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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은 멍하니 있던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오래 자서인지 머리가 조금 띵해져서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마구 흩뜨렸다. 그러고선 고개를 들어보니 거울엔 자다 깬 자신의 후줄근한 모습이 비춰져있었다. 까치집이 된 자신의 머리가 오늘따라 너무 우스워보였다. "...푸훗" 자신의 모습을 봄과 동시에 오늘 가보기로 했던 성규의 오피스텔이 겹쳐 떠올랐다. 그 환기안한 집의 지독시리도 독했던 유화물감 냄새는 아직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집에 다시 가게된다고 생각하니 실없는 웃음이 계속해서 실실 피어 올라왔다. 아마도 옆에서 누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면 저 인간 뭐 잘못 먹었냐는 듯이 혀를 끌끌 차댔겠지. 우현은 그 정도로, 영문도 모르게 기분이 묘해졌다. * * * 아침 겸 점심을 대충 챙겨먹고 집을 나선 뒤, 따사로운 토요일 정오의 햇살을 만끽하며 우현은 어제 처음 방문했었던 성규의 오피스텔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집은 우현의 집과 걸어서 대략 20분 거리에 위치 해 있었다. 어스름한 저녁에 들렀던 그 때와 똑같이 고요하게 닫혀있는 그의 집 문이였지만 어쩐지 그 때 보다는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우현은 살짝 심호흡을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청량하게 울리는 초인종의 소리가 주변에 머물고 있던 고요함을 부서트렸다. "...." 하지만 그 부서진 고요함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였다. 처음 들렀던 그 때 마냥 성규의 집 안에서는 아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집 안에 없는건가? 우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럽게 초인종의 버튼을 다시 눌렀다. 기다리는 우현의 손가락이 초인종의 옆을 다라락- 두드리고 있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그의 한 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고, 손으로는 문을 벌컥 열어제꼈다.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로 문은 어제처럼 쉽게 열리고 말았다. "아니 대체 문단속을 하는거야 안하는거야..."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실어 문을 당겨 열었다. 어제와 같은 진득한 유화물감 냄새. 하지만 그때와는 또 다르게 집 안의 거실은 아름드리 태양빛이 환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어두웠던 그때는 음침하고 쓸쓸해보였는데 지금은 무언가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우현은 빛이 비춰지고 있는 거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쭈뼛거리며 그 집의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여기저기 벽에 기대어져있는 그림들을 살금살금 지나치며 어제 성규가 있었던 그 방의 문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제는 틈이 조금 있었던 문이 오늘은 굳게 닫혀져있다. 우현이 베이지색 방 문의 중앙을 멀뚱히 바라보다 슬며시 손을 들어 똑똑- 노크를 했다. 귀를 기울여봐도 여전히 인기척은 없었다. 우현은 또 한번 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 슬슬 아무 문이나 여는 것에 대해 익숙해지는 것 같아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방의 안에는 어제 저녁 보았던 그 거대한 캔버스가 여전히 방 중앙에 떡하니 서있었다. 하지만 그 새하얗던 캔버스는 그 때와 다르게 그림으로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특유의 붓터치로 거칠지만 섬세하게 그려져 있는 것은 다름아닌 초콜릿 케이크와 모카라떼였다. 우현은 그림을 봄과 동시에 어제 성규에게 대접해줬던 자신의 그 초콜릿 케이크와 모카라떼를 생각해냈다. 그가 황급히 돌아가서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낸게 다름아닌 이것들이라니... 우현의 기분이 한순간 야릇해졌다. 어서 그를 만나 얘기하고 싶었다. 우현은 물감이 바싹말라 굳어 딱딱해진 캔버스의 모서리를 스윽 훑었다. 이윽고 발걸음을 돌려 캔버스의 방을 조용히 나갔다. 다시 그림들이 널려있는 거실이 보였다. 이 집 안에 성규가 있긴 있는걸까. 그런 생각이 우현의 머릿속에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그러면서도 워낙에 인기척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 혹여나 집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의 발걸음을 또 다른 방으로 옮겼다. 그렇게 우현이 들어간 작고 조용한 방 안에는- 하늘빛 시트가 씌워져있는 갈색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있는 새하얀 성규가 있었다. 성규의 위로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햇살들이 블라인드에 가려져 옅게 뿌려지고 있었다. 우현은 성규가 잠들어있는 그 광경이 너무나도 미묘한 분위기로 자신을 사로잡는 바람에 눈만 꿈벅거리며 그를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성규는 정말 가지런하다고 생각 될 만큼 옆으로 곱게 누워있었다. 그의 베게 옆에 살포시 놓여있는 손에는 깨끗하고 새하얀 그 모습들과는 이질적이게도 물감의 흔적들이 슬쩍슬쩍 묻어있었다. 우현은 그렇게 한참을 성규의 모습만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은 성규의 그림을 골라보려 이곳에 온 건데, 정작 그에 대해 의논해봐야 할 주인공이 이리 곤히 잠들어있다니. 우현이 머리를 살짝 긁적이며 골치아파졌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뒤를 돌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등 뒤에서 미약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성종이야...?" 자다 깨어 약간 껄끄럽게 소리나는 목소리가 우현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사실 그 목소리는 실낱같이 작아 금방 지나칠 수 도 있었지만 방안이 워낙 고요했기에 공간을 모두 울리는 듯 했다. 그리고 우현이 그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입속에서 나온 '성종'이라는 이름 때문이였다. 