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그렇게 생각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요근래 나는 넋을 놓는 시간이 많아졌다. 차마 말하지 못할 꿈을 꾸는 횟수도 늘어난 것 같고. 눈을 감으면 그 애를 생각했다. 그 애를 생각하면 아랫배가 저릿해졌다. 좋아해. 하루의 절반을 넘게 더 그 애를 생각했고 나와 마주한 사람들의 낯짝에 그 애의 얼굴을 대입시키는 일도 허다했다. 결국엔 네가 나와 입을 맞추면 어떨지를 고민하다가 그 때 짓는 표정 하나, 그것만 상상해도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어느 누구한테 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질 않을 것 같아서.
"옹성우는 어때?"
어차피 너도 안 믿어줄거니까. 그 주변만 뱅뱅 맴도는 거지. 주인 없이는 하루도 못 살고 죽는 강아지. 쓸모없다 버려도 그 발치에서 계속해서 주인만 생각하는 개. 개새끼. 개새끼마냥. 언젠가, 그러다보면 네가 나를 좀 알아줄까 하면서 말이야.
"괜찮아요. 알고 보니까 진짜 괜찮은 애더라고요."
나를 향하는 눈길들에 가만히 어깨를 으쓱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나와 눈을 맞춘 이야기의 당사자인 옹성우는 이제야 출근을 하는 모양이었다.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내게 먼저 인사를 하는 그의 모습은 그럭저럭 우리 사이가 원만하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나와 옹성우를 믿기 어려운 표정으로 보는 사람들이 좋았다.
"이러다가 둘이 서로 좋아하는 거 아냐?"
놀리기 위한 말투로 말을 꺼낸 과장은 그대로 내 등을 한 번 툭 쳤다. 어차피 둘이 나이차도 얼마 안 나기도 하고, 입사 시기도 비슷하잖아. 사수랑 부사수랑 정분 터는 거야 원래 있는 일이니까. 안그래? 과장은 워낙에 가벼운 사람이었다. 사내에서 커플 하나쯤은 나와줘야 한다고 우스갯소리를 제일 많이 꺼내기도 했고 원래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는 건 모두가 알았다. 그래서 멀찍이서 우리들의 얘기를 다 듣고 있음에도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는 옹성우도 그 말들을 가벼이 여겼을 것이다.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을 하고선 괜찮다고 넘어가는 게 그의 특기라면 특기였으니.
"안 그래도 제가 좋아한다고 고백했어요."
내 몫으로 둔 아메리카노가 식어 있었다. 커피는 뜨겁든지, 차갑든지 둘 중 하나여야 맛이 나는 법이었는데. 이런 게 넌 뭐가 좋다고 마시는지. 말이 미처 다 끝나기 전에 난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를 그대로 옹성우에게 쥐어주었다. 반쯤 얼이 빠져서 있는 그의 손가락이 살짝 나와 맞닿자 유난히 차가운 느낌이 와닿았다. 그거 너 마셔. 난 식어서 맛도 나지 않는 커피를 넌 좋아하잖아. 내가 말하기가 무섭게 회사 분위기가 정적이었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향해졌고 그 사이엔 정이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너 좋아해. 성우야."
그 때 보았던 네 얼굴은, 내 생각보다 좋았다. 매일 밤, 내 꿈속에서 키스에 숨이 막혀 울먹거리느라 빨갛게 달아오른 귓볼보다 더 사랑스러웠다. 목이 졸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얼굴 하난 죽어도 잊지 못하겠더라.
FXXK MY LIFE
F
옹성우는 인턴으로 우리 회사에서 일하다가 정직원이 된 케이스였다. 내가 비록 그의 사수로 있긴 배정받긴 했지만 나와 그가 입사한 시기는 비슷했다. 오히려 인턴을 했던 그의 경력까지 합하면 그가 내 사수를 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일을 잘했다. 유난히 좀 빨리 외우고 익히는 듯했다. 다른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들어온 내가 가끔씩 업무일지를 헷갈려 하면 그걸 알려주는 것도 그였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게 옹성우에게 자격지심이 생겼다. 물론 내가 그에게 별 같지도 않은 감정을 가진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이 모든 건 빌어먹을 내 거지같은 성격 때문이었다. 고작 그보다 내가 나은 걸 하나 꼽자면 외국어 하나인데 무역회사였던 전 직장에 비해서 이번 회사에서는 외국어를 쓸 일이 없다는 게 애석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내가 옹성우보다 나은 점이 없는 것 같았다.
"성우 선배 어때요?"
