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三 화
十四 화
十五 화
(도미와 황후의 장면에서,)
(백야와 황제의 장면에서 들어주세요!)
十三.
“폐하, 익위사가 황후마마를 모시고 갔사옵니다.”
“…….”
“명하신대로 황후께 태의도 보냈고, 황후전에 심어놓았던 서나인에게 적당히 지참금을 챙겨주며 시키신 명을 전했사옵니다.”
내시백이 차례대로 보고했다. 모두 황제의 명대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황제는 별다른 반응 없이 상소문을 읽는 데에 집중했다. 그런 정국의 눈치를 보던 내시백은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물러가는 듯하더니, 이내 잠시 머뭇대며 황제에게 입을 열었다.
“헌데 대체 그런 명은 왜 내리신 것인지….”
황후가 석고대죄를 하는 동안 정국은 홀로 생각하고 홀로 결단을 내렸다. 대승상이 사병을 키우고 있다는 것은 언제든 황제를 칠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 언젠가는 그와 결판을 내려야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거사가 앞당겨질듯했다. 게다가 황제를 조급하게 하는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태형의 존재였다. 영원히 그 자리에서 가만히 황제를 기다릴 것 같던 황후가 태형의 등장에 흔들렸다. 그건 황제가 직접 목도한 광경이었다. 그래서 정국은 결심한 바를 서두르려 했다.
“내시백은 짐이 왜 그런 명을 내렸다고 생각하지?”
“…황후전을 침을 통해 대승상을 치시려는 게 아닙니까?”
판단을 끝마친 정국은 내시백을 통해 자신이 황후전에 심어놓았던 서나인에게 명을 내렸다. 그 명은 서나인은 물론 내시백마저 당황하게 만들었다. 특히 정국에게서 황후를 향한 일말의 애정을 느꼈던 내시백은 심히 황당했다. 황명의 내용이 전혀 말이 되지 않아서였다. 정녕 황제가 황후전을 나락에 빠뜨리려함인가? 대승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허나 나온 대답은 부정이었다.
“틀렸다.”
황제의 의중은 좀처럼 짐작하기 쉽지 않았다. 천자의 명민함도 한 몫 했지만 그의 알 수 없는 감정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시백이 더욱 의문스러운 얼굴을 했다. 황후를 치려는 게 아니라면 대체 그런 가혹한 명을 내린 연유가 무엇이지?
“대승상을 쳐서, 황후전을 구하려는 것이다.”
“예?”
“단지 내 이기심이다. 난 잃는 법을 몰라. 황후도, 대의도, 그 무엇도.”
잠시 정국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황제의 계획을 파악하는 데 실패한 내시백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아랫것은 아랫것답게 그저 시킨 일을 잘 수행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시백은 황제를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고개를 들어 그런 내시백의 얼굴을 빤히 보던 정국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내시백, 너는 짐의 아주 충성스런 수복이 아니냐?”
“그럼요. 그 아무도 소인의 충심을 곡해하지 못합니다. 폐하를 위해서 이 한 몸도 불사를 수 있사옵니다!”
뜻밖인 황제의 질문에 내시백은 수심스럽던 표정을 거두곤 아주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잠시 이마를 짚던 정국은 득의양양한 내시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헌데 내시백 네게 노모와 누이동생이 하나 있다 하였지?”
“예, 그렇사옵니다.”
“허면, 짐이 네 노모와 누이의 목을 베어 버린다 해도,”
“…….”
“짐을 향한 충심은 변함이 없겠느냐?”
황제의 목소리가 쓸데없이 진중해서 내시백은 침을 꼴깍 삼켰다. 대체 이 시점에서 저런 질문을 하는 영문을 모르겠다. 제 노모와 동생을 몰살시키는 황제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해서 함부로 고개를 끄덕일 수도 부정할 수도 없던 내시백의 불안한 눈동자가 돌돌 굴렀다. 황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후전에 대한 이야길 하다 갑자기 왜 그리로 말이 샌단 말인가. 내시백은 억울했다.
“됐다. 나가보아라.”
정국이 체념한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나가라는 말이 이토록 반갑게 들릴 수가 없었다. 내시백은 황제가 또다른 말을 꺼내기 전에 총총 걸음으로 서둘러 대명전을 빠져나왔다. 텅 빈 처소에 홀로 앉은 정국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뜨거운 한숨이 튀어나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자신이 없었다. 황후가 자신을 원망하지 않을까. 그녀의 아비와, 오라비와 그녀의 모든 세력을 다 쳐버려도 자신을 보는 눈동자가 변함없을까. 여전히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불러줄까.
정국은 지난 합방일을 기억했다. 몸이 허하다, 정무가 많아 바쁘다, 전쟁을 나가야 한다 갖갖이 핑계를 대며 피했지만 끝내 마주하고 말았던 날이었다. 아침부터 목욕재계를 한 황후는 짙고 푸른 의복을 입고 황후전에서 정국을 기다렸다. 야장의를 입은 정국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 서슴없이 황후전으로 걸어갔다. 무장하지 않은,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모습이었지만 그는 함부로 침해하지 못할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타고난, 태생이 지배자인 그의 오만한 모습 뒤로 수많은 상궁나인과 익위사들이 따랐다. 유일무이한 천자의 권력을 보이듯이. 허나 황후전 안으로는 정국 혼자만이 들었다. 황후는 머리위로 붉은 깁을 쓰고 있어 불투명해보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깁 안에서 황후가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들었다. 황제가 보였다.
“황상.”
잔뜩 벅찬 음성이었다. 또한 떨림으로 인해 갸륵하고, 또 슬펐다. 정국이 침상에 앉은 그녀에게 다가가 거친 손길로 붉은 깁을 벗겼다. 황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정국이 손을 들어 황후의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에게 가 닿는 눈빛이 시리고 무정했다. 황후는 정국이 그대로 사랑을 말하고 입맞춰주길 바랬지만 그는 말로 칼날처럼 황후를 베었다.
“짐의 품에 안기길 바라느냐?”
“…….”
“마음은 못 줘도, 몸을 주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
“…….”
“네 아비와, 네 소원이 정녕 그것이라면 몸을 섞는 것쯤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정국은 비소를 띄우며 황후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그가 차갑게 말을 뱉을 때마다 황후의 상기되었던 얼굴이 천천히 무너졌다. 정국은 그렇게 황후의 진심을 조롱했고 짓밟았다. 황후가 바란 게 정녕 그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외면했다.
“황상….”
정국이 엄지손가락으로 황후의 입술을 느릿하게 쓸었다. 그녀의 뺨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곧 울 것 같았다.
“신첩이 바라는 것은 단지, 단지 합방이 아니라 황상의 마음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황후가 입술을 꾹 물고는 말했다. 그에도 정국은 코웃음쳤다.
“순진한 척, 약한 척. 이젠 지겹구나.”
“…….”
“짐이 분명 혼례를 치른 날 말했을 텐데. 황후를 마음에 담는 일 따윈 없을 것이라고.”
“…….”
“그리 바라던 황후자리에 올랐으면, 얌전히 황후나 하라고.”
“황상.”
“주제넘게 진심이 되지 말고, 척만 하라고. 말귀를 왜 못 알아듣지?”
턱을 치켜든 정국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황후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기 위함이었다. 고갯짓을 따라서 맑은 눈물이 흘렀다. 정국이 입 안 여린 살을 씹었다. 억겁의 무게가 심장고동을 짓눌렀다.
“…대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시끄럽다.”
