敵國의 皇后 四
생각지 않았던 밤 산책으로 조금 피곤했던지 황녀는 침소에 들어가자마자 풀썩 쓰러져 몸을 뉘었다.
옷은 갈아입으셔야 한다는 상궁의 핀잔에 툴툴거리면서도 미적미적 일어나니 같이 들어갔던 호석은 익숙하게 몸을 돌려 황녀를 등지고 섰다.
“호석아.”
“네, 공주님.”
“그 2 황자...라는 분 말이다.”
“예.”
“생각보다 좋은 사람 같아.”
“뭐... 전쟁을 치를 때와 아닐 때는 누구라도 달라지니까요. 전장에서 무서운 분이라고 해서 꼭 본성마저 그렇지는 않겠지요.”
공주가 아는 호석은 벗이자 의지가 되는 평범한 호위무사 정도겠지만 전장에서의 그는 냉혈한 그 자체였다. 저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병사이든 아니든 적군이라면 조금이라도 봐주는 법 없이 베어버렸고, 아꼈던 부하이든 아니든 군법을 거스른다면 그에 알맞은 벌을 내렸다. 물론 군법을 거스른 대가는 목숨을 내놓는 것뿐이었다. 겁이 많고 천성이 여린 공주가 우연히라도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저를 멀리할 것만 같아서 미리 변명이라도 해놓고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날 선 모습 하나로 지금까지의 진심들이 무너진다면 그건 좀 속상한 일일 테니까.
오늘은 얌전히 잘 주무시네. 머리를 쓸어주면 더 잘 자는 걸 알기에 호석은 조심스럽게 이마를 한번 쓰다듬은 후 조용히 침실을 나갔다.
그 시각 석진은 목욕 후 하얀 잠옷을 입은 채로 호롱불 아래 책을 읽는 중이었다.
이제 그만 자야겠다, 생각하고 책장을 덮으려는데 퇴궐하고 오는 길에 샀던 살구빛 머리 꽂이가 주머니 사이에서 튀어나와 눈에 띄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 그랬는지 꽤 값나가는 물건임에도 한 치의 고민 없이 냉큼 사 버렸지만, 딱히 후회하지는 않았다. 한눈에 보아도 저 머리꽂이가 공주보다 잘 어울릴 여인은 없을 것 같아서. 이걸 선물 받고서 싫어하는 여인은 보지 못했노라 너스레를 떠는 장사치의 말에 조금 혹한 것도 있었고.
손안에 쏙 들어오는 살구색 꽃을 만지작거리자니 마치 지금 황녀가 앞에 있기라도 한 듯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꽃 같은 사람.
한없이 여린 것 같아도 제 힘으로 꽃을 피워내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좋은 그런 사람.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법. 이미 깊이 새겨져 있어 아무리 지워 내려 훑어내도 손바닥으로 오롯이 더 느껴지는 마음인 것을.
석진은 결국 공주에 대한 연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 나름의 선을 두고 절대 넘어가지 않으려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숨기기에는 이미 그 농도가 깊어져 버렸다. 해서 석진은 더 이상 억지로 마음을 눌러 놓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미 어겨 버린 원칙과 충심, 더 지켜 봤자 엉키기밖에 더할까.
아예 결심을 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깊게 숨을 내뱉고 이부자리에 누운 석진은 창 틈새로 비치는 연한 달빛에 손에 쥐고 있던 머리 장식을 이리저리 비추었다. 볼수록 닮았네, 우리 공주님이랑.
“이게 뭐예요?”
“처음으로 행사에 참석하시는 거잖아요. 기념 선물입니다.”
“아아...”
“제 마음대로 고른 거라서 마음에 안 드실 수도 있습니다... 이런 데는 보는 눈이 없어서...”
“아닙니다! 마음에 들어요.”
그냥 공주가 생각나서 샀다고 말하고 싶긴 했는데 갑작스레 제가 사모하고 있음을 티내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기념 선물’이라는 마뜩찮은 핑계까지 댔다. 그럼에도 감동받은 것인지 멍하게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에 석진은 귀가 조금 붉어졌다. 그래서 부러 그 눈빛을 피하고 뒷목을 긁적였다.
“고마워요. 이거, 엄청 예쁘다.”
도련님이 내 거라고 샀다는데!!! 머리꽂이가 살구색이든 붉은색이든 나비든 꽃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아, 나는 선물까진 준비 못 했는데.”
“도와주다니요?”
영문을 모르는 석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 그게 실은 어제 설화국 2황자님을 뵈었습니다.”
자초지종 설명하는 황녀에 석진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아무리 일손이 부족하더라도 궁에 있는 별감들까지 다 물리시다니.
더군다나 궁 안에 외부인들이 많은 시기에 너무 위험한 짓이었다. 호석이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그런 일은 상상하기도 싫었던 석진의 얼굴에 냉랭함이 감돌았다.
“경솔하셨습니다.”
“에..?”
“설화국 황제를 맞이하는 데 치중해야 한다지만 모든 궁인들을 물리시다니요. 호석이 늦었으면 어쩔 뻔 하셨습니까. 더군다나 타국 사람들이 궁에 들어온 시기라면 더더욱 조심하셨어야 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아, 그래도 덕분에 좋은 친구를,”
“아니요. 쉽게 친구라 단정 짓지 마십시오.”
“...”
“공주님의 자리는 사람을 쉽게 믿어도 괜찮은 자리가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것이 지금의 마마이십니다. 이제는 어린아이도 아니시잖아요. 매일 매 순간 마마가 계신 위치를 생각하고 행동하세요.”
석진이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하는 말들은 현실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황녀도 뭐라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자기가 경솔했다는 것, 위험할 뻔했다는 것, 반성해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정색하고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보니까 괜히 무섭고 서럽고 그런 것이다. 항상 오구오구해주는 게 일상이었던 석진이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며 혼내고 있으니 여태 저 혼자 성숙하지 못하게 어리광부리고 있었던 건가 싶어서 무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더니 야속하게도 손에 쥐고 있던 석진의 선물이 눈에 아른거렸다.
울면 안 되는데. 내가 잘못한 거니까 참아야 하는데. 아니, 대체 나는 왜 맨날 눈물을 못 참는 거야. 짜증 나게!!
하필 또 머리꽂이가 눈에 띄니 더 서러워진 공주가 입술을 꼭 물고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중간에서 이도 저도 못하는 호석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망설이는 와중 공주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잠시만 바람을 쐬고 오겠다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자리를 피해버렸다.
“마마!”
호석이 당황해서 따라 나가려다 옆에 그대로 서 있는 석진을 흘긋 돌아봤다. 제가 봤을 때 석진은 황녀보다는 아니지만 꽤 오래전부터 그녀를 연모하고 있었다.
호석은 석진이 황녀에게 절대 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걱정되니까 저도 모르게 예민해졌겠지. 공주의 신변에 나보다 더 신경 쓰는 사람이니.
호석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석진은 엷게 애써 지은 미소로 호석을 보냈다. 석진이 걱정되긴 하지만 제 본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공주의 곁을 지키는 호위무사. 호석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 나가 공주를 찾으러 동분서주했다. 허나 그리 빠르게 달리지도 못하면서 어디로 가버렸는지 작은 몸태는 눈에 띄질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가신 거야.
침실에 남아 있던 석진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정색할 필요는 없었나.
