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그와트; 일곱 개의 호크룩스
55.
빗자루에서 떨어질 때 보였던 파노라마는 분명 나의 기억이 아니었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깨어났을 때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것 또한 나의 기억이 아니었다. 일기장을 연관 짓고 펜시브에서 본 장면을 떠올려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자꾸만 확인하려했던 것은 ‘혹시나’의 힘 때문이었다.
그리고 혹시나는 역시나 제 힘을 발휘했다. 로운이라는 사람이 내 전생이고, 그가 일기장의 주인이라면 모든 것들이 맞춰진다는 것에서부터 나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전생이라는 게 정말 있다는 걸 온몸으로 겪고 있는 걸로도 모자라 이 모든 게 이 세계의 최대 어둠의 마법사이자 범죄자와 연관돼 있었다. 그리고 그게 그간 나를 후원해주던 T였다. 내 부모님을 죽이고 나를 머글세계에 살게 했으며, 고아원에서 자라게 한 건 모두 그 사람 짓이었다. 그리고 혼란은 또 다른 의문을 낳았다.
왜?
는 로운에게 쓸 수 없는 표현이었다.
내 전생이 로운이었던 것과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 거지? 그는 내게 지나치게 잔인했고 또 지나치게 다정했다. 내게 원한이 있어서라 단정 짓기도 어려울 만큼 뭐 하나 적당한 게 없는 사람.
여러 가지 혼란과 의문 속에서 나는 또 고민해야 했다. T가 나를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가. T가 볼드모트 뷔라는 것을 안 이상 그의 존재를 덮어둘 수 없다. 호그와트에 어둠의 마법사가, 그것도 학생의 방에 드나들었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것도 없다. 나는 테라스 문을 열었다. 쌀쌀해진 공기는 저녁을 머금고 있었다. 천천히 그가 앉곤 했던 난간을 쓸었다. 차갑다. 차고 딱딱해. 난간의 끝에는 작은 화분이 위태롭게 걸쳐 있었다. 손을 뻗으려는 찰나 화분이 떨어졌다. 큰 소리가 날 것을 염두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나는 숨을 참았다. 화분은 떨어지지 않았다. 무언가에 걸린 듯 중력을 거슬러 떠 있었다. 천천히 화분을 건져냈다. 화분이 떨어진 곳에는 무언가 미약하게 타며 사라졌다.
“결계잖아.”
한바탕 학교를 뒤집었던 결계사건이 떠올랐다. 정말, 지나치게 잔인하고 지나치게 다정한 사람. 나는 화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가 들을 말의 무게에 대해 생각하던 곳에서, 내가 풀어갈 말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하는데, 자꾸만. 자꾸만 무언가 쿡쿡 찔렀다. 배를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어쩌다, 어쩌다가.
“추운데 왜 나와 있어.”
어쩌다 이렇게 됐니, 지민아.
“뭐라도 걸치지 않고.”
나는 가만히 박지민을 쳐다봤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전과 변함이 없었다.
“나한테 ‘전’이라는 게 의미가 있을까.”
“무슨 말이야?”
“넌 아주 오랫동안 주황머리였겠구나.”
“날 때부터 주황이었어.”
“아주 오랫동안 호그와트를 봐왔을 거고.”
“내가 호그와트보다 나이 많을 걸.”
아주, 오랫동안, 너는.
“그럼 아쿠룹스에 대해서도 알겠네.”
“……아쿠룹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숲에서 봤어.”
“무슨 숲. 금지된 숲? 거길 갔었어? 너, 괜찮아?”
박지민은 난간에서 내려와 내게 다가왔다.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나를 살펴보는 꼴이 우스워 픽 웃자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다쳤지.”
“응.”
“왜 몰랐지……”
“내가 다치면 네가 알아야 해?”
“너랑 난 연결돼 있어. 네가 위험에 빠지면 단번에 알 수 있다고. 그런데 왜, 왜 몰랐지…….”
“언제부터 연결돼 있었는데?”
내 말에 박지민은 멈칫하더니 내 어깨에서 손을 뗐다.
“너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거 묻네.”
“뭐가 어떻게 이상한데.”
“쓸데없는 거 묻잖아. 평소엔 뭐 묻지도 않던 애가.”
“박지민.”
“왜.”
“이 나이 부심 오지게 부리는 할아방구야.”
“뭐?”
단번에 얼굴을 구기는 박지민에 나는 웃었다. 퍼즐은 계속해서 조각나고 있었으나.
“넌 오래 살았으니까.”
“아니 왜 자꾸.”
“김태형이 누군지도 알겠네?”
계속해서 맞춰지는 중이었다.
“……그건 왜.”
“알아, 몰라.”
“……알아.”
“그럼. 로운이 누군지도 알아?”
나는 그 조각이 더 이상 남지 않을 때까지 맞춰나가야 할 것이다.