“전하께선 소녀와 함께 한 시간을, 모두 잊으신 건가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서 앞이 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원망어린 눈빛으로 정국을 올려다보았다. 그 작은 얼굴에 슬픔과 고통과 사랑이 다 섞여서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검은 눈동자에 더 이상 앳된 태자가 아닌, 오만한 황제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는 아직 어렸고 사랑에 진심을 다하던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황제는 달라졌다. 정국의 시린 얼굴에 미묘한 균열이 일었다. 그의 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우는 얼굴을 보면 숨이 막혔다. 차라리 눈이 멀었으면 했다. 원망을 바라고 한 말이었는데, 그녀가 자신을 원망스럽게 보면 심장이 아렸다. 사실 아직 어린 그의 마음이 그걸 두려워했다.
정국은 그 얼굴을 보는 게 두렵다. 내시백에게도 한 치의 떨림 없이 명을 내렸다. 계획한대로만 일이 진행된다면 그가 바란 것을 모두 성사시킬 수 있었다. 헌데도 정국은 왜인지 무서웠다. 끝끝내 제 곁에 남은 황후가 자신을 원망할까봐. 두려웠다. 그런 얼굴을 보고도 괜찮을 자신이 없는데. 괜찮을 수 없는데.
“내시백.”
잠시 생각을 더듬던 정국은 다시 눈을 뜨고 내시백을 불렀다. 내시백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서 총총 걸어 들어왔다.
“왜… 부르셨사옵니까?”
여전히 겁을 먹은 듯한 내시백에 피식 웃던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노모와 동생이 어디에 사는 지도 짐은 모르니 걱정 마라.”
“폐하….”
“황후전으로 가볼 것이다.”
안도한 표정의 내시백은 곧장 정국의 뒤를 따랐다. 황후전으로 향하는 황제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황후가 석고대죄를 하는 동안, 수없이 인내한 황제였다. 오죽하면 이 시점에 비를 내리는 하늘이 원망스러울 정도였으니, 황제는 속으로 석고대죄를 멈추라는 말을 오백 번도 넘게 반복했다. 허나, 황제도 대승상에 반하는 세력이 생기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이 석고대죄로 쐐기를 박아 놓아야 더 이상 대승상의 잘못으로 인한 황후의 폐위를 아무도 논하지 못할 것이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그들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국 자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었으니까.
“황제폐하 납시었사옵니까.”
별안간 황제의 행차에 황후전이 어수선해졌다. 최고상궁 도미가 가장 앞으로 나와 정국에게 목례했다. 마주한 황제의 얼굴은 지난 방문 때보단 풀려있었다.
“황후는 안에 있나?”
“예. 태의가 다녀갔지만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신 통에….”
“상관없다.”
결국 쓰러진 모양이다. 차가운 비와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된 석고대죄를 이기지 못하고, 나약한 황후가 결국. 정국은 굳은 얼굴로 막힘없이 황후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 황제를 그 누구도 저지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하고 무거운 황후전. 문이 열리자 저 멀리 비단금침이 보였다. 그 곳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황후도. 정국은 느릿한 걸음으로 황후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보면 억누르기 힘들 것 같았는데, 역시 예상이 맞았다. 그 어느 장신구 하나 없이 티 없이 질린 황후의 얼굴이 정국의 숨을 막았다. 편협하다. 편협하기 그지없어. 짐의 황좌를 위협하는 네 아비와 오라비부터 기세등등한 네 집안까지 뭣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 없는데 그럼에도 난 그대가 걱정된다.
이러니 그 수밖에 없는 것이지.
“…….”
정국은 침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턱을 괴었다. 지금만큼은 황후가 깨어나지 않기를 잠시 바랐다. 가만히 황후를 보고 있는데, 황후는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것인지 자면서까지 인상을 찌푸린다. 새하얀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보던 정국은 손을 들어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인상을 폈으면 좋겠는데.
“짐이 나오는 꿈을 꾸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황후는 항상, 제 앞에서 이렇게 고통스런 얼굴을 했으니까. 인상을 살살 펴주니 다시 편안한 얼굴을 하던 황후가, 이번에는 몸을 뒤척였다. 금침을 부시럭대던 황후가 정국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허, 황제의 입에서 어이가 없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러면 분명 의식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의심을 하게 되지 않은가.
“황후.”
얼굴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는데.
잠에든 황후는 대답이 없다. 정국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황후의 어깨를 살짝 쥐고는 제 쪽으로 몸을 돌리도록 하게 했다. 잠결에 탄식을 내뱉던 황후가 그 손길에 인상을 살짝 좁히며 다시 옆으로 돌아누웠다. 제 쪽으로 오는 황후에 저도 모르게 미소 짓던 정국은 다시금 굳고 말았다. 황후가 그 타이밍에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황상?”
황후는 힘없는 눈으로 바로 앞에 보이는 황제의 얼굴을 한 번, 제 어깨에 닿은 황제의 손을 한 번 보았다. 그리곤 미약한 부름. 황후의 풀린 눈에 순간 몸을 경직하던 정국이 황후의 어깨에 올린 손을 떼고 고개를 획 돌렸다. 그런 정국의 노력이 무색하게 황후가 침상에서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황후는 지금 바로 눈을 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체 왜 황제가 여기 있는 것인지, 제 어깨는 왜 잡고 있었던 것인지 알 리가 없다.
“황상!”
정국은 그만 저 영문을 모르겠다는 맑은 시야에서, 이 황후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곧장 나가려는 듯한 정국에 마음이 급해진 황후는 냅다 황제의 황룡포 자락을 잡아 당겼다. 얼마나 세게 당긴 것인지 정국은 채 한 걸음을 떼지 못하고 창피하게도 그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눈길로 정국이 황후를 바라본다. 황후역시 놀란 눈치였다.
“지금 무얼….”
“황상.”
황제는 당황한 얼굴을 하다가 금세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어버렸다. 황후는 나름 급하게 정국을 붙잡긴 했어도 무슨 말부터 건네야 할지 몰랐다.
“황상이 시키신 대로 얌전히 석고대죄를 했습니다.”
“…….”
“그리고 황상이 무얼 보시고, 들으셨는 지는 몰라도… 신첩은 변하지 않았어요.”
황후의 목소리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어느새 차분한 얼굴을 한 정국은 빙긋 웃었다.
“황후는 짐을 바보로 아는군.”
“…예?”
담담한 황제의 말에 갈피를 잡지 못하던 황후의 옅은 음성은 순식간에 멎었다. 입술에 닿는 손길 때문이었다. 정국이 무덤덤한 눈으로 황후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손을 대었다.
“화, 황상….”
“황후나 짐이나 똑같다는 소리야. 허나,”
“…….”
“가능하면 짐에게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까슬한 입술을 매만지는 손길은 집요했다. 그 눈빛만으로도 짙게 입을 맞추고 얇은 적삼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허리를 뜨겁게 쓰는 것보다 더, 얼굴이 달아올랐다. 황제의 적나라한 표정과 행동에 그 의미심장한 말은 나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입술에 닿던 손길이 멀어졌다. 정국은 언제 그런 얼굴을 하고 뜨거운 손길로 입술을 헤집었냐는 듯이 덤덤하게 일어났다. 황후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길로 정국을 올려다보았다.
“그 몸으로 내일 있을 연회에는 올 수 있겠나?”
“…그, 그럼요.”
그러고 보니 내일이 바로 황후전에서 예전부터 준비하던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때마침 백씨가 첩지를 받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아, 마치 백씨의 후궁 됨을 축하하는 듯한 아주 기분 나쁜 연회. 허나 그 자리에조차 황후인 제가 빠진다면, 백재인이 황제의 안주인 노릇을 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황후는 오기가 났다.
