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각] Major Arcana 메이저 아르카나
02. The Magician
w. 에오스
마르세유 판의 마술사는 수상한 인물이 그려져 있다. 첨단이 금빛의 곱슬 머리카락에 이상한 형태의 모자를 써 화려한 의상에 몸을 싸고...(중략)... 또, 이 마술사의 기발한 의상은 보는 사람에게는 어쩐지 수상한 인상을 주지만, 바보와 같이 전연 규칙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의상에는 1분의 혼란도 보이지 않고, 배색은 좌우 비대칭이 되도록 대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이 인물은 이러한 기발한 의상을 몸에 대는 것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스스로의 능력을 덮어 가려, 대중을 속이는 계산적 인물인 것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인물은 신체를 오른쪽(미래)으로 향하면서도 왼쪽(과거)을 되돌아 봐 반성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 마술사는, 그 외형적 특징이나 트릭을 실시하는 직업 상 등에서 바보 등의 트릭스터와 비교나 조합이 되는 일이 있지만, 그의 트릭은 용서되지 않는 일이며, 계산된 다음의 것이며, 작품이며, 예술이다. 고로 그는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켜 만능의 신과 같은 행동으로 관객을 놀래키지만, 어디까지나 스테이지 위로 한정된다.
-위키 백과, "바보 (타로)" 항목 본문 中
염소 자리는 가을의 시작과 함께 첫 번째로 눈에 띄는 별자리이다. 염소자리는 관절,골격, 치아 그리고 피부를 관장한다.염소자리 별자리의 주인공은 전령의 신 헤르메스의 아들이자 목동의 신인 판(Pan)이다. 판은 좀 엉뚱한 신이었던 것 같다. 신화에서 이 신은 하루 종일 여자를 따라다니거나 실컷 잔치를 한 후 골아 떨어지곤 했다.
-신화 위키, "염소자리" 항목 본문 中
***
"으음...음......"
감은 우현의 두 눈 위에 따스한 햇살이 비춘다.
우현의 기분과 너무나도 이질적인 따스함에 우현은 몸을 뒤척이다 이내 눈을 부릅 떴다. 눈은 떴지만 상황 파악을 못하던 우현은 이내 자신이 3년동안 쓰던 침대 위에서 자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침실은 자신이 약을 먹기 전과 그대로였다.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쳐다보니 건너편에 보이는 서재도 그대로였다.
'뭐야... 약이 아무 소용이 없었네...'
그런데 왜 이렇게 따뜻할까.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보일러가 자동으로 틀어졌나 싶어 침대에서 나오는데 아뿔싸. 마음만 너무 급했던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우현은 그 자리에 털썩 하고 쓰러졌다. 그래도 꽤 오래 잤나보네 다리에 힘 풀리는 거 보면. 하면서 손을 땅에 짚고 일어나려는데,
“하하하! 진짜 웃기네. 너같은 애는 처음이다 진짜. 혹시 이름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우현은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모든게 살짝 이상했다. 본인은 분명 자기 전에 커튼을 치고 잤으며, 설령 창문을 안 닫고 자서 바람에 커튼이 옆으로 치워졌다 한들 우현의 집은 1층이 아니기 때문에 저렇게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왠지 모를 스산함에 우현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 우현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잔디밭, 그리고 창문 앞에는 염소같이 생긴 사람이 웃음을 지으며 창문을 두들긴다.
아니, 사람같이 생긴 염소라고 해야 하나. 얼굴하고 팔을 보면 분명 사람인데 다리는 말 비슷했고, 머리 위에는 큰 뿔이 두 개 달려 있고, 그 뿔을 감추기 위해 이상하게 생긴 모자를 머리 위에 얹다시피 한 괴생물체의 모습에 우현은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난 분명히 수면제와 항우울제라고 알고 있었는데 의사양반이 환각제를 줬나 싶어 다시 침대에 들어가려는 우현을 보고는 그 염소인간이 창문을 더 세차게 두들겼다.
“야 인마! 침대로 다시 들어가면 어떻게 해. 나는 니 집에 못 들어간다고! 너가 나와야지 여정을 시작할 거 아니냐! 다른 애들 다 기다리겠다. 뭐야, 울어?”
야 인마- 이 한 마디에 우현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싶었다. 야 인마… 성규 형이 자주 하던 말인데. 내가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고 하트를 날리면, 성규 형은 반달 모양으로 눈을 고이 접어서, 세상에서 가장 예쁜 웃음을 보여주며 머리를 쥐어 박고는 다시 쓰다듬어줬는데.
내가 너무 그리워했구나.
성규 형을 그리워해서 지금 헛 것이 보이는구나. 내 마음이 너무 성규 형을 그리워해서 저런 기이한 생물체를 마음 속에 만들어서, 그 안에 성규형을 불어넣는구나 하며 우현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괴로워했다.
