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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를 널 때는 꼭 털어야 합니다. 낮에요.

엘리베이터는 지하 주차장에 빠르게 도착했다. 아닌가? 그냥 내가 빠르다고 느낀 건가? 문이 열리자마자 강태현은 거의 도망치는 수준으로 내렸다. 어, 야 같이 가! 강태현은 몇 걸음 혼자 척척 걸어가더니 멈춰 섰다. 나는 주머니에서 머리끈을 찾으려다 급하게 손을 뺐다. 강태현이 있는 곳으로 총총총 뛰어가니까 주차장에 또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웬만해서 구두 잘 안 신는데 이 소리 들으려고 신는다. 강태현한테 팔짱을 꼈다. 오우야 좀 춥다. 코트 말고 패딩 입을 걸 그랬나.

"기억해보면 나 진짜 어렸을 때부터 구두 소리 좋아했던 것 같아."

"너 그래서 6살 때 아줌마 구두 신다가 구두굽 부러뜨려서 혼났잖아."

"아 맞다. 넌 그때 나 안 말리고 뭐 했냐?"

"그때 내가 너 아줌마한테 혼난다고 백 번은 넘게 말했어."

"아... 그랬어?"

그냥 저렇게 흐지부지 대화가 끝났다. 저 앞에서 자동차 한 대가 헤드 라이터를 켜고 있었다. 아무래도 6명씩이나 한 번에 이동하다 보니 아빠가 오랜만에 큰 차를 가져왔다. 아빠는 당연히 운전석에 엄마는 또 당연히 조수석에, 언니 둘은 뒤 줄에 앉았고, 자연스럽게 강태현과 나는 트렁크와 연결된 맨 마지막 자리 당첨이었다. '둘이 뭐 그렇게 알콩 거리 느라 늦은 거야?' 어후 진짜 아빠는 늘 저 소리다. 강태현이 나랑 조금만 붙어있어도 저렇게 놀려댄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아 무슨 소리야 진짜!'라고 반응해주면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음청 좋아한다. 완전 상초딩.

"아빠 얘네 장난 아니야. 완전 진짜 저스트 프렌드라니까? 내가 남녀 사이에도 친구가 있을 수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이게 해준 장본인들이셔."

"아니, 우리 딸이 그렇게 매력이 없어?!"

아, 언니. 잠깐 죽이고 싶었다. 그걸 굳이 말하는 이유가 뭔데. 아오 진짜. 괜히 아빠가 강태현을 놀릴 구실만 잔뜩 제공해준 꼴이 나버렸다. 강태현은 한쪽만 꽂고 있던 에어팟마저 빼서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에어팟 케이스는 내가 생일에 사준 아주 노말한(데코라고는 가운데 웰시코기 한 마리가 다였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강태현 취향이 뚝뚝 떨어지는 케이스였다. 내가 고심해서 고른 게 꽤 마음에 드는지 에어팟 케이스를 아직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그걸 보면서 나는 내심 뿌듯해했다. 강태현은 앞자리 우리 언니를 노려봤다. 언니는 고개를 신나게 돌리다가 강태현과 눈이 딱 마주치곤 좀, 쫄았다. 입모양으로 왜, 뭐 이러는 것 같았다. 강태현은 언니한테 뭐라고 속닥속닥 거리다가 '태현아, 우리 여주가 그렇게 매력이 없니?'라는 아빠의 아주 그냥 ㅌ부터 물음표까지 완전 신나서 놀리는 말투로 묻자 '여주가 인간적으로 매력이 넘치는 편이죠.'라며 그냥 질문에 차단을 박아버렸다.

"여주야 태현이가 너보고 매력 있다는데?"

