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로망, 클리셰
W. 백빠
변백현; 탐욕, 엄마와 아들
열려오는 현관문 소리.
나는 그 소리에 고무장갑을 벗어놓곤 현관문 앞으로 쪼르르 달려나간다. 힐끗 본 시계는 어느덧 새벽 3시를 가르키고 있다. 어디서 뭘 하는지, 아침 일찍 나가 새벽이 되서야 들어오는 너다. 현관문 앞에는, 신발을 벗고 무표정의 얼굴로 들어오는 네가 보인다.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맘에 대충 머리를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느라 옷자락에 묻은 물기를 툭툭 털어본다. 그리고 애써 환하게 웃어보이며 너에게 말을 걸었다.
" 백현이 왔어? "
" …. "
" 밥은 먹었고? "
여전히 너는 대답이 없다. 그래, 이렇게 내쳐질 것을 알면서도. 혹시라도 오늘은 대답해줄까 싶어서 물어보았지만 오늘도 역시나, 대답해주지 않을거란 내 예상이 빗나가는 일은 없었다. 넌 나를 무심히 지나쳐 복도 끝 방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쾅, 하고 닫혀지는 문소리가 매섭다. 그러나 나는 그 문에 대고 크게 말했다.
" 백현아, 혹시라도 배고프면 말해! 알겠지? "
이 커다란 집에 내 목소리가 메아리 쳐 돌아오는 것만 같다. …저렇게도 내가 싫을까. 이제는 어느정도 마음을 열 법도 하건만. 벌써 내가 이 집에 들어와 산지도 넉달이 넘어가고 있었고, 이제는 나의 끈질긴 구애에 조금은 마음을 열 때도 되지 않나 싶지만 너는 나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사람 취급 조차 해주지 않는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싱크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래도 내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요즘은 네가 집에 들어오긴 한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출장을 자주 나갔고 덕분에 이 커다란 저택에 단 둘만 남게 되는 일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백현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저번달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이제는 새벽이든 언제든 집에는 들어와주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난 위로가 되었다.
난 왜 너가 나를 이리도 끔찍히 싫어하는지 아주 잘 안다. 오십이 넘은 자신의 아버지와 재혼을 한 26살의 어린 여자. 징그럽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는 늙고 돈이 많았으며 여자는 젊고 예뻤다. 누가 봐도 알만한 비정상적인 관계였다. 나는 너와 4살 차이였고, 너는 4살 차이의 새 엄마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물론 내가 그에게 엄마 취급을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에 욕심이고 그저 사람 취급은 해주었으면- 하는게 내 바람이었지만 그것마저도 그는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철저히 무시했다. 아주 철저히. 마치 내가 네 친엄마를 죽인 사람마냥.
그저 나는 돈이 필요했고, 네 아버지는 젊음을 원했고, 네 어머니는 자살했을 뿐이잖아. 애초에 너네 부모님은 사랑이 없는 관계였고, 그래서 네 엄마는 괴로웠고 아버지는 일년이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여자를 찾아 나섰을 뿐이야.
네가 방에 들어가고 나자 또 다시 집 안은 적막으로 휩쌓인다. 백현이에게 말을 걸 이유 같은 것들을 생각해내본다. …아, 빨래. 나는 백현이의 방 앞에 서 방문을 똑똑 두드린다.
" 백현아, 혹시 빨래 할 거 없어? "
" …. "
" 백현아? "
누군가 본다면, 싫다는 데 왜 자꾸 들러붙어?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백현과 사이가 좋아져야만 했다. 니 아빠가 또 다른 여자를 데려오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날 이 집에서 살게 해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 끊임없이, 계속해서 너가 나를 억지로라도 받아들이게 만들거야.
역시나 백현은 말이 없다. 그냥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어차피, 대답을 해줄거라는 기대는 없었으니까. 문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돌리려는 그 찰나 문이 벌컥, 하고 열린다. 순간 깜짝 놀란 내가 두어걸음 뒤로 물러섰고, 문을 연 너가 냉랭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너에게 다시 한번 묻는다.
" …어, 너 혹시 빨래할 거 없나해서. "
" 내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지. "
" …미안. 아, 오늘 네 방 청소 좀 해봤는데, 어때? 깨끗하지 않아? "
" 역겨워. 니 엄마노릇. "
" …. "
" 지겹지도 않나. "
귀찮게 굴지마, 라던가 몰라, 시끄러워. 라고만 말해줘도 나는 아마 이렇게까지 상처받지 않았을 것이다. 뭐, 험난할거라 예상한 길에 자진해서 들어온 입장이니 무슨 대우를 받든 할 말은 없다만, 사람이 정성을 들이면 좀 받아줄 순 없나. 저 두터운 철벽을 뚫을 수는 없는걸까. 그는 오늘도 상처받은 내 옆을 무심히 지나쳐간다. 그래도,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백현아, 나 지겹지 않아. 나는 백현이 나간 방 안을 휘, 한번 둘러본다. 빨랫거리는 아직 없네, 다행이다. 그리고는 얼른 지나쳐갔던 너의 뒤를 따라갔다.
