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 화
八화
九 화
十 화
七.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작고 남은 자리에서도 미련이 느껴지는 황후의 뒷모습에, 왜 이렇게 마음을 써야 하지? 정국이 인상을 찌푸렸다. 황제의 새 하얗고 깨끗한 얼굴에 이처럼 금이 가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세상이 지루하고, 만사가 재미없는 황제였다. 황제가 그렇게 전쟁에 집착하는 것도 ‘죽음’이라는 자극적이고도 피가 낭자하는 그 일에 겨우 숨통이 트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허무할 정도로 고용하던 정국의 감정이 이토록 요동친다는 것은, 그 파문의 주동자가 황후라는 것은, 더더욱 정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철저한 금남의 구역이었던 황후전에 별감을 들이겠다 직접 주청했다. 분명 수없이 다짐했었다. 황후가 정부를 들이겠다 해도 그리하라 허락하겠노라고. 헌데 어째서, 한낮 별감에게 곁을 허락한 황후에 이리 화가 치미는 것이지? 당장 고고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황후를 잡아 세우고, 언제나 한결 같았던 너의 마음을 속살거려 달라 소리치고 싶었다. 참으로 모순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폐하, 욕간에 물을 준비하라 할까요?”
황후가 나갔던 문을 열고 내시백에 들어왔다. 조심스레 여쭌 말은 온종일 정무에 집중하지 못했던 황제를 위해 나름대로 신경 쓴 처사였다. 허나 정국은 내시백의 물음에도 묵묵부답으로 앉아 있다가, 이내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폐하?”
“황후전 서 나인을 데려와라.”
“예?”
“앞전에 짐이 심어 두었던 나인 말이다.”
황제의 부가설명에 그제야 명을 이해한 내시백이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황제는 자신의 사람을 몰래 황후전에 두었다. 황후가 언제 어디서 무얼 하는지 보고받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그 나인을 황후전에 보낼 때부터 내시백은 황제의 의중이 궁금했다. 늘상 황후전 일엔 일체 신경도 쓰지 않는 척 하면서…. 존엄한 웃전의 생각을 어찌 다 헤아릴까. 생각해보니 황제가 서나인을 찾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내시백도 잠시 그 존재를 잊고 있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시백은 사사로운 생각을 접은 채 황후전 앞에 당도하여 나인들을 찬찬히 훑었다. 혹여 도미의 눈에 띄었다간 번거로운 자문을 피할 수 없을 테니 조용히 황제가 명한 나인 하나만 데려갈 생각이었다.
눈을 내리깐 채, 읍을 하고있는 나인들 사이에서 붉은 실로 머리를 묶은 나인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내시백의 손으로, 대명전에서 황후전으로 거처를 옮긴 바로 그 서나인이었다.
“너.”
“…….”
“대명전에서 부르신다.”
내시백은 서나인의 곁으로 다가가 존명을 전한다. 그러자 나인은 금새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조용히 내시백의 뒤를 따랐다. 황후전 궁녀가 당도한 황제의 처소. 겹겹이 휘둘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른하게 의자에 기대 눈을 감은 정국이 보였다. 나인은 호아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정국이 내시백을 더러 나가라는 듯 휙 손짓을 취했다.
“황제폐하를 뵈옵니다.”
나인이 잔뜩 긴장된 얼굴로 정국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찬찬히 눈을 뜬 정국이 나인을 더러 고개를 까딱인다.
“이리 와.”
가벼운 말이었지만 나인은 온 몸이 떨림으로 요동치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 누가 저 존귀한 황제 앞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음은 급했지만 실수하는 것보단 느린 것이 났다. 나인이 조심스럽게 천천히 한 발짝 다가가 황제의 근처에서 다시 무릎을 꿇었다. 차마 올려다보지 못했지만 정국과의 거리가 좁혀졌음이 느껴졌다.
“널 찾은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군.”
“예, 예. 폐하.”
“자, 오랜만에 네 할 일을 수행해야지? 황후전에 최근 왕래하던 별감, 그 자가 황후와 무슨 사인지, 황후전에 들어 무슨 일을 했는지 본 대로 상세히 고해라.”
최고상궁 도미가 기세등등하게 지키고 있는 황후전이라 그 보안이 철옹성 같을 것이란 착각은 버려라. 이 넓은 황궁에 황제의 손길이 뻗지 않은 곳은 없다. 황제가 손을 들어 나인의 턱을 부드럽게 치켜들었다. 나인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린다. 아아. 다 이런 식이지. 저 비정하고 차가운 황제에게 홀려 이 황궁의 여인 모두가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니 말이야.
“벼, 별감이 황후마마와 어찌 아는 사이인 지는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마께선 태후마마께 꾸준히 문안 가시는 걸 제외하곤 그 누구와도 친밀하게 지내시지 않거든요….”
“…….”
“아, 얼마 전에 황후전 바닥이 부서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최고상궁께서 별감 하나를 불러오셨습니다.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했으나 다른 나인들의 말을 들어보니 젊고 훤칠하다고… 그 별감이 맞는 것 같사옵니다!”
나인은 제가 아는 것은 최대한 많이 황제에게 알려주고 싶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녀가 황후에 대한 견문을 소상히 아뢸수록 정국은 점점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바닥은 또 어쩌다 부순 것이야. 그 성격이 당최 어딜 가지 않는군.
“그리고 얼마 전에 혼자 뛰쳐나가신 황후마마를 그 별감이 모시고 왔는데….”
찬찬히 고하던 나인이 말끝을 흐렸다. 아직 어림에도 오랜 황궁생활로 해도 되는 말인지, 안 되는 말인지 혼자 사리판단을 하고 있는 듯했다. 정국이 작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모르오나, 최고상궁께서 두 분이 계시는 처소에 술상을 가지고 들어가셨습니다.”
허. 정국의 입에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겁도 없는 별감과 지극히 높은 황후가 단란히 술판을 벌였다? 상상치도 못한 종류의 사실에 황제는 어찌 반응해 줘야 할지 몰랐다.
“아, 폐하. 제가 내시백님을 따라오기 전에도 그 별감이 황후마마와 함께 황후전으로 왔사옵니다!”
황후는 방금 전 대명전에서 나갔으니 그 길로 곧장 별감과 만난 것이 분명했다. 생각할수록 맹랑한 놈이었다. 나인이 제법 명쾌한 답들을 던졌음에도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지는 기분이다. 정국이 나인의 얼굴에서 손을 거뒀다. 황제의 시선이 제게서 멀어짐을 느낀 나인이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별감과는 상관없는 일 같은데… 최고상궁께서 도성 여인들이 입을 법한 옷을 구해오라고도 명하셨습니다. 아마 황후마마께서 입으신 텐데, 갑자기 그 옷이 왜 필요한지 자세한 것까지는 저도….”
자신의 감정을 어찌 추스를까를 고민하던 황제의 얼굴이 일순간 멎었다. 불안한 예감이 틀리지 않는 다는 걸 뼈저리게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별감을 만난 뒤로 황후가 이상해졌다. 자꾸만 넘지 않던 선을 넘어가는 기분이다. 황제를 연모한다고 그 어떤 누구보다도 가련하고 무조건적으로 욕망을 불어넣던 황후였다. 그런 황후가… 황제의 손아귀에서 감히, 탈출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황궁에만 머무르는 황후에게 도성여인이나 입을 법한 평범한 옷이 필요한 이유는 뻔했다. 황궁이 아닌, 도성에 나갈 일이 있으니까. 설마 그 별감을 따라 동행하려는 건가? 감히, 황후가 황제의 황궁을 벗어나서?
“폐하!”
홀로 남겨진 나인의 부름이 무색하게 정국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밖에서 안의 이야기가 궁금해 문에 귀를 바짝 붙이고 있던 내시백도 화들짝 놀라 제 정신도 챙기지 못한 채 부랴부랴 황제의 뒤를 따라갔다. 그 발걸음이 너무도 완고해서, 차마 어디 가시냐는 물음도 할 수 없었다.
없다.
발길이 붙은 마냥 죽어도 황후전을 지키고 있을 것 같던 황후가 황후전에 없었다. 도미가 갑자기 들이닥친 황제에 놀라 허리를 바짝 숙였다. 30년 경력으로도 만회하지 못하는 일이, 지금 눈앞에 일어났다. 하필 태형과 함께 황후가 황궁을 나선 지금, 황제의 행차라니.
“황후는 어디 있지?”
물음이었지만 마치 물음이 아닌 듯 낮고 단정적이었다.
“폐하….”
“황후전을 불태워버리기 전에 사실대로 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저 기세로 보아 정말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 도미는 일생일대의 절망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평소엔 들여다보지도 않던 황후전에 하필 지금 행차한 황제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본래 자신의 목이 베인대도 고하지 않을 것이었지만, 황후전의 명운이 달린 지금 도미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로 한다. 황제는 어차피 황후가 뭘 하든 관심이 없으니 천자를 속일 바엔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났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황후마마께서는….”
“…….”
“잠시 외출을 하시기 위해 정문으로 가셨습니다.”
정국이 입안 여린 살을 씹었다. 적이 눈앞에 있을 때조차 느긋하던 황제의 발걸음이 초조하게 이어졌다. 황제가 다녀간 황후전은 폭풍이 지나간 것보단 폭풍 전 전야를 예감하듯 무섭게 고요했다. 마마, 무사만 하십시오. 하는 도미의 간절한 바람만이 황후전을 굳건히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황제가 이리도 멀리 나온 적이 있었던가. 대명전과 태후전, 그리고 대전과 대청전 사이만을 이동하던 황제의 길이 넓은 황궁이 끝나는 정문을 향해 거침없이 향하고 있었다. 황제의 상징, 곤색 용포의 옷자락이라도 발견한 사람들은 일사분란하게 예를 취했지만 황제는 그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굴었다. 마침내 정국의 칠흑 같은 눈동자에 익숙한 뒷모습이 비친 순간, 원인을 알 수 없는 묵직한 고통이 가슴을 울렸다. 여전히 위태로운 그 뒷모습은 천천히 그리고 여실히 제게서 벗어나려 한 발 한 발 뻗어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기색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 황후는 어울리지 않게 매정하게 굴었다. 항상 관망했다. 저 약한 사람이 제 품으로 들어오려 발버둥 칠 때, 손을 뻗으면서도 철저하게 품을 막았다. 그리고 제게 사랑을 주지 못해 안달인 황후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헌데 황제는 지금 마치 다른 사람처럼, 나아갔다. 환영처럼 금방이라도 누군가 제게서 앗아갈 것만 같던 황후가 제 품에 들어온다.
정국은 황후의 허리를 감싸 안고,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발 나 좀 사랑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황후의 마음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어디 가.”
너는 나를, 절대 벗어날 수 없다.
황후는 정국의 생각보다 훨씬 더 발칙했다. 사근거리는 말소리로 모진 말을 던질 줄도 알았고, 몸으로 저를 녹일 줄도 알았다. 황후를 안고 있던 몸이 끝없는 상실감에 사로잡힌다. 그 누구보다 고고하게 제 발로 황궁을 걸어 나가던 황후가 기가 막혀서 정국은 허탈한 얼굴로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폐하.”
“잠행을 갈 것이다.”
내시백이 조심스럽게 황제를 불렀다. 거센 화, 혹은 태연한 얼굴을 드러낼 줄 알았던 정국은 예상 밖으로 천자의 면모를 보였다. 이 무슨 뜬금없이 잠행이라니? 내시백이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황제를 바라봤다.
“익위사는 어디 있지?”
“여기 있습니다.”
거침없는 황제를 따라 바쁘게 움직이던 일행을 어느새 따라잡았던 지민이 태연하게 합류해 있었다. 헌데 지민의 얼굴도 황제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동요의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마침 태후궁에서 돌아온 건가? 그럼 나와 함께 잠행을 가야겠다. 익위사에겐 거절할 권한 따윈 없다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겠지?”
정국의 남의 사정은 일도 고려하지 않은 말에 지민은 적응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속보이는 잠행의 목적은 어쨌든 지민이 신경 쓰이는 부분과 동일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내시백이 간곡히 ‘폐하! 갑자기 잠행이라니요! 오늘 대전회의마저 일찍 파하셨으면서, 황궁을 비우시면 아니되옵니다아!’ 하고 사뢰었지만 황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제 고집대로 익위사와 황제는 도포를 차려 입고 황궁을 나섰다.
“폐하께서 다치시면 신이 자결해야 할 것입니다.”
“미친놈.”
황궁의 주인이 황궁을 나선다. 지민이 문을 지나며 필요이상으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익위사의 임무가 아무리 황제를 지키는 것이라 해도 저리 극단적인 말로 제게 경고를 건네다니, 가히 지민다웠다.
“잠행의 목적이 뭔지는 안 물어보나?”
“궁금해 해서도 안 되고, 알 필요도 없다는 거 아실 텐데요, 헌데도 그리 말하시는 걸 보니 물어봐드리길 바라시는 군요. 왜 잠행을 가십니까?”
지민의 말에 정국이 호탕한 웃음을 내뱉었다. 역시 익위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무례한 만큼 저를 기쁘게 해 주니 말이야.
“황궁 항아들이 번살이를 위해 집에만 갔다 오면 사라진다는 소문이 있다. 항아들뿐만 아니라, 도성에 그 나이 또래 여인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한 둘이 아니야. 그걸 알아보러 가는 거다.”
지민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말대로 그 소문은 도성 전체에 퍼져 있고, 지민도 잘 알고 있었다. 헌데 이리도 갑자기? 필시 황제의 변심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가령 제 품을 애살스럽게도 끌어안고 이내 벗어나버린 황후라던가. 지민의 생각이 상황에 딱 들어맞았다. 황제가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황후와 다정히 너울을 둘러주는 태형이 있었다. 정국의 눈썹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다가가지도 말을 걸지도 않은 채 담담히 둘을 바라보던 황제는, 그들이 걸음을 옮기자 따라 걷기라도 하듯 발을 움직였다.
사적인 목적이 아니라고 잡아떼더니 이건 너무도 사적이지 않은가. 황후가 가는 모든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으니 말이다. 숨통이 트일 공간이 필요하다며 거창한 말을 내뱉고 나간 것과는 다르게 황후는 너무도 소소한 것을 누리고 있었다. 예를 들어 꿀경단이라던가.
태형이 황후의 손에 경단을 쥐어준다. 그리곤 둘이 마주선 채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가 하더니…. 태형이 얼굴을 바짝 황후에게 가져다댔다. 정국의 무색이던 얼굴에 진한 색채가 스쳤다. 황후의 손에 들린 경단을 하나 빼 먹은 태형이 싱글싱글 웃는 것이 확연히도 보였다. 허나 정국이 집중하는 것은 돌아서 있는 황후. 대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무슨 말을 나누는 것인지 하나도 들리지 않아서 황제는 마냥 답답했다.
경단을 먹던 두 사람이 이젠 인형극이나 보러 자리를 잡고 앉는다. 대체 뭐 저렇게 사소한 일들을 단 둘이서 하는 것이지? 예상처럼 거창한 일이 아니라 더더욱 심기가 상했다. 저 정도는 황제 자신과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닌가. 오랫동안 황후를 밀어내온 사람치곤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지켜보실 겁니까?”
인형극 전에도 태형과 이야기를 나누던 황후의 옆모습이 보였다. 환히 웃는다. 평생 울음을 참거나 혹은 터뜨리거나, 발악을 하거나 화를 내는 것밖에 본 적이 없어서 황후의 웃는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마치 그리움이 묻어나는 시선으로 황후를 바라보던 정국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이렇게 지켜만 보는 것은 황제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헌데도 황제는 계속해서, 여실히 그걸 하고 있었다. 극이 재미가 없었는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난 황후와 태형이 밖으로 나온다. 황후는 지친 듯 나무 앞에 주저 앉아버렸다. 하긴 황후전 밖엔 도통 나가지 않던 사람이라 시장을 걸어다니는 것이 보통일은 아닐 테지. 정국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발, 여기 얌전히 계십시오.”