울먹거리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그동안 공주가 우는 걸 달랬으면 달랬지 울린 적은 없었던 터라 두 눈에 들어차는 눈물을 보는 순간 바로 후회했다. 게다가 자신이 울렸다는 사실에 심히 당황해서 도망치듯 나가는 공주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했다. 좀 더 부드럽게 얘기할걸. 말을 아예 안 들으실 분도 아니고. ... 안전과 직결된 문제이니 예민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람을 경계하는 것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만 황녀는 그 경계심이 필수 덕목이어야 할 사람이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그녀가 황위 계승자가 아니었으면, 그냥 평범한 여인이었으면 하고 부질없이 바라게 된다. 그럴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복잡해진 마음에 바람이나 쐴까 싶어 방을 나온 석진은 사람이 잘 나다니지 않는 뒷마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데... 여기 계실 줄은 몰랐는데. 초록으로 무성한 풀숲 사이로 붉은 치맛자락이 눈이 안 갈 수 없게 싱그러웠다. 분명 앞문으로 나갔으니 그 방향으로 곧장 갔겠구나, 했는데 호석이 따라 나올까 봐 일부러 뒷마당에 숨은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진짜 똑똑하시단 말이야.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모르고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서럽게 훌쩍대는 모습이 마음이 아프면서도 귀여워 석진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공주 마마.”
“힉.”
제 딴에는 잘 숨었다고 생각했던 건지 파드득 놀란 황녀가 눈물 자국이 생생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석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 그럼 먼저 가세요. 저는 좀 이따 들어갈,”
우는 걸 들킨 것도, 코맹맹이 소리가 나는 것도 죄다 머쓱해서 주춤거리고 일어난 황녀는 그대로 다가와 자신을 품에 안는 석진에 굳어 버렸다. 사고회로가 정지된 작은 몸을 안은 석진은 동그란 뒤통수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울려서 미안해요.”
“네 ,네에... 알아요.”
당혹감에 횡설수설한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이 잘 익은 자두 마냥 붉어진 공주는 손을 어디다 둬야 하는지도 알 수 없어서 허공에 둔 채로 잔뜩 긴장해 있었다.
긴장한 건 석진도 마찬가지였는지 빠르게 쿵쿵대는 두근거림이 눈물로 젖어있던 볼에 여실히 닿았다. 그러면서도 석진은 제 가슴에서 공주의 얼굴을 떼지 않고 더 깊게 안는다.
“저 어린애 아니라면서요.”
“응?”
“자꾸 애기 취급하고 있으면서 어린애 아니라 그러고... 나도 나 미워해서 그런 거 아닌 건 알거든요.”
얌전하게 안겨있으면서 입으로는 새침하게 틱틱댄다. 그것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 석진은 품 안의 여인을 더 놀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잠시 신분을 내려놓고 말랑한 볼살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는 무엄함도 서슴지 않았다. 평소의 석진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지만, 특유의 이성과 논리도 연모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아이에여(아니에요)”
“아닌데. 어린 애 맞는데. 애기 같은 짓만 골라 하는 거 다 아는데.”
“씨이... 엉에으 또 아이라며서여!(언제는 또 아니라면서요!)”
“응. 대외적으로는 어른 해주시고 저한테는 애기 해주세요.”
뭐지. 뭔가 엄청난 소리를 들은 거 같은데...!
아닌가. 그냥 여전히 누이동생 같다는 말을 하신 건가... 그게 더 가능성 있긴 해...
“응? ... 뭐, 생각 좀 하고요.”
“으응.”
한 번 용기 내서 안은 것인데 막상 안고 나니 놓아주기가 싫다. 그래서 여즉 공주를 안고 있었던 석진에게는 그녀가 작고 여리다는 게 평소보다 더 와닿았다.
와중에 머리꽂이는 소중하게 들고 있던 손이 귀엽고, 눈물로 젖어있는 붉은 눈꺼풀이 예쁘고, 달아오른 뺨도 예쁘고, 아까 울음을 참으려고 꼭 물고 있었던 탓인지 평소보다 더 붉고 도톰해진 입술이 예쁘다.
저도 모르게 입술에서 시선이 멈췄다가 그 위로 제 입술을 맞댈 뻔한 석진은 안 놔줄 듯이 허리를 꼭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오늘은 뭔가 좀 위험하다.
그러니까, 내가.
큼, 머리꽂이 해드릴까요? 한껏 붉게 물든 귀를 들키지 않으려고 괜히 헛기침을 한 석진은 부러 말을 돌렸다. 황녀는 좀전의 간지러운 분위기를 읽지 못했는지 그저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꽂이를 받아들고 귀 근처 머리칼에 꽂는 손가락이 조심스레 살랑거린다.
완연한 봄이었다.
/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조금씩 넘어가는 무렵이었다. 호석이 어딜 갔었냐며 잔소리를 하자 황녀는 후원에 갔었고 석진과는 잘 풀었다고 대충 둘러댔다. 호석은 좋은 벗이자 충신이지만 뭔가 오늘 석진과 있었던 일을 터놓기에는 조금 부끄러웠다.
계속 달뜬 기분이 들었던 그녀는 혼자 넘겨짚는 것일 수도 있다고, 도련님은 다정하고 배려심이 많은 분이니까 그냥 달래려고 안은 것이리라 생각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렇게 황녀는 흥분을 가라앉혔는데 그러지 못한 자들이 있으니, 은청궁의 궁녀들이었다. 항아들은 물론이고 최고상궁까지 황녀의 첫 국제적 연회 참석에 어떤 옷이 좋을지, 욕탕에 어떤 꽃잎을 넣어야 할지, 머리는 어떻게 꾸며드려야 할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오전 내내 황녀는 석진 탓에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호석의 말로는 새벽부터 줄곧 저 상태라고 넌더리가 난다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공주님 국혼 올릴 때는 아주 몇 갑절은 더 난리가 나겠다, 생각한 호석은 벌써부터 환멸이 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예 그녀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황녀가 스무 살이 되도록 이런 일이 도통 없었으니. 호석 본인도 화려하게 꾸민 공주는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고.
공주는 오후 내내 궁녀들에게 휩쓸려 작약을 띄운 욕탕에서 몸을 씻고 새로 만들어 놓은 옷을 입었다. 붉은 옷은 황후의 상징이니 대외적 행사에서 붉은 옷은 되도록 피하라는 지침이 있어 공주의 옷은 보다 조금 얌전한 보라색 치마와 노란 복대가 있는 옥색 상의였다. 색은 차분했지만 넓은 소매와 허리띠에 화려한 수와 금박이 놓여있고 치맛단도 길게 늘어 뜨러져 있어 누가 보아도 황실 여인의 것이겠구나 싶은 의상이었다.
머릿기름을 발라 긴 머리의 반을 땋아 틀어 올리고 마지막으로 화려한 머리 장식을 달려고 하자 황녀는 궁녀의 손을 살짝 막고서 아까 석진이 꽂아주었던 머리꽂이를 내밀었다.
“이것으로 해주렴.”
“예? 그렇지만 오늘 같은 날에 하기는 너무 얌전한 것 같은데...”
“굳이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이것으로 부탁한다.”
