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로망, 클리셰
W. 백빠
김준면; 학생회장은 천사였다.
언제나 점심시간의 급식실은 시끄러웠다. 반드시 점심을 존나 빨리 먹고 축구를 하러가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스무명 남짓한 축구부들이 우르르 새치기를 해댔고 똥꼬치마를 입고 숨쉴 틈 없는 바지를 입은,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일진 아이들은 씨발 줄 존나 기네. 야 우리 먼저 좀 먹는다? 미안~ 찰진 욕과 되도 않는 미안을 붙여 일반 학생들을 위협했다. 아. 기다리는 시간은 늘어만 가는데 줄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 저 멀리 새하얀 김준면 선배가, 그러니까 학생회장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러자 똥꼬치마들과 0통 바지들은 뭐야 씨발 천사새끼 왜 갑자기 급식 먹어? 하며 잔뜩 짜증난 얼굴로 줄에서 빠져나와 제일 맨 뒤로 향했다. 아직 김준면은 걸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스무명 남짓 한 축구부 아이들 중 열번째 학생이 급식을 받고 있을 때, 나머지 열명은 가까워지는 김준면을 보자마자 눈치를 보더니 마찬가지로 맨 뒤로 향했다.
뭐, 다행히 그 덕분에 급식실은 어느정도 질서를 찾았다. 김준면은 그저 웃는 얼굴로 아이들을 쓱 훑으며 말할 뿐이었다. 다들 질서 잘 지키네, 착하다.
학생들은 김준면의 말을 잘 따랐다. 좋아했다. 신뢰를 주었고, 존경했다. 그는 언제나 누구에게라도 나쁜 말 한번 한 적도 없었고 부당한 대우를 한 적도 없었으며 학교도 잘 이끌어나갔다. 항상 학생들의 말에 귀를 귀울였으며, 권선징악이라는 말을 몸소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질이 나쁜 학생들은 바로바로 징계를 내렸다. 하얀 얼굴을 한 그는, 우리학교의 천사였다. 우리들은 그를 지칭하는 은어로 천사라고 불렀다.
그의 철저한 학교 운영에 있어 반항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끝내는 하지 못했다. 우리가 그의 말을 잘 듣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바로 김준면의 권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학교' 라는 곳에서 권력이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애매하긴 하지만,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닌 것이 그는 우리 학교의 또 다른 교장 선생님이나 다름 없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학생들에게 마음대로 벌점을 주고, 정학을 먹이고, 퇴학 처분까지 할 수 있는. 왜냐고? 그야 당연히 돈 때문이었다. 돈. 우리 학교의 체육관, 급식실, 탈의실, 인공잔디까지 모두 김준면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아버지 때문에 생길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학교의 먹이사슬은 학생→선생→교장=김준면→김준면 아빠였다. 그러나 김준면은 손에 쥐어진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다. 나쁜 놈들에겐 벌을, 착한 놈들에겐 칭찬을.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의 별명은 천사였다.
그의 등장 덕분인지, 아까보다 급격히 줄어든 줄에 나와 친구는 금방 배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 왠일로 급식실에 왔지, 준면 선배 원래 급식 잘 안 먹는데….
" 어, 초코우유 나왔다! "
" 그러게. 니가 환장하는거 나왔다, 야. "
" 알면 하나 기부 하시죠. "
" 꺼지세요. "
급식에 초코우유가 나왔다. 어쩐지 오늘 급식실 분위기가 밝더라. 그게 다 초코우유 때문이었어. 친구는 꺼지라는 내 말에 울상을 짓는다. 나는 급식판을 들고는 시끌벅적 거리는 급식실을 둘러보는데, 저기 구석 쪽에 6인용 자리가 통째로 비어있다. 이야, 이런 기회 흔치 않는데. 원래 지금때쯤이면 다 먹어가는 애들 옆에서 넋 놓고 기다리지 않는 이상 자리차지 하기 힘들거든. 나는 누가 먼저 채가기라도 할까, 재빨리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곤 얼른 식판을 놓곤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 대박, 오늘 운 존나 좋다. 한참 기다리나 싶었는데. "
" 그러니까."
