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일 옹졸해지는 때
그만하자는 소리는 절대 안 하길래 결국 끝까지 했다, 젠가를. 정말 등에 혀로 쓴 글자 맞추기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러브 젠가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뭐가 있었더라, 나름 재밌었던 것도 있었다. 서로 옷 바꿔 입기, 상대 업고 팔굽혀 펴기 같은 것도 있었고, 정말 심한 건 욕조에서 같이 씻기, 키스하기 이렇게 세상 숭한 것도 있었지만 그중 제일 최고봉은 내가 뽑은, 하 그것도 하필 내가 뽑았다. 난 아직도 강태현 표정을 지울 수가 없다. 황당함에 기습적으로 훅 들어온 19에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눈은 가만히 있을 줄 몰랐다. 그니까 그게 뭐였냐면,
"홍콩 갈래?"
플리즈 셧 유어 마우스... 내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젠가는 저 위에 있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못한 강태현이 졌다. 내일 아침은 강태현. 나는 아슬아슬하게 쌓여있는 젠가를 그냥 쑥대밭으로 만들어놨다. 내가 죄인이었다. 내가 죽일 놈의 젠가를 하자고 해서. 내가 휩쓸어버린 젠가를 강태현은 묵묵히 상자에 담았다. 나는 저 멀리까지 미끄러진 젠가들을 다시 주워들고 왔다. 남은 젠가를 다 담고서 나는 그 상자를 강태현 손에서 막무가내로 낙가 챘다. 언니 책상에 무작정 박아버리고 일어서서 그걸 씩씩거리면서 바라봤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을 걸 생각하니 끔찍했다.
내가 언니방을 나가니 묘하게 이제 자는 분위가 감돌았다. 강태현은 정수기 앞에 서서 물이 떨어지는 것만 바라봤다. 나도 정수기 앞에 섰다. 강태현이 밑에 놓아둔 컵에 물이 얼추 담기자 나는 그냥 멈춤 버튼을 누르고 컵을 들었다. 얼마 마시지 않아서 물은 컵 안에서 찰랑거렸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강태현에게 컵을 건넸다. 강태현은 어이가 없다는 실소를 흘리면서 컵을 받아들었다. '저기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냥 지나쳤다. 게임이 끝나고서야 바깥이 깜깜하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강태현은 물을 마시면서 거실 한 가운데로 들어왔다. 나는 거실 창 앞에 자리를 잡았다. 한강이 은은하게 보이는게 하염없이 보고 있기 좋았다. 누굴 딱 잊으면서. 강태현은 거실 불을 끄고 내 옆에 앉았다. '너네집이 뷰가 좋다.' 이런 무드 없는 소리만 하면서. '옆에 있어줘?' 강태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뒤에서 들렸다. 나는 그냥 아주 자세하게 봐야지 알아챌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라고 대답하면서. 아무 소리도 인기척도 없길래 방에 들어간 줄 알았는데 내 옆에 앓는 소리를 내면서 주저 앉았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강 대교는 주홍도 노랑도 아닌 그 어중간한 사이의 빛을 띠면서 빛나고 있었고, 그 위를 지나가는 차는 작은 모형 같았다. 달은 떴고, 해는 졌다. 너는 떴고, 나는 졌다. 아무말도 없는 강태현을 슬쩍 돌아봤다. 강태현은 컵을 양손으로 꼭 쥔 채로 밖을 보고 있었다. 피곤한건지 눈엔 힘이 없었다.
"강태현."
"어?"
"들어가자."
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졌다. 강태현은 책상에 컵을 내려놓고, 주변을 조금 둘러보더니 책장에 있는 포장도 안뜯은 향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써도 되냐고. 강태현은 고상한 버릇이 있었다. 자기 전에 향수를 꼭 뿌리고 자는 데 인조적인 향을 극혐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강태현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향수 케이스를 열었다. '그거 쓰지마!' 나는 침대에 뛰쳐나갔다. 강태현 손에서 향수를 뺏어 다시 케이스에 잘 넣었다. '너 어차피 향수 쓰지도 않으면서.' 강태현은 살짝 어이가 없다는 투였다. '내가 언니꺼 갖다 줄게.' 향수는 다시 책장에 잘 올려두고 언니 화장대에 있는 많고 많은 향수 중 손에 잡히는 하나를 들고 왔다. 강태현은 내가 가져온 향수를 몇 번 맡아보더니 손목에 뿌리고 목 뒤에 문질렀다. 내가 언니 향수를 다시 가져다 놓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강태현은 불을 껐다. '저거 비싼건데 한 번도 안쓰게?' 알아. 비싼 거 알아서 안쓰는 거라고. '저거 안쓰는 거면 그냥 나 주라.' 지가 줄 때는 언제고. 치사한 놈. '줬다 뺐기 없어.' 강태현은 의외로 그냥 수긍했다.
정적이 일었다. 작은 움직임까지 생생하게 들렸다. 강태현의 움직임이 사그라들고 숨소리가 잔잔한 파도같이 졌을 때, 침대 바깥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바로 밑에 붙어서 하나도 안보이지만 몸을 돌렸다. 덮고 있는 이불 끝자락만 살짝 보일 뿐이었다.
