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은 모르길
W.이요르
현재 시각 오전 10 시. 스튜디오에 도착해야 하는 시각 오전 10시 30분. 명백한 지각이다. 나름 신인이라고 샵에서 신경 써준다는 게 시간을 너무 소비했다. 슬슬 걸어서 샵에서 나오던 나는 다그치는 매니저 형의 소리에 놀라 부랴부랴 차에 탔다. 지각이야, 인마! 내가 차에 타는 것을 확인하곤 바로 운전석에 탄 종대 형은 화났는지 정색을 하며 내게 소리쳤다. 아,아니. 샵에서 너무 늦게 끝내줘서.. 너 신인이라 안 그래도 사람들 이목이 너한테 집중돼있는데. 미안해.. 휴. 일단 빨리 가자. 종대형은 화를 삭이며 차를 몰았다. 차 안은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나는 바보 같았던 나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느라, 종대 형은 시간에 맞춰 도착하기 위해 운전에 신경 쓰느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 미쳤어 도경수. 시간 생각도 못하고 거기서 실실 쪼개고 앉아있었냐. 넌 진짜 신인으로서 실격이야.
"도경수. 다 왔어, 내려."
현재 시각 10시 28분. 다행히 지각은 면했다. 미안한 마음에 형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종대 형이 한숨을 내쉬더니 내가 문을 열려던 찰나 내게 말했다. 경수야, 형이 화내서 미안해. 오늘 첫 포스터 촬영 날인데 괜히 형 때문에 기분 망쳤겠다. 아까 나에게 화낸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내게 사과를 하는 종대 형이었다.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건데 뭐. 이제 안 그럴게. 종대형의 말에 더욱 더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도 바로 뒤이어 사과했다. 그래그래, 착하다 우리 경수. 힘 내서 오늘 촬영 열심히 하자. 종대형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내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응! 자, 얼른 내려-. 나는 종대 형에게 밝게 웃어주고 밴에서 내려 큰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세요!! 신인 배우 도경수입니다!!"
***
감독님과 여러 사람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나를 발견하신 감독님께서 다른 배우분들을 소개해주셨다.
"아, 안녕하세요! 신인 배우 도경수입니다!"
"아, 요번에 오디션으로 당당히 들어왔다던 신인이시구나!"
민아 씨는 내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며 인사했다. 반가워요, 여주인공 배가은 역을 맡은 장민아예요! 재밌게 촬영해요, 우리! 민아 씨의 털털하고 활발한 성격 덕분인지 온몸을 죄어오던 긴장이 조금 풀어진 것 같았다. 아, 저 민아 씨 팬이에요. 전 작품도 다 챙겨봤는데.. 어머, 진짜요? 어땠어요? 팬이라는 나의 말에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더 주며 큰 눈으로 물어보는 민아 씨의 행동에 당황해서 말을 더듬으며 대답을 했다. ㄴ,네? 아, 멋졌어요! 우와, 칭찬 고마워요. 민아 씨의 미소에 괜히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장민아가 내 눈앞에서, 그것도 내 손을 잡고 있다니. 민아 씨! 민아 씨 먼저 포스터 촬영할게요. 네~ 감독님, 저 먼저 가볼게요. 경수 씨도 좀 있다 봐요. 계속 손을 잡고 있는 민아 씨 덕분에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터질 것 같을 때쯤, 사진작가님의 부름 때문에 민아 씨는 잡고 있던 손을 놔야만 했다 좀만 더 늦었다면 진짜 얼굴이 터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김종인이라고 해요."
빨개진 얼굴을 진정시키는데 온 힘을 다하던 중, 불쑥 내 눈앞으로 손이 내밀어 졌다. 얼른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을 확인해보니 김종인 씨였다.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톱배우. 매일 화면으로만 보다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내가 정말 배우가 됐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밀어 가볍게 악수를 했다. 아아, 네. 신인 배우 도경수.. 아까 들었어요. 아아, 잘 부탁 드립.. 그건 나 말고 감독님께 해야 할 말이고요. 아,그럼.. 민아가 손잡아주니까 기분 좋았죠? ㄴ,네? 종인 씨의 황당한 질문에 눈을 크게 뜨고는 나 어이없어요. 라는 표정으로 종인 씨를 바라보자, 갑자기 얼굴을 쓱 들이밀고는 살짝 웃으며 말을 하더니 그럼, 수고. 하고는 민아 씨가 촬영하고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런 종인 씨에 태도에 어버버하고 있는데 문득 방금 내 귓가에 대고 한 종인 씨의 말에 애써 진정시킨 얼굴이 또 빨개졌다.
"진짜 프로라면 여배우가 손잡았다고 얼굴이 빨개지진 않을 텐데. 도경수 씨는 프로답지 못하네 "
뭔가 내 생의 첫 연기생활이 힘들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자, 다음은 종인 씨."