황후더러 대충 무언가를 당부하는 듯한 태형이 잠시 머뭇대다 자리를 뜬다. 정국이 짙은 눈썹사이를 일그러뜨렸다. 황후를 저기 혼자 두고 어딜 가는 것이지? 이 사람 많고 위험요소도 많은 시장에 황후를 덩그러니 놓고 말이다. 정국의 걱정이 적중하듯 주저앉아 쉬고 있는 황후에게 한 사내가 다가왔다. 발끈한 정국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황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 잠깐!”
“…….”
“다가오지 마라. 오 보 이상 떨어져라.”
누굴 대할 때나 변하지 않는 저 오만한 말본새가 상당히 어이없었다. 저 정도 거구의 사내가 혼자 있는 와중에 다가오면 위협을 느낄 법도 한데, 황후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미치겠다. 정말.
“오 보 밖으로 물러나거든 내 아무 죄도 묻지 않겠다. 당장 장터 앞에서 육시당하고 싶지 않으면 운 좋은 줄 알고 물러가라.”
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거지? 저러다 성격 나빠 보이는 사내의 손이 올라가겠다. 생각하던 찰나. 얼굴이 울긋불긋해진 사내가 황후를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황후는 대체….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짚던 정국이 하는 수 없다는 듯 황후를 향해 나아갔다.
皇后
列傳
“부인.”
황후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헌데도 정국은 태연하게 다정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곁으로 다가갔다. 황상…. 황후가 입모양은 중얼였다. 목소리를 낼 수도 없이 당황했다는 신호였다. 그에 웃음이 나올 번한 정국은 애써 그 즐거움을 참지 않았다. 지금은 오히려 그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황후의 어깨를 다정히 감싼 정국이 황후를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눈으로 앞에 선 불한당 사내를 보았다.
“허, 네 놈은 또 뭐야? 이 년 기둥서방이냐?”
“…놈?”
“…….”
“뭣 하느냐! 빨리 빌어라!”
때 아닌 정국의 등장에 얼떨떨해하던 황후가 이번엔 거침없는 사내의 언사에 기겁할 듯 하며 손을 저었다. 저를 더러 ‘년’이라 칭한 것보다, 황제에게 ‘놈’‘이라 칭하는 것이 더 또렷하게 귓전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뭣하느냐 얼른 무릎 꿇고 빌으래도! 정말 육시 당하고 싶은 것이냐?”
“하이고. 아까부터 네가 무슨 공주라도 되는 듯 명령질인데, 이게 어디다 대고!”
황후 딴에는 사내의 목숨을 걱정해서 해준 말인데, 사내는 계속되는 황후의 명령적 어조에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모양이다. 마치 버릇처럼 우락부락한 손을 치켜든 사내가 황후를 겨누었다. 허나 얼마 안 가, 그 손은 정국에게 잡히고 말았다.
“부인,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정국에게 손을 저지당한 사내가 힘을 주어 벗어나려 애썼다. 허나 정국은 눈빛하나 흔들리지 않고 사내의 손을 속박한 다음, 여유롭게 황후에게 말을 건네기 까지 했다. ‘부인’이란 칭호도 당황스럽기 그지없는데, 만인지상 황제의 존대라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 몰랐던 황후는 그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냥 차라리 태형이라도 빨리 와 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봅시다, 어디 상한 데 없나.”
어깨를 감싼 접촉만으로도 황후의 심장은 터질 듯 벌렁거렸지만, 거기다 정국이 황후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잡고 제게로 돌린다. 정말 어디 다친 곳이 없나 확인하듯 정국의 눈동자가 황후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 내렸다. 시선 하나에도 마치 화염이 터지는 느낌이다. 황후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정국은 계속해서 집요하게 눈을 맞췄다. 아, 가깝다
.
“아니 이것들이!”
가볍게 자신의 손을 틀어쥐곤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는 정국이 상당히 고까운 듯 사내가 소리쳤다. 허나 그게 끝이었다. 고작 손 한 번 저지당한 것으로도 사내는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정국은 사내가 뭐라 무례하게 소리치던 황후를 향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손으로 살짝 지시를 내릴 뿐이다. 세 보 떨어진 곳에서 황제가 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지민이 그 신호에 따라 움직였다. 건조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지민은, 이 상황이 상당히 불편했다. 황후가 정국의 뒤로 다가오는 지민을 보곤 반색했다.
“익위사, 너도 나왔구나!”
지민이 사내에게 향하기 앞서 황후의 인사에 작게 눈을 맞춰준다. 황상을 향한 충성과 명민함 그리고 힘을 가지고 있던 익위사는 황후를 어찌 대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으나, 그 씁쓸한 눈길은 아무것도 모르는 황후에게 나직하니 내려앉았다. 중요한 것은 정국의 심사였다.
“어딜 보는 것입니까?”
“…예?”
“부인이 걱정 돼 다 내팽겨 치고 달려 온 나는 보이지 않습니까?”
분명 불한당 사내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연기하는 것이라면 앞전에 부인, 이라는 호칭만으로도 충분했다. 헌데 어째서 황제는 정말 황궁을 나선 자신을 걱정하여 나오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일까. 황후가 고개를 도리질 쳤다. 이 상황이 도통 말이 되지 않아서였다.
“오호라. 혼인도 안 한척 하며 꼬리칠 땐 언제고 이젠 서방이고 집안 무사놈이고 다 데려오는 게냐?”
그래서 이 사내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만약 황후가 뭐에 취하기라도 한 듯 몽롱한 상태만 아니었다면 그 독한 손에 이끌려 황궁에 잡혀갈 지도 모르니까. 정신이 팔려 사내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황후를 대신하여 지민이 사내를 제대로 응징했다. 익위사의 명성에 걸맞게 사내가 넌 또 뭐냐, 하는 눈빛을 보내자마자, 날렵한 움직임으로 사내의 명치를 가볍게 격파해 거구의 몸을 쓰러뜨렸다. 자세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채 바닥에 고꾸라진 사내는 외마디 비명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지민의 무덤덤한 시선을 마주하자 사내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더 덤벼서 득 볼 것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하지 않겠다.”
저 눈꼴 시린 한 쌍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 단호한 지민의 말에, 사내는 핏발 선 눈으로 정국과 황후를 노려보다가 이내 엎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당최 이 사람 많은 시전에서 사소한 잡음 없이 자신을 제압한 작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참 불신의 눈으로 지민역시 바라보던 사내가 뒤돌아서 달렸다.
“…어찌 된 일입니까?”
사내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황후가 정국을 바라봤다. 어느새 정국은 아까와 같은 표정은 지은 적도 없다는 듯 무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참 장하더구나. 황궁도 아닌 곳에서, 정말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리 당당히 구는 것이지?”
“…허면 저런 불한당에게 고개라도 조아려야 했나요?”
“하아,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황후는 평소처럼 정국의 말을 되받아쳤다. 황제의 말인데,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더라도 아무렴 수긍하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옳았다. 헌데 저 억울하다는 듯 뻔뻔스러운 태도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황상께선 잠행이라도….”
“임자는 이곳이 황궁이 아니란 걸 알았으면 좋겠는데.”
습관적으로 ‘황상’이라는 말을 내뱉는 황후를 급히 가로막은 정국이 태연하게 고개를 까딱인다. 부인에 이어 뼈에 시리도록 다정한 호칭에 황후가 눈을 부릅뜬다.
“아까부터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평소와 이리도 다르게 구시니 신첩이 가늠을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부군.”
부군. 이라는 말에 정국의 태연무색하던 얼굴에 금이 갔다. 황후가 제대로 맞받아치고 있었다. 금방 황상이라는 호칭을 정정하라는 신호를 보냈더니 부군이라. 여염집 아내가 제 남편을 부르는 다정한 명칭에 정국은 한방 먹었다는 듯 입가를 끌어올렸다.
“잠행 중에 이대로 두면 네가 끌려가기라도 할 것 같아서 잠깐 참견한 것뿐이다.”
잠깐 참견이라 기엔, 너무도 많은 일을 하지 않았나. 황제의 무덤덤한 말에도 아까의 기억이 다시금 새록새록 피어오르자 이내 황후의 얼굴엔 화사한 미소가 들어찼다.
“신첩을 걱정하신 게로군요!”
“뭐?”
“신첩이 걱정되어 참견하신 게 아닙니까? 그렇지?”
저 발랄한 말에 정국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황후를 바라보는데, 황후는 제 멋대로 단정 지으며 지민에게 눈길을 돌린다. 그렇지? 하고 긍정을 요구하는 듯한 황후의 질문에 지민은 애써 황후의 시선을 피했다. 다 알면서 대체 뭘 묻는 거지. 정국은 완전히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마.”
저와 얼굴을 맞주하고 싶지 않다는 듯 피하는 정국에도 그저 생글생글 웃던 황후가 기다리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왔구나.”
손에는 시원한 감주와 약과를 들고 걸어오던 태형이 황후를 향해 반색하다가, 이내 그 옆에 있는 작자가 황제라는 것을 안 순간 경직되었다. 황후의 시선을 따라 정국역시 고개를 들어 태형을 본다. 태형과 황제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삼자대면, 아니 사자대면이었다.
/ 황후열전
정국은 지금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다. 익위사와 함께 간단히 잠행을 나오는 것은 익숙했다. 헌데 어째서 황후를 황궁으로 데려가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태형까지 합류하여 단란히 넷이서 서시를 누비고 있는지 몰랐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제 옆에 황후가 서고, 또 그 옆에는 태형이 서 있다는 것이었다. 정국은 뒷짐을 지고 그 어느 것도 신경 쓰이지 않는 것처럼 굴고 있었지만, 지민의 제 주군의 표정을 정확히 읽어냈다. 자신도 저 별감 놈이 거슬리는데 황제라고 오죽할까.
“용기가 가상하구나.”
“…….”
“황후를 꾀어 내 황궁 밖으로 데리고 나온 것도, 황후라는 신분의 여인을 시장 한 가운데 덩그러니 버려 둔 것도.”
그래서인지 정국의 말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태형은 황후 건너에 서 있었지만 정국의 말을 못 전해들었을 리가 없다. 태형은 티나지 않게 살풋 웃었다. 그리곤 뭐라 입을 열려고 하는데, 그 말은 황후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신첩이 그러겠다 하였습니다. 저를 두고 간 것도 제가 목이 마르다 떼를 쓰는 바람에 마실 것을 잠시 사러 갔던 것이구요.”
태형이 변명을 했어도 짜증났을 테지만, 대놓고 태형을 변호하는 황후의 말을 듣자 목이 탄다. 지금 영원히 제 편일 것 같이 굴던 황후가 제 앞에서 누굴 감싸는 것이지? 정국이 미간을 슬쩍 좁혔다.
“그럼 저 믿을 것 없는 자를 따라나선 널 질책해야 하나?”
“믿을 만한 자입니다.”
아까부터 상황이 묘하게 흘러간다. 편을 굳이 나누자면 태형을 몰아세우는 황제와 그 뒤에 묵묵히 선 지민이 한 패, 질책의 대상인 태형을 그를 변호하는 황후 이렇게. 아주 재밌다는 듯이 웃음 짓던 태형이 황후의 귀에 바짝 입을 가져다 댔다.
“지금 여기서 제 편을 드셔도 되는 겁니까?”
갑작스런 귓속말에 당황한 황후가 어깨를 바르작 떨었다. 순간 걸음이 느려진 황후와 태형이 옆에서 보이지 않자, 정국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눈에 담기는 광경에 정국은 입 안을 씹었다. 황후에게 밀착하여 밀담을 건네는 패기 넘치는 태형의 행동에, 황후의 작은 얼굴이 동요된다. 무슨 말들을 사근거리는 지 황후는 그 상황을 정국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태형을 쳐내지 않았다. 오히려 저게 더 익숙한 듯 굴었다. 정국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네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난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황후는 저의 이 사소한 행동이 정국의 마음을 뜨겁게 불사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저 역시 태형의 귓전에다 대고 나긋한 음성을 불어넣는다.
“허면 당신의 이름은 나만 부르게 해줘요.”
미세하게 들리는 태형의 말에 황후는 간지러운 듯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붙였다. 대화의 내용을 모르고 본다면 그 어떤 애정어린 말을 건네는 중이라고도 오해할 수 있을 법한.
“황상께선 궁금해 하지도 않으신다니까. 시끄러우니 그만 빨리 가자.”
황후가 태형을 떼어내곤 도도도 걸어 정국의 옆에 섰다. 작은 고개를 들어 정국을 슬쩍 살핀다. 심기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신가? 이런 일엔 도통 눈치가 없는 황후는 황제의 저 굳은 얼굴을 잠행의 목적과 연결시켜 생각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황제의 뒷짐 진 손에 단단히 힘이 들어가 있다. 뒤에서 그걸 확인한 태형은 빙긋 웃으며 이내 일행을 따라 걸음을 놀렸다.
“부군! 이왕 나오신 거 저 인형극을 보시지요. 저게 서시의 명물이랍니다.”
길고 긴 장터를 또 걷다보니 아까와는 또 다른 인형극이 보였다. 사람이 가득 몰린 곳을 가리키며 황제에게도 그걸 소개해 주고 싶다는 듯, 황후는 태형의 설명을 인용했다. 황제에게 인형극이라 이 무슨 어울리지도 않는 조합이란 말인가. 지민이 속으로 생각했다.
“자자, 역적이 된 집안의 여식과 만인지상 황제의 금단의 사랑 이야기! 한 분당 한 냥입니다!”
설마 황제가 볼까? 저 삼류 인형극을? 지민이 의문스런 눈길로 정국의 의중을 살폈다. 아까부터 굳어진 얼굴로 황후가 가리킨 극을 쳐다보던 황제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저 낭만 없고 재미 모르는 사람이 인형극이라니. 태후에게 더러 당신 아드님이 시장에 나가서 인형극을 보시더이다 전하면 기함이라도 내지를 일이었다. 정국의 긍정에 다시금 환한 미소를 지은 황후가 정국의 손을 덥썩 잡는다. 놀란 기색의 정국은 하마터면 당황을 곧이곧대로 드러낼 번했다. 황제의 손을 이끌고 황후는 극을 하는 곳으로 저벅저벅 나아갔다. 낯선 의복치마의 품이 좁아 걸음이 흐트러질 번 한 것을, 태형이 잡아주었다.
“조심하십시오.”
“그래, 고맙구나.”
태형의 손을 잡고 다시 몸을 지탱한 황후가 태형을 더러 환히 웃는다. 황후에게 이끌려 가던 정국은 그걸 보며 다시 한 번 알 수 없는 짜증에 휩싸여야 했다. 황후는 자리를 잡고 아까 태형이 그랬던 것처럼 제 너울을 바닥에 깔았다.
“자, 앉으시지요.”
황후의 말에도 정국은 물끄러미 자리를 바라봤다. 저길 앉으라는 말인가? 황후는 제가 먼저 너울을 깔고 앉음으로 명쾌한 대답을 제시했다. 황제더러 바닥에 퍼질러 앉아 인형극을 보라니, 황후 말고 이리 명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이내 바람 빠진 웃음을 내보인 정국이 황후의 옆에 앉았다. 대체 알 수가 없다는 듯 황제를 보고 고개를 젔던 지민도 하는 수 없이 착석했고, 태형도 당연한 듯이 황후의 옆에 자리했다.
