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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lude





내가 아직 큰 주택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을 때였다.



아주 어릴 때 엄마의 손에 이끌려 온 집은 이층의 단독주택 앞이었다. 마당에는 아기자기한 꽃들이 있었고 무엇을 익히고 있는지 모를 장독대들이 즐비어 줄지어 있던 곳. 유치원에서 자주 그린 내 꿈의 집. 어린 나이에 처음 마주한 집은 그랬다. 물론 나와 엄마가 살 곳은 마당의 정문을 가로질러서 들어가는 일층이 아니라 이층에 샛방으로 내놓은, 주택의 본 크기에 비해서 너무나도 작고 또 작았던 집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만 해도. 엄마는 우리가 잠만 여기서 잘 뿐, 실상은 이 큰 주인집 주택에 사는 거랑 다름없다고 날 속였다. 그걸 철썩 같이 믿었던 나는 초등학교에 막 들어가기 전까지 그 기분 좋은 착각 속에서 살았었다.




"응애!"




그 커다란 사내아이의 울음 소리로 인해서 주택 안에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행동반경이 작아지지만 않았다면. 갓난 아기가 막 태어난 주인집에서는 우리가 일층의 거실과 부엌을 다니는 것을 싫어했다. 지금에 와서 매일마다 다크서클로 그늘져 있던 아주머니의 안색을 생각하면 정확히는 우리가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모든 사람이 제 아기를 깨우는 일을 매우 싫어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게 그 애는 시도때도 없이 울어댔다. 밥을 먹을 때도, 아침에도, 저녁에 엄마를 도와서 말린 고추 씨앗을 따던 그 때에도 이층에 사는 우리집까지 아이의 울음이 닿아댔다.




"아, 안녕."




그러던 그 갓난애가 처음으로 뒤집기를 하고 첫 발을 내딛었을까 아직 이빨도 나지 않은 아이의 첫 돌을 축하하러 갔던 날. 난 그토록 징징대던 아이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나이를 일 년이나 더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애는 애였던지라 매일같이 울어대서 붉게 물든 눈을 하고서도 잘생긴 게 확연했던 아이. 날 바라보던 큰 두 눈이 땡그랗게 좌우로 움직이는 게 퍽 귀여웠다. 동생은 딱히 갖고 싶지 않았는데 그 애는 날 홀리기에 충분했다. 엄마, 우리도 아기 갖자. 멋 모르고 그런 말을 꺼낸 내 말에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을만큼. 




"어마-."




그리고 그 이불보에 둘러싸여서 날 올려다 본 너는 날 보고 엄마라고 불렀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처음 말을 꺼낸 것도, 엄마라는 단어도, 그 단어가 향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도 모두 다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다. 진짜 그 애의 엄마인 아주머니는 놀라서 날 쳐다보고. 




"어마, 어마!"




모든 이의 시선을 통들어 가장 많이 받아 온 그 날. 그 때. 옹성우의 첫 돌. 



난 그 애의 엄마라고 불리웠다. 아니나 다를까 날 졸졸 쫓아다니며 옹성우는 걸음을 배웠고. 구몬 한글 첫 단계를 끝내자마자 내게 무지개맛 보석반지 사탕을 내밀고선 고백을 했었다. 앞니가 다 빠져서 <죠아해!>라는 어눌한 말이 어찌나 귀엽던지. 엄마가 곧 죽어도 내게 아기를 낳아줄 것 같진 않아보였던지라 난 나를 엄마라고 생각하는 옹성우를 동생처럼 생각했다. 한 품에 안기에는 좀 버거웠던 옹성우를 두 손으로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추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내 새끼처럼. 그렇게 너를 먹이고 키우고 가르쳤는데.




"좋아해."




왜 이런 상황이 되어버린 걸까.




'누나! 떵우는 누나랑 껴론할꼬야!'




통통하게 오른 젖살로 웃을 때마다 윙크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던 녀석이 떠올랐다. 수줍게 두 볼을 붉히며 내 손가락에 끼워주던 그 사탕이. 근데 그게 이런 뜻인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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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누나 좋아해."




그 때 주었던 무지개맛 왕 큰 보석 반지가 진심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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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 ▶



옹성우는 갓난 아기때부터 자주 울었다. 울지 않은 날이 손에 꼽힐 정도로 무슨 일이 있든 그의 의사소통 방식은 무작정 울기였다. 이빨이 자라고 내게 엄마라는 단어 대신 누나라는 단어가 적절하다는 걸 알았을 때에도 그 앤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하루는 내가 초등학교 학예회에서 같이 춤을 출 짝이라고 집에 남자애를 데리고 온 날 옹성우는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내가 열 셋이고 옹성우가 일곱살이었으니까 그 아이에겐 아직 제 뜻을 곧이 곧대로 펼 의사소통이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근데 그렇다고 손 끝으로 남자애를 가리키면서. 




'못생겼어!'




그렇게 말할 것 까진 없잖아.



그러니까 옹성우가 못생겼다는 말을 해대며 우리집에 온 애들은 여자고 남자고 손사레를 쳐대도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건. 그 애의 외모가 남들에 비해서 월등히, 아주 아주 월등히 잘났기 때문이었다. 배넷저고리를 입은 갓난 아기때부터 때깔이 타고 나더니 점점 자라면서 이목구비가 자리잡히고 젓살이 쏙 빠지기 시작하자 난 내가 연애를 하기도 전에 쓸데없이 눈이나 높아진 것 같다고 후회했더랬다.




주인 아주머니는 아주 바빴다. 원래도 하시는 일이 많았는데 옹성우의 아버지가 몸이 아프시고 난 이후에는 더 많은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연히 옹성우는 내 손에 맡겨지다시피 했다. 꼬맹이를 데리고 문방구도 가고 학교 미끄럼틀도 태워주고 작은 동네 슈퍼 앞에 있는 게임기에서 몰래 게임을 하는 맛까지 가르쳤는데. 어쩌다보니 내 주변에 있는 친구들은 다 옹성우를 알았다. 때쟁이 울보. 옹성우가 알면 기가 차고 화를 낼 별명으로 좀 많이 유명했다. 돈 많은 집에 태어나서 주인집의 텃밭과 마당을 자유로이 다니는 놈이니 제 마음대로 안되면 여간 짜증을 많이 냈었다.




"성우는 걱정 말아. ㅇㅇ도 있잖아."




그런 옹성우가 때에 맞지 않게 철이 들기 시작한 건 주인 아주머니마저 허리 통증이 심해져 결국 그 애가 우리와 함께 살기 시작하고 나서부터였다. 아빠가 하던 사업이 조금씩 실마리가 풀리면서 우리는 더이상 옹성우네 주택 이층에 살지 않았다. 이사라고 하기에도 좀 뭐한 바로 옆집 주택으로 둥지를 틀었다. 의례적으로 겪는 사춘기를 단계에 내가 접어들면서 내 방이 새로 갖고 싶었는데 이건 아주 좋은 기회였다. 다만 부부가 함께 요양을 받으러 다니면서 열살배기 옹성우와 또 같이 살아야 한다는 걸 빼면.