"강태현."
답이 없었다.
"잘 자."
내 말이 네 꿈 속에 들어가면 좋겠다.
"좋은 꿈 꾸고,"
이건 나로써.
"거리 좀 두고."
이건 친구로써.
-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가 원래 봐야 하는 건 하얀색 벽지였다. 그런데 내 눈에 보이는 건 내 침대였고, 책상 다리였다. 속에서 무언가 철렁, 떨어졌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허리가 땡겼다.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강태현은 없었다. 황급히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대 위에도 강태현은 없었다. 책상 위에 시계는 10시를 말해주고 있었다. 방금 눈을 떠서 안그래도 멍한데 몇 방 맞은 기분이었다. 부은 눈이고, 얼굴이고, 자시고 문을 벌컥 열었다. 강태현은 소파에 앉아서 티비를 보고 있었다. 내 얼굴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강태현은 나를 보자마자 화장실부터 가라고 했다. 강태현은 일단 침착하다. 아니, 쟨 늘 침착하다. 한껏 불안한 마음으로 얼굴을 씻고, 이를 닦았다. 강태현은 소파 왼쪽 끝에, 나는 오른쪽 끝에 앉았다. 좋아하는 예능이 나오고 있었다.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릎만 열심히 꼬집다 겨우 입을 뗐다. '나 어제 밑으로 내려갔어?' 강태현은 볼륨을 낮췄다. '응. 그래서 내가 올라갔어.'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미안, 잠버릇은 진짜 안고쳐지네.' 강태현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무의식은 지배 못해.' 이과충. 드럽게 많이 알고 있어.
강태현이 대령한 아침은 간단한데 맛있는 똥손마저 가능한 프렌치 토스트였다. 우리집 냉장고는 언제 스캔한거야. 계란을 풀어 얼마 안남은 식빵을 적시고 잘 달궈진 후라이팬에 올렸다. 사실 저 요리는 내가 알려준 요리였다. 요리라고 하기도 민망하지만. 강태현이 할 수 있는 요리가 계란밥밖에 없던 시절에 강태현에게 몇 가지 스킬을 심어줬다. 한창 강태현이 게임에서 줄줄이 지던 때가 있었는데 아침마다 간계밥을 먹는 게 고통스러워서 그 잘난 머리에 레시피도 좀 외우라고 특훈을 시켰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노릇한 기름 냄새가 내 특훈의 결과를 알렸다. 조그마한 그릇에 담아논 케찹만 포크로 찍어먹었다. 강태현은 식빵을 가위로 4등분 시켜서 식탁에 올렸다. '잘 먹겠습니다아' 기분 좋은 아침의 시작이었다.
엄마는 숙취로 호텔에 하루 더 있어야 겠다는 연락을 했다. 엄마가 없는 만큼 공부도 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왠일이냐고 하니까 어차피 종업하면 죽어라 수능 공부만 할텐데 괜히 기운이나 빼지 말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리고 엄마가 빌린 책을 대신 반납하라는 부탁을 했다. 마침 할 일도 없었던 차에 그냥 알았다고 했다.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차에 새로 생긴 빵집이나 갈 볼까 했는데 나갈 이유도 생겨서 더 이상 꾸물댈 수 없었다. 스피커 폰으로 통화를 듣고 있던 강태현은 거실 한쪽에 쌓인 대여섯권의 책을 가리키면서 입모양으로 물었고, 내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방에 굴러다니던 에코백을 들고와 넣었다. 강태현은 어제 바지에 사이즈를 너무 오버해서 산 후드티를 던져줬다. 나도 청바지에 후드티. 강태현이 에코백을 들었고, 나는 강태현 핸드폰을 챙겼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정적이 감돌았다.
집에 꽤 가까운 도서관까지 가는 길에는 다행스럽게도 대화가 자연스럽게 오갔다. 학교 얘기, 친구 얘기, 어제 게임 얘기, 오늘 아침 애기까지 이어지자 도서관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강태현에게 에코백만 전달 받은 다음 나만 도서관에 들어가서 빠르게 반납만 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저 유리 너머로 그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처음엔 화가 났다. 그 다음엔 당황했다. 강태현은 도서관까지 같이 들어올 분위기다. 제발 강태현이 도서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냥 무대뽀로 강태현 어깨에서 에코백을 끌어내렸다. '나만 들어갔다 나올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대답도 안듣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강태현은 들어오지 않았다. 강태현은 뒤를 돌았다. 다행이다. 나는 빨리 책을 올렸다. '반납이요.' 미운 얼굴이, 다시는 보고 싶지 않던 얼굴이 나를 보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꼴 보기 싫었다. '어, 태현이 친구구나! 여주 맞지?' 젠장. 기억력이 쓸데 없이 좋은 편이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나는 반납을 재촉하는 의미로 책을 살짝 밀었다. '네... 뭐.' 책 바코드를 찍기 시작했다. 손이 느렸다. 빨리 나가야 하는데. '봉사 왔다 반가운 얼굴을 다 만나네~' 전혀 반갑지 않았다. 당사자는 고려하지 않은 독단적인 결론이었다. '몇 권은 연체되서 음, 4일 뒤 부터 대출 가능하고,' 손은 느린데 말은 길었다. 최악이다. '태현이는 여전히 공부 잘하지?' 인사만 하고 나가려던 차에 다시 나를 단단히 묶었다. 밖을 쳐다보니 강태현이 없었다. 뭐야, 어디로 갔어. 도서관 문이 열렸다. 강태현이 들어왔다. '김여주 뭐하느라 오래 걸리는 거야.' 계획이, 다, 틀어졌다.