“아까 그리도 못마땅해 하시더니,어찌 또 어찌 이 맥락 없다는 극을 보러 오신 겁니까?”
배경음이 웅장하게 깔리고 아까처럼 부실하지만 정교한 인형이 등장했다. 조용해진 틈을 타 태형이 황후의 귓전에 다가와 또 조용히 물었다.
“황상은 관용적인 분이시니라. 나보다 덜 엄격하게 보실 게야. 걱정 말아라.”
약간은 벌써부터 지루하다는 기색이, 또 약간은 관심 있는 기색이 보이는 황제는 턱을 괴고 눈앞에 보이는 인형극에 집중했다. 헌데 그 집중을 또 깨뜨리는 것이 있었으니, 보란 듯이 옆에서 소곤거리는 황후와 태형이었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 둘만의 은밀한 대화는 정국의 심기를 상당히 어지럽혔다. 황제답지 않게 이상한 욕심이 뱃속을 타고 뜨겁게 치솟았다. 옆에 앉아 태형과 밀담을 나누는 황후가 저만 보게 만들고 싶다. 황제는 상당히 실천적인 사람. 결국 그 욕심을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극에 집중하고 있는 지금, 정국은 저 역시 정면을 집중하면서 장난스럽고 느긋한 손으로 황후의 손을 잡았다. 놀란 황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짐짓 태연하게 극을 보는 척 하며 황후의 손을 느긋하게 매만지다가 찬찬히 훑었다. 황제의 손이 집요하게 손을 유린할수록 저릿하게 올라오는 떨림에 황후는 제 손을 빼려고 시도했다.
“황상….”
황후가 당황을 드러내듯 낮게 불러보아도 정국은 뻔뻔스럽게도 대답은 물론, 시선 한 자락조차 주지 않았다. 황후에 비해 크고 단단한 손이 깍지를 껴온다. 여실히 느껴지는 손의 감각과 온기가 두 볼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사람이 사방에 깔려있어 크게 말하지도 격렬히 거부하지도 못했다. 정국은 그걸 노리기라도 한 듯 깍지 낀 손에 좀 더 힘을 실어 넣고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황궁의 정문 앞에서 몸을 끌어안았을 때보다 미묘하고 간지러운 기류가 흘러 황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태사 댁의 현명하고 어여쁜 낭주, 한 순간의 폭풍에 휩쓸려 역모의 주도자가 되는데!”
“저런.”
뻔뻔하다. 이리도 뻔뻔할 수가! 태연자약하게 인형극에 하나하나 반응하며 안타까움의 탄식을 내뱉는 정국을 황후가 조마조마한 눈길로 쳐다봤다. 정말 인형극이 재밌기라도 한 듯 황제의 시선은 거기 고정돼 있다. 황제와 맞잡은 손에 이리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자신뿐인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한 황후는 저도 황제를 따라 정면을 본다. 어디 한 번 해보시라지. 이런 작은 마찰에도 반응하는 것이 자신만 연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자 기분이 상했다. 황후는 저역시 이런 깍지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인형극을 보기 시작했다. 옆에서 태형이 뭐라 말하는 게 느껴졌지만 답할 정신도 없었다.
정국이 힐끔 황후를 흘겨봤다. 이젠 저도 신경 쓰지 않는 척 해보겠다는 건가? 장난기가 돋은 황제가 깍지 낀 손을 든다. 대체 또 뭘 하시려고. 황후가 속으로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 무색하게, 이어지는 정국의 행동에 황후는 질겁을 했다. 정국이 황후의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깨물었다. 바로 손을 빼내려는 황후의 노력이 무색하게 정국은 강한 악력으로 황후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황후의 손이 황제의 입가에 닿는다. 손을 입술에 가져다 댄 것이지만, 마치 입을 맞추는 듯해서 황후는 급히 숨을 삼켰다. 대체 이 짓궂은 일에 원흉을 알 수가 없다.
“부인.”
“…….”
“연극은 아주 깁니다.”
아아…. 귓가에 속살거리는 말이 환영처럼 멀어졌다. 정국의 장난기 가득한 음성에 황후는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황제는 연극이 끝나기 전까지 황후를 놓아주지 않았다.
八.
“익위사라는 직위가 이리 한가한 것인 줄 몰랐습니다. 매일 태후께 가셔야한다 들었는데….”
“그리 좋으면 네가 하던가.”
“그러게요. 제게 그런 일을 시켜주시면 좋을 텐데.”
“성가시기 짝이 없군.”
태형의 말에 지민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인형극이 끝나고 난 뒤 여전히 서시를 누비는 통에 지민과 태형은 언제 그렇게 친해진 것인지 겉보기엔 가벼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그 속 내용은 서로의 신경을 살살 긁는 것일지는 몰라도.
“익위사. 나는 네가 이렇게 말을 잘 하는 줄 몰랐다.”
황후가 감탄을 하며 지민을 향해 말했다. 나는 원래도 말을 잘 하는 사람인데, 당신의 앞에만 서면 말문이 막힌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지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헌데, 두 분… 왜 그러십니까?”
“그러게요.”
빙긋 웃으며 익위사에 감탄하는 황후를 바라보던 태형이 물었다. 지민도 태형이 지적한 내용이 아까부터 걸렸다는 듯이 의문스런 시선을 던졌다. 황후가 살짝 벌어졌던 입을 꾹 다문다. 죽어도 황제의 옆자리를 고집하며 보폭이 큰 황제와 걸음을 맞추기 위해 열심히 발걸음을 놀리던 황후가 맨 가장자리로 이동해 있었다. 그러니까 황후 옆에 태형, 그 옆에 지민, 그리고 다른 쪽 끝에 정국이 서서 걷는 중이었다. 인형극을 보고 난 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정국은 아무 말이 없다. 황후도 태형의 뒤에 살짝 숨어서 황제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다.
“…아, 아무것도 아닌데?”
황후가 천연덕스레 여유로운 척을 하며 말했다. 근데 왜 고개를 못 드시냐고요. 태형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황후를 보며 이마를 톡 쳤다. 순식간에 눈을 부른 뜬 황후가 매끈한 이마를 문지르며 태형을 쏘아봤다,
“정말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지민은 아까부터 뒷짐을 진 채 얼굴로 ‘사는 게 재미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정국을 향해 물었다. 익위사의 진지한 질문에 정국은 그 너머너머의 황후를 흘겨보다가 무심히 입을 열었다.
“잠깐 장난을 좀 쳤더니 날 잡아먹으려 드는군.”
아까 인형극을 보며 생긴 불상사를 잠시 생각하던 정국이 다시 한 번 어이가 없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인형극이 끝나자마자 황후는 정국에게 잡혀 있었던 손을 뿌리치고 제 등 뒤로 감추었다. 그렇게 제가 좋다고 소리치던 황후의 의외인 반응에 정국이 지금 뭐햐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 황후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황후는 시선을 피하며 어버버 거렸다.
‘부, 부군은 참으로 무엄하십니다!’
허. 그 뻔뻔스러운 말에 정국은 세상에서 가장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지금 황후가 황제더러 무엄하다 말했다. 그 무슨 짓을 해도 ‘무엄’하지 않은 황제에게 말이다. 궤변을 뱉고 보니 제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당혹스런 얼굴의 황후가 팩 뒤돌아선다. 정국은 아직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황후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어, 뒤돌아선 황후가 아주 절망스런 얼굴을 했다는 것을 몰랐다. 정국은 그 뒤로도 ‘무엄하다’라는 말에 사로잡혀 인생무상을 체감했다. 황제라는 작위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손 한 번 잡았다고 무엄한 무뢰한으로 찍히는 걸.
“익위사가 잘 보필하셨다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닥쳐.”
끝까지 빈정대는 태형에 지민은 이를 악 물고 말했다. 참으로 어색하고 불편한 일행이 남북으로 긴 형태를 하고 있는 서시의 중반을 지날 때 쯤, 그 낯선 평화를 깨뜨린 건 하늘이었다.
“비다.”
제법 맑은 하늘이었는데도 빗방울은 굵직했다. 처음엔 한 두 방울 떨어지던 비가 이내 후두둑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죄다 밖에 진열해놓은 물품을 정리하고 급하게 몸을 피하기 시작한다. 작은 손을 들어 머리를 살짝 가리던 황후도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몸을 바쁘게 움직인다.
“부군!”
아까 그렇게 부끄러워하던 것이 무색하게 황후는 본능적으로 정국에게 달려갔다. 황궁 안에서도 내시백이 커다란 차양막을 가지고 다니며 보좌한 탓에 비라곤 맞아 본 적 없을 황제를 걱정해서였다. 황제는 황후의 생각만큼 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황후는 제 작은 손을 들어 정국에게 내리는 비를 가로막았다. 물론 그 사이로 빗방울이 여실히 떨어져 내렸지만. 황궁 의복이었다면 소매가 넓어 비를 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황후는 그 생각을 하며 아쉬워 할 뿐이었다.
“…뭐 하는 거지?”
“황상! 감기 드시면 어찌합니까. 얼른 비를 피해야 할 텐데….”
이미 황후의 얇은 의복이 짙게 젖어들면서 살갗이 비쳤지만 황후는 얼굴에 떨어지는 비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사력을 다해 황제를 보호하려 들었다. 정신이 없어 정국을 더러 떡하니 ‘황상’이라 칭하면서 어깨를 바르작 떨어대니, 오히려 비를 막아줘야 할 것 같은 건 황후인데 말이다. 정국이 멍하니 황후를 내려다보았다.
“처마가 있는 곳까지 가야합니다. 저를 따르시지요!”
제법 지리에 밝은 태형이 소리쳤다. 그를 선두로 갑작스레 쏟아지는 빗속을 달렸다. 황제가 비를 맞을까 안절부절 못하는 황후를 물끄러미 보던 정국이 황후를 품속에 안았다. 황후가 놀랄 새도 없이 팔을 들어 황후의 머리를 가린다. 넓은 도포자락이 차양막이 되어 황후에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았다. 빗소리가 귓전을 강타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고, 정국의 옷소매에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 가장 소중한 것을 다루듯 황후의 머리를 조심히 끌어안은 황제가 황후를 데리고 빗속을 달렸다. 억겁처럼 긴 시간을 지나 처마 밑에 도착한 정국이 팔을 내리고 황후를 품에서 떼어냈다. 그러지 않으면 하루 종일 안겨 있을 것 같은 황후는 멍한 얼굴을 하고서 정국의 손길에 의해 떨어져 나갔다. 옆에서 물에 젖은 강아지마냥 저를 올려다보는 황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정국은 무시하고 제 도포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괜찮으십니까?”
먼저 처마 밑에 도착해 있던 태형이 황후를 돌려세우고서 어깨를 그러쥐고 물었다. 황후가 고개를 달싹인다. 여전히 멍한 얼굴에 살풋 웃던 태형이 황후의 어깨에 허술하게 둘러진 너울을 집어 든다. 그리고 너울의 물기를 모두 짜낸 후, 다시 그것으로 황후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제가 젖은 건 아직 털어내지도 않았으면서, 황제와는 아주 다른 처사였다.
“소나기인 듯합니다. 금방 그칠 테니 잠시 여기 있지요.”
지민이 처마 밖으로 손바닥을 내어 빗방울을 가늠해보았다. 때 아닌 소나기가 잠시 여기에 발길을 묶어 둘 듯하다. 비는 얼마 안 가 그치겠지만, 중요한 건 이미 비를 홀딱 맞아버렸다는 것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젖은 옷에 몸이 추운 정도였지만 안 그래도 옷이 얇은데다 몸도 약한 황후는 오한이 슬금슬금 들기 시작했다. 황후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슬쩍 본 정국이 곤란하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저럴 거면서, 먼저 피하기나 할 것이지 미련하게 제게 내리는 비는 왜 막아준단 말인가. 하여튼 답답한 사람이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 제 장포라도 벗어주면 좋으련만 황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속으로만 안절부절했다. 정신이 나간 사이에 그녀를 품에 안고 이까지 달려왔다. 미쳤군. 옆에서 어깨를 자꾸 바르작 떠는 황후가 신경이 쓰여 죽을 지경이었지만 황제는 애써 무시하려 끝없는 번뇌를 했다.
“추우십니까?”
허나 태형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사람이 아니었다. 다정한 물음에 황후가 다시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미 제 옷도 젖을 대로 젖은 지라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빗방울이 제법 약해진 것이 눈에 보인다. 이제 막 봄에 접어 들어서 그런가 떨어지는 비는 적당히 따뜻했다. 물에서 나오니 춥다면, 물에 들어앉아 있으면 되는 것이다.
“소소.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태형이 활짝 웃으며 황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작게 소소, 하는 부름에 고개를 든 황후가 제 앞에 내밀어진 태형의 손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 자가 어딜 가려하는 지도 모르면서, 이 근본 없는 신뢰는 대체 무엇이지? 황후 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물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답은 없었다. 허나, 황후는 잠깐의 망설임이 무색하게 태형의 손을 아주 꽉 마주잡았다. 싱긋 웃은 태형이 처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황후의 손을 잡아당긴다.
처마 밖으로 나가자마자 아까보단 부드럽게 내리는 비가 온 몸으로 느껴졌다.
“이리 비를 맞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이 처음이니라.”
떨어지는 물줄기에 황후가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태형이 젖은 머리가 황후의 얼굴에 붙은 것을 때 내주며 말한다.
“허면 오늘 한 번 제대로 맞아보는 것도 괜찮겠군요.”
“대체 이걸 왜 제대로 맞아봐야 하는 거지? 그냥 다시 처마로 가자.”
황후가 제 이마를 닦으며 태형의 손을 잡아당겼다. 말끔해진 이마에 다시 빗물이 흘러내린다.
“소소.”
“응?”
“헌데 지금은 춥지 않죠?”
떨어지는 비가 찝찝하다 이 생각만 하던 황후는 태형의 말에 잠시 숨을 참아본다. 처마 밑에 있던 때와 달린 ‘춥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정말 그렇구나!”
황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태형이 환히 웃으며 황후를 본다.
“황궁에 들어가시면 맞고 싶어도 못 맞으실 테니. 지금 실컷 비를 맞으시지요. 앞으로 없을 기회입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두 사람을 처마 아래서 바라보던 지민이 어이가 없다는 듯 숨을 내뱉는다. 지금 황후가 저 이상한 얘기에 설득당한 거야? 당연하다는 듯이 황후는 가만히 비를 맞았다. 저러다 진짜 감기 드시면 어쩌려고.
“황상! 맞아보니 정말 따뜻합니다. 이리 오세요.”
태형의 손을 잡고, 그 아른한 빗속에 있는 황후가 정국을 향해 손짓했다. 달큰한 빗방울이 황후의 작은 얼굴을 타고 올 때마다 온 세포가 하나하나 들고 일어난다. 젖은 의복을 입고 비에 쫄딱 젖은 채 제게 하얀 손을 내미는 황후.
“…….”
황제가 아주 담담하고 쓸쓸한 눈으로 그런 황후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 손을 잡을 수 없다. 황후 옆에 태형처럼, 그녀를 한 없이 자유롭게 만들어주지도 못한다. 황제이니까. 처마 밑과 끝없는 빗속, 마치 다른 공간처럼 벌어진 그 사이에서. 황후는 처음으로 티 없이 깨끗한 웃음을 지으며 정국을 바라봤다. 가만히, 황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정국은 처음으로 황제라는 자리가 원망스러워졌다.