“반드시 참석할 것이옵니다.”
황후의 결연한 대답에 잠시 무언가 기대라도 한듯한 정국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모든 게 그의 예상대로였다.
“허면 무슨 일이 있어도 견뎌.”
“…….”
“내가 그대를 가질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무너지지 말고 견뎌라. 반드시.”
끝까지 황제는 알 수 없는 말을 담담한 어투로 내뱉엇다. 황후의 동그란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듯 흔들렸다.
“오늘은 푹 쉬도록.”
황제가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여운도 미련 한 자락도 남기지 않은 그의 자취는 황제를 닮아 차가웠다. 처소를 나서는 황제의 뒷모습을 눈에 담던 황후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 황후열전
태형은 실없이 황궁 주위를 서성였다. 황후는 이미 익위사의 품에 안겨 황후전에 도착했겠지만, 도저히 발걸음이 그 곳으로 향하질 않았다. 이토록 초라할 수가 없다. 분명 자신의 마음에 확신만 있다면 마음껏 그녀를 연모하고, 지켜줄 수 있을 줄 알았다. 헌데 환상과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그 괴리감이 태형의 숨을 막았다.
“황제, 황제라….”
지엄한 그 자리에 있다면 말 한마디가 법이 되는 세상이다. 황후가 황제를 연모하는 것도, 그가 황제이기 때문일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는데. 입안이 씁쓸하다. 정국의 행동 하나에, 말 한 마디에 설레고 무너지는 황후의 얼굴이 너무도 눈에 선해서 태형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목적지 없고 불행만이 가득한 태형의 걸음을 멈춘 것은 뜻밖의 사내였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황궁의 별감 같지도, 내관이나 우림위 소속 같지도 않은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 어느새 한적한 곳에 다다랐고, 주변이 조용한 지금 낯선 이들이 제 앞을 가로막았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태형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구냐.”
감히 황제의 지엄한 황궁에서 이리도 은밀하고 갑작스러운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누가 보낸 것일까. 직감하건데 혹여 아까 제가 무례한 소리를 짓걸였던 백재인이 보낸 자들인가? 허나 그들은 태형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들었다. 태형의 인상이 그였다. 제게는 아무런 무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저들은 자신을 죽이러 온 자들일까, 아니면 어딘가로 데려가기 위해 온 자들일까. 머리를 굴려보기도 전에 한 놈이 기함을 지르며 검을 겨누고 돌진해왔다. 상대는 도합 네 명. 다들 무기를 들고 있었고, 이런일에 전문적으로 훈련된 이들 같았다.
태형은 옆으로 몸을 틀어 검을 피하며 팔꿈치로 상대의 등을 내리찍었다.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사내가 앞으로 주춤하다가 금세 칼의 방향을 바꾸어 뒤돌아 달려온다. 그 자를 막을 새도 없이 또 한명이 칼등으로 어깨를 내리찍으니, 태형은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낮은 자세에서 다시 달려드는 사내의 검을 피하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지만 한 명이 틈을 보이면 다른 한명이 파고드는 통에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었다. 결국, 칼날보다 시린 칼등이 뒷통수를 가격함에 태형은 정신을 잃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냥 황후전으로 돌아 갈 것을 그랬다. 몸도 상한 황후가 또 제 걱정을 하면 어쩌나. 태형은 그대로 흐린 정신을 놓았다.
皇后
列傳
“별감은?”
“어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연회의 날이 밝았다. 도미는 아직 몸이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연회는 빠지시라며 간곡히 청했지만, 황후는 기어코 준비를 시작했다. 근래 마음고생에 몸 고생을 동반한 터라 더욱 핼쑥해진 얼굴은 분을 살짝 올리자 생기발랄하게 변했다. 어제는 초라하던 적삼이 오늘은 나긋하게만 보였다. 그 위에다 보라색 스란천을 두르고 투박한 끈으로 허리에서 매듭을 짓는다. 질서가 뚜렷하고 화려한 황실의복과 달리, 황후가 연회와 같은 행사시에 즐겨 입는 의복은 최대한 투박한 미를 강조했다. 그 위에 속이 살짝 비치는 상아색 치마를 덧입어 다시 천을 묶었다. 겹겹이 쌓이는 옷자락은 황후의 고매함을 한껏 높여 주었다.
“별감도 오늘 연회를 즐기면 좋으련만, 대체 어딜 간 게야.”
“하아, 마마. 백씨가 상석에 떡하니 앉아있을 텐데 어찌 연회를 즐기실 수 있단 말입니다. 소인은 폐하의 옆에 같이 앉을 백씨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사옵니다.”
도미는 그런 황후의 머리를 살짝 넘겨 청옥 머리꽂이를 꽂아주면서도 한탄조로 말했다. 황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백야가 더 이상 천한 항아가 아닌, 황제의 후궁이라 하더라도 제가 황실의 안주인임에는 변함이 없다. 백야를 포함한 후궁들과 황친, 수많은 대소신료들과 변방의 성주들이 모두 모일 이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 번 각인시켜야 했다. 마지막으로 푸른 귀걸이를 매단 황후가 느릿한 걸음으로 황후전을 나섰다. 그 어느 때보다 고아한 자태는 모든 이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황후마마 납시오!”
이런 큰 연회시에만 열리는 익화궁. 계수금라를 수놓은 듯한 벽면부터 둥근 형태의 장엄한 지붕까지 연회를 위해서 존재한다 해도 무방한 익화궁. 그 곳을 채우는 것은 단정한 의복을 차려입고 소탈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문무백관들과, 그보다 한단계 상석에 앉아있는 황실을 종친들이다. 그 뿐 아니라 이 날만을 위하여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황궁악사들은 비파부터 대금까지 갖가지 악기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무희들 역시 이 곳에서 선보일 춤을 위해 있었다.
그 중 단연 황궁 연회의 주인공은 내명부 여인들이오. 황제의 사돈의 팔촌까지 모두 내명부로 연결된 여인들은 오로지 이 연회를 위해 사들인 비단옷과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한 채 고고하게 앉아 아래를 관망하고 있었다. 공주부터 궁주, 부부인과 대부인 직위를 가진 여인들과 황제의 여인으로 품계를 받은 후궁 연재인과 순빈, 그리고 백재인까지. 색색의 의복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을 정도로 화려하고 다양했다. 허나 그 모두가, 황후의 등장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황제와 태후를 제외하곤 이 황궁에서 가장 높은 여인. 쩌렁쩌렁한 내관의 외침이후, 문이 열리고 한편으론 단아하지만 또 한편으로 더없이 화려하게 치장한 황후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절색의 황후, 모두가 그녀에게 고개를 조아렸지만 모두가 궁금한 듯 힐끔힐끔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황후는 고고하게 턱을 치켜 들고 그들 사이의 붉은 길을 따라 행차했다. 그 어떤 소문이 들려도, 어제 바로 석고대죄를 한 황후라하여도 그녀가 이 황궁의 주인임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법한 자태였다. 황후가 계단을 올라 내명부 여인들을 지나, 후궁들이 있는 칸마저 지난다. 백야는 고개를 숙였지만 황후가 지나는 것이 느껴지자 이를 바득 갈았다. 후궁이 되었으나 황후보다 높이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이 뼈저리게 억울했다. 해서, 이 억울함을 뼈에 새기도록 했다. 당신 집안에서 내게 무엇이든 해온다면 지지 않고 그 위기를 기회로 삼으리라.