솔직히 말하면 옹성우를 좋아하고 아끼고 사랑스러워했지만 열일곱의 나이의 난 그 애를 귀찮아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저랑 놀아달라는 애들이 수두룩 하건만 왜 꼭 학교만 파하면 무작정 내 방으로 들어오는지. 방 문을 꼭 잠고 잠을 잤는데도 어떻게 된건지 왜 맨날 작은 침대에서 날 부둥켜 안고 잠을 자는지. 그리고 왜 그런 짓을 열 살이 아닌 열아홉이 되고 나서도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야 어린 나이의 투정과 애정으로 넘겨짚으면 되겠지만. 이젠 엄마와 아빠도 노후여행을 떠나겠다고 해서 이 넓찍한 집은 오로지 옹성우와 내 몫이 되었는데도 도대체가 다 큰 놈이 여적 날 껴안고 자는 이유를 모르겠다.




"너 방 따로 있잖아."

"여기가 더 좋아."

"그럼 내가 너랑 방 바꿔 줄까?"

"싫어."




봐. 아직 난 말도 다 꺼내지 못했는데 저 끝에 답이 뭐가 나올지 다 파악해놓고선 꼭 울 것 같은 얼굴로 옹성우는 날 보았다. 누나는 나 싫어? 저따위의 말을 꺼내면 결국 내가 두 손, 두 발 다 들 걸 뻔히 다 알면서. 




"침대도 좁은데 왜 불편하게 고생하냐는 거지, 내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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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떡해. 누나가 좋은데."




빌어먹을. 옹성우는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저 얼굴을 빚어준 것을 평생에 걸쳐서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한다. 옹성우가 날 쫓아다니는 이유. 더운 여름에도 에어컨 하나 없는 내 방에서 날 끌어안고 자는 이유. 열아홉이 되고 나서도 여적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하는 이유. 저 말간 얼굴에 또 내가 넘어가주는 이유.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유를 밝혀보자면 옹성우가 나를 엄마라고 불렀던 그 태초부터가 잘못 되었다. 나중에 옹성우가 결혼하면 누구도 아닌 내가 소맷단을 적시며 울어야겠다. 그거라도 못하면 이렇게나 땀이 뻘뻘 나고 더워 뒤져버릴 것 같은데도 내 팔뚝에 달라붙어 있는 옹성우를 떼어내지 못한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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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SE ■





그래도 옹성우는 나한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부터 내 동생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것처럼 지금까지도 옹성우는 언제든 내 옆에 있었다. 부르면 쪼르르 달려오는 게 꼭 옆집의 밍키 같기도 했고. 그 잘난 얼굴로 여자친구 한 번 사귀지 않고 날 지켜줄 거라던 말도 우스갯 소리로 여겼지만 여하튼 고마웠다. 내 앨범에는 옹성우가, 옹성우의 앨범에도 꼭 내가 옥의 티처럼 껴져 있는 게 우리 사이를 직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내 추억을 하나씩 되짚어 보면 옹성우는 어김없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야, 너 규민오빠랑 아직도 사겨?"




황규민. 내가 먹이고 키우는 또다른 존재.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취직을 했을 무렵 난 내가 버는 돈의 일부분을 꼭 규민 오빠에게 갖다 바쳤다. 엄마가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고 누누이 얘기를 해주었던 것도 같은데 왜 그 말을 새겨 듣지 않았을까. 황규민은 내 학교 선배이기도 했고 내 세번째 연애 상대이기도 했다. 한때는 학교에서 교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지금은 고시원 한 칸짜리에서 임용고시에 목을 매고 있는 나의 남자친구였다. 고시생을 내 옆에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난 돈이면 돈, 도시락이면 도시락. 옹성우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 놈을 살뜰히 챙겼다. 



군대에 있을 때에도 제대를 하고 고시원에 들어갔을 때에도 난 그를 위해 인내심을 배웠다. 언젠가. 이 단어 하나가 내 전부였다. 데이트라고 해봤자 고시원이 다였던지라 영화관마저도 우리에겐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여자랑 영화관을 가는 걸 보고, 헤어질 때 고시원 앞에서 키스를 하는 걸 보고 나서 깨달았다. 영화관 하나 가는 것도 벌벌 떨어대는 건 나에게만 그런 거라고. 오로지 나에게만 사치이고 안되는 일이었다. 




"씨발 새끼."




전까지만 해도 약하게 내리던 빗줄기가 거세졌다. 우산 하나 갖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오빠의 시간을 뺏는 거라고 생각하던 내가 너무 불쌍해졌다. 저 놈은 입술만 부벼대던 게 아쉬웠는지 제 고시원으로 여자를 데리고 들어가는데. 저 새끼를 남자친구로 둔 내가, 뭐 하나 더 먹여보겠다고 난리를 쳐댄 나 자신이 그렇게나 안타깝고 불쌍해보일 수가 없었다. 홀딱 젖은 몰골로 집에 들어오자 현관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나보다 한 템포 느리게 집으로 들어오던 옹성우와 마주했다.




"어디 갔었어?"

"어?"

"오늘 비 온다고 말을 그렇게 해댔는데 듣지도 않더니. 전화는 왜 안 받아."




한 손에 검은 우산을 든 옹성우는 우산을 들고 간 게 거짓말처럼 나 못지 않게 흠뻑 젖어 있었다. 비는 오는데 전화는 안되지, 회사에는 또 없다고 그러지. 한숨을 길게 내쉬는 옹성우에게서 한기가 느껴졌다. 얼마나 날 찾아다닌건지 축축하다 못해 물을 끊임없이 떨어트리고 있는 앞머리가 옹성우의 눈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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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그 애 답지 않게 살짝 높아진 언성에 괜히 눈물이 났다. 이젠 남자친구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놈이 뻔히 날 엿 먹이는 걸 봤을 때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는데. 내 남자친구도 나를 찾지 않는 날, 날 위해 우산을 들고 수도 없이 뛰어다녔을 옹성우가 떠올랐다. 아무도 날 걱정해주지 않았는데도 그 애는 날 걱정했고 나를 기다려주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앞이 뿌예져서 더이상 옹성우가 보이지도 않았다.




"누나?"

"성우야 미안해."




미안해.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그대로 주저 앉아서 엉엉 울었다. 이상하게도 남자친구에게 버림 받은 것보다 꼬맹이의 작은 정성 하나에 눈물이 났다. 나를 따라서 무릎을 굽히고선 앉은 옹성우는 다리 사이로 파묻고선 울어대는 내 얼굴을 들어서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바로 날 찾으로 다닌건지 눅진하게 젖은 옹성우의 교복 셔츠가 뺨 위로 느껴졌다. 




"울지마. 왜 또 울고 그래."




울보 꼬맹이라고 불리우던 옹성우가 우는 날 달래는 상황이 낯설었다. 더구나 옹성우에 비해서 한참이나 작은 내 몸뚱이가, 뼈마디가 훤히 들어날만큼 커진 손으로 내 등을 쓸어주는 게. 하지만 익숙하게 토닥이는 그 리듬이, 손길이 끊임없이 요동치는 감정을 가라앉히게 만들어주었다. 내 무게를 온전히 받아내면서 안아주는 녀석의 품이 너무나도 편했고. 그건 정말이지. 잠깐 정신을 놓으면 이 상태로 잠을 잘 것만 같은, 아주 시몬스 저리가라 할 정도로 편안함을 가진 품이었다. 




"이러다가 감기 걸리겠다."