/ 황후열전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지민이 적당히 굳은 눈초리로 황후를 보며 따뜻한 물을 내밀었다. 이불을 덮어쓰고 몸을 숨긴 황후는 코를 훌쩍이며 따스한 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오늘 황궁으로 돌아가긴 글렀군. 황후의 맞은편에 앉은 지민이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이게 다 저 자식이 때문이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어차피 비는 어떻게 했어도 맞았을 겁니다.”
황후 옆에 앉아있던 태형이 지민의 원망 가득한 시선에 발끈하며 소리친다. 물론 그 뒤에 바로 재채기가 뒤따르는 바람에 전혀 설득력이 없어 졌지만.
“폐하. 어찌하실 겁니까?”
“오늘은 여기 묵지. 다른 수도 없지 않느냐.”
이 답 없는 두 사람 대신 황제에게 의중을 묻자, 침상 옆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정국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어떻게 황제와 황후가 시장 변두리에 있는 이 허름한 객주에 묵을 수 있지? 지민은 나오는 것이 한숨뿐이라 운신할 틈도 없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지 말고, 이왕 기회가 생긴 김에 오늘 밤은 이야기나 하며 보냅시다.”
“내가 네 놈이랑 이야기를 왜 해.”
지민은 보기도 싫다는 듯 태형에게서 획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바로 황후가 보이는 것이다. 황후는 그들의 대화에 끼일 힘도 없다는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물을 홀짝홀짝 넘길 뿐이었다.
“아아. 이불이 답답하다. 나도 편한 옷을 입고 눕고 싶구나.”
이내 황후가 몸에 두른 이불을 팡팡 치며 한탄했다. 이런 사람이 평소에 그 치렁치렁하고 불편한 의복을 어찌 입고 다녔는지 신기할 뿐이다.
“여인이 입을 옷이 없다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 옷도… 비에 홀딱 젖어서 벗으셔야 하는데, 그리 고집하시니….”
“허, 그럼 여기 사내만 득실대는 곳에서 난 뭘 입고 있으란 말이냐?”
황후의 앙칼진 말에 지민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황후의 너무도 거침없는 의사가 익위사의 혈기왕성한 가슴을 후벼 팠다.
“아아, 도미가 보고 싶구나.”
언제나 제가 필요한 것만을 딱딱 챙겨주던 도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황후가 울상이 되어 중얼거리자 태형이 의외라는 듯한 얼굴로 황후를 본다.
“그러고 보니, 절대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으실 것 같은 분이 최고상궁은 제법 잘 따르십니다?”
태형의 말에 지민이 나름 동감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황궁에서 황후전 소문도 좋지 않았지만 그보다 나쁜 것이 황후전 최고상궁 ‘도미’에 관한 소문이다. 헌데 눈앞에서 에취- 하고 재채기를 하는 황후는 도미를 진심으로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너희들이 도미를 잘 몰라서 그런다.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 드는 것이 최고상궁 도미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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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말을 ‘개떡같이’라고 폄하하면서까지 칭찬하는 최고상궁 도미. 문득 지민은 태후전에 갈 때마다 도미를 욕하던 태후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태후는 왜 그렇게 도미를 싫어하는 것일까.
“헌데 태후마마께선 그 상궁을 진절머리가 나게 싫어하시던데요?”
“아아. 태후마마는 그럴 만도 하시지.”
이불속에서 손을 꺼낸 황후가 휴지를 들어 코를 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도미에게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복숭아요?”
“그래. 말했듯이 도미는 아주 정확히 내 명령을 수행한단다. 나는 복숭아가 나지도 않는 한겨울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듯이 말한 것인데, 도미는 그걸 끝까지 기억하고 수행했지. 황궁에 이 겨울에도 복숭아나무가 자라는 곳은 태후전 궁정뿐이었는데, 그것들은 다 태후마마께서 아주 애지중지 해서 키우신 것들이란다.”
“태후마마 답군요.”
“헌데 도미는 내 말에 곧장 태후전으로 가 복숭아란 복숭아는 죄다 가지째로 꺾어왔지 뭐니. 그걸 아신 태후마마께서 노발대발 하셔서 도미를 불러 들이셨는데, 도미는 거기서 아주 뻔뻔하게 ‘우리 황후마마께서 드시고 싶다 하셔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니, 연륜 지극한 분께서 좀 참으소서.’하고 말했단다. 태후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나이 얘긴데 말이야.”
태후를 아주 잘 알았던 지민이 재앙과도 같은 상황에 나직이 아… 하고 탄식했다. 과연 하루도 빼 먹지 않고 태후가 도미를 욕할 만도 하다.
“만약 폐하께서 그냥 넘어가라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태후께선 정말 도미를 요절내셨을 게야. 그게 아직도 한으로 남으셨는지 도미라면 아주 치를 떠시지.”
황후가 나긋나긋 웃으며 설명해주자 지민은 이제야 태후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태형은 아주 호탕하게 웃었다. 세 사람이 앉아 있는 탁상과 침상 옆에서 혼자 눈을 감고 기대있던 정국이 그 웃음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저 사람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까부터 이야기를 주고받고, 웃고 난리도 아니다.
“아, 지금 딱 술 한 잔만 했으면 좋겠는데….”
황후가 탁상에 턱을 누르며 중얼거렸다. 평소엔 생각도 나지 않던 술이 비를 맞고 나자 이리도 당기는 것이지?
“그럼 한잔 하시면 되지요. 객주 아래층에 술이 있을 겁니다. 소신이 사올 테니, 기다리십시오.”
“지금 마마께 술을 드린단 말이냐?”
황후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태형이 황후의 부탁을 들어주러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민이 그의 손을 탁 잡는다. 고지식하고 충심 가득한 지민의 말에 태형이 고개를 내저었다.
“몸 녹이는데 술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다고. 몇 잔만 합시다.”
그리곤 사람 좋게 둘러대며 지민의 손을 놓고 황후가 간절히 바라는 술을 가지러 객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갑자기 무슨 술입니까.”
“난 황궁 안에선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아주 검소하게 살았느니라. 익위사 너도 딱 한 잔,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지 않니? 응?”
탁상에 얼굴을 올린 채 애살 그득한 목소리로 중얼인다. 익위사는 차마 그걸 두 눈뜨고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위엄 가득한 황후가 저리도 아이같이 군단 말인가. 속이 답답하다.
지민을 제외하고도 속 터지는 사람이 또 있었으니. 눈만 감은 척하고 온 신경을 이쪽에 기울인 황제다. 허, 황궁에선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아? 며칠 전 태형과 함께 단란히 술상을 즐겼다던 나인의 말이 떠올라 어이가 없어진다. 황후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술을 가지고 오는 태형을 아주 반갑게 반겼다.
“자, 얼른 가져 오렴!”
기어코 입에 대지고 않겠다는 지민의 앞에 까지 술잔을 내민 태형이 술을 졸졸 따른다.
“폐하껜 안 드려도 됩니까?”
“주무시는 것 같은데?”
“그냥 우리끼리 먹자꾸나.”
실제로 절대 자지 않고 있던 황제가 순간 울컥했다. ‘우리끼리’를 강조한 사람이 다름 아닌 황후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자길 연모한다고 그렇게 소리치던 사람이 이젠 절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게 아닌 걸 잘 안면서도 정국은 짜증이 났다.
“크.”
평소 그리도 고고하고 귀한 티가 온 몸으로 다 난다는 황후의 입에서 시원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따뜻하게 데워진 술이 속을 타고 내려간다. 아주 찌릿했다.
“술도 한잔 하는김에 우리 한 번 진솔한 얘기를 해보자꾸나.”
“진솔한 얘기요?”
“그래. 음… 먼저, 익위사.”
황후가 아주 발랄하게 저를 지목하자 술을 넘기던 지민이 사례가 들린 듯 컥컥 기침했다. 황후가 방긋 웃는다. 술이 들어가니 의외로 푼수 끼가 나오네… 지민이 멍하니 생각했다.
“익위사 너는… 연모하는 여인이 있느냐?”
“…예?”
“아니, 우리 황후전 나인의 얘기를 들어보니 황궁 나인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사람이 문하시중과 익위사 너라 길래.”
대체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저런 걸 묻는 거지? 익위사의 얼굴에 사상 최대의 난제라는 듯 근심이 들어앉았다. 맑은 눈을 뜬 채 제 답을 기다리는 황후를 보며 마른 침을 삼키던 지민이 하아, 한숨을 내뱉었다.
“왜? 못 말하겠느냐? 허면 이걸 마셔라.”
황후가 지민의 잔이 흘러넘칠 정도로 술을 콸콸 따라 부었다. 아주 들 떠 보이는 황후가 하는 짓을 쳐다보던 지민이, 황후의 눈길에 못 이기고 그 잔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자, 다음은 우리 별감.”
미리 태형의 잔에 술을 따라 준 황후가 태형을 쳐다봤다. 태형 앞에 붙은 ‘우리’라는 칭호에 정국의 눈썹이 꿈틀했음을, 알 리가 없다.
“너는 말이다… 내 어디가 그렇게 좋은 것이냐?”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은 더 심기불편한 내용이었다. 목소리에 왜 저리 수줍음이 느껴지는 것이지. 황후가 물끄러미 태형을 바라보았다. 태형의 눈동자에 약간의 파문이 일었다. 뭐지 이 갑작스런 미묘한 기류는. 황후와 태형이 아주 오래, 집요하게 시선을 맞춘다. 그 침묵 속 단란함을 느낀 지민이 타는 목을 축이기 위해, 술을 더 들이켰다.
“…….”
한참 황후의 눈길을 그대로 받던 태형은, 대답 대신에 제 앞에 놓인 술을 들이켰다. 황후가 순식간에 상처받은 얼굴을 한다.
“내가 좋은 이유를 말하는 것이 그리도 어렵더냐?”
“너무 많아 말하지 못한 것입니다.”
퉁명스럽게 원망하던 황후의 입이 순식간에 다물어졌다. 태형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장난기도 가벼움도 없이 적당히 낮고 담백했다.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던 황후가 이내 흠흠 헛기침을 했다.
“허면 이젠 황후마마 차례입니다.”
“…무, 무엇이든 물어 보아라.”
황후가 태연하게 말했지만 내심 태형의 질문이 두려운 모양이다. 그걸 놓칠 리 없는 태형이의 입가에 개구진 미소가 들어앉았다.
“언제부터… 폐하를 연모하신 것입니까?”
대화를 듣고만 있던 정국의 숨이 멎었다. 그는 아주 요동치는 심장을 숨기고 황후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기대’라는 것을 품고 있었다. 황후가 너무나도 평온스러운 눈으로 태형의 당당한 시선을 받는다. 아주 길고도 짧은 침묵이 지났다.
황후는 대답 없이, 제 앞에 술잔을 아주 깔끔하게 들이켰다.
皇后
列傳
“나는…취하지 않았느니라.”
그 말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도록 황후의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생각 외로 발음은 제법 정확했지만 부드러운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 헌데도 지민이 황후에게서 술병을 빼앗아들자, 황후는 저런 궤변을 늘어놓으며 내 술을 내놓으라는 듯이 팔을 내밀었다.
“취하셨습니다.”
“아니, 아니라니까.”
이럴 줄 알았다. 딱 한잔만 한다더니, 진솔한 얘긴가 뭔가를 하다 보니 황후는 이미 술에 떡이 되어 있었다. 지민 자신도 술기운이 아릿하게 맴도는데 더 열심히 퍼 마신 황후라고 덜할까. 지민은 황후가 더 이상은 마시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애를 쓰는데 정작 이 일의 주동자인 태형은 턱을 괴곤 물끄러미 황후를 바라본다.
“익위사… 명이다. 얼른 그 술을 다오. 응?”
“주지마라.”
황후 특유의 끝맺음이 나긋한 말에 지민의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리는 찰나, 쓸모없는 고뇌를 막은 것은 황제의 지엄한 목소리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국이 다가와 황후의 맞은 편, 지민의 옆에 착석했다. 황후가 반쯤 풀린 눈으로 정국을 똑똑히 바라본다.
“주십시오….”
“안 돼.”
제 말 몇 마디에 흔들리던 지민과는 다르게 정국은 아주 나직하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황후는 지금 술을 못 먹는 것이 못 견디게 서러워졌다. 취기가 돋으면 사람이 감정적으로 변한다 하였나. 황후가 지금 딱 그 꼴이다.
“황상은 왜 맨날….”
“…….”
“왜 맨날 신첩이 하는 것마다 안 된다고만 하십니까?…”
어린애마냥 떼나 쓸 것 같던 황후가 순식간에 꼬리를 내리고 저렇게 말하니, 단호하게 굳어진 황제의 얼굴이 파도에 쓸린 냥 혼란스러워진다.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평소 나긋한 말씨에 높낮이가 평이했던 황후지만 지금은 말의 높이가 요동을 친다. 마치 원망하는 듯도 했지만 그게 더 아이 같아서 아주 애달프고 애교서린 외침이었다.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황상이 그리도 잘 나셨습니까.”
그 맑은 눈이 눈물로 그렁그렁해졌다. 하는 말이 죄다 어이가 없다.
“마마.”
정국이 탄식을 내뱉자 눈치를 살피던 지민이 황후를 말리려 들었다. 허나, 지민은 절대 황후를 이길 수 없다. 감정의 관계가 본래 그런 것이었다. 황후가 곧 울 것처럼 구니, 말리지도 못하겠다.
“황제면… 황제면 다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허면 저도 황제 시켜주세요….”
그동안 쌓였던 울분을 모두 뱉어내듯 억울한 어조로 되 내는 황후에 정국은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허, 제게 황제를 시켜달라니. 황제를 인형극에서 보았던 역할1 쯤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정국은 자존심 상하지만, 이 곤란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황후를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태형을 쳐다봤다. 뭘 하나 했더니 태형은 탁자에 턱을 괴고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 말리나?”
“왜요, 사람은 뭔가를 참으면 병이 됩니다. 이번 기회에 황후께서도 속을 털어놓으셔야 지요.”
정국이 지금 뭘 하냐는 듯 묻자 태형은 아주 태연자약하게 대답한다. 황제의 새하얀 미간이 정처 없이 찌푸려졌다.
“역시 별감 너밖에 없구나.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내 맘 알아주는 이는 너밖에 없다.”
“감읍할 따름입니다.”
“자 그런 김에 한 잔 하자.”
황후가 이 틈을 타 천연덕스럽게 지민의 손에 들린 술병을 빼앗아 오려고 했다. 황후의 그 자연스러움에 순간 넋을 잃은 지민이 너무도 쉽게 술병을 내주었다. 허나 황후의 바람은 그 손이 정국에게 저지당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황후가 팩 토라진 얼굴로 정국을 본다. 제 딴에는 눈에 힘을 주려고 하는데 눈꺼풀이 슬슬 감기는 게 곧 정신을 놓겠군. 손에도 힘이 없어서 황후의 작은 손에 잡힌 술병은 다시 황제에게로 돌아갔다. 황상…. 말꼬리를 늘리던 황후의 고개에 힘이 빠진다. 곧 탁자에 쳐박힐 번한 머리를 받힌 건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대기하고 있던 태형의 손이었다. 황후는 주로, 취하면 머리부터 박는 성격이군. 태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황후를 침상으로 옮기지.”
정국이 한숨을 내쉬며 술병을 탁상에 내려놓았다. 그 말에 따라 태형이 황후를 안아들려는데, 다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 말고. 익위사, 네가 해라.”
