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로망, 클리셰
W. 백빠
변백현; 몸파는 누나 下
' 성장통이 아니면. '
' 잠깐의 성장통이 아니면 어쩔래. '
' 사랑이면, 어쩔거냐고. '
그 이후, 시큰하게 아픈 발목 때문에 얼마간은 술집에 나갈 수가 없었다. 깁스를 한 창녀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나는 너가 내 집이라도 알아내 찾아올까, 같은 술집에 다니는 동생의 집에서 지냈고, 안타깝게도 너는 더이상 나를 찾지 못했다. 어쩌면 날 찾기를 기대했을지도. 그렇게 나는 술집을 잠시 그만 둔 채, 단골 손님들의 출장으로 근근히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다. 너가 지독한 상처를 남겨버렸던 내 왼쪽 발목은 차차 나아가고 있었다.
두 달이 지났다. 내 발목은 언제 아팠냐는 듯, 깔끔히 나아버렸고 내 마음 속에 꽤나 크게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했던 변백현은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니, 거의 흔적도 남김 없이 잊혀져가고 있었다. 아니다, 잊혀지지 못했다. 무의식엔 아직도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 잊었어, 나는 너를 잊었다고. 아니야, 나는 변백현을 아직 잊지 못했어…. 조금도, 잊지 못했다고. 보고싶다.
나는 그날도 단골의 지저분한 손길을 버텨내고, 온갖 술과 향수 냄새에 찌든 채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이 생활에 강한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 지독한 싫증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 무엇보다도 얼른 집으로 가 더러운 몸뚱아리를 씻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히 들었다. 겨우겨우 온수를 흘려내는 녹슨 수도꼭지가 이토록 그리울 줄이야. 더욱 더 지친 내 몸을 채찍질하며 분주히 다리를 움직였다.
빌라 옆 작은 가로등 하나. 약한 빛이 나의 보금자리인 빌라를 비추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누군가 빌라 입구에 음식 쓰레기를 투기했고 그 냄새를 쫒아온 도둑고양이들이 봉투를잔뜩 헤집어 놓아 비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 그 옆엔… 고양이들보다, 그 비릿한 냄새보다 더 익숙한 실루엣이 가로등 빛에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 …. "
변백현. 너는 날 오래도록 기다린 듯, 조금은 지친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려댔다. 지금 내 앞에 너가 있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내 왼쪽 발목이 조금씩 욱씬 거려오기 시작했다. 거의 다 잊은 줄 알았더니만, 아직 내 몸은 완벽히 기억해내고 있었다. 너 변백현을, 니가 준 사랑을, 그리고 여전히 남은 나의 연정을. 난 네가 서있는 입구쪽으로 다가서지 못한 채 우뚝 서서 너를 바라보았고 너는 내 인기척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들어버린 내 얼굴을 바라본다. 무표정. 그러나 상처 받은. 그게 나를 참 아프게 만들었다.
" …. "
" …. "
너와 나는 마주보면서도 어떠한 말도 주고 받지 않았다. 이렇게 너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왼쪽 발목이 거칠게 아파온다. 모든 신경이 내 왼쪽 발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무서워졌다. 니가, 변백현 네가 나를 크고 강한 소용돌이에 밀어넣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그대로 뒤로 돌았고 제대로 걸어지지도 않는 왼쪽 발목을 질질 끌며 너로부터 멀어지려 힘들게 올라온 길을 다시 되돌아나갔다. 그러나 곧 단단한 힘이 내 손목을 붙잡아왔고 나를 제 품에 안아왔다.
" …왜 자꾸 도망가요. "
" …. "
" 도망치지마요, 제발. "
누구의 품보다 따뜻한 너의 품에서, 누구의 목소리보다 다정한 네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린다. 너는 내게 도망치지 말라고 말한다. 나는 도저히 이 사랑을 마주할 수 없어 저 멀리로 도망치려는데 너는 자꾸 내게 인식시켜주려고 한다. 사랑, 이라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인식시켜주려고 한다. 나는 너에게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시리도록 차가운 말로 대답해줄 수 밖에.
" 가, 백현아. "
" …누나. "
" 너가 날 찾지 않으면, 나도 도망가지 않아. "
" …. "
" 그러니까 그냥 가. "
너에게는 가혹하기 짝이 없는 말이겠지만 나는 해야했다. 나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여자가 아니며, 더군다나 너에게서 받을 자격은 더욱 없는 여자였다. 내게 사랑이 존재한다면 그건 내 허벅지 안쪽을 깊숙히 지분대오는 남자들에 대한 인류애라거나, 내 지긋지긋한 생활에 느껴지는 경멸을 끌어안을 수 있는 포용력 같은, 그런 사랑만이 존재해야했다. 그리고 너에게 사랑이 존재한다면, 그건 내가 아닌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에게 향해야했다.
