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사랑은 호수와 같아서
나재민x시준희
-그 날밤은 너를 잊기에도 애매하고, 너를 사랑하기에도 애매한 날이었다. 그래서 내 마음은 너와 같이 바라본 호수와도 같았다.
너를 바라본 호수는 내가 이제껏 보지 못한 모습으로 내게 손짓했지만, 나는 그 손짓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호수는 자꾸만 나를 자기 품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나는 그것이 싫었고. 너는 그런 나를 도와 호수 속으로 못 가게 나를 잡아댕겼다.
잡아댕긴 너의 손이 아파서 놓칠 거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러기엔 호수에 빠지기 싫었다.
그렇지만 잡아댕긴 너의 손은 점점 호수처럼 광범위해졌고, 끌어댕긴 너의 팔은 나를 호수 못지않을 만큼 싫게 만들었다.
결국 네가 준 사랑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호수와 같아졌다. 그래서 너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난 다시 나를 집어삼킬 호수에 빠졌다.
당신의 사랑은 호수와 같아서.
-2018.10.17. 날씨 흐림.
"준희야 내가 다 잘못했어.. 끅.. 나 이제 술 마시고 너한테 전화 안 할게. 근데.. 끅.. 나 재민 그 새끼랑은 붙어 다니지 마.. 내가.. 끅"
무슨 얘기를 지껄이나 싶어 계속 들어줬다. 어디 한번 내가 아닌 다른 여자랑 입을 맞춘 입으로 얼마나 잘 나불대는지 싶어서 들어줬다. 아무튼 헛소리가 분명했다.
들을 가치가 없다는 걸 인지하고 전화를 끊으려 하자, 과거 나를 죽을 만큼 사랑했다는 전 남자친구님께서는 내게 잘못했다며 사정사정했다. 아무래도 그때 나 몰래 키스하던 그 여자랑은 끝이 좋지 않았나 보다.
계속해서 죽을 만큼 사랑했다고 말하는 주둥이 때문에 진절머리가 났다. 나는 그리 죽을 만큼 사랑 아니 좋아는 했으려나 잘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간에 정말 나 대신 죽어줄 것도 아니면서 죽을 만큼 사랑했다는 말을 저리 쉽게 뱉을까.
계속해서 전 남자친구님의 전화를 받아주고 있으니 옆에 있던 나 재민도 성질머리가 좀 난 거 같았다. 내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자기가 뺏어 강제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내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전 남자친구님께서는
그리 쉽사리 술 주정이 가시지 않으셨는지, 다시 전화가 왔다. 나는 웃으면서 나재민 눈앞에다가 핸드폰을 보여줬고, 나재민은 고개를 젔더니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내 전 남자친구님께서 이번에는 분노하셨는지 무작정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게 남사친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둥, 네가 내게 키스 한 번이라도 허락해줬으면 이런 일 없었다는 둥, 왜 너는 비싸게만 구냐는 둥. 내가 들을 가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재민에게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내 눈에 비친 나재민은 화를 누르며 그 새끼가 하는 말을 하나하나 듣고 있었다.
"응, 네가 욕하는 그 나재민인데. 그렇게 키스를 하고 싶으면 나랑 할래? 우리 이미 진득하게 키스해서 내 입에서 준희 향기 나는데 어때?"
나재민의 말에 실소가 터졌다. 전 남자친구랑 나재민이랑 키스라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자세히는 못 들었지만 핸드폰 너머로 미친놈들이라는 소리는 정확히 들린 거 같았다.
나 재민은 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더니 내게 다시 핸드폰을 건넸다. 우리가 진득하게 키스한 사이인 건가, 나 재민이 뱉은 말을 그대로 따라 하자 나재민 귀가 빨개졌다. 아까 그 패기 넘치던 발언들을 뱉은 나재민은 어디 가고 내 앞에 남은 건 한 마리 순한 양 같은 나재민뿐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랑 나재민은 전화 오기전까지 했던 걸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분위기를 이어갔다. 나재민과 나는 눈을 감았다. 그래, 우리가 진득하게 키스하는 사이인 거는 맞지. 단순히 연인 관계만 아닐 뿐.