" 야, 오늘 밥도 잘됐어. 개찰짐. "
" 너는 뭐든지 다 맛있다고 하.. 에- "
성미 급한 나는 얼른 밥부터 입에 떠넣고 우물우물 거리는데, 친구가 에- 하며 내 뒤를 바라본다. 뭐야, 내 뒤에 뭐 있어? 궁금함에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급식판이 내 옆자리에 턱, 하니 놓인다. 그리곤 우리 옆에 잠깐 비어있던 나머지 네자리가 순식간에 찼다. 익숙한 향수 냄새에 옆을 바라보았고,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준면 선배였다.
" 어, 안녕하세요. 선배. "
" 뭐야, 너였어? 어쩐지 뒷모습부터가 예쁘다했더니 총무 너였구나. "
" …부끄럽네요. 감사해요. "
" 오늘 학생회 있는거 알지? 늦지 말고 꼭 와. "
" 네, 선배. 안늦을게요. "
김준면은 그래, 맛있게 먹어. 예쁜 총무. 하고 웃어주었다. …언제봐도 참 잘생겼구나. 좋겠다. 돈도 많고 잘생긴데다 성격까지 좋아서. 결점이 없네, 결점이. 아참, 아무것도 아닌 학생인 척 했지만 사실 난 학생회에서 드는 금전적인 부분을 총괄하고 있는 총무부 부장이다. 줄여서 그냥 총무라고 부른다. 아무래도 학생회에선 돈이라는게 중요하기도 하고, 거론되는 횟수도 많다보니 학생회장과도 교류가 많은편이다. 그러니까… 뭐, 나름 친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학생회 내에서겠지만.
처음엔 옆에 있는 준면선배를 약간 의식해서 말 없이 밥만 먹었다가, 정작 선배는 우리 쪽에 신경도 쓰지 않고 일행들끼리 이야기를 하길래 나 또한 친구와 재잘재잘 말을 주고받으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친구가 밥을 먹다 무언가 생각난 듯한 얼굴로 말했다. 마치 유레카를 외치는 듯한 얼굴이었달까.
" 아, 맞다! "
" 아씨, 깜짝이야. 왜? "
" 너 그거 들었냐? 조온나 대박사건인데. "
" 나 그런 정보 느린거 알잖아. "
" 너 이거 들으면 진심 지릴 수도 있어. "
이슈 같은건 원래 관심 없는데, 그렇게까지 말하니 궁금하긴 하네. 그 조온나 대박사건이라는 게 뭔지, 친구의 말을 기다리는데 답지 않게 뜸을 들인다. 음, 뭐랄까. 자기가 무슨 비밀리에 활동하는 007 요원이라도 되는 마냥 주위를 살피면서. 나를 제외하면 누구 한명 듣고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대체 뭔데 그래, 한번 재촉하자 친구가 속삭이는 투로 말한다.
" 어제 음악실에서… 콘돔 나왔대. 다 쓴거. "
" …우엑. 미친. 그걸 누가 발견했대? "
" 1학년 음악실 청소 담당하는애. 쓰레기통 비우다가 알게 됐대. "
" 걘 그게 콘돔인 줄 어떻게 안거야? 눈썰미와 음란함이 장난이 아니네."
" 여튼, 지금 그게 누구 짓인지 밝혀내려고 애들이 눈에 불을 켰어. "
" 와, 그나저나 간도 크다. 어떻게 음악실에서 그 짓을 하냐. "
" 그러니까.. 일학년 걔도 발견해놓고 민망한지 선생님한텐 말 안하고 애들한테만 했더라고. "
" 하긴, 음악실에서 그걸 알아본 것도 웃기고 나왔다고 쌤한테 이르는 것도 웃기다. 나같아도 절대 못, "
" 음악실에서 뭐가 나와? "
우리의 쉴새 없는 대화에 뜬금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준면선배였다. 내 옆에서 자신의 친구들과 이야기하느라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줄 알았더니만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아까부터 우리 둘을 힐끗대는 시선이 느껴지더라. 나는 당황한 얼굴로 준면 선배를 바라보았다. 뭐가 나왔는데? 궁금함을 얼굴에 써놓은, 하얀 피부의 학생회장. 당황한 것은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준면선배는 내 친구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 …어, 그게, 그러니까요. "
" 응, 그게. "
" 음악실에서어… 그러니까… 그…. "
" 괜찮아, 말해봐. "
" 다 쓴 콘…돔이… 나왔대요. "