황후는 후궁들을 지나쳐 위의 상석으로 올랐다.
“황제폐하와 태후마마를 뵈옵니다.”
황후가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태후가 흐뭇한 얼굴로 황후를 보며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정국은 황후를 힐끗 보다 이내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후는 그 어떤 내색 없이 정국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오늘은 웬일로 최고상궁도 별감도 달고 오지 않았군.”
“황상. 최고상궁을 데려오면 태후께서 심기불편해 하실까 데려오지 않았고, 신첩의 별감은 어디에 있는지 신첩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답니다.”
즉, 태형을 데려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임을 강조한 황후가 형식적으로 예쁜 미소를 지었다. 황제의 입에선 한숨이 들려온다. 저 아래, 문무백관 들 사이에 가장 앞에 선 대승상과 문하시중이 보인다. 황후는 이까지 오면서 제 아비와 오라비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문하시중의 담담한 시선이 가끔가다 황후를 올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는데, 황후는 철저히 무시했다. 여기선 대승상의 여식도, 문하시중의 누이도 아닌 황후일 뿐이라는 건가? 황후의 그런 모습이 가상했지만, 그래서인지 마음이 더욱 불편했다. 이 연회가 끝나고나서도 자신을 똑같은 눈빛으로 봐주길 바랬다.
“이만 연회를 시작하지. 일년에 한 번, 이 연회는 황실의 안녕과 나라의 평안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연회다. 이 순간만큼은 정무도, 신부고하도 신경쓰지 말고 한 마음이 되어 즐기도록.”
정국의 나직한 음성이 넓은 익화궁을 울렸다. 모두가 일제히 제 앞의 술잔을 치켜들었다. 황후는 저 혼자 느릿한 손길로 술이 아닌 차가 담긴 술잔을 살짝 들고서 정국을 바라봤다. 면류관을 쓰고 어느 때보다 화려한 황금색 황룡포를 입은 황제는 앞선 선황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타고난 지배자였다.
“황제 폐하. 천수, 만수, 흥복을 누리소서!”
모두가 외치며 치켜든 술잔을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동시에 시작된 악사들의 연주. 경쾌한 음악이 휘황찬란하게 울려 퍼졌다. 무희들이 가에서 나와 그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였다. 백야와 황제가 한 자리에 있었지만 처음으로 마음이 편안했다. 그래서 황후는 오늘은 이 연회를 마음껏 즐기리라 다짐했다.
“내 황실 큰 어른으로서 황후께 한 잔 주고 싶은데.”
경쾌한 음악과 문무백관들이 소회를 나누고 회포를 푸는 가운데 태후가 황후에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황후도 빙긋 웃으며 잔을 가지고 태후의 앞에 섰다. 웬일로 도미를 달고 오지 않은 황후가 기특해 태후는 평소보다 더 다정히 잔에 술을 따르고 황후의 손을 살짝 그러쥐었다.
“연회를 준비하느라 고생하시었소.”
“태후마마의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황후가 천천히 허리를 굽히고 인사하며 태후가 따라준 술을 음했다. 연회에선 이렇게 고마움을 표하고, 축복을 표하며 서로의 잔을 채워주곤 했다. 태후의 선창을 따라 정국이 작게 손짓해 태부와 중서시랑을 불렀다. 앉아 다른 신하들과 잔을 걸치던 그들이 황제의 명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국경의 건황전을 처리하는데 태부가 큰 공을 세웠다지.”
건황적은 패망한 진나라의 유민들이 남아 구성한 오랑캐였다. 그들은 국경에서 백성들의 재산을 훔치고 목숨을 빼앗으며 연명하던 이들로 주나라 황실의 크나큰 골칫덩어리였다. 그들이 그렇게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은 대승상이 몰래 돈을 받고 눈을 감아주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대승상에게 반기를 든 태부의 무리가 그들을 쳤다. 대승상을 친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과찬이시옵니다. 폐하.”
“태부와 중서시랑에게 금화 오십전을 하사하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태부와 중서시랑이 황제가 건넨 잔을 높이 들며 허리를 숙였다. 그 꼴을 보고 있던 대승상이 작게 얼굴을 구기며 술잔을 털어넣었다. 얼마 전부터 눈에 거슬리게 굴던 태부가 끝내 제게 반하는 행동을 했다. 스스로 성주들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건황적을 허락도 없이 죽였지. 조정 사람들이라면 죄다 대승상이 건황적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건 황제도 물론이었다. 정국이 대승상을 바라봤다. 훤히 꿰뚫는 천자의 눈빛이었다.
“그럼 이제 황후께서 후궁들에게 축배를 하심이 어떻습니까?”
황제의 치사를 잘 받던 태부가 눈을 돌려 황후를 보며 말했다. 갑작스런 그 말에 황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부와 황제를 번갈아 바라봤다.
“백재인께서도 첩지를 받으셨고, 다른 후궁들은 황궁에서 살지 않으신 탓에 내명부가 모일 기회는 흔치 않았사옵니다. 이번 기회에 황후께서 축배를 건네고 내명부를 돈독해 하시지요.”
저 자가. 황후의 얼굴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저건 모든 대소신료가 보는 앞에서 백야가 황궁에 사는 유일한 황제의 후궁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려는 짓이었다. 무례하기도 짝이 없지. 감히 대신이 내명부의 일에 참견이라니. 황후가 입을 열어 한소리를 하려는데, 그걸 제지한 것은 정국이었다.
“태부의 말이 옳다.”
“황상!”
놀란 황후가 정국을 보았다. 그는 태연하게, 그리고 또 무엇이 문제냐는 듯이 황후를 봤다.
“백야가 첩지를 받은 후 처음 있는 연회이지. 어떤 식으로든 백야를 인정하는 것이 옳아.”
“…….”
“황후가 싫다면 내 직접 백야의 잔을 채우지.”
황후가 입술을 꽈악 물었다. 제 스스로 백야에게 환대를 하기도 싫었지만, 그걸 정국이 하는 것은 더 싫었다. 벌써부터 긴장과 설렘으로 볼을 발갛게 물들인 백야가 꼴 보기 싫었는데, 그런 그녀에게 다정히 잔을 건네는 황제라니. 정국은 황후가 지독히 싫어하는 것이 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신첩이… 하겠습니다.”
끝내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빈과 연재인, 그리고 백재인… 내게 와라.”
후궁들을 향해 손짓하며, 술이 담긴 병을 손에서 천천히 돌린 황후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연재인과 순빈이 서로의 눈치를 보다 먼저 일어나 황후에게 다가갔다. 뒤이어 승리의 미소를 가득 머금은 백야 역시 그들을 따라 황후의 앞에 섰다. 그녀가 계단을 올라 비로소 황후의 눈높이에 섰다. 그래, 이게 맞는거지. 황후, 당신과 내가 무에 다르다고. 백야는 득의양양했다.
“항상 폐하께 충심을 다하고, 분란 없이 지내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
“앞으로도 내명부의 평화를 위해, 잘 부탁하마.”
입에 발린 말을 하며 황후가 옆에 있던 서나인에게 고갯짓했다. 도미 대신에 황후를 모시러 따라 온 서나인. 그녀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황제를 흘끗 보더니, 손에 쥐고 있던 잔을 차례로 후궁들에게 주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백야에게 잔을 건네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자, 내가 주는 축배니라.”
황후가 그들이 쥔 잔에 천천히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허리를 숙인 후궁들이 감사를 표했다.