그리고 우리 아빠는 그 차단에 굴복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 아버지... 우리 아빠가 딸내미를 지독히 아껴 평생 옆에 두고 있겠다는 타입이 아니라는 걸 잠시 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랑 언니한테 귀에 박히도록 20살이 되면 나가라고 했다. 엄마랑 둘이서만 평화롭게 살고 싶다면서... 어렸을 때 나는 왕자님과 결혼을 해야 집을 나갈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러자 그 뒤로 우리 아빠는 김여주의 완댜님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중 단연 일등 완댜님은, 말해 뭐해, 강태현이었고. 아빠는 요즘 강태현의 물오른 미모에 힘입어 강태현에게 미친 듯이 들이대기 시작했다. 여주는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는데 태현이가 딱이지 않냐는 식으로 말이다. 어디 멀리 안 나가도 된다면서, 고개만 돌리면 일등 미남이 있는데 뭘 고민하냐면서 강태현은 부정을 할 수도, 긍정을 할 수도 없는 정말 최적의 명분을 만들었다.

'아빠? 난 아직 아빠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은근히 살기가 담긴 내 말뜻을 잘 이해하긴 한 건지 아빠는 이어지는 엄마의 타박과 함께 꼬리를 내렸다. 아우 얄미워 진짜. 강태현은 멋쩍게 웃으면서 다시 에어팟 한쪽을 귀에 꼈다. 그리고 다른 콩나물은 내가 달라고 해서 귀에 꼈다. 잔잔한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뜨또 노래 정주행으로 달리더니 크리스마스라고 분위기를 좀 바꿀 생각인 것 같았다. 갑자기 로맨틱 보이 코스프레야 당황스럽게. 차 안은 꽤 조용해졌고 우리는 얼마 안 가 호텔에 도착했다. 아빠와 언니를 따라서 졸졸 따라갔다. 이번에는 강태현이 나에게 팔짱을 껴왔다. 얘는 어렸을 때 한 번 길을 잃은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유독 사람이 많고 장소가 커다란 데 오면 늘 나한테 팔짱을 낀다. 왜냐면 난 길치도 아니고 길을 꽤 잘 기억하는 편이라 웬만해선 헤매는 일이 없다. 약간 자랑 아닌 자랑으로 말하자면 말이다.

로비에서 레스토랑까지 이어지는 길은 사람이 많이 없었다. 팔에 걸려 있는 강태현을 끌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많으면 강태현이랑 쌍으로 이리저리 치여서 휩쓸리는 데 다행이었다. 언니들을 뒤따라 닫히려는 문 사이로 간신히 아슬아슬하게 들어갔다. 안에는 이미 강태현 아줌마, 아저씨가 계셨다. 엄마가 집에서 통화하는 걸 들었는데 일 때문에 바로 오신다고 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8명이서 외식을 하면 늘 자리를 고정석이었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언니들은 서로 마주 봤고, 우리는 맨 끝에 서로의 앞에 앉았다. 언니들도 술을 마신다고 우리는 점점 끝으로 밀려났다. 그래, 지금 분위기상 와인 한 병을 딸 것 같다. 아마 2차는 집이지 않을까. 복잡하게 각자 음식을 주문하지 않고 코스 요리로 통일했다. 이거 시간 좀 걸리겠는데.

"여주 몸은 이제 괜찮니? 시험 기간에 많이 아팠다면서."

강태현 아줌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으셨다. '이제 다 나았어요! 링거도 맞고 시험도 끝나니까 그냥 바로 건강해졌어요!' 내 말에 엄마가 밥 좀 많이 먹으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기말고사 얘기까지 이어졌다. 엄마들의 대화는 정말 알고리즘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모르겠다만 어쨌든 성적으로 이어진다. 괜히 목이 타서 물을 홀짝였다. 다행히도, 꽤 만족스러웠던 마지막 시험이라 엄마와 아줌마는 화기애애하기 성적 얘기를 끝냈다. 강태현은 뭐, 진짜 짜증 나지만 늘 잘했지만 난 기복이 좀 있는 편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안 차리면 뼛속부터 문과인 나는 과학을 시원하게 말아먹는다. 이번에 강태현을 가만히 놔두질 않았는데 그 덕을 톡톡히 보는 중이었다. 모르는 과학은 강태현에게로- 가끔은 인강보다 설명을 잘했다. 그래서 그런지 시험 기간에 내가 강태현을 편하게 두면 되레 본인이 더 불안해한다. '38번에 3번 다시 확인해봐.'라는 식으로 말이다. 저 말 안에 제발 좀 물어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을 게 뻔했다.

