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길게 자라버린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넘긴 인국이 입에 물고있던 담배를 빼내 그대로 제 앞에 쓰러져있는 사내의 목덜미에 그었다. 으아악…! 뻔한 반응에 입맛을 다시며 일어난 인국이 기지개를 폈다. 알아서 해. 인국의 말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내녀석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와 방금 전까지 인국이 잡고있던 남자에게로 돌진했다. 옥상을 빠져나오며 인국은 주먹 쥔 오른손을 후, 하고 불었다. 아까 녀석이 반항하길래 무심결에 주먹을 그대로 날렸다 살짝 삐끗한 것 같았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는 인국을 누군가가 뒤에서 잡았다.
“어디 가?”“형님 마실가신다.”“그니까 어디로.”꼬치꼬치 캐묻는 호원이 녀석에게 대답대신 웃음을 날렸다. 어깨를 두어번 툭툭 치고 다시 내려가려는데 호원이 인국을 붙잡았다. 같이 가. 미묘한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순간의 정적을 털어낸 인국이 긍정의 표시로 씨익 웃어보였다. 잠깐만 기다려. 반으로 들어가 가방을 들고 온 호원이 인국의 옆에 와 섰다. 너 가방은? 내가 언제 가방 키우는 것 봤냐. 비식 웃음을 터뜨린 호원이 바이크 열쇠를 인국에게 던졌다. 뭐야, 너 이거 압수당했다며. 다시 찾아오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호원의 말에 인국이 장난스레 어깨동무를 걸었다. 맨날 언제 키 클래, 하면서 놀렸었는데 몇 달 전보다 부쩍 키가 큰 것 같았다. 나 어깨 다쳤어. 미간을 찌푸리며 인국이 둘렀던 팔을 빼낸 호원이 두어번 어깨를 돌렸다. 왜? 인국의 호들갑스런 반응에 호원이 더욱 더 인상을 찌푸렸다.“또 아버지야?”“…….”술이나 먹을래? 걸음을 빨리해 현관을 나서며 호원이 말을 돌렸다. 어이구, 우리 호원이 많이 컸네. 아침부터 술마시자 그러고? 인국이 호원의 뒷머리를 마구 헤집어놓으며 웃었다. 까분다. 호원도 따라서 잦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나름 여유롭게 학교를 빠져나가는데 뒤에서 불청객의 외침이 들려왔다. 야!! 거기 너네!! 서인국, 이호원! 이새끼들이 또…!“야, 뛰어!!!”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투어 바닥을 박차고 달렸다. 후다닥 후문을 빠져나가 대충 세워둔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호원이 건네는 가방을 핸들에 건 인국이 빠르게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뒤를 돌아보자 안타까운 표정으로 둘의 멀어지는 모습만 바라보는 학주가 보였다. 나이스, 호원의 말에 인국이 말없이 속도를 높였다. 어디 갈래? 막골? 콜. 오늘 새벽에 비가 왔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물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어지럽게 불어왔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낀 호원이 몸을 일으켰다. 미친 새끼, 그러다 골로 가는거야 새꺄. 인국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호원은 인국의 허리에 감고 있던 손을 올려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잊으려고 할 수록 더 진하게 번져오는 어제의 기억에 호원은 조용히 눈을감았다. 또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물먹은 휴지마냥 흐릿했다.* * *“씨…팔.”힘겹게 호원을 끌고온 인국이 매트리스에 그를 집어던지다시피 올려놓고는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들쳐매고 오는것도 모자라 갑자기 비가 퍼붓는 바람에 배로 힘이 들었다. 창문 너머로 내리는 비를 쳐다본 인국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따로 없었다. 야, 야! 나 좀 씻는다? 어차피 듣지도 못할 호원이였지만 그냥 한번 물어 본 것이었는데 으,으…. 거짓말처럼 들려오는 대답에 화장실로 향하던 인국이 호원에게로 몸을 돌렸다. 몸을 뒤척이는 호원의 앞으로 가 쪼그려 앉은 인국이 가만히 호원을 응시했다.“가라고, 씨발….”“…….”“있는 거 다 드릴게요…. 가라고, 흐윽….”