“황후의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그리곤 그녀가 건넨 축배를 마시기 시작했다. 모든 대신들과 황친의 시선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마지막 모금까지 모두 마신 후궁들이 차례로 잔을 입에서 뗐다. 그리곤 다시 악사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황후도 짐 같던 일을 마쳤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자리로 가 앉았다. 후궁들은 마신 잔을 내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들의 걸음을 살피던 정국의 눈동자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리고 일순간의 일이었다. 그대로 백야가 쓰러진 것은.
“꺄악! 마마!”
백재인의 자리 뒤에 서있던 장상궁이 놀라 달려왔다. 힘이 축 빠진 백야의 몸이 계단에서 위태롭게 무너졌다. 정국의 인상이 차갑게 굳었다. 백야 옆에 있던 내명부 여인들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지던 익화궁이 고함과 비명에 사로잡혔다. 정국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황제가 오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길을 터주었다. 황제가 쓰러진 백야를 받쳤다. 술을 마신 이후 곧바로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누구라도 독의 위험이 있었음을 예상할 법했다. 황후는 그 자리에서 당황하여 흔들리는 눈을 하고서 가만히 옷고름 위에 손을 얹은 채 있었다.
대체 누가 이 연회에서 백씨를 독살하려 했단 말인가. 설마… 백야의 첩지에 불안해 하던 후궁들? 맘 약한 연재인일 리는 없으니 순빈의 짓인가? 황후의 시선이 백야와 반대편에 있던 순빈을 향했다. 순빈은 놀란 얼굴로 백야에게 달려가지 않은 채, 제 자리에 앉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아니면, 혹여 저도 모르는 사시에 대승상과 오라비가 조치를 취하기라도 한 것인가? 황후의 눈이 불안감에 흔들렸다. 백씨가 눈에 거슬리기는 했으나 이토록 갑자기,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다급한 일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백야를 비롯한 다른 후궁들도 똑같은 술을 마셨는데 어째서, 어째서 백야만.
“어서, 태의를 불러라.”
황제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정국은 그 어느 때보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옆에 백씨를 걱정하며 모여 있던 여인중 하나가 제 비녀를 빼서 내밀었다. 혹여 정말 독이라면, 은으로 된 비녀가 까맣게 녹슬 테니까. 정국이 비녀를 받아들고 피를 내뱉던 백야의 입을 별려 비녀를 살짝 밀어 넣었다. 잠시 뒤, 비녀를 꺼내자 은색 비녀가 끔찍하리만큼 검게 녹슬어 있었다. 정국이 비녀를 던지듯 놓았다. 독이다. 감히 황제와 온 대소신료 앞에서 대체 어느 누가 황제의 후궁을 독으로 시해하려 했단 말인가.
“후궁 모두가 같은 술을 마셨는데 어찌 백재인만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이지?”
정국은 그렇게 물으며 황후를 바라봤다. 왜, 왜 신첩을 보십니까? 왜. 황후의 손이 달달 떨렸다. 금방 황후가 준 축배를 마시고 내려오던 백야가 쓰러진 것이니, 누구든 황후를 먼저 의심할 법 했다. 허나 같은 술을 마신 연재인과 순빈은 멀쩡한데, 어떻게 정국이 황후를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황후는 억울하고 놀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황상.”
“황후는 후궁들에게 술을 따라 준 술병을 가지고 와라.”
의심이었다. 도미도 없고, 태형도 없이 그저 그 불구덩이 한가운데 오롯이 혼자인 황후는 점점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겁이 났다. 그런데 그것보다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정국이 너무 원망스럽고 슬퍼서 당장 입술이 닥친 채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제 앞 상에 놓인 술병을 가지고 당장 그에게 나아갔다.
“신첩이, 신첩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
“보십시오! 순, 순빈도 연재인도 모두 무사한데, 백야만 쓰러지지 않았습니까!”
“…….”
“신첩이 독을 탄 게 아닙니다! 황상.”
목이 아프게 변명해도 정국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황후가 울었다. 눈물 흘리며 병을 들어 그 안에 남은 술을 제 입 안으로 털어넣었다. 평소보다 더 독하게 느껴지는 술이 목을 감쌌다. 안에 남은 술이 전혀 없을 때까지 마셨다. 숨막히게 조용한 익화궁 안에서, 모두가 그런 황후의 비참한 외침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아…. 이제 만족하십니까?”
술을 다 털어넣은 황후는 멀쩡했다. 황후가 버리듯이 빈 술병을 손에서 놓았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내시백.”
“예. 폐하!”
“후궁들이 마신 잔을 내 앞으로 가져와라.”
황제는 끝내 모두의 앞에 황후를 철저히 발가벗기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황후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황제의 명에 내시백이 후궁들이 입을 댄 잔을 서나인으로부터 받아들었다. 서나인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내시백을 바라봤고, 내시백은 태연히 그 시선을 피하며 잔을 가지고 황제에게 갔다.
“여기 있사옵니다.”
마침 태의가 도착했고, 황청에서 검서관들이 나왔다. 발을 바쁘게 놀려 그까지 올라온 검서관에게 황제는 그 잔들을 건넸다. 검서관들이 잔에게 은구슬을 세 개씩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에 들고 굴렸다. 독이 있다면 그 한 방울까지 전부 은구슬에 묻어나기를 기다리면서. 대승상이 손이 터져라 잔을 세게 쥐며 그 쪽에 집중했다. 대승상의 세력도, 태부의 세력도 모든 문무백관이 숨죽였다. 황후에겐 그 숨막히는 시간이 억겁처럼 느리게 흘렀다.
“폐하!”
침착하게 잔을 굴리던 검서관이 잔을 황제를 향해 들고 몸을 숙였다. 정국이 담담한 얼굴이 그들이 올린 세 개의 잔 안을 들여다봤다. 하나의 잔만, 백야가 마신 가장 왼쪽에 있던 잔만 검게 물들었다. 그 잔에만 독이 묻어있다는 반증이었다. 황제가 그 잔을 받아들고 주저앉은 황후 쪽을 향해 던졌다. 떨어진 잔 안에서 검게 변한 은구슬들이 굴러왔다. 황후도, 나머지 모든 사람들도 그 증좌를 정확히 목도한 순간이었다.
“화,황상…….”
“네 짓이구나.”
유독 낮고 단정적인 정국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황후는 정국이 두려웠다.
“황후가 백야를 독살하려 한 것이야.”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그것은 만국의 진리였다. 익화궁 안이 온통 술렁였다. 황후의 눈에서 눈물방울들이 떨어졌다. 멎은 눈동자. 그래, 가장 높은 곳의 황후가 나락으로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 황 후 열 전 熱 血 皇 后 /
十四.
황궁은 본래 그런 곳이다. 겉으론 고고한 척 눈부신 콧대를 세우고 수도 한 가운데 웅장이 솟았지만 실은 오만하기 짝이 없으며 그 어떤 곳보다 추악하다. 황궁은 속이 맑은 자는 탁하게 만들고 진실된 자를 짓누르며, 아둔한 자는 삼켜버린다. 그런 곳에 몸담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 꽤 적응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황후는 초조한 발걸음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계속해서 서성였다. 황후가 불안한 듯 손톱을 잘근잘근 짓이기는 소리가 고요한 황후전을 울렸다. 두려움이 가득 잠식한 그녀의 얼굴에는 앳되고 어린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도 발 들이지 않는 그 곳에 어느새 다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손톱을 물어뜯는 것을 멈춘 황후가 재빨리 고개를 들어 애타게 그 곳을 바라봤다.
“마마!”
황후전을 찾는 이는 정해져 있다. 오늘도 영락없는 도미의 목소리에 유독 심장이 요동친다.
