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명 김여주
병명 해리성 기억장애를 동반한 알츠하이머
' 여주씨, 녹음 시작할게요. '
*
선생님, 제가 요즘 이상한 꿈을 꿔요.
모르겠어요. 얼마나 된 지는.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안나요.
요즘 들어 기억의 출처를 찾는 게 더 힘들어졌어요.
아시잖아요. 저 더 심해진 거.
선생님. '자각몽'이라고,
아세요?
보통 꿈 속에선 자의식이란 게 없잖아요.
그냥 흘러가는대로 관망하다가 잠에서 깨버리면 끝나는, 뭐 그런 수동적인 거잖아요.
근데 저는 꿈 속에서 제 의식이 있다는 걸 느껴요.
그리고 그 세상이 내가 만들어낸 세상인 것도 알고 있어요.
제가 밤을 무서워해요.
어릴 때부터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에서 자랐거든요 제가.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한 치앞도 안보이는 골목길이 꼭 제 미래같아서, 그래서 무서워했어요.
근데 그 꿈 속에서는 밤이란 게 없어요. 좀처럼 깜깜해지는 법이 없어요. 해가 절대로 지지 않아요.
아마도 제가 해가 지지 않도록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꿈 속에서 보이는 모든 것들은, 제가 전부 보았던 것들로만 이뤄져 있어요.
책들은 제가 읽은 것들만. 영화도, 게임도 전부 해봤던 것들만.
알아요.
저도 이게 말이 안된다는 것 정도는.
중요한 건 그 곳에 남자가 한 명 있다는 거에요.
네. 딱 한 명.
다른 사람은 절대로 없어요.
제가 꿈 속 세상에 있을 때는 그 남자와 저, 단 둘뿐이에요.
그 사람은 나를 따뜻한 눈빛으로 봐주고,따뜻한 말을 해주는 것 같아요.
꿈에서 깨면 많은 부분을 잊어버려서 거기까진 선생님한테 설명못하겠는데.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구요.
그래서 저는 그 곳에서 행복한 것 같아요.
고민할 일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가득 차 있고,아름답고 예쁘고.
나를 따뜻하게 봐주는 사람이 있고.
그 곳에선 그 사람을 잊는 일도 없구요.
꿈에서 깨기만 하면 저는 내내 울어요.
일어나자마자 거의 한 시간을 펑펑 울다가, 정신 차리고 씻는데 울컥해서 또 울다가.
배가 고파서 밥을 먹다가도 버럭버럭 눈물이 나는 거에요.
되게 웃기죠,
저는 꿈에서 깨기만 하면 그 남자 얼굴도 잘 기억나질 않는데.
무슨 얘길 하고 무슨 표정을 했는 지 기억도 안나는 주제에
그 사람이 너무 보고싶어서 눈물이 나는 거에요.
분명히 꿈 속 세상인데.
내가 잠에서 깨면 사라지는 그런 세상일텐데.
이상하게 내가 잠에서 깨어 있는 동안 그 사람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게 너무 서글프고 애달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제가 수면제를 매일같이 먹고 있다는 얘기, 했었나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어릴 때부터 수면제를 먹었었나봐요.
내성이 심하게 생겨서 이젠 한두알 정도로는 눈을 감을 수도 없는데.
그 사람 만나려고 요즘엔 잠이 들때까지 먹어요.
네. 병이 더 악화된다는 건 알고 있어요.
제 병이 알츠하이머랬죠.
점점 제 머릿 속 기억들을 좀먹는 무서운 병.
선생님.
제 얘기 들으시면서 이상한 거 못느끼셨어요?
말했잖아요.
그 세상에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만 가득하다고.
그 세상은 오롯이 제 의식으로 만들어낸 세상이라고.
근데 그런 세상에,
왜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가 있는 걸까요?
***
고또입니다.
거의 몇개월 전에 올렸던 프롤로그를 드디어 제대로 된 제목을 들고, 남자주인공을 정하고 돌아왔어요.
(전에 있던 글은 전부 지웠습니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말씀드리면,
제가 독방에서 썼던 꿈 속에서 만나는 남자에 관련된 고르기 글에서 파생된 글입니다.
제가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는 이야기라서 준비가 길어졌어요.
애달픈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여러분의 눈물샘을 놓치지 않을테야...!!
프롤로그부터 암호닉을 받아도 되나 싶지만...
이번에는 저도 꼭 대댓 달면서 소통하고 싶어서, 암호닉 받겠습니다.
천천히, 오래봐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