나재민은 내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난 단순히 키스하는 게 좋았다. 그냥 키스. 왜 다들 키스가 황홀하다니까, 나도 한번 해본 거다. 왜 내 전 남자친구님도 그렇게 키스를 갈망하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그렇게 내 인생의 첫 키스는 내 남자 사람 친구인 나재민에게 바치게 되었다.
-2018.10.29. 날씨 맑음
"야 시준희. 너 나재민이랑 사귀는 사이 아니라며. 이건 뭔데?"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오해 많이 받았다. 나랑 나재민 사귀는 사이 아니냐고. 그럼 나는 항상 아니라고 말해줬다. 우리는 진짜 사귀는 사이가 아니니깐 아니라고 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이번엔 나랑 나재민이 키스하는 사진을 어디서 찍었는지 가져와서는 다짜고짜 화부터 낸다.
나는 내게 묻고 있는, 그니까 나재민에게 관심 가지던 복학생 언니에게 이런 소리를 듣고 있는 중 이였다. 언제 자기랑 나재민 좀 이어 달라며 빌빌 거리더니 이번에는 자기가 위선자인 마냥 날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보게 큰 소리로 소리치고 있다. 이럴 때는 더 뻔뻔히 치고 나오라는 나재민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복학생 언니가 들고 있던 핸드폰 속 사진을 쳐다봤다. 언니의 눈은 내가 다음에 나올 당황할 행동을 기대하는 거 같았다. 나는 그런 거 싫어하는데, 어찌 골려줄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그냥 언니 핸드폰 속 사진 속 나랑 나재민 부분을 확대했다.
"꽤 잘 찍혔네요, 언니. 카톡으로 이 사진 좀 보내주세요. 나재민도 보여주게."
언니는 내 반응이 마음에 안 든 건지 눈썹을 찡그렸다. 때마침 아니나 다를까 나재민이 나를 데리러 왔다. 아, 이런 거까지 도움받기 싫은데. 결국 나재민이 또 화가 났다. 다짜고짜 언니의 핸드폰을 뺏어서 그 사진을 보고는 며칠 전부터 자기를 따라다니며 사진 찍는 사람이 누나냐며 큰 소리쳤다. 결국 나재민이 또 한방 먹였다.
주위 반응은 이미 언니 쪽을 향해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언니는 그제서야 자기 처지를 생각하는 건지 서둘러 강의실을 나가려는 거처럼 보였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왜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나락으로 끌어내리려는 심보가 왜 생기는지 말이다. 마음에 안 들었다. 집 가서 씻고 누워서 넷플릭스나 얼른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재민은 오늘 쉬고 싶은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날 쳐다보며 손가락에 술잔을 든 마냥 제스처를 취하는데, 오늘은 도저히 술이 당기는 그런 날이 아니어서 거절했다. 뭐, 나 재민은 나름대로 아쉬운 듯 입에서 쩝 소리를 내더니 내 뒤를 따라 강의실에서 나왔다. 그렇게 나 재민은 다른 친구들과 술 약속을 잡고 나는 나대로 자취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다음 날 새벽에 있을 일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2018.10.30. 날씨 구름 낌
"야 준희야, 나재민 얘 좀 어떻게 해 봐. 너 찾고 난리 났다."
오늘 새벽 도영 선배한테 온 전화였다. 새벽 3시가 다 되도록 넷플릭스를 보다가 전화가 온 탓에 보던 영화가 끊겼다. 중간에 영화 끊기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도영 선배니깐 일단 참고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전화해서 한다는 말이 나재민이었다. 나재민 이 자식은 술은 잘 못하지만 그래도 자기 알아서 조절해 마시는 스타일이었다.