언니들은 취업 얘기로 한창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 나 이제 고3... 나는 일단 내신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기 때문에 1학기까지 학교생활에 온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물론 성적도 포함이다. 국어랑 수학은 지금 목표대로 잘 나와주고 있고, 영어는 조금 더 빡세게 해야 하고, 문제는 과학인데... 나는 강태현을 쳐다봤다. 멍하니 접시랑 포크만 보던 녀석과 눈이 딱 마주쳤다.

"너 방학에 학원 많이 다녀?"

"아니, 이제 다 끊었어."

됐다. 과학도 해결. 그냥 강태현이 있으면 솔직히 문제없다. 학원을 다니기엔 귀찮고, 과외는 부담스럽다. 그냥 내가 모르는 게 나올 때마다 설명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이제 학원을 안 다니신다니 이번 방학에 단물까지 다 빼먹을 생각이었다. 강태현은 공부한다는 자식이 어떻게 그렇게 맨날 칼답인지 모르겠다. 가끔 수학도 물어보는데 모르는 문제를 찍어서 보내면 10분 내로 연습장에 적은 풀이를 찍어서 보낸다. 답지보다 세세하게 풀어줘서 애용하는 편이다. 진짜 편하다. 굳이 인강을 들을 필요가 없다. 강태현은 내가 10개를 물어볼 동안 나에게 1개 정도를 물어보는데 나는 그마저도 도움이 잘 안되는 편이다. 왜냐면, 난 설명을 잘 못하거든ㅋㅎ... 풀이를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말을 하다 보면 내가 말린다. 그래서 강태현은 나한테 답이 맞는지 아닌지 정도만 묻는 편이다. 쫀심 상하지만 팩트는 팩트다...

강태현하고 시답잖은 얘기나 주고받고 있을 때 밥이 스무드하게 식탁 위에 올려졌다. 오 서빙하시는 분 스킬 대박. '잘 먹겠습니다아.' 거의 속삭이듯 얘기하고 바로 포크를 들었다. 오, 맛있어. '강태현 이거 맛있어.' 용감하게 먼저 포크로 찍어올린 나를 보면서 강태현은 갑자기 피식 웃는다. '앞으로 우아하게 살겠다는 사람이 냅킨도 안 하냐.' 아앟... 나의 미스테이크... 내가 새해 다이어리 목표에 우아하게 살기!!라고 적고 있던 걸 강태현한테 딱 들켰다. 강태현은 별생각 없었지만 내가 뭐랄까 쫌 민맹했다. 고3이라고 너무 밑바닥처럼 1년을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썼는데 강태현이 보고 난 후로 두 줄을 쫙쫙 그었다.

요리는 순차적으로 잘 나왔고, 언니들은 취업의 슬픔을 얘기하며 어른들과 같이 와인잔을 부딪혔다. 어른들은 오랜만의 외식에 다들 들뜨신 분위기였고, 유일하게 알코올을 주입하지 않은 나와 강태현만 집으로 귀가 조치 당했다. 언니들까지 싹 다 2차로 바를 간다고 해서 밖에 더 나와있고 싶어 우겨볼까 싶었지만 그냥 포기했다. 왜냐면, 강태현이 그냥 고개를 끄덕이면서 코트를 챙겨 입고 있었거든. 아, 진짜 나랑 안 맞네 이 싸람. 나와 강태현은 대리 기사님과 함께 호텔을 떠났다. 술기운이 슬슬 올라오는 건지 언니는 얼굴이 달아오른 채로 작별 인사를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나는 내가 어디 전쟁이라도 나가는 줄 알았다. 우주 언니는 술에 취하면 애정이 폭발하지만, 태인 언니는 반대로 찬바람이 쌩쌩 부는 타입이라 우주 언니는 늘 태인 언니한테 걷어차이고 울면서 집에 들어왔다. 오늘은 제발 조용하게 집에 들어왔으면 좋겠다. 언니의 손을 꼭 잡고 오늘은 강해져서 돌아오라는 말에 언니는 백 퍼센트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것 같지만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흔들었다. '싸아랑 하는 내 동쌩! 잘가~ㅠㅠㅠㅠㅠㅠ' 차 안에서 대충 손을 흔들어주고 등받이를 제일 뒤로 젖혔다. 강태현은 술 마신 태인 언니와 인사를 하지 않는 편이라 -언행이 격해지는 편이다- 이미 차 안에서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였다. 대리 기사님은 차를 출발시키셨고, 강태현은 창밖만 바라봤다. 나는 강태현만 쳐다봤다. 저 작은 머리통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 건지, 1년 공백기가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 감정 기복이 다시 시작됐다. 이럴 때마다, 내 사춘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아서 짜증이 난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졌다. 위험하다. 2020년 내 목표는 신데렐라였다. 해가 지면 집으로 귀가하는. 해가 지면 아무것도 안 보여서 위험하다. 눈에 뵈는 게 없어서 내가 덜컥 무슨 짓을 저질러 버릴지 모른다. 그래서 강태현이 위험하다. 강태현이 위험한 건지, 강태현 때문에 내가 위험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둘 다 일지도.

