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一 화
十二 화
十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대승상이 가장 아낀다던 진나라산 벼루가 날아왔다. 그 투박한 물건이 제 이마를 찧고 피를 흘러 보내도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있던 윤기가 이를 악 물었다. 싸늘한 얼굴로 의자에 앉은 대승상과, 그 앞에 선 윤기. 천자의 분노보다 더욱 재앙이라던 대승상의 진노 앞에서도, 윤기는 마치 전쟁터에 오롯이 버려졌었던 그 날처럼 무덤덤하기만 했다. 윤기 스스로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 애썼지만 황제가 덕재패의 존재를 안 이상, 이 일이 대승상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예, 아버님.”
윤기를 부르는 대승상의 음성은 낮고 또 조용했다.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린 피가 뚝뚝 떨어져도 가지런히 모은 손을 움직이지 않은 윤기는 그 부름에 충심을 담아 대답했다.
“네가 오늘 망친 일이, 어떤 일인지 알고는 있느냐?”
대승상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황제에게 덕재패에 대해 낱낱이 일러바친 윤기의 행동 덕에, 일이 아주 복잡하게 되었다. 현재 대승상이 가진 사병은 황궁의 병부만큼이나 막강했기에 그들을 유지하는 데에는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다. 헌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금줄이 끊겼으니 그것을 다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황제는 이미 병부를 움직여 덕재패의 산채에 불을 지르고 그들을 몰살했다. 그들을 통해 거래되던 자금이 끊기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황상이 어떤 처분을 내릴 지도 모르는 마당에, 합방이 코앞인데 황후께 불똥이라도 튀면 어찌할 게야?”
“…….”
묵묵히 질책을 받던 윤기의 얼굴에 처음으로 동요가 일었다. 객잔에서 본 황제는 황후가 이 일과 관련 없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아니 부정하려고 애썼다. 이번 일로 다시금 황후와 자신을 거리를 실감했을 황제는 더욱 가혹하게 황후를 벌할 것이다. 연모하는 황제와 온갖 대소신료들의 앞에서 모욕을 당하는 누이라…, 생각만으로도 아뜩했다.
“소자가 모든 벌을 받겠습니다.”
“황상이 굴러 들어온 기회를 놓칠 것 같으냐? 이때다 싶어 황후를 견제할 것이다. 이참에 폐위라도 거론되는 날엔… 합방이든 무엇이든,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아버님.”
윤기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제 손을 꼭 쥐고 놓지 않던 어린 황후에게 이 천하를 당신의 발 앞에 꿇리겠다 약속했던 윤기였다. 헌데 그런 그녀가 폐위라니. 그것만을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만 했다. 심장이 사납게 뛰었다.
“황후마마께 황상을 알현하라고 말씀드려라. 최대한 자신과는 관련이 없다고,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야 한다.”
“…….”
“그래, 아무리 그래도 황상이 그리 쉽게 황후를 버리진 못할 게야.”
“알겠습니다.”
황제가 이대로 누이를 버린다면… 자신은 그녀를 데리고 그 어디든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허나 윤기는 주먹을 꽉 쥔 채 황궁으로 가기 위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자신이 다짐하고 다짐해도, 황후는 황제의 곁이 가장 행복할 테니까. 그 자리가 정녕 그녀의 자리이니까.
/ 황후열전
자신을 향해 당돌한 질문을 던진 태형이 떠난 후, 황제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태형의 그 눈빛이 마치 일종의 선전포고 같아서. 황후에게 단 한 발짝도 다가갈 수 없는 자신과 달리,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신분의 벽도, 황후의 마음도 그 어떤 것도 아닌 듯 굴어서. 그게 황제의 숨통을 죄어왔다.
“폐하, 백재인 마마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정국은 머리가 복잡할수록 일에 매달렸다. 정무를 보고, 재정을 검토하고, 변방의 성주들이 보내오는 상소들을 수없이 읽고 또 읽었다. 애써 마음을 다잡는 정국을 태형이 한 번 헤집고 간 뒤, 대명전을 찾은 것은 재인이 된 백야였다.
“들라.”
정국이 읽던 상소를 말아 탁상에 올리며 눈을 꾹 감았다. 피로가 몰려왔다. 잠행에서 돌아온 후 대승상이 풀어놓은 도적패들을 처리하고, 쥐새끼처럼 키워오던 사병의 규모를 파악하는 데 진이 빠질만큼 시달린 탓이었다. 곤해 보이는 정국과 달리 화사한 얼굴을 하고, 항아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값비싼 옷을 차려입은 백야가 대명전에 들었다. 그녀의 인기척이 느껴졌음에도 정국은 감은 눈을 뜨지 않고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대었다. 시야가 캄캄해질수록 황후의 울 것 같은 얼굴이, 태형의 뒷모습이 자꾸만 겹쳐졌다. 그건 일종의 형벌이었다.
“재인 백야, 폐하를 뵙습니다.”
숨막힐 듯 조용한 황제의 공간에, 정국과 백야 두 사람만이 남았다. 작게 읍을 하며 정국의 눈치를 살피던 백야가 금세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치 황제의 복잡한 머릿속을 살살 달래기라도 하려는 양. 정국이 천천히 감은 눈을 뜨고, 그런 백야를 내려다보았다.
“정무가 많아 곤하십니까?”
“어쩐 일이냐.”
“뵙고 싶어서… 소녀는 첩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함부로 처소를 나서선 안 된다고 장상궁이 그랬는데, 그래도 뵙고 싶어서….”
백야는 횡설수설하며 황제의 손 위에 함부로 제 손을 포갰다. 따뜻하고 작은 손의 감각에 정국은 힘을 풀며 천천히 뻐근한 목을 움직였다.
“시중 받는 것이 아직 익숙치 않을 터인데.”
“예. 다들 제게 깎듯이 대해주시는 게, 조금 어색합니다.”
백야는 정국의 관심이 좋아 환하게 웃으며 조잘거렸다. 그런 자신의 말이 황제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는 걸, 그의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팔린 이후라는 걸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정국이 무신경히 툭툭 던지는 한마디에도 백야는 잔뜩 들떴다.
“그만 일어나라. 다리가 저릴 것이야.”
“예.”
이리 제 팔을 잡고 꿇은 무릎을 일으켜주기까지 하는 황제에게, 다른 생각이 있을 줄 어찌 상상이나 할까. 백야는 환히 웃으며 정국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곤 탁상 위에 있는 정국이 읽고 있던 상소에 관심을 보였다. 내명부에 속한 그녀가 정계에 관심 둘 일은 아니었지만 백야에겐 법도와 신분보다 당장 마음 가는 것이 먼저였다. 천성이 그런 아이였다.
“대전회의가 없는데도 상소를 보십니까?”
“대전회의가 없으니 짐이 직접 다 읽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군요. 허면 대전회의도 하지 않고, 상소도 읽지 않으실 땐… 폐하께선 보통 무얼 하십니까?”
“태후께 문후를 드리거나, 황실기관을 감찰하거나, 잠행을 나가지.”
무수리와 항아를 전전했던 백야는 상상도 못 할만큼 황제인 정국의 하루는 바쁘고 또 바빴다. 백야가 다 알지 못하는 영역의 일도 많아 간추려 말한 것이었는데도, 정국은 대답은 마치 그는 늘 한가하지 않다고 답하는 것 같았다. 나랏일을 하고, 잠행을 가며, 전쟁을 치루는 황제. 그는 만인지상의 천자였다. 눈앞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서 결코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 백야는 어쩐지 울적한 얼굴을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전장에서 보내기에 황궁에 있을 때 무엇이든 제대로 해두어야 한다.”
“…….”
“짐이 황실을 자주 비워 불한당같은 척신들이 언제 득세할지 모르니까.”
“대승상…같은 분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백야가 조심스럽게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대승상의 이름을 꺼냈다. 황제의 눈썹이 심기불편하게 움직였다. 지금도 황제의 신경을 건드리는 대승상의 여식이 황후전을 떡하니 지키고 있었다. 황후전은 내명부의 중심이자, 보위를 잇는 일에도 밀접하게 관여하고 있었다. 허니 대승상의 여식이 황후인 한, 정계가 어떻게 돌아가던 대승상은 명백한 정적이었다. 백야가 그 사실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이 언급했다. 정국이 바람 빠진 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낱 백야도 아는 대승상의 권세라.
“허면 전장에서 돌아오신 후에, 정무도 다 보시고, 대전회의도 다 하시고 나서 시간이 남으신다면….”
“…….”
“소녀의 처소에도 들러주실 수 있나요?”
백야의 음성이 떨렸다. 총애를 확신할 수 없는 애첩의 목소리가 여리고 가늘게 황제의 귓가를 맴돌았다. 황제가 빤히 눈을 뜨고 백야를 바라봤다. 그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 백야는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해서.”
숫기 없고 연약한 백야에게서 황후를 보았다. 맑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태자였던 정국을 붙잡던 그 어린 소녀와 같다. 기어코 자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 모진 음성과 같다. 황제는 백야의 그런 점이 두려웠고, 또 끌렸다. 백야는 마치 정국이 처음 만난 황후의 모습 같았다.
“…황상.”