근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이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것일까. 나는 일단 내 자취방에서 나왔다. 모자 하나 걸치고 밖으로 나와 대학가 근처로 가자 나재민이 가장 많이 다니는 '드리핀' 술집 간판이 눈에 보였다. 다짜고짜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새벽 3시가 돼도 대학가 술집은 활기가 넘쳐났다. 나는 자연스레 나재민을 찾았고, 저 멀리서 날 향해 팔을 흔드는 도영 선배가 보였다.
도영 선배에게 애가 이렇게 될 때까지 뭘 했냐고 핀잔을 줬지만, 이미 도영 선배도 자신 주량을 넘긴 거 같았다. 도영 선배는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속이 안 좋다며 빠르게 화장실로 뛰쳐나갔다. 나는 도영 선배를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비싼 돈 주고 술을 마셨는데 어째서 다시 내보내는 건지 아까웠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나재민을 챙겨 집으로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야! 야! 하며 나재민을 불러대니깐 나재민이 엎드려있던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선 다짜고짜 내 얼굴에 두 손을 감쌌다. 이 새끼, 취했다. 단단히 취했다.
"도영이 형~ 형 얼굴이 준희 같아요! 준희같이 눈도 이쁘고 코도 이쁘고 입도 이쁘고. 그리고 입술은 특히 더 이쁘고.. 아야! 왜 때려요 형!"
나재민 입에서 입술 얘기가 나오자마자 내 손으로 나재민 입을 때렸다. 할 말 못 할 말, 가려서 하지 못하는 나재민이 탐탁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택시를 태워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내 옆에 있던 나재민이 내 휴대폰을 보더니 뺏어들려고 난리 법석이었다. 이 자식 앞으로는 술 먹이면 안 되겠다. 나는 나재민에게 저리로 가라며 자세를 바꿨다. 얼씨구, 그러자 나재민이 삐지면서 입을 내밀었다. 귀여웠다. 술 취한 나재민이 단지 귀여웠지 사랑스러운 것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웃어 보였다. 그때 나는 술에 취하진 않았지만 나재민은 취해있었다. 나재민은 맨정신이 아니었어도 나는 제정신이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그 자리에서 한 번 더 키스를 했다.
물론 이 키스를 화장실에서 돌아온 도영 선배에게 걸린 게 흠이었을 뿐이었다.
-2018.11.03. 날씨 맑음
"바이칼 호수래 멋지지 않냐. 아, 나도 러시아 가보고 싶다."
머리가 요즘 상한 것 같아서 대학가 근처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굳이 날 따라온 나재민은 내 옆에서 잡지를 보더니 한 풍경 사진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호수라, 어렸을 때부터 물을 무서워했다. 수영장보다는 바다가 바다보다는 강물이 그리고 호수 또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재민 말에 별로라고 답해줬다. 그러자 나재민이 어째서냐고 물었다. 그냥 물이 무서워서라고 답하기 싫어서 이상한 말이 흘러나왔다. 꼴에 내 자존심이 이상한 것에 반응했다. 그래서 나재민에게 물었다.
"호수 한가운데 내가 구해달라고 외치면 날 구하러 누군가와줄까? 넌 와줄 수 있어? 난 그게 싫어. 바다나 강이 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 꽉 막힌 물 한가운데 혼자 가둔 것 같은 느낌. 소름 끼쳐."
내가 생각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황급히 자리를 뜨려고 했고 나재민은 그런 내 말을 듣더니 혼자 멍하니 잡지 속에 호수가 담긴 풍경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괜히 얘기했다. 그냥 수영을 못해서 싫다고 얘기할걸.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불행 중 다행히도 미용사분께서 내 차례를 알렸다. 나는 재빠르게 답하고선 미용사분께서 가리킨 의자 쪽을 향해 걸었다.
"나는 구해주러 갈게. 근데 수영을 잘 못해서 오래 걸려."