낮은 명령에 태형도, 지민도 모두 얼떨떨해졌다. 마치 자신을 경계하는 듯한 황제의 행동에 태형이 바람 빠진 웃음을 작게 뱉는다. 아마 황후전 앞에서 했던 당당한 고백이 황제의 맘을 잡아 죈 것일 터였다. 허나 그것도 상당히 큰 오판이다. 그걸 증명하듯 지민이 절망적인 얼굴을 했다. 저번에 황후가 쓰러졌을 때부터 왜 자꾸 저더러 황후를 안으라 하는지 모르겠다. 태형은 경계하면서 왜 자신에게 그리도 편하게 황후를 맡기는 것이지? 어디다 말도 못하고 혼자 속이 탔던 지민은 관자놀이를 꾹꾹 짚으며 세상모른 채 잠 든 황후에게 다가갔다.
황후의 고개를 조심히 들키고 어깨에서 힘을 준다. 혹여라도 황후가 깰까 조심조심 황후를 안아 들자 얇은 비단에서 사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차마 황후를 내려다보지 못한 지민이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황후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같은 공간에 황제가 있는데, 하나뿐인 침상을 황후가 차지해버렸다. 황제는 어디서 주무시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민은 곤히 잠든 황후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돌아서니 황후가 그리도 애원했던 술을 마시는 중인 황제가 침대를 슬쩍 본다. 어떻게 시선에서조차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본래 잘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황궁에서 벗어난 동안 정국은 더더욱 알 수 없게 굴었다. 익위사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의 마음이 황후에게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적어도 황후가 행복했으면 했다.
“내가 깨어있을 테니, 잠이 오면 바닥에 이불을 깔던지 의자에 기대던지.”
황후 한 사람이 잠에 들었을 뿐인데 분위기가 무섭도록 내려앉았다. 태형은 탁상에 엎드린 채 자는 것인지 그저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 이미 운신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한다.”
황제의 의사는 굳건했다. 더 권해봐야 듣지도 않을 것이다. 포기한 지민이 벽에 등을 기대도 스르륵 앉았다. 객잔의 맘은 아주 조용하고 무사태평했다.
깨질 듯한 머리에 황후가 눈을 뜬 것은, 그 밤이 절반쯤 지났을 때였다. 술만 마셨다 하면 밀려드는 자책감을 느끼며 상체를 일으킨 황후가 어두운 객잔을 둘러보았다. 모두 자는 것인지 불편하게 앉아서 눈을 감고 있다. 하긴 온 몸이 찌뿌둥한 게 개운하진 못해도 상당히 오래 잔 것 같으니까. 이불을 들추고 바닥을 밟으니 머리를 울리는 통증이 더 강해졌다. 대체 얼마나 퍼마신 거야. 속도 불편하고, 머리도 아프니 짜증이 난다. 해서 황후는 겁도 없이 혼자서 객잔을 나섰다. 2층은 여관, 1층은 주막처럼 생긴 객잔은 아래층에 내려오니 아무도 없이 아주 조용했다. 바깥바람이 쐬고 싶다. 달이 중천에 걸린 지금, 객잔이 안 그래도 시장 후미진 곳에 있는 통에 사람 하나 없었다. 헌데 황후는 겁도 없이 그 주위를 찬찬히 누비며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하아….”
시리고 고매한 공기가 속을 타고 들어가자 제법 개운해 지는 것 같다. 황궁과는 다르게 어디 막힌 것 없이 탁 트인 느낌. 그게 좋아서 황후를 눈을 꼭 감고 바람을 느꼈다. 헌데 그럴수록 생각이라는 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제가 술에 취해 한 짓이라던가. 아릿하게 떠오르는 기억에 황후의 발걸음이 조마조마해졌다. 미쳤다. ‘황상이 그리도 잘 나셨습니까.’ 분명 제 입으로 그딴 말을 짓걸였다. 아니 태어날 때부터 황제의 재목으로 태어난 황제가 당연히 잘났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황후는 당장 객잔 뒤로 보이는 산에 머리를 박고 이 거지같은 기억 모두를 잊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 스스로와의 싸움을 하며 객잔 주변을 서성이고 있을 때, 이상한 인기척이 황후의 오감을 사로잡았다.
“뭐지, 이 야밤에.”
웅성웅성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황후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객잔 뒤에는 크지 않은 규모에 산이 있었는데 산 근처로 갈수록 소리가 아주 선명해졌다.
“이 정도면 아주 비싼 값에 팔리겠어.”
“동생은 기방에 넘기기엔 너무 어리니 진나라 상인에게 넘기자고.”
무성한 나무 사이로 몰려있는 한 사내들의 무리. 황후가 고개를 빼꼼히 빼고 그들을 훔쳐봤다. 이 밤에 사내들끼리 몰려있는 것도 수상한데, 정작 황후가 더 할 나위 없이 놀란 것은… 둘러싸여있는 사내들 사이로 보이는, 입이 천에 막힌 채 잡혀 있는 두 명의 소녀였다. 그 중 한명과 눈이 마주치자 황후는 잽싸게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지금 내가 뭘 본거지. 손이 달달 떨려온다. 얼른, 얼른 다시 객잔으로….
다급히 걸음을 옮기던 황후의 발에 무성한 풀이 쓸려 사락- 거리는 소리가 적막가운데 울려퍼졌다. 큰일이다.
“거기 뭐냐!”
소리를 들은 그들 중 한 사내가 매섭게 반응하며 이쪽으로 온다. 황후는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정지된 듯 끔찍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묶여있는 소녀의 눈이 떠올랐다. 대체 저들은…. 발걸음이 가까워진다. 황후가 눈을 꾹 감았다.
“…….”
그 때, 누군가 황후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 손에 어딘지도 모른 채 딸려간 후에, 소리가 난 나무 뒤를 훑어본 사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무리로 간다. 누군가 어깨를 그러쥐었다. 그 자의 손길에 이끌려 풀이 우거진 더미에 몸을 숨겼다. 황후가 두려움에 무의식적인 소리를 낼 수도 없이 단단한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나다. 쉿.”
짧게 들려도 황후는 목소리의 주인이 정국임을 단 번에 알아차렸다. 순식간에 몸에 힘이 풀린다. 이미 풀 뒤에 숨어 주저앉았는데도, 다시 풀썩 쓰러질 것 같았다.
“뭐야?”
“아무것도 없었는데. 뭐 산짐승이었나보지.”
사내들은 다행이도 아직 황후와 정국의 존재를 모르는듯했다.
정국은 사가에 나간 황궁 항아들이며 도성 소녀들이 죄다 실종 된 일, 아마 그것의 주범이 저 사내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대체 어떤 상단과 무슨 거래가 있길래 어린 여인들을 납치하는 것이지? 게다가 이 겁도 없는 황후는 어쩌다 저 흉악한 자들이 있는 이 산까지 들어온 것이고. 정국은 일단 사내들이 가면 단단히 황후를 질책하기로 했다. 만약 자신이 따라나오지 않았다면 어쩌려고 그랬단 말인가. 사내들은 포박한 소녀들을 데리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대로, 그들을 보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운명은 참으로 잔인하게 그지없다.
에취! 오늘하루 비를 맞아 감기기운이 있던 황후의 잠재적 재채기가 하필, 절망스럽게도 이 시점에 터지고야 만 것이다. 정국이 한숨을 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게 누구냐!”
“뛰어라!”
이번엔 외부인의 존재를 확신한 사내들이 우수수 산을 달려 내려온다. 황후의 손을 꽉 맞잡은 정국도, 풀숲에서 나와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한다.
九.
“잠행을 나온 황제가 근처 객잔에서 머무르고 있다고 합니다.”
마치 눈앞에 천자가 있는 듯 정갈하게 꿇은 무릎과 빳빳히 들린 고개, 적당히 내리깐 시선. 그리고 명확한 진실만을 전하는 단단한 음성이 화려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익위사 하나만을 데리고 나왔다 하니, 적당히 살수를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윤기가 살기 가득한 눈을 반짝였다. 허나 그보다 한 단 높은 곳에서, 작은 술상을 앞에 두고 앉은 대승상은 그의 말에 잔잔한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항상 마음이 너무 급한 것이 문제다.”
“아버님.”
“지금 황상이 죽으면 누가 정치를 한단 말이냐.”
“그거야, 황후께서 수렴청정을….”
“수렴청정? 후사도 보지 못한 황후가 수렴청정은 어찌 하겠느냐? 넘치는 것이 황족이고 보위를 물려받을 명분이 있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아들도 없는 황후 따위, 폐위시키면 그만이 아니겠느냐? 아직은 때가 아니야.”
최악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대승상에 목이 탄 윤기가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선황 때부터 권력을 손에 쥐고 황제마저 휘두르며 살아온 대승상이다. 그의 꿈은 오로지 제 핏줄을 황위에 올리는 것. 그러하기에 대승상에게는 황후가 필요하다. 다만 황후가 그 과정에서 상처받는 것 따위는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잠행 후에 돌아가면 합방이 있을게야. 이번에는 피해가시지 못하겠지. 황후께서 회임만 하시면… 걸리적거리는 황제는 그대로 목숨을 거두고, 황후의 핏줄이 다 장성할 때까지 우리가문에서 대리청정을 하면 될 일이다. 조급해하지 마라.”
온 나라가 뒤집어 질만한 내재적 반역을 대승상은 너무도 쉽게 입에 담았다. 윤기가 씁쓸한 입안을 다지며 손 안에서 술잔을 굴렸다. 황제가 죽으면 누이가 슬퍼할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지만 참으로 우습다. 황제를 따라 목숨도 끊을 황후인데 아무렴. 누이와 황제의 아이라… 궁극적인 목표에 꼭 필요한 존재였지만 왜인지 생각을 하자 속이 아리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윤기는 대승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잔을 내려놓고 따라 일어났다.
“너는 천천히 마시다 오너라. 잠시 태사를 만나기로 했으니, 따를 필요 없다.”
“살펴 가십시오.”
공손히 허리를 굽히는 윤기에 가볍게 인사를 받은 대승상은 그대로 문을 열고 나섰다.
홀로 남은 방 안, 그 적막감을 느끼기도 무섭게 이곳이 기방이라는 것을 인지시켜주듯 술병을 손에든 기녀가 수줍게 들어와 윤기의 앞에 술을 내려놓는다. 윤기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잔잔히 웃음을 머금고 기녀를 바라보았다.
“나으리 어찌 이리 뜸하셔요. 소녀 나으리를 기다리는 얼마나 애가 탔는지 아십니까?”
기녀의 투정에 윤기는 아무 말 않고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코를 찌르는 사향내가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지만, 머리 아픈 정치 문제보단 아무 말이나 하며 정신을 환기시켜줄 기녀가 그 누구보다 나았다.
“정아.”
“예, 나으리.”
“필부가 무엇이냐.”
제 무릎에 편히 누워 눈을 감은 채 묻는 윤기에 기녀은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
“한낮 평범한 사내를 일컫는 말이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헌데 그건 왜….”
정은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손을 들어 자신의 뒷동수를 당긴 윤기가 그대로 입을 맞춰왔기 때문이었다. 평소 기방을 그리 자주 들러도 저만의 선을 그어놓고, 어떤 사람도 넘지 못하게 하던 윤기다. 헌데 어째서 오늘은 이리도 적극적으로 혀를 섞고,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지? 격하게 밀어붙이는 입맞춤에 숨이 찼던 정이 몸을 살짝 뒤로 뺐다. 그러기 무섭게, 누워있던 윤기가 상체를 살짝 일으키고 따라와 집요하게 숨을 붙잡았다.
“하아, 나으리….”
“아무래도 내가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한참 만에 윤기가 어깨와 뒷통수를 잡은 손을 놓아주자, 볼이 발갛게 상기된 기녀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윤기를 쳐다봤다. 윤기의 반쯤 풀린 눈은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뜨거운 정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허나 그는 더 이상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제가 먼저 달려들었던 방금까지의 상황이 꿈이라도 되는 냥 미련 없이 일어났다. 잠시 갈피를 못 잡던 정의 손이 그런 윤기의 장포자락을 붙잡았다.
“나으리!”
허나 그 달콤한 목소리로 가차 없이 쳐내고야 만다. 붙잡은 자신의 손을 뿌리치지도, 그대로 나아가지도 않았지만 정이 고개를 떨구고 장포를 잡은 손마저 떨굴 수밖에 없었다. 윤기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찬 밤공기가 폐부로 스며들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다.
황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자신역시 필부는 될 수 없다. 눈만 감아도 선명히 떠올릴 수 있는 한사람의 얼굴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풋내 나는 입술로 야속하게도 저를 오라버니라고만 부르는 황후. 그녀를 상대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번뇌와 고난을 이겨내야 하는지, 그녀는 모른다. 윤기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기루 입구를 나설 때였다.
“게 서라!”
인적 드문 밤길에 요란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무슨 소란이지? 인상을 찡그린 윤기가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식간에 눈앞으로 남녀 한 쌍이 달려간다. 그리고 그 뒤로 험악하게 생긴 사내들이 손에는 칼을 든 채 그들을 쫓는다.
덕재패? 조용히 숨어서 시킨 일이나 하고 있을 자들이 어째서 이 분란을 일으키며 누군가를 쫓고 있는 거지? 윤기의 눈이 가늘게 금이 갔다
.
게다가, 술기운에 머리가 어른거려서 그런가. 아님 그리운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인가. 대체 왜….
“황후마마?”
황후가 황제의 손을 잡고 그들에게서 도망치고 있는 거지?
/ 황후열전
“하아, 황상….”
황후가 숨이 찬 듯 중얼거렸다. 정국은 집요하게 뒤따르는 패거리들을 돌아보며 황후의 손을 좀 더 다급하게 당기지만, 숨이 찬 황후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힘겹기만 했다. 혼자라면 어떻게든 요령껏 숨었겠지만 체력 약한 황후를 데리고 있으니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사면초가. 딱 그 꼴인 상황에 정국은 인고의 한숨을 내쉬었다.
“게 서라!”
우선 선두로 달려오는 건 세 명. 충분히 따돌리고 도망칠 수 있다. 도망을 멈춘 정국이 황후를 제 뒤로 숨기며 사내들을 매섭게 쳐다봤다.
“황상, 어쩌시려구요. 무기도 없는데….”
“조용히 있어.”
황후가 불안한 마음에 정국의 도포자락을 잡아당겼다. 물론 그녀의 걱정처럼, 도끼며 검이며 다양한 무기를 소지한 흉악한 사내들과 달리, 객잔에서 바로 빠져나온 정국의 손에는 그 흔한 단도조차 들려있지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그 유명한 전쟁영웅이라지만 지금 맨손으로 저 자들을 상대하겠다는 것인가?
“오호라. 네 놈, 아까 장시에서 봤던 그 놈이구나.”
게다가 설상가상. 오늘 낮 장시에서 황후에게 집적대던 사내가 그 무리에 끼여 있었다. 지민에게 맞고 도망간 치욕을 갚아주겠다는 듯이 비열하게 번득이는 눈에, 황후는 안절부절하며 미간을 좁혔다.
“황상, 어느 곳에 있던 황상의 몸이 먼저입니다. 신첩의 뒤로 숨으세요.”
그러더니 하는 말에 헛웃음이 나온다. 물론 황제의 안전이 즉 나라의 명운이다. 어떤 위급상황이 발생하던지 황제의 옥체를 지키는 것이 가장 먼저일 것이다. 헌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황제와 황후 단 둘이 위험에 빠진 이 시점에, 자기 뒤로 숨으란 말이 나오나. 황후의 말도 안 되는 언변은 순간 상황을 망각한 채 웃음만 나오게 만들었다.
“네가 나서면 둘 다 죽고, 내가 나서면 누구 하나는 살겠지.”
“황상,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어찌되었건 자신이 다친다는 것은 필수로 가정하는 정국의 말에 황후가 더 할 나위 없이 얼굴을 찌푸린다. 그리고는 그 작은 주먹으로 정국의 어깨를 쿵 하고 치기까지. 갑작스런 폭력에 정국의 입에선 당황한 듯 아- 하는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신첩이 절대 황상이 혼자 죽게 내버려 두진 않을 것입니다!”