발칙한 백야의 부름이 정국을 무의식에서 이끌었다. 백야는 나름대로 용기를 내고 정국을 그렇게 불렀다. 황후가 늘상 그를 부르는 호칭 그대로, 제게 있어 과분하고 또 무례한 그 이름 그대로. 백야는 황후만이 정국을 그렇게 칭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그걸 훔쳤다.
황후와 혼례를 올린 날 정국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 첫날 밤, 정국은 미련과 분노로 점철되어 떨리는 손으로 붉은 비단발을 걷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 있던 황후는 그런 정국을 보며 잔뜩 떨리는 눈동자와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황상,이라고. 그 호칭은 태후에게나 허락되는 호칭이었다. 아무리 황후라고 하나 하대와 비슷한 그것이 무례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헌데도 그녀는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저 이 밤이 정국과 혼인한 첫날밤이라 떨리는 것이라는 듯이 앳된 소녀의 티를 내며 황제의 뺨을 뜨겁게 쓸었다. 황상이라 부르면서 사내로 대했다. 그 이후로 황후는 낮은 자리에서 정국을 그리 부르는 유일무이한 사람이 되었다. 법도가 아닌 걸 알면서 정국은 그녀가 다정한 음성으로 자신을 그리 부르는 걸 저지하지 못했다. 황후는 그랬다. 애초부터 정국을 한없이 무력하게 만들었다. 겉으로 매달리는 쪽은 철저히 황후였지만, 끝내 그걸 거역하지 못하는 건 황제쪽이었다. 항상 황후전을 생각하면 가슴 한복판이 차갑게 식었다.
정국은 시야를 틔우고 정신을 환기했다. 같은 부름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백야다. 저 부름이 허락되는 것도, 끝내 정국을 움직이게 하는 것도 전부 황후였는데 말이다. 정국은 패배를 인정했다. 황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백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런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미련한 황후도, 당돌한 태형도 도저히 거슬려서 참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용했다.
“폐하, 혹여 소녀가 무례를….”
“이만 돌아가라.”
정국의 뒷모습을 붙잡으려는 백야의 목소리가 황제의 단호한 명령에 흩어졌다. 그대로 정국은 백야를 등지고 대명전을 나섰다. 문밖에 있다 놀란 내시백이 황제의 뒤를 따르고 그 걸음의 종착지를 알 길도 없이 걸었다. 반쯤 걸었을 때 그가 향한 곳이 황후전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황제는 그리 하는 데 실패했다. 어쩌면 예상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천자의 심정을 짐작하며 내시백은 가만히 그를 따랐다.
“폐하!”
황후전 앞을 지키던 도미가 황제의 행차에 읍을 했다. 황후가 멋대로 황궁을 나섰을 때 이후로 도미는 처음 뵙는 황제라 더욱 목을 곧추세웠다. 대승상의 일과 관련해 황제가 황후를 잔뜩 벼루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일로 처결이라도 내리러 오신걸까. 그러기엔 황후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은데.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마마께 아뢸까요?”
“안에 누가 있나?”
서릿발같은 황제의 음성이 들렸다. 도미는 놀란 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허리를 더 숙였다. 별감 태형이 황후전 안에 있었다. 그 안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그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그런 만큼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별감이….”
“됐다. 황후에게 아뢸 필요 없으니 모두 물러가라.”
청천벽력이다. 도미는 눈앞이 캄캄했으나 정국의 명에 모든 궁녀들을 데리고 황후전 밖으로 나갔다. 이제 황후전은 턱없이 허술한 공간이 되었다. 황제의 손바닥 안, 별감과 황후였다. 문 두 겹을 남기고 정국이 처소 앞에 섰다. 그의 우편에는 내시백만이 남았다.
“폐하, 아뢸까요?”
정국이 고개를 저었다. 많은 이들이 자리를 비운 황후전은 조용하고 또 조용했다. 정국은 황후를 부르기도, 이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두려웠다. 황후가 울고 있을 것 같았고, 그 눈물을 보인 앞에 태형이 있을 것 같았다. 헌데도 자신이 들어가면, 황후가 자신을 보고 웃어줄까봐. 그게 가장 겁이 났다. 정국이 문을 천천히 밀었다. 황후를 닮아 붉은 황후전의 내부가 보이고, 침전 가운데 선연히 몸을 기댄 황후가 보였다. 그리고 그 곁에 별감 태형.
“폐하….”
내시백이 못 볼 것을 보고, 불충을 저질렀다는 듯 처절한 음성으로 황제를 부르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두 눈이 차갑게 식었다. 황후는 울고 있지고, 웃고 있지도 않았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정국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 너머 태형은 황후의 뺨을 살살 쓸고, 어르고 어르며 입을 맞추었다. 바라만 봐도 숨이 막혔다. 황후의 눈은 채 감기지 못하고 놀라 동그랗게 팽창되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고 오물거리는 입술에 태형이 더 깊게 머금었다. 황제는 그 광경을 똑똑히 목도했다. 입맞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황제에겐 억겁같이 느껴졌다. 태형의 손이 황후의 뺨을 타고 내려와 하얀 목언저리를 살살 쓸었다. 그의 귓볼이 답지 않게 붉게 물들었다. 황후가 작은 손을 들어 태형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놀라고 숨이 차 한 행동이었지만 이 순간 황후의 작은 행동조차 태형의 뱃속을 뜨겁게 달구고, 황제의 가슴을 불살랐다. 영원 같은 찰나였다.
입술을 뗀 태형이 황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놀라 얼굴이 달아오른 황후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황후가 천천히 이 상황을 자각하고, 제 작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너, 너….”
혼란스럽게 요동치던 황후의 예쁜 눈동자가 태형의 잔잔한 얼굴을 노려보고, 당황으로 넘실대며 그의 뒤를 훑었다. 그리고 태형을 넘어서 기시감이 느껴지게 열린 문틈을 보았다.
“…….”
붉게 번진 황제의 두 눈을 확인하는 순간, 황후의 세상운 천천히 내려앉았다. 정국의 목울대가 애타게 끓었다. 연정이 가차 없이 짓밟히고 희롱당한 순간이다. 이건 완벽하게 동점인 싸움이었다. 그런데도 황후는 절망했다.
/
“……황상”
마치 자신이 처음으로 사모한다 고백했을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저를 보고, 황제는 부르는 황후에 씁쓸한 미소를 짓던 태형은 다시 한 번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너무 놀라서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밀어내지도 못한 황후는, 눈을 크게 뜬 채 제 뺨을 애틋하게 쓰다듬는 손길과 입술에 느껴지는 촉감을 받아 드릴 수밖에 없었다. 태형의 큰 손이 황후의 허리를 지분댔다. 황후가 당황해 입술을 오물거리는 게 느껴졌다. 태형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황후의 입술을 열면 정말 끝을 볼 것 같았다. 허나 태형은 끝까지 그러지 못했다.
“하아… 별감.”
잠시 떨어지자 참은 숨과 탄식을 한꺼번에 뱉어내던 황후가 혼란스런 눈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이것조차 너무 가깝다. 생각한 황후가 뒤로 침상을 짚고 몸을 뺐지만, 곧장 따라온 태형이 빙긋 웃으며 다정하게 머리를 쓸었다. 다시 입을 맞추는 사이에 반쯤 열렸던 문은 언제 그랬냐는 듯 굳게 닫혀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던 황제의 모습역시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황후는 심장이 철렁했다. 황제가 정말 보았을까. 다른 사내와 입맞추는 자신의 모습을.
“네가, 네가 지금 뭘 하는 게야. 지금….”
“더 이상 양보하고 싶지도, 참고 싶지도 않아 졌습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태형은 차례대로 황후의 반듯한 이마와 눈꺼풀 위에 입을 맞췄다. 태형의 움직임에 따라 눈을 질끈 질끈 감던 황후가 태형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황후의 손길에 순순히 떨어져 나온 태형이 침상에서 물러서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황후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뱉어냈다. 이미 무례란 무례는 다 저질러 놓고 이리 늦은 사과라니. 생경하게 입술에 느껴지던 감촉이, 애타게 허리를 감아오던 손길이 너무도 생생하여 다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황후의 섬섬옥수가 당황한 듯 공중을 헤집다가 이내 제 가슴께 위를 짓눌렀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아서였다. 허나 떨리는 것은 떨리는 것이고 황제를 만나 방금 제 눈앞에 보인 그의 모습이 현실인지부터 파악해야 했다.
“내 황상께, 황상을 보러 가야겠다.”
“입을 맞춘 건 전데, 왜 황제를 찾으십니까?”
“뭐라?”
태형은 오늘 하루 무례하고 당돌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 뻔뻔스러운 말에 채 답을 찾지 못한 황후가 망연자실하여 침상을 짚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마마를 모시고 도망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황제의 곁에서 황후는 죽어도 행복해질 수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이 답답한 황궁을 벗어나는 게 나을 테지. 허나 황후는 다시금 눈을 크게 뜨며 그 무슨 소리냐는 듯이 태형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진정 실성한 것이냐? 황후인 내가 어찌 너와 도망을 한단 말이냐? 아까부터 왜 자꾸….”
“허면 이 황궁에서 백야와 황제를 두 눈 뜨고 보실 수 있으십니까?”