“어찌, 어찌 되었느냐? 응?”
“백재인은 서둘러 대청전으로 옮겨졌다고 하옵니다! 곧장 태의가 들어 진맥을 하고 있다한데… 얼른 대승상께 연통을 드리려 했건만 폐하께서 벌써 길을 막아놓으셨습니다!”
황후가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도미가 그런 황후를 서둘러 부축했다. 대체 한식경도 채 지나기 전에 일어난 영문도 모르는 일이 황후의 정신을 앗아갔다. 분명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황후는 눈 뜨고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온 대소신료들과 황궁 사람들이 모인 연회에서 독을 마신 백야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익화궁 속에서 정국은 쓰러진 백야를 품에 뉘이고 무섭도록 일그러진 얼굴로 황후를 추궁했다. 백야가 쓰러지기 전 마신 독이 발린 잔 안에 든 술. 그리고 황후가 백야를 독살하려 했다는 황제의 말. 순식간에 온 익화궁이 술렁이고 황후가 새하얘진 눈앞을 더듬을 수도 없을 그 때, 정국은 어느 때보다 낮은 목소리로 ‘황후를 당장 황후전에 유폐하라.’ 명했다.
불안정한 시선과 걸음걸이로 가장 높은 곳에서 위험하게 내려온 황후는, 등 떠밀리듯 익화궁을 나서기 전의 풍경을 기억한다. 백야의 얼굴에 시선이 박혀 다른 곳엔 신경 돌릴 틈이 없는 정국과, 분노를 간신히 억누른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던 아버지, 눈길만으로도 이미 저 대신 궁지에 몰린 마냥 저를 바라보던 오라비, 끌려 내려온 황후를 경멸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대신들의 얼굴. 모든 것이 생생하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백야의 잔에 독을 넣지 않았어….”
“마마, 누군가의 아둔한 모함입니다! 마마께서 유폐되신 틈에 서나인이 사라졌습니다! 분명 그 아이가 누구의 사주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 아이만, 서나인만 찾아내면…”
중얼이듯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 말하는 황후의 목소리에 도미가 말했다. 도미의 부축에 겨우 중심을 잡고 있는 황후는 도미의 위로에도 암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온 몸에 맥아리가 풀려 다 죽은 움직임이었다.
“대체 누가 나를 모함한단 말이니? 대체 누가 서나인을 시켜 그 잔에 독을 발랐냔 말이다.”
“그건… 소인도 당최… 지금 그런 짓을 할 이는 백씨 뿐이온데….”
“그래, 만약 백야가 날 모함하려 제 스스로 독을 집어삼켰다 치자꾸나. 나도 몰랐지만 백야가 그 정도로 독한 아이였는지도 모르지. 허나, 다른 이들도 그걸 믿어줄까? 황상의 총애를 담뿍 받아 모두의 반대에도 재인자리에 오른 그 아이가, 평생 독수공방만 해온 박복한 황후인 나를 모함하려고 목숨을 걸었다고? 모든 이의 눈앞에서 내 잔에 독이 나왔는데?”
황후는 스스로를 폄하하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안쓰러운 눈길로 황후를 바라보던 도미는 웃전의 암담한 말에 반기를 들 수가 없어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폐하께서, 설마 그런 모략에 말려드시겠습니까….”
황후가 눈을 꾹 감았다. 짙어진 시야 너머로 백야의 여린 몸을 붙잡고 세차게 얼굴을 굳히며 제 심장에 비수를 찌르던 황제가 보였다. 잠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아렸다. 황제는 해명 한 번 들어보지 않고 황후인 자신을 처소에 가두었다. 그 행동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몇 년을 동고동락한 저보다, 자신이 눈앞에서 본 것을 더 신뢰한다는 뜻을 담은 배반이다. 아니, 애초에 정국은 황후인 저에게 마음을 준 적이 없으니 배반도 성립되지 않는, 외면이다.
“황상께서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야…. 중요한 것은 모두의 앞에서 백야가 쓰러졌고, 내 잔에서 독이 나왔다는 것이다. 다른 이의 상식으로도 이리 대놓고 독을 건넸다는 것이 납득되진 않겠지. 허나 백야가 황상의 사랑을 받는 후궁이고, 나는 황제의 관심이 닿지 않는 냉궁에 살며 후궁을 시기질투하는 황후라는 전제가 깔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게다가 백야에겐 목숨까지 걸 이유가 없어…. 그 아인 숨만 쉬어도 황상의 사랑을 받는 아이인 걸….”
막바지에 다라 황후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간신히 올라온 울음기를 삼킨다는 증거였다. 황후의 떨리는 말은 이 상황을 단번에 이해시켜주었지만, 단번에 나락으로 빠뜨리기도 충분했다.
“설마 대승상께서 정말 먼저 손을 쓰신 것은….”
“나도 처음엔 그 생각을 했으나, 아니다. 곧 합방이 코앞이야. 합방만 손꼽아 기다리시는 아버님께서 직전에 이런 무리수를 던지실 일을 없다. 순빈이나 다른 후궁도 이런 다 드러나는 수를 쓸 만큼 무모하지 않아….”
침착해야 했다. 이런 상황이 닥칠수록 더욱더. 분명 밖에서도 대승상이 어떻게든 사건의 진위를 알아내기 위해 애쓰고 있을 것이다.
“하. 서나인은 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아서 그런 짓을 한 것이야….”
번살이도 하지 않는, 처음 입궐할 때부터 송장으로 황궁을 나설 때까지 황후전을 모시는 나인들. 최고상궁 도미는 그들에게 마지막 남은 믿음을 걸었는데, 어떻게 황후전 안에서 배신자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심장이 내려앉았다. 어찌 온갖 풍파란 풍파는 죄다 황후에게만 날아드는 것인지, 황제도 야속하고 황후의 아비인 대승상도 야속하고, 이미 독을 마시고 쓰러진 백야마저 증오스러웠다. 도미가 지엄한 황후의 여린 어깨를 그러쥐었다.
“당장 이 급박한 때에 별감은 대체 어딜 간 것인지….”
태형이라도 황후의 옆에 있어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보다야 나을 텐데.
오늘따라 유독 무거운 황후전의 공기가 여리디여린 황후 뿐 아니라, 그 누구보다 강한 줄 알았던 도미의 어깨마저 사납게 짓눌렀다.
/ 황후열전
“소소는 아닙니다! 모함입니다!”
“이 무지한 놈! 황후께서 이런 무모한 짓을 독단적으로 했다 생각지 않아! 단지 바보같이 상대의 계략에 단단히 발이 묶인 것뿐이다.”
몸이 의지를 따라가지 못해 윤기는 속이 타 죽을 지경이었다. 갖가지 추악한 모략과 황궁의 술법에 통달했다 생각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그런 작태를 목격하자, 심지어 그 당사자가 제 누이라는 것을 인식하자 숨이 탁 막히는 것이다. 그녀답지 않게 겁을 지레 먹고서 비틀거리며 익화궁을 나서던 누이의 뒷모습이 눈에 선했다. 윤기는 그 생각만하면 가슴이 저려 당장 무섭도록 고요한 황후전에서 누이를 데려오고 싶었다.
대승상은 역시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그 역시 이 잔혹한 황궁에서 선황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 얼마나 오래 버텨왔던가. 헌데 순식간에 벌어지는 바보 같은 참사를 막지 못하고 끝내 판을 키우고야 말았다. 합방이, 꿈에서나 그리던 고지가 코앞인데 이토록 무력할 수가.