친구는 자기가 말하고도 쑥쓰러운지 고개를 푹 수그린다. 하긴, 열여덟살 아직 꽃도 안 핀 새싹들이 대놓고 말하기엔 콘돔은 꽤 민망한 단어였다. 게다가 잘생긴 남자에게 말하기엔. 나도 어딘가 부끄러워 곁눈질로만 선배를 힐끗 댔는데 김준면은 아주 웃기게도,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이 아닌, …그러니까, 진짜 웃겨서 웃는 웃음이라고 해야하나. 그 웃음에 난 당황했다. 내가 예상한 그의 반응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웃음은 작고 낮았기 때문에, 고개를 숙인 친구는 물론 저 옆에서 자기들끼리 신나게 대화를 주고받는 김준면의 친구들까지도 보지 못했다. 오로지 나만이, 그 웃음을 볼 수 있었다. 김준면은 곧 다정한 얼굴과 친절한 목소리로 아직도 부끄러워하고 있는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 말해줘서 고마워. 누가 발견한건지도 알 수 있을까? "
" 어, 일학년 음악실 청소 담당이래요. "
" …그렇구나. 고마워. 앞으로 단속 잘해야겠네. "
나는 여전히 김준면의 이유 모를 웃음에 생각이 빠져있었다. 왜 웃었을까. 무슨 마음으로 웃었을까. 이 일에 관련이 되어있는걸까? 그 생각에 빠져 밥을 깨작댈 동안 준면 선배는 금새 다 먹었는지 일어날 채비 중이었다. 그때 정신이 버적 들어 안녕히가세요, 선배. 인사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자신의 초코우유를 내 앞에 놔두었다. 맛있게 먹고, 조금 이따가 보자.
" …. "
" …야, 이정도면 너 좋아한다는 뜻 아니냐? "
" 초코우유 싫어하나보지. "
" 이걸 싫어하는 미친놈이 어딨어. "
" 준면선배 원래 착해. "
" …음. 그 말은 일리가 있네. "
나 지금 막 느꼈어. 무지 착한사람이란걸. 배려와 관용이 솟구치는 사람이란 걸…. 열여덟, 소녀의 가슴엔 금새 콘돔이란 이질적인 단어는 잊혀지고 있었다. 정말 착하고 바른 사람이야, 학생회장은. 다음 날, 그 일은 바로 학생부쪽에서 교내 풍기문란에 대해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해프닝이 끝이 났다. 더불어 한국인은 한국인인지 다들 냄비근성 하나는 타고난 바람에 아이들의 관심은 또 다른 것으로 돌려졌다. 더 이상 음악실이라는 말을 들어도 콘돔이라는 단어가 따라나오지 않을 때 즈음, 나는 원치 않게 그 일의 주인공을 알게 되고 말았다.
3학년과 2학년은 음악시간이 없었고 1학년만이 음악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2층 안 쪽 구석에 있는 음악실은 눈에 띄게 왕래가 적었다. 게다가 음악실이라고 해봐야, 피아노 한대에 교회 의자 열개 정도가 비치되어있는 좁은 공간이어서, 아무리 음악에 관련된 동아리나 진로를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피아노가 있는 강당으로 향했으면 향했지 음악실에 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 때는 커플들의 메카, 핫 플레이스로 손꼽히기도 했지만 선생들이 풍기문란으로 단속을 시작하자 핑크빛 음악실은 다시금 회색의 침침한 곳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점차 모든 이들의 발길이 뜸해진 음악실은 오전에 두세타임을 빼곤 사람의 왕래가 아예 없는 곳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음악실에서 섹스를 할 생각을 했다니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안타깝게도 음악실에서 콘돔이 나온 이후, 급식실에서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김준면 덕분일지도 모르겠으나 음악실에 대한 규제가 엄격해졌다. 방과 후 사용 금지, 쉬는 시간, 조회시간, 점심시간을 포함한 모든 수업시간에 남녀 단 둘이 사용 금지, 음악실 관리는 학생회에서. 그렇게 음악실은 금단의 구역으로 정해져버리고 말았다. 나조차도 2학년이 된 지 반년하고도 삼개월이 지났지만 단 한번도 음악실 근처에 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그 음악실을 가게 된 건 어느 1학년 아이 때문이었다.
내가 학생회실 마무리를 맡은 날이었다. 확인 차 들렀는데 문 앞에 어떤 1학년 학생이 치마임에도 불구하고 쪼그려 앉은 채 한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의아했으면서도 그게 나는 아니겠지- 하며 무시하고 문을 여는데.
