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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수빈이 보셨어요?"

"오야~ 수빈이? 아까 저짝으로 가던데?"

"감사합니다!"

솔직히 할머니가 어디를 가리키고 계셨던 건지 잘 모른다. 그냥 그 언저리로 달렸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쪽을 따라 풀이 나지 않는, 걷거나 뛸 때 모래가 밟히는 소리가 자박자박 나는 길이었다. 곧 해지는데, 그러면 감기 걸릴 텐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늘 이렇게 해가 질 때쯤 밖으로 뛰쳐나왔다. 맨날 같은 곳에 있으면 좀 좋아. 그래도 이 동네 눈은 밝다 이건지 구석구석 숨어들어갔다. 저번에는 자정이 지나가도록 찾지 못해 온 마을 사람들과 경찰까지 불렀다. 순경 분들의 도움으로 덤불에 가려 잠이 든 최수빈을 찾고 나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 다친 곳 없고 잘 잤으면 됐지. 캥거루 맘이라도 된 것처럼 최수빈을 싸고돌았다. 동네 어르신들은 수빈이를 보고 한마디씩 하셨지만 나는 그냥 최수빈 귀를 막았다.

'잘 잤어?'

갑자기 잠에서 깬 최수빈은 뚱뚱해진 눈을 부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집에 가자.'

손을 붙들고 감사 인사를 일일이 찾아가서 드렸다. 최수빈은 영문도 모르고 그냥 꾸벅꾸벅 인사를 드렸다. 동네 사람들을 등지고 다시 캄캄한 길을 따라 집으로 가는 길에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다 들어버렸다. 최수빈은 태평하게 잠투정이나 부렸다. 나는 눈물을 벅벅 닦아내고 최수빈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손은 내 두 배나 될 것 같은데, 늘 나한테 잡혀 다녔다. 집에 들어가서 바로 이불에 들어가려는 걸 화장실에 넣었다. 꾸역꾸역 씻기고 바닥에 앉혀 머리를 말렸다. 이미 잠들어 버린 수빈이의 얼굴에 로션을 콕콕 찍어 발랐다. 이렇게 예쁜데. 잘 때는 이렇게 천산데. 최수빈을 이불 속에 꽁꽁 넣어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방금 전까지 최수빈이 있던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켰다. 엄마, 아빠, 심지어는 동생까지 부재중 전화가 내 걱정만큼이나 쌓여있었다. 그래, 그날엔 그렇게 앉아서 잠들었다.

동네엔 자잘한 언덕들이 많았다. 그게 우리 동네의 자랑이라고 이장님은 늘 입이 아프게 말씀하셨다. 도대체 어떤 점에서 자부심을 가져오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하여튼 싫었다. 최수빈이 올라간 언덕이 도대체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싫었다. 키도 멀대 같은 애가 서있기만 해도 보일 텐데 허구한 날 앉아 있으니 늘 어느 언덕부터 올라야 하나 선택 장애가 도졌다. 해가 지려는지 하늘이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보랏빛 하늘, 구름마저 물들어 꽤 볼만했다. 구름이 예뻐서 결정한 언덕으로 달렸다. 달뜬 숨이 몰려왔다. 중턱에 오르니 숨이 막혔다. 무릎을 짚자 땀방울이 풀잎 위로 떨어졌다. 보랏빛 하늘도 이젠 점점 남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빛이 점점 번졌다. 더 늦어지기 전에 최수빈을 찾아야 했다. 목에 가뭄이 들어 목소리가 비틀어졌다. 이름을 부르길 포기했다. 들어도 최수빈은 오지 않는다. 다시 언덕을 올랐다. 최수빈이 교복에 회색 후드 집업을 입고 앉아 있었다. 무릎을 모아 팔로 가뒀다. 해지는 쪽에 앉아 있는 게 아마 일몰을 보고 싶었나 보다. 최수빈의 어깨를 잡았다. 새끼, 요즘 밥 잘 먹고 맨날 밖에 나돌아 다니니 몸이 좋아졌다. 체력도 좋아졌는지 한 곳에만 엉덩이를 붙이는 법이 없었다. 최수빈이 나를 보고 눈으로 꿀떡을 만들었다. 내가 맨날 하얀색 꿀떡 같다고 놀리던 눈이었다. 나는 말없이 옆에 앉았다.