" …나한테 가라고 하지마요. "
" …. "
" 가란 말 하지마. 응? "
그러나 너는 나를 더 꼭 껴안으며 말해왔다. 가지말라고. 그 목소리가 참 아프다.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요, 애원했던 너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계속 네 앞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네 앞에 서서 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럴 자신이 없다는 말이 더 알맞겠다. 너로 인해 무너져내릴지도 모를 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난 네 말에도 잔인하지만 너의 품을 밀어냈고 결국 너는 순순히 밀려주었다. 허한 바람이 내 온 몸을 감싼다. 그리고 왼쪽 발목은 걷잡을 수 없이 아파온다. 널 보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왼쪽 발목은 더 이상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왼쪽 발목을 심하게 절으며 천천히 네 옆을 지나치려는데 등 뒤에서 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성장통이 아니었잖아. "
" …. "
" 그냥 지나가는 성장통이 아니었잖아요. "
" …. "
아마, 절고 있는 내 왼쪽 발목을 보며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래, 성장통이 아니야. 상처야, 흉터야, 후유야. 너의 정곡을 찌르는 목소리에, 차마 발걸음을 더 떼고 나아갈 수가 없어 그 자리에 멈춰섰다. 너는 내게 빠르게 다가와 내 두 어깨를 잡았고, 나는 삐걱거리는 왼쪽 발목에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 누나, 말해봐요. 사랑이 아니었어요? "
" …. "
" 그게 사랑이 아니었다고 나한테 말해봐요. "
" …. "
" 말해보라고...!! "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사랑이었기에. 아무 말이 없는 내 어깨를 잡은 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나는 너를 끊어낼 기회가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어떻든 무엇이 진실이든, 말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아주 모질게, 누구보다 무자비하게. 너의 마음을 도려낼 수 있도록.
" 그래, 난 널 사랑한 적 없어.."
" …. "
" 사랑하지도 않았었고, 지금도 사랑하지 않아...!! "
" …. "
"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가버려,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마!! "
내 외침이 고요한 달동네를 울렸다. 사랑하지 않아. 그 말을 힘겹게 내뱉으면서도, 두 눈에 출렁거리는 눈물이 들어찼다. 투명한 것들은 이내 얼굴 아래로 흘러내린다.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 어떤 말 보다 더 악랄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울어야할 건 내가 아니라 변백현이었음에도, 나는 눈물을 흘려내고 말았다.
" 내가 그랬잖아…, 날 사랑하지 말라고. 나같은 사람 사랑하지 말라고, 응? "
" …. "
" 사랑하면 내가 아니라, 너가 힘들거라고. 다 너가, 너가 아프고 상처 받을거라고 그랬잖아…. "
너는 그저 우는 나를 품에 안았다. 너는, 사랑을 돈으로 사고 파는 나같은 여자를 단단히도 사랑하게 된 모양이었다. 이미 내가 하는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한 듯 너는 날 품에 안고 다독여왔다. 내가 너를 어떡하면 좋을까. 너는 나로부터 멀리 떠나야하는데, 너는 너의 길을 찾아야하는데. 이 세상 가장 아래 밑바닥에서 네발로 기듯 이 세상을 기어다니는 나같은 여자는 발로 짓밟고 저 위로 올라가야하는데.
" …백현아, 너는 날 감당하지 못할거야. 응? "
" …. "
" 나는 수많은 남자들에게 사랑도, 몸도 다 바쳤던 여자야. "
" …. "
" 너는 날 감당 못해. 할 수 없어. 절대 못, "
" 못하길 바라는거잖아요. "
" …. "
" 다 감당할게요. 내가 다 감당할게. "
나지막한 음성이, 내 심장을 힘껏 내리친다. 너는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내 머릿결을 쓰다듬어준다. 안되는데, 너는 감당할 수 없을텐데… 하지만 나는 그 손길에 어쩔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고 만다. 너가 내게 저녁을 먹자고 말했던 우리의 첫 날처럼, 나는 안되는데… 를 중얼거리면서도 네 품 안에 있는 걸 밀쳐내고 도망칠 수가 없었다. 모두 다 감당하겠다는 너의 말에.