" …어? 어! 저기요, 언니! "
" 응? 나? "
" 네! 언니 학생부 맞으시죠? "
" 응, 맞는데. 왜? "
오늘은 야자가 없는 날인데다 내일은 토요일이고 더불어 내가 나온 시간은 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나온, 일곱시 남짓 한 늦은 시간이라 만약 나를 기다렸다면 오래 기다린 것이 분명했다. 내 대답에 아이는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다가도 어느새 우물쭈물 소심하게 말을 꺼낸다.
" 저기.. 혹시.. 죄송한데.. 음악실 좀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 "
" 음악실? "
" 네.. 제가 휴대폰을 두고와서요. 언니가 잠깐만 열어주시면.. "
" 아… 알겠어. 여기서 잠깐 기다릴래? "
주말 이틀 동안 휴대폰 없이 지내는 건 내가 생각해도 끔찍한 일이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회실로 들어가 구석탱이 쪽에 열쇠들이 집합해있는 찬장으로 다가갔다. 어디보자, 음악실키가… 음악실키… 음악실… 뭐야. 음악실 키가 없어. [ 음악실 ] 이라고 쓰여있는 아래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았다. 혹시 다른데 걸려있나 확인해보았지만 역시나 없었다. 아오씨, 귀찮은 일이 생겨버렸구만. 일단 가방을 아무데나 내려놓고는 1학년 아이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후 나 혼자 음악실로 향했다.
정말 구석진 곳에 있구나, 음악실. 끝 코너를 돌자 저 구석에 음악실이 보인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나저나 키가 없을리가 없는데 어딨지…. 누가 잃어버렸나. 설마 지금 이 안에 학생회 중 누군가가…? 나는 문고리에 손을 올려 조심스레 돌려보았다. 잠겨있지 않은 문. 끼릭 거리는 소리가 나지않게 아주 살살, 아주 약간 문을 열어재꼈다. 키를 잃어버린걸꺼야, 하고 바랬던 내 바람과는 달리 누군가의 목소리가 문 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 …응으, 오빠아… 문, 문은 잠구고, 하으! "
" 괜찮아. 여기 어차피 아무도 안와. "
적나라한 신음소리. 이건 완전, 우리 지금 섹스해요! 라고 광고해대는 꼴이잖아! 게다가 남자의 목소리는 누군지 알 수 있을만큼 확연했다. 김종인. 학생부에서 체육부장이던가. 나는 아이처럼, 엿들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열린 아주 작은 틈 사이로 남녀의 부끄러운 소리들을 듣고 있었다. 몰라, 나도. 왜 여길 못 떠나는지. 그럼 예전에 여기서 콘돔 나왔다던거… 쟤꺼였어? 김종인?
" 오빠아… 누가 보면 어쩌려구우… 걸리면 큰일나는데에…. "
" 몰라, 여기만큼 안전한데도 없어. 김준면이 떡칠라고 음악실 아무도 못오게 만들었잖아."
" …으읏, 준면 선배 집에 안갔을텐데… 우리 들키면 혼나…. "
" 알빠야. 떡은 지도 치면서 남 치는 것도 이해해줘야지. "
…. 학생회장의 이름이 나왔다. 더 무언가를 듣고 싶었지만 이후로는 신음소리만이 난무하게되었고 나는 둘의 대화를 곱씹으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음악실을 금단의 구역으로 만든 건 김준면이 섹스를 하기 위함이었다는거야? 그럼, 설마 그 콘돔의 주인이 준면선배…? 이럴 때만 빠르게 돌아가는 머리, 말도 안되는 정리에 나는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마, 말도 안돼! 뭔가, 뭔가 이건 내가 얽혀서는 안되어야 할 일인 것 같아. 나는 그저 조심히 작게 열어재낀 문을 닫았다. 1학년아, 미안하지만 주말동안은 책도 좀 읽고 영화도 좀 보고 하렴. 미안하구나.
그렇게 내가 살금살금 뒤를 돌았을 때였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을까. 준면선배가 내 뒤에 있었다.
" …. "
" 여기서 뭐해? "
웃는 얼굴의 준면선배를 보자마자 등에 소름이 돋아났다. 언제부터 이 곳에 있었을까. 왜 여기에 온거지? 저 안에서 하는 말을 듣기라도 했을까. 순식간에 피어오르는 오만가지 생각에 어색한 목소리와 웃음으로 선배- 부르며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음악실 쪽으로 다가오면 신음소리가 들릴지도 모르니까. …이미 들은걸까?