순간 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반쯤 감겼던 눈을 연거푸 깜박거리자 내 발이 바닥과 동떨어졌다는 것. 옹성우가 날 안았다는 것. 이 두 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야, 나 괜찮아! 뭐가 괜찮다고 한 건지도 모르겠다. 당황스럽고 당황스럽고 또 당황스러웠다. 내가 이런식으로 옹성우에게 안겨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고. 무엇보다 잘생긴 내 동생, 우리 아가, 내 새끼. 내가 정해놓은 옹성우의 범주 안에서 이런 일이 생겨난다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았다. 자기 전에 먼저 씻어. 귀찮다고 바로 눕지 말고. 무덤덤히 꺼내는 녀석의 말에 괜히 난 몸을 있는 힘껏 움츠렸다. 내 방까지 올라가는 그 짧은 찰나에 겪은 낯선 상황에 잠은 무슨, 오던 잠까지 다 달아날 듯했다. 




"감기 걸리면 또 얼마나 사람을 고생시킬려고."

"…야, 너."




겨우 발바닥이 땅에 닿았는데 녀석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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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옹성우, 너.


언제 이렇게 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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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SE 





"요맘때 딸기, 맞지?"

"아, 땡큐."




달달달. 오랜 시간 켜놓은 선풍기에서 낡은 쇳소리가 들려왔다. 베란다 문 앞에서 한가롭게 놀고 있자니 내일이 월요일인 게 더 싫어졌다. 여름의 초입이 언제였냐는 듯이 장마철이 한동안 오가더니 이젠 매미떼가 윙윙 울어댔다. 한여름이라고 학교들은 방학을 하고 동네 슈퍼들도 잠깐씩 휴가를 가는데 도대체 난 언제쯤 내 앞으로 놓인 연차를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초부터 휴가 쓰겠다고 말할 걸 그랬다. 이러다 그냥 이렇게 또 한 해가 가는 건 정말 싫은데. 




"넌 방학도 하고 좋겠다."

"어차피 보충 나가야 되서 누나랑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는데 뭘."

"그래도 그 때가 좋은 거야, 임마."




고작 여섯살 차이에 꼰대 같은 말이 나왔다. 옹성우는 방학이 시작 되었고 그 전부터 난 근 한 달을 옹성우와 주말을 함께 보내고 있다. 내가 황규민 때문에 운 걸 들켜버린 게 문제라면 문제였고 그 따위 개새끼를 만날 바엔 가끔은 혼자 있는 게 낫다고 하는 옹성우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도 한 몫을 더했다. 주말에 누구랑 노냐는 말로 꼬셔도 보았지만 자기랑 놀면 된다는 말도 안되는 지론을 펼쳐대는 녀석 때문에 집 밖에 나가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학생일 때는 그래도 학교 다니면서 노래방이든, 카페든 많이 놀려다닌 것 같은데. 늙으면 쓸 체력도 없어지는 건가. 수능만 아니면 나도 열아홉으로 돌아가고 싶다. 6년의 차이라는 게 몸소 와닿는 기분에 그대로 방바닥에 들어눕자 옹성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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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누나가 열아홉 하고 내가 스물 다섯할까?"

"너 막상 내 나이되면 싫다고 도망갈 걸?"

"아닌데. 난 차라리 내가 누나였으면 좋겠는데."

"뭐가 좋아서?"




입에 물고 있는 아이스크림 때문에 내 물음이 뭉개졌다. 내가 옹성우라면 죽어도 젊은 게 최고라고 생각할텐데. 하긴 그 때는 다 어른이 되고 싶어하더라.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다 밀어 넣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문득 녀석의 등만 보이는 게, 그것도 하얀색 티셔츠를 입은 등이 괜스레 더 어려보여서 어깨나 좀 토닥여줄까 하고 누운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연하보다는 연상이 좀 더 승산이 있는 것 같아서."




그대로 몸을 돌린 옹성우의 그림자가 내 얼굴 위로 드리웠다. 하얀색 티셔츠에 검은색 머리. 하얀 얼굴에 검은색 눈동자. 온통 흑백논리로 생겼으면서 또 그게 못내 잘생긴 놈이었다. 하루만 내가 옹성우가 되기를 어렸을 때는 얼마나 바라고 바랐던가. 저 얼굴이면 내가 이 동네 여자란 여자는 다 꼬시고 다녔을 거라고. 하다 못해 연예인이라도 되어서 이 얼굴로 세상 천하를 다 누렸보겠노라고 그리 다짐했던 얼굴이 바로 일어서면 닿을 거리에 놓여 있었다. 전까지만 해도 녀석이 입고 있는 하얀색 티셔츠가 풋풋해 보인다고 한 건 죄다 취소해야겠다. 슬쩍 보이는 쇄골과 그보다 좀 더 위에 있는 목덜미 뒤로 아직 마르지 못한 땀방울이 야했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쓰레기다. 애한테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어, 응?"

"하여간에 눈치는 더럽게도 없어요."




녀석이 하는 말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못했다. 하기야 그런 얼굴로. 그런 모습으로 훅 하고 다가오는데 정신이 온전한 여자가 세상에 어디있겠냐만. 이미 다 먹어서 쓸모도 없는 아이스크림 막대만 앞니로 질겅질겅 씹다가.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꼼짝도 못한 채 누워 있는 내 얼굴에 별안간 차가운 손이 닿았다. 머리라도 묶고 있어. 많이 더운 것 같은데. 앞머리를 한 쪽으로 쓸어주는 손이 차가운데 더웠고. 내 얼굴은 더운데 차가웠다. 온통 이질적인 것들 투성이다. 웃을 때마다 그늘지는 옹성우의 눈에, 말려 올라가는 게 썩 예쁜 그 입꼬리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내가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다.




"덥다. 에어컨 틀테니까 얼른 들어와."




먼저 자리를 뜨는 옹성우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안 그랬으면 난 아마 해가 다 질때까지 녀석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뭣하면 침까지 흘러가며 감탄을 금치 못했을지도. 20년 넘게 녀석을 봐왔는데 요즘따라 왜 이러는지. 고작 한 달 됐다고 내가 연애를 하고 싶어서 미친건지. 아니면,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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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해? 안 들어와?"

"어, 어. 지금 가!"




와, 나 진짜 돌았다. 석고대죄라도 해야하는 판인가. 괜히 싸대기를 때려보기도 하고 두 눈을 힘껏 문질러도 보았지만 스스로 던진 질문에 자연스레 나온 답에 기함이 찼다. 아직도 베란다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 날 보고 있는 옹성우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기가 어려웠지만. 그 눈빛에 등 뒤에서 땀이 나는 듯했고 녀석이 날 부르는 내 이름 석자에 귓가가 빨개지는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




"에어컨 바람 나가니까 얼른 문이나 닫고 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고 뭐고. 진짜 들어가기 싫다. 성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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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t-Forwarding ▶▶





"퇴사할까."




다 구워진 삼겹살을 입 안에 우겨넣다가 손이 멎었다. 매번 퇴사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오늘은 왠지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내 고민에 윤지성은 말없이 술잔에 소주만 가득히 따라주었다. 우리는 한낱 월급쟁이라는 걸 잊지마라. 친구야. 나를 순살 덩어리로 만들기에 충분할 팩트를 던져대면서. 그리고 너 성우도 먹여살려야 한다매. 윤지성의 입에서 나온 옹성우라는 이름에 반쯤 꼬꾸라져 있던 몸이 올곧게 섰다. 맞다. 우리 성우!




"우리 새끼. 요즘 내가 잘못한 게 많아서 족발도 더 많이 사줘야 하는데."




