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러니까 어쨌든 나는 최연준의 여자친구였다. 통상적으로 말이다. 나를 알고 최연준을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알고 있었다. 나도 최연준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득을 보고자 시작한 사이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사이도 아니었다. 나와 최연준은 그렇게 참, 남보다는 가깝고, 연인보다는 먼, 이도 저도 아닌 사이가 되어버렸다. 서로의 집 키를 가지고 있었으며, 오밤중에 전화는 서로에게 실례가 아니었으며, 술에 취하면 제일 먼저 연락하는. 하지만 최연준은 여자친구가 나 말고도 몇 명 있었는데 나도 뭐 간간이 만나는 남자들이 있었다. 사귀는 사이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조금의 설렘을 가져다준 딱 그 정도까지. 최연준은 지난달부터 만나는 여자친구가 있었고, 그 여자애는 날 싫어했다. 뭐, 특히 나를 싫어했다기보다는 아시안을 별로 안 좋아했다. 아니, 아시안을 혐오했는데 나는 아시안과 최연준의 퍼스트라는 이유로 제일 싫어했다. 특히 한국인은 마늘 냄새가 난다면서 내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노골적으로 코를 막았다. 이건 뭐 웃겼다. 근데 더 코미딘건 그 여자애는 최연준을 중국인으로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난 최연준과 맥주 한 캔을 하면서 들은 얘기에 박장대소를 했다. 하긴 '최' 발음이 중국 애들 성이랑 비슷하게 나긴 했다. 인정. 독일인과 프랑스인을 구별 못하는 아시안으로써 이번은 인정했다. 헷갈릴 수 있어. 최연준은 담뱃불을 붙이면서 그 코카시안 여자애 얘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매 끼니마다 만두 타령을 하길래 거기서 눈치챘다고 했다. 이름이 에밀리라고 했나, 아니 뭐 암튼 난 사람을 싫어할 감정적 여유가 없는 사람이라 그냥 웃겼다. 심지어 좀 귀엽기까지 했다. 중국 이퀄 만두라니 얼마나 귀엽고 깜찍한 발상인가. 한국하면 김치로 뒤덮인 나라로 생각할 아이라는 게 확실했다. 이건 뭐 인종차별을 넘어서 그냥 무식한 정도였다.
최연준은 그날 내 집에서 자고 갔다. 코카시안 여자애는 최연준의 옷이 똑같은 걸 보고 나를 제일 먼저 의심했다. 내 앞에 서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냐 난 어제랑 옷이 다른데. 최연준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여자애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더니 그냥 지나쳤다. 아이고 넌 이제 아웃이네. 어이가 털린 표정을 짓는 코카시안 때문에 길이 막힌 나를 본 최연준은 내 손목을 낚아채고 나를 끌었다. 코카시안 여자애는 이미 바닥에 주저앉아서 울고 있었다. 저래 봤자 더럽게 소문이 나는 건 저 여자애다.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통상적인 여자친구는 나라고. 최연준이 아무리 사랑한다고 속삭였든 간에 퍼스트는 나였다. 오히려 저 여자애는 세컨드 주제에 떳떳하다고 욕을 무지막지하게 먹을 게 뻔했다. 아니 진짜 도대체 왜 최연준이랑 사귀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늘 끝이 더러운 건 여자애들인데 말이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가련한 이미지를 잡아가고 있었다. 애들은 내가 보이면 일단 친절하게 굴었다. 다니엘이 속을 썩이는데 얼마나 힘들까. 이런 마인드인 듯싶었다. 어쨌거나 나는 좋았다. 팀플에서도 조금 수월한 쪽으로 빼주었고, 자리도 엔간해서는 지정석으로 앉을 수 있었다. 동정이건 연민이건 상관없었다. 저들의 감정 따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난 내 감정 하나 컨트롤하는데 이미 충분히 지쳐있었다.
2.
카톡 알림음이 미친 듯이 울렸다. 카톡 알림음은 웬만해선 다 꺼두는 편인데 새로운 톡 방에 나를 초대시킨 모양이었다. 나는 잘나가는 퀸카들 무리에 속한 핫한 걸이 아니기 때문에 딱히 어디에 소속될 모임이 없다. 처음에 무시하려고 했던 카톡 알림음에 시끄러웠던 건지 소파에 누워 햇빛을 책으로 가리면서 잠을 자고 있던 최연준이 벌떡 일어났다. 햇빛에 눈을 잔뜩 찌푸리면서 비틀비틀 일어나 내 아이폰을 뒤집었다. '열어봐두 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비밀번호를 눌렀다. 최연준은 톡방을 쭉쭉쭉 내리면서 꽤 오래 스크롤을 내렸다. 소파 끝에 앉아 두 다리를 오버사이즈 티에 집어넣은 채로 무릎을 턱 밑으로 끌어당긴 채 티비를 보고 있던 나에게 건넸다. 채팅방은 미친 듯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뭐, 내용을 확인할 필요 없이 딱 각이 섰다. 미국에서 카톡을 쓰고 한글로 채팅창을 도배할 집단은 한국 유학생들 밖에 없었다. 아 진짜 너무 귀찮아. 영어 배우려고 왔으면서 한국인들끼리 몰려다니고, 똥 군기 잡고 아주 그냥 할 수 있는 꼰대 짓은 다 하는 진짜 피곤한 사람들이었다. 중국인으로 소문난 최연준은 이들의 레이더망을 벗어났지만 난 한국말을 쓰는 걸 들켜서 완전 잡혀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모고 뭐고 한 번도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난 미국 땅 와서 한식을 먹은 적도 없었고, 먹을 계획도 없기 때문에 밥을 먹기 위해서라도 나갈 생각 따윈 없었다. 최연준은 다시 내 옆에 드러누웠다. 다시 얼굴을 책으로 덮은 최연준의 가슴 위에 아이폰을 올렸다. '채팅방 나가줘.' 아이폰이 가슴골을 타고 배로 미끄러졌다. 최연준은 책을 얼굴 밑으로 내리고 아이폰을 조금 만지더니 다시 배 위에 올렸다. 이번은 책을 얼굴 위로 올리지 않았는데 최연준의 반질반질한 피부가 햇빛을 맞으면서 빛났다. 담배도 피우는 놈이 피부는 어떻게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최연준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찹쌀떡 같아...