" 음악실엔 무슨 일이야? "
" …저어, 그게… 누가 음악실에 휴대폰을 두고 나왔다고 해서…. "
" 그랬구나. 그런데 왜 앞에 서 있었어? "
" 네? 저… 그게… 못찾아서 다시 한번 찾아볼까 고민하던 중이었어요."
" 같이 들어가서 찾아줄까? "
" 아, 아뇨! 아뇨, 아뇨, 제가 혼자 찾을 수 있어요. 서, 선배님은 어쩐 일이세요? "
누가 안에서 섹스를 해서 구경하느라구요- 라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니 대충 핑계를 댔는데, 오히려 덫을 놓은 격이 되고 말았다. 같이 찾아준다니. 이렇게 착한 사람이 음악실에서 그 짓을? 아마 저 사람들이 준면선배를 부러워해서 만들어내는 말도 안되는 소문들뿐일거야. 다행히 그는 내 뒤에서 음악실에서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 듯 했다. 이와중에 안도감을 느끼며 여긴 어쩐일이시냐며 말을 돌렸는데 그가 작게 웃으며 되묻는다.
" 나? "
" 네. 시간도 늦었는데 여긴 어쩐 일로…. 뭐 확인하러 오셨어요? 아니면 선배님도 두고온 거 있으신가? "
말을 무조건 길게 해야만 했다. 그냥, 왠지는 몰라도 일단 안에 있는 두 사람이 큰 일을 끝내야할 것만 같았다. 여전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준면선배를 바라보는데, 그가 앗, 이건 너무 가까운데- 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곤 내 어깨에 두 손을 올리더니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한다. 그의 하얗고 조각 같은 얼굴, 그리고 그 안의 깊은 두 눈이 나를 마주한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유 모를 위압감 때문이었다.
김준면은 웃으며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 왜 모르는 척 해. 다 들었으면서. "
" …. "
" 김준면이 떡치려고 음악실 못오게 만들었잖아-. "
" …. "
" 그럼 내가 여기 왜 왔을까? "
다시 한번 소름이 돋는다. 등 뒤 뿐만이 아닌 온 몸에. 털 끝까지 쭈뼛 서는 느낌에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지만 그는 나를 따라오듯,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다. 아까 말했듯 복도 끝에 위치한 음악실, 곧 단단한 콘크리트 벽에 등이 부딫쳤다. 김준면이 내 앞에 선다. …그가 이렇게 컸었나. 무언가 나를 위에서 꾸욱, 누르는 것만 같다. 이건 다른사람이야. 준면선배가 아니야, 다른 사람이야.
" 저, 저는… 아무, 아무것도 못들었어요…. "
" 자꾸 거짓말하네. 거짓말은 나쁜건데. "
" …. "
" 아까도 문 앞에서 관음하고 있었으면서 거짓말 했어. "
" 아, 아니에요, 그게, 그게 아니라, 저는…, "
휴대폰을 찾으려고 했던거에요-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헙- 하고 다물어졌다. 김준면이 내 쇄골 위로 얼굴을 묻어왔기 때문이었다. 내 머릿결 사이로 손을 넣어 뒷통수를 받친 후 나를 품에 안 듯, 나의 쇄골과 가슴팍 중간 즈음에서 고개를 묻곤 숨을 크게 들이마쉬는 그. 간질거리는 느낌이 온 몸을 감쌌다. 그는 중얼거린다.
" 하으… 좋은 냄새나. "
" …서, 선배니임…. "
" 아까 한 애는 향이 별로였거든. "
그는 고개를 들곤 소년처럼 웃어보였다. 그리곤 제 주머니에 짤랑, 거리며 들어있던 키를 눈 앞에 흔들어보인다. …음악실키였다. 언제인진 모르겠지만 오늘도 다른 여자와 그 짓을 한 모양이었다. 문을 잠그러 온 것 같은데, 그 앞에 내가 있었고 지금 김준면은 그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다. 말도 안돼… 무서워, 도망치고 싶어, 이건 아니야…. 그가 내게 속삭인다.
" 들킨 김에 하지, 뭐. "
" …네? "
" 비밀로 해주겠다는 약속으로. "
뭐라 대답도 하기전에 김준면은 내 교복 첫 단추에 손을 가져다댄다. 눈 깜빡할 새에 풀어버린 첫 단추. 나는 질겁하며 그의 커다란 손을 벌벌 떠는 두 손으로 붙잡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눈물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울상인 얼굴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안돼, 절대 안돼, 절대로. 거의 울듯한 목소리로 애원하는 나였다.