“어이. 낮부터 자꾸 상황파악 못하고 사랑노름이던데. 정신 차려. 이것들이 지금!”
낮과는 다르게 제 손에 들린 도끼와 옆에 선 동료들을 힘입은 사내는 땅 바닥에 침을 퉤 뱉으며 소리쳤다.
“오냐. 오거라.”
정국이 소매를 살짝 걷으며 자신만만한 눈초리로 말했다. 주나라의 황제, 전쟁터의 독사는 평소 그 치열함 사이를 활개 치던 모습 그대로 날렵하게 몸을 날렸다. 제 뒤에 옷자락을 꼭 잡고 있는 황후를 온전히 지키며 맨 손으로 셋이나 되는 거구를 상대하려면… 정말 목숨을 걸어야겠군.
거침없이 날아드는 도끼의 손잡이를 잡아 막아 낸 정국이 그대로 힘을 주었다. 악력에서 밀리자, 당황한 사내를 틈 타 가뿐한 발길질로 몸을 날려버린다. 한 명이 바닥에 철푸덕 쓰러지기 무섭게 단도를 두 손에 든 또 한명이 빠르게 다가온다. 작은 크기였지만 제법 정교한 손눌림으로 곧장 목을 겨누는 칼날에 정국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볍게 한 손을 제지하고 뒤로 꺾는다. 사내의 고통어린 비명이 들려왔다. 동시에 다른 한손역시 밀어내는데, 사내가 고통에 오히려 원동력을 얻는 것인지, 귓바퀴 바로 밑에 겨눈 칼을 밀어내지 않는다. 힘을 주다보니 정국의 미간이 잔뜩 찡그러졌다. 꺾은 팔목을 더 힘주어 밀어내자 사내는 비명을 더 크게 지르면서도 집요하게 칼을 잡은 손에 힘을 빼지 않았다. 위험하다, 느끼기 무섭게.
“황상!!”
황급한 부름에 긴박히 적을 상대하던 것도 잊은 정국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게 조용히 붙어있으라니까. 다른 한 놈이 황후의 목에 칼을 겨눈 채 그녀의 팔을 단단히 뒤로 잡고 이쪽을 보고 있다. 아아, 하여튼 황궁 밖까지도 불행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다. 차라리 자신이 위협받았다면 마음 편히 사력을 다 해 싸울 수나 있지, 황후가 인질이라니. 곤란해진 정국의 어두워 질 때 쯤,
“황상, 뒤를 보세요!!”
황후의 눈이 단단히 팽창된다. 그리고 정국이 다시 뒤를 돌았을 때에는 매서운 칼날이 어깨를 베고 난 후였다. 정국의 입에서 단말마의 신음이 흩어졌다. 젠장. 황후를 신경 쓰느라 미처 대치하던 단도를 생각지 못했다. 칼날이 쓸고 지나간 왼쪽 어깨에 다급하게 통증이 시작되었지만 지체 할 시간이 없었다. 정국은 오른손을 들어 사내의 꺾인 팔목에서 재빠르게 단도를 빼앗았다. 곧장 정국을 베었던 다른 칼날을 들이미는 사내를 막아내고, 몸을 숙여 복부를 찔렀다. 정국의 부상 때문에 오히려 방심하던 사내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도, 독한 놈….”
황후를 인질로 잡고 있던 사내가 바닥에 쓰러진 제 동료를 보며 중얼거렸다. 한편에는 두려움이 서렸지만 또 한편으론 상당히 안심한 눈치다. 제 손안에 황후의 목숨이 달려 있는 한, 저이가 쉽게 공격하지 못할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국은 입 안에 고인 핏물을 뱉으며 알싸하게 웃었다. 속이 타오를 듯이 뜨거웠다. 베인 상처가 내상까지 스며들었는지, 몸을 가누는 것도 힘겨웠다.
“부군, 괜찮으십니까?…”
황후가 어쩔 줄을 모르며 정국을 바라봤다. 또 저런 눈을 한다. 정국이 질려버렸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곧 있으면 저 패거리 일행이 더 몰려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 길이 없다. 정국은 모든 힘을 짜내어 사내를 상대하고자 아까 다른 자가 들고 있었던 단도를 고쳐 잡았다.
“허튼 생각 하지 마. 다가오면 이 계집은 곧장 목이 베일 것이다.”
“네 손 안의 사람이 조금이라도 다치면, 넌 오늘 죽는다.”
제겐 쉽게 손 댈 수 없는 인질도 있고, 상대는 다치기까지 했는데 왜 이렇게 심장이 쫄리는지 사내는 알 수 없었다. 익숙하게 주위를 압도하는 정국의 기세에 헛웃음을 치면서도, 사내는 귀중한 인질을 목에 더 가까이 칼을 들이밀었다. 고통스러운 듯 황후의 얼굴이 팩 일그러졌다.
사내는 여인을 납치하던 패거리의 일원이다. 허나, 아까 장시에서 여인을 꼬시는 수법이나 쓰던 것으로 봐선 그리 배포가 크지 못하다. 즉 제 손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만한 용기가 없다는 뜻이다. 황후의 목숨줄이 일각에 달린 지금, 정국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단도를 겨누고 그대로 돌진했다.
“아니 이 놈이!”
역시 사내는 그 칼로 황후의 목을 베기보단, 손목을 틀어 날아오는 정국의 단도를 막아냈다. 체구가 체구인 만큼, 들어가는 힘이 상당했다. 이렇게 칼로 대치하는 시간동안 힘이 빠지면 사내는 곧 정신이 흐트러져 인질을 잡은 손을 놓을 것이다. 그 때까지만 버티자. 허나 칼이 두 합, 세 합 대치될수록 어깨에서부터 아려오는 통증에 오히려 제 정신이 더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아아, 황상….”
사내의 손에 속박되어 정국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던 황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못났다. 어떻게 황후가 되어선 힘이 되어주지는 못할망정, 짐만 되고 있단 말인가. 이미 정국의 어깨에서 나온 피로 장포가 붉게 물들었다. 이렇게는 안 된다. 잠시 자그마한 머리통을 굴리던 황후는 정국이 고통스럽게 인상을 찡그리자,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제 어깨에 둘러진 사내의 팔을 아주 꽈악 깨물었다.
“아아악!!”
사내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뒷걸음질 치자마자, 연달아 발꿈치를 들고 그대로 사내의 어깨도 꽉 깨물었다. 순식간에 제 어깨에 얼얼한 고통이 찾아들었다. 사내는 뒷걸음질 하다못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물론 정국과 대치하던 칼로 바닥에 떨어뜨린 채로.
“황상!”
순식간에 저와 합을 맞추던 사내가 바닥으로 고꾸라지자, 정국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방금 황후가 사내를 넘어뜨린 것인가? 허. 얼떨떨하기 무섭게 잠시 흔들리는 눈동자로 쓰러진 사내를 보던 황후가 달려와 정국의 손을 잡았다.
“저들 패가 옵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얼른!”
옆쪽에서 달려오는 또 다른 사내들과, 아려오는 어깨, 그리고 야무진 황후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정국이 그대로 황후의 손을 따라 달렸다. 사람도 없고 끝도 없는 이 장터 길보단,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라 생각되는 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황후는 한 손으로는 정국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치맛자락을 잡아 올린 후 황급히 산을 올랐다.
도착한 혈전의 장소에 나뒹구는 동료들을 발견한 왈짜패들은 산으로 도망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곤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야,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도 유분수지. 우리 산채가 있는 산으로 들어가?”
서산(西山)의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자신들이다. 이제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엿들은 저들은 독 안에 든 쥐다.
/ 황후열전
하아. 정국의 입에서 힘겨운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산 한가운데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나무들로 둘러싸인 이곳에 멈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대로 주저앉았다. 도망을 치고 칼을 겨누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찼다. 헌데도 황후는 숨 고를 틈도 없이 정국을 돌아보며 그를 살폈다.
“황상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단호한 대답과 다르게 정국의 얼굴은 정말 힘들어 보였다. 걱정스런 눈으로 황제를 보던 황후가 시선을 내려 다친 어깨를 본다. 그러자 울컥 울음이 차오르고 말았다. 다 바보같이 사내에게 잡혀버린 자신 때문이다. 어떻게 천자의 몸에 부상을 낼 수가 있어….
“우, 울지 마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그렁그렁한 황후의 눈을 보고 당황한 정국이 말을 더듬었다. 아니 다친 것도, 죽을 듯 아픈 것도 자신인데 왜 황후가 운단 말이야. 허나 황후는 올라오는 울음을 더 힘겹게 참아냈다. 그 서럽고 속상한 얼굴이 낯설었다. 그래서 안절부절하던 정국은 대체 어떻게 울음을 그치게 하는지 몰라 버벅대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난 괜찮다질 않느냐.”
그 다정한 한 마디가 오히려 불을 붙인 듯, 황후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소리에 정국이 놀란 새도 없이 황후는 그대로 정국을 끌어안았다. 여린 몸이 사력을 다해 자신을 안아오는 느낌이 생경했다. 정국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곧 놓칠 새라 제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은 황후가, 감당이 되지 않았다.
“황후, 난 정말 괜….”
“이게 다 신첩 때문입니다. 흐으, 신첩이 밤중에 객잔 밖에만 나오지 않았어도, 재채기만 하지 않았어도….”
목언저리에 얼굴을 묻어서 발음이 온통 짓눌렸다. 헌데 그러니 더 서럽게만 들리는 울음이라, 자신을 끌어안은 황후에 적응을 못하던 정국도 졌다는 듯 힘을 풀고 황후의 작은 등을 토닥여주었다. 말만 토닥이다지, 여인을 달래는 법을 도통 알 리 없는 황제는 투박한 손길로 등을 툭툭 칠 뿐이었다. 정국이 제 딴에 달래주자 더 서러워진 황후는 정국을 더 꽉 껴안으며 더 크게 울었다. 이젠 황후가 정국을 안았다기 보단 정국의 너른 품에 황후가 아이처럼 안겨있는 것 같았다.
“목이 쉬겠구나.”
“신첩은 목이 쉬어도 됩니다. 흐으윽,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목숨이 붙어있는 것도 죄스러….”
얼씨구. 황후는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또 엉엉 울었다. 이 여인을 어찌해야하나. 정국의 낯빛에 잔뜩 곤란한 기색이 스쳤다.
“이제 그만 떨어져라.”
“황상….”
“내 어깨가 아프니까….”
아까부터 온 힘을 다하는 황후에 안 그래도 혼미한 정신이 더 나갈 것 같았다. 저 때문에 다친 어깨의 상처가 저 때문에 더 아파오는 지 알 리가 없던 황후가 황제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엉망이 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국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황제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고통스러워 보임이 느껴지자, 황후가 화들짝 놀라 상체를 뒤로 뺐다. 겨우 그 강한 안김에서 벗어난 황제가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맞다. 부상은, 부상은 어쩝니까. 많이 다치셨습니까?”
걱정에 눈이 먼 황후가 손을 들어 황제의 도포에 가져다 댔다. 뭣도 모르고 이리 사랑스럽게 행동하던 황후에 고개만 젓던 정국이, 느껴지는 황후의 손길에 놀라 바라보았다. 황후가 겁도 없이 황제의 도포 매듭을 풀고 거침없이 옷을 들추고 있었다.
“황후….”
정국이 아무리 다급히 놀라 그 손을 저지해보려 해도, 오늘따라 힘이 세진 것인지, 부상 때문에 정국이 제대로 힘을 못 써 그런 것인지, 황후는 멈추지 않고 황제의 옷을 풀어헤쳤다. 황후의 손길에 도포가 벗겨지고, 황제의 부상이 드러났다. 탄탄한 살결위로 자리한 칼자국, 끊임없이 새어나오는 피에 황후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제야 그쳤던 눈에 또다시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정국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세상에… 어떡해….”
“…….”
“이게 괜찮은 것입니까? 황상은 아주 거짓말이 입에 붙으셨습니다! 맨날 신첩에게만, 괜찮다 신경 쓰지 말라 하시고… 아아, 정작 몸이 이리도 상해 가는데!”
처음에는 놀라 말을 잇지 못하던 황후가 이젠 아주 역정을 내며 정국을 몰아세웠다. 상처에 닿는 손길이 홧홧해 정국은 곤란하다는 듯이 손을 어디에 둘지 몰라 방황했다. 어찌 부끄럼 따윈 없다는 듯 사내의 몸을 더듬고, 뚫어져라 본단 말인가. 도통 멈출 줄 모르는 황후의 질주에 정국이 체념한 얼굴을 하며 손을 들어 제 입을 틀어 막았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진 않겠지만 혹여라도 제 얼굴이 붉어졌다면, 그건 아주 큰 낭패일 테니.
“글쎄 난 괜찮다니까….”
정국의 목소리가 정처 없이 떨렸지만, 황후는 상처에 너무 큰 집중을 하다 보니 알아채지 못했다. 정국이 한참동안 안절부절한 후에야, 황후가 눈길을 거두고 도포를 다시 올려주었다. 당장 그 손길을 따라 제 옷을 정리한 정국이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당장 객잔에 돌아가 치료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돌아간단 말이냐? 장시거리엔 이미 그 패거리들이 깔렸을 테고, 이 산마저도 안전한지 아닌지 모르는데.”
“허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상처가 그리도 큰데 놔뒀다간….”
“목숨이 경각에 달리겠지.”
황후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을 잇지 못하자, 정국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 말의 주체가 자신임에도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관조적인 말투에 황후가 입술을 깨물고 정국을 획 째려봤다. 아니 근데 왜 또, 그 눈에 눈물이 차오르냔 말이다.
“황상은 어찌 그런 말을 쉽게 하십니까? 만약 황상이 잘못되면…, 잘못되면….”
다시 울음을 터뜨릴 듯하며 제게 안겨오려는 황후를 황제가 급히 막아 세웠다.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어내 안기지 못하게 하는 정국에, 황후가 맑은 눈을 불쌍한 강아지마냥 뜨며 정국을 올려다보았다.
“끼 부리지 마라.”
황후는 다시 황제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려왔다는 걸 알지 못했다. 혹여 황후가 더 울까봐 겉으로는 티내지 않았지만 정국은 지금 한계를 느끼는 참이었다. 아까는 상처부위가 아픈 것이 다였는데, 지금은 정신이 차차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아까 패거리들이 납치한 여인들을 산채로 데려가자 한 것을 보니, 그 자들은 이 산에 익숙한 자들이 분명하다. 언제까지 이리 숨어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황후를 두고 정신을 놓을 수 없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아아. 헌데 머리가 띵해온다. 자꾸만 다 잡으려 해도 쉽지가 않았다. 눈앞에 황후가 저 걱정스런 얼굴로 보고 있는데.
“황상!”
기어코 내상을 버티지 못한 황제가 눈을 감았다. 제 품으로 쓰러지는 황제를 받아 든 황후가 놀라 소리치며 황제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를 어쩌지.”
얼른 객잔으로 가서 정국을 치료해야 하는데, 산에서 얼마 올라오지도 않은 곳이라 언제 그 패거리가 들이 닥칠지 몰랐다. 설상가상으로 정국마저 쓰러졌으니 황후 혼자 힘으로 그를 옮기는 일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면초가(四面楚歌). 부정할 수 없는 제 현실이 황후를 극한으로 내몰았다. 헌데, 하늘은 황후의 생각보다 더더욱, 무정하기 그지없었다.
“쥐새끼같이 감히 우리 소굴로 숨어들어?”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황후가 그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횃불과 무기를 든 사내들이 황후와 정국을 둘러싸고 있었다.