3.
난 집을 겁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 학교하고 집이 아니면 밖을 딱히 나갈 일이 없다. 지금처럼 최연준이랑 마켓에 오는 게 아니라면. 최연준은 일단 식빵을 담았다. 그리고 다 먹은 잼이랑 티백. 나는 라면을 담았다. 그리고 맥주 몇 캔이랑 감자칩까지. 신속하게 쇼핑을 마치려 하길래 나는 최연준을 끌어당겼다. '나 밖에 나온 김에 조금 더 둘러볼래.' 최연준은 카트를 돌렸다. 대답하는 목소리만큼이나 카트가 부드럽게 돌아갔다. 최연준은 내 뒤에서 카트에 상체를 기대면서 끌었다. 오 바나나 세일 중. 내가 바나나를 집어 들자 최연준이 카트를 옆에 대령했다. 내가 다시 앞으로 가려는 걸 최연준이 잡았다. 내 손을 잡아 자기 팔에 올렸다. 말이 좋아 올렸다는 거지 그냥 팔짱을 꼈다는 소리다. 그렇게 나는 마켓을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불편할 건 없었다. 말했잖아 통상적 연인이라니까. 계산대에 와서 내가 팔짱을 풀자 최연준이 물건을 매대에 올렸다. 나는 매대를 지나쳐 반대편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최연준은 지갑을 꺼내서 달러를 꺼내 계산하고 종이 백에 차곡차곡 담았다. 양손 가득하게 종이 백을 든 최연준이 고개를 까딱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최연준 꽁무니를 쫓았다. 자꾸 처지는 속도에 최연준 티 끝자락을 잡았다.
최연준이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고 문을 열었다. 최연준이 가져다 놓은 종이 백을 정리했다. 냉장고에 넣고, 식탁에 올리고, 바나나를 걸어 놓았다. 내가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최연준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설거지 한 걸 정리하고 있는 내 뒤에 서서 찬장에 있는 컵을 꺼냈다. 아니 컵을 집었으면 가면 되지 자꾸 컵을 집었다, 놨다, 집었다, 놨다 뒤에서 알짱거렸다. 내가 뒤를 돌자 가깝게 붙어 있던 최연준이 움찔했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으면 난 최연준의 3번 갈비뼈 정도에서 시선이 멈춘다. 최연준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눈을 맞추기 편해졌다. 최연준은 너구리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가 헝클어졌다. 내가 짜증 내기도 전에 머리카락을 알아서 정리했다.
오늘 저녁은 최연준 담당이었다. 내 집에서 먹고 자는 대신 밥이랑 설거지를 시켰다. 최연준은 끓는 물에 스파게티 면을 넣었다. 보글보글 끓이더니 이제 기름에 볶는 소리가 들렸다. 최연준 특기였다.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할 수 있는 요리가 몇 없긴 했지만 이 몇 없는 요리들이 꽤 맛있어서 같은 요리를 여러 번 먹어도 넘어갔다. 그리고 특히 알리오 올리오는 나름 고급진 요리에 속해서 아마 여자애들을 꼬시는 마지막 무기로 썼을 것 같았다. 내 집에서 이미 여러 번의 실습을 거쳤으니 그 여자애들은 퍽 맛 좋은 완성품 파스타를 먹었겠거니 싶었다. 최연준이 맨 처음 파스타를 만들 때 난 스파게티 면의 식감을 톡톡히 느낄 수 있었다. 오독오독 씹히는 것이 맛있었다고 하면서 난 요즘도 최연준을 놀린다. 이제 플레이팅까지 알아서 하는 최연준에게 박수를 치면서 성장했다고 말하면 얼굴이 빨개져서 변명하는 게 너무 웃겼다.
최연준이 나를 불렀다. 티비를 식탁 쪽으로 돌리고 의자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아' 내 인사에 이미 포크를 돌돌 돌리면서 '응 맛있게 먹어' 이렇게 답했다. 어째 점점 실력이 느는 것 같은 느낌이다. '각시야.' 나는 가끔 최연준을 저렇게 불렀다. 우렁각시처럼 내 집에만 오면 집안일을 하느라 난리였다. 시킨 건 요리와 설거지였지만 사실상 빨래, 청소까지 전부 최연준이 자처했다. '너 두 집 살림해?' 코난쇼를 보면서 마켓에서 사온 피클을 포크로 찍던 최연준이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입을 가리면서 웃어댔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최연준은 여전히 쿡쿡 웃었다. '아니 너 요리가 늘었길래. 딴 여자애한테도 해주는 거 아니야?' 순간 최연준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휴지로 입을 쓱 닦더니 포크로 면을 돌돌 말았다. '나 요리해주는 사람 너 말곤 없어.' 아, 코난쇼의 방청객 웃음소리만 가득 찼다. 최연준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렇게 쓰레기처럼 살았나...' 물음보다는 한탄이었다. 스파게티 면이 자꾸 미끄러졌다.
4.
최연준은 스파게티 면이 유독 잘 미끄러지던 날도 내 집에서 자고 갔다. 본인 집이 훨씬 넓고 좋을 텐데, 내 구박에도 구박 대기를 자처하면서 집에 남았다. 나는 최연준이 집으로 돌아가는 걸 바라는 유교걸이 아니다. 오히려 집에서 먹고 자면서 집안일해주기 때문에 땡큐였지. 최연준은 돈 지랄을 잘했는데 내가 정말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건 집에 있는 냉장고, 소파, 침대를 다 신형으로 채워 넣었을 때였다. 나한테 디자인과 색깔을 묻길래 이사를 하나 싶어서 내 취향껏 골라줬다. 근데 그걸 한 달 뒤에 내 집에서 보게 될 줄 몰랐지. 침대는 방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큰 사이즈를 골랐는데 역시 뒹굴뒹굴하기 좋았다. 이 느낌은 최연준이 같이 누워버리는 순간 끝났다. 최연준이 옆에 누우면 난 잠버릇인 몸부림도 치지 않고 정자세로 잠들었다. 본능적으로 공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아채는 모양이었다. 최연준이 내 발에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여기서 또 놀라지 않길 바란다. 애매한 사이라면서 침대에 같이 눕는다고???라면서. 말했잖아, 통상적 연인이라니까. 아마 침대는 본인이 맨날 바닥에 자기 힘들어서 커다란 걸로 바꾼 게 분명했다. 냉장고랑 소파는 내 희망사항이었다. 난 가구들이 집에 들어온 날 최연준을 잡고 방방 뛰었다. 처음엔 가져가라고 못을 박았다. 근데 최연준은 태연하게 뭐라고 했더라, 아 나한테 그냥 잠시 동안 맡기는 거라고 했다. 소유권은 본인한테 있고 우리 집에 둘 곳이 없으니 잠시 너네 집 자리 좀 빌리는 거라고. 그 말에 기분은 좋았다.