평소에 별로 명령하는 것이 없던 공주가 저 따위 항아에게 부탁한다고까지 말하니 곧바로 살구 빛이 은은하게 도는 꽃 모양 머리꽂이를 곱게 꽂아놓기는 하였으나 조금 부족하다 생각이 드는지 살짝 시무룩해졌다.
오늘은 누구보다 우리 공주 마마를 빛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물론 아무 치장을 하지 않아도 경국지색이라 할 만한 엄청난 미인이시지만 기왕 하는 것, 그 어떤 여인도 상대가 되지 않게 해드리면 좋으니까.
항아들이 조금 시무룩해진 것을 느꼈는지 황녀는 곧 미소로 화장은 너희들이 하고 싶은 만큼 평소보다 조금 화려해도 괜찮다고 일렀다. 금세 표정이 환해진 그녀들은 곧 온갖 귀한 화장품을 가져와 황녀의 얼굴에 조금씩 올리기 시작했다.
공주의 치장에 방해가 될 것 같아 호석은 잠시 다른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는데 평소처럼 아래위로 검은 옷을 입고 그 위에 또 검은 겉옷을 입었다. 황녀의 호위가 된 후로 호석의 옷은 검은색이나 짙은 푸른색이 대부분이었다. 왜냐는 질문에 어두운 색이 좋다고 둘러댔지만 실은 무관들이 으레 그렇듯 피가 묻을 경우를 대비해서 부러 어두운 옷만 입는 거였다. 붉은 옷 역시 피가 묻어도 티는 나지 않지만 호위 일을 하기에는 너무 튀는 것이라 좋아하는 색임에도 단 한 번을 입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영문으로 작고 붉은 보석이 하나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연회인데 조금 특별하게 꾸며보는 건 어떻겠냐고 황녀가 하사한 것이었다. 이런 기회는 잘 없다는 사근사근한 꾀임에 호석은 자기가 뭐 이런 것이 어울리겠느냐며 허허 웃어넘겼지만 내심 마음에 들었는지 이따금 집중한 얼굴로 목 주변의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한편 정국은 오전 내내 유월국의 책을 구경하거나 검을 닦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설화의 일은 남준과 그 집안, 수하에 있는 유생들, 관리들이 알아서 잘 해나가고 있으리라 믿었다.
남준은 어떤 일이든 결코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실수를 할지언정 최악의 선택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금쯤이면 이미 좌승상 민대감의 손이 닿았을 텐데 그동안 그 자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손을 잡는 쪽을 선택했을 거다.
돌아가면 좌승상 쪽도 일단은 내 세력이 되어있겠군. 좌승상은 정훈과 화씨를 몰아내는 데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인물이다. 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그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 굉장히 무모한 짓이었다.
문제는 정훈과 화씨를 치우고 나서였다. 산 넘어 산처럼 어렵사리 정훈을 몰아내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는 필시 나를 제 손바닥 위에 놓으려 하겠지. 딸이 하나 있을 뿐이니 외척이 되려 할 것이고.
화씨를 없애고 나면 민씨에 대적할 만한 집안의 여식이 없는데. 남준의 집에도 여동생이 있었으나 그녀는 이미 일찍이 혼인을 치른 몸이었고 김 씨에 더 힘을 실어 주었다가는 안 그래도 견제받는 남준이 더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김 씨라면, 태형도 괜히 의심을 사게 될지 모른다. 정계에 엮이고 싶지 않아 멀리 여행을 다니며 세월을 보내다 이제야 조금 설경에 정착했다 들었는데 불똥이 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자여서 경계심을 풀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아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니까. 잘못 없는 자를 힘들게 할 순 없지.
사실, 유월의 황녀가 황위 계승자만 아니었다면 그녀를 황후로 들이고 싶었을 거다.
소문만 자자했던 유월국 공주.
조국을 망하게 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하던데 애초에 미신을 잘 믿지 않을뿐더러 그런 건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제게 어떤 패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니.
유월은 약소국이지만 꽤 중요한 지리에 위치해 있고 오래전부터 관계를 유지해 온 설화의 주요 외교 국가 중 하나다. 유월의 황녀를 황후로 들인다면 외척은 유월의 황실이 될 것이고 외척 세력이 감히 설화 황권에 간섭할 가능성은 극히 줄어들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정국에게는 어느 정도 성공한 국혼이었다. 국혼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간의 계약이어야 한다고 황자 시절 내내 생각했던 정국이었으므로 황후와는 애정을 나눌 필요가 없으니 얼굴도 모르는 황녀이지만 황후 자리에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황후 시절 내내 독수공방했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조금 냉정한 것이었으나 정국은 그만큼 차갑고 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월의 황녀는 하나뿐인 황위 계승자.
그녀를 황후로 맞이한다면 유월은 황실의 대가 끊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걸 순순히 허락해 줄 리가. 황후를 데려오겠다고 불필요한 피를 보았다간, 여론도 좋지 않겠지.
게다가 어제 만나 본 황녀는 황후보다는 황제의 재목이었다. 황제 한 명을 안는 것보다 백성을 안는 것이 더 어울리는 사람. 나름대로 개방적인 편인 유월에서도 황궁을 답답해하는 것이 티가 났는데, ‘여황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보수의 극단에 있는 설화에서 황후로 살다간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아쉽지만 다른 방법을 더 생각해 봐야겠어. 정국은 턱을 괴었다.
내시백을 비롯해 설화에서 온 자들은 그나마 저런 모습이 익숙하기라도 하지, 유월 황궁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일 열심히 하던 자들은 연회고 자시고 하루빨리 저 망할 황제가 제 나라로 돌아가기만을 바랐다.
궁인들이 저를 보고 욕을 하든 말든 애초에 그들을 사람 취급도 안 했던 정훈은 이 행차의 목적이었던 그녀를 오늘 당장 찾아 빠른 시일 내로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무려 설화의 황후로 만들어주겠다는데 거절할 귀족 여자는 없지.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누군가 정훈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딱 한 번 만난 여자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조급하냐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 모든 것은 정훈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애초에 ‘낭자’를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않았다. 미모에 감탄하고 시선을 빼앗겼던 것은 부정할 여지 없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평생의 반려로 삼고 싶다거나 아껴주고 싶다거나 하는 평범한 연모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가지고 싶을 뿐.
그는 갖고 싶은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손에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의 욕망은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지금 제가 ‘낭자’라 부르는 여인 역시 하나의 놀이처럼 생각했다. 사냥을 나왔을 때처럼, 조금 특별하고 예쁜 사냥감을 제 것으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그런 감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를 황후로 세워놓으려는 것 역시 제 옆자리를 내어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화씨들 뜻대로 황후가 정해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자신이 찾던 그녀가 지금 있는 이 황궁의 주인이 될 황녀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공주 마마 납시오! 우렁찬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하얀 얼굴을 본 정훈의 동공이 팽창한다.
/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황녀는 여태 제 침소에서 자신이 나서야 할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얼굴을 내비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건만 이게 뭐라고 가슴이 내내 쿵쿵거려 물 한 모금만 겨우 마신 터였다.
“유모, 나 뭐 실수하진 않겠지?”
“걱정 마십시오, 아기씨. 내관이 아기씨께서 납신다, 하면 그저 천천히 자리로 가셔서 앉으시면 되옵니다. 누구와 눈이 마주친다 싶으시면 살짝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시고요.”