결국 호원의 감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또륵 하고 흘러 귓바퀴를 지나 베개로 떨어져 금세 스며들었다. 말없이 긴 손가락을 뻗어 눈물을 닦아낸 인국이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호원의 손을 꽉 잡았다. 이호원의 아버지, 아니 말로만 아버지인 그 남자. 인국이 한숨을 내쉬었다. 술 마실때도 아무 말없이 술잔만 들이키던 멍청한 새끼…. 흑과 백, 물과 기름. 차라리 정 반대선이었다면 좋았을텐데 호원은 그러질 못했다. 결국 물과 기름이 섞이다 말고 뒤엉킨 그 지점. 흑과 백이 어설프게 섞인 침침한 회색 언저리. 호원은 딱 그 지점이었다. 호원을 내려보던 인국의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호원의 뺨으로 똑 떨어졌다. 씻어야겠다고 생각한 인국이 몸을 일으켰다. 와이셔츠를 벗어내며 화장실로 향하려는데 자는 줄만 알았던 호원의 손이 제 발목을 잡았다.“가지 마….”“…….”“성종이가 아파…. 많이 아파요….”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를 모르는 척 할수 없어 인국이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손을 뻗어 이마에 데보니 열이 끓고 있었다. 놀란 인국이 벗다 만 와이셔츠를 방구석에 집어던지며 호원의 몸 이곳저곳에 손을 댔다. 손이 스쳐지나간 자리마다 붉게 열꽃이 피어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호원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인국은 미처 옷을 벗겨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에 제 머리를 헝클였다. 인국은 머리가 캄캄해짐을 느꼈다. 일단 열내리는게 시급했다.“내가 진짜, 살다살다 남 병수발까지 들어보는구나.”인국이 물수건을 호원의 이마에 던지며 말했다. 미처 덜 짜낸 물수건이 철퍽 하는 소리를 내며 호원의 이마에 얹어졌다ㅡ기보다는 달라붙었다ㅡ. 다시 물수건을 제대로 꼭 짜서 올려준 인국이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옷도 갈아입혔고 집구석을 뒤져서 찾은 타이레놀 두알 억지로 밀어넣었으니까 괜찮겠지 뭐. 일단 인국이 할 수 있는 처치라곤 그게 다였다. 한 숨 놓으니 그제야 질퍽한 제 양말과 교복바지가 느껴졌다. 찝찝한 옷을 다 벗고 화장실로 들어가 물을 트니 욕이 절로 튀어나올정도로 차가운 물이 쏟아져나왔다. 이를 악 물고 몸을 씻어냈다. 살얼음을 맨살에 쏟아붓는 것 같았다. 그냥 집에가서 씻을껄,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덜덜 떨리는 몸에 인국이 헛웃음을 지었다. 와, 가오 존나 죽어. 낄낄 웃던 인국이 갑자기 벌컥 열린 화장실문에 깜짝놀란 인국이 소리를 질렀다. 씨발, 뭐야!!“하아…, 하….”“야, 새꺄!! 문 닫어!!”“…….”아 따거! 너무 놀란 나머지 거품칠하다 말고 손을 떼서 그런지 머리에서 거품이 흘러내렸다. 급하게 물을 틀어 비눗기를 씻어내는 인국의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호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닫고 들어와 변기위에 올라와 무릎을 끌어당겨 앉는 호원의 모습을 흘낏 쳐다본 인국이 물을 끄고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말했다. 왜 자다말고 깨서 지랄이야. 그의 말에도 아무말없이 제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다. 성종이는…. ……. 어디 아퍼? 계속되는 인국의 질문, 계속되는 호원의 침묵. 결국 인상을 찌푸린 인국이 대충 큰 수건으로 아래를 가리고 먼저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오, 씨발 존나 추워…. 능숙하게 호원의 옷장을 열어 팬티를 꺼낸 인국이 아직도 화장실에 있는건지 코빼기도 안비추는 호원을 향해 외쳤다. 야!! 나 니 빤쓰 빌려입는다!! 편한게 최고지. 트렁크팬티를 껴입은 인국이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털었다.“…너 병원 가봐, 열 많이 나.”“…성종이가 좀 다쳤어.”“…….”“너한테까지 손벌리기 싫은데, 당장 낼 입원비가 없어….”“…얼만데.”“그냥 진료비만 대줘. 알바해서 갚을게.”됐어. 안 갚아도 돼. 아냐, 갚아서 꼭 줄게. 안 갚아도 된다니까. 아니라니까, 그럼 내가 불편하잖아. 아 안 갚아도 된다고!!! 결국 인국이 언성을 높여서야 호원이 입을 다물었다. 진짜 자존심만 드럽게 센 새끼…. 왜 이제 말해, 새꺄. 