시 커다란 손가락으로 타자를 눌렀는데 이번에는 ‘아닍아닞’ 이라고. 휴대폰 자판이 날을 따라주지 않는다. 또 그러부터 시간이 또 지났나,아 제발 보내져라. 하고 결국 ‘아니아니요’를 치는것에 성공했는데. 버튼을 누르려는 그 순간에, 타일러씨에게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기욤씨 아까부터 답장 잘 못하시는거보면 피곤하신것같네요.안녕히 주무세요 8_*.]
그리고 결국 ‘아니아니요’는 보낼수 없었다. 그저 커다란 손가락에 원망하고, 또 타일러씨에게 바로바로 답장하지 못한채 - 혼자 바보같이 설레기만 잔뜩하던 나에게 원망했지.
* * *
“타일러, 이쪽!”
“어 반가워!”
정신없는 파티장이다. 언제와도 이곳은 쓸대없이 시끄럽기만 한것같아 - 파티의 분위기를 싫어하는건 아는데. 참 줄리안의 클럽은, 딱 줄리안만의 독특한 색깔이 묻어나와 있어서. 그래 솔직히 말해, 이 색깔을 내가 싫어한다는 것이다. 진짜 너무 요란해. 하지만 뭐, 가끔은 이런 요란한것도 즐기고 싶어서. 솔직히 오늘도 이 분위기를 ‘즐기러’ 온 것이니. 줄리안과 손을 잡으면서 인사를 했을까. 줄리안은 손을 잡자마자 - 그래서, 요즘 연애는?. 이라며 내게 먼저 그것부터 물어오더라. 넌 친구 건강보다, 연애가 더 궁금하냐. 요즘 건강해? 이런 말부터 좀 해줄것이지.
“없어, 완전 공부만 했어, 진짜”
“누가 석사 아니랄까봐”
푸푸푸, 하고 줄리안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너도 이젠 별거 아니네, 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댄다. 뭐가 별거 아니긴 별거 아니야. - 난 그대로구만. 다만 요즘 논문이네 뭐 때문에 바빠서 이런거라니까. 괜시리 조곤조곤, 일일이 다 설명해가면서 서울대학생의 바쁜 나날에대해 다 이야기를 해 주니. 줄리안은 또다시 푸푸푸, 입을 내밀더니. 이상한 변명도 늘었다고. 그래서, 꼬신 사람들도 하나도 없고?. 라며 어깨를 친다. 아 진짜 바빴다니까.
“야,타쿠야도 대학교 다니는데, 중국어 교수님한테 끈질기게 들이대서 결국 사귄다잖아”
“신고해”
결국 예전 타일러는 다 죽었다며 고개를 도리질 치는 줄리안에, 욱 하는 감정으로 - 아 나도 있다고. 나도 번호 교환하고 잘 되어가는 사람 있다며 그에게 빽 소리지른 덕에. 모두 다 들켰어. 그의 표정이 걸렸다는 듯 입꼬리가 베시시 올라간다. 누구야?키는? 이름은? 나이는?.이라고, 아 망했다 망했어. 아직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 번호밖에 모르는데. 다 망해버렸다.
“뭐야, 번호밖에 몰라?”
그걸 또 줄리안이 눈치를 채서. 그는 바로 내 휴대폰을 낚아채고선 - 언제 알았는지 패턴을 푼 후에 그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내더라. 너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뒤늦게 핸드폰을 낚아채려 애를 썼지만. 그는 나보다 더 큰 키와 긴 팔을 이용해 잡지 못하도록 이리저리 흔들어대곤, 이내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답장을 의미하는듯한 진동이 울리자 이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면서 잘 해봐라 식으로 제 팔짱을 끼며 지켜보기. 아 - 몰라 될 때로 되야지. 알았다고. 줄리안에게 선전포고하듯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오늘 안에 꼭 약속 잡아내고 만다고. 비장의 웃음을 지어내니 그는 오오 -. 봐봐, 이래야 타일러지. 라며 감탄을 내뱉었다.
그리고 결국 그와의 대화를 시작했다. 우선 초반의, 지루하고 형식적이었던 자기소개가 끝나고. 뒤이어 게임이야기를 빌미로 같이 여행가자는 이야기를. 회삼의 돌직구를 딱 날리고, 떨리는 손으로 어쩔줄을 몰라하며 줄리안에게 - 보, 보냈어. 라고 웃어보였는데. 다행이 줄리안은 역시 너라고, 그대로네! 변한 것 없네! 라며 내 어깨에 팔을 둘러왔다.
그래 줄리안은 딱 거기까지만 알아서 다행이다.
약속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몰라서 다행이야. 그에게 답장은? 이라는 말을 내게 물어보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 쪽에서는 답장이 없었다, 아마 싫은 듯이. 딱 그 공백만 봐도 그는 대답하기 난처해 보이는 듯 보였으니까. 참, 참 진짜. 괜히 그에게 매달리는 모습은 보여주기 싫어, 한 오 분정도 지났나. 결국 ‘주무세요’ 라고. 그 문자의 끝을 마무리하고선 썩 좋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껐지.
논문 때문에 쌓인스트레스를 풀러 줄리안의 클럽에 왔건만,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는 느낌을 들었다. 후에는 타쿠야까지 와서 제 짝남에 대한 자랑을 읊고. 줄리안은 오늘 타일러가 어떤 일을 한줄 아냐며 떠든탓에. 진짜 민망함과 짜증만 올랐어. 결국 그 클럽이 문이 닫기 한참전의 시간에, 그 분위기를 박차고 나왔다.
그사람, 아무래도. 내가 별 마음에 들지는 않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