애매하게 퇴근 시간을 피해 생각보다 빠르게 집에 도착했다. 도착지가 우리 집으로 되어 있었는지 나는 대리 기사님을 보내고 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아까 분명 강태현이랑 안녕하고 왔는데,

"나도 오늘 너네 집 가야 해."

"왜? 너도 집 있잖아."

"누나가 비밀번호 바꿨대."

그럼 언니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어이가 털린 내 표정을 보고도 그냥 어깨만 으쓱한 강태현은 17층을 눌렀다. 숨을 크게 뱉었다. 강태현은 엘리베이터 광고만 멍하니 봤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17층에 멈추고 나는 먼저 내려서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문을 세게 당기고 강태현이 들어오든 말든 그냥 먼저 들어갔다. 신발을 벗어던지고 방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이번에는 브라에 두꺼운 티에 집업까지 꼭꼭 챙겨 입고 옷장을 열어서 저 안에 짱박혀있던 옷을 꺼냈다. 얌전히 소파에 앉아있는 강태현에게 옷을 던져주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손을 씻고, 양치도 하고 세수도 하고. 젖은 잔머리와 손을 탈탈 털면서 도망치듯 화장실을 나왔다. 안방 장롱을 뒤져 이부자리 세트를 빼냈다. 온 힘을 다해 빼낸 이부자리 세트를 강태현에게 던졌다. 비닐이 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났다. 코트를 벗어 예쁘게 소파에 내려놓던 강태현이 뭐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헉헉거리면서 강태현의 소리 없는 물음에 답했다. 포장을 잘해서 소리 없는 물음이지 사실은 나 혼자 찔려서 술술 불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거 너가 깔아. 언니 방이랑 안방만 빼고 자리는 알아서 잡아."

"그래. 그럼 나 너 방에다 깐다."

쟤는 왜 저렇게 차분한 거야.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다, 난. 그에 비해 강태현은 굉장히 잔잔하다. 크게 동요도 없고, 변화도 없고, 티가 안 나는 건지, 티를 안내는 건지. 아무튼 그래서 나는 나랑 똑같은 류의 사람은 못 만난다.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 만나게 된다면 결과는 뻔하다. 그린 어니언 수프, 파국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평소 강태현과 같은 성격이 정말 좋았다. 중심이 딱 잡혀있는 느낌이니까. 내가 아무리 요동쳐도 중간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근데 지금은 강태현이 아무 반응이 없어서 더 화가 났다. 딴지라도 걸었으면 좋겠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나 혼자 난린지 짜증 냈으면 좋겠다. 강태현은 옷과 이부자리 세트를 바리바리 챙겨들고 내 방으로 갔다. 문이 닫히고 소파를 발로 걷어찼다. 시원하게 소리가 났다. 발은 아팠다. 멈추지 않았다. 남이 보면 미쳤냐고 물어볼 정도로 급격하게 감정선이 요동쳤다. 난 아직 사춘기다. 거의 끝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아니면 난 내 감정의 출처를 모른다. 몰라야 했다.

강태현이 방에서 나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 했더니 방문 너머로 단정하게 깔아놓은 이불이 보였다. 침대 옆에 딱 붙어 있었다.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고 강태현의 발끝만 집요하게 쫓았다. 혹시나 강태현이 왜 보냐고 말하면 그냥 바닥 보는 거라고 변명할 수 있도록.