긴장한 기색이 뚜렷한 황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던, 아직도 아기씨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김 상궁은 벌써 세 번이나 같은 말에 대답했으나 전혀 귀찮아하지 않았다. 엄마나 다름없는 마음으로 보살핀 황녀가 지금 얼마나 떨릴지 감히 가늠할 수 있었던 탓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제 뒤로 호석과 유모, 소속 궁녀들을 거느리고 은청궁을 나서는 황녀의 발걸음이 나긋했다. 긴장과 별개로 태생부터 갖춘 위엄과 고아함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공주 마마 납시오!”
우렁찬 소리와 함께 수많은 시선들이 작고 여린 몸태와 얼굴에 꽂혔다. 황녀는 언제 긴장했냐는 듯 그 시선과 인사들을 태연히 받아내며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양 나른한 무표정으로 앉아있는 공주에게로 호기심 어린 눈빛들은 물론이요 설화, 유월 나눌 것 없이 많은 사내들의 감탄이 새어 나왔다.
‘저주를 타고났다기에 어떤 낯인가 했는데 저토록 고우시다니.’
‘유월에서 그리 꽁꽁 숨긴 연유가 미모 때문이라 해도 믿겠군요.’
‘저 정도면 진정 나라를 망하게 할 만도 하겠어.’
‘미인박명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보오. 미인들은 항상 팔자가 사납지.’
‘쉿- 누가 들으면 경을 칠 겁니다.’
옆에서 황녀를 향한 말을 다 듣고 있던 정국은 얌전히 앉은 공주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공주가 미인인 것과 저주가 무슨 상관인지. 나라의 녹을 먹는다는 자들이 타국 공주의 외모 품평이나 하는 게 영 탐탁지 않다. ... 궁 안에 갇혀 살았다해도 이보다 더 무례한 말들을 많이 들어왔겠지.
무심결에 작게 중얼거리던 정국은 순간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에 당황해 멈칫했다. 지민이나 남준을 제외하고는 타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일절 주지 않았던 무심한 성정인 그가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여인에게 이 정도로 신경 쓴다는 것은 스스로도 낮설었다.
시간이 약이라고, 자리에 앉은 지 일각 정도 지났을까 웬만큼 긴장이 풀린다. 공주는 몸에서 힘을 좀 빼고 그때서야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궁을 가득 채운 경쾌한 음악과 사람들의 소리가 웅웅거렸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옆에 서 있는 호석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술과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나름대로 연회를 즐기고 있던 황녀의 눈은 석진을 찾느라 바빴다. 일부러 선물 받은 것도 꽂고 나왔는데...
“응? 응, 고맙구나.”
단번에 얼굴에 스친 서운함을 알아챈 호석은 공주가 듣고 싶었을 말을 대신했다. 저가 아니라 석진이 하는 말을 원했을 거란 걸 잘 알지만, 어쨌든.
호석 덕에 살짝이나마 미소 짓고 있던 공주는 곧 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찾고 있던 석진은 아니지만 반가운 마음에 더 환하게 웃어 보였더니 정국은 의례적인 눈인사만 하고는 고개를 틀어 버렸다. 뭐지. 웃어주는 거까진 안 바랐지만 그래도 뭔가 속상해...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형식적인 사이였나 싶어 민망해진 황녀도 곧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선이 닿은 그 자리에는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다.
저 남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그것도 설화국 황제의 자리에. 내가, 잘못 본 건가... 아니야. 저 자는 지금도 나를 보고 있잖아. 그때와 똑같은 눈으로.
“...예. 방금 봤습니다.”
>
“호석아... 설마 저 사람...”
“보지 마세요.”
“...”
“괜찮습니다. 제가 옆에 있을 거니 걱정말아요.”
/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롭니다. 공주를 제게 달라 하였습니다.”
“그 아이는 유월의 황위 계승잡니다. 공주를 좋게 보아준 것은 감사한 일이오나 그는 절대 아니 될 말입니다.”
야외 연회를 뒤로하고, 예정대로 저녁 만찬을 즐기던 사람들의 숨이 덜컥 멎었다. 황제 부부와 고관대작 몇 명만이 남아 있었는데, 처음에는 다들 정훈이 조금 지나친 농을 한다고 생각했다. 허나 정훈의 눈과 설화 쪽 대신들의 표정을 보고서야 자잘한 농 따위의 시답잖은 발언이 아님을 알았다.
아아. 유월까지 굳이 납신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호석과 공주만이 짐작하고 있던 이 행차의 원인은 다른 이들에게도 명명백백히 드러났다. 다행히 부황은 정훈의 말에 당황스러움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으나 정훈은 제 뜻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무리 유월이 약소국이라 해도 그렇지, 황위 계승권자인 공주를 물건 거래하듯 막무가내로 내놓으라 하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공주를 마치 공녀 취급하는 듯한 정훈의 태도에 유월 대신들은 주먹을 쥐었다.
치욕이다. 이는 이미 유월을 제 속국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옆에 있던 황후는 다른 의미로 이마의 핏대를 세웠다.
“말씀 중에 송구하지만 공주를 설화의 황후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 아이는 유월의 황위를 승계받을 황족이고 그 이전에는 제 딸이니까요. 말씀을 거두시지요.”
“이런. 저 역시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리 작은 나라의 황제가 되는 것보다야 대국의 황후가 되는 게 딸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을 텐데. 순간의 자존심으로 딸의 앞길을 막지는 마십시오, 황후.”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느냐보단, 곁에 누가 있느냐가 중요하지요. 친히 부마가 되신다 해도 막을 것인데 황후 자리라... 자식이 불행해질 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어미가 어디 있겠습니까.”
유월의 황후는 흔들림 없이 정훈의 시선을 받아냈다. 받아냈다기보다는 노려보았다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정훈은 곧 분에 겨운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본래 제정신이 아닌 데다 술까지 들어간 정훈이 혹 이 자리에서 칼이라도 빼어들까 걱정했던 대신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으나 정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서 분노를 지워내고 미친 사람처럼 크게 웃어댔다.
숨이 넘어갈 듯 꺽꺽 웃더니 술병을 잡아채 한 번에 들이켜 마신 그는 엉성한 자세로 탁자에 올라가 유월의 황제와 황후 앞에 절을 올렸다. 누가 말릴 새도 없었다.
“그러시군요. 그럼 저는 두 분과 더 할 말이 없으니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휘청거리며 탁자에서 내려온 정훈은 호위들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가다 말고 휙 뒤를 돌아보았다. 애써 담담히 앉아있는 황제 부부를 보며 또다시 낄낄대던 그는 제 발 근처에 침을 뱉고는 유쾌한 말을 하는 것처럼 신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황위 계승자라....”
“...”
“헌데 물려받을 황위가 없으면 어찌 될까-?”
유월의 황제가 흠칫 몸을 떨었다.
혹 공주가 재앙을 가져올 것이란 예언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던가.
***
敵國의 皇后 五
연회에서 돌아와 심란한 마음에 씻지도 않고 있었던 황녀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상궁에게서 조금 전 있었던 정훈의 만행을 전해 들은 탓이다. 유월을 무시한 것도, 자신을 공녀 취급한 것도 화났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에 대한 무례한 태도였다. 어디서 감히. 손톱이 손바닥의 살갗에 상처를 낼 정도로 힘이 들어갔지만 아픔을 느낄 틈도 없었다.