그리고 자꾸만 나에게 옹성우에 대해 묻는 정이가 미웠다. 정이는 이번달에 입사한 막내였다. 눈이 동그랗게 생겨서 여자치곤 키가 큰 편인 나에게 무언갈 물어볼 때면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 보는 게 예뻤다. 하루 종일 쉴 새도 없이 움직이는 입술은 고작 입사한 지 한 달도 안된 정이가 회사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막내가 된 비결이기도 했다. 워낙에 생겨먹은 성격이 모난 나도 유독 정이만은 좋아했다. 밖에서는 언니라고 불러도 되냐며 날 졸졸 쫓아다니는 모습이 아기새 같아서 거절도 못했다. 그런 정이가 옹성우가 입사한 이래로 많이 하는 말은 그에 관한 것들이었다.
"성우 선배는 커피도 꼭 식혀서 마신대요. 뜨거운 건 너무 뜨거워서 싫고, 차가운 건 차가워서 싫다고."
특이하죠. 샐쭉하니 웃을 때 접히는 볼살이 귀여웠다. 정이의 말을 가만히 있다가 보면 옹성우는 하나도 잘난 점이 있는 것 같지 않은데. 커피 하나도 까다롭게 마시는 그가 뭐가 좋다는 건지. 정작 내 부사수였지만 업무 외에는 말 한 번 섞지 않은 나보다 정이는 옹성우에 대해 잘 알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까지도, 퇴근하다가 같이 만나서 가는 길에서도. 옹성우는 옆에 있지도 않았는데 정이는 항상 옹성우 얘기를 했다. 그리고 난 그게 퍽 싫었다.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더 많은 나에게 싫어하는 목록이 늘어나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좀처럼 정이가 옹성우에 대해서 묻는 말이 많아진다는 건,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아, 기억이 났다. 그 날. 그 때. 몇 시, 몇 분, 몇 초였는지까지 다. 난 다 기억이 났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만 주구장창 달고 살고, 싫어하는 사람이 생겨도 그 사람 뒤만 졸졸 눈으로 쫓는 나는 무엇하나 잊질 않았다. 그러기도 그러는 게,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한데 섞여서 모여있는데 잊혀진다는 게 더 신기할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있던 이브날. 야근에 다 쩌들어 있는데 정이만 유난히 들떠 있었다. 옹성우와 단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웃을 때마다 말려올라가는 볼이 그날따라 빨개졌다. 불그스름한 얼굴에 생기가 더해졌고 옹성우의 고개짓 한 번에 정이는 웃었다. 나는 그렇게나 보기가 어려운 얼굴을 옹성우는 고개 끄덕임 하나에 만들어냈다.
"저, 성우 선배랑 뮤지컬 보기로 했어요."
다 선배가 도와준 덕분이에요. 이러려고 한 게 아니었다. 내가 정이에게 건넨 뮤지컬 티켓은 오로지 나와 정이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날짜의 티켓을 구하기 위해서 몇 번이나 사이트를 뒤지고 뒤졌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먼저 티켓을 건네주고 그녀가 나와 같이 보자고 말을 하길 기다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먼저 나와 보자고 할 걸. 왜 바보같이 티켓만 다 건네줘서. 정이는 웃는 게 예뻤다. 그리고 그 때의 정이의 얼굴은 비할데 없이 행복해보였다. 순간 정이와 옹성우를 번갈아 본 난 내가 정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때야 알았다. 다 뺏기고 나니까 알았다.
모든 덕을 내게로 돌리는 정이는 틀렸다. 난 그녀의 말처럼 착하지도, 좋은 마음을 베풀려고 한 바도 아니었다. 지독히도 그녀를 좋아했고 옹성우를 싫어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은 군상 중 하나였다면 그녀가 그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옹성우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괜한 초조함에 입술을 물어뜯다가 정이를 한 번 보고 겨우 웃고 있으면 금세 날 따라오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래. 적어도 그녀가 좋아하는 그는.
그는 내가 싫어해야 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M
옹성우가 내 부사수가 아니길 바랬다. 그랬다면 남들이 나와 옹성우를 비교하는 말들을 듣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매일마다 옹성우의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 근데 이제 와서 보면 그가 내 부사수여서 다행이었다. 이게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다만 이번 프로젝트의 팀장이 된 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실적이 우수해진 것도 나름 옹성우의 지분이 있었다. 하기 싫다가도 그를 생각하면 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하루를 온전히 다 보내는 날들이 많아져도 견딜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옹성우가 아니었다면 정이가 나와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낼까 싶기도 한 생각이 일었다.
