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로망, 클리셰
W. 백빠
도경수; 보스의 여자
안녕하세요. 도경수라고 합니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남편과 깍지를 끼고 있던 손에 들어갔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어두웠으며 감미로웠다. 그리고 동시에 무언의 힘이 들어가있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움찔 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그 부드러운 목소리 속, 은밀히 담겨있었다.
" 내가 가장 아끼는 놈이야. 꼭 한번 당신한테 소개해주고 싶었어. "
" 남편이 이렇게 누군가를 집에 데려온 건 처음이네요. 반가워요, 경수씨. "
" 영광입니다, 회장님. "
남편은 우리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대형 무기상의 회장이었고, 정부에서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는 권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수 많은 대기업들이 지상을 점유하고 있다면, 이 남자는 지하 세계 전체를 손 안에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이 도경수- 라는 사람을 집 안에 데려와 제 오른팔이라고 소개했다. 어쩌면 그는 나보다 더 이 남자를 신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진중함을 내포하고 있는 눈빛, 예의바른 행동, 절제된 말투. 적절한 선을 지키되 너무 멀어지진 않고, 드러나진 않지만 명백한, 왕과 신하의 관계를 잘 지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는 눈만큼은 예외였다. 남편이 잠깐 신경이 다른 곳에 팔려있을 때, 혹은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나를 바라보는 네 눈빛은 묘해졌다. 나를 이따금씩 깔아뭉개고 무시하는 눈빛이기도 했고, 욕망인지 야망인지 커다란 무언가 꽉 가득차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욕망, 혹은 야망은 마치 나를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면 머리 한 쪽이 하얗게 질리며 어지러워지곤 했다.
" 저… 여보, 있잖아요. 저 도경수라는 사람. "
" 응, 왜? "
" 어떤 사람이에요? '
" 어떤 사람이라니, 내 오른팔이라고 했잖아. "
꽤 늦은 시간까지 남편과 단 둘이 술을 마시고, 새벽 한시가 다 되서야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남편과 함께 현관문 앞에서 짧게 배웅을 하고,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물어보았다. 도경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고.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자신의 보스의 아내라는 여자를 그런 눈으로 볼 수가 있는지. 어떻게, 그가, 그렇게 맹랑하고 이상야릇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는지. 그러나 남편은 그저 자신의 오른팔이라고만 답을 했다. 그것만으로도 답은 충분하다는 뉘앙스였다. 그러나 나는 …어딘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해보이듯, 일주일 후 쯤일까. 도경수가 아주 늦은 밤 집으로 찾아왔다. 그러니까, 밤이라기엔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열두시 사십분쯤. 마침 남편은 중요한 거래건으로 해외에 나가 있었고, 나 혼자서 큰 저택을 홀로 찾아온 도경수를 맞이해야만 했다. 검은색의 실크 가운 차림으로. 그를 맞이하면서도 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온 당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그리고 난, 웃기게도 그 사실이 짜릿하다고 느꼈다.
" …어…경수씨? 이시간에 여기 왠일이에요? 회장님 안 계시는데. "
" 압니다. 안사람 잘 있는지 보고하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
" 그럼 좀 낮에 오지, 뭘 이렇게 늦게 왔어요. "
" 죄송합니다. 낮엔 제가 시간이 안되서. "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일단 들어오라며 손짓을 했다. 잠잘 시간 쪼개서 남편 명령 들어주러 이 새벽에 여기까지 왔는데, 나 잘 있는거 봤으니 그만 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차나 한잔 대접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서며 물어보았다.
" 경수씨는 남편이랑 같이 안 갔나봐요? "
" 저는 회장님 대신 여기에 남은 일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
…아. 하긴, 그이가 해외에 갈 일이 있으면 막중한 일은 모두 이 사람 책임이겠지. 정말 도경수에 대한 남편의 신뢰가 얼마나 두터운지 짐작이 갔다.그런 도경수가 완전히 집 안으로 들어서자 괜시리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남편의 가장 최측근이라고 하지만, 그는 엄연히 남자였고, 남이었다. 일말의 죄책감, 그리고 일말의 즐거움. 도경수,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때와 변함 없다는 사실이 한 몫 했다. 여전히 그는 내 머리를 하얗게 만들어버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뭐, 차 한잔 하고 가요.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
" 좋습니다. "
" 다음부턴 이렇게 늦은 시간엔 오지 마시고. "
" …. "
내 말에 도경수가 바람 빠지듯, 실소를 터트렸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반응. 뭐야, 싫다는거야? 흐응, 맘에 안든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가 대답한다. 노력해보죠. …나는 그쪽의 노력을 바란게 아니라 확답을 바란건데. 나는 실크 가운을 안쪽으로 여미며 부엌 쪽으로 들어가다 문득 이 시간에 차를 우리긴 너무 귀찮고, 그냥 와인이나 한병 딸까- 하는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 도경수에게 물어보았다.