공주는 분노했지만 동시에 은연중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상대는 강대국의 황제였고 분노는 아무런 힘이 되지 않는다. 당장 내일이라도 정훈은 유월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힘이 있는 자였다. ... 아바마마 말대로 국경에 가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황녀는 신경질적으로 탁자를 엎어버렸다. 정훈을 향했던 분노는 곧 제 경솔함에게로 방향이 틀어졌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무작정 나서다니. 이렇게 남들에게 피해만 줄 거면서. 무슨 생각으로, 무슨 자신감으로 그랬던 거야. 옆에서 오냐오냐해주니 네가 정말로 뭐라도 된 줄 알았어? 제 안에 있었던 또 다른 목소리가 날카롭게 질책했다. 고통스런 무력함을 못 견딘 황녀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안 다치셨습니까.”
떨고 있는 손을 감싸 쥐는 온기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두 눈 안에 석진이의 얼굴이 맺혔다.
조금 전 모든 궁인을 물리고 잠시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했으나 탁자가 쓰러지는 소리에 걱정됐던 호석이 때마침 달려온 석진을 들여보낸 것이었다. 명은 지켜야 하니 자신은 들어갈 수 없지만 그게 석진이라면 말이 달라지니까. 공주가 못 들어오게 할 리 없으니.
“이리 계실까 봐서요. 용서하세요.”
예상대로 스스로를 탓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석진은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왜 더 말리지 않았느냐,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릴지언정 저를 탓하는 게 나았다. 그랬다면 용서라도 빌었겠지. 하다못해 달랠 수라도 있었을 텐데.
“다 제 탓입니다. 제가 쓸데없이 나선 탓이에요. 아바마마 말씀이 맞았습니다. 제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흐으, 저 때문에,”
“그만.”
참고 있던 두려움과 응어리가 터졌는지 울먹이며 끊임없이 자책하는 공주를 더 볼 수 없어 석진은 눈물진 뺨을 조심스레 가로 쥐었다.
>
“마마의 잘못이 아닙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응?”
“혹 그 자가 화나서 도성에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모두가 다치지 않게 제가 황후가 될 수밖에 없다면요? 그럼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 그리 두지는 않을 겁니다. 공주만큼은 제가 지켜드리겠다고 약조하겠습니다.”
“허나 전쟁이 일어나면 그 피해가,”
“마마.”
“예...?”
“지금보다 어렸을 때, 마마께서 정말 아가였을 때 제게 했던 말씀 기억하십니까.”
“...”
“저한테만 말하는 비밀인데, 실은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고 두렵다고 하셨었지요. 예언이 들어맞을까 봐 무서운 것도 있지만, 제왕의 법도만을 강요받는 답답한 황궁에서 벗어나 그저 평범한 여인으로 살아보고 싶다고.”
“... 그랬었지요.”
“?”
“저와 함께 도망가세요. ... 지금으로선 마마를 지킬 방법이 이것뿐입니다.”
“그게 무슨...”
>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드릴게요. 내일 밤, 마마께선 저와 떠나셔야 합니다.”
“잠, 잠깐만요. 그럴 순 없습니다. 저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어찌 도망가란 말씀을 하십니까.”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궁에는 듣는 귀가 많아 소상히 말해 드릴 순 없으나 안전해지시면 다 얘기해드릴게요. 조금만, 저를 믿고 함께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반칙이다. 저런 표정으로 말하면 당연히 들어줄 줄 알고 저러는 것이야.
하지만 이번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황녀는 처음으로 석진의 말에 안 된다는 대답을 했다.
“여기서 다 말해줄 수 없단 것은 이해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전 궁을 떠날 수 없어요. 여기가 제가 있어야 할 곳입니다. 제가 궁을 버리는 것은 곧 나라를 버리는 것 아닙니까. 억지로 끌려갈지언정 제 손으로 버릴 수는 없습니다.”
“...”
“제가 아는 도련님은 제게 나라를 버리라 하실만한 분이 아닙니다. 도련님같이 바른 분이 어찌,”
“공주께서 아직 저를 잘 모르시나 봅니다.”
“...예?”
“전 공주께서 바라시는 대로 성인군자가 못 됩니다. 그러니, 나라를 위해서일지라도 사랑하는 여인을 그런 사내에게 보내줄 순 없습니다.”
황녀는 저에게 몰아치는 이 상황들이 익숙하지 않았다. 평생을 잔잔한 수면처럼 살아오던 그녀에게 갑작스레 들어오는 파도는 두려웠다. 허나 석진이 나긋하게 속삭이는 마음은 줄곧 기다리던 것이기에. 망설임 없이 끌어안을 수밖에.
“많이 기다렸어요?”
한참을 얽혀 있던 입술 사이가 비로소 멀어지자 황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눈을 마주하지 못하겠다 싶어서.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석진은 턱을 살짝 끌어당겨 정갈한 손가락으로 입술을 천천히 훑어냈다. 제 얼굴을 살피는 다정한 눈빛과 살살 입술을 매만지는 손가락이 못 말리게 짓궂었다. 몽롱하게 있던 공주는 이제야 다시 기억난 건지 화드득 석진의 손을 잡아 멈추게 했다.
“응?”
“어, 어쨌든! 저는 궁을 떠날 수 없어요. 도련님을 좋아하는 것과 이것은 별개의... 그러니까.. 별갠데...”
용기를 내서 당당하게 말을 꺼내기는 했으나 고개를 갸웃하며 저를 보는 석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고회로가 정지됐다. 사내이시면서 쓸데없이 왜 저리 고와서는. 그리고 고우면 곱기만 할 것이지 표정은 또 왜 저리 다정하단 말이야.
“예에...”
“저를 믿으세요. 완전히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곧 다시 궁으로 돌아오실 수 있게 할 거예요.”
“...”
“저는 늘 그랬듯이 마마의 옆을 떠나지 않아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공주께서 그 무엇도 잃지 않으시도록 할 겁니다. ... 믿어주세요.”
“지금 가실 겁니까?”
공주는 내심 아쉬웠는지 두 손으로 석진의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맑은 눈빛이 왜인지 자극적이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동하는 게, 석진은 제 스스로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겨우 마음을 다잡은 석진은 괜히 헛기침을 하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조금 더 있다 가시면 아니 됩니까...?”
“혼자 잠들기 무서우시다면 김 상궁을,”
“그것이 아니라...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오늘만 여기서 자고 가시는 건 안 되겠지요?”
애교 섞인 목소리로 꾸물꾸물 더 깊게 안겨오는 공주에 석진은 미치겠다는 듯 고개를 젖혔다.
아. 이러시면 내가 좀 힘든데. 아무리 바른 성정의 선비라도 사내는 사내인지라 정인이 이리 유혹 아닌 유혹을 하면 흔들리지 않을 자가 없다. 석진도 이 순간은 그저 필부일 뿐, 폭 안긴 공주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넘겼다.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하얀 목 언저리에 천천히 입술을 찍어 누르니 품에 안긴 작은 몸이 움찔거린다. 살갗을 짧게 핥았다가 바로 입술을 뗀 석진은 제 귀와 똑같이 발갛게 익은 귓가에 나긋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평소 학문과 충절밖에 모르던 단정한 사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야살스러웠다.
“자고 가면, 제가 이보다 더 무엄한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십니까?”
“... 짓궂으십니다.”