"먼저 들어가요. 난 아직 일이 남아서."
"아니에요."
아직 정이는 옹성우에게 고백을 하지 않은 듯했지만 그녀의 모습 곳곳에선 이미 온몸으로 그를 좋아한다고 외쳐대고 있었다. 그래서 그게 더 보기 싫어 일에 매달렸다. 내가 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내 손에 쥐어진 일 외에는 뜻대로 풀리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옹성우는 언제부터인가 일주일 중 삼일은 야근을 달고 사는 나와 일을 나누겠다고 했다. 솔직히 그가 이젠 하다하다 내 일까지 가로채려고 하나, 못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밤새 야근을 하다가 두 눈 밑에 거무스름하게 그늘이 진 걸 보면 그마저도 못할 짓이었다.
"성우씨?"
옹성우는 철두철미한 남자였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서 사람들은 모두들 사수인 나를 따라하는 거냐고 물었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옹성우는 나보다 더 지독한 놈이었다. 처음에는 그가 잘났다는 것에 눈을 두었다면 이젠 그가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가 보였다. 야근을 같이 한 동지애라면 동지애고 웃기게도 불쌍하게 본다고 하면 그 말도 맞았다. 업무에 지쳐서 결국 파티션에 얼굴을 기댄 채 졸고 있는 옹성우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 봐도 돼요."
부시시한 얼굴로 날 올려다 본 옹성우의 눈가가 붉게 충열되어 있었다. 굳이 나 따라서 이렇게 밤 안 새도 되니까 내일부터는 일찍 들어가요. 차라리 그가 아예 나쁜 놈이었으면 좋겠다. 그랬다면 내가 옹성우를 신랄하게 까기라도 했을텐데. 정이가 왜 그를 좋아할까. 이것들은 정말이지 깨닫기 싫었는데 그래도 이해는 갔다. 세상에 옹성우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니. 나를 빼고 나면 아예 없을 수도.
"저, 아직 괜찮은데."
"괜찮기는 무슨."
얼굴이 이렇게 엉망인데. 나는 자꾸만 시선이 머무는 그의 넥타이를 풀어서 다시금 고쳐 매주었다. 거짓말은 이만하면 됐어요. 그를 걱정하고자 꺼낸 말은 아니었는데 옹성우는 날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보았다. 이게 무슨 느낌인지 도무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그저 옹성우가 짧게는 일분, 그 남짓한 시간동안 나를 보았고 내가 만져준 넥타이를 보았다. 정이가 좋아했던 반듯하게 넘긴 머리가 아닌, 잔뜩 흐트려저서 앞머리로 눈을 반쯤 가린 얼굴로.
분명 정이는 옹성우를 좋아하는 게 맞다. 그럼 옹성우는 정이를 좋아하나. 가장 먼저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은 이 말이었지만 차마 묻질 못했다. 정이를 좋아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꼴이라도 될까봐. 그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고 굳이 내가 나서서 먼저 화살을 맞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어느 때가 되었든, 정이는 조만간 옹성우에게 고백을 할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걸 잘 못했으니까 그 시일이 더 빨라질 수도 있겠지. 그러면 난 어떡해 해야할까. 옹성우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보다 못난 사람이 나라는 것도 알았는데. 그럼에도 정이가 참고 참다가 내게 옹성우가 좋다고 고백을 했을 때에는 정말이지 심장을 다 뜯어버리고 싶었는데.
"그럼 오늘은 선배도 저랑 같이 퇴근하시면 안돼요?"
어느새 졸린 눈은 다 사라지고 날 뚜렷이 바라보는 옹성우의 눈이 내게 답을 재촉했다. 싫다고 거절할 여지는 주지도 않았으면서. 처음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이런 걸까. 갈피를 잡지 못하는 기분이 계속 되었다. 알았어. 끝내 답을 꺼내고선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내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L
오늘이다. 난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정이가 입고 오는 옷과 조심스럽게 내게 옹성우를 물어왔을 때 알았다. 오늘 그녀가 고백을 하리란 걸.
"알았어. 오늘은 옹성우 야근 안 시킬게. 됐지?"
정이는 내게 야근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프로젝트 팀장으로서 그건 말도 안되는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결국에 그녀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니니까. 솔직히 내가 그에게 야근을 하라고 독촉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날 보며 부탁한다는 정이의 얼굴을 보면 꼭 모든 잘못은 내게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모두들 월요일 날 봅시다."