최연준은 아예 내 집에 살림을 차린 것 같았다. 아침에 내 알람 소리에 같이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옷을 입고 차 키를 빙빙 돌리면서 거실에 앉아 있다 나와 같이 집을 나갔다. 내가 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할 동안 최연준은 차에 시동을 걸어둔다. 그 에, 뭐시기 코카시안 여자애 이후로 최연준에게 여자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조수석에 앉아 립스틱을 발랐다. '너 솔로야?' 최연준은 기어를 당기고 핸들을 돌렸다. 미러로 나를 흘겼다. '뭔가 잊고 있는 거 같은데, 나 너 남자친구야.' 아 맞다. 내 영혼 없는 맞장구에 최연준은 실소를 뱉어냈다. '넌 그걸 되게 자주 까먹더라.' 립스틱과 거울을 가방 안에 넣으면서 나는 비웃었다. '지는.' 내 말에 최연준은 뭔가 말하려고 했던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 강의까지 끝나고 나는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과 강의실을 나오다 코카시안 여자애한테 뺨을 한 대 맞았다. 아픈 건 아픈 거였고, 기분이 더러웠다. 나는 코카시안 여자애의 금발 머리를 잡아당겼다. 실컷 흔들다 내팽개쳤다. 힐을 신고 있던 여자애는 내 힘에 비틀거리다 넘어졌다. 나는 똑같이 뺨을 한 대 갈겼다.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다. 친구들은 남방을 벗어 나를 가렸다. 다들 핸드폰을 꺼내들기 시작했고 나는 얼굴을 가린 채 빠져나왔다. 친구들 중 한 명인 대니는 편의점에서 코카콜라 캔을 사 와서 내 뺨에 붙여놓았다. 샐리는 어디서 밴드를 가져와서 생채기가 난 곳에 밴드를 붙였고, 알렉스는 페이스북과 인스타에 퍼져있는 동영상에 내려달라는 말을 달았다. 그리고 나는 울었다. 아파서 우는 것도 아니고, 최연준이 존나 짜증나서도 아니었다. 그냥 더 때려주지 못한 게 분했다. 하필 오늘 스니커즈를 신고 와서. 나도 힐 신고 와서 좀 밟을걸. 대니의 연락을 받은 최연준은 나를 픽업하러 왔다. 샐리는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와 최연준을 번갈아 봤다. 나는 연락하겠다는 표시로 폰을 흔들어 보였다. 최연준은 말없이 차를 빠르게 몰았다. 집에 와서 최연준은 나를 앉혀두고 약을 일일이 다 발랐다. 최연준은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말이 없었다.
5.
코카시안 여자애는 생각보다 더 싸이코였다. 그렇게 공개 저격을 당해놓고서 나에게 디엠을 폭탄으로 날렸다. 아 최연준은 왜 이런 애랑 사겨가지고. 나는 별 같잖은 소리를 하는 디엠을 읽고 씹었다. 그러자 여자애는 더 길길이 난리를 쳤다. 이거 보니까 나만 엿 먹이는 게 아니라 최연준도 같이 쌍으로 먹이고 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다니엘이 밤에 잘해주냐, 너한테는 상냥하게 해주면서 먹나 보지, 다니엘 등에 상처는 사실 내가 다 낸 거다, 내 목에는 아직 다니엘이 남긴 키스 마크가 남아있다, 너는 그런 다니엘이랑 하는 공놀이는 재밌니(ball은 남자의 고환을 말하는 슬랭입니다.), 외에도 뭐가 되게 많은 게 아주 그냥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심산이었다. 자기 전에 이런 디엠이라니 고오맙네. 야한 밤 되라 이런 뜻인가. 나는 내 옆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고 있는 최연준의 배 위에 아이폰을 던졌다. 최연준이 에어팟을 귀에서 뺐다. '너 에밀리랑 잤어?' 최연준은 내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 아이폰을 확인했다. '이거 오늘 보낸 거야?' 최연준의 표정이 굳어갔다. '지금도 보내는 거 같은데 한 번 봐봐. 얘 진짜 끝내줘.' 최연준은 헛웃음 지었다.'얜 왜 소설을 쓰고 있냐.' 최연준은 몸을 일으켜 헤드에 기대앉았다. '나 얘랑 안 잤어. 키스도 안 했어. 손만 잡고 끝났어.' 최연준이 다급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왜 나한테 말해. 원래 그런 거 신경 안 썼잖아.' 아 방금 내 워딩 좀 셌다. 최연준을 돌아보니 상처받은 표정이다. 근데 다시 고쳐 말할 생각은 없었다. 캠퍼스에서 다른 동양인 여자애랑 키스하는 걸 눈까지 마주친 나로서 이 정도 워딩으로 상처받는다면 좀 서운했다.
