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루한 옷차림의 백현은 너무나도 쉬이 남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순사들 옆에서 종노릇이나 하는 놈, 친일파 등의 말로 백현에게 마구 비난을 퍼부었다. 백현은 근 3여년 동안 눈을 꾹 감고 귀를 틀어막은 채로 살아왔다. 나에대해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거야, 백현이 집으로 돌아와 입을 비쭉였다. 간밤에 내린 장맛비는 땅을 젖게 만들었고 백현의 닳은 고무신 또한 젖어들었다. 삐걱대는 미닫이문 소리는 언제나 듣기 거북스러웠다. 그리고 그 미닫이문을 열어젖히면 항상 같은 자세로 병상에 누워있는 백현의 어미가 있었다. 그녀의 호흡은 평온했지만 몰골은 산사람의 것 치고는 너무나 안쓰러웠다. 백현이 다 헤진 수건에 미적지근한 물을 묻혀 제 어미의 팔을 잡고는 살살 닦아내었다. 어느새 3년 째 였다. 백현의 어머니가 연유도 모른 채 잠자코 누워있는것이. 그리고, 하얀 제복의 청년의 손에 들려있던 검에 찔려 아버지의 그 용맹하던 눈빛이 갈 길을 잃어 그만 져버린 것이. 그 모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백현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짐승들의 먹잇감이 되어주는 수 밖에 없었다. 무더운 오뉴월의 장마철이었지만 어째 집안은 조금 스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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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헨리예요."
"...."
"영어, 할, 줄 모르죠? 아,음, 길이 어디예요?"
동양의 이목구비를 가진 자의 이름은 헨리라고 하였다. 그의 버벅거리는 한국어 솜씨는 보잘것없었다. 그는 아무래도 길을 찾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헨리는 손에 작은 쪽지를 쥐고있었고, 그것에는 '경성은행'이라 적혀있었다. 백현이 그에게 따라오라고 일렀고, 헨리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활짝 웃어보이며 백현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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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쁜놈이에요."
"네?"
"내 입에 풀칠하자고 그 짐승새끼들한테 빌붙어 먹는 하찮은 놈이에요."
백현의 목구멍에 무언가가 단단한게 박힌 듯 더 이상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백현의 눈망울이 가늘게 떨렸으며 두 주먹은 꽉 쥔 채로 몸을 조금 떨었다. 헨리는 완벽히 백현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백현의 떨리는 어깨를 잡고는 괜찮아요, 다 괜찮아. 하며 그를 위로했다. 곧 백현의 선한 눈매는 더 아래로 떨어졌고, 눈가에는 가득 물기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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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일말의 호흡을 내뱉지도, 들이쉬지도 않았다. 장마철이라 빨지 못한 이불은 눅눅했고, 때가 타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백현은 조금도 울지 않았다. 백현이 살며시 어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물 묻은 낡은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닦아내었다. 모두 마지막이었다. 그녀의 메마른 손등도, 매일 그녀를 닦던 이 수건도, 볼품없게 바랜 이불자락도 모두 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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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곧 다시 미국으로 가요, 백현."
"...잘가요."
"그게 전부예요? 나 다시 안와요, 백현."
"...가요, 늦었잖아요, 밤이에요."
백현이 먼저 뒤를 돌았다. 항상 헤어질 때 먼저 뒤를 도는 것은 백현이었다. 그저 헨리는 백현이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저멀리 보이지 않을 때 즈음에서야 뒤를 돌아 자신이 머물던 호텔로 향하곤 했었다. 헨리가 오늘따라 백현이 이상하는 것을 눈치챘다. 이윽고 헨리가 저만치의 백현을 따라가 손목을 잡고 그의 몸을 돌렸다.
"왜 그래? 나 무슨 잘못했어요?"
"그런거 아니에요."
"백현.."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이거 놔요."
백현이 헨리의 손을 뿌리치고자 팔을 세게 휘둘렀다. 그러자 헨리의 목에 걸려있던 카메라줄이 끊기며 카메라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투명한 렌즈에는 금세 금이갔고 여러개의 선을 만들어냈다. 백현이 놀라 카메라를 주우려고 했지만 헨리는 카메라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백현을 손목을 다시 잡았다.
"미, 미안해요. 헨리."
"말해요."
"네?"
"왜 힘들어해요, 나 속상해요."
어쩌면 그가 아끼던 카메라의 초점은 항상 백현에게 맞춰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장맛비는 뒷심을 발휘하는지 갑자기, 그리고 매섭게 내렸다. 젖은 머리칼의 헨리는 백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백현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을 뿐 어떠한 말도 하지않았다. 헨리가 미간을 약간 찌푸리더니 먼저 입을열었다.
"나는,"
"..."
"미국으로 같이 가자고 말하고 싶었어요."
"...헨리.."
"나랑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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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새끼가 그 양놈이랑 어울려 다닌다는 소문이 경성바닥에 쫙 깔렸어."
"아니에요, 그런거."
"헨리라는 그 새끼 자꾸 신문에 이상한 걸 쓰고다닌다고, 알겠어?"
"예?"
"처신 똑바로 하고다녀."
백현이 찬열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 이윽고 백현은 책상위에 올려져있는 신문을 보았고 그것을 펼쳐들었다. 신문에는 우리네 사람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는 모습과 순사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는 사진들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조그맣게 "Henry"라고 쓰여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글씨인지 알수 없었지만 헨리가 항상 수첩끝에 적어놓던 것과 일치했다. 백현이 신문을 챙기고 급히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서둘러 그의 얼굴을 봐야했다. 백현은 어쩌면 정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시간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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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누군가의 소행이 틀림없었다. 분명히 누군가의 악행으로 지금 그는 흙먼지에 쌓여 많이 이들에게 둘러쌓여있는 것이었다. 그의 흰 옷깃 사이로 새빨간 것들이 잔뜩 적셔졌다. 백현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들을 저지하기에 바빴다.
"그만해요, 제발!"
"이 새끼도 친일파 새끼 아니야?"
그들은 백현에게도 발길질을 했고, 쉽사리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어딘가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은 무언의 탄식을 내뱉으며 뿔뿔이 흩어졌다. 백현이 헨리의 얼굴을 안고는 피범벅이 된 헨리의 얼굴을 닦아내었다. 헨리가 가늘게 눈을 뜨고는 백현을 향해 웃어보였다.
"살빠졌어요, 백현."
"말하지마요, 헨리, 흐읍.."
"울지마.."
헨리는 얼굴위로 떨어지는 백현의 깨끗한 눈물이 금세 혈액과 섞여 붉게 변해버렸다. 호루라기를 분 사람은 순사들이었다. 그들은 헨리와 백현을 일으켰고, 찬열은 헨리를 병원에 후송시키라며 말하고는 백현을 끌고 차에 올라탔다.
"변백현."
"저도, 저도 따라갈래요, 헨리한테 갈래요."
"넌 닥치고있어."
"...."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 새끼 볼 일은 없을거다."
백현이 찬열을 응시했다. 찬열이 애써 백현의 눈길을 피하려는 듯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백현은 찬열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시는 볼 수 없다니, 그 안에 담겨있는 속뜻은 과연 무엇일까. 백현이 울음을 참으려는 듯이 옷자락을 꽉쥐었다. 찬열이 백현을 곁눈질하다가 살풋이 웃고는 다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
여름의 끝자락, 아카시아 꽃잎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허공에 흩날렸다. 그것은 마치 헨리와 백현같았다. 아름답지만 곧 소멸해버릴 그런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