단호한 태형의 말이 황후의 말문을 막았다. 이젠 천하다 폄하할 수도 없는 백야는 황제의 첩지를 받아 황궁에 사는 유일한 후궁이 되었다. 푸른 비단 의복을 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처소에서 정국을 기다리는 백야는 영락없는 후궁이었다. 앞전에 백야를 여인으로 대하는 정국을 보았다. 방금 전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문틈으로 백야를 품에 안고 입술을 머금던 황제를 황후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허나 그때의 충격보다 그것과 똑같은 광경을 정국이 목도했을 것이란 사실을 황후를 더 떨리게 만들었다. 그건 황후가 정국을 연모하기 때문이었다.
“그것 보십시오.”
당장이라도 정국을 보러가야 했다. 옆에서 태형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황후가 긴장으로 풀린 몸을 가누고 일어나려 했다.
“황후마마.”
허나 밖에서 들려오는 뜻밖의 목소리에 잠시 분노로 물들었던 황후의 눈동자도, 그런 황후를 내려다보던 태형의 눈동자도 당황으로 가득 찼다. 이토록 익숙한 음성은 윤기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황후가 옷소매를 들어 제 입술을 문질렀다. 윤기가 아직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금방 일어난 낯 뜨거운 상황을 벌써 들킨 것 같아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에 반해 금세 덤덤한 얼굴로 돌아온 태형은 나갈 생각은 없는지 한발 물러나 그 옆에 설 뿐이었다.
“드세요.”
그런 태형을 슬쩍 째려보던 황후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윤기가 황후전에 발을 들였다. 황후는 최대한 평소 같은 눈으로 윤기를 보며 반갑게 그를 맞았다. 헌데 오늘따라 윤기의 표정이 더욱 날카로웠다.
“오라버니 오셨습니까?”
“어찌 상궁들이 전부 황후전 밖에 있는 것입니까?”
그에도 내색 않고 인사를 건네던 황후는, 불현 듯 윤기의 이마에 선명하게 자리한 상처를 보고서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황후가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중간에 멈춰선 윤기를 향해 달려갔다. 잔뜩 걱정스런 얼굴로 윤기를 살피는 황후는, 마치 이 공간 안에 태형이 있다는 사실도, 황제에게 당장 어떤 해명이라도 해야 한단 사실도 잊어버린 듯 했다.
“어찌 다치신 겝니까?”
“…….”
“오라버니!”
발꿈치를 들고 윤기의 이마를 어루만지던 황후가 물었다. 헌데도 윤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후가 답답해진 듯 소리친다. 그제야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윤기가 제 이마에 닿은 황후의 손을 세게 쳐냈다. 언제나 그렇듯 황후가 속상한 눈길로 윤기를 올려다보았다. 뒤에서 지켜보던 태형은 절로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 이러십니까. 말씀을 좀 해보십시오, 예?”
마치 천지가 개벽할 적부터 제 사람이었던 것처럼 자신을 걱정해주는 유일한 사람. 이런 누이에게 이 따위 천박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죄악이었는지도 모른다. 윤기가 손을 들어 황후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리곤 직진. 황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오라버니.”
제법 강한 손길로 황후를 침상에 앉힌 윤기가 한 쪽 무릎을 꿇고서 시선을 맞추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윤기의 목이 애타게 끓었다.
“잘 들으십시오.”
“…무얼 말입니까.”
“지금 당장 황제폐하를 알현하여 마마는 이번 일과 아무 상관없다 직접 말하십시오. 또한 바로 처분을 내려 달라고도 고하세요. 시간이 지체될수록 일은 커지고 마마의 처분도 무거워집니다.”
“…….”
“아버님이 사병을 키우고 있단 사실이라도 발각되면, 반역으로 엮여 더 큰 피를 볼 수도 있단 말입니다.”
마치 저 자신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라도 처한 듯 급박한 윤기의 말에 황후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라비의 시선이 답지 않게 애가 탔다. 여태까지 보았던 차가움 속, 그 여린 속살을 본 듯만 해서 황후는 가만히 손을 들어 다시 그의 이마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고 싶었다.
“폐하께선 황후마마의 말을 믿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애초에 차단한 것은 옆에 있던 태형이었다. 그제야 처소 안, 또다른 누군가의 존재를 인식한 윤기가 구겨진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태형역시 겉으론 호의를 가장하고 있지만 차가운 시선으로 윤기의 눈길을 받았다. 황후의 오라비라. 전혀 설득력 없는 관계였다.
“황후전 별감 태형, 문하시중 어른을 뵈옵니다.”
태연하게 인사하고 제 정체를 고하는 태형에 윤기의 인상은 더욱이 단단히 일그러졌다. 철저한 금남의 구역이라던 황후전에 사내 별감이라니? 애초에 이 일에 대해 해명 받고 싶은 상대는 태형이 아니라는 듯, 윤기의 시선이 태형에게서 황후로 옮겨갔다. 황후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사내가 하나도 없는 것이 불편하여, 신첩이 황상께 주청을 직접 올려 들인 별감입니다.”
황후의 답에도 윤기는 입안을 곱씹었다.
“헌데 한낱 별감주제에 감히, 누구 대화에 끼어드는 것입니까?”
제게 건네진 예의바른 공대, 허나 그 속에 숨겨진 뼈에 사린 신분의식과 차가움이 태형을 옭아맸다. 생각보다 더더욱 기분 나쁜 상대라 태연한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황상과 함께 황궁 밖으로 나갔을 때에도 동행하였던 자라, 제 수족이 되어 그런가 봅니다. 오라버니는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가 황상을 알현하러 지금… 지금 갈 터이니.”
윤기의 청이 아니었더라도 황후는 당장이라도 정국을 만나야만 했다. 황제가 그 치부를 보았는지, 찔러보든 해명을 하든 뭐라도 해야만 했다. 황후가 도미를 부르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윤기가 든 사이에 처소 바로 앞까지 와있던 도미의 대답이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복병에 한숨을 내쉰 태형도 그런 황후의 뒤를 따르기라도 할 듯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너는 여기 있거라.”
허나, 뒤돌아 단호하게 저지하는 황후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태형을 데리고 대명전에 가는 것은 스스로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변명에 진정성이라도 있으려면 혼자여야 했다. 황후전 안에서 별감과 문하시중의 시선이 사납게 뒤엉켰다. 눈치 있게 겉옷을 들고 바로 등장한 도미 덕에, 황후는 어려움 없이 그 사이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황후전엔 더 이상 별감은 필요 없습니다. 이제 그만 물러가세요.”
황후가 나간 황후전. 윤기가 먼저 태형을 향해 나긋하게 말을 건넸다.
“신은 황후전 사람입니다. 어째서 황후마마가 아닌, 문하시중의 말에 따라야 합니까?”
윤기의 매서운 시선이 가늘게 변했다. 일개 별감주제에 필요 이상으로 당당한 태형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황후의 오라비니까요.”
“정말입니까?”
윤기가 이번엔 적의 가득한 시선을 숨기지 않고 태형을 노려봤다. 이 상황에서 정말이냔 질문이 갑자기 튀어나온 연유가 뭐지? 태형이 비소를 띄웠다.
“오라비라면 황후께 일말의 정염도 없는 것인지, 여쭌겁니다.”
“정염, 정염이라.”
이마에 겁 없이 닿던 황후의 손길에도 동요하던 윤기였다. 태형의 말에 윤기의 표정이 되돌릴 수 없이 일그러졌다. 입 안 여린 살을 씹던 윤기가 한숨을 내쉬며 뇌까렸다.
“소소가 또 쓸데없는 짓을 했군.”
그리곤 그의 입에서 나온 ‘소소’라는 이름에 이번에는 태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난 번 서시에서, 소소는 어렸을 적 오라비가 불러주던 아명이라던 황후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황제도 모르는 그 이름을 알았다 들뜨던 것이 비참하게 윤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를 이리 불렀던 모양이었다. 태형이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황후의 앞에선 이리도 하찮은 것에 질투나 하는 필부가 되어버린다. 아아, 부디 정말로 그렇게 살면 좋으련만.
皇后
列傳
“황상께선 안에 계시는가?”
“아, 그것이 폐하께선 아까 황후전으로 행차 하셨사온데….”
황후의 얼굴에 잔뜩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분명 문틈으로 보이던 사람은 황제가 맞았다. 황후가 제 아랫입술을 감쳐 물었다. 지금까지 사랑해 마지않았던 무정한 황제를, 원망이나마 할 수 있었던 건 황후 자신의 마음이 진심이라서였다. 헌데 그 진심은 오늘 정국이 보는 눈앞에서 치부를 만들었고 철저하게 비틀렸다. 황제가 그걸 보고 일말의 동요라도 했을까. 그러지 않았으면 싶다가고, 정말 한 치의 동요도 없었다면 속이 상할 것 같았다. 참으로 모순적인 마음이었다.
황제의 마지막 그 눈동자가 잔상처럼 남아 머리를 어지럽혔다. 분명 그대로 돌아섰다면 먼저 대명전에 도착해 있을 텐데, 황제는 왜 지금 처소를 비운 것일까. 그 뒤로 다른 어디를 들린 것일까.
“폐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안에서 기다리시는 게 어떨는지요?”