나도 최연준이랑 키스를 안 했다는 소리가 아니다. 했긴 했다. 한 번. 한 번 하고 동양인 여자애와의 키스를 정면으로 마주쳐서 그 뒤로는 없었다. 잠은 안 잤다. 필요가 없었다. 욕정에 목마른 것도 아니고. 틴더만 깔아도 밤을 격하게 보낼 상대는 차고 넘쳤다. 최연준은 계속해서 날아오는 디엠을 보더니 전원을 껐다. 자려고 하는 것 같길래 불을 껐다. 최연준은 군말 없이 구겨진 이불을 펴서 덮었다. 나는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최연준은 내 허리를 잡고 당겨서 이마를 어깨에 박았다. '미안해.' 나는 최연준의 팔을 풀었다. '이런 거 싫어. 하지 마.' 최연준은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당황한 건지 그냥 방에서 나갔다. 나는 최연준의 온기가 있는 곳까지 팔다리를 쭉 폈다. 침대가 생기고 처음으로 혼자서 넓은 공간을 누렸다.
아침에 깨서 밖으로 나가니 본인 집으로 돌아간 줄로만 알았던 최연준은 거실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로 찬 바닥에 누워있는 게 딱해서 침대로 옮겨놨다. 물론 나는 깨우기만 했고, 본인 발로 걸어갔다. 최연준은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 내 얼굴에 붙은 밴드를 확인했다.
6.
난 한국인 유학생들 사이에서 아주 잘나가는 안주가 되어있었다. 다니엘의 여자친구로서, 다니엘과 헤어지지 않는 사람으로서, 다니엘의 양다리를 버티는 사람으로서, 이번 코카시안 여자애 사건의 주인공으로써. 결국 이 인간들이 궁금한 건 내가 아니라 다니엘과 나의 관계였다. 강의가 끝나고 알렉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유학생 무리가 나를 납치해갔다. 나는 그동안 한국인이었으면서 선배들을 마주칠 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갈굼을 당하고 한국식 호프집에 앉아 다니엘과 관련된 모든 일들에 대한 질문 폭격을 맞으면서 3시간을 날렸을 때 최연준에게 SOS를 쳤다. 절대 안으로 들어오지 말고 밖에 차만 대놓고 전화하라는 말에 최연준은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난 다니엘의 전화하면서 얼른 가봐야 할 것 같다는 말과 다시는 맘대로 부르지 말아 달라는 말을 덧붙이고 밖으로 나왔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할까 조수석에 빠르게 탔다. 안전벨트를 매고 의자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았다. 기 빨려... 최연준은 틀어놨던 힙합 노래를 껐다. 차가 부드럽게 도로 위를 달렸다. 얘 운전은 진짜 잘해.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잠에 드는 걸 포기하고 눈만 얌전하게 감고 있었다. '밥 먹었어?' 나는 고개만 저었다. '집에 먹을 게 없는데, 밖에서 먹고 들어갈까?' 나는 엄지를 들어 올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최연준은 나를 화덕 피자 가게에서 흔들어 깨웠다. 아 뭐야 결국 잠들어 버렸다. 최연준은 조수석을 열고 허리를 숙여서 내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내가 눈을 뜨자 조수석에서 상체를 빼면서 내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기립성 저혈압으로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는 내 어깨를 한 손으로 잡았다. 나는 최연준에게 반쯤 안긴 채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최연준은 내 어깨를 끌어당겼고 나는 최연준의 허리를 잡았다. 솔직히 화덕 피자는 맛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뭐, 괜찮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데에는 최연준의 공이 컸다. 요즘, 과하게 친절하다. 안 하던 짓을 평소에 한다. 피자를 나이프로 잘라주는 최연준을 보면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 덕분에 나는 손에 기름 한 번 안 묻히고 피자를 고고하게 포크로 찍어가며 편하게 식사를 했다. 나는 스프라이트를 마셨다. 탄산에 '크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최연준은 나를 보면서 콜라를 마셨다.
7.
최연준이 내 집에서 뻐팅긴 지 두 달이 넘어갈 때 나는 최연준한테 내 집에 있는 이유를 물었다. 최연준은 시리얼을 먹으면서 으음 소리를 냈다. 입에 있는 시리얼을 다 먹고 나서야 최연준은 입을 열었다. '우리 집은... 햇빛이 안 들어와' 숟가락을 입에 밀어 넣으면서 말을 하느라 발음이 다 뭉개졌다. 사실상 내가 들은 말은 '우리지븐... 해비치 안드러왕' 정도였다. 소파에 앉아서 테이블 위에 있는 시리얼을 먹으려고 하니 최연준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나는 최연준과 소파 사이에 상체를 끼워 넣었다. 최연준의 허리 정도에 어깨가 딱 들어맞았다. 최연준은 아무 말 없이 티비를 보면서 시리얼을 먹다 우유를 들이켜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어깨가 미끄러졌다. 나는 소파에 완전히 누워있었다 부엌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완전히 뒤로 꺾어 뒤를 봤다. 허리가 들렸다. 최연준이 거꾸로 보였다. 최연준은 손의 물기를 몇 번 탈탈 털어내고 티셔츠에 문질렀다. 최연준은 내 뒤통수를 들어서 본인 허벅지에 올리고 소파에 앉았다. 어쩌다 베개가 생긴 나는 머리와 허벅지 사이에 끼인 머리카락을 뺐다. '담요가 생겼네' 최연준은 머리카락을 넓게 펼쳤다. 테이블에 있는 바나나를 집어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티비는 시끄러웠다. 소파 구석에 박혀있던 담요를 끌어당겼다. 오후 햇빛은 나른하게 발끝에 닿았고 눈은 서서히 감겼다. 점심 정도에 잠들었던 기억이 저녁에 다시 이어졌다. 최연준은 소파에 기대서 잠들어 있었고, 나는 여전히 최연준의 다리 위에 머리를 올리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니 머리카락이 등허리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덮고 있던 담요를 앉아서 자고 있는 최연준에게 턱받이처럼 둘러줬다. 아 완전 웃겨. 입을 벌리고 자길래 시리얼 몇 개를 입술에 붙였다. 아 내 폰 어딨어 진짜 웃겨ㅋㅋㅋㅋ 사진을 좀 찍다가 입술에 붙은 시리얼을 먹어서 동영상으로도 찍었다. 됐다. 너무 오물오물 먹는데ㅋㅋㅋㅋㅋ 최연준 카톡으로 동영상으로 보냈다. 방 안에서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폰을 소파에 던져두고 머리끈으로 머리를 돌돌 돌려가면서 묶었다. 팬케이크나 구워야겠다. 마켓에 다녀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먹을 게 동났다. 나 혼자였다면 두 달은 거뜬했겠지만, 이 인분 같은 일 인분을 드시는 분이 집에 계시니. 도대체 몇 장을 구워야 할지 망설이다 그냥 남은 우유에 맞춰 밀가루를 때려 넣었다. 쟤가 다 먹겠지. 프라이팬에 버터를 바르고 반죽을 굽고 있으니 최연준이 일어났다.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하니 있길래 그릇이랑 포크를 세팅하라는 주문을 내렸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접시를 들고 갔다.