또 다시 퍼뜩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궁금증들이 우후죽순으로 솟아나왔다. 하지만 그것들을 잠시 머릿속 한 켠으로 꾸욱 눌러두고, 우현은 미소를 내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안타깝지만 저네요." "어..." 성규가 뿌옇게 보이는 눈앞의 인영때문에 눈을 찡그렸다. 상체를 일으키며 손으로 눈을 슥슥 비빈 뒤 자신의 앞에 서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그는 성종이 아니라 어제봤던 그 카페의 사장이라는 남자였다. 성규는 불현듯 그의 이름이 생각났다. 남우현.. 이라고 했나... 머메이드지로 만들어진 베이지색 그의 명함에 적혀있던 정갈한 세 글자. 성규는 그에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남우현...?" "어? 기억하고 있네요. 김성규씨."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 성종이 불러주는 것 과는 또 다른 느낌이였다. 게다가 남이 본명을 불러주는 건 너무 간만이라서 낯설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말한 우현은 자신을 바라보며 그 특유의 강아지같은 미소를 지어대고 있었다. "그럼 제가 그림을 보러 오겠다고 했던것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아..." "그림을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것도?" 그러고보니 그랬었지. 그의 말에 어제의 그 약속이 불현듯 생각났다. 하지만 후회하는 느낌이 드는 건 아니였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저 사람에게는 그러고 싶어서 한 말이였으니까. "알아. 다 기억나." "어? 진담으로 한 소리였어요 그거?" 우현이 처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성규를 향해 되물었다. 그에 대답하듯, 성규는 눈을 맞추며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순간 우현이 크게 당황했다. 눈이 마주쳐서? 아니면 그림을 무료로 준다는 말 때문에? 그 이유는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아, 아무튼 그럼... 그림을 좀 골라봐도 될까요...?" "마음대로." 우현은 괜히 헛기침을 큼큼- 해대며 방을 나섰다. 성규가 그런 그의 뒤를 슬그머니 따라갔다. 우현의 귀가 살짝 발그스레 해진게 보였다. * * * 집 안 곳곳에 널려있는 그림들을 보며 전시 할 만한 작품들을 몇가지 골라낸 후, 우현이 숨을 골랐다. 캔버스들의 무게가 꽤 되는 바람에 그림은 조금씩 나눠서 옮겨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언가 잊은게 없나 곰곰히 생각한 그 순간, 우현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슥- 스쳐지나갔다. "아. 저기.. 성규씨." 우현의 말에 거실 창 밖을 보며 팔짱을 끼고있던 성규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새초롬한 시선을 똑바로 마주보기가 왠지 힘이 들었다. 우현이 손 끝을 조금 움찔하며 말을 이었다. "궁금한게 있는데 말이죠..." "뭔데..?" "성종씨.. 그 사람하고는 어떤 사이인겁니까?" 우현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다가 성규의 눈으로 휙 올려세우며 물었다. 자신의 물음에 살짝 움찔하는 성규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공간을 조여오는 정적에 우현이 주먹을 살짝 쥐었다 폈다. 자신이 괜한 호기심으로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이 아닐까, 대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반응하는걸까- 정적이 이어지는 동안 오만가지 난잡한 생각들이 우현의 머릿속을 휘저어댔다. "나는 사실-" "....." "이 이야기를 너한테 아직 해주고 싶지 않아." '아직 해주고 싶지 않다?' 우현이 그의 말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의문했다. 저 말은 무슨 뜻일까. 그리고 우현이 그의 말뜻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도중, 성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정 궁금하면 그 애한테 다시 물어봐." "성종씨한테요?" "이야기 해 줄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 애는 너에게 그 이야기를 해 줄거야. 아니면..." "....." "어쩔 수 없지." 나지막이 말한 성규가 팔짱을 낀 팔의 힘을 조금 풀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더 세게 그를 비췄다. 갈빛이 도는 머리가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우현은 그런 성규를 보면서 온몸을 감싸오는 야릇한 기분에 손끝을 바르르 떨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성규는 더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그를 감싸고 있는 무언가가 그를 더욱 더 매혹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그리고 그 순간 흘러오는 구름에 가려져, 성규를 하얗게 비추고 있던 햇빛이 거두어지자 우현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우현이 허둥거리며 약간의 캔버스들을 챙겼다. 힘을 주어 그림들을 들어올리는 순간, 우현이 무언가 생각난 듯 성규에게 말을 꺼냈다. "맞다, 그러고보니 방안의 그 커다란 캔버스말인데요." "어?" "그거 어젯밤에 돌아와서 그린건가요?" 우현이 빙긋 웃으며 성규를 향해 묻자, 그가 당황함을 온몸으로 보이며 팔짱을 풀고 어버버거렸다. "그, 그건 그냥..." "예쁘더라구요."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모르는듯, 휘적거리는 그가 우현의 한 마디에 뚝 멈춰섰다. "제가 만든 케이크랑 커피가 그렇게 예쁜줄은 몰랐어요." "....." "괜찮다면 그것도 카페에 가져다놓고 싶은데." 우현이 성규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대답이 나올 듯 말 듯, 성규의 입이 움찔거렸다. "마, 마음대로 해." 그의 대답에 우현이 한껏 미소를 지었다.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음을 보인 그가 캔버스를 다시 힘주어 들어올리고 그의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텅- 닫히고 거실에 덩그러니 서있던 성규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요동치는 심장과 붉어지는 양볼을 느꼈다. 그날따라 차갑기만 한 자신의 손등이 참 고맙게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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