“대답해.”
“……응. 알아.”
“네 전 주인이라는 사람이. 혹시. 그 사람이야?”
“아니. 전 주인이라는 건 없어. 김희완, 잘 들어. 내 주인은 너야. 그때부터 지금까지 주인이 바뀐 적은 없어.”
“그러지마…… 그렇게 말하지 마……”
정말 내가 로운이었다고 말하지 마.
“난, 난 그냥. 그냥. 그 사람이 저지른, 수많은 범죄들의 피해자라고 해줘…….”
“응, 알아. 맞아. 네 말이 맞아. 넌 아무 잘못 없어.”
그 과정이 얼마나 아프든 간에.
“그러니까 울지 마…….”
T가 올 때마다 박지민이 나갔던 건 이유가 있었다. 모든 걸 알고 있었으니 그가 불편할 수밖에. 아마 처음부터 박지민은 그를 싫어했을지도 모른다.
“네가 다시 내 이름을 박지민으로 지어줬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지.”
나는 주말마다 같은 시간에, 악몽 같은 꿈을 꾸고 깨어나는 게 싫어 박지민에게 옆을 지켜 달라 했다. 박지민은 침대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병동에서 내 손목에 이상한 짓을 했을 때가 생각났다. 가만, 이건 누구 기억이더라.
“초반에 기억 못 하냐고 그랬던 건 왜 그랬어. 당연히 전생이니까 기억 못 하지.”
“그냥, 조금 화나서. 너한테 난 건 아니고.”
박지민은 말을 아꼈지만 내가 묻는 말에는 모두 대답해줬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덮고 잔잔하게 오가는 대화를 짚고 있자니 자장가가 따로 없었다. 가물가물한 게 내 시야인지, 기억인지 분간하지 못 할 때쯤 나는 다시 물었다.
“너 짱 세다고 그랬지.”
가물가물한 게.
“그리고 내가 주인이라고 했지.”
내 시야인지.
“그럼 내가 하는 말은 전부 다 들어?”
“……뭘 시키려고.”
“이상한 거 안 시켜.”
기억인지.
“그냥, 사람 한 명만 봐줬으면 해.”
“조폭 같이 말하지 마. 누굴 봐달라고?”
그것도 내 기억인지.
“후플푸프 정호석.”
그 옛날의 내 기억인지.
“그거 알아? 이번 시험 끝나면 트리위저드 게임 하는 거.”
“그게 뭔데요?”
새로 나온 차향이 좋았다. 딸기와 파인애플 향이 나 상큼했는데 묘하게 심신이 안정됐다. 사실 유앤아에 오는 것 자체가 심신이 안정됐다. 여기저기서 좋은 향들이 들끓고 앞에서는 지은 언니의 웃는 얼굴이 있으니. 주말 오후를 즐기기에 딱 좋은 지금.
“쉽게 말하자면 학교 세 군데가 모여서 마법경진대회를 하는 거야. 각자 돌아가면서 개최지를 정하는데 올해는 호그와트더라구.”
언니는 차근차근히 설명해줬다. 트리위저드 게임. 아쿠룹스에 의해 학생 한 명이 죽었다던 게임.
“……학생들이 다치거나 하지는 않을까요?”
“걱정 마, 참가하고 싶은 사람만 이름을 넣어서 추첨하는 거니까. 게다가 2학년부터 넣을 수 있어서 너는 해당사항 없어.”
“그리고 올해부터 불의 잔엔 전 학년이 아닌 2학년부터 넣을 수 있습니다. 아직 고등마법을 배우지 않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한 선택이니 양해바랍니다.”
“원래 전 학년이 넣을 수 있는 거 아니었나요?”
“아주 옛날에 바뀌었대. 그게 언젠지는 나도 몰라. 근데 너, 게임에 대해 모르는 거 아니었어?”
“아. 전체적인 건 잘 모르고. 부분적으로만 들었어요.”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차를 내려다보면 찻잔에 비친 게 내 얼굴인 걸 꼭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뭔가 자꾸만 툭툭 끊기고 무작위로 연결되는 기분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천천히 차를 들이켰다. 분명 내가 비쳤던 찻잔은 마시고 보면 빈 잔이 된다. 그게 너무 공허해서 계속 차를 따랐다.
“퀴디치 대회는 아마 크리스마스이브에 하게 될 거야. 그때 우승팀은 월드컵 경기관람권이 주어지니까 바짝 긴장해. 우린 완전 이 갈고 있어.”
“제가 있어서 쉽진 않을 걸요?”