그날의 팬케이크는 최연준의 극찬을 들으며 완판했다.
8.
최연준과 첫 번째로 만났을 때, 그때 첫인상을 나에게 물으면 난 답해줄게 얼마 없다. 내가 맨 처음 본 최연준은 뺑소니를 당하고 도로에 쓰러져 있었을 때니까. 난 그때 너무 패닉이 돼서 기억도 잘 안 난다. 앰뷸런스를 불러서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는 기억이 잘 없고, 너무 급한 마음에 여자친구라고 속여서 보호자 행세를 했던 것 같기는 하다. 어쨌든 최연준은 곧바로 수술실로 들어갔고 난 그때 얘가 한국 사람이고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걸 알았다. 최연준이 수술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나는 배정받은 병실의 간이침대를 펴고 잤다. 일주일이 지나고 최연준의 어머니가 병실에 오셨고, 나는 그 일주일 동안 최연준의 어머니에게 간병인으로 고용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오시고 간병인으로서 일도 끝나게 되면서 나는 더 이상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최연준은 본인 전화번호를 나에게 주면서 연락하라고 했다. 최연준의 퇴원 날에 맞춰 연락하니 최연준의 답장이 바로 날아왔다. 왜 연락을 안 했냐, 기다렸다, 치사하다. 나 삐쳤어요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텍스트에 강의 중간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냐고 묻길래 학교라고 하자 건물을 알려달라고 했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면서. 그리고 강의가 끝나고 정말로 최연준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칙칙한 환자복 대신 청바지에 무스탕까지 멋들어지게 입고 말이다. 그리고 난 그때 솔직히 그래, 인정한다. 난 그때부터 최연준을 좋아했다.
9.
최연준과 더 자주 연락하고, 더 자주 만나고, 더 자주 밥을 먹는 때가 왔을 때, 최연준은 만나자는 얘기를 꺼냈다.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서 최연준과 같은 눈높이에서 그 말을 듣자니 눈을 피할 수 없어서 힘들었다. 나는 당연히 예스를 말했다. 최연준은 나를 그렇게 좋아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내가 눈치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어도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최연준은 나를 그저 그런 같은 학교 동기쯤으로 생각했다. 많은 만남을 가진 건 나의 애프터 신청이 컸고, 만나자는 말을 한 건 어머니의 압력이 컸다. 어머니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최연준이 결혼을 빨리 하기를 바라셨다. 되도록이면 대학 졸업 2년 안에 결혼하기를 바라신다고 했다.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최연준은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결혼에 대해서만 이렇게 쪼아대셔서 정신을 못 차리겠다고 했다. 내 생각엔 최연준에게 사업을 빠른 시일 내에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러신 것 같다. 최연준이 혼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일이라 항상 옆에 있을 사업 파트너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와이프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왜냐면, 어머님이 딱 그 포지션에 계시니까. 영원한 파트너. 사랑이든, 일이든. 서로의 크기를 알기 때문에 더 압박하신 게 아닐까 싶다. 최연준이 하루빨리 결혼을 해서 사업을 물려줘야 하니까. 그리고 그 압박에 나란 존재는 거의 구원과 같았다. 목숨을 살려준 여자가 알고 보니 이 넓은 미국 땅에서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한국 학생이고 사랑에 빠졌다, 완벽한 서사가 다름없었다. 최연준은 명분을 만드는 거라고 했다. 그러니 자신과의 연애에 무게와 책임을 두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자유롭게 있어도 된다고. 그냥 어머니가 가끔 찾아오시는 날, 얼굴만 비추고, 밥만 먹으면 된다고, 딱 그 정도만 해달라고 했다. 최연준은 자신의 요구를 흔쾌히 수락하는 나에게 너는 내가 해줄게 없냐는 눈을 했다. 최연준이 그어놓은 선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나는 꼬여버리는 마음을 붙들고 서로 선만 잘 지키자고 했다. 최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은 2달 후에 아까 언급한 동양인 여자애와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깨졌다. 나는 어머니가 오시는 날 중요한 세미나가 있다면서 내뺐고, 최연준 두 달에 한 번 정도로 여자가 바뀌었다. 그리고 뺑소니가 있기까지 1년이 다 돼가는 지금, 우리는 아직 연인이라는 이름 안에 지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어머니와 꼬박꼬박 만나고 있다. 어머니는 늘 나에게 내가 최연준과 만나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하셨다. 나는 그때마다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10.