아까 낮에는 선을 내가 생각해도 진짜 잘 지켰다. 넘지도 않고 밟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뒤로 물러나 있지도 않았다. 해가 떠 있을 땐 선이 잘 보인다. 문제는 밤이 되면 선이 잘 안 보인다는 사실이다. 남녀가 왜 맨날 그 야심한 밤에 선을 자주 넘겠는가. 밤이 되고 깜깜하니까 선이 잘 안 보여서 그렇지. 낮에는 선을 잘 넘을 일이 없다. 해는 떴고 선은 반짝반짝 빛나며 서로를 비추고 있으니 다들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게, 내가 자발적 신데렐라가 되기로 한 이유다.

화장실 문이 열리고 강태현이 살짝 젖은 앞머리를 털면서 나왔다. 쟨 언제 화장실에 들어간 거야. 강태현은 잠깐 멈칫하더니 소파에 앉았다. 등받이가 약하게 꿀렁거렸다.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켰다. 좋아하는 예능이라도 걸릴까 싶어 계속 채널만 뱅글뱅글 돌렸다. 강태현은 뒤에서 말이 없었다. 뭘 하고 있는 건지 소리도 안 들렸다. 나는 제발 재밌는 거 아무거라도 좋으니까 하나라도 걸렸으면 싶었다. 아마 아까 지나친 것 같은 채널이 보이자 강태현은 소파에서 내려왔다. 속으로 숨을 삼켰다. 아까 낮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야."

욕을 안 하고 싶었다. 안 할 수가 없었다. 존나 야하다.

"이거 보지 말고, 나랑 놀자."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눈이 마주칠 것 같아서 여전히 티비만 봤다. 너무 빠르게 채널을 돌리느라 티비는 검은색 화면만 띄웠다. 내가 보였다. 나를 보는 강태현도 보였다. 나는 계속 채널만 빠르게 돌렸다. 솔직히 말해 이번이 3회전인 것 같았다. 재밌는 건 꼭 내가 티비를 틀면 안 하더라. '놀 것도 없잖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강태현은 답이 없었다. 티비를 보니까 강태현이 고민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더 재밌네. 채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뭐라도 할 테니까 너가 나 놀아주는 걸로 하자.' 강태현이 리모컨의 빨간 버튼을 꾹 눌렀다. 팔이 밑으로 쑥 내려갔다. 나는 몸을 돌리는 척하면서 살짝 떨어졌다. '뭐 할 건데?' 강태현은 웃으면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내 방으로 들어갔다. 뭔가 부스럭대더니 검은색 주머니를 들고 왔다. 바닥에 내려놓길래 냉큼 열었다. 안에는 카드랑 뭐 이것저것 많았다. '이게 뭐야?' 열어볼 만한 건 다 열어보고 들춰볼 수 있는 건 다 들춰보자 강태현은 내 손을 감쌌다. '강태현의 매직쇼. 오직 관객 한 명에게만 보여주는 기술 대방출의 시간.' 그러더니 내가 들고 있던 걸 가져갔다. '대방출은 무슨, 니가 신서유기야? 진짜 알려줄 것도 아니면서.' 미심쩍은 미소를 지은 강태현이 카드를 섞었다. '속고만 살았네. 알려줄 거야.' 헐?! 분명 전에는 이런 기술 가르쳐 주는 거 아니라고 학을 떼더니.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일단 관람 먼저. 알려주는 건 뒤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지 연습할 때밖에 안 보여주던 귀한 마술을 보게 생겼다. 완전 기대. 다른 반 애들 말로는 진짜 잘한다던데.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은 우와 정도밖에 없지 않았을까. 와 진짜 신기해. 영문 서적 지가 번역해서 본다고 할 때부터 얘 진심이구나 싶었는데 진짜 진심이었다. 약간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분명 내가 내 눈으로 다 보고 있는데 동전은 내 목에서 나타나고, 카드는 쏙쏙 다 골라내고, 완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자, 이건 이제 마지막.'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되게 아쉽네. 이번은 꼭 속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눈을 크게 떴다. 손등에 마법을 불어넣으라고 해서 손등을 몇 번 문질 문질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에서 하트 스펀지가 나타났다. 눈 뜨고 코 베였다... '원래는 여기다가 작업 멘트 날려야 하는 건데.' 뭐야 그 어정쩡한 멘트는. '그럼 나 좋아한다치고 날려봐. 멘트가 뭔데.' 강태현은 하트를 내밀었다. '뻔하지 뭐.'