" 네 아버지 모레 오신대. 그날 저녁에 시간 비워놔, 같이 외식하자."
" …. "
" 아, 맞다. 다음주에 네 아버지 생신인거 알지? "
부엌으로 향한 너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나는 그 옆으로 다가가 너에게 웃으며 말해본다. 그 날 외식도 하고, 같이 말도 더 나눠보다보면 사이가 조금 나아질지도 몰라. 그 사이에서 내가 네 엄마이고, 아버지의 부인이라는 걸 약간은 인정할 수도 있겠지. 4살 차이 나는 주제에 엄마 노릇을 한다고 너는 날 비웃지만 나는 어쩔 수 없어. 그게 내 생존 방식이야. 이 집에서 살아남기 위한, 너를 내 아들로 만들어내기 위한.
" 나는 넥타이 사주려고. 아들은 뭐 사줄거에요? "
" …아들? "
물을 마시던 네가, 순간 물병에서 입을 떼곤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너무 다급했나. 그래도 나름 장난스런 목소리로 말했는데. 여기서 주눅들면 엄마고 뭐고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백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웃으며, 장난인 듯 아닌 듯.
" 응, 아들. 넌 아들, 난 엄마. "
" …. "
네 눈동자가 날카로워진다. 사랑 없는 집안 속, 아버지의 사랑은 고사한 채 엄마의 메말라가는 사랑을 겨우겨우 빨아먹으며 살았어서 그런가, 엄마라는 말에는 꽤나 강렬히 반응한다. 턱없이 부족한 사랑에 헐떡이던 외로운 옛 기억, 제게 미약하나마 사랑이란 걸 줬던 것은 엄마 뿐이었기 때문이겠지. 살갗을 아리게 만드는 네 눈빛에 나는 굴하지 않고 한번 더 네게 말했다. 각인시켰다. 세뇌시켰다.
" 왜 그렇게 봐? 맞잖아, 엄마. 내가 네 엄마잖아. "
" …미친년. "
너는 화를 많이 참고 있는 듯, 욕을 중얼거리더니 손에 들려있던 물통을 냉장고 안으로 거칠게 집어넣는다. 너는 날 더 상대하다간 폭발할 것 같은지 나를 지나쳐가려고 한다. 아니, 안돼. 이렇게 조금의 실마리가 나온 이상 내게 욕을 하던, 날 때리던 실낱같은 희망 한줄기는 보고 넘어가야겠어. 나는 가려는 네 앞을 막고 백현의 눈을 바로 쳐다본다.
" 알아. 너 나 미워하는거. 나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다 알고. "
" 알면 거슬리지 좀 마. "
" 근데, 나 이정도면 할만큼 했고 그건 너도 인정할거야. 엄마취급 안해줘도 좋아, 그냥 사람취급만 해달라는데, 그것도 힘들어? "
" 꿈도 크네. 뭐? 사람취급? "
" 못 바랄거 바라는거 아니잖아. 내가 네 아버지랑 재혼한게 잘못이야? 내가 너네 엄말 쫒아내기라도 했어? "
" ...그 더러운 입에 누굴 담아. 뚫린 입이라고 못하는 말이 없네. "
" 너 이젠 안되겠어. 나 엄마라고 불러. "
" 씨발, 그 입 안닥쳐? "
난폭한 언어들이 네 입을 타고 흐른다. 나는 꽤 견고하게 네 앞에 서있다. 네 눈빛은 이제 소름이 돋다못해 몸서리가 쳐질만큼 잔인하다. 온갖 욕을 하는 네 입보다, 내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고 갈기갈기 찢어내는 것은 네 눈빛.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네게 다시 한번 말했다.
" 응, 나 못 닥쳐. 나 네 엄마 맞아. "
" …. "
" 그러니까 엄마라고 불, "
눈 앞이 하얘지면서 내 고개가 돌아갔다. 퍽, 같은 둔탁한 소리가 났던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힘이 풀린 다리에 털썩 넘어졌다. 니가 날 때렸다. 뺨을 쳤다. 때려도 상관 없을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막상 뺨이 돌아가니 볼과 귀가 얼얼한 것은 물론 서러움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웃겼다. 도발한건 난데. 너를 끝까지 몰아붙인건 난데.