샐리는 나와 최연준 사이의 관계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샐리는 내가 최연준과 단둘이 있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냥 최연준을 별로 안 좋아했다. 그런데 요즘 최연준의 행동이 달라졌다는 걸 여실히 느꼈는지 다니엘이 얼마 전에 머리를 다쳤냐고 물어왔다. 나는 샐리의 말에 웃으면서 안타깝지만 완전히 정상이라고 답했다. 샐리는 혼란스럽다는 듯 빨간 머리를 손으로 쥐어뜯었다. '걔 요즘 완전 이상해! 왜 갑자기 너한테 헌신적이야?' 샐리는 햄버거 세트에 같이 나온 스프라이트를 열정적으로 빨대로 먹다 이내 뚜껑을 열고 얼음을 까득까득 씹었다. 감자튀김을 케첩에 찍으면서 나도 동의의 표시를 날렸다. '그러게. 죽을 때가 됐나.' 샐리는 여전히 머리카락을 붙들고 있었다. 아까 본 장면이 어지간히 충격적인 듯싶었다. 하긴, 샐리가 그동안 본 다니엘은 연락은 잘 안 받고, 얘기할 때는 폰만 들여다보고,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고, 밤마다 클럽킹으로 뽑히는, 그니까 결국 쓰레기라는 소리다. 내가 읊은 얘기는 요 근래 최연준이다. 나를 픽업하러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내 집에 들어와 산 것도 마찬가지였다. 샐리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괴리를 여실히 느끼는 모양이다. 대충 시기를 나누자면, 파란 머리 전과 후로 다니엘 초이는 좀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용실에서 파란 염색을 머리에 끼얹을 때 약도 섞은 거 아니야? 그게 아니고서야 이게 말이 돼? 다니엘이 저래서 나 알렉스한테 10달러나 뺏겼잖아! 쒯... 퍼킹 다니엘!' 알렉스와 샐리는 나에게 동의를 구하고 내기를 했다. '다섯 달 안에 다니엘이 스칼렛한테 호의적 -알렉스는 여기서 호의를 강조했다-으로 변한다.'에 10달러를 걸었다. 술 먹고 취한 상태에서 얘기한 거라 기억은 나지 않아서 샐리는 그 당시에 나한테 굉장히 미안해했다. 아무리 취해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면서 석고대죄를 했지만 내가 그냥 하라고 했다. 절대 그럴 리 없다에 돈을 건 샐리에게 10달러 꽁으로 벌게 된 거 축하한다고까지 말했다. 결과는, 샐리가 10달러를 잃었다.
최연준은 내가 강의 끝나는 시간에 맞춰 차를 끌고 픽업 나왔었다. 사실, 깜박하고 샐리와 점심 약속이 있다는 얘기를 못했다. 그걸 최연준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최연준이 있는 쪽으로 종종걸음으로 가다 신발 끈에 내가 걸려 넘어질 뻔했는데 그때 최연준이 기가 막히게 잡아줬다. 나는 땅에 닿지도 않았는데 최연준이 다친 곳이 없나 안절부절하면서 살펴보고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신발 끈을 매주는 걸 보고 샐리는 표정이 썩었고 알렉스는 웃었다. 내가 멋쩍게 웃으면서 점심 약속에 대해 사실을 고하자 최연준은 괜찮다는 말과 함께 늦을 것 같으면 연락하라는 말을 했다. 최연준은 밖에서는 한국어를 안 쓰는지라 -중국인으로 소문이 나있어서- 대화를 정확하게 들은 샐리는 알코올을 찾았다. 알코올에 홀린 것 같은 샐리를 말리던 대니의 외마디 외침에 나는 술 한잔하고 들어가겠다는 말을 했다. 이게 지금 내가 샐리와 단둘이 일단 점심을 먹으러 맥도날드에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강의가 끝난 대니와 알렉스가 합류하면 펍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넷이서 3차까지 달리고 내 연락에 차를 가져온 최연준을 보고 샐리는 다시 뒷목을 잡았다. 샐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최연준은 내 가방을 받아들고 조수석을 열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면서 셋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샐리, 그게 말이다... 나도 얘가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모르겠어...
11.
최연준은 주말에 영화를 보자는 얘기를 했다. 마침 할 일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어서 오케이 했다. 최연준은 곧바로 노트북을 켜서 예매 사이트에 들어갔다. 최연준은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댔다. 너 액션 좋아한다고 했나? 3d 좋아해? 앞에 앉는 게 좋아, 뒤에 앉는 게 좋아? 넌 키가 작으니까 -난 대한민국 여자 평균 키에 준한다.- 뒤에 앉으면 보기 힘드려나? 갈색 머리였을 땐 영화 보자는 소리도 안 꺼냈을 위인이 영화도 보자고 하고 심지어는 내 취향을 묻는다. 질문 폭격에 답할 생각도 없이 식탁에 앉아 거실에 있는 최연준을 지켜만 봤다. 물음에 답이 없자 최연준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마치 냥펀치를 날려놓고 내가 뭘? 하는 고양이 같은 표정이다. 암말 없이 가만히 조용히 쳐다보는 최연준에 내가 입을 뗐다.
"너 요즘 왜 이래?"
나 혼자만의 독단적이 생각이 아니기에 더 확신에 찬 질문을 던졌다. 최연준은 힘 빠진 미소와 함께 아...라고만 대답했다. 그리고 최연준은 길게 답이 없었다. 나는 그동안 담아뒀던 말을 쏟아낼 준비를 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우리는 언제, 헤어져?"
최연준은 상처받은 눈으로 나만 올곧이 담아냈다. 울 것만 같은 표정이다. 난 더 울고 싶었다.
12.
최연준은 노트북을 닫았다. 그러더니 내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를 빼고 앉는 게 마치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감정이 너무 격해지면 뇌가 과부하에 걸린다. 지금은 좀 정도가 심했다. 들리고 보이는 모든 게 느리게 움직였다. 울렁거렸다. 최연준은 머리를 한 번 쓸어넘겼다. 최연준의 모든 행동이 번져 보였다. 손이 갑자기 내 볼에 닿았다. 볼에 닿았다 눈에 닿았다 아주 그냥 바쁘게 움직였다. '울지 마. 내가 미안해.' 최연준은 안절부절못했다. 아예 내 옆에 와서 나를 안았다. 최연준의 어깻죽지에 얼굴이 파묻혔다. 최연준은 나를 세게 안았다. 미안하다는 말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나는 최연준을 안지 않았다.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최연준에게서 떨어지면서 나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울면서 말했다.
나 니가 진짜 싫어.
13.