“너 되게 재수 없는 말을 귀엽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언니는 웃으며 내 찻잔에 찻잎 하나를 띄워줬다. 순간적으로 파동이 일었다. 거친 표면 위에 동동 떠 있는 게 꼭 나 같았다. 나는 물마시듯 다시 차 한 잔을 다 들이켜 버렸고, 언니는 내게 티백을 챙겨주겠다며 일어섰다. 다 젖은 찻잎이 바닥에 들러붙었다.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결국엔 엉엉 울며 잠들었던 그 날 밤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든 말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어디부터 알고 어디까지 모르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박지민은 다 알까. 연결돼 있댔으니까 어느 정도는 알지 않을까. 내가 어떤 감정인지 정도는 알 수 있대잖아. 그러면,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까? 호그와트에는 비밀이 너무 많다며 투덜거렸던 것치고 너무 나를 짓누르는 거 아니냐고. 죽음의 개에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인데.
“그래. 우리 증명하자.”
자꾸만 없는 수면 만들어서 그 위로 떠오르지 좀 말라고. 모두 흩뿌리고 싶은 심정인데.
“꼭 증명해서, 보란 듯이 미움 받자.”
“아, 언니.”
“응?”
“체리 향도 있어요? 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너도 그랬니. 정국아.
안정을 찾으려 간 게 아주 도움이 안 된 것은 아니었지만 완전히 나아지지는 않았다. 차향이나 다정한 말들로 긍정적인 회로를 돌리기에 내가 빠진 수렁이 너무 깊었다. 두둑한 종이가방을 들고 터덜터덜 걸었다. 향긋한 티백 향이 걸음을 걸을 때마다 올라왔다. 언제나 다정한 사람. 퀴디치 상대편이라고 견제하듯 말하지만 절대 사람 대 사람으로 견제하지는 않는다. 진심어린 장난이나 장난어린 진심이 아니라 정말 온전한 진심을 주는 사람. 가끔은 날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챙겨주느냐 묻고 싶을 정도로. 이런, 무조건적인 친절을 받을 만한 자격이 내게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묻고 싶을 정도로.
“머글들은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하나 봐. 쟤도 너도 혼자네? 같이 다니면 되겠다.”
야외 복도인데도 목소리가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 앞에 선 김도연의 목소리가 그랬다. 김도연이 가리킨 곳엔 현승희가 있었다. 나는 답을 않고 김도연을 비켜 걸었다. 그리고 뒤에서 들리는 말은 온몸에 가득했던 향기마저 몰아낼 만한 것이었다.
“아, 넌 그래도 혼자가 아니겠구나. 밤마다 만나는 분이 있으니.”
나는 지난 학기에 김도연이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의 연장선인가. 밤마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얘가 어떻게 알지? 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기 위해 종이가방을 움켜쥐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한 배를 탄 거 아직도 모르겠어?”
“뭐?”
“그래도 조심해. 같은 배라도 바닥에 구멍 나는 쪽이 먼저 가라앉으니까.”
그러고 김도연은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김도연이 반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꼭 모든 것을 안다는 듯 말하는 게 기묘했다. 그냥 주워들은 이야기로 골려주려 했다기에는 한 배를 탔다는 말이 걸렸다. 떨어지지 않던 발이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걷다가, 뛰다가, 달렸다. 김도연이 사라진 모퉁이까지. 종이가방이 한 손에서 덜그럭거리며 흔들렸다. 마침내 모퉁이를 돌았을 땐 아무도 없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손잡이가 헐거워진 종이가방은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종이가방을 품에 안자 다시금 향기가 밀려왔다. 가쁜 호흡이 방금 급하게 뛰어서 그런 건지, 다른 이유 때문인 건지 알 수 없었다. 들숨과 날숨이 정리되고 있었지만 나는 분명 엉키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감히 종잡을 수도 없을 만큼.
안녕하세요 육일삼입니다. 새해 첫 글이에요!
이탤릭체로 돼 있는 부분은 여주에게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전생의 기억입니다. 중간에 태형이 짤이 나와서 혹시라도 당황하셨을 분들을 위해,, 지난 화에도 썼던 것 같네요.
여주는 태형이에게 느끼는 감정이 되게 복합적이에요. 전생의 기억이 문득문득 떠오르면서 로운이 가졌던 감정도 슬며시 흘러갔을 거거든요. 물론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객관적으로 판단하려 하지만 태형이 제게 보여준 다정한 면모 같은 것에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을 이번 화에 좀 넣어봤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보이게 될 거예요.
호일호 첫 글이 2018년 여름이더라구요. 물론 인스티즈 서버 문제로 6월에 썼던 글이 모조리 날아가서 새로 쓴 거지만,, 1년 하고도 4개월이 훌쩍 넘어 버렸습니다. 내용이 3부로 나뉘어져 있고 그 양도 많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요. 질질 끄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고, 다른 작품도 써 보고 싶기도 하고, 이 인물들이 너무 마음고생을 많이 하는 것 같아서 이번 달 안에는 완결 짓고 싶은데 가능할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최근들어 제 작품을 봐주시는 분들이 늘어서 힘 내서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따뜻한 댓글 남겨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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