" 내가 그랬잖아요. 누나가 누구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
" …. "
" 난 그것마저 다 사랑할 수 있다고. "
" …. "
" 내가 뭐든지 다 안아줄게요. "
그래, 성장통이 아니었다. 이건 사랑이었으며, 명백한 사실이었다. 성장통으로 치부하기엔 난 이미 절름발이가 되어있었으니까. 나는 조금씩 무너져내려가고 있었다. 네 앞에 계속 해서 쌓아낸 벽이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한 때, 너는 네 옆에 누워 있는 내게 말했었다. 그러니까 누나, 나는 누나가 뭘 하는 사람이든 좋아요. 그냥 누나 자체로서요. 너는 나를 품에 더 꽉 껴안고는 마치 그 날의 너처럼 나를 불렀다.
" 그러니까, 누나. "
" …하지마. 말하지마. "
나는 네 품 안에서 고개를 저었다. 네 가슴팍이 내 눈물로 축축히 젖어간다. 너의 말은 나를 완전히 무너트리려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무너지면 안돼, 더 이상은…. 너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한번 나를 부른다.
" …누나. "
" …하지말라구… 하지마…. "
너는 네 품 안에서 애원하며 울고 있는 날 보며 생각하겠지. 누나가 졌어요, 내가 이겼어. 거봐요, 사랑이라고 했잖아요. 나는 네 부름을 들으며, 마치 들켜서는 안될 치부를 사람들 앞에서 낱낱히 밝혀지게 된 사람처럼 부정할 수 없는 심판대 위에 올라선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묘하게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너는 그런 내게 고백한다.
" 사랑해요, 누나. "
" …. "
" 내가 많이 사랑해요. "
인정해버릴 수 밖에 없겠지, 이젠. 완벽히… 네 앞에 무너져내렸다는 표현이 알맞으려나. 널 지켜려던 나는, 날 지키려던 너를 이겨낼 수 없었다. 덜덜 떨리던 다리가 점차 힘이 빠져버린다. 사랑…, 안돼 너가 아플거야. 너가 힘들거야. 언젠가는 산산히 조각나버릴거야. 너와 나, 누구에게든 상처밖에 남지 않을 사랑이야, 이건. 나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네게 말했다.
" 백현아…, 백현아. 나 무서워. 무서워, 누나…. 지금이라도 가. 응? "
" …. "
" 지금이라도 날 놔줘. 너가 아플거야, 많이 아플거야. 정말 많이 힘들거야, 백현아…. "
그래, 사랑이라면. 사랑이라도 좋으니 네 선택에 후회를 하고 도망쳐버려. 날 네 품에 껴안지 마. 너가 나를 향한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우리의 사랑이 견고해지기 전에 날 뿌리치고 가줘, 응? 널 올려다보는 시야가 뿌옇다. 쉴새없는 눈물샘 덕분인가. 너는 내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짓곤, 허리를 숙여 나와 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곤 나의 얼굴을 네 손으로 감싼다.
" 누나. "
" …. "
" 날 사랑해요? "
" …. "
" 대답해요. 날 사랑해? "
그때처럼 대답하고 싶다. 아니, 우린 잠깐의 성장통일 뿐이야. 사랑이 아니야…. 그러나 나는 이미 무너진지 오래였다. 네가 내 두 다리를 온전히 부러트리고 만 것이다. 그저 사춘기에 치부해버렸던 너의 감정은 사랑이었으니까. 나는 너의 사랑이 담긴 두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응, 사랑해. 사랑해, 백현아. 나는 널 사랑해…. 아니라고 말해야해, 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 사랑해, 백현아….
" …. "
그대로 너는 내게 입을 맞춰왔다. 따뜻하고, 포근한, 기분 좋은 입맞춤. 고통과 외로움 뿐이었던 내 인생에도 봄이 스며드는 듯 했다. 봄이 도래한다고 해서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함께 손을 잡고 들어가는 곳은, 장미 뿐인 가시덩쿨이다. 발은 아프고 따가울 것이며 가끔은 후회도 할 것이다. 그냥 들어오지 말걸. 그저 옆에 나있는 삭막한 시멘트 길을 혼자 걸어 가는게 나았을텐데. 그러나 너와 함께 만개한 장미꽃을 볼 수만 있다면 발바닥에 피나는 것 쯤이야 참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너와 함께라면 견뎌내볼 수도 있을 것 같아. 장미보다 더 아름다운 너와 함께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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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Shades of cools
작가는 해피엔딩 지향자입니다. 끼륵끼륵. 부제가 조금 과격했지만(민망) 암호닉은 따로 받진 않지만 말해주시면 기억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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