호원의 티셔츠와 바지도 꺼내 껴입은 인국이 거울을 보고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지금 같이 가자.성종이 병원.* * *“어깨부근에 찰과상은 치료해드렸으니까 괜찮으실꺼구요, 다만 열이 좀 높네요. 특별히 다른 증세는 없으시죠?”“…네.”“꼬박꼬박 약 챙겨드시고, 혹시 열이 안내려가거나 다른 증상이 보일경우 즉시 병원으로 와주세요.”“저, 성종이는….”“아, 동생분도 가벼운 타박상 외에는 영양결핍정도라서 영양주사 몇대 맞으면 간단히 끝나니까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이어지는 의사의 주의섞인 말에 무슨말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호원을 대신해 꼼꼼히 들었던 인국이 진료실을 빠져나와 성종의 입원실로 향하며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대었다. 약 처방해주는거 아침,점심,저녁으로 식후 30분에 꼭! 챙겨 먹고, 성종이는 당분간 무리하면 안되니까 집에서 푹 쉬래. 오늘 오후쯤이면 퇴원할 수 있다니까 잘 챙겨서 퇴원하고. 참다못한 호원이 종국엔 인국의 입을 손바닥으로 턱 막아냈다. 진짜 니가 내 마누라도 아니고 쫑알거리지 좀 마. 알아서 하니까. 그런 호원의 말에 코웃음을 친 인국이 과연 그럴까~? 하며 얄궃게 굴었다. 6인실, 그것도 아이 몇명이 입원되어 있는곳이라 그런지 병실치고는 제법 시끄러웠다. 문을 열기도 전에 한 꼬맹이에 의해 문이 벌컥 열렸고 그 뒤로 병문안이라도 온건지 와르르 애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바람에 휘청이는 호원을 턱, 잡은 인국이 조심하랬잖아, 하고 핀잔을 주었다. 안그래도 열이 올라 세상이 핑글핑글 도는데 소란스런 주변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일단 해열제 좀 먹자.”“…아 씨발, 진짜 내가 한,두살배기 꼬맹이도 아니고! 작작해라?”“너 열 엄청 난다고, 씹새끼야!! 그러다 죽으면 난 어떡해!”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 인국을 멀뚱히 바라보던 호원이 성종이 누워있는 침대로 말없이 걸어갔다. 아니, 내말은! 그니까 나 사고칠때마다 덤탱이 씌울 너가 없으면 난 어떡하냐는 말이야, 새꺄. 인국의 말도안되는 변명에도 호원은 묵묵부답이었다. 촤륵, 하고 넘겨진 커튼 사이로 허여멀건한 성종의 모습이 보였다.“이제 그만 그만 가봐.”뭐? 일단 약 먹고! 정말 이렇게 요란스런 인국의 모습은 간만이다. 학교에선 온갖 똥폼 다 잡으면서. 성종이 깨겠다, 오늘은 고맙다. 약도 내가 알아서 챙겨먹을테니까 이제 그만 가. …….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인국이 뒷머리를 잔뜩 헤집으며 병실을 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호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야하는데 열이올라 그마저도 제대로 하질 못했다. 간이의자에 앉아 성종이 손만 꼭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다음달까지 삼백이야, 삼백.’‘싫다고!!! 너 이제 우리 아빠 아니잖아!! 제발 그만 좀 찾아와!!’‘이 씨발년이, 진짜!! 계집애같이 비실,비실거려서는 한번 친애비 손에 죽어볼래!?’‘…그 손 놔요.’‘어이, 큰아들. 다음달까지 삼백. 없으면 진짜 둘 다 내 손에 아작날 줄 알어.’한숨만 흘러나왔다. 삼백은 어디서 구할것이며, 아니 그것보다 지 주제를 모르고 삼백을 운운하는 아버지란 작자도 어이가 없었다. 인국에게 빌린 돈도 벌써 꽤 되고, 보증금도 거의 다 깎여 바닥을 치는 상황인데 삼백이라니. 똑딱이며 초침 흐르는 소리만 고요한 병실에 울려퍼졌다. 이젠 지겹다 못해 지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손에 잡히는 것을 쥐어들고 저와 성종에게 휘둘러대는 아버지나 성종이 아프다는 말조차 꺼내보지 못한 한심한 저 자신이나. 절로 욕지기가 흘러나왔다. 씨발…. 왠지 울고싶어만 졌다.* * *
일단 상이라고 했지만..... 상 중상 중하 하 로 일단 생각해두긴 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게 함정... T.T..... 불마크는 맨마지막에 장식하도록 하겠습니다 ^.^ ㅋㅋㅋ
금같은 피드백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연재중인 작품도 곧 올릴꺼에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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