나재민이 잡지에서 손을 놓더니 내 등 뒤에서 뱉은 말이었다. 처음엔 그 말을 듣고 감동적이었다. 감동적이다 못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확실했다. 나재민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니 좋아한다. 그러면 나는? 과연 나는 나재민을 좋아하는 걸까.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나재민 말을 무시한 채 미용실 의자에 앉았다. 미용사분께서는 의자 밑 발판을 두어 번 누르더니 의자 높이가 올라갔다. 미용사분께서는 내 머리카락을 보시더니 끝이 많이 상했다며 속상해하셨다. 얼마만큼 자르겠냐는 말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었다. '최대한 짧게 부탁드릴게요'라고. 미용사분께서는 이내 놀라더니 그래도 되냐고 물었고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 계획하지 않은 중 단발머리를 택했다. 미용사분의 가위 소리가 내 귀를 자극했다. 그리고 내 눈은 거울 속 내 뒤에서 잡지를 읽으며 나를 기다리는 나재민에게 시선이 향했다. 혹시나 눈이 마주칠까 무서워서 슬쩍슬쩍 쳐다보는 게 다였다. 그러자 미용사분께서는 내게 남자친구냐고 물었다. 사실 그 질문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만 우린 항상 이런 문제에 정확히 얘기해야 했다. 그래서 미용사분께 얘기해줬다. 단지 친구라고. 물론 나재민도 내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2018.11.07. 날씨 구름 낌
"그래서 너는 어떤 마음인 건데."
도영 선배가 이토록 내게 단호했던 적이 있었을까. 도영 선배 앞에 아메리카노가 점점 더 차가워질 것 같았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입에 머금고 천천히 삼켰다. 어떤 마음이라. 생각해본 적 없다. 나재민이 좋다. 그게 친구이건 연인이건 나는 나재민 자체를 좋아한다. 그런데 연인인 나재민을 원하지 않는다. 그냥 지금처럼 그래 지금처럼 있으면 되지 않는 걸까. 나는 도영 선배에게 모르겠다고 슬며시 말을 흘렸다. 그러자 도영 선배 얼굴 표정이 찌그러졌다. 그러고는 선배 앞에 식어가는 아메리카노를 들어선 입에 넣었다. 누군가에게 나재민에 관한 내 마음을 털어 넣는 것에 대해 긴장되었다. 도영 선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재민이 놓아줘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나는 도영 선배 말을 듣자마자 다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속이 탔다. 재민이를 남 주기는 아깝고 내가 갖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인 걸까, 내가 그 정도로 쓰레기인 걸까. 그러다 보니 도영 선배 말처럼 확실히 정리해서 놓아주는 게 맞는 거 같았다. 단지 그 과정이 무서울 테지만. 결국 나는 도영 선배 말에 뒤늦게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 선택은 나 재민을 놓아주기였다. 왜냐고 묻는다면 나재민과 사귈 자신이 없어서라고 이젠 답할 수 있었다.
"선택 잘해. 지금처럼 울지 말고."
도영 선배는 이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두어 번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나재민 생각이 났고, 이제까지 만나왔던 전 남자친구들도 생각이 났다. 두려웠다. 어차피 만나면 헤어져야 하고, 더 이상 어떠한 인연도 남질 않는다. 물론 어떤 연인들은 헤어진 뒤 아름다운 이별이라며 친구처럼 잘 지낸다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 과거 전 남자친구만 예를 들어도 답이 나왔다. 근데 그런 나재민이랑 연인이 되고 헤어진다면? 그거만큼 비참하고 슬픈 일이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시도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친구로, 이렇게 친구만으로도 있고 싶어졌다. 그렇게 도영 선배와의 만남은 나재민을 보내주는 것으로 결론을 내면서 마무리되었다. 근데 이 만남이 그 후에 나재민과 나 사이에 일어날 문제, 즉 작은 나비의 날갯짓일 줄은 몰랐다.