다시 황후전으로 돌아갈까 생각하던 황후는 대명전 상궁의 말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길이 엇갈리는 것보단 안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 나을 거란 결론이 났기 때문이었다. 황후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주인 없는 대명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정국의 처소는 그의 성미를 보여주듯 모든 것이 반듯하고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탁상위에 올려진 다기와 수없이 쌓인 상소를 본 황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아비의 일만으로도 곤란한 황제에게 또 다른 신경 쓸 거리를 제공한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서만 정국을 기다리기엔 마음이 불안해서 황후는 불필요하게 처소 안을 서성였다. 침상까진 차마 갈 수 없어 집무실을 오가다, 그 옆에 딸린 서재로 발길을 옮겼다.
평소에도 상소와 서적에 온 시간을 쏟는 정국이었으니, 서재역시 크고 온갖 책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꼽혀있는 수많은 책들을 손으로 훑던 황후가 어느 곳에 잠시 멈춰 섰다. 책들 사이에서 많은 서찰뭉치가 모여 꼽혀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호기심이 들어 조금 높이 위치한 그것을 빼기 위해 발꿈치를 들었다. 책이 워낙 빡빡하게 꼽혀있어 잘 빠지지 않았다. 황후가 더 힘을 주어 당겼다. 힘이 들어가서 황후의 인상이 자연히 찌푸려졌다.
“어….”
죽기 살기로 당기다보니 뽑히긴 한데, 중요한 건 책 한 권 만한 종이들이 빠지면서 그 옆에 꼽혀있던 모든 책들이 우수수 떨어지려 했다는 것이었다. 다시 집어넣으려 해도 소용없었다. 순식간에 제 눈앞으로 둔탁한 책더미가 쏟아지려하자 황후가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다. 허나 몸 위로 느껴져야 할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익숙한 체향과 온기 그 뿐이었다. 황후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어느새 저를 끌어안듯 제 앞을 막아 세운 고아한 푸른 용포가 보였다.
“황상!”
황후의 다급한 부름과 동시에 황후를 끌어안은 정국의 입에선 낮은 외마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위로 책더미가 무수히 떨어져 등을 가격했다. 아프겠다. 생각하기 무섭게, 그 책장에 있던 책들이 다 쏟아지고 굳어진 얼굴을 한 황제는 제 품에서 버리듯 황후를 밀어냈다.
“황상, 괜찮으십니까?”
대체 언제 온 것이지. 게다가 황제는 왜 하필 제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을 때 등장한 것이냔 말이야. 여과 없이 책으로 가격당한 등은 괜찮은지 걱정한 황후가 물었지만 황제는 말없이 몸을 틀었다. 그리곤 서재를 벗어나 탁상 앞, 의자에 앉았다. 황후가 종종걸음으로 그를 뒤따라갔다.
“아직 부상이 채 아무시지도 않으셨을 텐데, 어찌 신첩을 막아 세우신 것입니까?”
이게 본론이 아니란 걸 황후도 알았지만 정말 말이 필요한 일에 대해선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황후는 쓸데없이 정국의 몸걱정부터 했다. 허나 황제는 아무 대답 없이, 탁상 앞에 앉아 다기를 들고 느긋하게 차를 따랐다. 황제는 표면적으로 전혀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황후는 그런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화를 내지도, 상처 받은 티를 내지도 않았다. 황후가 불안할 만큼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정국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굴었다.
“그대가 해명하러 온 건가.”
“…….”
황후가 우물쭈물 말문을 트지 못하고 서있자 정국이 먼저 입을 열었다. 딱딱한 음성에 황후가 놀라 줄곧 바닥을 전전하던 시선을 들고 그를 바라봤다.
“해명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차를 한 번 들이마신 정국이 그런 황후의 시선에 응했다. 오만하고 시린 정국의 눈은 그래도 들어줄 테니 어디 한 번 해명해 보라는 듯 보였다. 그는 늘 무정했지만 이렇게 천자다운 면모를 보일 때마다 황후는 심장 한 켠이 시렸다. 자신을 대하는 황제의 태도에는 늘 사적인 감정이 없다. 황후가 다른 이에게 입술을 내어준 것 따위의 일은, 그에게 별 게 아닌 것 같았다.
“신첩은….”
“그대 아비가 키우는 사병이 총 백만이다. 변방 다섯 개 성의 병력과 맞먹을 규모지.”
“…….”
“사병은 키우는 데도 애가 들지만, 관리도 쉽지 않아. 웬만한 자금력으론 어림도 없다. 허나 그리 비열하고 더러운 수라니…, 그대가 보기에도 우습지 않나?”
황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분명 태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리라 생각했는데 그가 하는 말은 죄다 대승상과 정계에 관련된 일이었다. 황제가 하라는 해명은 우습게도 태형과 입을 맞춘 게 아니라, 대승상이 모략을 꾸민 일에 관해서인 모양이었다. 정적(政敵). 정국은 황후를 자신의 여인이 아니라 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었다. 쓰러뜨려야 하고, 해치워야 하는 걸림돌. 황후가 떨리는 손을 숨기려 의복의 소매를 내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이 날카로워서 그게 더 아팠다.
“…신첩은 정말 그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사옵니다. 믿어주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 순간만큼 백야가 부러운 적이 없었다. 그녀는 황제와 이런 이야길 주고받지 않겠지. 반역도, 사병도, 온갖 권모술수도 없이 그저 연정만을 나누고 주고받겠지. 황후와 황제 사이에 운우지정이 끼어 들 틈은 없었다. 황후는 자신이 그걸 잠시 망각했음을 깨달았다. 황제에게 자신은 황후일 뿐이라는 걸.
“아버님의 사병은 황후전과 일절 관련이 없어요. 만일 신첩이 사병의 존재라도 알고 돕고자 했다면 황후전 자금이 먼저 빠져나갔겠지요. 허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신첩은 진정 몰랐으니까요.”
“…….”
“예. 그럼에도 제 아버님이 친히 행하신 일이라, 신첩도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황제가 평정을 지키는 만큼, 황후역시 이성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더 이상 감정에 휘둘렸다간 자칫 정말 황후전이 흔들릴 수도 있으니까. 황제가 원하는 해명이 이것이라면 황후는 그걸 충분히 해 줄 작정이었다.
“신첩은 황상의 처분을 모두 따를 것입니다. 허나 제 결백만은 알아주세요.”
황후가 제법 또박또박 말을 끝낸 후 정국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정국은 천천히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차의 쓴맛이 입안을 떨떠름하게 감쌌다. 감정 없이 차가운 눈동자가 제 앞의 황후를 천천히 훑었다. 그녀에게 닿는 시선이 집요했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와 의복, 그리고 색 없이 번진 입술이 정국의 시선을 잡아챘다. 일순간 균일하던 황제의 표면에 미약한 흐트러짐이 일었다. 굳은 얼굴이 더 차갑게 식었다.
정국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두운 시야로 자꾸만 생각하기 싫은 장면이 떠올랐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태형의 품에 안겨서 입술을 내어주고 마음도 내어주는 황후라. 피가 거꾸로 솟았다.
“황상.”
느릿하게 잔을 굴리며 입안을 곱씹던 황제가 황후의 부름에 다시 눈을 떴다. 오롯이 망막 속에 맺히는 황후가 자신을 다정히도 발음하고 구슬린다. 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영악하고 순진한 얼굴이 속을 끓게 만들었다.
“허면 이제 그거 말고.”
“…….”
“다른 일을 해명해 보아라.”
무언가 절제하는 듯 정국의 목소리는 잔뜩 억눌린 기색이 감돌았다. 다시금 황후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허공을 방황했다.
“별감을 연모하나?”
“황상.”
“아니면 외로워 잠시 곁만 내준 것이야?”
“…….”
황후의 감정을 조롱이라도 하듯이 잔뜩 비꼬는 어조였다.
“그대의 연모는 참으로 얕고 또 가벼운 것이로군. 과연 짐이 황제가 아니었더라도 짐을 연모했을까?”
“…….”
“황후가 바라는 건 내 마음이 아니라, 그저 그 황후의 자리인 게야.”
“…황상.”
“그러니 별감따위와 혀를 섞고, 마음을 나누고 그 모든 짓을 할 수 있는 것이지.”
해명이 아니라 취조였다. 자신을 향한 마음을 뻔히 다 알면서 정국은 황후의 진심을 난도질 했다. 황후가 미간을 찌푸리고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백야를 품으면서 제게만 탓을 하는 것이 억울해 눈물이 났다. 그리고 일자가 되어 실룩이는 입술이 연심을 토해내지 못해 서글펐다.
“…은애해요. 은애합니다.”
“…….”
“별감이 아니라 황상을, 황상은 그걸 알면서… 왜, 왜….”
별안간 황후는 억울해서라도 전심으로 제 마음을 고백했다. 맨날 짓밟히고 무시당하는 마음이라도 뱉지 못하는 게 더 슬펐으니까. 떳떳한 것이라곤 진심이 다였는데 그것마저 의심받는 게 억울했으니까. 울음 섞인 고백이 정국의 감정에 파동을 만들었다. 자신은 황후와 이런 사랑노름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닌데, 황후는 자꾸만 황제가 꽁꽁 숨기고 있는 환부를 들쑤셨다. 정국이 찻잔을 던지듯 손에서 놓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태연하게 내게 거짓을 잘도 고하는군.”