" 차 말고, 와인 괜찮아요? "
" 뭐, 당신이 괜찮다면 저도 괜찮습니다. "
그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의미심장한 말처럼 들렸다. 당신, 이라는 호칭도 거슬렸다. 나는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이고는 와인과 잔 두개를 챙겨 베란다 옆 쪽에 마련되어있는 티 테이블로 향했다. 이리로 와요, 말하자 도경수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온다. 남편과 가끔 분위기를 잡고 싶을때면 꼭 여기에 앉아서 와인을 마시곤 했다. 바깥 야경이 꽤나 아름답거든. 두 와인잔에 와인을 따랐다. 자줏빛의 와인이 찰랑거리며 담긴다. 그가 제 앞에 놓인 와인잔을 들더니 한모금 입을 축인다. 나 또한 와인잔을 들고 입가를 적셨다. 돌연, 지금 아니면 물어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저, 경수씨…. "
" 네. "
" 나 쳐다볼때 경수씨 눈빛. 진짜 이상한거 알아? "
" …. "
" 거칠어. 무슨 야생동물 같아. 꼭 나 볼 때만 그래. "
도경수가 내 말에 와인잔을 놓곤 가볍게 웃는다. 다리를 꼬고 편히 앉은 폼새가 꽤나 색다르다. 남편 앞에선 딱딱한 자세로만 앉아있는게, 꽤나 반듯한 사람이라고 느꼈는데 지금 보니 막상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 말에 답없이 고개를 돌려 바깥 야경을 바라본다. 여전히 입가엔 웃음기가 남아있다. 나는 답을 기다리며 그의 옆 모습을 바라보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 예민하네. 그런 것까지 알아채고. "
" …지금 나한테 반말하는거야, 경수씨? "
" 먼저 예의없이 반말한게 누구더라. "
" …. "
나랑 그쪽이랑 같아? 라고 물으려 했던 내 입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도경수의 눈빛으로 다물어져버렸다. 웃음기는 여전했지만 그 눈빛은 어딘가 내 등 뒤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말 없이 저에게 시선을 꽂고 있는 내게, 마찬가지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와인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는 도경수. 그의 표정, 몸짓, 분위기, 말투, 모든 것은 여유로웠지만 가볍지가 않았다. 나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리곤 그에게 물었다.
" 여기 온거. 남편이 시켜서 온 거 아니지, 당신? "
" 알고 있었잖아. "
" …허. "
" 당신 생각보다 음탕해. 이 시간에 외간 남자를 집에 들이는 것도 모자라 와인까지. "
" 경수씨가 외간 남자는 아니지. 남편의 오른팔이라면서. "
" …외간남자가 아니면, "
" …. "
도경수가 갑자기 내 팔을 잡곤 끌어당겼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남편이 가장 믿는 남자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지금껏 나를 바라보았던 눈빛의 정체. 와인보다 향기로운 그의 향이 내 코 끝을 향유한다.
" 나 이래도 되는건가. "
" …. "
나를 빨아들이는 그의 눈. 검은 가운을 입은 내 온 몸이 부끄러워지도록, 그는 나를 깊숙히 들여다본다. 내 팔을 움켜쥔 그의 손이 다부지다. 지금 이 상황이, 말도 안되는 그의 태도에 나는 어쩐지 화가 나지 않았다. 아까 말했듯, 나는 지금 짜릿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나를 참지 못하게 만든다. 예의나 도덕을 차릴 관계가 아니기때문인걸까. 나와 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게걸스럽게 물었다. 내 가운끈을 단숨에 풀어버린 그의 뜨뜻미지근한 손이 풀어진 가운 사이를 파고들고 내 가슴을 움켜쥔다.