치킨, 피자, 햄버거. 남들은 다 그런 거 먹으러 다닐 때 곧 죽어도 족발에 막국수를 먹는 신기한 옹성우. 그 식성 때문에 난 그렇게나 좋아하던 족발을 포기했지만 그래도 녀석이 먹는 것만 봐도 행복했으니까 뭐.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르자마자 원샷을 때린 윤지성은 넌지시 물었을 뿐이다. 우리는 이미 직장에 치여서 삶이 권태로운 인간들이었고. 그깟 돈 하나 때문에 내가 한 프로젝트를 눈 뜨고 코 베이게 남의 이름으로 날려먹어도 웃어야 하는 병신들이었다. 그러니 남의 인생에 별로 관심이 있어서 물어본 말은 아닐텐데 난 괜히 쫄아버린 기분이었다.




"아니, 그게…"

"어! 성우야, 여기!"




윤지성에게 말이라도 꺼내보려 했던 내 입술이 굳게 다물었다. 저 멀리서 검은색 남방을 걸친 옹성우가 보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녀석은 바로 윤지성과 친숙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언제봐도 참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안녕하세요."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은 옹성우를 알았다. 내 대학교 동기. 입사 동기. 가끔씩 나가는 영화 동호회 사람들까지. 그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았지만 하나 다른 건. 예전에는 울보 때쟁이로 이름을 떨쳤다면 지금은 인물 훤하고 잘난 동생으로 알려졌다. 옹성우는 내가 있는 모든 공간에다 자신의 영역을 표시했다. 산책 나가는 똥강아지가 길가에 가다가 제 흔적을 남기는 것마냥 녀석은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 내 친구들. 내가 만난 남자들. 그럴만도 한 것이 어디를 가든 옹성우가 날 마중나왔다. 어떤 일, 어떤 곳에서도 걔는 날 챙기는 게 습관이었다. 지금처럼 술에 취한 날이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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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이제 그만 가자. 볼 엄청 빨개."




아니나 다를까. 옹성우는 윤지성한테 깍듯하게 인사를 한 다음 바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술에 취하면 무작정 바닥만 보는 내 버릇 때문에 시선을 맞추며 날 어르고 다르는 데에 도가 튼 녀석만의 방식이었다. 




"나 오늘은 진짜 얼마 안 마셨어. 아직 취하지도 않았단 말야."

"알았으니까 업혀."

"넌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지. 코딱지만한 놈이."




진짜 맹세컨데 오늘은 소주 한 병도 다 까지 않았다. 지랄 맞은 ㅇㅇㅇ의 인생에 고작 소주 네 잔 기운 거면 매우 적은 편에 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성우는 바로 내 앞에 자신의 등을 내밀었다. 가는 길에 요맘때 사줄게. 예전 나와 헤어지기 싫어하던 옹성우에게 자주 써먹던 먹는 걸로 꼬시는 스킬까지 써가면서. 다섯개 사먹을 거야. 내가 제 등에 몸을 살짝 굽히자 바로 일어선 옹성우는 윤지성이 건네준 내 핸드백과 외투를 챙겨서 제 팔에 끼워넣었다.




"월요일에는 숙취 다 해결해서 와라. 성우도 잘 가고."




당연하게 우리 몫의 음식들을 계산하려 일어선 윤지성은 정말 좋은 친구다. 아직 사직서를 내던지지 못한 회사만 빼면 먹을 것을 사주는 친구도 있고 술에 취했다고 날 데리러 와주는 동생도 있는데. 왠지 모르게 자꾸만 울적해졌다. 그냥 윤지성이랑 더 마신다고 그럴 걸 그랬나. 요근래 계속 소화가 안되는 것 같았다. 딱히 뭘 많이 먹은 적도 없었거늘 뭐가 얹혀서 내려가지 않는 기분. 사실 오늘 술을 마시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 중 팔할이 옹성우 때문이라는 게 문제였다. 회사에서 이리저리 축구공마냥 굴러다니느라 딴 생각할 시간도 없었는데도 옹성우가 떠올랐다. 자세하게는 베란다에서 옹성우와 얘기를 한 이후부터. 그게 진짜 어이가 없는 일인걸 알았음에도 좀처럼 쉬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뭐가 또 그렇게 힘들어서 그래."

"응?"

"누나 맨날 술 마시러 가는 날은 기분 안 좋은 날이잖아."




나를 안은 손에 힘을 준 옹성우의 뒷통수가 동그랗다. 까만색 뒷통수. 여적 염색 한 번 하지 않아서 반질반질한 검은색 머리카락. 그냥. 항상 똑같지 뭐. 차마 너 때문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옹성우가 가장 큰 문젠데 그 당사자가 날 걱정하고 있으니. 




"황규민 때문에 그래?"

"뭐?"

"내가 보기엔 그렇게 좋은 사람도 아닌 것 같았는데 그렇게 그 형이 좋아?"




이건 또 뭔 소리야. 지금 여기서 황규민이 왜 나와? 옹성우가 지금 그 놈의 이름을 부르지만 않았다면 황규민의 얼굴마저 새까맣게 잊고 있을 뻔했다. 그런데 그런 놈 때문에 내가 술을 마셨다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나. 아니야. 잔뜩 힘을 주느라 턱이 다 뻐근해질 정도로 부정의 말을 힘있게 꺼냈다. 녀석이 그런 내 뜻을 알고 있는진 모르지만.




"내가 연애 하지 말라고 한 건, 그냥. 그냥 누나가 힘들어 하니까 그런거야."

"……."




얘 전혀 못 알아듣고 있잖아. 울컥함을 넘어서 포효하고 싶은 감정이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심지어 별 같지도 않은 놈 때문에 옹성우가 말을 하는 내내 목소리에 힘이 없어지는 게 더 맘에 안 들었다. 미안해. 내가 먹고 싶다던 아이스크림을 사러 들린 편의점 앞에서 멈춰선 옹성우는 이젠 하다하다 사과까지 해댔다. 그래. 이건 내가 잘못 한 게 아니다. 지 때문에 고민하는 건 모르고 되도 않는 황규민을 들먹이는 옹성우가 잘못했고. 내 인생에서 오점 하나 남겼으면 되지 여태 퇴장조차 안하고 옹성우를 시무룩하게 만든 황규민 새끼가 더 잘못이었다. 




"아니. 야! 나 내려봐."

"응?"

"내가 할 말이 있으니까 좀 내려놓으라고."




내 말에 썩 놀란 표정을 지은 옹성우는 큰 눈을 뜨고선 멀건히 날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얼굴을 보니까 혓바닥 밑으로 꾸깃꾸깃 넣어둔 말이 술술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고해성사라도 하듯이 내 모든 죄를 다 고백하고 싶을 정도로 말간 얼굴이 나를 흔들었다. 그리고 옹성우의 입에서 황규민이라는 단어가 한 번 더 나오자.




"내가 걔 때문에 왜 이 고생을 해? 미쳤냐? 하루 종일 회사일로도 바쁜데 사람 머릿속에서 둥실둥실 떠다는 게 누군데!"

"……."

"…내, 내가 너 때문에 일을 못한단 말야. 내 동생처럼 키운 너한테 이상한 감정을 품는 것 같고. 진짜 이런 걸로 고민하는 내가 너무 너무 싫은데. 너한테 너무 미안한데."




술에 취한 게 맞다. 아무래도 난 취한 게 분명했다. 말을 꺼낸 사람도 나인데 말을 하다가 추접하게 우는 사람도 나였다. 닭똥 같은 눈물에 콧물까지 합세해서 이젠 말도 못하게 되었다. 옹성우가 나를 보는 눈빛을 잘 알았다. 누구보다 나를 좋아하고 다정하게 아껴주는 눈빛. 오로지 내게만 그 다정함이 유효하다는 것도. 여섯살 차이가 무색하리만치 내 옆에서 날 지켜준다는 그 말들도. 그런 순수하고 착한 아이를 갖다가 난 밤새 옹성우를 껴안고 부비적대는 꿈만 꿔대니 이 부정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황규민 때문에 원치 않게 나온 내 말로 인해서 가뜩이나 조용한 밤 거리가 더 조용해진 듯했다.