퇴근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과장의 목소리에 몸이 굳었다. 지금이라도 말릴까. 싫다고 해볼까. 정이에게 미처 꺼내지 못한 고백들을 오늘이라도 꺼내볼까. 뒤죽박죽 섞여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그런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여섯시 삼십분이 되었고 그대로 몸을 일으켜서 화장실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몰라도 다음주면 프로젝트 시안이 있는 날이니 오늘은 꼭 일을 다 끝마쳐야 했다. 아직 자료도 다 정리하지 못했는데 온통 정이와 옹성우에 대한 생각들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얼마나 화장실에 있었는지, 세 번이나 더 세수를 하고선 들어온 사무실에는 내 책상 위 올려진 초밥이 보였다.
"세수하고 오셨어요?"
"어?"
"맨날 저녁도 굶고 일하시길래 사왔는데."
"네가 왜 여기 있어?"
초밥과 나무 젖가락 두 개. 그리고 옹성우. 난 분명 그에게 당부했다. 오늘은 야근하지 말라고. 정이가 아니더라도 요즘따라 내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말을 할 때면 내 얼굴만 바라보는 그는 좀 쉴 필요가 있었다. 그런 그가 도대체 왜 여기있는 거지. 내가 분명 오늘은 가도 된다고 했잖아. 아직 마르지 않은 얼굴과 손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화장실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정이와 옹성우가 만나지 않았으면 하고 빌고 또 빌었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다가오니까 당황스럽기만 했다.
"선배는 당연히 오늘도 야근하실 거잖아요."
우선 밥부터 먹고 하면 해요, 우리.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는 날 탕비실로 데려가 앉혔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서 그런가. 지금쯤 정이가 어떨지 걱정이 되다가도 얼떨떨한 기분만 들었다. 옹성우는 내게 젖가락을 건네고선 이내 날 바라보았다. 우리가 둘이 마주보면서 사이좋게 밥을 먹을만한 사이인가. 문득 그를 따라서 어찌저찌 입에 초밥을 넣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그를 보면 그런 어색함을 느낀 건 나만 그랬던 것 같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편안하게 밥을 먹었다. 간간이 내게 물을 건네주다가 또 한 번 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무엇을 원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버릇이 이런 건지. 내 얼굴을 멀건히 보기만 하는 옹성우를 마주하는 일은 영 껄끄러웠다. 꼭 알아야 할 답을 다 몽땅 다 밀려쓴 듯한 느낌이었다.
"왜?"
"네?"
"너 요즘 계속 넋 놓잖아. 뭔데. 말해."
옹성우는 내 말에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끝끝내 말을 하지 않았다. 난 옹성우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 않았다. 그마저도 아는 건 모조리 다 정이가 알려준 것들 뿐이었다. 그래서 묻는 말에 답을 하지 않을 게 분명한 그를 앞에 두고선 이미 다 마신 물을 정수기에서 따르면서도 난 되려 다시 묻지 않았다.
"물도 미지근하게 줘?"
"무슨…."
"너 미지근한 거 좋아한다며."
찬물 반, 뜨거운 물 반. 어림잡아서 따른 후에 옹성우에게 내밀자 그는 아까보다 더 알기 어려운 얼굴을 해왔다. 아니지. 알기 어려운 게 아니라 어쩌면 내가 알지 못했던 걸 수도 있다. 난 그를 몰라도 정이를 잘 알았다.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정이를 잘 알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줄곧 그를 볼 때, 지금의 옹성우와 같은 얼굴을 했었다. 그 표정을 옹성우가 그것도 나한테 한다는 사실은 꽤 낯설었다. 사람이 좋아한다는 감정이 생기고 난 후부터는 좀처럼 그걸 숨기기 어려워한다. 왠만해서 남에게 감정을 들어내놓고 다니지 않는 내 눈에는 그런 사람들이 신기했었다. 이미 누가 봐도 좋아하는 듯한 얼굴을 해놓고 숨긴다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이야. 이럴거면 그러지나 말지.
"티라도 내지 말든가."
내 말에 크게 눈을 뜨는 옹성우의 눈이 유독 동그랗게 보였다. 무쌍인데도 눈동자까지 동그란 게 정이와 비슷했다. 정이는 옹성우를 왜 좋아했을까. 어쩌다가 좋아했을까. 너 나 좋아해? 그는 무슨 잘못이라도 들킨 것마냥 굴었다. 그러다가도 그는 올곧게 날 보았다.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모든 걸 다 알 법한 표정. 그대로 날 따라 선 옹성우의 눈썹을 매만졌다. 눈썹 다음에는 눈, 코, 뺨, 입술. 그리고 그의 뒷목을 당겼다.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맞부딪힌 입술과 달리 옹성우는 눈을 감지 못했다. 감지 못한 두 눈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그 모습이 웃겨서 난생 처음 키스할 때 눈을 뜬 채로 했다. 윗입술을 머금다가 그대로 혀를 넣자 입안이 뜨거웠다. 몇 번이고 그의 입 속을 배회하다가 뒤섞인 감촉에 숨이 막혔다. 옹성우의 팔은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난 좀 더 그를 끌어 당겨 입을 맞췄다. 그가 겨우 눈을 감을 때까지 계속.