강태현은 내 맞은편에 있는 사람을 보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만 살짝 숙였다. '태현이도 같이 왔었네~ 진짜 오랜만이다 태현아~' 강태현에게 시선이 완전히 돌아갔다. 강태현의 시야엔 내가 없었다. 나는 뒤로 빠졌다. 아, 이래서 싫다고 한거였는데. '야, 가자.' 강태현은 듣지 않았다. 쟤는 항상 저랬다. 해가 밝았다. 날은 맑았고, 선이 다시 선명하게 보였다. '나 밖에 있을게, 나와.' 듣기는 했을까. 결국엔 얼이 나가버린 강태현을 놓고 밖으로 나왔다. 새로 생긴 빵집으로 발을 쿵쿵 찍으면서 걸었다. 고소한 냄새가 코 끝에 감돌았다. 제일 달아 보이는 빵 하나만 쟁반에 올렸다. 줄을 서서 계산을 기다리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무시했다.
포장이 다 끝나고 매장을 나와서 핸드폰을 켰다. 부재중 전화1통. 정말이지 너무 담백했다. 그래도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진동이어서 전화가 오는 줄 몰랐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했다. 강태현이 빵집 쪽으로 오는 도중에 만났다. 강태현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에코백을 어깨에 매고 있었고, 나는 빵이 든 종이백을 들고 있었다. '미안. 오랜만에 뵈서,' 말을 끊었다. '가자.' 듣기 싫다는 뜻이었다. 강태현은 옆에서 눈치만 살폈다. 어차피 화도 오래 못 낸다. 너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다. 내가 너에게 낼 수 있는 화는 제일 작아서 금방 없어진다. 기억도 나지 않을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 나는 빵을 반으로 잘랐다. 초코로 범벅이 된 크루아상이었는데 정말 보기만 해도 혀가 아리는 느낌이었다. 반쪽을 강태현에게 밀었다. 식탁에 앉아 핸드폰을 보던 강태현이 내가 그냥 막무가내로 손에 들게 한 포크를 잡고 어안이 벙벙한 채로 크루아상만 바라봤다. '나눠먹자고. 먹어.' 포크로 크루아상을 콱 찍었다. '고마워.' 강태현은 우수수 떨어지는 초코 가루에 난리를 피우며 먹었다. 아주 단, 그런 빵이었다.
다음편을 위해 분량이 반으로 줄었어요...
와 이건 진짜 용납할 수 없어... 스토리 개연성 무엇...
여러분 저를 매우 치세요 이건 맞아야 해
이게 말이 됩니까ㅠㅠㅠ 제가 프로그램을 돌리니까 전편은 11000자가 넘더라고요! 근데 오늘은 5000자 밖에 안넘었어요
여러분 자, 돌을 양 손에 들고 저에게 던지세요
이게 말이 됩니까?? 전 대체 무슨 스토리를 다음에 연재하겠다고 이 깽판을 친 걸까요
설레는 포인트도 없고... 뭔 소린지도 모르겠고...
개망했다.
그나저나 여러분이 이우고를 정말 폭발적으로 좋아하셔서 쓰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커지네요
제가 댓글을 보고 일일이 답을 드릴 수가 없어서 그냥 공개적으로 댓글을 박아버리기로 했습니다 케케케켘 (이쯤되면 이중인격)
이름하야
박아모아요
(이름이 구리다구요? 지송... 더 좋은 코너 이름이 있으면 여러분들의 씽크빅을 공유해주세요...
제 짱돌은 이게 최선인가봐요...)
세상에 피는 소중해요 자매님
자매님의 그 격렬한 사랑, 제가 받아들이져. 하트 들고 오세여
아슬아슬한 묘한 텐션 정확하게 짚으셨네요 여러분 박수~!!!!
저희집이 정남향이래여 저는 아마 남쪽에 있는 것 같아여
저 100개 셉니다. 진지해요.
와 저 이분 너무 좋아요 완전 저 세상 텐션 어디 계시져
찐이십니다. 마나하는 휴카를 아신다는 건 찐이네여.
자매님 댓글마다 영역 표시 제대로 하세여...
자매님 출첵 제가 확인합니다...
여러분이 제 목표를 이뤄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제가 글 쓰면서 목표가 두 가지 생겼는데요, 하나는 제 글을 보고 입덕 하는 자매님들이 생기는 것이며, 두번째는 제가 이 빙의글 판에서 짱을 먹는 것입니다. 첫 번째 목표를 이뤘으니 이제 저는 짱을 먹기 위해 달려가겠습니다. 짱이 되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