" 아으…! "
내 신음은 내 입안을 휘젓는 그의 혀에 먹혀들어가고 말았다. 그의 말캉한 혀는 내 입천장을 살살 쓸었다가도, 내 혀를 강하게 옭아매기도 하고 서로가 유하게 섞이기도 했다. 그의 타액이 내게 넘어오고, 숨이 조금 벅차질 쯔음, 그가 급한 듯, 내 손을 끌어당겨 보이는 아무 방이나 들어갔다. 하필 남편의 서재였다. 책상 위에 있던 두터운 파일들과 볼펜들, 같은 성가신 것들은 책상 아래로 밀어버리곤 나를 그 위에 눕혔다. 차가운 책상이 내 등에 닿자 정신이 저 멀리로 달음질하는 것 같았다. 도경수의 뜨거운 입술이 내 목에 닿고, 나는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한채, 마주봐야하는 현실은 잠시 한켠에 덮어둔 채, 그렇게 더러운 욕구는 고개를 쳐들고 말았다.
도경수는 나를 탐하기 시작했다. 제 맘대로, 제 뜻대로. 남편이 없을 때마다 집을 찾아왔고, 남편이 집에 있을 땐 밖으로 불러내기도 했다. 간이 큰 건지, 남편에 대한 예의가 없는건지. 그는 항상 관계를 가질 때 제 아래에 깔려 신음을 내지르는 날 보며 묻곤 했다. 우리 만약 당신 남편한테 들키면 어떻게 될까. 땀에 젖은 도경수의 머릿칼 사이, 네 얼굴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고있다. 나는 그저 네 입술에 키스를 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지금만큼은 그런 걱정 하지마… 다 괜찮아, 괜찮을거야.
그러나 아침이 되고, 도경수 그가 내 옆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걸 보자면, 나 또한 그런 생각이 든다. 만약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되면 우린 어떻게 될까. 아마 도경수를 죽일 지도 모르겠다. 그럼 나는? …글쎄, 그는 나를 끔찍히도 사랑하니 제 옆에 묶어주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을까. 나를 무척이나 아끼니까. 나는 남편을 사랑했고, 미안했고, 양심에 찔렸고, 죄책감이 들었지만 도경수가 내게 일으키는 욕망의 소용돌이는 무엇으로도 멈춰지지 않았다. 남편이 그리도 날 사랑해주고, 아껴주고, 애지중지했지만 나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도경수를.
도경수를 멈춰야했음을 후회하게 된 건, 머지 않아서였다. 남편이 도경수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남편이 도경수를 내게 소개시켜준 날 후로는 이렇게 셋이 면전을 마주한 적이 없었는데 묘하고도 독특한 상황이 웃기다고 느껴졌다. 어이없기도 했고. 우리 둘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있어야만 했다. 나는 그의 얼굴만 봐도 아래가 이렇게 달아오르는데. 남편의 사랑을 받는 아내로, 자신의 보스에게 충성하는 오른팔로 돌아간 우리가 참 기이했다.
"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뿌듯한 일은 경수 너와 아내를 얻은 일이다. 다른 건 다 잃어도 두 사람만큼은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아. "
" 여보도 참. 경수씨 민망하겠어요. "
" 앞으로도 이렇게 셋이 많이 만나자고. 경수는 내 아들놈이나 다름 없어. "
" 아들 말고 동생 정도로 해요. 나랑 경수씨는 나이차도 별로 안 나서 엄마는 불가능이야. "
남편은 껄껄 웃으며 그런가? 그래, 그럼 동생으로 하자구. 하며 앞에 있는 위스키잔을 들었다. 자, 내 동생을 위하여. 도경수는 작은 미소를 띄며 잔을 들었고, 나는 앞에 있던 물잔을 들어 짠,- 하고 남편과 잔을 부딫쳤다. 그 순간 도경수는 나를 바라보았다. 너와 내가 처음 만났던 그날 그 눈빛 그대로. 아니, 예전의 눈빛은 욕망에 더 가까웠다면 지금은 무시, 혹은 천시에 가까웠다.
난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도경수가 혹시 나를 좋아하게 된다면 어떨까. 혹시 이미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몸뿐이 아닌 마음까지도 잠식 시키려고 들면 어쩌지.