" …. "
" 아윽…. "
너는 넘어진 내 위로 다가와 내 머릿채를 강하게 쥐어 제 얼굴 앞으로 끌어당긴다. 마주치는 네 눈동자, 너에게 손찌검을 당했다는 허탈감, 끝내 널 여기까지 몰아붙인 성취감, 많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섞여나온다. 나는 손을 들어 가까이 와있는 백현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아마 너는 이런 날 미쳤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 자, 이제 엄마라고 해봐. 응? "
이제는 일종의 오기이기도 했다. 나는 어릴 적 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엄마가 일찍이 집을 나갔고, 그때부터 쌓아왔던 '엄마' 라는 존재의 갈망에 나 또한 '엄마'라는 말에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 역시 엄마, 라는 단어에 눈동자가 격하게 요동을 친다. 이제는 어떻게 되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더한 욕을 듣던, 네게 죽을듯이 맞던…. 네 아래에 이리 깔려있으니 묘하게 색정까지 느껴진다. …네 아버지가 아닌 너를 찾아헤맸어야했나. 등에 닿는 차가운 마룻바닥. 차가웠다. 온 몸에 솜털들이 곤두섰다. 차가워, 내 등에 닿는 바닥, 네 눈빛, 네 손길, 모두 다.
" 니가 내 엄마라고? "
" 그래, 엄마. "
니가 내 말에 작게 실소를 터트리더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 커다란 손에 잡힌 머릿채 때문에 머리가 얼얼히 아파왔지만, 금새 우악스레 부닺치는 네 입술에 나는 그런 아픔 따위 쉽게 잊을 수 있었다. 너가 내 입술을 거칠디 거칠게 물어온다. 분명 내 두 손은 자유로운데 어찌 저지할 수 없을 정도의 입맞춤. 한 손으론 내 턱을 마구잡이로 벌려 혀까지 섞어내었다. 내 혀를 강하게 옭아내는 네 입술에 발 끝이 찌릿해져온다. 이젠 내가 입은 티셔츠까지 말아올리고 있는 너다. 너는 금새 내 가슴 둔덕을 움켜쥔다.
" 아읏…!"
" 누구 맘대로 니가 내 엄마야. "
" …아, 아파, 아파, 백현아…. "
" 씨발, 누구 맘대로, 어?! "
" …. "
날 다루는 네 손길은 투박하고 거칠다. 아팠다. 그러나 내 앞에서 울부짖듯 말하고 있는 네 모습이 더 아파보여 나는 정작 더이상 아프다고 말하지 못했다. 내 온몸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가시를 단 네 눈빛. 네 손이 머릿칼을 파고들어와 단단히 쥔 내 머릿채보다, 손 안에 가득 쥐고 쥐어짜듯 잡은 내 가슴보다, 너의 눈빛을 받아내는 일이 나는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다.
" …배, 백현… 아으…, "
" 너 같은 년이 대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알아? "
" …. "
" 돈 많은 새끼들이면 다 대주는 창년이 대신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이 씨발년아…!! "
분명 너는 나에게 화를 내고 있었는데, 내게 성을 내고 있었는데 나는 무섭지가 않았다. 눈물이 핑 돈다. 나를 창년이라고 말하고, 나는 절대로 저의 엄마가 될 수 없음을 사납게 이야기해왔지만 나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네 눈이 너무 슬퍼보여서. 그리고 너는 아무런 애무도 없이 나를 범해왔다. 아주 거칠고 험악했다.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 너를 감싸 안았지만 너는 그마저도 할 수 없도록 내 두 손목을 바닥에 단단히 결박시켰다. 너의 아래에서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 너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고 내 가슴팍은 조금씩 축축해져갔다. 나는 널 다독이듯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너 또한 중얼거렸다. 엄마, 엄마, 엄마….
분명 나를 부르는 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가슴 저리게 부르는 그 이름은, 내가 아닌 그의 어릴 적 엄마를 향한 것이었을 것이다. 결국은 제 목숨을 스스로 끊어낸 어미를 향한 애탄 부름. 조금씩 내 손목을 결박하던 네 손에 힘이 빠진다. 나는 한쪽 손을 빼내어 너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는다.
기괴한 모습이었다. 남자는 여자를 포악하게 범하면서도 여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울었고, 여자는 남자에게 맹렬히 짓밟히고 있음에도 남자를 위로한다. 관계가 끝나자 너는 날 그대로 안고 잠에 들었다. 나 또한 네 품에 안겨 잠에 들었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아들과 몸까지 나누는 엄마… 결국 나는 너에게 엄마이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대신, 백현아, 내 안에서 안식을 느껴줘. 내게서 네 어미를 생각해내고, 내게서 네 어미를 보렴.
내가 너에게서 '엄마'이기를 포기하자, 나는 비로소 너에게 엄마같은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없어서는 안 될, 언제나 옆에 있어야하는, 영원히 떠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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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MANIA
어버이날 기념이라고 하면 웃기려나요. 참고로 번외 있습니다. 불맠입니다(환호성) 제 목표는 수위 없는 시리즈에서 고품격 수위로 바뀌었습니다^^..
암호닉은 따로 받고 있지 않습니다만 댓글란에 자연스레 말해두시면 기억은 해두겠슴다..ㅎㅠㅎ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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