"해지는 거 보려고?"

목소리가 다 갈라졌다.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성대에 힘을 줬다. 역시나 몸이 따끔거렸다. 괜히 다 말라버린 침을 삼켰다. 최수빈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얜 아직도 지가 소형견인 줄 알았다. 나보다 족히 30센치는 큰데 맨날 몸을 구깃구깃 구겨서 안기려 들었다. 그래서 나는 대형견인 줄 아는 소형견이 되기로 했다. 최수빈이 하고 싶으면 맞춰줘야 했다. 그래서 나는 최수빈이 정한 배역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래서, 매일 악역만 되지 말았으면 빌었다.

"응, 근데 다 져서 오늘도 못 봤어."

"내일 나랑 보러 오자."

"와아 진짜? 약속해 빨리."

최수빈의 새끼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었다. 도장에 복사까지 받아내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방실방실 웃었다. 오늘로 같이 해지는 걸 보러 오자는 약속만 13번째였다. 최수빈은 이 사실을 12번이나 잊었고, 나는 12번이나 잊어버린 최수빈을 붙들고 13번째 약속을 했다. 그리고 내일은 14번째 약속을 하겠지. 최수빈은 매일 아침 달력을 보면서 밑에 쓰인 숫자를 물어봤다. 나는 매일 아침 웃으면서 넘겼다. 그냥, 심심해서 써본 거야.라고 하면서. 최수빈은 말해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런 적 없다며 우길 것이고, 나는 고집 센 최수빈을 꺾으려 할 게 뻔했다. 매일이 새로운 너에게 하루라도 화내는 아침을 맞이하게 해주긴 싫었다. 아마 최수빈은 평생 모를 것이다. 그 숫자가, 내가 너에게 고백한 횟수라는걸.

집으로 가는 길, 나는 또 최수빈 손을 꽉 붙들었다. 최수빈은 당황하면서 붙들렸다. 그도 그럴게, 최수빈에게 우리는 아직 친구였다. 저스트 프렌드. 그것도 삽질만 지겹도록 하는. 나는 귀까지 새빨개진 최수빈의 손을 잡고 앞으로 끌었다. 최수빈은 어어, 하면서 끌려왔다. 오늘 최수빈이 입은 교복이 우리를 말했다. 졸업한 지 벌써 2년인데, 그때 입던 그대로 똑같이 입었다. 그 와중에 키가 조금 컸는지 바지가 짧았다. 입으면서 왜 바지가 맞지 않을까 심각하게 고민할 최수빈이 절로 그려져 웃음이 터졌다. 땀에 말라붙은 머리를 정리했다.

"어, 너 원래 단발이었어?"

"... 아니. 어제 잘랐어."

"아까웠겠다. 엄청 길었잖아."

"아니야. 생각보다 괜찮았어."

"진짜? 그래도 아까웠을 텐데..."

"왜, 잘 안 어울려?"

"아니, 그게 아니라... 밑에가 조금 삐뚤빼뚤해가지구..."

뷰웅신. 이럴 때마다 욕을 면전에 쏟아내고 싶었다. 한 달 전쯤, 내가 최수빈에게 직접 가위를 쥐여주고 부탁했다. 단발로 잘라달라고. 최수빈은 자신 없어하면서 머리를 잘랐다. 덕분에 길이가 얼추 맞는 단발이 됐다. 최수빈은 당장 미용실로 가자고 허둥댔고 나는 머리를 털면서 잘 잘랐다고 했다. 마음에 든다고, 예쁘다고, 고맙다고. 최수빈은 그 순진한 미소를 지으면서 웃었다. 다행이다. 근데 밑에가 삐뚤빼뚤하다고 본인이 기억 못하고 지적하니 웃겨 돌아가실 지경이다. 처음 저 물음을 던졌을 때 원래부터 단발이었다고 대답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어제 자른 걸로 설정했다. 최수빈의 기억 속에 나는 분명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였을 테니까, 나는 그 기억을 고치는 게 싫었다. 처음엔 단발로 잘랐다고 못 알아보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직 그정도로 심각하진 않았나보다. 나는 머리를 끌어모아 묶었다. 겨우 꽁지머리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하면 밑 머리가 어떤지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와중에 최수빈이 손을 놓고 도망칠까 팔에 손을 끼고 머리를 묶었다. 머리를 묶고 손을 잡았다. 다시 집으로 걸었다. 모래가 밟히는 소리가 자박자박 들렸다.