[TXT태현] 이것도 우정이라고 2 | 인스티즈

"그쪽을 향한 내 마음?"

아 방심했다. 역시, 위험하다.

마술은, 배우다가 때려쳤다. 난 이제부터 망손이다. 뭐 하나 성공하는 게 없다. 강태현은 최대한 가르쳐주려고 애썼지만 내가 포기했다. 일단 카드 섞는 것부터가 문제다. 내가 일단 카드를 손에 쥐면 그렇게 탈출하고 난리다. 강태현이 하는 게 제일 속 편하다. 나는 이론만 열심히 익혔다. 마법으로 가오 잡는 애 있으면 찬물을 확 부어버려야지. 이딴 생각이나 하면서. '은행기 앵콜.' 강태현이 카드 섞는 소리가 속 시원했다. 난 절대 저렇게 못한다. 은행기는 그냥 내가 붙인 이름이다. 기술 이름이 다 비슷비슷해서 헷갈렸다. 마침 은행에서 돈 세는 기계랑 소리가 비슷하니까 막무가내로 은행기라고 불렀다. 처음엔 이름을 정정하던 강태현도 수긍했다. 그 카드로 원카드도 몇 판 하고 나니 진짜 할 게 없었다. 원카드는 세 판 했는데 첫판은 내가 이기고, 두 번째 판은 강태현이 이기고, 세 번째 판은 엎었다. -내가 질 것 같아서- 결과적으로 무승부였다. 내일 아침이 걸린 게임이라 승패를 갈라야 했다. 시간상 이미 부모님들과 언니들은 어디 호텔을 잡아서 다음날 얼굴을 보게 될 것 같다. 밥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끼리 아침 당번 정하는 중요하는 문제기 때문에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아, 언니 이번에 젠가 새로 샀던데 그걸로 할까?' 이미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말했다. '콜.'

언니 책상 밑에 있는 젠가를 꺼냈다. 기어 들어갔다 기어 나오니 힘들었다. 왜 이렇게 꽁꽁 숨겨 둔 거야.

응, 그래, 난 이걸 강태현에게 하자고 해선 안됐다. 이건, 커플 젠가였다. 강태현이 여기에 무슨 글씨가 쓰여 있다고 할 때 알아챘어야 했다. 난 그냥 로고 말하는 줄 알았지. 그래서 나는 장난으로 뭐가 쓰여 있으면 쓰여 있는 대로 하라고 했다. 젠장. 가위바위보에서 진 강태현이 젠가를 하나 뽑았다. 그리고 뭐라 쓰여있는지 읽는데, 하, 진짜 언니...

"겉옷 벗기기.'

"뭐?!"

솔직히 이건 아니지. 왜 숨겨놨는지 이유를 이제서야 알았다. 남친이랑 하려고 숨겨놨는데 내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그냥 넘어가자고 무마했다고 생각했는데 강태현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너가 쓰여있는 대로 하자며.' 미쳤냐? 옷을 벗기게? 눈으로 할 수 있는 말을 전부 쏟아냈다. '내가 벗기진 못하니까 너가 벗어. 마침 입고 있네.' 아니이거내가하자고해서무르지도못하겠고쟨또왜저렇게진지해서뭐라고하지도못하게만들어가지고나진짜집업벗어야해말아야해아니진짜쟤진심이야?

결국 집업을 벗었다. 뭔데 이거. 왜 이런 분위기로 가는데. 강태현이 그제서야 젠가를 맨 위에 올렸다. 나는 달달 떨면서 젠가를 밀었다. 얼굴이 미친 듯이 뜨거워졌다. 그냥 엎어버려? 그게 더 이상해질 것 같은데. 근데 내가 이상한 거 뽑으면 어떡해? 하다가 결국 뽑았다.