민아 씨의 촬영이 끝났는지 작가님은 잠시 재정비를 하시더니 종인 씨를 불렀다. 그럼, 내가 종인 씨 다음이야? 종인 씨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는데, 내가 종인 씨 다음이라니..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자신감은 바람과 함께 저 멀리 날아가는 것 같았다. 잘 가, 내 자신감아..
"종인 씨는 강승민의 마음을 잘 표현해주시면 돼요.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되죠?"
종인 씨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가장 친한 친구에게 흔들리는 것을 알면서도 여자를 미워하지 못하는 순정파 강승민 역을 맡았다. 과연 그는 어떻게 강승민을 표현할까? 오디션장에서도 극찬을 받았던 나였다. 그런 나를 김종인 씨는 단 한마디로 날 무너트렸다. 흥. 내가 저 가식쟁이에게 혼잣말에서도 존칭을 써야 해? 종인 씨는 무슨! 김종인이다, 김종인! 프로답지 못한 나보다 못하면 실컷 비웃어줘야지!
"자, 카메라가 그녀라고 생각하고. 하나, 둘, 셋."
감독님의 말씀에 김종인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그리고 바로
'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에 맞춰 내 몸엔 소름이 돋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짧은 순간, 종인은 강승민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눈을 보고 있으니 내 가슴이 다 먹먹해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모습. 너무 사랑해서 미워할 수도 없는 강승민의 모습. 김종인이 눈을 한 번 더 감았다 뜨니, 고여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왔다.
'찰칵'
남자의 눈물이 그렇게 슬픈지 처음 알았다. 나 말고도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느꼈을 것이다. 강승민은 슬픈 남자다. 미치도록 불쌍한 남자다. 김종인은 그런 강승민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었다. 아니, 강승민이 김종인이고, 김종인이 강승민 같았다. 미쳤네. 김종인은 미쳤다. 프로였다 김종인은. 비웃어주겠다던 나의 의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멋있었다. 오랫동안 이어진 김종인의 촬영은 작가님의 감탄과 함께 끝이 났다. 김종인은 피곤한지 고개를 몇 번 돌리며 굳어있던 몸을 풀곤 스태프분들에게 인사를 한 뒤 세트장에서 내려왔다.
"다음은 경수 씨.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요."
"네!"
촬영을 하기 위해 세트장으로 가는데. 내려오던 김종인과 눈이 마주쳤다.
"아, 멋있었어..."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는 나를 지나쳐갔다. 내가 말을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나를 무시했다. 잠깐 스쳐 지나간 눈빛에선 비웃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게 바로 프로라는 거야.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 대신 수치심으로 물든 마음에 손끝이 떨렸다.
"경수 씨, 안 오고 뭐해? 촬영해야지."
"아, 지금 갈게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카메라 앞에 섰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그 시선들 중에는 김종인의 시선도 있었다. 불안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아니꼽게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자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경수 씨는 친구의 여자를 사랑하는 한민수 역을 잘 소화해 주면 돼요."
한민수. 친구의 여자를 사랑하는 나쁜 남자다. 이 드라마의 악역. 행복한 연인 사이에 낀 불청객. 분명 촬영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잘 소화해 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경수 씨는 지금 친구와 여자가 같이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거예요. 알겠죠? 질투와 시기감으로 가득 찬 표정이 드러나야 해요."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아. 감을 못 잡겠어.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오직 김종인의 말만이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하, 경수 씨. 오늘 왜 그래? 오디션에선 잘했잖아. 좀 쉬었다 할까?"
내게 실망한 듯 말하는 작가님의 말씀에 그쪽을 쳐다보는데, 내 눈엔 내게 실망한 작가님이 아닌 그 뒤에서 환한 미소로 민아 씨와 얘기하고 있는 김종인이 들어왔다. 저렇게 예쁜 미소도 지을 수 있었구나. 나를 볼 땐 무표정이거나 비웃기만 해서 웃는 방법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나한테만 그런 거였어. 내가 싫어서 나에게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거구나. 민아 씨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김종인의 그런 미소를 받는 그녀가 부러웠다.
'찰칵'
"좋았어, 경수 씨! 그거야. 자, 다시 한번 갈게!"
난 프로가 아니다. 한민수는 친구와 함께 있는 여자를 보고 있는 거지만, 난 민아 씨와 함께 있는 김종인을 보고 있었으니까. 촬영하는 내내 아무 생각 하지 않았다. 그저 민아 씨를 향해 짓던 김종인의 미소만을 떠올렸을 뿐이다.
***
"자, 다음은 종인 씨랑 경수 씨랑 같이 찍을게요."
몇 분간의 휴식 후, 작가님의 말을 시작으로 촬영이 다시 시작됐다. 강승민과 한민수. 김종인과 나. 어색하다, 어색해. 촬영장을 휩쓰는 어색함과 긴장감에 온몸이 굳어갔다. 아마 내가 실수라도 하면 김종인은 옳거니. 하며 질질 물고 늘어질 것이다. 아씨, 잘해야 되는데..
"경수 씨, 내가 불편해요?"