"진짜야?"

"아니."

"아닌데 왜 울어."

"그냥 술 취하면 울어."




애써 외면한 사실이 바로 앞에 다가왔다. 옹성우는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서 여전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말도 안되는 말들로 고개를 돌려가면서 대꾸를 해보았지만 두 손으로 내 볼을 꾹 붙잡는 녀석 때문에 이제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건 두 눈동자밖에 남질 않았다. 내가 누나 술 취할 때마다 데리러 갔는데 난 우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거짓말 하면 안되는 거야."

"야."




쪽. 내가 어떤 말도 하기 전에 내 볼에 입술이 닿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때문에 그나마 요리조리 피하던 눈동자마저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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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좋아해?"

"아니."

"나 안 좋아해?"

"……."

"황규민이 나보다 더 좋아?"

"야이씨."




옹성우는 나를 잘 안다. 내가 저를 아는 것보다 더 나를 안다. 꾹 입술을 다물고선 부정만 해대는 내 말이 더이상 이어지질 않았다. 이럴 때만 맨날 울 것 같은 얼굴을 해가지고. 사람 짜증나게. 그대로 옹성우의 얼굴을 똑같이 붙잡고선 발 끝을 올려 입술을 부딪혔다. 이게 어떤 일이고 이후에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는 전혀 가늠도 못한 채 그저 내가 움직이는 대로 가볍게 입술을 열고 날 감싸는 촉감에 두 눈을 감아버렸다. 옹성우의 숨결이 입술을 살짝씩 벌릴 때마다 깊게 파고 들었다.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꽉 붙잡는 손의 힘이 점점 거세졌다. 처음은 내가 먼저 시작했는데 날 잡아 먹어버릴 것처럼 쉴 틈 하나 안주고 다가오는 건 옹성우였다.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잠, 잠깐만."




백기를 드는 건 내 쪽이었다. 가뜩이나 술에 달아오른 열이 전에 걸린 감기를 더 달고 온 모양이다. 거기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 옹성우가 마지막을 활활 장식해버렸으니. 난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부여잡고선 옹성우를 밀어냈다. 하지말라고 안되는 거라고. 너는 아직 수능도 치지 않은 고삐리고, 미자에, 옆집 아줌마가 날 믿고 내어준 소중한 아들내미라고. 안되는 이유를 대면 더 댈 수 있었는데. 고작 해봐야 옹성우가 울 것 같았다는 게, 계속 이상한 오해를 하는 게 싫다는 것만으로 선을 넘었다. 그리고 그게 못내 비양심적이인건지 내 몸은 주인의 못난 양심을 잊을 수 있게 퓨즈를 끊어버린 듯했다. 




"누나!"




정말 웃기게도 날 붙잡고 있는 옹성우의 어깨를 향해서 고꾸라진 채 기억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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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 ●






아침은 원래부터도 싫어했지만 왠지 오늘은 더 싫어질 것 같았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선 일어난 곳은 내 집, 내 방이었다. 너무나도 안전하게 누워있는 걸 보면 밤새 옹성우가 고생을 좀 했겠다 싶었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열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기라도 했으면 바로 집 밖을 나가버리는 방법을 썼을텐데 빌어먹게도 이미 거실에서는 녀석이 일으키는 소음으로 시끄러웠다. 빨래를 하는 듯하다가 밥솥을 여는 소리가 들렸고 이제 옹성우의 발걸음은 내 방문으로 오고 있었다. 




"일어나."

"……."

"일어난 거 다 아니까 일어나."




가까스로 머리 끝까지 덮은 이불을 순식간에 걷혔다.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다. 밤새 퉁퉁 부어버린 내 얼굴도 그렇고 어제 내가 곯아 떨어지기 전까지의 기억이 선명한데 그걸 어떻게 넘어가야 할 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미완성인 상태로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보다 지금 옹성우를 마주보는 게 더 죽을 것 같았다. 




"자, 잘 잤어?"

"아니."

"아, 그렇구나."

"누나 같으면 잠이 잘 오겠어?"




옹성우의 말에 아니라며 동조를 표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난 내가 분리수거도 안되는 쓰레기라는 걸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수능 백일도 안 남은 얘한테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제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고, 충동적으로 그런 몹쓸 짓을 저질렀어도 안되는 거였다. 내가 성격이라도 화끈한 여자였다면 크게 웃으면서 그까짓 일이라고 넘기겠지만 이 못난 난 그런 것도 못했다. 이십 평생을 피하고 돌아서는 방법만 알았던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뜨거운 시선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옹성우를 무작정 무시하는 거였다. 그리고.




"어제 무슨 일 있, 있었나?"

"뭐?"

"아니. 어제 내가 좀 많이 취했나봐 너가 나 데리러 온 것 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잘…."




기억이 안 나는 척 뒤덮는 게 전부이다. 진짜 내가 생각해도 너무 치졸한 방법이다. 여섯살이나 더 쳐먹었으면 뭐해. 누나는 커녕 옹성우보다 한참 모자란 사람인데. 스스로 아닌 척을 하면서도 자꾸 마음이 걸려서 내 모든 시선은 갑자기 합장하듯이 모아버린 내 두 손에 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입고 있는 하얀색 티셔츠는 옹성우가 아끼는 옷 중에 하나였다. 여름에는 반팔, 겨울에는 긴 팔. 꽤 단순하게 입는 옹성우는 계절마다 제가 아끼는 옷들이 있었는데 그런 옷을 나한테 입혀주다니. 이 누나는 이런 못난 사람이거만 옹성우, 너는 참 착한 아이구나. 쓰벌. 진짜 너무 미안해지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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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안 난다고?"




잠깐 올려다 본 옹성우의 표정이 영 좋질 못했다. 살면서 이렇게나 낮은 옹성우의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분명 에어컨도 틀지 않아서 한증막이 따로 없는 내 방이 왜 이렇게 서늘하게 느껴질까. 성우야? 내가 녀석의 이름을 부르자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리며 날 보는 옹성우의 눈길은 먹잇감을 본 사자의 눈빛을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평소에 보기에 어려울 정도로 기분이 다운된 거라는 것도 다 알겠는데. 대뜸 내가 앉아 있는 침대에 앉더니 진짜 잡아먹을 것처럼 다가올 필요는 없는 거잖아. 야.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하다가도 내 몸은 점점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어제 누나가 나한테 고백도 했는데."

"……."

"고백하다가 우는 것도 누나가 했고 키스도 먼저 했는데."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봤자 난 침대에 있고 옹성우 때문에 더블 사이즈로 바꾸긴 했어도 녀석을 피하기에는 한없이 작았던지라 결국엔 더이상 피할 곳도 없었다. 항상 옹성우가 누워 자던 왼쪽 끄트머리까지 물러서자 나는 있는대로 얘를 말리기 위해서 갖은 애를 썼다. 우리 아침부터 먹자. 갑자기 숙취 때문에 속이 안 좋다. 여러 변명을 대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도 없었다. 큰 베게 하나만을 두고 있는 우리 사이는 갑작스럽게 내 손목을 제 쪽으로 당기는 옹성우 덕에 무너져버렸다.




"키스하다가 좋다고 쓰러진 사람도 누나였으면서."