그때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모르겠다. 나는 너무 울고 핀트가 나갔다. 아침이 되니까 난 침대 위에서 일어났고 눈은 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어있었다. 촉박한 강의 시간에 떠지지도 않는 눈을 가라앉힐 시간이 없었고, 나는 커다란 뿔테안경을 쓰고 벙거지를 쓴 채로 강의를 들었다. 가까이서 나를 보고 내 상태를 확인한 알렉스는 경악했지만 나는 애써 웃었다. 아침에 최연준은 없었다. 그날 밤이 되고 다음날로 넘어가는 새벽에도 최연준은 없었다. 그렇게 걔는 내 바운더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지금 이 순간조차 우리는 정확한 관계가 아니었다. 싸운 건지, 헤어진 건지, 헤어지는 중인 건지, 아니면,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지. 답답함에 숨이 막혀왔다. 지 혼자 시작하고 지 혼자 끝내고. 연락 없는 폰만 꺼졌다, 켜졌다 고생이었다. 소파에 드러누웠다.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걔가 미치도록 미웠다. 그리고 죽도록 보고 싶었다. 넌 끝까지 나에게 나쁜 놈이었다. 난 네가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냥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만이라도 다른 감정들에 막히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조차 나에겐 어려운 일인가 싶었다. 난 늘 너에게 쉬웠고, 넌 늘 나에게 어려웠다.
넌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14.
한 달 동안 연락이 없자 난 최연준의 전화번호를 지워냈다. 헤어진 게, 맞는 것 같다.
15.
안 그래도 밖에 발을 붙일 일이 없었는데 이제는 더 없어졌다. 맥주 몇 캔에 영화 한 편을 보면 잠이 왔다. 일단 학교에서 돌아오면 냉장고부터 열었다. 내 하루는 점점 짧아졌다.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속으론 이미 수천 번 울었다. 연락을 하진 않았다. 오늘만 해도 열댓 번은 넘게 전화번호를 썼다 지웠다. 최연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내 베개는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최연준의 이름을 들었다. 나는 아무 일 없다는 굴었다. 우리 집 꼴은 말이 아니었다. 난 이렇게 지내고 있다. 넌 어떻게 나를 그렇게 잘 피하는 건지, 한 달이 되어가도록 최연준의 신발조차 본 적이 없다.
개새끼.
16.
한 달 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침구 빨래도 한 번에 해버렸다. 서랍도 다 열어서 정리했다. 커다란 쓰레기 봉지를 끌고 다니면서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떨어졌다. 현관 앞에 있는 작은 서랍장 안에는 최연준의 담배와 라이터가 있었다. 대여섯 개비가 남아있는 담뱃갑을 열었다 닫았다 의미 없이 움직였다. 결국 그마저도 내 쓰레기 봉지 안으로 들어갔다. 불을 붙이지도 않았는데 코 끝엔 이미 담배 향이 닿았다. 신경질적으로 라이터와 담뱃갑을 던져 넣었다. 집에 있던 물건들은 다시금 혼자가 됐다. 칫솔, 컵, 심지어 베개까지도. 그냥 다 가져다 쓰레기 봉지에 처박아 버렸다. 마음 같아선 냉장고랑 소파도 다 갖다 버리고 싶었다. 한참 고민하다 몸값이 비싼 애들만 집에 있을 권한을 줬다. 산만한 쓰레기 봉지를 질질 끌고 현관을 열었는데, 엄한 담배 향 타령이 진짜였었다. 초인종을 누르려고 했던 건지 어중간하게 올린 손이 보였다. 맥이 풀렸다. 지금 누구 잊고 훌훌 털어서 다시 열심히 살겠다고 집을 갈아엎은 건데.
"도와줄까?"
왜 물어본 건데. 이미 최연준은 내가 질질 끌고 있던 쓰레기 봉지를 어깨 위로 짊어지고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그냥 주저앉았다. 너무 싫어 진짜. 최연준은 딱 그날처럼 옷을 입었다. 청바지에 무스탕. 최연준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딱, 죽고 싶었다. 최연준이 현관문을 열었다. 내가 고개를 들었다. 최연준과 눈이 딱 맞았다. 최연준은 손을 뻗었다. '왜 그렇게 앉아 있어. 일어날 때 어지럽게.' 나는 자연스럽게 최연준 손을 잡았다. 솔직히 잡자마자 후회했다. 이렇게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서야. 최연준은 나를 아주 천천히 일으켰다. 내가 완전히 일어서자 최연준은 손을 곧바로 놓았다. 이게 제일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세운 여러 가지 플렌 중에 최연준이 집에 찾아온다는 플랜은 없었다. 나는 점점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현실적인 감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당황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최연준은 현관문은 잠갔다. 들어가도 되냐는 말이고 뭐고 일단 고개부터 끄덕였다. 최연준은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그냥 정말 들어가기만 했길래 나는 정신줄을 붙잡고 식탁에 앉으라고 말했던 것 같다. 최연준이 의자를 빼고 앉았다. 나는 맞은편에 앉았다. 손님이 오면 마실 거라도 내오는 게 예의라지만 집에 마실 거라곤 맥주가 유일했다. 냉장고를 열었다 그냥 다시 닫았다. '나 마실 거 안 줘도 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은편에 앉았다.
최연준은 1달 동안 자초지종을 먼저 말했다. 어디에서 뭘 하느라 코빼기도 안 보였는지 얘기했다. 내가 최연준한테 언제 헤어지냐고 물었던 날, 최연준은 집에 갔다고 했다. 집에 도착하고 어머니한테 연락이 왔는데 내일 셋이서 영화 보고, 밥 먹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더랬다. 최연준은 내일 나를 빼고 둘이서만 보자는 말을 하고 다음날 혼자 어머니를 만나러 몰에 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영화표는 다 취소하고 최연준은 어머니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했다고 했다. 그동안 나와 만나면서 어떤 말을 하고 만남을 시작했는지, 본인이 나에게 어떻게 굴었는지, 그래서 지금 서로가 어떤지에 대해 전부 들은 어머니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셔서 최연준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하셨다고 했다. 최연준은 나로 시작한 얘기가 대학 생활 전반과 사업 얘기까지 번져 1달 동안 학교를 못 나왔다고 했다. 이 와중에 무작정 피해 다녔던 게 아니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과정에서 핸드폰이 고장 나서 수리를 맡겨서 아예 연락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1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도 궁금했지만 내가 최연준한테 바라는 제일 첫 번째 답은 이게 아니었다. 최연준이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자 정적이 찾아왔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최연준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모든 걸 포함하고 있는 내 물음이 도대체 어떤 방향으로 향해 있는지 유추해내기 힘든 모양이었다. 거기에 최연준은 최선의 대답을 찾았다.