"최수빈."

"으응."

"수빈아."

"왜애."

"나랑 사귈래?"

"으응?"

최수빈이 놀라 손을 놓으려 했지만 넌 맨날 이러더라. 한두번 이러는 게 아니라 나는 손을 꼭 잡았다. 최수빈을 바라보자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 데굴데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매일 보는 건데 매일 색달랐다. 최수빈의 심장박동이 나한테까지 들려 나도 콩닥콩닥 뛰었다.

"...그래."

101번째 고백은 오늘도 가감없이 떨렸다.

최수빈을 멀끔하게 입혔다. 서울에서 산 슬랙스에 니트. 깡촌에서는 보기 힘든 패션 아이템이었다. 나도 단정한 검정 원피스를 입었다. 평소에는 절대 신지 않는 구두까지 꺼내 신고 다시 손을 잡았다. 오늘은 일요일. 성당에 가는 날이다. 본당 신부님은 늘 말씀이 길고 장황했다. 마치 줄무늬 주름치마를 스트라이프 패턴의 드레이핑 스커트라고 말하는 것처럼 톡 까놓고 보면 별 일 아닌 걸 열심히 포장했다. 이젠 어느 정도 짬이 생겨서 그 포장을 벗겨내고 들을 수 있었다. 최수빈은 이곳에 오는 걸 싫어했지만 절대 물러섬이 없는 날 확인하고 꼬리를 내렸다. 최수빈은 무교다. 하느님이 어쩌고, 예수님이 어쩌고하는 교리가 당연히 최수빈의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독실한 신자냐. 그것도 아니다. 사실은, 나도 무교다. 내가 이렇게 꼬박꼬박 성당을 나오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최수빈도 그걸 알았다. 내가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더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하느님도 안 믿는 주제에 성당에 나와서 되도 않는 기도를 드리고 있으니 기가 찰게 뻔했다. 최수빈은 신을 왜 믿냐고 물었다. 아니 왜 믿는 척 하냐고 물었다. 나는 믿을 게 이제는 신밖에 없다고 답했다. 척이라도 하면 속아주지 않을까 싶었다. 잘린 머리카락은 하느님께 봉헌되었다. 돈이라도 찔러 넣어 은총을 받고 싶은데 그럴 돈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갖고 있는 걸 내놨다. 최수빈이 빗겨주던 머리카락을 바쳤다. 나한테서 제일 소중한 걸 주면 뭐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뭐라도 잡을 동앗줄이 이제 존재의 유무조차 알 수 없는 하느님밖에 없었다. 손을 모았다. 하느님 아버지,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이제 남은 게 눈물과 피 밖에 없어서 그 둘을 걸었다. 온 눈물을 바쳐 기도했고, 온 피를 바쳐 고해했다. 제발 하느님 아버지, 저를 용서하시고 제 죄를 용서하시어 저를 구하소서. 손끝이 하얘지도록 잡았다.

최수빈을 파란지붕 할머니 댁에 맡겼다. 엄마하고 아빠가 집을 찾아왔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울었다. 아빠도 울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눈물을 바쳐서 이제 남은 눈물이 없었다. 고작 스물 하나에 시골에 처박혀 사는 날 보고 엄마는 악을 썼다. 아빠는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발, 최수빈을 지우고 다시 서울로 가자고. 나는 미안하다고만 말했다. 엄마, 아빠는 분명 낮에 왔는데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볼 때가 되니 달이 반갑게 인사했다. 미안, 오늘은 네 인사 못 받아주겠다. 엄마는 억지로 내게 통장을 쥐여주고 갔다. 아빠는 내 핸드폰을 켜놨다. 차가 뱉어내는 매연이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이 밝게 울렸다. 언제든 기다리고 있어. 울었다. 눈물 없이 울었다.