-2018.11.09. 날씨 흐림
"시준희, 그러면 나랑은 왜 키스한 거야?"
나비효과였다. 나재민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내게 물었다. 자꾸만 나를 쳐다보며 울먹이고, 화를 내는 나재민의 모습에 억울하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나재민의 반응이 싫었다. 오늘 이 사건이 아마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을 것이 분명했다. 나재민이 내 어깨를 잡으며 머리를 숙였다. 나재민이 운다. 천하에 나재민이 내 어깨에 파고 들어서 운다. 비라도 내려서 나재민이 우는 걸 들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재민 입에서는 내가 원치 않던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좋아해. 좋아한다고 내가 시준희 너를 좋아한다고.. 나재민 말이 귓속에 울려 퍼졌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대답해줬다. 나도 좋아한다고 나재민 너를... 하지만 나재민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알지 못했다. 내겐 용기가 부족했다. 그리고 두려움만 가득했다. 내가 여기서 너에게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너는 100일이 지나고 200일이 지나고 1년, 5년 동안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줄까. 아님 우린 그전에 남이 되어 서로 모른 척 살아가는 게 아닐까. 결국 난 말하지 못했다. 나재민이 울던 얼굴을 들어 올리더니 내 볼을 양손으로 감쌌다.
"이 짓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이제 안 할게."
나재민 입술이 나의 입술과 닿았다. 그 뒤는 우리가 여태껏 그래왔듯 길어지고 거칠어지고 부드러워지고. 그리고 마지막은 항상 후회했다. 키스가 끝났다. 그와 동시에 우리 둘 사이도 끝이 났다. 우리는 친구도 연인도 뭣도 아니었다. 삭막한 분위기 속 나재민이 내게 물었다. 정말로 자기에게 설렌 적 없었냐며. 설렌 적이 없다는 게 말이나 될까. 매일이 설렜고 떨려왔다. 이 질문만큼은 용기를 내어 얘기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 재민은 아니다라면서 내 입을 닫게 했다. 그러고는 내게 등을 돌렸다. 걸어가는 나재민 모습이 처량하다 못해 슬펐다. 지금이라도 달려가 뒤에서 안아준다면 얘기가 달라질까, 아니면 나재민을 더 괴롭히는 꼴만 되는 걸까. 나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상태로 쭈그려 앉아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파묻고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흘리는 게 다였다. 몇 분간 그러고 있다 주인 아주머니께서 추운데 뭐 하냐며 얼른 들어가라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자취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재민과 함께한 마지막 공간에서 마저도 끝이 났다.
-2018.12.04. 날씨 맑음
"그래서 어젯밤까지 ppt 만들고 잤다고?"
놀란 눈으로 대단하게 바라보는 도영 선배였다. 기말은 다가오고 밀린 과제와 넘쳐나는 팀플로 하루하루가 기절 상태였다. 카페인으로 어떻게든 하루하루 버텨가는 게 다였고, 그럴 때마다 수명이 적어도 한 달씩은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도영 선배와 공강시간에 교내 식당에서 학식으로 점심을 때우자며 이야기를 하는 도중이었다. 저 멀리서 금발로 머리를 물들인 나재민이 보였다. 도영 선배는 슬슬 내 눈치를 보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 했다. 나는 상관없다는 눈치를 주며 그 상태로 나재민 쪽으로 직진했다. 그 순간이었다. 나재민이 내 쪽을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심지어 손까지 흔들어댔다.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재민이 내게 다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예전 나재민으로 시간이 돌아간 듯했다. 물론 그 표정과 손짓이 내가 아닌 나와 도영 선배 뒤에서 걸어오던 1학년 여자애에게 향했다. 나는 픽하고 웃어 보였다. 그런 내 모습에 도영 선배는 안절부절못했고 나재민이 그대로 우리를 지나치자마자 도영 선배가 괜찮냐고 물었다.