그러나 그가 이렇게 날이 잔뜩 선 눈으로 날 볼 때면 그런 생각은 금새 없어지곤 한다. 좋아하는 여자를 저런 눈으로 바라볼 순 없을테니까. 어쩌면 도경수는 나를 싫어하거나 증오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경수랑 잠깐 둘이 술 한잔 할테니까 먼저 들어가서 자요, 당신은. "
" 응, 알겠어요. 경수씨, 우리 남편 잘 놀아주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
네, 안녕히 주무세요. 깍듯이 인사하는 도경수를 속으로 잔뜩 비웃으며 나는 뒤로 돌아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 미세하게 들려오는 둘의 웅웅거리는 대화소리를 듣고 있자니 잠이 딱히 오질 않았다. 도경수… 방금 나를 바라보던 깔보는 것만 같은 눈빛. 아래가 축축해져왔다. 천천히 손가락들을 내 아래에 가져다댔다. 처음으로 해보는 자위행위였다. 도경수, 그를 생각하며 조그맣게 그 이름까지 불러재꼈다. 절정에 한번 오르고나서야 몸이 축 늘어졌다. 내가 누워있던 침대 아랫자리가 어느새 뜨끈뜨끈 해져있었다. 새어나온 액체들을 닦을 틈도 없이 나른해진 몸은 서서히 잠에 빠지기 시작했고, 내가 완전히 잠에 들었을 즈음, 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남편이 침대 위로 올라왔고, 나는 다시 더 깊은 잠의 세계로 빠지려고 들었다. 그때 남편의 손이 내 아래에 닿았다. 그것도 아주 거칠게.
" 여, 여보..! "
" …젖어있네. 혼자 했어? "
남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화들짝 놀라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키자, 보이는 건 남편이 아닌… 도경수였다. 미쳤어, 도경수. 남편은 어쩌고 당신이 침실에 들어오는거야?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데, 도경수는 아랑곳 않고 내 아래를 매만졌던 손을 빼네며 작게 웃었다. 그리곤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 묻잖아. 자위라도 했냐고. "
" 당신 뭐하는거야, 지금. 나가. 나가, 당장!"
" 니 남편은 존나 취해있어. 재밌지 않아? 스릴 있고. "
아니, 전혀. 이런 건 스릴 없어. 이렇게 대놓고 하는건 질색이야. 다급한 손길로 도경수를 밀어내는데 순간적인 힘으로 날 눕혀 그 위에 올라탄다. 내 위에 몸을 겹친 네가 내 가운 끈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도경수, 진짜 뭐하는...! 저지하려 그의 어깨를 밀어보지만 알코올이 들어간 덕분인지 힘을 주체하는 못하는 그가 내 두 손을 제 한 손으로 단단히 결박했고, 나는 이 광동을 보고 있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때 방문 밖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나는 절박한 목소리로 내 몸을 지분대던 그에게 속삭이듯 애원했다.
" 경수씨. 제발 부탁이야, 나와봐, 좀. 응? "
" 무서워? "
" 응, 무서워, 제발, 경수씨… 제바알…. "
그 발소리는 점점 방문 쪽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도경수, 그도 저 소리를 들었을텐데 내 위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장난이 과해, 당신. 이정도면 됐어. 나를 골려주려거나 나를 무섭게 만드는 거였다면 성공했어, 지금도 충분히. 그러니까 제발 나와, 응? 나는 내가 뭐라고 짓껄이는지도 모르면서 아무 말이나 뱉어가며 애원했다. 제발 내려와달라고. 그러나 도경수는 그저 내 얼굴 가까이 다가올 뿐이다. 술냄새가 훅, 하고 풍겨왔다. 취했어. 그래, 취했겠지. 취하지 않았다면 이럴 수 없지. 창문에 비친 은은한 달빛이 네 두 눈을 약하게나마 비춘다. 우리 이러다 죽어, 경수씨… 둘 다 죽는다고.
여보, 자? 경수가 어디있는지 없어졌네.
그때 방문 바로 밖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이제 나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취한 것 같기도, 또는 취하지 않은 것 같은 네 눈은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다. 나는 소리를 쥐어짜가며 그에게 말한다. 나와, 지금이라도, 제발, 경수씨. 응? 제발…. 내 애원에 너는 웃는다. 씨익.
" 울어봐. 울면 더 예쁘잖아, 당신. "
" …진짜 미쳤어…, 도경수…. "
" 당신은 내가 미친 걸로 보여? "
" …. "
광기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기어코 네가 내 가운데에 자리를 잡는다. 경련을 일으키듯, 어떻게든 도경수의 아래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보지만 그의 힘에 억눌려 침대에 파묻히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도경수는 내게 이따금씩 보냈던 천시와 모멸, 경멸, 무시 그 모든 것들을 담아 나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올라간 네 입꼬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눈빛. 너는 내게 속삭여온다.