"야, 내가 언제! 네가 갑자기 막 들이대니까 그런…."

"기억 잘 하네."




망했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진짜. 다 들켜버린 거짓말이 뭐가 그리 좋다고 옹성우는 웃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창피함에 이미 뒷목까지 후끈거리는 내가 꼴보기 싫었다. 옹성우를 보고 싶지 않은데 저 놈은 제 잘생긴 얼굴을 물려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이불을 힘껏 끌어당겨서 내 얼굴이라도 가려볼까 했지만. 




"예쁜 얼굴을 왜 자꾸 가릴려고 그래."




저런식으로 낯간지러운 멘트를 날리면서 내 손을 저지하는 옹성우 때문에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너 짜증나. 이미 내 얼굴은 더이상 온전한 부분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온갖 곳이 뜨겁고 부끄러웠다. 첫 사랑을 했을 때도 이런 기분이 아니었는데 열아홉한테 실오라기 하나 없이 다 까발려진 상태는 정말이지 비할데가 없었다. 그리고 내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걸어오는 옹성우 덕에 녀석의 도드라진 뼈마디가 고스란히 느껴질 때면. 다른 것보다 준비도 없이 꺼낸 내 고백에 대한 옹성우의 대답이 제일 무서웠다. 스물 다섯이면 어른이라고 했던 엄마의 말은 순 거짓투성이다. 먼저 미안하다고 말을 꺼내야 하는데 또 추하게 눈물이 눈 사이를 비집고 나오려고 했다.




"나 누나 좋아해."




내가 먼저 누나 좋아했어. 내가 좋아해. 손 위로 닿은 옹성우의 입술이 부드러웠다. 내 손바닥에 짧게 입을 맞춘 옹성우는 좋아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뇌까렸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고백에 익숙해지라는 뜻인지, 뭔지. 무슨 주입식 교육을 시키는 것마냥 수도 없이 반복했음에도 좋아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여러 표정으로 나눠지는 녀석의 얼굴 때문에 익숙해지는 커녕 매 순간이 설렜다. 




"그렇게 막 좋아한다고 그러는 게 어디…있어."

"좋아하는데 좋아한다고 하지도 못하는 게 바보지."

"너 내가 바보 같다고 돌려까는 거지."




옹성우를 향해서 눈을 흘기면 그 이후에 아니라고 하든, 맞다며 날 놀릴 줄 알았는데. 내 등을 감싸는 손과 그와 동시에 옹성우가 다가왔다. 코 끝이 닿고 입술선이 닿고 틈새를 메꾸듯 내 안을 헤집는 녀석의 행동이 무척이나 저돌적이었다. 어젯밤처럼 내게 다가오는 데에 서슴이 없는 옹성우 때문에 내 몸은 이미 침대에 눕혀진지 오래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몰고 가는 게 어디있냐. 잠깐동안 입술이 떨어지면서 내가 투덜거리자 옹성우는 좀처럼 봐주지 않을 기새로 맞부딪힌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대꾸를 했다. 안 그러면 계속 피할거잖아. 




"사람 애간장은 다 녹여놓고선. 무책임하게."




옹성우는 제 팔로 날 훤히 가둬두고선 그런 반박할 수 없는 말만 해댔다. 아니. 내가 언제 그랬는데. 내가 잘못 한 거라고 어제가 다였던 것 같거늘 얘는 한 번씩 입을 맞출 때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잘못했다고 말했다. 거기에 뭐라 하고 싶어도 지 말만 하고선 또 키스를 하는 통에 난 아주 옹성우 품 안에 든 물고기라도 된 기분이었다. 부러 입술 안쪽의 여린 살점부터 깊게 파고든 녀석은 몇 번째인지도 모를 키스를 했고. 그에 맞춰서 견고하게 쌓아둔 내 벽이 우스울정도로 쉽게 부수어졌다. 




마치 날 배려하듯이 느릿하게 옹성우는 내 입술을 물다가 좀 늦게 떨어졌다. 잔뜩 숨을 몰아쉬며 옹성우의 어깨를 부여잡고 있으니. 그제서야 거칠게 몰아붙혀진 바람에 가슴 바로 아래까지 아슬아슬하게 올라가 있는 티셔츠가 보였다. 그나마 옹성우 꺼라서 좀 큰 게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뜬금없이 맨살을 다 까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자세로. 옹성우의 시선이 진득하니 묻어났다. 




"…야!"




난 내가 옹성우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틀렸다. 이 놈은 아주 요물이다. 급하게 옷을 추스리는 내 손보다 더 빨리 옹성우의 입술이 다가왔다. 배꼽 부근에 잘게 입을 맞춘 놈은 자신이 꽤나 참고 있다는 걸 내게 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근데 정작 이런 자극에는 나도 면역력이 없었다. 더 빨개질 데가 없다고 생각한 게 바보 같았다. 점점 엉망이 되어가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저 녀석은 미쳤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이럴 순 없어. 두 손으로도 부족해서 내 머리 맡에 있는 베개로 얼굴을 파묻자 또 그 틈을 비집고 볼에, 입술에, 콧등에 입술이 다가왔다. 나쁜 놈. 네가 이렇게 다가오면 나는 어떡하라고.




"너, 너. 스무살 넘을 때까지 이런 짓 하기만 해."

"그럼 스물 넘으면 해도 돼?"




나 이제 네 달 밖에 안 남았는데. 생글하니 웃는 옹성우가 왜 저리도 얄미워 보일까. 여태 내가 키우다시피 한 놈인데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힘들게 키워봤자 뭐해. 내 머리 위에 올라간 것도 모자라 거기에 피크닉까지 즐기시는 놈인데. 그럼 우리 사귀는 건. 그것도 스물 될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거야? 옹성우의 목소리가 내 목 근처에서 낮게 울렸다.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와, 진짜 너무하다."




옹성우가 어릴 때는 제 뜻대로 되는 게 없으면 우는 놈이긴 했어도 몸집이 크고 나서부터는 떼라는 걸 부려본 적이 없었다. 한동안 어릴 때의 그 귀여움 가득한 어리광을 보지 못해서 아쉬워 했었는데 그걸 지금 여기서 볼 줄이야. 내 어깨와 쇄골 부근에 얼굴을 부비적 거리며 날 올려다 보는 얼굴에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다. 꼭 이럴 때 귀여운 표정을 지을 건 또 뭐야. 그런 표정 지어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야. 옹성우. 




"그리고 네 말대로 네 달 밖에 안 남았다매. 잘 참아봐."




우리 새끼가 스무살이 된다니 얼마나 역사적인 순간이야.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한 옹성우가 귀여웠다. 언제부터인가 항상 내가 옹성우의 손에서 놀아나는 것 같았는데 꽤 오랜만에 내 쪽으로 온 주도권이었다. 녀석의 뒷통수를 꾹꾹 누르면서 쓰다듬자 옹성우는 내 손을 채가듯 잡았다. 그러고선 손바닥에 제 볼을 비비고 살짝 틀어서 입술을 맞추고. 여러번 손바닥에 지장을 찍듯 제 입술을 찍어댄 놈은 동그란 눈을 치켜뜨고선 날 향해 웃어보였다. 순수한 얼굴로 매우 음흉한 뜻을 품은 것처럼.




"누나는 12월 31일에 약속이나 잡지마."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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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키우던 애가 스물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인데 같이 있어줘야지. 안그래?"




주도권은 개뿔. 나 아무래도 실수 한 거 같은데. 