마주한 황제의 시선이 숨을 옭아맸다. 황후의 눈이 잔뜩 팽창되었다. 허나 정국은 봐주지 않고 돌진했다. 순식간에 황후에게 다가간 정국이 무릎 꿇은 그녀를 일으켜 세워 벽으로 내몰았다. 얇은 의복 너머 등에 닿는 감촉이 차가웠다. 황후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정국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황후의 손목을 쥐고 포박하듯 벽에 몰아세웠다. 짙게 발열된 황제의 눈동자가 낯설기만 했다. 뭐라 입술을 달싹이기도 전에 정국은 황후의 목언저리에 고개를 묻었다. 생경한 감각이 더더욱 낯설어서 황후의 입에서는 외마디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이렇게 황제와 밀착한 적이 있었나. 황후의 귓볼이 당황과 긴장으로 점철되어 붉게 물들었다. 정국은 황후의 살결에 일부러 입술을 가져다 대고 달싹였다. 그녀가 당황해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으로 굳어진 황후의 손에 느릿하게 깍지를 끼며 정국은 천천히 입술을 옮겼다.
“황상, 어찌 이러십니까….”
벽과 황제의 사이에서 꼼짝도 못하는 황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가지 않아 눈앞이 새하얘졌다. 간지러운 감각에 고개를 드는 황후를 따라 정국의 입술도 위로 움직였다. 달큰한 살내음이 이성이 돌게 만들어서, 정국은 참지 않고 그녀의 귓볼을 훔쳤다. 흑. 황후가 급히 품에 안기듯 몸을 움츠리는 것이 느껴졌다. 황제는 한손을 놓고 황후의 의복을 천천히 걷으며 어깨에 입맞췄다. 괜찮다고 어르고 달래듯이.
“황상.”
“어째서.”
뱃속이 뜨거워서 황후가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황후가 자유로워진 한쪽 손으로 급히 정국의 어깨를 짚었다.
“어째서 이리도 거슬리게 구냔 말이야.”
매정할거면 끝까지 매정해야 했다. 황제를 향한 제 감정이 아무리 변하지 않았다 해도, 이미 황제에겐 백야가 있다. 수없이 희망고문 당하고, 수없이 기대하고, 수없이 버려져 보았다. 헌데 그렇게 비참함을 느낄 때마다, 왜 황제는 자꾸만 다시 자신을 저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기대하도록, 제 주제도 모르고 기대에 들뜨도록, 대체 왜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 황후는 정국이 이럴 때마다 울고 싶어졌다. 이것도 똑같았다. 진정 연모해서가 아니라, 황제의 손바닥 안에서만 놀아날 것 같은 자신이 그 안을 벗어나려 드는 게 심기에 불편해서, 그래서라는 걸 황후는 알았다.
“황상께는 백재인이 있습니다.”
“…….”
“제게 마음 주지 않으실 것도, 잘 압니다.”
황후가 눈을 꼭 감았다. 목소리가 정처 없이 떨려오고 있었다. 저를 안듯이 밀어붙이고 귓전에 뜨겁게 속삭이는 정국이, 그 애끓는 음성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헌데도 그 애정 어린 행동을 곧이곧대로 받아드릴 만큼, 순진하고 철없는 황후가 아니었다. 체념한 얼굴로 제 품에 안겨있는 황후를 보던 정국이 입술을 떼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황후는 곧 다리에 힘이 풀린 것만 같았다. 이렇게 온 몸으로 황제의 온기를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변했구나.”
“…신첩은 단 한 순간도 변한 적 없습니다.”
이번엔 황제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황후는 동요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변했다.”
“황상.”
“네가 정말 변함없다면,”
“…….”
“밀어내었어야지….”
눅진한 황제의 음성, 그리고 깍지 낀 손을 쓰다듬는 그 손길이 답지 않게 자꾸만 애틋해서 황후는 한참 지난 후에야 정국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요치 않을 것이라던 황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곧 무너질 듯한 슬픔으로 물들었다. 아아, 하는 맥 빠진 탄식만이 입 안을 쌉쌀하게 맴돌았다.
정국이 서서히 고개를 떼고 얼굴을 들었다. 황후의 시선과 황제의 그 두 눈이 정처 없이 맞물렸다. 탁하게 흐려진 황제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황후는 걷잡을 수 없이, 더 없는 나락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황제가 동요하고 있었다. 태형에게 입술을 내어준 자신에게 투정이라도 부리듯이, 왜그랬냐고 질책이라도 하는 듯이.
“짐을 정말 연모한다면,”
“황상….”
“짐을 믿고 기다려 주었어야지….”
황제가 이리도 무너질 듯한 얼굴을 보여준 적이 있었나? 황후는 울고 싶어졌다. 항상 제게 상처 주던 황제였다. 황제가 지금 느낄 감정 따위. 황후는 매일매일 그걸 느끼고 고통을 맛보며 살았다. 헌데 어째서, 황제의 이런 얼굴에 억장이 무너질 수 있단 말인가.
황제는 저를 연모하지 않는다. 황제가 연모하는 것은 첩지를 받은 백야 그 뿐이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갑자기 들이닥치는 파문에 황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처 없이 떨리는 황후의 눈동자와 달리, 금방 감정을 갈무리한 황제는 태생부터 황제답게 시선을 느릿하게 굳혔다. 숨을 뱉을수록 속이 타고 당장이라도 이대로 끝을 보고 싶었지만 황제는 절제를 아는 사람이었다.
“황후.”
그 어느 때보다 담담하게 나온 부름에 황후는 두려움을 느꼈다.
“처분을 내리겠다.”
“…….”
“석고대죄 하여라. 그리고 네 가문에 내릴 벌을 기다려. 이것이 짐이 마지막으로 네게 베푸는 관용이다.”
석고대죄. 일의 크기에 비해 가볍다면 가벼운, 허나 황후라는 고귀한 신분에게는 더없이 잔인한 벌이었다. 허나 황후는 석고대죄라는 처분보다, 완전히 식어버린 정국의 표정에 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잡은 손을 놓고 벽으로 밀어 세웠던 황후를 놓아준 정국은 망설임 없이 뒤 돌았다. 푸른 용포를 흩날리는 황제의 뒷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멀게 느껴졌다. 다신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뒷모습이라서… 황후는 그대로 벽을 타고 주저앉았다.
“황후마마. 날이 이리도 흐린데, 곧 비가 올 것입니다! 헌데 어찌….”
지엄하고 고고한 주나라 황제의 대명전 앞. 돌 하나도 정교하게 놓은 대명전 앞에서 황후는 거적을 깔았다. 새빨간 의복을 입은, 고귀한 황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바로 그 거적이라 도미는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차라리 황후전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금족령이나 어디 행궁으로 잠시 유배라도 가는 것이 나았다. 황후에게 석고대죄라니. 이토록 비참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도미는 당장이라도 황후를 말리고만 싶었다.
“마마! 정말 하실 겝니까?”
“의복 벗는 것을 도와라.”
도미의 애타는 외침이 무색하게, 황후는 너무도 차분한 음성으로 명했다. 위엄을 상징하는 의복을 벗고 얇은 적삼차림으로, 거적 위를 무릎 꿇고 엎드려 있어야 하는 석고대죄는 순식간에 그 위엄을 떨어뜨리는 것과도 진배없다. 애당초 소문이 좋지 않은 황후전인데 이번 일로 주위 사람들이 황후를 얼마나 쉽게 볼지 물 보듯 뻔했다.
“…황후마마.”
“황상의 명이다. 어서 옷을 벗기라 하지 않니?”
황후의 단호한 명에 어쩔 수 없어진 황후전 나인들이 침통한 얼굴로 황후의 의복을 걷기 시작했다. 옥대를 풀고 그 새빨간 당의를 벗기고 머리에 화려하게 꼽힌 봉잠과 머리장식을 뽑아냈다. 사치스런 의복과 장식품에 몸을 숨기던 황후는 비참하게 무릎을 꿇었다.
“마마.”
살갗이 비치는 적삼위로 찬공기가 닿았다. 헌데도 황후는 내색 않고 가만히 꿇어앉았다. 황후전의 모든 상궁나인들이 황후를 향해 절을 했다. 대승상의 여식이자 문하시중의 누이라 닿을 수 없을 만큼 고귀하다던 황후가 덧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에, 지금 황후께서 정말 석고대죄를 하시는 거야?”
“폐하의 총애를 받던 백재인마마도 품계를 받은데다 석고대죄라니… 황후전 위상이 땅에 떨어지겠구나.”
평소 황후가 무서워 황후전 근처로 발걸음 한 번 하지 않던 나인들이 거적에 엎드린 황후를 더러 수근 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도미가 야무지게 그들을 물리기 일쑤였지만, 황후는 그 어떤 동요도 없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머리가 무겁다. 따라 무거워지던 구름이 쌓이고, 오후가 된 황궁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마! 비가 옵니다. 이를 어찌합니까!”
굵은 빗방울이 적삼 하나 걸친 황후의 몸 위로 떨어지자 안절부절하던 도미가 우산을 가져와 황후를 씌웠다. 허나 그것도 잠시, 황후는 우산을 든 도미를 물리려 하였다.
“나는 지금 벌을 받는 중이다. 우산을 치우고, 최고상궁과 항아들도 당장 돌아가렴.”
“마마….”
“어서.”