" 미친건 내가 아니라 니 남편새끼야. 동생이 보는 앞에서 형을 죽이는 미친새끼. "
" …. "
" 나 여기까지 오느라 되게 힘들었으니까, 당신이 보상을 좀 해줘. "
" …. "
" 마지막으로. "
정신을 차리기엔 충격이 컸고, 알아 듣기엔 너무 복잡했다. 너는 일순간 내 안을 푹, 파고 들어왔다. 추잡한 신음과 동시에 문고리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방문이 열리며 환한 빛이 우리 둘을 은은히 비췄다. 그리고 그 앞엔 남편의 실루엣이 언뜻 보였다. 나는 네 아래에 깔려 그저 흔들리는 것 외엔 수가 없었다. 너는 남편이 우리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나를 일으켰고, 나는 방문 앞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남편과 얼굴을 마주해야했다. 도경수는 뭐가 그렇게도 재밌는지 혼자 큭큭, 웃어댔다.
" …이, 이게 무슨…… 지금 뭐하는건가…? "
" 어때, 당신 아내랑 내가 떡치는 걸 보는 기분이. "
" …이…이…게……. "
" 개인적으론 좆같았으면 좋겠는데. "
남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 쪽으로 다가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때 도경수가 무언가를 꺼내든다. 나는 남편을 마주보고 있기에 그가 어떻게 무엇을 꺼내는지는 잘 몰랐지만, 내 이마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철컥… 하는 소리.
총이었다. 이마에 닿은 서늘한 것은 총구였다.
" 근데, 눈 앞에서 죽었을 때보단 좆같지 않을 걸? "
" 도, 도경수…너…, 다, 당장 그 총 내려놔! "
" 기억해? 당신이 내 앞에서 도승수 죽였던거? "
" 제발, 제발…! 내려놓고 얘기하자꾸나, 제발…! "
" 씨발, 물어본 말에나 대답해!! "
" 난다, 기억 나. 내가 잘못했다.. 제발, 제발 그여자만은…! "
" 아, 기억이 난다고? "
그럼 죗값을 치뤄야겠네? 도경수는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내 눈엔 두려움 혹은 무서움의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있었다. 상황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도경수가 날 속였단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지금 상황을 부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 입술에 진하게 입술을 맞추는 그, 그는 내 머릿채를 우악스레 잡아 다시한번 남편과 얼굴을 마주하게 만든다. 귓가에 네 입술이 닿고, 도경수는 내게 속삭인다. 자, 작별 인사해. 안녕, 남편.
" 안돼, 제발, 경수야, 내가 잘못했다, 응? 그 여…, "
탕-!
귀를 찢어발기는 것 같은 총성이 커다란 저택을 울렸다. 그러나 그 총알이 뚫어낸 것은 내 이마가 아닌… 남편의 가슴이었다. 정확히 왼쪽 가슴을 관통 당한 남편이 털썩, 무릎을 꿇는다. 그러더니 머지않아 검붉은 색의 진득한 액체가 기이하게 퍼지기 시작한다. 도경수가 웃으며 여전히 내 귓가에 닿아있는 입술로 속삭였다. 내가 널 어떻게 죽여.
응? 이렇게나 많이 사랑하는데 어떻게 죽여. 내 골반을 잡은 그가 세게 허리를 쳐올렸다. 흐응, 흐읏, 그 아래에 깔려 참을 수 없는 교성을 뱉어내면서도 남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도경수가 말한다. 자, 지금이라도 작별인사 해. 그가 내 한쪽 손을 들어 남편에게 흔들어보인다. 잘가, 남편. 고여있던 눈물이 후두둑, 하고 떨어졌다. 슬픔도, 절망도, 분노도 아니었다. 아득히 도경수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니… 울음소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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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He loves me (Lyzel in E flat)
도경수는 참 또라이가 잘 어울려요. 이번편 수위를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번외에만 수위를 넣어야한다는 나의 강박관념으로 인해 (찡긋)
자 그럼 다같이 번외를 기대해보아요ㅎ0ㅎ
+ 암호닉은 따로 받을까여? (고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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