그가 완벽한 사람이라는 말은 틀렸다. 그가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모조리 전부. 그의 목울대가 넘실거렸고 차오르는 숨을 내뱉을 때마다 야한 소리가 들렸다. 결국 그가 얼굴을 돌려서 날 밀어내지 않았다면 난 언제가 끝이고 그만두어야 하는 때인지도 모른 채 키스를 했을 것이다. 선배. 잔뜩 상기된 두 뺨과 귓볼이 사랑스러웠다. 키스하는 내내 손에서 느껴지는 그의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또 한 번 깔끔하게 넘긴 그의 머리가 흐트러졌다. 아니지, 머리 뿐만이 아니라 지금의 옹성우는 조금 많이 선정적이었다. 그의 동그란 눈이 나와 마주했다.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놓기 싫어서 내 손을 잡고 있는 손도, 무언갈 말하고 싶어서 달싹이는 입술도. 온통 다 사랑스러운 것 뿐이어서 다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선배."
"나 좋아해?"
옹성우는 한참의 뜸을 들였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문득 그에게 잡혀 있는 내 손이 뜨겁다 못해 땀이 날 것 같았다. 잠깐만 뺄 요량으로 비틀어 손을 빼내려고 하자 덥썩 날 잡는 손이 말보다 더 빨랐다.
"좋아해요."
"어?"
"저 선배 좋아해요."
뒤늦게야 안 사실이지만 정이와 옹성우는 많이도 닮아 있었다. 무쌍이지만 동그랗게 자리잡은 눈도 그렇지만 하는 행동이나 모습이 더 닮았다. 좋아하는 걸 숨기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그걸 결국 들켰을 때 당황스러워 하는 눈빛도, 그러면서 앞만 보고 내달리는 성격까지. 왜 지금 정이가 생각이 날까. 정이가 날 향해 좋아한다고 하는 하면 이런 기분이 들까. 속에서 무언가가 소용돌이쳤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진 모르겠다. 그저 날 볼 때면 한껏 달아오른 얼굴. 옹성우의 이 얼굴은 곧 죽어도 나만 알겠지.
다시 그의 뒷통수를 끌어 당겼다. 한차례 맞부딪힌 입술일 뿐인데 그새 옹성우가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잠깐씩 닿는 볼이나, 입안은 뜨거운데 손은 찼다. 입술을 가볍게 깨무는 것도 그의 습관인 듯했고. 내가 그의 어깨를 밀자 의자에 앉아서 제 얼굴을 만지는 대로 얌전히 있는 옹성우는 다른 때보다 좀 더 예뻤다. 그는 위에서 내려다 볼 때 더 예뻤다. 입술에서 쇄골 근처로 끝없이 숨이 닿으면서도 그거 하나 제지하지는 못했다. 온 몸으로 좋아한다는 걸 알려줄 필요는 없는데. 그의 쇄골 부근에 내 몫으로 남긴 흔적이 야했다. 짧은 키스 뒤로 이번엔 옹성우가 날 끌어 안았다.
"좋아해."
누구 것인지 모를 말이 입 속에서 흩어졌다. 이젠 내가 정이를 좋아하는 건지, 옹성우를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 고작 내가 알 수 있는 거라곤 나를 붙잡는 네 손이 단단하다는 것. 그와 맞춘 입술에서는 끊임없이 더운 열기가 나를 맴돈다는 것이었다. 빈틈없이 나를 안는 품에 몸을 기댔다. 더이상 버텨낼 재간도 남아있질 않았다. 정신이 몽롱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이 움직였다.
"나도 좋아해."
듣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다시금 입술에서 뭉개졌다.
정말이지. 난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날 올려다 볼 때 그늘진 그 눈동자와 순하게 웃는 입꼬리. 나와 마주하는 매순간 열에 달아올라서 어쩔 줄 몰라하는 너의 그 사랑스러운 얼굴이.
So Come and Fuck my life, baby.
#오랜만이에요 우리 이쁘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