“야… 울면 내가 뭐가 되냐. 얼른 나와봐. 재미있는거 보여줄게. 여기에 너 말고도 여기에 너같은 애들 많아. 일단 나와서 나랑 얘기부터 하자.”
한참이 지나고 우현은 겨우 마음을 추스려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밖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비가 내리고 있었고, 회색 구름은 파란 하늘을 가린지 오래였다. 그리고 창 밖을 바라보니 염소인간은 우현을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바라보다 이내 표정을 원래대로 바꾸고는 우현에게 소리쳤다.
“야, 씨… 너가 제3공간으로 가는 줄 알고 엄청 걱정했잖아. 빨리 옷이랑 챙겨서 나와. 갈 길이 급해.”
‘제3공간…?’
아까부터 도통 알아듣지 못할 말만 하는 염소인간 앞에 커튼을 무심한 듯 치고는 우현은 서재로 가 큰 트렁크를 열고 옷장 안에 있던 옷가지를 어거지로 구겨 넣었다. 그리고 책상 위를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진들… 데려가야 하나?’
책상 위에는 성규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 담겨진 액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사진 속의 성규와 우현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그래… 미련을 남겨 두지 말자.'
우현은 그 액자들을 옷 사이사이에 조심스레 끼워 넣은 뒤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짐 위에 툭 얹고는 여행가방의 지퍼를 닫았다. 우현이 현관 문을 여니, 염소인간이 창문 밖에서 시무룩하게 쭈그려 앉아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반갑게 우현을 맞이하였다.
“아 고것 참 튕기는구만. 진짜 알 수 없는 존재야. 어쨌든 집 밖으로 나와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누구세요.”
“거 참, 성질도 참 급하네 자식. 너 그리스 로마 신화 잘 아냐?”
“옛날에… 아주 옛날에 읽어봤어요.”
미신과 신화에 관심이 많아 매일 신화 관련 서적을 읽던 성규 덕분에 우현도 한동안 관심 있어 했던 분야였다. 물론 우현은 성규 옆에서 만화로 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긴 했지만…
“거기서 나오는 목동의 신 기억하니? 내가 바로 그 판(Pan)이다. 근데 경험상 한국인들이 오면 내 이름을 가지고 참으로 잘만 놀더라고. 그래서 한국어 이름을 새로 지었다. 앞으로 이중엽 이라고 불러주렴.”
“이중엽이요?”
“응, 가운데 중 자에 밝을 엽 자 써서 중엽. 나는 너같은 아이들을 안내해주는 전령이다. 갈 길을 잃어버린 아이들을 위해 등불처럼 길을 밝히지. 참 불쌍한 아이들… 물론 이 일도 하다 보니까 고아원 원장이 된 듯한 느낌이 들지만 말이다.. 아이고 근데 이름 물어본다는걸 까먹었네. 넌 이름이?”
“남우현 입니다.”
“너는 어쩌다가 여기로 왔냐?”
그의 질문에 우현은 기억을 더듬어본다. 막상 누군가 물어보니, 쉽게 한 줄로 대답이 나오지 않아 기억을 거꾸로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스물 한 알의 약, 사진들, 계단 한 구석.
이별, 사랑, 만남.
남우현, 김성규, 그리고…
“운명이요.”
“응?”
“운명을 찾으러 왔어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판, 아니 이중엽은 적잖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곧 장난스러운 표정과 농담으로 그의 당황스러움을 감추는 듯 했으나 얼굴 한 구석에는 아직도 그가 느낀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참 신기한 아이구나. 너같은 아이는 정말 오랜만에 봐. 너같은 애가 오면 난 도통 갈피를 못 잡겠어. 예측할 수가 없잖아? 아까는 울더니, 지금은 전재산을 거는 사람마냥 비장한 표정으로 운명을 말하지 않나… 내가 너무 나이가 들었나? 난 이 일을 하면서 느낀건데 운명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더라고. 모든 일은 규칙과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공간이라 그런지… 난 잘 모르겠더구나.”
“저같은 사람이 예전에도 있었나요?”
“음… 있었지. 그나저나 넌 너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안 궁금하니? 내가 보기엔 너의 운명보다 당장 더 급한건 여기가 어딘지 인 듯 싶은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 오면 그거부터 물어보거든.”
우현은 자꾸 말을 돌리려는 중엽을 눈치챘지만 그냥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성규를 만나기 전에는 그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냉정하다는 말을 들어온 사람이다. 스스로를 보호할 줄 아는 사람은 너무 처음부터 자신의 패를 드러내지 않는다.
“네, 저도 마침 그게 궁금했어요. 사실… 운명이 있겠어요? 제가 바보인거죠. 여기가 어딘지 저도 이제 궁금해지네요.”