"아, 스무살 엄청 기대된다."




주워담기에는 이미 글러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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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IND ◀◀





성우가 조금 컸을 때였다. 자신이 버릇처럼 <엄마>라고 불러대던 사람은 그 말이 어울리지 않게 작은 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라는 말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단어인지 그제야 알게 된 성우는 곧바로 누나라는 말로 그녀를 지칭했고. 그 때보다 좀 더 컸을 때에는 그녀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는 짓을 그만두었었다. 자신의 세계는 오로지 저 작은 여자애 한 명이 전부였지만 그녀한테는 자신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게 이유였다.




'너 이제 누나 싫어졌어?'




제 딴에는 그녀의 사적인 공간을 지켜주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녀는 그게 서운해서 울었다. 누나가 더 잘해줄게. 미안해. 자신의 머리를 묶고 있던 왕구슬 모양의 머리 끈을 풀어서 성우의 손에 쥐어준 그녀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걸 너에게 줄테니 다시는 자신을 싫어하지 말라고 그랬다. 그러니까 그 왕구슬 모양의 머리끈은 뇌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매일 양갈래로 머리를 땋아서 길게 묶고 다닌 ㅇㅇ는 성우에게는 첫 정이 붙은 아이었고 첫 사랑이었다. 처음엔 그녀만 보고 살아서 그 익숙함이 착각을 주는 건 아닌가 했지만 성우가 사춘기의 나이에 들어서고 꽤 많은 여자애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그녀에 대한 제 마음이 착각이 아니라는 걸 또 한 번 깨달았다.




근데 그걸 알았을 땐 애석하게도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 성우가 열아홉이 되고 그녀가 벌써 세 번째의 남자친구를 만났을 무렵 그는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나이차나 다른 것보다 더 자신과 ㅇㅇ의 관계를 신경 쓰던 성우는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녀가 준 왕구슬 머리끈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죽어도 ㅇㅇ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그의 다짐이기도 했다. 놔준다고 해도 다시금 저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그녀였지 않은가. 성우는 길다면 긴 기다림 속에서 조용히 ㅇㅇ의 빈틈을 노렸다. 인내는 쓰지만 그 후의 열매가 얼마나 달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성우였다. 




그래도 가끔은 그 기다림과 인내심이 바닥이 나는 날이 있었다. 비 오는 날, 황규민인지 뭔지 하는 놈이랑 헤어졌다며 울고 있는 그녀를 안았을 때. 그리고 자신의 품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를 볼 때면. 참을성이라는 것이 금세 밑바닥을 보였다. 조금만 잘못하면 좋아한다고 툭 고백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 모든 순간을 누나가 알까. 언제 좋아했는지 알기도 전부터 그녀를 좋아했다는 걸. 참고 또 참고 그렇게 참았는데 자신에게 좋아한다며 술주정을 부렸던 날에는 그녀를 얼마나 안고 싶었는지.




'너, 너 스무살 되기 전까지 이런 짓 하기만 해.'




붉게 물든 볼을 가까스로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꺼낸 경고는 별 효과가 없었다. 경고라는 게 무색하리만치 귀여웠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태어났지. 참아볼라고 하면 참지 못하게 하는데에 그녀는 일가견이 있었다. 저보다 나이는 더 먹었다고 나름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성우의 손이 닿았다 하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볼이나,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눈동자, 말을 할 때마다 작게 오므러지는 입술. 이젠 그녀의 작은 행동마저도 성우를 자극했다.




'아, 스무살 엄청 기대된다.'

'야, 야. 옹성우!'




방을 나서는 자신을 쫓아오기 위해 뭐가 그리 급한지 소란스러운 ㅇㅇ의 방을 한 번 쳐다본 성우는 자꾸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또다시 참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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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에 사람이 저렇게 귀여워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나 몰라.








*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로 다가온 2020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티비에서 새해를 알리는 제야의 종이 울렸다. 딱 12시를 넘어가는 시침과 밖에서 들리는 폭죽소리. 새해라는 건 나이를 먹어가는 것 외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그렇게 여겼는데 올해는 달랐다. 왜냐하면 나를 쳐다보는 옹성우의 눈빛 때문에 한겨울에도 한여름인 것처럼 땀이 날 것만 같았으니까. 정확히는 오후 11시부터 늦게 온 족발을 받았을 때부터 옹성우의 시선이 아주 집요하게도 날 쫓아다녔다. 내가 마실 맥주를 꺼내면 이제 몇 분 몇 초 뒤에 자신도 '스물'이 되니 제 것도 준비해 달라는 둥. '스물'이 되면 어떤 기분일지. 대학교 결과가 나오면 자신도 '스물'이니 바로 알바를 시작하겠다느니. 그 놈의 <스물>이라는 단어를 수식어처럼 달고 살았다.




"스무살이 된 거 축하해."

"응."

"이제부터 같이 술 마실 수 있겠네?"

"그렇겠네."

"…어, 그리고 또. 내가 노트북 사줄까?"




아까 전에는 스무살이다 뭐다, 술을 마시겠다 난리 법석을 떨더니 12시가 넘어가자 녀석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분명 대화를 하고 있는데 옹성우는 계속해서 내 입술만 보고 있었다. 저 시선이라도 좀 거둬주던가 하지. 부담스러운 기분에 낯간지러운 기분, 부끄러운 기분까지 온갖 것이 다 뭉쳐서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는 게 이토록 힘든 건지 처음 알았다. 




"누나 나랑 할 거 많잖아."

"…어?"

"나 스무살 되면 누나랑 사귈 수 있다며."




나 갖고 싶은 거 다 준다고 했잖아. 나란히 앉은 소파가 한 쪽으로 천천히 기울어 갔다. 쟤는 왜 맨날 말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나를 가둘려고 하는 걸까. 진짜 어디로 피할 수도 없게 매번 똑같은 데자뷰 속에서 이번에는 소파에 갇혔다. 노, 노트북 사줄게. 싫어. 게임기 사줄까? 나 게임 안하는데. 내가 하는 말에 다 고개를 내젓던 옹성우는 그대로 손을 뻗어서 내 네번째 손가락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다른 건 다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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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나랑 사귀자."




사귀자는 고백을 이런 자세로 받기는 생전 처음이다. 그것도 완전 다이렉트로. 단백한 어투로 사귀자는 말을 꺼낸 옹성우는 가만히 내 대답을 기다렸다. 티비에서는 아직도 소란스럽게 연말 시상식이 이어져가고 밖에는 새해를 축하하느라 신나하는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한데. 우리 주변만 다시금 적막해지는 것 같았다. 무언가에 씌인 것처럼 녀석에게 밀려서 소파의 팔걸이에 기댄 내 고개가 자연스럽게 끄덕였다. 옹성우네 아주머니나 우리 엄마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할 지, 앞으로 우리가 과연 괜찮을 지. 물어도 나오지 않을 고민들이 옹성우의 고백에 대답을 꺼내면서 머릿속을 배회했다.




그리고 아까 전부터 내게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은 옹성우는 내가 하는 고민들을 다 아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떴다. 녀석의 까만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까만색으로 빛났다. 낮은 채도로 비추는 전등에 반사된 눈동자가 예뻤다. 얘는 진짜 안 예쁜데가 하나도 없네. 생각해 보면 옹성우가 성인이 된 지는 몇 분도 되질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서 앳된 소년의 얼굴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옹성우가 날 보는 것처럼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옹성우를 바라보았다. 이젠 익숙한 숨결이 쇄골에 닿았다. 그 숨결은 내 턱 끝에도 닿았다가 아랫입술에서 맴돌았다. 괜히 놀리고 싶은 마음에 입술을 다문 채 힘을 주었다. 바로 나를 보는 옹성우의 미간에 짧게 주름이 지어졌다.