"안 괜찮으면 선배가 학식 사주시게요?"
나 재민은 나랑 그날 이후 과 활동에 많이 참여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1학년 여자애들과도 그리고 원래 있던 동기들 하며 선배들까지 이번에 나재민을 다시 봤다며 칭찬해대기 바빴다. 그러고 반대로 내 소문은 좋지 않은 쪽으로 빠졌다. 신경 안 썼다. 어차피 잠잠해질 소문이고 그리 심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소문을 정정하려고 다니면서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 옆에 있어주는 도영 선배와 같은 사람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느 날도 다름없이 침대에 누워 대나무숲을 보다가 나재민 관련된 글 하나를 발견했다. 우리 과 어느 1학년 여자애의 당찬 고백이었다. [ㄴㅈㅁ선배 좋아해요..]로 시작해 한 1000자는 가뿐히 넘긴 장문의 러브레터 같은 글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그 둘이 사귄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그 뒤 도영 선배와 내 주변인들은 내 눈치를 봤지만 뭐 어쩔 수 없어서 쿨한 척했다. 시간이 다 해결해주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나랑 도영 선배는 교내 식당에 남는 자리를 찾았고 메뉴를 골랐다. 아, 오늘 학식에 미역국이 나왔다. 난 미역국 싫은데.
-2018.12.14. 날씨 구름 낌
"종강을 축하하며! 인문대학 파이팅!"
종강 기념 겸 술집 '드림핀'에 왔다. 여기저기서 소맥 말기 바빴고 또 여기저기서 술 게임하느라 바빴고 암튼 우리 테이블 빼고 다들 단체로 종강을 축하한다며 시끌벅적했다. 도영 선배는 대충 나랑 장단을 맞춰주다가 다른 테이블에 불려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슬슬 집에나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과 사람들에게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인사를 한 뒤 가게 밖으로 나왔다. 1시간이나 그곳에 앉아있던 내가 기특했다. 그러다가 애석하게도 나재민과 딱 마주쳤다. 이 자식은 왜 가끔씩 내가 있는 곳에 나타나서 당황스럽게 하는지 모르겠다. 처음은 둘 다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은 안부 인사였다. 서로 잘 지내냐고 묻는데 뭐, 정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어서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그다음으로 나재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헤어졌다. 이 말이 그 때는 무슨 말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러자 나재민이 웃었다.
"네가 생각나서 그냥 헤어졌어. 그랬더니 걔가 나보고 미친놈이래."
그럴만하지. 나도 모르게 머리에서 생각했던 말이 입으로 튀어나갔다. 나재민이 더 크게 웃어댔다. 낯설었다. 내가 아는 나재민은 이런 거에 크게 웃고 떠들 애가 아니었다. 뭐 내가 없는 동안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재민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이리 와보라며 손짓했다. 내가 싫다며 고개를 돌리자 나재민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처럼 또 우리가 키스하는 기억이. 놀라서 얼굴을 뒤로 빼자 나재민이 가만히 있으라며 주머니에 자기 손을 집어넣었다. 목걸이였다. 그러고는 말없이 내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나는 지금 뭐 하는 짓이냐며 나지막이 내뱉었지만 나재민은 그런 내 말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묵묵히 목걸이를 쳐다봤다.
"어때? 너 오늘 생일이잖아. 이거 내가 너한테 선물하겠다고 8월에 사두고 지금 주는 거야. 그니까 지금은.. 음 별 의미 없는 선물이야."
그리고 나재민은 목걸이만 쳐다보더니 예쁘네 한 마디만 한 채 다시 술집 드리핀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멍하니 나재민이 들어간 드리핀 가게 안에만 쳐다봤다. 그리고 확신이 들었다. 정말로 끝이 났구나. 안녕 나재민. 그 날 밤에 나는 잠들기 전 까지도 나재민이 준 목걸이만 만지작거렸다.
-2019.08.29. 날씨 맑음.