“궁금하다고 하니 내가 다 고맙네. 내가 아까 너가 제3세계로 갈까봐 걱정된다고 했지? 여기는 제2세계야. 너가 살던 세상은 제1세계고. 이 세상은 사실 세 개의 세계로 이루어져있어. 제1세계는 육체의 세계, 제2세계는 정신의 세계, 제3세계는 영혼의 세계. 말이 어렵지? 쉽게 말해줄게.”
이중엽은 숨을 고르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제3세계에 간다는 것은, 즉 영혼의 세계에 간다는 것은 말이다, 제1세계의 육신이 알고 있는 ‘죽음’인거야. 하지만 제3세계의 영혼 입장에서는 이 현상을 ‘본질로의 회귀’ 라고 해석하겠지. 그들은 육체와 정신의 소유를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 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간혹 제3세계에 사는 영혼들이 몸 안에 갇혀 사는 제1세계의 영혼들을 가르쳐준답시고 제1세계를 방문하는 경우가 있는데, 제1세계 영혼들은 사실 육신에 가려 진실을 잘 못 보는 편이거든. 그래서 자기네들하고 같은 존재 보고도 귀신이니 뭐니 하면서 도망가는 어리석은 자들이 제1세계 사람들이기도 하고.”
“그러면 여기는요?”
“사실 제2세계가 흥미로운게 보통 사람들이 죽으면 그들의 제1세계에서 제3세계로 바로 넘어가거든. 그런데 제2세계는 참 말하기 애매한게…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꿈이 남은 자들’이 머무는 공간이야.”
그가 잘 알고 있는 분야여서였을까, 중엽의 말투는 처음보다 훨씬 부드럽게 바뀌어 있었다.
“영혼 자체는 이제 육신을 떠나야 하는데, 무언가가 마음에 걸리는거지…예전에 온 한 사람을 예로 들어줄게. 제1세계에서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던 사람이 있었어. 복잡한 가정사를 가지고 태어난 그는 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였는데, 그에게는 재정적 지원도, 여인을 만나 아기를 낳고 도란도란 살 마음의 여유도 없었어. 대신 그 사람은 어릴 적 엄마가 읽어주던 이야기에 나오는 왕처럼 대궐같은 궁전에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살아가는게 꿈이였어. 그런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냐? 아니지. 그렇게 헛된 꿈만 꾸다가 그는 그만 어느 늦은 저녁에 공사판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하게 됬어. 아마 그 때 빨리 병원에 실려갔다면 그의 영혼이 여기에 도착하기 전에 육신으로 돌아갔겠지. 그런데 그의 동료들은 아는게 없었어…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빨리 병원에 실어 가야 하는지도 몰랐던거지. 그들은 대충 그의 육신을 벽돌 나르던 달구지에 싣고 선술집에 가서 거하게 한 잔 한 뒤에, 그제서야 죽어가는 그를 확인하고는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병원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어. 물론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본인들이 직접 달구지를 끌어서 병원으로 갔지. 죽어가는 그가 마지막으로 생각하던 것은 오래된 그의 꿈이지…”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떻게 됬는데요?”
“나의 주인님은 그의 꿈을 높이 샀지. 그런 환경에서도 그런 꿈을 가지고 매일 일을 하러 나갔다는 것에 주인님은 정말 큰 감명을 받으셨어. 그래서 그의 고장난 육신에서 그의 정신을 데리고 와서 이 곳에서나마 그의 꿈을 이루어 주셨지. 그는 제3세계로 가지 않았어…아마 멀지 않은 훗날에, 만나게 될거야. 물론 마냥 좋은 사람은 아니다만…”
“형한테도 주인이 있어요?”
우현이 무의식적으로 형이라 부르자 중엽은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노발대발 소리를 지른다.
“형…형이라니! 내가 아무리 어리게 보인다지만 엄연히 너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 호칭에 있어서는 난 엄격한 편이니, 반드시 안내자님 이라고 부르기를. 이상”
갑작스러운 중엽의 화에 우현은 그저 벙찔 뿐이었다. 이 형 진짜 나랑 핀트가 안 맞네.
“주인님은 참 취향이 독특하셔… 한동안 예의 바른 애들을 데려오더니 이제는 또 나사 빠진 애들을 데려오려고 작정하셨나. 도통 이해가 안된다만, 이마저도 주인님의 뜻이니…”
“형…아니, 안내자님에게도 주인이 있어요?”
“당연하지. 나는 주인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이 세계는 주인님의 대리자인 나에 의해 움직이지. 이 넓은 곳을 다 관할하려면 이렇게 젊은 여자하고만 놀아날 것 같은 멋진 외모를 가져도 굉장한 신중함과 정해진 규칙에 의하여 일을 처리해야 하거든. 나에게 예외란 없지.”
