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야, 나왔어!"
"아 무슨, 누가 들을까 겁나.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면서 왜 얼굴이 빨개져?"
나를 놀리며 쿡쿡대는 동혁이의 얼굴이 예쁘다.
그 날 처음 동혁이를 만나고, 다음 날 정말 동혁이는 나를 만나러 다시 와주었다. 손에는 변명거리인 밝은 호롱불을 들고서.
매일 갇힌 집 안에서 나만의 세상에 살던 내게 동혁이라는 존재는, 식상한 표현이지만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아버지는 내겐 너무 어려운 존재고, 여울이에겐 내가 어려운 존재니까.
동혁이에 대해 아는 건 많이 없지만 며칠새 그는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됐다. 많은 얘기를 해주고, 낮에 나와 거리를 다니며 사람구경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 해주는 좋은 아이.
그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제법 친해졌고, 나는 매일 밤 이렇게 동혁이를 만나는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화백님께서는 언제 돌아오시는거야? 네가 분명 열흘은 넘기지 않을 거라고 한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겠어. 따로 연락도 없으시고...예정한 것보다 며칠씩 늦어지는 건 처음이야."
"덕분에 너를 이렇게 매일 보는 것은 좋지만..."
"...너는 어떻게 낯뜨거운 소리를 그렇게 쉽게해?"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거 다 안다, 뭐."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나는 이제 몰래라도 못나와."
"알아. 그래서 낮에 만나러 올거야."
"뭐?"
내 말에 동혁이는 그저 눈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다음 날, 아버지께서는 거의 보름만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아버지의 눈을 제대로 마주보기도 전에 땅에 이마부터 갖다대어야 했다.
아버지는 혼자 돌아오시지 않았다. 아버지의 뒤로 보이는 검은 옷을 입은 무리의 사람들과, 그 중심에 있는 분은 홍운의 왕이었다.
화려한 무늬의 붉은 옷을 아래 위로 단정히 갖춰입은 그 모습은 영락없는 왕의 옷차림이었다.
도대체 왜? 왕이 궁 밖으로 나와 세상을 둘러보는 일은 홍운에서는 없는 일이다. 나라를 돌며 보고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일까? 이렇게 왕께서 직접 함께 나오실만큼.
아니, 보름이라는 시간동안 아버지와 함께 있으셨을텐데, 왜 굳이 여기까지 오신것일까.
준비되지 않은 마음탓에 온 몸에 긴장이 흘렀다.
"고개를 들어보거라."
"소녀, 궁의 사람도 아니거니와 왕의 얼굴을 맞댈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 내 너를 보려 여기까지 온 것이건만..."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는 없어 그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왕을 호위하던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선지 모두 뒤를 돌아있었고, 나를 쳐다보는 것은 아버지와 왕 뿐이었다.
나는 엎드린채로 겨우 고개만 들고 벌벌 떨고있는데, 왕께서 다가와 무릎을 굽혀 내 눈을 바라본다.
"이..이러시면.."
"괜찮다. 여전히 예쁘구나."
"...소녀는 오늘 용안을 처음 뵙는것인데...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게 당연한 것인줄 알면서도 못내 서운하구나. 그래도...이렇게 얼굴을 봤으니 되었다."
나는 당최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홍운의 왕이 아버지가 아닌 나를 보러 이곳에 직접 오셨다는 것부터, 나를 이미 안다는 듯한 말까지.
왕의 얼굴은 왠지 무척 수척하고 어두워 보였다.
다리를 굽혀 앉아도 숨겨지지 않는 위엄과 그의 용모에서 풍겨나오는 풍채, 모든 것이 그가 이 나라의 왕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에게서 묘한 친근감을 느꼈다.
나를 예전부터 알아왔다는 사실때문에였을까, 나는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왕은 내 손에 꽃 한송이를 쥐어주었다.
"과꽃이다. 이제 또 가을이니..."
마치 하려던 말을 꾹 참는 사람처럼 왕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이내 그는 내 얼굴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들릴듯 말듯한 소리로 미안하다, 라는 짧은 말을 뱉고는 뒤돌아섰다. 그를 호위하던 검은 옷의 무리들도 여전히 뒤돌아선 채로 왕의 뒤를 좇았다.
아버지는 멀어져가는 왕을 향해 한참 고개를 숙이고는 그 무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짧은 한숨을 뱉았다.
"아버지,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말씀도 없이 늦으시고는..."