"준희야, 가자! 내가 근처 맛집 알아뒀어!"
도영 선배 후배인 재현 선배가 강의가 끝나자마자 내게 달려와 말을 걸었다. 나는 빠르게 짐을 정리하고 강의실 바깥으로 나왔다. 저 멀리서 도영선배가 자기도 끼어달라며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나재민과는 목걸이 준 날을 기점으로 만나지 못했다. 나재민은 작년 종강 때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군대를 가 휴학을 했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나재민이라서 학과 사람들은 처음에 당황했지만 뭐 며칠 지나지 않아 다들 나재민이란 존재를 완전히 잊은 채 잘 적응해나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재민을 잊고 도영 선배와 같이 학과 생활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든 전 과목 A 이상은 맞겠다는 게 우리들의 목표였다. 물론 중간중간 나재민이 생각나는 날들이 있었다. 이번 연도 1학기 때에는 나재민으로부터 우편 하나가 왔다. 별 우편 아니었다. 엽서 한 장이 들어있었는데 그 엽서 배경이 작년 나랑 나재민이 미용실 잡지에서 본 그 호수였던 게 전부였다. 내용 또한 별거 아니었다. 그냥 잘 지내냐 이런 것이 전부였고 마지막으로 군대 갔다 오면 동시에 러시아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는 얘기였다. 한마디로 군대에다가 여행까지 다녀오면 이제는 더 이상 내가 학교 다니는 동안 나재민을 만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 편지를 마지막으로 나재민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어내고 날려보냈다. 그리고 그 뒤 내겐 그냥 남들과 같은 날들만 일어났다. 과 모임에도 소소하게 나가고, 친구들과 여행도 다녀오고, 도영 선배랑 스터디 모임을 만들고, 그리고 도영 선배가 소개해준 재현 선배를 만났다. 그렇게 재현 선배와 마음이 맞아서 사귀게 되었고 엊그저께는 재현 선배와 사귄 지 100일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 일기도 이제 여기까지 쓰기로 결정했다. 무언가에 이끌리 듯 방 청소를 하다가 나재민이 준 목걸이가 보여서 한번 펼쳐봤다. 그리고 끝을 맺어줘야만 할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작성했다. 안녕, 시준희.
-끝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독 꽃을 쓰다가 별로 감이 안 잡혀 단편 글 하나를 쓰게 되었습니다! 여주 성격이 참으로 답답하지 않나요?! 하하 하하 그게 바로 저랍니다! 우리 준희,, 과거 많은 남자들에게 치여서 연애에 대해 그리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지 못해요. 그래서 준희에게는 평생 잃고 싶지 않은 재민이와의 관계는 덧없이 소중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사귈 수도 없던 것이지요. 준희는 무의식적으로 만남보단 이별을 먼저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서 재민과 준희의 마음이 같음에도 그 이상의 관계로 진전하려고 하지 않죠. 준희의 생각은 어쨌든 친구라도 된다면 재민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뿐이었단 거죠. 결국 재민이와의 사랑은 엇갈려나갔고 친구도 연인도 아닌 그저 과거의 한 사람으로만 남게 됩니다. 재민에게 좋아한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지만 결국 친구관계마저 틀어지게 된 우리 준희.. 그렇게 재민은 준희에게 다시 한번 사랑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고 준희 곁을 완전히 떠나갑니다. 그리고 우리 준희는 완전히 연애를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마지막에 재현이를 만나게 되죠. 결국 이 얘기는 과거 스쳐간 남자 중 한 명의 이야기일 뿐이었네요. 다음에는 독 꽃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맨 처음 나온 시에서 말한 나는 준희이고 호수는 준희가 맨 처음 생각한 연애인식입니다. 그 호수 가운데 재민이가 준희에게 연애 인식을 바꿔주는 과정이고요 결국 마지막에 준희는 새로운 연애 인식을 가지면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다는 그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