“응, 조심히 가요.”
“?”
“꼭 오셔야 합니다? ... 기다릴게요.”
석진이 야외 연회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건 아버지인 태학사의 부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족이 아닌 석진에게 연회 참석은 필수가 아니었으니까. 무슨 일이시기에 이리 갑자기 부르시나.
“들어오거라.”
“어찌 연회에도 가지 않으시고,”
그까지 말을 한 석진은 입을 다물었다. 늘 차분하고 온화하던 아버지의 잔뜩 어그러진 표정을 보았기 때문에. 다급히 부르실 때부터 그리 좋은 일은 아닐거라 생각했지만,
“행차의 목적이 공주 마마였다. 일전에 국경에 가셨을 때 본 모양이야.”
“그들의 정보력은 무시할 것이 못 되지 않으냐. 우리 집안이 황실과 가까운 것을 알고 분열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다. 우리 손으로 황실을 저버리게 하려는 게야. 더군다나... 너는 공주님과 더 각별한 사이가 아니더냐.”
“!”
“억지로라도 모셔갈 모양인데 공주께서 너를 계속 못 잊으시면 곤란하다 생각했겠지.”
“...”
“우리는 그 전에 자기들의 편에 서거나 이 땅을 떠나라고 경고하더구나.”
“그럴 순 없습니다.”
“알고 있다. 신하된 자로서 어찌 그러겠느냐. ... 그러니, 너는 내일 밤 공주님을 데리고 몸을 피해야 한다.”
“몸을 피하라니 어디로 말입니까.”
“남쪽의 산을 넘으면 강이 하나 나올 것이다. 나룻터로 가서 내 이름을 대면 건너편의 섬으로 데려가 줄 것이니 우선은 그 곳에서 은신하거라. 아비는 좀 더 시간을 끌어보마.”
“어떻게...”
“설화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거짓을 고했다. 새로운 태양이 뜨기 까지, 조금만 시간을 끌면 돼.”
석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태양이라 함은 새 황제를 말씀하시는 건가.
“궁 안의 사람이 모두 선하지는 않다는 것, 명심하고.”
아버님께 들은 말과 제가 하려고 했던 말을 모두 전하고 궁을 나온 석진은 남겨 둔 공주가 눈에 밟혔다. 이제는 정인이 되신 분이니 이런 상황에서 더더욱 혼자 두기 불안했다. 믿어달라며 안심시키긴 했지만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는데 도대체 공주에게 뭘 믿으란 건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아버님 말씀대로 일단 도망치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침착하게 굴면 다 무사할 수 있어.
/
“황제께서 바쁜 일이 있으시다.... 꽃 따러 다니는 일 말고는 하는 일이 없으신 줄 알았더니.”
이제 막 동이 텄음에도 일찍 깼던 것인지 비스듬히 의자에 앉아있던 정국은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정훈을 무시하는 말투에 오만함과 비웃음이 묻어나는 듯하다. 예정대로라면 날이 밝는대로 설화로 돌아갈 채비를 해야 하는데, 제멋대로인 정훈은 유월에 볼 일이 끝나지 않았다며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흥흥 웃는 정국과 달리 말을 전한 지민은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
“그냥 괴상한 정도가 아닙니다.”
지민은 답답한 듯 제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유월에 기어이 행차까지 하신 이유가 황후를 얻으러 온 거랍니다. 게다가 그 대상이 유월국 공주님이구요.”
좀 전까지는 살짝 웃음기를 띠고 있던 정국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당연히 유월 황실에서는 반대했으나 수족인 근위병들은 물론이고 국경 부근의 군대까지 부른 참입니다. 공주가 황실 후계자라는 연유로 거절했더니 유월을 없애버리고 공주를 데려올 작정이에요.”
“... 일이 복잡하게 됐는데.”
“좀 복잡한 게 아닙니다. 이대로라면 유월은 곧 멸망할 거고 그게 설화에 영향을 미치진 않겠지만 황자님께서 세운 그 계획에는 조금 차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생각지 못했던 복병이 생겼다는 것에 정국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유월의 황녀라니. 아무리 제가 황후감으로 탁월하다 생각했더라도 속국도 아닌 남의 나라 공주를 저렇게 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필시 전쟁이 뒤따를 거고 국력의 차이로 보았을 때 전쟁이 아니라 학살에 가깝겠지. 게다가 만약 그녀가 정훈의 황후가 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어쩔 수가 없는데.
“일단 스승님께 전서조를 보내라.”
거사가 조금 앞당겨져야겠어.
남준에게 상황을 전하고 정국은 지금 당장 설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정훈이 유월에 좀 더 머문다는 것은 기회임이 분명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정훈은 두 가지를 동시에 고려하질 못했는데, 지금은 유월을 칠 생각만 하고 있으니 정국에 대한 감시가 소원해졌을 터였다.
애초에 유월 행차만을 명했으니 황명 불복종이랄 것도 없고. 어차피 곧 황명이 아니게 되겠지만.
한편 은청궁.
호석은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털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석진으로부터 황녀와 도망칠 생각이라는 말을 전해들은 후로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다. 정훈이 공주를 원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몸을 피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피가 거꾸로 솟는 거 같았다. 제 힘 만으로는 공주를 지킬 수 없다는 게 무인으로서, 공주의 사람으로서 사무치게 한스러웠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예. 걱정 마십시오. ... 공주께선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
공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고 해봤자 이 상황에서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 뻔해서.
“안정에 좋은 차라도,”
“되었다. 그럴 것 까진 없어. 도련님께 말은 전해 들었느냐?”
“예.”
“같이 가는 거지?”
“어?”
“그 편이 훨씬 나을 겁니다. 제가 여기 있어야 서신으로나마 상황을 전할 수 있으니까요.”
“그건...”
“내 옆에 있겠다 하지 않았느냐. 헌데 어찌 그런 말을 해.”
“꼭 다시 돌아갈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
“아, 제가 누굽니까~ 전쟁 때도 무사히 돌아온 사람 아닙니까. 별 일 없을 거예요.”
지금 제 목숨을 아끼고 있지 않으면서 그렇게 예쁘게 웃으면 나더러 어찌하라고. 본분을 다하지 않고 내 곁을 떠난다는데도, 너를 미워할 수가 없지 않으냐.
“그건 좀 마음이 아픈데.”
황녀는 방 안에 틀어박혀 오전 내내 나오지 않았다. 문 밖에서 나인들이 이러다 정말 저 설화군들이 공격하는 것 아니냐며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눈치를 보는 조심스러운 말투에서 공주가 제 발로 가줬으면 하는 속내가 들려오는 것 같아 메스꺼웠다. 아직 젊은 나인들이니 목숨에 위협을 받게 될 것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딱히 그들을 탓하고 싶지 않았던 황녀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김 상궁이 공주가 즐기던 간단한 간식거리를 들고 들어왔지만 ‘괜찮다’는 대답만 들려 왔다.
공주는 이대로 석진이 올 때까지 방 밖으로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도망을 가려면 뭐라도 먹어야겠지만 지금은 뭘 먹더라도 체할 것 같아서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않았다.
아바마마, 서신을 남깁니다.
궁 안의 눈이 두려워 차마 뵈러 갈 수 없음을 용서하시옵소서.