"너가 결정하면 나는 따를게."
최연준의 최선은 고작 거기까지였다. 왜, 왜, 왜, 왜! 한 걸음만 더 와 달라고 하는 내 말은 깡그리 무시하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최연준은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미안해.' 최연준의 고개가 숙여졌다. '뭐가 그렇게 미안해.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래. 최연준은 잘못한 게 없다. 가볍게 그냥 만나는 척만 해달라는 부탁을 먼저 깨버린 게 나였으니까. 일시적인 만남에 감정을 섞어버린 내 잘못이었다. 이게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 내 잘못만 없었어도 우리는 친구 정도는 됐을 텐데. 최연준은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머리를 박고 빌어야 할 판이다. 어머니한테도 깨지고, 사업 얘기까지 이어졌다는 걸 보니 일이 크게 번진 모양이니, 최연준의 창창한 앞날에 물감을 엎어버린 꼴이었다. 쪽팔려. 미친 듯이 쪽팔렸다. '내 탓이 크네. 여자친구라는 존재만 채워주면 됐는데 다른 것도 채우려고 했으니까. 미안해' 내 사과에 최연준의 눈이 커졌다.'니가 왜,' 최연준의 말을 잘라먹었다. '너는 나한테 감정 없고, 나도 지금 버리는 중이니까 우리 관계 다 정리된 것 같다. 어머니한테 죄송하다고 말씀드려. 내가 직접 전해드리진 못할 것 같으니까.' 최연준의 표정이 굳었다. '야. 누가 너한테 감정 없대.' 나도 말이 거칠게 나갔다.
"여자친구 행세만 하라면서. 사귀자는 말 대신 한 말이었잖아. 그리고 만나기로 하고 나서도, 너 여자들 정리 안 했잖아. 놀 거 다 놀고, 만날 거 다 만나고 다녔는데 니가 날 생각했으면 이렇게 했겠어? 이건 니가 나에 대한 감정이 있어도 잘못된 거야."
"처음엔 아무 느낌 없었지. 근데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됐어. 그래서 만나던 애들도 다 정리했어. 놀고, 만나던 거 다 끊어내고 너 남자친구 역할 좀 제대로 하고 싶었어."
"그래서, 지금 너가 잘했다는 거야?"
"전에 내가 했던 모든 거, 미안해. 계속 사과하고 싶었어. 내가 다시 보니까 진짜 쓰레기 같더라. 그래서 더 잘해주려고 애썼어. 그게 너한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어."
"아무 말도 없이 그러면 내가 아 그렇구나 하고 알아? 왜 너 혼자 생각하고 행동해? 나는, 왜 나는 하나도 생각 안 해? 내 감정은 집어치우고 니 죄책감 덜어내기만 하면 되는 거야? 내가 너를 좋아해서, 니가 갑자기 나한테 잘해주면 내가 옳다구나 하고 그냥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두 손으로 이마를 받쳤다. 머리가 아파졌다. 최연준은 망부석처럼 자리만 지켰다. '나가줘. 나중에 얘기하든지, 그냥 끝을 내든지 난 모르겠고 일단 나가.'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최연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에 머리를 기댔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연락할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 나가고 문 잠가.'
17.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매일 벙거지를 쓴 채로 학교에 출석했고 애들은 내 꼴을 보고 얼른 집으로 귀가시켰다. 최연준을 향한 샐리의 욕은 점점 박차를 가했고, 이제 거기에 대니와 알렉스도 동참을 해서 최연준은 정말 오래 살아야만 했다. 알렉스는 오늘 집 앞까지 에스코트를 하겠다면서 옆에 섰다. 알렉스는 내기를 해서 미안하다는 얘기를 했다. 내가 최연준을 이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다고. 거기에 나는 이제 안 좋아한다고 소리쳤다. 알렉스는 나를 진정시키면서 샐리한테 따 낸 10달러로 밥이나 사겠다고 했다. 집 근처에 왔을 때 알렉스는 멈춘 나를 뒤에서 밀었다. '내일은 벙거지 쓰고 오지 마라~ 스크림 같아서 무서워~' 애써 손을 흔들어주자 알렉스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도 그럴게, 최연준이 일주일 만에 낯짝을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최연준은 나를 보고 있었다. '시간 괜찮아?' 나는 말없이 문을 열었다. 최연준도 눈치껏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신발을 벗기도 전에 최연준은 나를 불러 세웠다. 불러 세웠다고 해봤자 한 발자국 앞에 서 있는 게 전부였지만. '내가 말을 하는데 순서가 너무 잘못된 거 같아서...' 센서등이 깜박이다 다시 켜졌다. '내가 그동안 너무 잘못했어. 내가 아무리 가볍게 시작했다지만 그러면 안 됐는데. 미안해. 그리고 나 정말로 너 좋아하는 거 맞아. 가짜 남자친구 말고 진짜 남자친구 하고 싶어. 해도 될까?' 신발 안에 있는 발가락들에 힘이 들어갔다. '나 진짜로 너 좋아해...' 그 말에 주저앉았다.
최연준은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지금, 대답해 줄 수 있어? 기다릴까?' 눈물이 볼을 타고 미끄러졌다. 눈에 소금기가 가신지 얼마가 됐다고 다시 절이기 시작했다. 최연준은 또 당황했다. 옷소매를 끌어당겨 내 볼을 톡톡 두드렸다. 우왕좌왕 거리면서 최연준은 나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나를 소파에 앉히고 본인도 옆에 앉았다. 휴지를 내 손에 쥐여주고 본인도 휴지 서너 장을 뽑아서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내가 시키는 게 아니라, 니가 하는 거야. 너가 하고 싶다 그래서 하는 거야. 너가 나 좋아한다 그래서.'라고 말을 한 거 같긴 한데 말이 최연준에게 잘 전달이 됐는지 모르겠다. 좀 울었어야지. 최연준은 나를 안았다. '진짜로 미안해, 고마워, 잘할게.' 나도 최연준을 안았다. 내 등허리를 감싼 팔이 단단했다. '사랑해.' 귓가에 들리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