황후의 고집을 모르지 않았기에, 도미는 미련 가득한 시선으로 황후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우산을 거두고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오롯이 혼자 남은 황후. 아프다고 느낄만큼 거센 비가 적삼을 적시고 온 몸이 시려왔지만 황후를 이를 악 물고 견뎠다. 그녀가 똑똑히 노려다보고 있는 대명전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황후전 나인들이 모두 돌아간 가운데, 유일하게 처마 밑에서 황후를 담담하게 바라보는 이는 태형이었다. 무작정 황후에게 가 비를 막아주지도, 석고대죄를 끝마쳐 주지도 못하는 태형은 제 처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다른 이 앞에서 비참해져 본적 없었을 황후였다. 헌데 황제의 한마디에 황후는 어김없이, 가차 없이 그 어려운 일을 감행했다. 황제는 황후에게 정녕 그런 존재인건가. 태형이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비가 와 이 쪽 길을 지나는 이는 잘 없으니 그건 다행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마! 천천히 가십시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대명전 앞이 급작스레 소란스러워 진 것은.
태형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지난 번 보았을 때처럼 고운 의복을 차려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백야가 우산을 씌워주는 상궁의 시중을 받은 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설마 황제를 알현하러 온 것인가? 아니면 제 주제에 황후에게 우산이라도 씌워주려고? 의도야 어떻든 백야의 등장은 상당히 달갑지 않았다. 태형에게는 더더욱.
“어서 가자. 빗줄기가 상당히 세구나.”
헌데 그런 백야, 아니 이젠 백재인이 된 여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태형이었다. 백야가 갑작스런 태형의 등장에 고개를 들어 태형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말을 먼저 꺼낸 것은 백야도, 태형도 아닌 백야의 뒤에 서있던 상궁이었다.
“어허, 지금 감히 백재인 마마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냐?”
“백재인이라.”
상궁의 호통에 태형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상궁보다 낮은 항아에서 순식간에 후궁의 자리에 오른 황제의 백야라. 생각 할수록 황후에게 비통한 일이 아닌가.
“너는 누구냐?”
어느새 하대가 익숙해진 백야가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태형은 황후를 마주할 때처럼 순순한 시선이 아닌, 제법 반항기 어린 얼굴을 하고서 백야를 내려다보았다.
“신은 황후전 별감입니다.”
“아니, 별감 따위가 지금 황제폐하의 후궁 앞을 가로막는 것이란 말이야? 어서 비키지 못할까!”
황후전 별감이라는 말에 더 기겁한 상궁이 아까보다 두 배 더 크게 호통 쳤다. 허나 태형은 비켜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젠 백야가 인상을 살짝 구겼다.
“백재인 마마께서 지금 어딜 가시는지, 신이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이 놈이…!”
태형의 당돌한 질문에 또 한소리 하려는 상궁을 저지한 백야가 입을 열었다.
“내명부의 수장이신 황후마마께서 석고대죄를 하고 계시는데 후궁인 내가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
“그래서…우산이라도 씌워 드리게요?”
“그래. 그리고 폐하께 비도 내리는데 황후마마의 석고대죄를 멈추어 달라 청할 것이야. 폐하께서 내 말을 꼭 들어주실 게다.”
기가차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말 저대로 행한다면, 만약 백재인의 청을 황제가 들어준다면, 세간에 백씨는 더 없이 현숙하고 황제의 총애까지 받는 여인으로 알려질 것이 뻔했다. 반면 황후는 황제에게 총애 받지 못하는 데다 후궁에게까지 도움 받는 아주 비참한 여인이 되어버릴 테지. 가장 중요한 것은 황후 스스로가 그걸 견디지 못할 것이다.
눈앞의 백야 따위가 황후를 그리 만들 수는 없다. 태형이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니까.
“돌아가십시오. 황후마마께서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니, 그걸 네가 어찌 안단 말이야?”
태형의 단호한 말에 또 백야의 뒤에 있던 상궁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끝까지 화 한 번 내지 않고 잠잠하게 있던 백야가 이번에도 싱긋 웃었다.
“웃전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아주 보기 좋구나. 허나 나만이 폐하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 네 주인이 저리 비를 맞으며 황궁의 웃음거리가 되어도 좋단 말이냐?”
자신만이 황제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리 단언하는 말에서 자신감이 흘러 나왔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태형에게는 하나도 효력 없는 자신감이었다. 태형이 헛웃음쳤다. 황후를 더러 ‘웃음거리’라 칭하는 백야는 정말 순진하게 아무것도 모른 채 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황후를 알게 모르게 깎아 내리려 하는 말인지 모호하게 태형의 화를 돋구었다.
“비키거라. 내 황후마마께 갈 것이니.”
도도하게 눈을 내리깔며 비키라 말하는 백야. 아마 이 정도까지 했으면 태형이 순순히 비키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허나 태형은 예상치 못하게 백야의 팔을 잡아 당겼다. 백야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식간에 백야의 옷자락을 잡고 얼굴을 바로 마주한 태형이, 아주 사나운 눈을 하고서 백야를 노려보았다.
“아니…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백야의 뒤에 서있던 상궁나인들이 기겁을 했다. 백야 역시 당황해 말을 더듬었지만, 태형은 아주 태연하고 굳은 얼굴로 담담히 백야를 향해 뇌까렸다.
“넌 절대 황후마마를 비참하게 만들 수 없다. 너와는 태생부터 다른 사람이니까.”
“…….”
“알아들었으면….”
“…….”
“잔말 말고 당장 꺼져.”
十二.
“태부(太傅)가 대승상과 척을 지기로 한 모양이더구나?”
“예?”
“여태까지 조정에서 대승상의 의견에 반대할 생각을 하는 신료들은 없었다, 헌데 태부가 이번에는 대놓고 반기를 들었다 하지. 나 참 대체 무슨 생각인지.”
태후는 황궁 안의 사사건건한 일에도 빠삭한 만큼, 정치적인 면에서도 부진하지 않았다. 신진 세력을 다수 보유한 태부와 선황 때부터 조정을 꽉 잡고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을 자랑하는 대승상, 황후의 부친…. 아. 지민은 태후의 말을 곱씹다가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대승상과 태부의 정치 싸움. 단지 그 뿐만을 전해들었을 뿐인데 거기서 황후를 또 생각해 버렸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었다.
“왜 그러니?”
지민의 구겨진 얼굴을 보고서 태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지민은 시선을 다잡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 때, 단란한 다과를 방해하는 이의 등장이 일었다. 태후전 상궁이 고개를 예의바르게 숙인 채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었다. 태후의 얼굴에 의아하다는 기색이 어렸다. 상궁은 다시 한 번 태후의 앞에서 읍을 하고는 그녀의 귓전으로 다가와 무언가를 속삭였다.
“마마, 그것이….”
상궁이 소곤소곤 전하는 말에 태후의 표정이 놀람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환한 미소로 들어찼다. 지민은 굳이 신경쓰지 않고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세상에, 황궁에 아주 재밌는 일이 일어났구나! 어서 구경을 가야겠다.”
상궁의 말을 다 전해들은 태후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흥미로운 일의 등장으로 마치 소녀처럼 들뜬 태후는 평소보다 환하게 웃었다. 헌데 그런 태후가 저 혼자 가지 않고, 지민을 바라봤다. 안 일어나고 뭐하느냐는 태후의 표정에 지민이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저도 갑니까?”
“그럼. 너에게도 아주 재밌는 일이 게다. 황후가 대명전 앞에서 석고대죄를 한다지 뭐니.”
무덤덤하던 지민의 얼굴에 감정의 파동이 일었다. 태후의 입에서 천진난만하게 나온 ‘황후’와 ‘석고대죄’가 당최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서였다. 지민은 더 이상 앉은 자리에서 고민하지 않았다. 익위사 지민,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태후가 입꼬리를 예쁘게 올리며 먼저 태후전을 나섰다. 자연스럽게 온 상궁들이 옆에 몰려들어 태후에게는 차양막을, 지민에게는 우산을 씌워주었다. 지민은 우산 밖으로 손바닥을 내밀어 빗방울을 가늠해 보았다. 이렇게 거센 비가 쏟아지는데 석고대죄라니… 마음과 얼굴이 온통 불안감으로 물들었다.
“세상에… 저게 정말 황후란 말이냐?”
그리고 그런 황후를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을 때는, 불안감 따위의 감정만 덮치는 것이 아니었다. 감정이 아니라 고통이다. 어째서 황후가, 얇은 적삼을 하나만을 입고 비를 온전히 맞으며 무릎 꿇고 있단 말인가. 잘게 떨리는 어깨가 위태로웠다. 대체 몇시진 째 저러고 있는 것인지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 지민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황후에게 가만두지 못하고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태후를 바라봤다. 집요한 시선에 태후가 고개를 돌려본다.
“왜 그렇게 보느냐?”
“태후께서 석고대죄를 멈추어 주소서.”
별안간 지민답지 않게 생각한 곧이 곧대로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만큼 다급했고 무엇을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공손하고 또 전혀 안절부절 못하는 지민의 태도에 태후는 잠시 멍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빗소리만 아니었다면 대명전 앞을 카랑카랑하게 울렸을 큰 웃음소리였다. 지민이 태후의 반응에 미간을 좁혔다.
“내가 무슨 수로 석고대죄를 멈추겠니? 황상의 명이다. 이 황궁에서 황상의 명을 거스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 보아라. 그리 위세가 높다던 대승상의 여식마저 황상의 말 한마디에 석고대죄를 하고 있잖니.”