"아... 이건 넘어가자."

"그냥 해. 수위는 우리가 알아서 낮추지 뭐."

"... 난 몰라. 너가 말하라고 한 거야."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을 내쉬었다.

"등에 혀로 쓴 글자 맞추기..."

강태현은 말이 없었다. 좀 멍해진 것 같았다. 난 우리 언니 취향이 이런 쪽인 줄 처음 알았네. 얼굴이 타오르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젠가를 그냥 맨 위에 올렸다. 넘어가자는 뜻이었는데 강태현은 손가락을 들었다. '등에 손가락으로 글씨 쓰는 걸로 바꾸자.' 얘 왜 이렇게 이 게임에 열과 성을 다하는데. 진짜 울고 싶었지만 결국 등을 내줬다. 강태현은 무릎으로 걸어와서 내 뒤에 앉았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허리가 빳빳해서 세워졌다. '크게 써.' 조금만 볼륨을 높여서 말했다간 떠는 게 들릴 것 같아서 작게 말했다. '그럼 걸릴걸.' 강태현도 덩달아 작게 말했다. 얼마나 가까이에 붙어있는 건지 숨소리가 다 들렸다. 미치겠다. 왜 이걸 하자고 해서. '뭐가 걸려. 안 걸려. 그냥 크게 써. 빨리 맞히게.' 손을 들어 마른 세수를 했다. 강태현의 손가락이 느리게 등을 타다 브래지어 끈에 걸렸다.

"봐, 걸린다니까."

마술 카드는 일반 카드와 코팅이 다른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게임을 할 때 사용하지 않습니다.

코팅에 따라 값이 달라지기 때문에 게임을 할 때 사용하는 건 무례라고 합니다.

마술을 하는 사람의 자존심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절대 마술 외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출처는 카드마술을 독학한 제 친구입니다.











되게 오랜만에 다시 쓰네여ㅎㅎ

제가 변명 아닌 변명을 살짝 하면 저는 글을 쓸 때 이우고의 강태현이 또 하나의 인격체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강태현은 정말 강태현 자체로 등장할 수 있게 노력하는 편인데 솔직히 저는 강태현이라는 사람의 캐릭터 분석에 완벽히 실패했습니다...

알면 알수록 모르겠어요! 이과 주제에 감성적이고, 근데 그 부분은 잘 안 들어내려고 하지만 은연중에 드러나고.

진짜 어려워요.. 제가 숱한 사람들의 캐릭터를 분석하고 글에 입혔는데 이렇게까지 힘든 건 처음이었습니다...

여주가 다음 대사를 던지면 어떻게 대답할지 정말 요만큼의 예상이 되질 않는 사람입니다ㅠㅠㅠㅠㅠㅠ

강태현 너란 남자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도 뭐 겨우겨우 썼네요... 사실 이번에 마술 브이앱 하는 거 보고 필이 딱 꽂혀서 써야겠다 싶었거든요

그리고 러브 젠가 썰을 너무 쓰고 싶다는 열정 하나로 몇 시간째 컴퓨터만 붙잡았습니다!

여러분 칭찬해주세요!!!!!! 장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너무 좋아하시길래 나름 열심히 써봤어열!!!!!!!!!1




