"나랑 해보자는 거지?"




아니 그건 아닌데. 그건 진짜 아니었는데.




"나, 나.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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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아직 시작도 안했어."




결국 또 옹성우의 덫에 걸렸다. 벗어나는 방법 따윈 없었다. 무표정으로,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내 입술 안을 파고드는 움직임이, 아무래도 또 옹성우의 버튼을 잘못 눌러버린 내 죄인 듯했다. 더위의 잔재가 가득했던 여름의 끝무렵 8월 말에도 지금처럼 내게 이렇게 다가온 옹성우는. 더이상 여름이 아닌 겨울의 문턱에서 다시금 나를 끌어당겼다. 분명 내가 키웠던, 어릴 적의 옹성우는 이런 모습이 아닌 것 같은데. 나를 안아서 제 무릎 위에 앉힌 옹성우의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감쌌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날 갖고 노는 듯한 몸짓에 난 그대로 옹성우의 목에 팔을 둘렀다. 뜨거운 숨이 여러번 오가는 틈새로 옹성우가 중얼거렸다.




"방으로 들어가자."




옹성우가 고개를 틀었다. 다시 입술이 포개졌다. 나를 안은 채 방문을 연 옹성우는 침대에 내 몸이 다 눕혀지기도 전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흘렸다. 내 귓가와 목덜미를 만지는 손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어릴 때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던 그 순진한 아이가 이렇게 자랄 줄 누가 알았으랴. 얼굴이 화끈거렸다. 갓난 애기의 옹성우와 스물의 옹성우의 변화는 혼란스러웠지만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이미 옹성우에게 갇혀버린지 오래였다.

















Play The Button

FIN





#성우야_생일_축하해









+)사담, 너무 오랜만이에요.


진짜 너무 오랜만에 글잡을 찾아온 것 같아요. 이제 8월을 다 지나가는데 그동안 우리 독자님들이 건강히 잘 계셨는지가 제일 궁금했어요. 잘 지내셨나요?


사실 저도 이렇게나 독자님들을 오랜 시간동안 못 만날 줄은 몰랐어요. 너무 죄송합니다.


우선적으로 제가 인티에서 강퇴를 당했고 아이디 복구를 생각하기도 전에 실수로 임시저장함에 있던 모든 글들을 다 복사하지도 못한 채로 아이디를 삭제시켜버렸어요. 그래서 틈이 나는 대로 바로 인티에 다시 가입을 하고 독자님을 찾아뵈려고 기억에 있는 걸 되짚어서 다시 뼈대를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도 아니고 진짜 업친데 덥친격으로 손목 터널증후군과 손목 관절염이 동시에 찾아왔더라구요.


원래부터 글을 쓰는 직업을 해왔고 지금 다니는 회사도 사무직이기 때문에 항상 습관처럼 손목이 자주 아프긴 했는데 요근래 정말 심각하게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약물과 주사, 물리치료를 동시에 병행했는데도 별로 진전이 없어서 수술까지 고려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짧은 글이라도 써보려고 타자를 조금만 치면 저릿저릿하고 기본적으로 손을 움직이거나 쓰는 것도 어려워져서 그나마 즐겁자고 쓰는 이 공간마저 포기를 해야했습니다 정말 너무 너무 죄송할 따름이에요.....


손목이 조금 더 나아지면 좋은 글과 함께 독자님들에게 근황을 전하고 싶었는데 더이상 기다리게 하는 것도 너무 죄송해서 이렇게 성우의 생일을 빌려서 뒤늦게 오게 되었네요. 


지금은 어느 정도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어서 성우의 글을 짧게 썼는데 마음에 드시나요?

솔직히 성우의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쓰고 싶었던 소재였던만큼 잘 쓰고 싶었는데 재미있게 읽혔으면 좋겠네요♥


이미 12시가 넘어서 성우의 생일 25일을 맞추지 못했지만 우리 성우 정말 정말 생일 축하하고,

저를 기다려주셨을 독자님들 너무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하루 빨리 손목이 나아져서 아직 보여드리지 못한 96즈 글과 성운이 글, 그리고 새로운 글들로 다시 찾아올게요.

이제 여름이 다가고 가을이 찾아왔는데 감기 걸리시지 않게 조심하고, 아프지 말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우리 또 만나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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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169.204
작가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댓글 먼저 쓰고 읽을게요 그냥 우울해서 들어왔는데 바로 작가님 글이라뇨!!! 전 회원도 아닌데 작가님 글 다 읽었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오늘 아니 이제 성우 생일 기념으로 올려주신건가요,,,ㅠㅠㅠㅠㅠ너무 감사합니당❤️
5년 전
Lighter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이렇게 좋아해주셔서 괜히 저도 뿌듯하고 기쁘고 그러네여🥰
우리 독자님도 항상 행복하기만을 바랄게요 좋은 월요일 보내세요❤️❤️

5년 전
독자1
와...작가님ㅠㅠㅠ오랜만이에요ㅠㅠ보고싶었어요ㅠㅠ 작가님 이름보자마자 들어왔어요ㅠㅠ 진짜 오늘 글도 너무 짱이에요...역시성우ㅠㅠㅠㅠ
5년 전
Lighter
저도 너무 오랜만이에요ㅜㅜㅜ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바로 제 글을 찾아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로 가득하시길 바랄게요💕

5년 전
독자2
작가님~진짜 오랜만이예요ㅜㅜㅠㅠㅠ요즘 작가님 글이 한 번씩 생각날때마다 읽곤 했었는데 어떻게 딱 이렇게 찾아오시다니ㅠㅜㅠㅠㅠㅠ너무 잘 읽었어요~ 역시 작가님 필력은 대단해요!!!!!
5년 전
Lighter
너무 오랜만에 찾아왔죠ㅠㅠㅠ지금은 짧은 글로 돌아왔지만 나중엔 좋은 글들로 가득하게 돌아올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하구 시간이 꽤 지났는데 저 하나 잊지 않아주셔서 정말 감사해요!!ㅠㅠㅠㅠㅠ
5년 전
비회원198.22
작가님!!! 정말 오랜만이네요ㅠㅠ아 정말 설레요,,, 작가님 글읽으면 힐링되는느낌입니다,,,ㅠㅠㅠㅠ자주 못오시더라두 가끔 이렇게 남겨주세요ㅠㅠㅠ 건강조심하시구요!!!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5년 전
Lighter
힐링 많이 받으셨나요~? 이렇게 오랜 시간 못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오랜만에 찾아와서 너무 죄송해요ㅠㅠㅠ틈틈히 손목이 나아지는대로 글 많이 써서 데리고 올게용 늦은 답글이지만 오늘 하루도 행복하기를 바라요!!!
5년 전
삭제한 댓글
(본인이 직접 삭제한 댓글입니다)
5년 전
Lighter
짧은 글이었지만 독자님께 재밌게 읽혀진다면 좋겠어요! 제 손목이 나아지는 대로 좋은 글들과 함께 돌아올게요 저도 울 독자님 많이 많이 사랑하구 항상 좋은 일들만 있기를 바랄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ㅎ
5년 전
독자4
우와 진짜 브금이랑 내용이랑 찰떡이에여
5년 전
Lighter
브금이랑 잘 어울려서 다행이네요ㅎㅎ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5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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