“저쪽은 이미 기절한 것 같은데 버리고, 계집을 데려가라.”
이건 정말이지… 재앙, 이었다.
皇后
列傳
요즘 도성에 나도는 소문이 있다.
‘해시이후에 집 밖으로 나오는 여인은 죄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
이게 소문만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황궁에서 잠시 사가로 나온 항아들이며 그 나이 또래의 여인들이 죄다 실종되는 사건이 끊이질 않았다. 요괴의 소행이다. 전쟁에 원한을 품은 옆 나라 사람들이 한 짓이다. 각양각색의 추측도 잇따랐지만 정작 범인은 낮엔 아주 유유히도 장시를 맴돌던 한 불한당 패거리였다. 기방에서도 온통 소란을 피우는 통에 출입 가능한 기방이 이젠 도성 내에 씨가 말랐다는 그 악독한 소문의 주인공, 덕재패. 이들은 늦은 밤 혼자 다니는 여인들을 납치해 줄곧 저들의 산채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여인들을 타국의 상인이나 먼 지방에 기녀로 팔아 어마어마한 수익을 챙겼다.
“하아, 닥치고 시키는 일이나 할 것이지. 왜 쓸데 없는 일을 벌인단 말이야.”
그들이 손 쉽게 순라군의 눈을 피해 납치를 감행하는 것도, 납치한 여인들을 타국의 상인에게 큰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것도, 다 든든한 뒷배가 있기 때문이었다.
문하시중 민윤기. 크게 말하면 그 뒤에 있는 대승상의 세력. 뿌리부터 유고하고 고귀한 신분의 대승상은 어울리지 않게 천박한 방법으로 제 정치자금을 벌었다. 평소 양아치짓이나 하고 다니던 덕재패를 끌어들여 여인들을 납치하게 하고 그걸로 발생하는 돈은 적당히 분배한다. 부도덕한 그 거래로 버는 수익은 상상이상으로 짭짤했으니, 윤기역시 이면의 추악함을 알면서도 함구하고 있던 것이었다. 물론 황후가 안다면 길길이 뛸 테니, 그녀는 이 일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헌데 어째서 조용히 돈 되는 일이나 수행하고 있어야 할 덕재패 놈들이 애꿎은 황후의 뒤를 쫓고 있는 거지? 아니, 애초에 황후전 안에 있어야 할 황후가 왜 이 장시 한복판을 누빈단 말이야? 그 의문은 황제가 잠행에 나왔다는 기억을 상기시킴으로 해결되었다. 황후가 기어코 잠행마저 황제를 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하여간….”
누이의 성격을 아주 잘 안다는 듯 실소를 내뱉던 윤기의 평온하던 얼굴이…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헌데 분명 덕재패는 손에 무기를 들고 그 뒤를 쫓았다. 필히 저들은 황후가 황후인지 알고 그랬을 리 없다. 분명 황후의 신분을 모르던 저들이 황후마저 납치하려 했을 때 황제가 끼어 든 것이겠지. 헌데 황제의 손엔 검 하나 들려있지 않았는데…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은 결국, 황후가 위험하다. 로 결론 났다. 명석한 머리를 굴리던 윤기는 입 밖으로 작게 욕지기를 내뱉으며 아까 그들이 달려갔던 쪽으로 서둘러 말을 몰았다. 황제에게 덕재패와 그들이 한 짓이 들통 난다면, 자금줄이 끊기는 것은 물론 대승상의 손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허나 그들의 손에 황후가 다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윤기 자신이 대승상에게서 버려진다 해도, 황후의 생사는 결코 정치적인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제 생사와도 똑같은 일이었다.
“나으리?…”
“너희가 쫓던 자들은 어디로 갔나. 빨리 말 해.”
한참을 달리자 부상을 입거나 지쳐 복판에 쓰러져 있는 세 명의 사내들이 보였다. 자신을 알아보는 그들에게 내어줄 시간 따윈 없다는 듯 윤기는 아주 다급하게 물었다.
“아, 큰일입니다. 그 년놈들이 저희 얘기를 엿듣는 바람에…. 그래도 산으로 도망쳐서 대장과 다른 애들이 쫓고 있습니다. 금방, 아니 이미 잡혔는지도 모르지요”
젠장. 목이 탔다. 덕재패들이 잡아간 여인들을 팔기 전에 무슨 짓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내들뿐인 산채에 끌려 가 딱 거래가 되기 전까지, 저들끼리 여인들에게 험한 짓들을 일삼는 다는 걸. 서시의 크지 않은 저 산은 그들에게 집과도 같이 익숙한 곳이다. 이미 황후가 그 험한 곳에 잡혀갔을 거라 생각하니 딱 죽고 싶은 마음, 그 뿐인 것이다.
“소소!”
산 한가운데서 황후라 부를 수 없으니, 딱 본인만 알아들을 만한 황후의 아명을 외치며 윤기는 산 안을 뒤졌다. 워낙 나무가 무성하고 어두워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았다.
“소소!”
아까 몸 곳곳에 부상이 있던 자들을 보니 혈투가 있었던 모양이다. 허면 검 하나 쥐고 있지 않던 황제의 몸도 성하지만은 못할 터. 얼마 올라가진 못했을 것이다. 마음이 초조해 졌다. 애가 타니 오히려 더 헤매는 느낌이다. 그렇게 산을 이잡듯 뒤지는 윤기의 귀를 사로잡은 것은… 익숙하고도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다가오지마! 내가 지금 장난을 하는 줄 아느냐?”
황후다. 처음에는 소리치는 것이지만, 말끝이 나긋하게 흩어진다. 윤기는 고민할 새도 없이 말을 틀어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허, 네 년이 죽어봤자 우리가 눈이라도 깜짝 할 것 같으냐? 자신 있으면 어디 한 번 죽어보던가.”
“그래. 어디 한 번 그래보자꾸나.”
윤기는 지금 제 눈을 의심했다. 윤기의 예상대로 황후일행은 얼마 올라가지 못하고 덕재패에게 둘러싸였다. 황제는 어딜 부상입기라도 한 건지 쓰러져 있고, 황후는… 한 놈의 칼을 빼앗아, 대뜸 제 목에다 겨누고 있었다. 허, 대체 무슨 힘으로 상대의 검은 빼앗은 것이지? 하여간 겁이 없다. 이 황궁 밖에서 제 목숨을 걸고 하는 협박 따위가 통하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덕재패가 낄낄 웃으며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이 황후를 내려다봤다. 황후는 그 고고한 눈길을 거두지 않고 천천히 칼을 죄어 들어갔다. 새하얀 살결이 날카로운 검에 쓸려 붉은 핏방울을 흘려보낸다. 아, 세상에. 황당하다는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진 윤기가 곧장 말에서 내렸다.
“그만두십시오 마마!”
급한 외침에 끝까지 그 뻔뻔한 얼굴을 치켜 든 황후가 제 목에 찔러 넣던 칼을 잠시 멈추었다. 덕재패의 험악한 인상도 모두 윤기를 향했다가, 이내 놀란 듯 의아해진다.
“아니, 나으리….”
“모두 물러서라.”
“허나….”
“죽고 싶은 것이냐?”
가차 없이 덕재패를 물리며 황후에게 다가서는 윤기는 아주 차갑고 날카로운 말투로 위협했다. 덕재패 대장은 머뭇하다가 이내 윤기의 시린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섰다. 시야가 밝혀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목에 칼을 겨누던 황후가 방금 그 사람이 윤기임을 깨달았다.
“오라버니….”
“소소.”
익숙하고도 안심되는 사람이 등장하자 황후는 손에서 스르르 칼을 놓았다. 윤기가 어떻게 알고 이곳에 온 것인지, 사내들이 왜 윤기의 말을 듣고 물러서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살았다라는 생각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긴장이 풀리자 몸도 풀린다. 윤기가 바로 제 앞까지 다가오는 것을 본 황후는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 황 후 열 전 熱 血 皇 后 /
十.
고통 속에 먼저 눈을 뜬 것은 황후가 아닌 정국이었다.
“폐하! 정신이 드십니까?”
옆에서 물어오는 것은 누가 봐도 익위사였고, 황후는 깨어나지 않은건가. 그 생각을 하며 정국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찾아오는 어깨의 통증에 정국의 얼굴이 정처 없이 일그러졌다.
“더 누워있으셔야 할 텐데요.”
그리고 들려오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는 이곳엔 어울리지 않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정국의 시선이 그 쪽을 향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태평한 얼굴로 접선을 부치고 있는 윤기였다. 정국의 미간이 다른 의미로 좁혀졌다. 대체 니가 왜 여기 있느냐 라는 듯한 시선에 한숨을 내쉬던 윤기가 접선을 탁- 소리나게 접었다.
“도성 여인들이 사라지던 것은 덕재패의 소행입니다.”
“덕재패?”
“예. 도성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불한당 패거리지요.”
반쯤 체념한 어조로 고하는 윤기에 황제는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를 하면서도 새겨 들었다.
윤기는 황제에게 진실을 고하는 것을 택했다. 어차피 사내들의 얼굴도, 산채도 알게 되었으니 들통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물론 대승상쪽에서 먼저 덕재패를 싸그리 몰살시키고 산채를 태워도 됐지만 애초부터 이 일에 미약한 불만을 품고 있던 윤기는 이번 계기로 싹을 잘라내고 싶었다. 그게 얼마나 손해가 되던, 대승상이 얼마나 노를 하건 상관없이.
“웬만한 물건 거래보다 사람을 더 높게 쳐주는 것 아십니까?”
“…….”
“덕재패는 납치한 여인들을 상단에 팔거나 기루에 넘겨 어마어마한 수익을 냈지요.”
“…헌데 문하시중이 어떻게 그 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거지?”
황제의 날카로운 물음에 윤기가 어깨를 으쓱였다. 분명 황제의 분노는 대승상 일파를 포함하여 황후에게도 이어질 것이다. 가뜩이나 사력을 사해 황후를 미워하고 합방을 피하려 애쓰는 황제인데. 대승상의 바람처럼 이번 합방이 성사되기가 또 어려워질 듯 하다. 윤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덕재패의 뒷배가, 저희니까요.”
“뭐?”
정국이 짙은 눈썹사이를 찌푸렸다. 간단히 실종사건인줄만 알았던 일이 집단 납치인 것도 놀라운데, 정계와도 연관 있는 문제라? 허, 정국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덕재패가 벌어들인 수익의 대부분이 저희 쪽 정치자금으로 쓰였습니다.”
“지금 이걸 내게 고해도 되는 건가?”
“그들은 지금 폐하와 황후의 정체를 모르니 아마 외부인에게 비밀이 탄로난 줄로만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버님께도 금방 보고가 갔을 테고요.”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생각했던 대승상이었지만 이리도 비열하고 치밀한 수를 써 정치자금을 벌고 있는 줄은 몰랐다. 하긴, 온갖 성주들과 대신들이 대승상의 발밑에서 빌빌대는 것도 그의 재물이 한 몫 했겠지. 대승상은 점점 더 깊고 잔혹한 방법으로 황제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었다. 단단히 굳어 허공을 헤집던 황제의 시선이, 침대에 누워있는 황후에게 잠시 멈췄다.
“…황후는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나?”
모른다 해도,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걸 정국은 알았다. 담담한 질문에 윤기가 곤란하다는 듯이 이마를 긁적였다.
“당연히 모르십니다.”
“허나 대승상의 정치자금이 즉 황후의 정치자금일 테니, 모른다고도 할 수 없겠군.”
윤기가 간단명료하게 진실을 말했음에도 정국은 애써 더 선을 그으며 띵한 머리를 짚었다. 윤기가 뻐근한 고개를 한 번 돌렸다. 황제는 또 이 일에 대한 반감으로 황후를 더 멀리할 것이다. 황후와 가까이하면 어찌 되는지 아주 선명히 알고 있는 정국이었지만, 매번 그런 현실이 닥칠 때마다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부상에 엉엉 울며 제게 안기던 황후의 얼굴이 아스라이 기억 속에서 흩어졌다. 왜 자꾸만 대승상의 여식이자 황후, 그렇게 봐야만 하는 그녀가 다르게 보이는지 몰랐다.
“폐하께서 황궁으로 복귀하시면 신은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진실을 고한 것은 가상하나, 일의 크기는 실감하고 있겠지? 쉽게 넘기진 않을 것이다. 대승상에게도 전해라. 허튼 수를 썼다간 그 쪽 가문이 무사하길 기대하지 말라고.”
자신은 절대 한낮 필부가 될 수 없다. 정국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번일은 황후도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방패가 되어 황후를 막아주지도, 사사로운 정에 휘둘려 봐주지도 않을 테니까.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여린 환상에서 깨어나, 황제 자신을 옥죄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깨달아야 한다.
“명 받들겠나이다.”
황후의 오라비에 자리에서 일어나 작게 읍했다. 황제는 그 담담한 눈길로 인사를 받다가 이내, 복잡한 생각을 접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 황후열전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햇살에 가만히 눈을 떴다. 잠시 시야가 흐리다. 그 답답함을 풀기 위해 황후는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점차 맑아오는 눈앞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상체를 살짝 들려 하자, 몸 옆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형체가 그녀를 붙잡았다. 황후가 고개를 돌렸다.
“마마….”
“네가 어떻게….”
태형이 다급하게 황후의 어깨를 잡았다. 황후가 띵한 머리를 다잡고 다시 제대로 태형을 쳐다봤다. 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애타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태형이 맞았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풍경은… 하루를 묵었던 객잔이었다. 돌아온 건가. 대체 어떻게?
“신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갑자기 사라지셨다가 쓰러진 채 남의 손에 들려왔는데… 도성 전체를 뒤질 번 했습니다.”
쓰러진 채 들려서 와? 황후는 정신을 잃기 전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 보았다. 분명 산으로 도망쳤다가, 그 패거리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칼을 제 목에 들이밀고 협박을 했었다. 황후가 급히 손을 들어 제 목을 더듬어 보았다. 느껴지는 천자락이 부드럽게 목을 감싸고 있었다.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태형을 바라보자, 태형이 바싹 마른 입술을 힘들게 달싹인다.
“목에 흉이… 질 것입니다.”
이딴 건 아무렇지도 않은데, 태형은 왜인지 말을 잘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왜 한숨도 못잔 얼굴이지? 그렇게나 걱정을 한 건가. 물끄러미 태형을 바라보던 황후가 손등을 가만히 태형의 뺨에 가져다댔다.
“네가 나를 많이 걱정한 모양이구나.”
“…….”
달큰한 살내음이 황후의 음성처럼 사근사근히 올라왔다. 황후의 말처럼 태형은 밤새 갑자기 사라진 황후에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태형도 도성에 나도는 흉악한 소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황후가 혹여 그런 험한 일에라도 처했을지 모른다, 이리 생각하자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이 싹텄다. 분명 황후전의 별감으로써 적당히 웃전을 걱정하고 지키려 함이 옳았지만, 지난 밤 느낀 감정은 태형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선이었다. 태형은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이리 깊게 개입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느새 눈앞의 이 사람이 제게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인가.
“마마를 안고 온 그 사람은 누굽니까?”
건조한 목소리로 태형이 묻자, 황후는 다시 회상을 시작했다. 그 날카로운 칼날이 제 목에 이런 상처를 내며 파고들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들을 물리고 제게 다가온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라버니.”
헷갈릴 것도 없이 윤기였다. 그를 보자 안심이 되었고, 저도 모르게 정신을 놓았다. 헌데 어떻게 윤기가 자신이 있는 곳을 알아챈 것이지? 그 패거리들은 어째서 윤기의 말에 물러선 것이고? 꼬리의 꼬리를 물던 의문은 황후가 가장 중요한 것을 떠올리도록 해주었다. 황상은 괜찮으신 건가?