곤히 잠든 최수빈의 머리맡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었다. 파마를 한 번 시켜볼까. 피부도 하얘서 강아지 같겠다. 우리 수빈이, 너무 이쁘다. 말로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온 몸을 그 말로 적셨다. 그리고 최수빈에게 꾹꾹 눌러 스미게 만들었다. 내일, 내일도 고백하게 해줘. 내일도 그 말간 얼굴로 내 고백에 그렇다고 말해줘. 내일도 나를 보면서 웃어줘. 내일도 나를 기억해줘.

풀벌레 우는 소리가 여리게 들렸다. 온몸의 피가 아렸다.

아침해가 수줍게 인사했다. 안녕, 오늘은 어떨까. 최수빈이 일어날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달력에 적힌 검정색 숫자를 천천히 셌다. 달력에 달아둔 유성 매직의 잉크가 다 닳지 않았다. 저 매직이 닳을 때까지만이라도 달력에 숫자를 쓰고 싶었다. 미닫이 문이 열렸다. 최수빈이 하늘마루에 걸터앉은 나를 봤다.

"안녕 수빈아. 좋은 아침."

온몸의 눈물을 바쳐 기도했다.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눈물이 마르자 더 바칠 것이 없었다.

신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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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작가님 이 글 자꾸 다시 생각나서 또 보러왔어요!
물론 첫 댓글이지만...(머쓱)
브금이 글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브금 덕분에 더 몰입이 잘 되어서 그런가
왜 자꾸 눈에서 땀이 고이는 것 같죠...?8ㅅ8
늘 새롭게 수빈에게 고백을 하고 인사를 하고
어찌보면 정말 사랑이 깊구나 싶으면서도 너무 야속하네요..
그럴 리 없을거라 생각하는 수빈에게 매일 맞춰가며
살아가는 여주 입장을 생각하면 할 수록 너무 맘 아파요
혹시나 시간이 되신다면 이 글도 혹시 번외편 가능할까요?8ㅁ8
이런 찌통 글...한 편으로 끝내기 너무 아쉽다고 생각해요ㅠㅠㅠㅠ
허흑 암튼 마무리로는 작가님 정말....사랑해여...!(´▽`ʃƪ)💕

4년 전
42
저는 수빈이를 보면 뭔가 늘 마음이 저릿하더라구요. 뭔지 모르겠는데 찌르를한 것이 이런 감성의 글에 나오면 나름 잘 어울리겠다 싶었는데 좋아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브금은 제가 정말 우연찮게 찾은 거라 괜찮을까 했는데 잘 어울린다고 해주셔서 마음이 놓입니다ㅎㅎ 수빈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아프지마 곁에 남아있는 여주를 표현해보고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알아주셔서 너무 감사해요ㅜㅜ 번외편은 요즘 유독 단편글 번외 요청이 많아 당황스럽네요... 이렇게 좋아하실 줄 모르고 그냥 빨리 완결이나 짓자 하고 올리는게 단편글들인지라... 좋아해주셔서 너무너무너무넌무넘ㄴ움 감사드려요💕 저도 이런 소재를 참 좋아하는데 번외편은... 제가 조금 여유가 있을 때 생각해보도록 할게요! 지금 저질러 놓은 글들이 너무 많아서... 너무 좋아해주셔 진짜 정말 감사드려요💕 정말로요! 전 이런 댓글을 볼 때마다 너무 힘이 나요ㅜㅜ 너무 감사합니다💕💕💕💕
4년 전
비회원64.183
ㅠㅠㅠㅠㅠㅠㅠㅠㅠ허엉엉거엉ㅇ 이 새벽에 이걸 읽다니 제 눈물로 저희집 낙동강됐어욥 ㅠㅠㅠㅠㅠㅠㅠㅠ 하아,,,,,,,, 수비낭,,,,,,, 먼데 슬프게 하는고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작가님 진짜 이 글 분위기 대박이구,, 넘 가슴 아리는 것 가타여,,,
4년 전
독자2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거 번외없나요 ㅠㅠㅠㅠㅠ아 제가 진짜 이글에 나오는 주인공 된 것 마냥 감정이입하고 있네여
4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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