소녀는 오늘 밤 잠시 궁을 떠납니다. 도망이 최선이 아님은 알지만 차악이라 생각하기에 선택한 결정이니 감히 살펴 보아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그리고 아바마마의 명을 어겼던 것, 후회하고 있사옵니다. 대단한 성군이라도 된 양 굴었지만 생각해보면 아바마마께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늘 아바마마께 자랑스러운 딸이자 후계자가 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어 송구한 마음뿐입니다.
언제 다시 뵐 수 있을는지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어디에 있든 아바마마의 자식으로서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무사히 잘 지낼 테니 아바마마께서도 제 걱정은 마시고 부디 강녕하세요.
/
야속한 해는 기어코 어둠을 남기려는 듯 한번 머뭇거리지도 않고 흘러간다. 공주는 대충 채비를 하고서 황후전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유약한 성정에 그런 일을 겪으셨으니 많이 놀라셨을 텐데.
“어마마마.”
“공주, 어인 일입니까.”
공주는 황후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궁인들을 모두 물리라 명했다. 잠깐 당황해하던 윤 상궁은 곧 궁인들과 함께 문을 나섰다. 황궁 안의 모든 이가 공주는 팔려가듯 혼인을 치르게 될 거라고 수군댔던지라 동정심이 들었으므로 구태여 왜 황후와 둘만 남아야 하는지 캐묻지 않았다. 윤 상궁은 그저 안타깝다는 눈으로 공주의 뒷모습을 한 번 훑어본 뒤 궁 밖으로 나갔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오늘만큼은 그저 평범한 어머니와 딸이고 싶습니다.”
침착하던 목소리에 점점 물기가 스몄다. 핏줄이 살짝 불거진 메마른 손은 황녀의 손을 맞잡았다.
공주는 제 이름을 좋아했다. ‘여주’라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음성이 따뜻해서 좋아했다. 그리 불릴 때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좋아했다. 제 사람이 아니면 알지 못하는 그 이름이 괜히 비밀스러워 좋아했다. 헌데 지금은 왜 눈물이 나지.
“괜찮다. 괜찮아, 아가.”
“제가 결국 다 망쳐버렸어요. 아바마마랑 어마마마께서 어떻게 이끌어 오신 나란데, 제가...”
“뚝. 눈가가 벌써 다 짓물렀구나. 여주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단다. 그저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야. 나라의 명운이 다했을 때, 하필 이런 일이 생겨난 것이니 괴로워 말거라.”
“허나... 그 사람은 쉬이 포기할 것 같지 않아요. 제가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이 궁마저 없애버릴 지도 모릅니다. ... 사실은 오늘 밤 도련님과 도망가기로 했는데, 아직도 이게 맞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도련님은 다 생각이 있으신 것 같지만 그래도, ”
“여주야.”
황후는 공주를 안고 있던 몸을 일으켜 다시 손을 꼭 부여잡고 눈을 맞추었다. 무언가 굳건한 결심을 한 것 같았다.
“때로는 정도(正度)를 따르지 않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네 마음이 도망을 원한다면 그것을 따르거라. 어차피 이런 상황이 된 이상 이 나라는 미래가 없어. 곧 설화에 복속될 텐데 그들도 생각이 있다면 도성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진 않을게다. 제 영토가 될 땅을 불필요하게 망치는 일이니.”
“그 말씀은,”
“백성들이 입는 피해는 심하지 않을 것이니 너는 도망가거라. 오늘 밤 도령과 멀리 떠나. 떠나서 네가 살고 싶은 삶을 살거라.”
“제가 떠나면 두 분께선...”
“폐하와 난 궁을 지켜야지. 그래도 명색이 황궁인데, 주인이 없어서야 쓰겠느냐.”
“위험하실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차라리 제가,”
“차라리 네가, 그 자의 황후가 되겠다는 말이냐.”
“...”
“더군다나 유월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국의 황후 자리다. 너 같은 아이가 그런 곳의, 그런 남자의 황후가 되었다가는 금세 시들어 버릴 게야. 그렇게 사는 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야...”
“어마마마.”
“제발 살아다오. 살아서 행복해다오. 너를 사랑하는 좋은 사내와 혼인해 아이도 낳고 좋은 곳들을 마음껏 다니면서, 그렇게 살아다오. 태어나자마자 틀에 맞춰진 대로 억눌려 살아온 네가 아니더냐. 부디 너는 꼭 살아서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도록 행복해야 해. 어미의 부탁이다, 아가.”
황후의 손이 안쓰럽게 떨린다. 처음 보는 어머니의 눈물에 황녀는 당황할 새 없이 그 몸을 끌어안았다.
/
다시 궁에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석진이 말했지만 공주는 본능적으로 돌아올 수 없음을 알았다. 석진을 믿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의 순간이 어머니와 함께하는 마지막이라는 것을, 황궁과도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갗에 닿는 공기와 바람이 그렇다고 일러주었다.
“예, 마마.”
“예. 누가 봐도 궁녀....아, 아니 물론 공주가 가지신 귀티는 안 가려지지만, 예, 어쨌든 그...”
“풉.”
막상 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투정처럼 느껴져 귀엽게 생각했던 것을 이제 와서 사과하고 있으니 그 마저도 귀여웠다.
“그리고 네게 하나 부탁할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고 느껴지면 바로 몸을 피하거라. 내가 있는 곳으로 무사히 살아서 돌아와.”
“하지만 마마,”
“허면 부탁이 아니라 명령으로 바꾸자꾸나. 어떻게든 살아서 내게 와, 호위무사.”
하여간 당신은, 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너무 잘 알아.
“명 받잡겠습니다, 마마.”
“대신 마마께서도 부디, 건강히 잘 지내셔야 합니다.”
해시(*21시~23시)가 되기 전에는 오신 댔는데.
달은 이미 한참 전에 떴고, 이제 석진만 오면 되는 건데. 석진은커녕 엇비슷한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애가 달았던 공주는 살짝 창문을 열었다. 이런다고 서둘러 오시는 건 아니지만, 답답하니까. 뒷문으로 오시려나? 헌데 저 검은 안개는 대체 무엇이지? 설마 사람은 아닐...
“마마, 잠시만 문을 닫아보십시오.”
그대로 조금 있으니 궁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닫힌 창밖으로 이상하리만치 밝은 불빛들이 있다. 본디 은청궁의 등은 이 정도로 밝지 않은데도. 상황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호석은 굳은 얼굴로 검을 빼들었다.
이 정도 밝기라면, 등불이 아니라 횃불이다.
“마마! 마마!”
“마당에 설화군이...!”
“다친 곳은 없으신지요!”
곧 별감들이 목숨을 바쳐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명들. 은청궁 별감들이 황제의 익위사들에게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순간 어지러움이 일어 온 몸에 힘이 풀린 공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마!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제 뒤에 붙어 계세요.”
아득함 속에 호석이 제 팔을 잡자 공주가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목소리와 손길에 겨우 정신이 들자 빨리 스스로가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도망은 글렀고, 내가 나선다면 더 이상 목숨을 잃는 자들은 없을 테지.
“호석아. 내가 가야 한다. 놓으렴.”
“안 됩니다! 마마께서는 여길 빠져나가셔야,”
“빠져나갈 수 없다. 연회 때부터 있었으니 저들도 내 얼굴을 알 텐데,”
“아니요.”
“공주를 끌고 나와!”