"이리 오시는 건 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오늘까지도 계속 말렸는데 듣질 않으셨어."
"왜 저를 보러 오신거예요..? 필요하면 저를 부르셨어도 됐을텐데..."
"그런 눈을 하고서 왕궁까지 갔다가는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퍽 좋았겠구나."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래, 눈을 가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존재조차 잘 모르는 일개 화백의 딸이 왕궁에 드나들었다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게 분명했다.
아버지께서 나를 숨겨 키우는 것만으로도 동네에 이런저런 소문이 무성하다는데.
동혁이는 내가 대단히 못생겼거나 감춰야 하는 특별한 단점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저 내 눈 때문이라고 치기에는 저잣거리조차 마음대로 못다니는 건 좀 너무하지만, 궁까지는 마음대로 다닐 수 없었겠지. 한 번 보면 절대 잊혀지지 않을 모습이니까.
그렇다하더라도 직접 오셔서까지 나를 보고 가실건 뭐람...
나는 손에 든 과꽃을 팽그르르 돌려보았다. 가을에 피는 꽃. 나도 가을에 태어났는데, 마치 생일 선물같네.
며칠 후, 나는 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
"준회야, 아니 이제 이렇게 불러서도 안되겠네요."
"편히 말씀하세요. 아직 왕이 된 것도 아니잖아요."
"근 며칠을 내내 앓으시더니....이렇게 급작스럽게 가버리실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준회는 왕의 죽음을 두고 눈물을 삼키는 자신의 보모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아들처럼 자신을 봐준 보모이기에, 준회는 거리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왕은 그의 첫 번째 왕비를 많이 사랑했다고 한다.
그 왕비가 아마 공주를 낳다 죽었다지. 궁의 사람들조차 모르는 사실이지만, 준회는 이 사실을 알고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 공주를 받았으니까. 왕비의 아이를 받았던 일개 궁녀를, 왕은 무슨 생각에선지 두 번째 왕비로 들였다.
왕은 어머니를 통해 공주와 첫 왕비의 기억조각을 끝내 붙잡고 있는듯 했다. 왕이 어머니를 사랑했을리 없을 수 밖에.
후계자가 필요해 어머니를 안고, 나를 낳았으리라.
왕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고, 자연히 왕의 사랑이 나에게까지 미치지도 않았다.
왕비와 왕자라는 직책을 안고도 어머니와 나는 궁에서 왠지모를 소외감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어머니는 궁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람들은 사고였다고 했지만, 나는 그게 거짓말이란 걸 알았다.
최근 며칠간 통증을 호소하던 아버지는.. 의원의 치료도 제대로 받지 않으시더니 돌연 세상을 떠나셨다.
좋은 왕이었지만, 본인의 삶에 미련이 없으신 분이었다. 나라를 가지고서도 잃은 사랑 하나에 연연해 삶을 쉽게 포기하시다니.
준회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이 되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을 공주를 찾을 것이다.
준회는 공주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며칠 전에 잠시 궁을 비우셨다는데, 죽기전에 공주를 만나러 간 것이겠지.
내 얼굴은 한 번 먼저 보러온 적이 없으시면서.
하늘의 저주를 받았다는 공주를 죽이지도, 버리지도 못해 숨겨놓고 살려두다니.
정에 얽매인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한심한 존재이던가.
공주를 찾아내서 죽일 것이다. 그녀의 존재가 재앙이라는 것쯤은 더 증명하지 않아도 사실이었다.
공주의 어머니인 첫 왕비가 죽었고,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으며, 준회 자신의 불행의 이유였고, 아버지의 삶을 망친 인물이었다.
몇 년이 걸리든 찾을 것이다.
멸망하는 것은 이 나라가 아니라 공주의 인생일 것이다.
공주가 그런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면, 내가 그 운명을 막을 거니까.
암호닉
김밥빈 님
♥
+)
2편을 가지고 찾아오는데 일주일 걸렸네요ㅠㅠㅠㅠㅠ
대단한 글 쓰는것도 아닌데 이렇게 오래걸리다니
바빴어요..으항항
변명일뿐이죠 그냥 저를 몹시 치세여ㅠㅠㅠㅇ으앙ㅇ
오래걸린건데도 퀄이 이모양이라 사죄합니다ㅠㅠㅠㅠㅠㅠ
다음글에서 만나요!!!
참 요즘 미세먼지 극성이던데 조심하세여 다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