“얄짤 없는 성격이네요…”
“그렇지. 내가 한 번 규칙을 바꾸는 순간, 이 세계는 물론이고 서로를 지탱하는 제1세계와 제3세계 사이를 잇는 다리에도 균열이 가거든. 내가 아까 운명을 믿지 않는다고 얘기하지 않았니? 나는 운명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너희들이 생각하는 모든 운명은 사실은 주인님의 정해진 뜻이지.”
“그 카드, 이젠 아무 것도 아닌걸. 난 이제 운명 따윈 믿지 않거든. 찢든. 블태우든. 버리든. 너 마음대로 하세요.”
아련한 기억에 우현은 잠시 질끈 눈을 감는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저 멀리에 작은 오두막집이 한 채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키가 크고 짙은 검정색 머리에 붉은 빛이 감도는 분홍 목도리를 한 남자가 물뿌리개를 들고 그대로 우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몸 주위에는 배추흰나비같이 하얀 나비들이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우리와 여정을 함께 할 두 번째 친구, 이성열이다."
얼굴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니 우현은 성열의 외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엄청난 비율에 외모도 꽤나 잘생겼는걸. 죽기 전에 모델이라도 했었나...?'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모여있는 눈코입, 중에서도 우현의 눈에는 메마른 눈빛 속에 숨겨진 빛나는 흑진주같은 성열의 눈동자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친근하고 다정할 것 같으면서도, 자신만의 공간 밖에는 겹겹이 가시넝쿨을 놓아 누군가 함부로 그에게 다가갈 수 없게 만들어버린 것 같은 성열의 눈동자. 우현은 문득 서재에 있던 작은 티비 너머로 이 키크고 잘생긴 청년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티비에 나온 적 있지 않으세요?"
우현의 목소리를 듣자 성열이 힐끗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위아래로 우현을 쓱 훑고 나서야 한 마디 말을 뱉었다.
"이젠 아니에요.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알아봐주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간결하고도 차가운 두 마디에 우현은 벙찔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박하같은 쿨내에 반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두 눈으로 연예인병 걸린 연예인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에... 김성규도 종종 이런 쿨함을 보이긴 했다만 그래도 성규는 자신감에 가까운 그런 모습인데 비해 성열은... 우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저를 보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신다면 저도 할 말이 없네요."
"아...아니 그게 아니라...!"
"둘 다 내 앞에서 뭐하는 짓이냐."
중엽의 말 한 마디에 잠시 서늘했던 공기가 다시 원래 포근하고 나른하던 제2세계 특유의 공기로 돌아오고 있었다.
"제가 있던 곳에서는 저에게 이렇게 무례한 행동을 하던 사람이 없었습니다만, 다른 곳에서 오셨나 보네요."
"나 참, 하긴 그쪽 연예계가 누가누가 더 잘난 놈인가에 따라 대우받는 세상이겠지만, 지금은 우리 둘 다 죽은 존재 아닌가요? 아 맞다, 우린 같은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죠. 나는 보통 사람들의 세상, 그 쪽은 겉은 아름다운 나비같아도 속은 이미 곪을 데로 곪은 썩은 바퀴벌레 같은-"
"그만, 그만! 유치해서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 너희가 하도 싸우니까 내가 미리 고급정보를 알려주는데, 이렇게 너희들끼리 치고박고 제1세계 이야기 가지고 싸워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다. 일단 안내자인 이상 너희가 가고 싶은 길을 가게 하는 것도 나의 소명이고, 너희를 중재하는 것도 전적으로 내 의무 중 일부이다. 일단 너 이름이..."
중엽은 바지주머니 한 쪽에서 곱게 접혀진 종이를, 나머지 한 쪽에서 만년필을 꺼내더니 이내 종이를 펴서 그 속의 내용을 읽었다.
"이성열 입니다."
"흠흠, 그래. 이...성... 그래 찾았다. 이성열, 맞지?"
"네."
"그래, 여기 있는 남우현, 그래 너 말이야. 너도 듣길 바란다. 모두가 모이면 나에 대한 소개를 다시 하겠지만 내가 너희들의 안내자다. 너희가 여기 온 이유는 각기 다르다만 한 명 한 명 모두가 나의 주인님에게 선택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본인이 가고 싶어하는 곳으로 안내해주는 자이다."
중엽은 우현과 둘이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간결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내가 너희들의 안내자이다만... 너희가 온 이유를 나는 모른다. 이 역시도 이해할 수 없는 주인님의 뜻이다만... 그 분의 뜻이 있는 곳에 내가 가서 받들어야 함이 백 번 옳지. 그래서 간단하게 질문하겠다. 너는 이 곳에 무슨 이유로 왔나?"
"스케줄을 마치고 저녁 9시 반 쯤에 집에 돌아오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