김 상궁의 말과 겹쳐져 신경질적인 남자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호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공주를 내려다봤다. 당신을 어떻게 탈출시킬까. 호석은 순간 벽에 걸린 장옷에 눈길을 주었다. 내가 저걸 쓰고 공주인 척 달아나면, 익위사 열 명 쯤은 따돌릴 수 있을 텐데. 문제는 그 사이에 공주를 데리고 도망칠 사람이... 형님이 있기만 했어도.
계속 장옷을 응시하는 호석이 느껴졌는지 공주는 호석의 손목을 쥐었다.
“하지 마.”
“예?”
“뭘 생각하고 있든 하지 마. 내 옆에 있어. ... 제발.”
곧 정신을 잃을 듯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에 호석은 결국 가만히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석진도 없는데, 저까지 사라지면 저 작은 몸이 아스라이 쓰러질 것 같다.
“공주는 어디에 숨겼느냐!”
“공주 마마는 오늘 저녁상을 물리시고부터 보이지 않으십니다. 정 의심스러우시면 직접 궁 안을 뒤져보십시오.”
“네 놈이 공주의 호위무사냐.”
“뭐, 됐다. 좀 있으면 주인도 못 지키고 죽을 텐데.”>
“대장, 못 찾았습니다!”
“못 찾아?”
이대로 가버렸으면 좋겠다. 제발, 그냥 가.
고개를 숙인 채 간절히 바라던 공주는 뜻밖의 말에 화드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자, 네 년이 쓸 데가 생겼구나. 이제 그 노리개 값을 톡톡히 치러 보아라. 거짓말했다가 폐하께 걸리면 너나 나나 죽는 것이니 허튼 생각 말고.”
병사들 틈에서 유월 황궁의 의복을 입은 궁녀가 나왔다. 겁을 먹긴 했지만 단호한 결심이 선 듯한 얼굴. 아는 얼굴이었다. 은청궁 소속 궁녀였으니까.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세수 시중을 들었던 아인데, 모를 리가 있나.
궁녀는 정훈에게 정국과 공주의 만남을 일러바쳤던 그 여인이었다. 어느새 허리춤의 노리개는 더 좋은 것으로 바뀌고, 이제는 화장품을 살 여력까지 있는지 화장을 한 얼굴이 고왔다. 양심과 충절을 판 대가는 생각보다 더 달콤한 것이었으리라. 적잖이 충격을 받은 황녀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었는지 고개를 돌린 그녀는 손가락으로 정확히 황녀를 가리켰다.
두세 명의 병사가 울고불고 황녀를 부여잡는 상궁과 궁인들을 걷어찼다. 억센 힘에 거부조차 하지 못하고 질질 이끌려 마당에 준비된 가마 앞으로 간 황녀가 겨우 다리에 힘을 주고 서 있자 근위대장은 아래에서부터 눈으로 여린 몸을 훑었다. 그 시선에는 호기심, 분노, 더러운 욕망 따위가 얽혔다.
“역시. 일개 궁녀치고는 낯이 아주 곱다 싶더라니, 얼굴로 폐하를 꾀어낸 것이냐?”
“...”
“후궁도 아니고 무려 설화의 황후로 앉힌다는 데 감사할 줄도 모르는 괘씸, 히익! 이놈! 당장 칼을 거둬라!”
검보다도 날선 호석의 눈빛에 다른 병사들은 감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소리도 없이 근위대장에게 달려들어 온몸으로 살기를 띠는데, 잘못 덤벼들었다가는 바로 몸이 두 동강 날 것 같았다. 마른 체구인지라 방심 했던 것이 실수였다. 그들은 공주의 호위무사가 유월 최고의 무인이라는 소문이 참이었음을 절절히 깨닫는 중이었다.
쓸 만함을 넘어 범 같은 자로고.
그러나 제아무리 범이라도 뒤에서 날아온 화살마저 피할 수는 없는 법.
숨어 있던 병사가 쏜 화살이 호석의 오른쪽 어깻죽지에 그대로 꽂히고 꼿꼿이 서있던 호석의 몸이 일순간 휘청거렸다.
>
“호석아...”
멍하게 내뱉은 황녀의 음성이 밤하늘에 흩어졌다. 살을 파고드는 끔찍한 고통일 텐데도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은 호석은 찡그린 얼굴로 화살을 뽑아냈다.
괴물 같은 놈!
병사들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호석에게 희한하게도 분노를 느꼈다. 저들은 갖지 못한 충심과 강인함이 부러워서 일지도, 혹은 약소국 공주의 호위무사 주제 대국의 군인인 자신들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서 일지도 몰랐다.
그들이 칼을 손에 쥐고서 얼굴에 식은땀이 맺힌 호석에게로 모여드는 그때.
“멈추어라!”
얌전히 가마에 들어간 줄 알았던 공주가 병사들 쪽을 노려보며 가마 문 앞에 서 있었다.
하얀 목에 작은 칼을 들이댄 채로.
“그 사람 건드리지 마.”
손이 자꾸 떨리는 걸 보이지 않으려 은장도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칼에 공주의 얼굴이 비쳤다. 병사들이 제 쪽으로 위협하며 다가오자 그녀는 칼날을 제 목으로 더 가까이했다. 이제 조금만 더 손에 힘을 주면 그대로 목 안에 칼이 들어올 지경이었다.
“다들 그만 둬라! 폐하께서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하게 데려오라 하신 걸 잊었느냐!”
당황한 사내 하나가 소리치자 위협하던 병사들이 주춤거렸다. 황제가 분노할 구실을 만들면 안 되는데.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고 목이 달아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공주의 목적은 호석을 구하는 것. 호석에게서 칼을 치우지 않으면 제 목에서도 절대 치우지 않으리라.
호석은 한 번도 죽음이 두려운 적 없었다. 무인으로 태어났으니 무인답게 죽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고,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 무서웠다. 자신이 아니라 공주의 죽음이. 가녀린 목에 들이밀어진 단도는 제 목에 들이밀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주가 잘못된다면, 더는 살아갈 이유가 없으니.
“그 사람 조금이라도 해치면 죽어버릴 것이다. 네 주인에게 내 시신을 운반하고 싶지 않다면 당장, 거두어라.”
절대 물러설 것 같지 않은 황녀를 보며 병사들은 고민에 빠졌다. 정훈은 분명 방해가 될 호석을 제거하고 공주만 상처하나 없이 데려오라 명했는데, 호석을 없애면 공주가 죽을 기세였고 그렇다고 없애지 않자니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게 되었다.
곧 새하얀 목과 칼날 사이로 붉은 피가 떨어졌다.
+
쓰는데 계속 마음에 안들어서 몇 번씩 수정을..헣... 이러다가 아예 못 올리겠다 싶어서 그냥 올림니다
여주 이름은 그냥 여주했어여 제 네이밍센스의 한계.....ㅎ..
그리고 이거 왠지 모르겠는데 계속 오류가 나서 제가 한 번 알림 없이 올렸다가 오류있는 거 일일이 다 지우고 다시 수정 알림으로 보내드리거든여 혹시 알림 가실 때 이상하게 가시진 않죠..? 쫄보라서 살짝 무섭ㅠㅠㅠㅠㅠㅠ
그럼 여러분 날씨도 추운데 감기 조심하시고 설날 잘 보내세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