“황상! 황상은 어디 계시느냐? 치료를 해야 하는데, 어찌 된 것이야?”
“마마. 폐하께선 내상을 치료하시고 마마보다 먼저 깨어나셨습니다.”
황급하게 황제에 대해 묻는 황후에 태형은 가만히 그 팔을 잡고 침착하게 설명했다. 부상이 더 심한 건 자명하게도 정국이었지만, 워낙 수련된 몸이라 지민이 의원을 불러옴으로써 쉽게 치료를 끝냈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황제는 깨어났다.
“허면 어디 계시느냐?”
“익위사는 이번 일에 대해 소상히 조사하기 위해 먼저 황궁으로 갈 것이고, 폐하께선 객잔밖에 잠시 나가셨습니다.”
대체 몸도 성치 못할 텐데 밖에 나가긴 왜 나간단 말인가. 걱정스레 새하얀 미간을 찌푸린 황후가 곧장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마마!”
태형이 뭐하는 짓이냐는 듯 황후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황후는 그 손을 뿌리치려 애썼다. 힘을 주어 그런가 황후가 작은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놓아라! 내 눈으로 황상을 봐야겠다.”
“제발, 마마께서도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태형이 애타는 목소리로 부탁했지만 황후는 기어이 그 손을 뿌리치고 객잔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정말 태형의 말대로 몸이 덜 회복된 것인지 계단만 내려와도 온 몸이 쑤셨다. 허나 문을 열고 나가자, 밖에 서있는 정국이 보였다. 황후가 빠르게 달려가 정국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손길을 따라 정국이 황후를 돌아봤다.
…분명 익숙한 눈빛인데 또 이리 보니 마음이 아픈, 차디찬 시선이었다.
“…황상.”
“깨어난 모양이군.”
황제의 목소리는 퉁명스럽고 적당히 담담했다. 마치, 그 전에 제게 보여줬던 다정함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이. 황후는 괜시리 불안해졌다.
“몸, 몸은 괜찮으시는 것입니까? 이리 나와 계셔도….”
“황후의 오라비 짓이다.”
“…예?”
정국의 몸을 살피던 황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도성에서 없어지던 여인들은 모두… 일개 대승상의 자금줄이었단 말이야. 어제 그치들도 모두 대승상이 고용한 왈짜패고.”
“화, 황상… 신첩은, 신첩은 몰랐습니다! 황상.”
“사람의 탈을 쓰고 아주 참담한 일을 일으키고 다니는 대승상이, 누굴 위해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지?”
황후는 이 일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변명부터 했다. 이미 단단히 굳어진 정국의 시선을 한시라도 빨리 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황궁 밖 여인들이 사라지는 일에 왜 제 아버지가 관련되어 있는지 황후는 아는 바도 들은 바도 없었다. 황후도 방금 그 얘기를 듣고 어안이 벙벙하던 찰나였다. 허나 정국은 이미 황후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황후가 아무리 변명해도, 그게 진실이라 해도 그녀의 아비와 오라비가 모두 꾸민 일이니 관련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황궁에서 나온 뒤 자신이 잠시 미쳤었다. 감히 대승상의 여식과 진심을 주고받아?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잠깐은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허나, 그건 아주 헛된 상상이었다는 것을 황제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대는…무얼 기대한 것이지? 어차피 이리 될 것을.”
진심으로 경멸한다는 황제의 눈, 처음 받아보는 것도 아닌데 황후는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다. 잠시 황제가 주는 달콤함에 벌써 취해있어 그런 것인가. 인간은 참으로 간사하기 그지없다. 그 짧은 시간에도 제가 느끼는 감정이 진짜라고 착각해버리니 말이다. 황제가 자신을 사랑한다, 뇌리 깊은 곳에 숨어있던 착각이 황후의 가슴을 후벼 팠다.
“이번만큼은 문하시중이 직접 제 죄를 인정했으니, 황후도 그 여파를 피해가진 못할 것이다.”
“황상….”
“우선 황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황후는 처분을 기다려라.”
황제의 단호한 한마디에 황후가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메마른 입술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정국은 잠시 흔들리는 눈으로 그 피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 황후열전
이제 정말 끝이구나. 태형은 생각했다. 자신의 목적은 애초부터 황제가 황후를 연모하도록 돕는 것이었으니. 황제가 황후를 지키려다 부상까지 입었다는 것은 그의 마음도 충분히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할 테다. 헌데 어째서 마음이 이리도 무거운 것이지? 눈만 감아도 선명히 떠올릴 수 있는 황후의 얼굴이 자꾸만 머리를 어지럽혔다. 황제는 제 몸을 다 회복하기도 전에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익위사가 먼저 궁으로 갔으니, 황후와 황제만 제 자리를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객잔을 나서는데 분위기가 미묘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황후의 얼굴이 어두웠다. 황제는 먼저 빠르게 걸음을 옮겨 앞서가고 있었는데, 뒤 한 번 돌아보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 사이에 미묘한 기류를 느낀 태형이 조심스럽게 황후에게 물었다. 황후가 기운 없이 고개를 달싹였다. 전혀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그렇게 어색한 일행이 서시를 지나 황후에 거진 다다랐을 때였다. 익위사가 미리 황궁에 들어가 언질을 준 것인지, 황궁 밖에는 내시백이 상궁 내관들을 거느리고 아주 걱정스런 눈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황궁 문 앞에서 초조하게 두리번거리던 내시백이 저 멀리 보이는 황제와 황후를 발견하곤 아주 반갑게 손을 들었다.
“폐하! 무사하십니까!”
헌데, 왜 그들의 옆에 서있는 한 사람이 이리도 낯선지 모르겠다. 황후가 자동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더 이상 투박한 항아복이 아닌, 진푸른 비단의복을 입은 채 덩달아 초조하게 기다리던 여인은….
백야였다. 황후가 백야를 보곤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내시백의 외침에 고개를 돌리고 황제를 발견한 백야가 눈물 그렁그렁한 눈을 크게 뜨며 황제를 본다. 그리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치맛자락을 살짝 잡고 걱정하고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는 듯이 다급하게 달려온 백야는, 황후의 눈앞에 있는 정국을 끌어 안았다.
아아….
“폐하! 소녀가 얼마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맑은 눈물을 뺨에 뚝뚝 떨어뜨리며 소리쳤다. 정국은 가만히 서서 백야의 손길을 받아주었다. 사력을 다해 황제를 끌어안으며 맑고 비통한 목소리로, 제 사내를 걱정하는 백야. 태형이 숨을 씹었다. 분명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황제가 백씨를 밀어내지 않았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걸 지켜보던 태형이 문득 옆에 선 자그마한 황후를 바라봤다.
“…….”
황후는 아주 공허하고,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눈을 하고서 가만히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화가 났다. 왜 어째서 매일 황후만 아파해야 하는 거지? 갖은 희망고문으로 황후를 괴롭게 한 건 황제였다. 헌데 왜 모든 고통은 황후가 다 끌어안아야 한단 말이야. 태형이 한걸음 옮겨 황후의 시야를 가렸다. 황후가 그 눈동자를 그대로 들어 태형을 올려다봤다.
“보지마세요.”
“…….”
“제발.”
아릿한 그 목소리에 황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皇后
列傳
도성에서 일어난 실종사건의 주범이 대승상이다. 황제는 잠행을 갔다가 그들의 공격에 큰 부상을 입었다. 그 두 가지 사실에 황궁은 제법 시끄러웠다. 헌데 황후는 모든 일과는 상관도 없다는 듯이 황후전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 황후를 지켜보던 태형은 한참이나 고민했다. 제 마음이 무엇인지. 제가 어떻게 하는 길이 황후를 돕는 길인지. 결론이 도통 나지 않자, 태형은 황제를 찾아갔다. 햇빛이 아주 센 한 날의 정오였다.
“허, 일개 별감 놈이 지금 폐하를 알현하겠다는 것이냐?”
대명전 앞까지 찾아간 태형에게 내시백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저었다.
“일단 고하기라도 해주십시오.”
“어허, 대명전을 뭘로 보는 것이야. 누가 감히 누굴 알현한다고.”
내시백이 턱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물러가라 했지만, 태형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무래도 조용히 황제를 만나기는 그른 듯싶다. 이제 자신은 황후전 별감이니, 황후전의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조용히 있으려 했지만 이러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미리 송구합니다.”
태형이 내시백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였다. 내시백의 동그란 눈이 커지며 태형을 올려다본다. 싱긋 미소를 머금은 태형은 그대로 곧장 나아가 대명전을 문을 열었다. 문을 지키고 있던 항아들이 죄다 놀라고 그를 붙잡을 새도 없이, 세 겹의 문을 모두 열고 들어간 태형은 끝내 황제를 마주했다. 탁상에 앉아 상소문을 훑던 정국의 매서운 시선이 갑작스런 침입자를 향했다. 뒤늦게 따라 들어온 내시백이 기겁을 하며 태형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아니 네 이놈! 예가 어디라고 감히, 얼른 나가라. 어서.”
“내시백.”
내시백이 연약한 팔목으로 태형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지만 태형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곤경에 처한 내시백을 구한 건 황제의 나직한 부름이었다. 다시 상소로 시선을 돌린 정국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됐으니 나가봐라.”
“…예, 폐하.”
황제의 명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태형을 꼴아 보던 내시백은 공손이 허리를 숙이고 물러갔다. 내시백이 문을 닫고 나가자, 태형이 황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 맞은편 자리에 착석했다.
“황후전 별감이 여긴 무슨 일이지?”
도성을 그렇게 함께 나돌아 다닌 것 치고는 하나도 친근하지 않은 말투였다. 역시 태생부터 황제라 그런가 주어진 환경에 무섭도록 적응을 잘 한다. 누군 전혀 그러지 못하고 있는데도.
“궁금하게 있어 왔습니다.”
“무엇?”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태형에 정국이 보던 상소문을 접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타고난 지배자의 오만한 시선이 두려울 법도 한데, 태형은 여전히 태연하고 담담한 눈으로 황제를 보았다.
“폐하의 마음이요.”
허. 그리고 떨어지는 당돌한 언변에 황제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폐하께서 황후마마를 진심으로 연모하시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내가 그걸 왜 너에게 알려줘야 하지?”
관용적이던 황제의 시선이 매섭게 그였다.
“폐하께서 어찌 대답하시는 지에 따라, 신의 마음도 달라질 테니까요.”
자신만만한 태형의 말에 정국은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껴야 했다. 잃을 것이 많고,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자신과 달리 태형은 오직 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그것만큼 황제가 부러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없었다.
허나 자신은 황제. 그건 싫다고 피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운명이었다.
“짐은 황후를 연모하지 않아.”
“허면 도성에서는 왜 그러셨습니까? 마음 주지도 않으실 거면서 황후마마께 애 먼 희망고문은 왜 하신거냔 말입니다.”
태형의 얼굴에서 태연한 낯빛이 싹 가셨다. 사내의 낮은 목소리가 평이하지만은 않은 어조를 타고 천자에게 쏘아 붙었다.
“연모하든, 연모하지 않든 황후는 내 황후다. 내 사람에게 내가 뭘 하던지 그게 대체 무슨 문제가 있지?”
고고한 황제 특유의 뻔뻔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말이었다. 태형은 그동안의 노력이 무색하게 오만한 황제의 태도에 허탈함을 느꼈다. 결국엔 황제는 끝까지 황후를 연모할 생각이 없었고, 황후는 끝까지 그 애타는 고통 속에서 괴로워야 했다. 그녀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자신의 마음의 다라고 생각했다. 헌데, 이미 선을 넘은 감정을 자각하기도 전에, 황제는 제 눈앞에서 황후를 버렸다. 이젠 충신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눈감지 않아도 된다. 제 감정을 숨긴다고 황후가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다, 그걸 깨달은 순간 태형은 이상하게 답답하던 속이 확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심각하게 생각하던 태형의 얼굴이 밝게 풀어졌다. 별감은 확신에 찬 그 눈으로 황제를 똑똑히 바라봤다.
“예. 문제 없습니다.”
“…….”
“답은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짧은 목례를 끝으로 막힘없이 대명전을 나서는 태형의 뒷모습을, 정국은 아주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왜 이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것인지, 왜 점점 더 자신을 죄어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태형은 곧장 가벼운 발걸음을 옮겨 황후전으로 돌아갔다. 황후전 앞을 지키던 도미가 태형의 등장에 아주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종일 한 끼도 드시지 않았다. 몸도 성하지 않으신 분이… 이를 어찌한단 말이냐.”
황후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것처럼 굴었다. 태형은 오늘로써 그 막힌 속을 풀어내고자 다짐했다. 도미의 말에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태형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황후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상에 기댄 황후가 손에서 옥환을 굴리며 처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속이 끓어올랐다. 아주 태평하게 정무를 이어가는 황제와 달리, 황후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그 환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태연하던 속에 분노가 차서 그런가 태형이 저벅저벅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그리곤 황후의 침상에서 한쪽 무릎을 굽히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왔느냐?”
“마마….”
황후의 탁한 눈동자가 태형을 향했다. 고통스럽다. 연모가 이런 것인가. 그냥 잠시 속이 상했을 뿐인데 어쩐지 그 작은 얼굴을 보는 것조차 마음이 아프다.
“폐하께선 몸은 좀 괜찮으시더냐?”
“…….”
태형의 목이 애타게 끓어올랐다. 당신은 왜 당신에게 마음 하나 없는 황제를 그리도 사랑하는지, 그 마음을 접고, 더 이상 아프지 말고 눈앞의 자신을 봐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별감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이 낯설고…그래서 더 뜨거웠다. 태형이 손을 들어 황후의 뺨에 가져다댔다. 황후가 살짝 의아한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감히 무례하게도 별감이 황후의 얼굴에 손을 얹다니, 또 무엄하다 호통을 칠만도 한데 황후는 얌전히 태형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소소.”
황궁 밖에서는 많이 부르던 이름인데, 황후전 안에서 듣자 제법 낯설다. 그게 무엄하게 느껴졌는지 이번에는 황후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황후의 시선은 담담하기 그지 없었지만 태형의 마음을 뜨겁게 불살랐다.
“더 이상,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긴, 싫어졌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황후의 눈길을 무시한 채, 당돌한 그 고백을 끝으로 태형이 고개를 들어 황후의 붉은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댔다. 황후의 두 눈이 세상 그 무엇보다 놀란 듯 팽창되었다. 태형은 가만히 눈을 감고, 애타는 손길로 황후의 뺨을 쓰다듬으며 황후의 아랫입술을 짙게 머금었다. 초련(初戀)이었다.
/ 황 후 열 전 熱 血 皇 后 /
말머리가 바뀐 걸로 걱정하는 분들이 많으셔서,, 사실 애초에 말머리가 정국이었지만
그게 결말은 아니었습니다ㅋㅋ 처음 황후열전을 쓸 땐 딱히 결말을 안 정해놓고 써서
제일 핵심인물인 정국이를 말머리에 적은 거였구요,, 요번에는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
놓기 위해 말머리를 지웠습니다!!
연재텀 정말 극악이죠... 죄송합니다,,중요한 건 앞으로의 연재텀도 극악일 것 같습니다
,,(머리박기) 그래도 항상 기다려주시고 정성스런 피드백 남겨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합
니다ㅠㅠ!!
엇 그리고 제 맘속에 남주는 아직 1도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저번화에서 한
독자분이 요청해주셨기 때문에,, 간단하게 조사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스토리가 바뀌는 부분이 생각보다 뒷편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