김종인이 사람 좋은 미소로 나를 보며 말했다. 불편하냐고? 어! 엄청! 너 같으면 안 불편하겠냐? 가식 덩어리. 사람들 앞이라고 웃는 것 좀 봐. 나 혼자 있을 땐 그렇게 비웃더니. 사람들 앞에선 혼자 잘났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김종인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요."
"그럼 표정 풀어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말하는 김종인의 모습에 잠깐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입을 뗀 그는 목소리를 낮춰 나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왜, 프로가 아니라서 아직은 어려운가?"
..가식쟁이. 아무것도 모르는 스태프들은 종인 씨가 후배도 챙기고, 역시 톱배우야. 경수 씨가 잘 보여야겠네~ 이런 멍멍이 같은 소리만 하고 있다. 이봐요! 다들 속고 있는 거예요. 이 사람 아주 사기꾼에 가식 쟁이라니까!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느라 빨개진 내 얼굴이 웃겼는지 옆에서 김종인이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그래, 실컷 비웃어라.
"자, 그럼 둘이 마주 서서 카메라를 바라봐주세요. 지금 둘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싸우고 있는 거예요. 감정이입 해주시고. 찍을게요."
그러니까 한민수가 강승민 싫어하는 거잖아. 그럼 됐다. 그런 컨셉이라면 자신 있었다. 왜냐하면 난 김종인이 미워 죽겠으니까. 감정이입 100%입니다. 카메라. 저 카메라는 김종인이다. 가식쟁이, 잘난척쟁이, 재수 똥 김종인이다. 잠깐 민아 씨를 부러워한 내가 싫다. 이젠 김종인이 나를 보고 매일 웃어준다 해도 싫다. 속으로 김종인을 씹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촬영을 했다. 수고했다는 작가님의 말에 모든 촬영이 종료되었다. 으으, 드디어 끝났다. 포스터촬영만 하는데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작가님이 계신 곳으로 가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을 모니터링 했다. 와, 이게 나야? 역시 사람은 화면발을 잘 받고 봐야 한다니까. 사진을 넘기며 내 연기에 대해 감탄하는데 내 사진은 이제 끝났는지 김종인의 사진이 나왔다. 누구나 입을 법한 가디건에 편한 검은 바지를 입었음에도 귀티가 좔좔 흘렀다. 잘생기긴 잘생겼구나. 나에게선 눈 씻고 찾아봐도 느낄 수 없는 어떠한 아우라가 그의 사진에선 흘러나오고 있었다. 톱배우는 뭔가 다르네. 시선 처리 하며, 절제된 감정 표현 하며. 난 언제쯤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뭐해요?"
아이고, 깜짝이야!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옆을 바라보니 민아 씨가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요즘은 불쑥불쑥 나타나서 사람 놀라게 하는 게 유행이야!? 김종인도 그렇고, 게다가 민아 씨까지!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다.
"모니터링 하고 있었구나~"
오오, 김종인 이 자식, 한 연기 했는데? 민아 씨는 화면에 떠 있는 김종인의 사진을 보더니 기특하다는 듯 칭찬했다. 아역배우로 같은 드라마에서 데뷔했다더니, 민아 씨와 깁종인은 많이 친해 보였다.
"아, 맞다. 경수 씨! 경수 씨도 오늘 회식 갈 거죠?"
"예? 회식이요?"
"응응. 우리 드라마 대박 기원으로 감독님이 오늘 거하게 한턱 내신데. 갈 거죠?"
"아니, 제가 거기에 껴도 되는지.."
"에이, 경수 씨도 이 드라마 주연배운데, 당연히 가야죠!"
자자, 빨리 준비하세요! 예? 아, 저기 잠시만요! 저기 민아 씨!! 나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은 안 들리는지 민아 씨는 나의 손을 잡고 날 끌고 갔다. 그래.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거기선 김종인과 마주칠 일 없을 거야. 마주쳐도 뭐 어쩌겠어 자기가. 흥. 결론이 나자 이번 회식을 통해 스태프분들께 잘 보여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빠르게 걸어가는 민아 씨의 걸음 속도에 맞춰 따라갔다.
*안녕하세요, 이요르입니다! *톱스타 종인이와 신인배우 경수 사이의 알콩달콩합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1화에선 싸가지없는 종인이와 어리버리한 경수밖에 나오지않았네요.. *하.지.만! 2편부터는 달콩달콩한 둘 사이가 나올 예정이니!! 달당하지 않다고 떠나버리시면 아니아니 아니되오!! *글수정 도움주신 헬로님 감사합니다♥♥ *암호닉은 다음편에서 모두모두 정리해드릴게요! *암호닉은 항상 감사하게 받고 있습니다! *너만은 모르길 은 매주 금요일 밤 9시 55분에 찾아뵈실 수 있으세요! *댓글 달기 귀찮으시면 추천 한번 꽝 눌러주고가세요.!! *조회수랑 댓글 수 차이 보면 마음이 아파요ㅜㅜ *여러분 사랑해요♥이요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