감격의 현장

[TXT태현] 이것도 우정이라고 2 | 인스티즈

[TXT태현] 이것도 우정이라고 2 | 인스티즈

[TXT태현] 이것도 우정이라고 2 | 인스티즈

그대들ㅠㅠ
저 진짜 너무 감동이었어요ㅠㅠ 저 댓글 다 봐요ㅠㅠㅠ 보고 늘 감동 먹고요ㅠㅠㅠㅠ 진짜 감사합니다 다드류ㅠㅠ
근데 럽 미 레스가 좋았어요? 전 역대급으로 망한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반응이 좋아서 놀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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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봐 걸린다니깐 크으으으으b 멘트 설레영
4년 전
독자3
짜 잠만ㅇ요,,,, 진짜진짜 ㅁㅌ피ㅣ친거 가타요🤭🤭🤭,,, 이게 나쁜 말이 아니라요,,, 진ㅋ자 막,,, 아,,, 막 아,,,
4년 전
독자4
작가님 코피가 나네여..... 그렇지만 저는 피가 많은 사람이니 과다출혈도 상관없습니다... 계속 가시져... 나 설레 죽어...
4년 전
비회원64.183
와 성공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작가님 진짜 진심으로 격렬하게 사랑합니다 부담스러우셔도 받ㅌ아주세여 아 강텬 미텨써ㅠㅠㅠㅠㅠㅠㅠ
4년 전
독자5
작가님..,진짜 저 설렘사 할 것 같아요.....
저 뭔가 차분한데 아슬아슬한 묘한 텐션 너무 좋아요ㅠㅠㅠㅠ
하....저 진짜 제대로 강Me놈 된 것 같아요....(?)
작가님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 계시나요? 절 할게요ㅠㅠㅠㅠ
흑흑 저 진짜 인간 팽이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ㅠㅠㅠㅠㅠ
너무 설레서 막 돌아버려요 완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4년 전
비회원36.3
저 눈팅만 해서 죄송한데 이건 댓글을 달 수밖에 없네요 ㅜ뉴 아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시죠? 아슬아슬해서 코피 나올뻔 햇잖아요... 지금 이성이 없어지는 것 같은데요 ㅠㅠㅠ 아나 작가님 진짜 이러시면 저 댓글 100개 달거라구요.. 그냥 사랑해요
4년 전
독자6
아악 ㅠ 장해여 작가님!!! 생각치도 못한 이우고 2편이라니 끄아아아ㅏㄱ 이우고 강태현을 올해도 또 보네 ㅠ 카드게임의 속사정,,, 마지막 문단마저 발린다... 러브젠가는 그냥 미치셨습니까... 잔잔한 강태현이 러브젠가를 밀어붙이다니 쓰읍 침나와... 럽미레스여? 역대망이라고여?? 으음으으음 (격한 절레절레 읽는 제 인생이 망할 뻔 했습니다 ㅎ ㅏ 저 마나하는 휴닝카이도 정말 좋았다구여 아빠 시리즈도 그렇고 하,, 걍 빠지는 게 없음... 작가님 글 올라오는 간격도 진짜 빠르시고 ㅎ ㅏ 제가 설레서 인티를 불성실하게 안올수가없어욮진짜!!
4년 전
독자7
와 미쳤다 진짜ㅠㅠ작가님 천재세여?? 아니 겁나 아슬아슬 긴장된다구요ㅠㅠㅠㅠ강텬 진짜 너무 좋다.....그 미묘한 긴장감 너무 잘 풀어냈어요ㅠㅠㅠ 아 진짜 너무 좋아 다음편 기다립니다..강ㅁ ㅣ놈 오열하고 가여ㅠㅠㅠ최고야
4년 전
독자8
봐,걸린다니까.....봐,걸린다니까....봐,걸린다니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엉엉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4년 전
비회원160.132
wow............
4년 전
독자9
선생님사랑해요 아 너무좋다 설렘사....
4년 전
독자10
숨 죽이면서 봤어여....저 작가님 글보다가 입덕했습니다...
4년 전
비회원64.183
작가님 정말,,, 몇 번을 읽었나 몰게써여,, 담편,, 담편이 시급하다; 사랑해요 진짜루 강텬 입덕 완료우,, 💓💓
4년 전
독자11
헐.. 이런 글이 있는걸 이제서야 발견하다니ㅜㅜㅜㅜㅜ 진짜 글 잘쓰시네요ㅜㅜㅜㅜ 왜 이렇게 설레는거죠ㅜㅜㅜ
4년 전
비회원128.121
어머!!!!!!!!어머!!!!!!!!!!!!!!!!!!!!!!! 이게 뭐람..! 저는 이런 그런 그런 태현이를 상상치도 못했는데 말이져.. 아주그냥... 조쿠만유? 넘 좋다구여.. 사랑한다구여..!!!
4년 전
독자12
알아서 수위를 낮춰..? 이건 진짜 대박모먼트 ㅜㅜㅜㅜㅜㅜㅜ 작가님 진짜 금손이세요
4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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