“대체 누굽니까. 어느 누가 이리도 무모하게 모두의 앞에서 감히 황후를 모함한단 말입니까.”
“황후의 뒤에 나인 하나가 있었지? 그 아이는 병부에 잡혀있다더냐? 분명 그 나인이 관련 있을 것이다.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겐지 확인해야만 해.”
황궁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급해졌다. 당장 황후와 만날 길조차 차단되었으니, 마냥 이 상황을 손 놓고 볼 수도 없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본 사람이 많은 만큼 소문만 무성해질 것이고 그리되면 황후가 전적으로 불리하다. 개미새끼하나 보이지 않는 대청전 앞. 대승상은 제 뒤를 따르는 윤기를 힐끔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황상의 앞에서 감정적으로 굴지 마라. 이 기회를 틈 타 우리 가문까지 정리하려 드실 분이야. 황상에게 이번 일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단 말이다.”
대승상의 차가운 말에 윤기는 입을 다물었다. 끝까지 황후의 안전도, 그녀가 겪고 있을 두려움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대승상은 지금 이 순간마저도 제 가문에 미칠 화를 걱정했다. 애초에 황후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 역시, 제 여식이 아닌 제 손자를 황위에 올리도록 만들어줄 황후의 자리를 염려하는 것이었다. 윤기의 입가가 자조적으로 뒤틀렸다. 쓰러진 백야와 황제가 있을 대청전에서 대승상의 등장에 목을 빳빳하게 세운 궁녀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리고 그 옆에 선 내시백. 그의 존재는 이 안에 황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폐하를 알현하러 왔다. 어서 고해라.”
이번 사건에서 가장 의심을 받는 황후의 부친이다. 아무리 대승상이라는 작위의 신료라 하나, 황후와 내통하지 못하도록 아예 황궁출입을 막을 법도 한데, 내시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문 너머까지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황제폐하, 대승상과 문하시중께서 드셨사옵니다.’하고 고했다. 그리고 그 문은 머지않아 열리었다.
“들어가 보시지요.”
대승상이 먼저 대청전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운검들과 익위사 셋, 상궁내관들이 대청전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헤치고 간 끝에 침전에 누워있는 백야와 한 발 물러서 있는 어의, 그리고 침전 옆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는 황제가 보였다. 그 꼴을 보자 윤기의 얼굴에 저절로 금이 갔다. 허나 겉으론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황제폐하.”
대승상의 부름에 정국이 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이 평소 이지적이고 무료한 정국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정국은 바싹 마른 입술을 잠시 달싹이다, 순식간에 굳어진 눈으로 대승상을 바라보며 대충 손짓했다. 황제의 신호에 뒤에 서 있던 태의가 머뭇대다가 이내 말문을 먼저 튼다.
“백재인 마마께서는 독에 당하셨습니다. 허나 다행히도 극히 소량을 섭취하시어 목숨에는 위험이 없으십니다.”
태의의 말에 윤기가 노골적으로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반면 대승상의 얼굴에는 표정변화가 없다. 단지 태의의 얘기를 다 들은 후 다시금 시선을 정국에게 줄 뿐이었다.
“대승상은 이것이 궁금하여 이까지 행차한 것이 아닌가?”
잔뜩 갈라진 낮은 목소리가 뱉어졌다. 정국은 하도 신경을 써서 피로해진 눈가를 꾹꾹 누르며 대승상을 향해 말했다. 이미 연회에 참석했던 대신들과 황친을 다 물렸는데도, 황궁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진의를 기다리고 있다던 자들의 소식을 듣고나자 정신적 압박감이 황제를 짓눌렀다. 게다가 대승상의 등장은 그런 정국을 더더욱 곤하게 만들었다.
“폐하. 신은 후궁의 상태가 궁금하여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후궁이 쓰러진 것은 소신의 여식, 아니 황후마마 때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극한이라 하나 대승상은 정치적으로도 그 수많은 능구렁이들을 물리치며 이 자리까지 온 인물이다. 당황 한 점 비추지 아니하고 적당히 미소를 걸면서 황제를 향해 태연하게 말한다. 그 뒤에서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린 윤기와는 전혀 다른 처사였다.
“설마 폐하께선 황후마마를 의심하시는 겝니까?”
“하아… 의심이라.”
“…….”
“대승상. 홀로 짐 몰래 수십만의 사병을 키우고 있는 비열한 그대보단, 짐의 마음이 더욱 진심일 것이오. 그대는 그대의 여식이 가엾지도 않으시오?”
황후를 향한 ‘진심’. 진심이라. 정확히 귓전을 때려 박는 황제의 의미심장한 말을 파헤쳐 볼 새도 없이, 대승상의 안이하던 얼굴에 눈에 띄는 균열이 일었다. 정국이 속 시원히 내뱉은 ‘사병‘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홀로 도성과 떨어진 곳에서 거사를 위해 은밀하게 훈련시키던 제 사병들을 황제가 무슨 수로 알고 있는 것이지? 황후일 뿐만 아니라 또다시 들이닥치는 파문에 대승상은 정신이 멍해졌다.
“아직 덕재패를 움직여 도성 여인들을 팔아넘긴 죄도 치사하지 않았소. 그대가 저지른 일 때문에 황후가 두어 배로 곤혹을 겪는 중이지. 짐은 성군이라, 나의 신하들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싶지 않소. 그들이 앞 다퉈 말하고 있지 않은가. 당장 황후를 처형하라고!”
황제의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말은 당장 수많은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아비인 대승상이 저지른 일로 인해 민심이 바닥을 쳤다. 이참에 그 여식인 황후가 시기질투에 눈이 멀어 후궁마저 독살하려했다는 일이 터지면서, 그것은 정점을 찍었다. 익화궁에서 참혹한 현장을 목격했던 자들은 황궁 앞에 몸을 엎드리고 황후의 폐위와 처형을 소리쳤다. 그들에겐 황후가 정녕 후궁을 독살하려 했는가는 중요치 않았다. 단지 눈엣가시같던 대승상과 황후가 제대로 걸려들었다,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정국이 바라던 바였다.
“폐하!”
꽉 막힌 황룡포 자락을 답답한 듯 풀어헤치던 정국이 저를 애타게 찾는 내시백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냐.”
“폐하! 방금 병부에서 황궁을 나서던 한 나인이 잡혀왔다 하옵니다! 그 아이가 자백하길, 자신이 황후전 나인이라고, 황후의 명을 받아 백재인의 술잔에 독을 발랐다 하더이다!”
설상가상. 사면초가. 온갖 부정적인 말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해서 아까 이후로 아무 말도 뱉지 못하는 대승상을 대신해, 참지 못한 윤기가 황제를 향해 다급히 입을 열었다.
“황후전 나인은 죽을 때까지 황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분명 이 역시 황후마마를 곤란에 빠뜨리려는 수작입니다. 폐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속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다급하게 황제를 향해 그리 고하는 윤기를, 소식을 전하던 내시백은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곤 속으로 뱉는 헛웃음. 설마 황제가 그런 것마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겐가. 황후측도 순식간에 벼랑 끝에 몰리니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정국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기 전까지 백야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황제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일말의 미련을 남겨둔 황제는 그 후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 나갔다. 그를 따라 본래 대청전에 속한 이들만 남겨둔 채 모두가 함께 나선다. 대승상과 문하시중도 갑작스런 증인의 등장에 어지간히 놀란 모양인지 황제를 따라 병부로 속히 걸음을 옮겼다.