" 이러지 마세요…, 비밀로 할게요, 하지마세요, 저 무서워요, 선배님…. "
" 무서워, 내가? "
" 네, 무서워요, 꼭 비밀로 할게요, 그러니까 선배님… 하지 마세요…. "
" 하지마? "
네, 제발요, 제발… 이번엔 고개를 다시 끄덕였다. 김준면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눈꼬리 끝엔 눈물을 방울방울 단 채, 김준면의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잡곤,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김준면은 볼 아래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곤, 머리를 내 귓가로 넘겨주었다. 내 턱 끝을 살짝 잡는 김준면. 그리고 웃으며 말한다.
" 내가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야. "
" …읍. "
그대로 김준면의 입술이 거칠게 맞닿았다. 지르려던 비명이 그의 입술에 머금어져 들어갔다. 그의 손을 잡았던 두 손으로 가슴팍을 퍽퍽 쳐냈지만 오히려 김준면은 나의 두 손을 싸잡아 한 손으로 단단히 결박했다. 여기가 학교 복도라는 사실도 잊은 모양인지, 김준면은 혀로 내 입 안을 잔뜩 헤집어놓고 와이셔츠 단추를 끝내 끝까지 풀어버린다. 하얀 나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덜컥, 하고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음악실이 열린 모양이었다. 김종인과 여자애가 나왔고, 김준면은 잡은 내 손목을 질질 끌곤 음악실 안으로 향했다. 김종인은 음악실 안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곤 픽- 웃으며 중얼거린다. 저정도면 강간수준인데. 김준면은 날 끌고 들어가면서도 주머니에 있던 음악실 키를 김종인에게 던졌고 김종인은 친절히 문까지 잠궈주곤 음악실을 나가주었다.
나는 선택의 여지 없이 덮개가 덮힌 평평한 피아노 위로 눕혀져야했다. 그리고 김준면은 내 위로 올라탔고. 무너지면, 망가지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전에 그가 다시 내 입술을 물어왔다. 내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자신의 다리로 단단히 결박 한 후, 그는 날 우악스럽게 일으켜 나시를 벗겨냈다. 민망한 속옷이 드러났고,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는 벗겨낸 나시로 눈물이 줄줄 흐르는 내 얼굴을 천천히 닦아주었다.
" 왜 자꾸 울까. 하고싶어서 구경했던 거 아니었어? "
" 그만…흐으,… 저 처음… 처음이에요…하으… "
" 처음이라고? "
" …네… 한번도, 흐끅, 안해봤어요… 흐, 하지마세요…. "
" 그렇게 안 생겼는데, 너. "
" 지, 진짜에요… 흐… 진짜로… 처음… 흐끅… "
" 아으. 씨발, 처음이라니까 더 꼴린다. "
김준면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처음이라니까 더 꼴린다. 점점 내 다리 사이를 짓누르는 그의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김준면은 손에 쥔 나시를 바닥에 던져버리곤 입술로 내 목선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한다. 나는 두 눈을 꽉 감아버렸다. 그의 손길과 입술이 내 온 몸을 향유하는데 문득 나는 어디선가 휴대폰 벨소리를 듣는다. 곧 이어 음악실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언니, 언니 여기 있어요? 언니…! 그러나 그 소리들은 저 멀리로, 아득히 멀어져만간다.
그저 꿈이길 바랬지만, 나를 범하는 이 남자가 천사라 불리우는 학생회장이 아닌 다른 누군가이길 바랬지만 어떤 것도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은 없었다. 내 머릿 속에 정리되어있던 문장, '김준면은 천사다' 그 문장이 산산조각 흩어진다. 김준면은 천사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모두 그렇다하더라도 더 이상 내겐 아니었다. 천사가 아니다. 그는 뭘까. 끊임없이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나는 중얼거린다.
김준면은 천사-였-다, 김준면은 천사-였-다… 학생회장은 천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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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PARIS
오늘편은 정말 수위를 쓰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애초에 수위 없는 시리즈로 시작했으니까요..(후우) 근데 사실 수위 쓰라고 하면 또 잘 못써요ㅎ
암호닉은 따로 받고 있진 않지만 기억은 해둘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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