이 황궁에서 황제의 명을 거스를 수 있는 자는 없다. 그 한마디가 익위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황후는 정말 황제가 황제라서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 라는 대답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와서 더 고통스러웠다. 황후는 그가 천자가 아니었더라도 그의 말대로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구할 수 없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자신은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헌데, 익위사 너….”
“…….”
“황후를 연모하는 구나?”
명백한 사내의 눈으로, 그것도 잔뜩 상처 받은 얼굴로 저 멀리 무릎 꿇은 황후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지민은 별안간 태후의 목소리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네가 대신 석고대죄라도 해주고 싶니? 황후를 저리 만든 황제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 분개하고 싶고? 저리 비를 맞는 황후를 보니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지는 않니?”
지민이 고개를 돌려 태후를 바라봤다. 태후가 내뱉는 말은 하나같이 제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 익위사의 눈빛이 더 세차게 요동쳤다. 연모? 모시는 주군의 여인에게 감히 어떻게…, 허나 곧장 부정할 수 없었다. 분명 아니라고 답해야 하는데 입은 닥친 채 말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태후가 그런 지민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지푸렸다. 이미 태후는 지민의 마음을 확정지은 모양이었다.
“연모로구나. 아니 익위사 네가 어쩌다 황후를?”
아아…. 지민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힘을 준 주먹이 떨려왔다.
“…함구하여 주십시오.”
“…….”
“폐하와, 황후께 전부.”
지민의 목소리가 난생 처음으로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걸 알아챈 태후는 흐음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태후의 눈길이 황후를 너머 다른 곳을 향했다.
“좋다. 대신 내게 저 상황은 또 무엇인지 익위사 네가 설명해다오.”
태후의 말에 지민의 시선도 태후를 따랐다. 대명전 마당 한 중앙에서 석고대죄하는 황후를 사이에 두고 옆쪽 처마에서 황후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 아니 태형. 지민이 짙은 눈썹 사이를 일그러뜨렸다. 저 별감은 황후가 있는 곳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심기가 여간 불편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별감입니다.”
“별감? 대명전 소속의?”
“아니요. 유일한 황후전 별감입니다.”
허. 태후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대체 그 어마어마한 사실이 어째서 제 귀엔 들어오지 않은 것이지? 황후가 입궁한 이후로 단 한번도 꺾이지 않은 금남의 구역에 사내가 들었단 말이야?
“허면 백재인은 왜 저리 굳은 얼굴로 오고 있는 지도 아느냐?”
태후가 표정은 환히 웃으며 작게 물었다. 설상가상. 어느새 상궁들을 대동한 ‘백재인’역시 그 처마에서 나오고 있었다. 헌데 웬일인지 백야의 표정은 단단히 굳어있었다. 작은 얼굴을 찌푸린 백야는 태후를 발견하곤 금세 표정을 숨기며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태후마마를 뵈옵니다.”
“오, 백재인. 재인께선 여기에 무슨 일로? 폐하를 뵙고 오시었나?”
형식적인 태후의 물음에 지민은 불현 듯 백야가 석고대죄하는 황후를 보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금방 품계를 받은 후궁에게 황후의 치부를 보여주다니, 상당히 불쾌하고 화가 난다. 백야는 맑게 웃었다.
“아뇨, 폐하께 황후마마의 석고대죄를 멈추어 달라 청하러 왔사온데… 그러지 못하고 물러가옵니다.”
백야의 목소리에 연약한 물기가 어렸다. 저런, 이렇게 태후의 입에서 안타까움의 감탄사가 새어 나오도록. 헌데 백야의 말을 잘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다. 황제와 황후도 모다 백야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인데, 자신이 왜 그런 청을 올린단 말인가? 주제를 몰랐다. 지민이 작게 혀를 찼다.
“웃전을 생각하는 백재인의 마음씀씀이가 아주 기특하군요.”
“과찬이시옵니다. 허면 신첩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그래요.”
태후의 인자한 웃음을 받은 백야는 다소곳이 무릎을 살짝 굽혀 읍한 후 대명전 마당을 벗어났다.
“저 아이… 맹한 줄만 알았건만 영악한 면이 있구나.”
“헌데 어찌 반응이 그리 유하신 것입니까?”
태후는 백야의 속을 훤히 꿰뚫었음에도 인자하고 친절한 얼굴로 백야를 대했다. 비를 맞는 황후와 상궁에게 우산시중을 들어 의복 한자락 젖지 않은 백야를 생각하던 지민은 기분이 상하여 딱딱한 어조로 태후에게 물었다.
“백야가 영악한 것이, 내가 그 아이를 싫어할 이유는 아니란다. 황궁에서 살아남으려면 누구든 영악해져야만 하지.”
“…….”
“게다가 백야는 황후만큼 어여쁘지도 않잖니. 나는 그래서 백야가 좋다.”
태후가 산뜻하게 웃었다. 이유가 워낙 어이없고 태후다운 것이라 지민은 헛웃음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 비는 여전히 줄기차게 쏟아졌다. 가뜩이나 몸도 약할 텐데, 걱정이 된다. 저 굳건한 대명전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익위사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질 때쯤이었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꿈만 같이 대명전의 문이 열리었다.
“황상역시 성인군자는 못되시는구나.”
그럼 그렇지 하는 태후의 예상과는 달리, 그 문에서 나온 것은 정국이 아니었다. 아주 급하게 발을 놀려 계단을 내려오는 자는 내시백. 황제의 수족이었다. 태후와 지민의 얼굴에 의아하다는 기색이 어리었다. 게다가 그 내시백은 작은 우산을 들고서 황후를 지나쳐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지민을 발견한 내시백이 빠르게 달려와 그 앞에서 멈춰 섰다.
“익위사, 마침 여기에 있었군. 폐하의 명이 떨어졌다.”
“무엇입니까.”
“그게 좀 갑작스러울 수는 있는데… 너더러 황후마마의 석고대죄를 멈추고 황후전으로 모셔가라신다.”
내시백의 말대로 너무 갑작스러워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지민의 얼떨떨한 표정 다음으로 태후의 웃음소리도 따라 들렸다.
“황상이 익위사 너를 이만큼이나 신뢰하는 모양이다?”
동감하는 바다. 어떻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무슨 일이 날 때마다 제게 황후를 맡기는 것이지? 석고대죄를 멈춰주는 것은 정말 하해와 같은 은혜지만 왜 하필 저란 말인가. 아아. 지민이 곤란한 눈으로 황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찌 지금까지 버틴 것인지 가상할 만큼 위태로워 보이던 황후가 무너졌다. 황후의 여린 몸이 거적위로 고꾸라진 것이었다.
“황후마마!”
잠시 고민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지민은 곧장 달려갔다. 헌데 ‘곧장’이 적용된 것은 익위사 뿐만이 아니었다. 처마 밑에서 황후를 보고 있던 태형역시 황후가 쓰러지는 것을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달려 나왔다. 황후의 곁에서 지민의 눈동자가 태형과 맞물렸다.
“비켜서라.”
“그리 할 수 없습니다.”
지민의 목소리는 평소 그랬듯 무덤덤하고 차가웠다. 태형의 끓어오르는 눈빛이 오히려 그것을 받아쳤다. 하아. 지민은 인고의 한숨을 참아냈다.
“황제폐하의 명이다. 한낱 별감이 어찌 황명을 거스르려 해. 네 행동이 황후마마를 곤란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러는 건가?”
“…….”
황제의 앞에선 익위사인 저도, 별감인 태형도 한낱에 불과하긴 매한가지다. 지민은 스스로가 가증스러웠다. 황명이라는 껍데기 안에 결국 황후를 별감에게 내어주지 않겠다는 사심을 채워 넣는 것이었으니까. 태형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제 행동이 황후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자 물 불 가릴 것 없다던 생각이 흔들렸다. 결국 태형은 반쯤 꿇었던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산도 없이 달려와 태형과 지민에게 비가 여실히 떨어지고 있었지만 둘 다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지민이 비를 맞으며 황후에게 다가갔다.
“…익위사인가?”
헌데 쓰러진 줄 알았던 황후가 미약한 음성을 내뱉었다.
“예. 마마.”
지민은 황후의 말에 답하며 그녀의 머리맡에 손을 끼워 넣었다. 저번처럼 안아 올리려는 것이었다. 헌데 황후가 그 손을 잠시 저지했다.
“황상은 어찌하고 계시느냐?”
“…폐하께선 대명전 안에 계십니다.”
황후의 신호에 아직 그녀를 안지 않은 채 지민은 덤덤히 대답했다.
“그렇구나. 허면 별감은?”
“신은 여기 있사옵니다. 마마.”
이번엔 한 발 물러서 있던 태형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어느새 황후의 힘없는 입가엔 흐린 미소가 서려 있었다.
“아아, 그래. 그런데 익위사. 내 부탁이 하나 있는데.”
“무엇이든 하명하소서.”
“내가 너무, 너무 창피…한데 혼자 움직일 힘이 없구나. 그래서 네가 내 눈을 좀 가려주었으면 하는데….”
이토록 나약하던 황후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태형은 그런 황후의 모습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이 순간에도 그녀를 직접 일으켜 주지 못하는 제 처지가 이토록 한탄스러울 수 없었다. 지민역시 그와 비슷한 심경이었지만,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리 와 날 안아다오.”
지민의 긍정어린 답에 힘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린 황후가 애살스럽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아, 이러면 좀 곤란한데. 분명 황후의 말은 단지 안아서 자신을 옮겨달라는 의미인 줄 알았음에도 중의적인 표현은 익위사의 심장을 뜨겁게 불살랐다. 지민은 애써 그런 기색을 숨긴 채, 황후의 등 뒤로 두 손을 그러넣었다. 황후가 지민의 뒷목에 팔을 감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 묻으십시오.”
대명전에서 황후전까지는 아주 먼 거리였음으로 그까지 가는데 누구를 얼마나 만날지 알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창피하다는 황후를 위한 지민의 배려에, 황후는 망설임 없이 익위사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비냄새와 지민의 편안한 냄새가 섞여 기분이 포근해졌다. 지민은 깍지를 끼고 황후의 다리를 받힌 채 일어났다. 곧장 눈이 마주친 태형이 마지막으로 잔뜩 상기된 채 굳은 얼굴을 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망측… 하다 해야 하나, 아니면… 그 용기가 가상하다 해야 하나?”
태후역시 말문이 막혔다. 감히 황후를 저 적나라한 자세로 안아 든 익위사를 대단하다 해야 할지 무모하다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익위사에게 저리 저돌적인 면모가 있었다니. 세상에.”
태후의 놀란 모습이건 만나는 상궁나인들의 수근거림이건 아무것도 상관이 없었다. 제 품에 안긴 황후가 색색대는 일정한 숨소리를 뱉으며 안정된 것이 느껴지자 지민은 저역시 마음이 놓였다. 허나 가끔가다가 황후가 고개를 살짝 달싹이며 그 숨결이 목언저리에 닿을 때면, 지민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 황후전이 구석진 곳에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리도 멀다니.
“익위사, 괜찮니?”
“아무런 말씀도 하지 마십시오.”
황후가 고개를 살짝 떼고서 지민을 살폈다. 괜찮다는 그 물음에도 입술이 움직이는 게 생경하게 느껴져서 눈을 지그시 감은 지민의 목울대가 끓어올랐다. 알겠다. 굳은 지민의 얼굴에 눈을 동그랗게 뜬 황후가 급히 다시 고개를 묻었다. 그렇게 한참만에야 황후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 아니 마마, 황후마마!”
역시나 황후전에서는 도미가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곤 그냥 안아 든 것도 아니고 황후를 아주 대놓고 끌어안은 채 걸어오는 지민을 발견하고는 도미의 눈이 세상 그 무엇보다 크게 팽창되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도미야.”
“뭣하느냐! 어서 황후마마를 내려드려라!”
황후가 지민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고 도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도미는 익위사에게 얼른 황후마마를 내리라며 호통에 호통을 쳤다. 한숨을 내쉬던 지민이 황후를 내리려 했고, 도미가 황후를 부축하려 했다. 헌데 황후는 지민의 뒷목에 감은 손을 풀지 않았다.
“걸을 힘이 하나도 없다. 나를 처소 안까지 데려다다오.”
“아니 마마 어찌 이러십니까. 이걸 다른 이가 보기라도 하면… 아니 폐하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이미 많은 이가 이 꼴을 보았다. 그리고 익위사를 내게 보낸 것은 황상이시니라.”
황후의 당당한 대답에 도미가 뒷목을 잡았다. 오랜 석고대죄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힘 하나 없어 보이는 황후였지만 어쩐지 모든 것에 체념한 듯 편함만을 추구하는 황후는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황후의 말에 하는 수 없어진 지민은 그대로 황후를 데리고 계단을 올랐다. 그런 황후와 지민을 힐끗힐끗 쳐다보던 항아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유일한 황후의 공간, 황후전 안에 들어온 지민은 그 비단금침위에 황후를 조심히 뉘었다.
“고맙구나. 정말.”
“아닙니다.”
참지 못하고 눈꺼풀을 감은 황후가 입술만 열어 나직하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 작은 얼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던 지민은 곧장 뒤돌아서 황후전을 나서려고 했다.
“익위사.”
허나 황후의 부름에 그 발걸음은 다시 멈춰서고 만다.
“예. 황후마마.”
“폐하의 진심이…무엇일까?”
“…….”
“난 정말 하나도 모르겠구나. 황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게 어떤 마음인지….”
황후의 음성이 금방 꺼질 듯 미세하고 정처 없이 흔들렸다. 익위사가 마른 침을 삼켰다.
“황제폐하를, 연모하십니까?”
“그럼. 그걸 말이라고? 황상은 내 생명의 은인이자, 하나뿐인 지아비이자, 유일한 천자시니라. 연모할 수밖에….”
황제를 향한 무조건적인 헌신. 이라는 비수를 익위사의 가슴에 박아 넣은 황후는 그 말을 끝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지민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황후의 말을 곱씹었다. 저 고귀하고 가련한 여인의 초련은 황제 하나뿐이었다.
皇后
列傳
“황후전 별감이라 했습니다. 당장 그 자를 벌해 주세요!”
백야는 제 손에 들린 찻잔을 부술 심산인지 온 힘을 다해 꽉 쥐었다. 한낱 천한 별감 주제에 그 오만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감히 꺼지라는 무례한 소리를 짓걸인 태형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거기서 뺨이라도 내려치는 것인데. 너무 당황해서 그냥 돌아와 버렸다. 백야는 처소에 와서도 그게 너무 분하고 억울해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재인첩지나 받으신 분이 그런 사사로운 일에 신경 쓰실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백야의 반응에 잔잔히 웃던 태부는 느릿한 손길로 찻잔을 들어 깊이 음했다. 이 곳, 백재인의 처소에 전혀 관련 없는 것 같은 대신 태부가 들었다. 태부의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아주 주기적이고 잦게 백야를 찾아오는 태부. 원래 황궁에서의 모략은 아주 뜻밖으로부터 나오는 법이다.
“아무래도 황후를 폐위시키는 것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아.”
“분명 우리 측 신하들이 황후의 폐위나 유배를 적극적으로 청했는데, 폐하께선 석고대죄를 명하시고 말더군요.”
대승상의 이번 음모는 상당히 치명적인 것이라 황후를 쉽게 잘라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아무래도 크나큰 착각인 모양이었다. 백야가 이를 바득 갈았다.
“석고대죄. 겉으로 보기엔 명예가 다인 황후에게 그 무엇보다 가혹한 처사지요. 허나 그것만큼 가벼운 벌도 없습니다. 오랫동안 황궁을 비우는 유배나 아예 세력을 잘라내는 폐위와 달리 아주 일시적이고 타격 없는 벌이니까요. 폐하께서 머리를 아주 잘 쓰셨습니다. 황후전을 그리 감싸시다니.”
태부는 애초에 대승상과 황후 세력에게서 돌아섰다. ‘대승상’이라는 독보적인 존재 앞에서 빌 붙어봐야 자신은 일개 대신에 지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보단 오히려 무모 할지는 몰라도 자신의 세력을 만드는 것이 낫다.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적당히 멍청하고 또 적당히 힘이 있는 백야는 그런 태부에게 아주 걸맞는 세력이었다.
“허면 이제 어찌합니까?”
“마마께서 이제 첩지도 받으셨으니 저쪽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대승상은 불안과 걱정이 많은 사람이니까요. 대승상과 황후쪽에서 먼저 반격을 가해 올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마 그리 먼 일이진 않을 것입니다.”
백야와 태부는 아주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 꿈이 현실로 다가 올 날은 머지않았다. 점차 세력의 밑바탕을 잃고 있는 대승상은 곧 그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거사를 치룰 것이다. 그 때 황제의 곁에서 ‘공신’이 되어 천하를 가지면 되는 것이다.
“저는 무얼 하면 됩니까?”
“마마께서는… 앞으로 다가올 연회를 위해 아름답게 치장만 하시면 됩니다. 이참에 황제의 마음을 제대로 앗아 황후와의 합방마저 방해한다면 일이 아주 재밌게 되겠군요.”
태부의 말에 백야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 황 후 열 전 熱 血 皇 后 /
연재텀 정말,,, 뭐라 말씀드리기도 민망할 지경 (헛웃음)
그래도 우선 내용이 큰 틀부터 세세한 것까지 조금씩 수정되고
있기 때문에 전에 보셨던 분들은 좀 다른 걸 느끼실 거예요!!
그리고 저번 편 투표에서ㅋㅋ 예상외로 어남국 지지자분들 너무
많아서 한 번 놀라고, 비회원으로 보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놀랐습니다ㅋㅋㅋㅋ 이젠 결말이랑 큰 시놉시스들은 다
짜놨는데,,, 저도 결말 너무 보여드리고 싶은데,,, 빨리 쓸 수 있
을지가 걱정..... 우선 다음편은 이번 주말내로 업데이트 될 예정
입니다(사실 이렇게 떠벌려놔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씀 드립
니다ㅠㅠ..)
아 그리고 작게 Q&A합니다!! 댓글로 궁금하신 것 물어봐 주세
요!! 많이 사적인 질문이나, 답변이 곤란한 질문, 앞으로의 전개
에 대한 스포만 아니라면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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