주나라 병부(兵簿)
고문이 가해지는 곳이라 살갗이 타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고상한 황제는 그 어울리지 않는 곳으로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딛었다. 지하에 위치한 어두운 공간에는 횃불이 여러 개 밝혀져 있어 시야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곳엔 고문을 받을 필요도 없이 온전한 상태로 항아의 복색을 한 채 꿇어앉아 있는 여인이 보였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는 황제의 옷자락을 발견하자마자 다급히 몸을 낮추었다. 정국이 적당히 가까워지다가 걸음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이 아이입니다.”
“…고개를 들라.”
수복들이 충성스럽기로 유명한 황후전의 나인. 고개를 들고 황제를 마주했다.
“자, 아까 자백한 것을 폐하의 앞에서 다시 한 번 고하거라. 한 치의 거짓도 보태어져서는 아니 될 것이야.”
병부령의 말에 제법 명석한 나인의 눈동자가 병부안의 사람들을 찬찬히 훑는다. 가장 앞에 선 황제와 그 뒤의 내시백, 그리고 관복을 입은 노신 대승상과, 가장 예민한 얼굴을 한 문하시중. 금새 눈을 내리깐 나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녀는 황후전 나인입니다. 최고상궁님과 황후마마께서도 소녀의 얼굴을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황적에도 황후전 나인으로 두 해 전에 이름을 올리었고, 단 두 식경 전까지만 해도 황후전에서 마마를 모셨사옵니다.”
자백, 치고는 당당하고 아주 흔들림 없는 말이었다.
“연회가 열리기 하루 전, 그러니까 어젯밤. 최고상궁께서 은밀히 제게 가루 한 첩을 건네셨습니다. 그리곤 이걸 내일 백재인마마의 술잔에 바르라고 그리 말씀하셨지요. 처음에는, 처음에는 너무 두려워서 못하겠다고 거절했지만 황후께서 직접 저를 타이르셨습니다. 어차피 술잔에만 독이 들어 백재인만 쓰러질 거라고, 허니 의심받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그래서 시키는 대로 재인마마의 잔에만 독을 발랐습니다!”
나인이 비통한 듯 소리치면 바닥에 바싹 이마를 갖다 붙였다. 이미 정확과 사건의 진위는 완벽하다.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해 독수공방만 일삼던 황후가, 후궁을 질투하여 죽이려고 독을 건넸다. 황후전 나인을 시켜, 백야의 잔에만 독을 넣었다. 증좌도 증인도 충분한 지금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병부에 순식간에 정막이 찾아들었다.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의 의중. 인생에서 처음으로 머리가 아득해진 대승상은 정국의 눈치를 살피려 했다. 허나 그보다 먼저였던 것은 뒤에서 노기를 참지 못하던 문하시중 윤기였다. 윤기는 곧장 다가가 바닥에 엎드린 나인의 몸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분노로 거칠어진 손길이 나인의 멱살을 그러잡았다. 그 새하얀 얼굴에 견딜 수 없는 패악이 자리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 당장 그 입을 다 찢어놓아야 진실을 말할 테냐? 감히, 황후를. 감히.”
나인은 적당히 당황에 사로잡혔지만 한편으론 너무도 안심한 얼굴을 했다. 억장이 뒤집어지는 기분이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병부령이 말린 탓에 윤기는 나인의 멱살을 잡은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지만, 이 분은 삭일 수 없었다. 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아, 왜 황후를 모함하는 것이지?
“대승상, 이건 어떻습니까?”
그 난폭한 적막위로 한참을 가만히 서있던 정국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단단히 잠긴 천자의 음성은 쓸쓸하고 막막한 잿더미 같았다.
“이번 기회에 덕재패와 관련된 일과 몰래 사병을 키우던 일까지 치사하는 것이.”
“…….”
“황후를 폐위시키고, 대승상과 문하시중을 유배 보내고, 대승상의 자금과 사병을 전부 몰수하면 될 것 같은데?”
끝처리가 흐릿한 말을 마친 정국이 뒤돌아 대승상을 바라보았다. 의연하고 평소 같은 황제의 얼굴은 그날따라 유독, 담담하고 또 굳건했다. 대승상이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자, 정국이 관자놀이를 꾹꾹 짚었다. 면류관을 쓰는 대신 같은 무게의 고뇌를 안고 살아야 할 황제, 그는 황제여야만 했다. 자신을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그래서 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황후를 만날 기회를 주지.”
“폐하….”
“그 후엔, 황후를 폐위시키고 참형에 처할 것이다.”
“폐하!”
담담한 그 한마디가 무미건조해서, 말의 뜻을 모를 번 하였다. 대승상이 절규하며 주저앉았다. 황제는 너무도 고고한 발걸음으로 그런 대승상을 지나쳐 피비린내 나는 병부를 나섰다. 그리고 황제를 배웅하며 몸을 웅크린 서나인의 몸에서 사락- 하고 떨어지는 붉은 머리끈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황제의 사람이었다.
/ 황 후 열 전 熱 血 皇 后 /
十五.
“폐하께선 안에 계십니까?”
익위사가 이리도 큰 목소리로 빠르게 말한 적이 있었던가? 대명전 상궁은 필시 단 한 번도 그런 지민을 보지 못했다.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익위사는 뒤늦게야 오늘 터진 파문을 듣고서 앞 뒤 가리지 않고 곧장 황제를 보러 온 것이었다.
“폐하께선 대명전에 아니 계신….”
“허면 어디 계신단 말입니까?”
지민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황후, 독살, 폐위. 띄엄띄엄 들은 단어들로 처음에는 황후가 독을 지레 삼킨 줄 알고 얼마나 심장이 내려 앉았는 줄 모른다. 허나 독을 마신 장본인이 백야라는 것을 안 순간, 아니 그 범인이 황후로 몰렸음을 안 순간에는 불안감이 숨통을 잡아 죄기 시작했다. 황후가 그랬을 리 없다. 지민은 확신할 수 있었다. 허나 과연 황제도 자신처럼 생각할까? 황제가 설마 이 일로 황후를 버리진 않을까? 확신에도 불구하고 불안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올랐다. 고민할 새가 없었다. 해서 바로 달려왔는데, 빌어먹게도 황제는 그 곳에 없었다. 지민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검을 쥔 한 쪽 손에 땀이 차오고 있었다.
“익위사.”
무슨 영문인지 상궁은 대답을 할 기미를 아니 보이니, 이 황궁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천자를 찾아내는 수밖에. 그리 생각하던 지민을 돌려세운 것은 익숙하게 자신을 부르는 나긋한 음성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제 아랫것들을 거느린 채 느릿하게 걸어오는 태후였다. 지민의 얼굴에 약간의 반가움이 비쳐졌다. 태후라면 역시 연회에 참석하였을 테니 뭔가 아는 바가 있을 것이다.
“태후마마!”
“무슨 말부터 꺼낼지 바로 감이 잡히는구나. 허나 잠시 넣어두도록 하렴. 우선 대명전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제가 바로 황후에 대해 질문할 줄 예상이라도 한 듯이 태후는 가볍게 손을 들어 저었다. 지민이 다급한 듯 미간을 좁혔다. 지금 한가로이 황제도 없는 대명전에 들어갈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태후는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는 것인가? 지민의 불만 가득한 얼굴에도 끝끝내 계단을 다 오른 태후가 대명전 문 앞에 서있는 상궁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장 상궁은 아주 오래전부터 대명전을 모셨으니, 황상이 신뢰하는 수복이겠군.”
“과찬이시옵니다. 태후마마.”
“그래, 황제께서 무얼 시키시던가?”
태후가 지금 무슨 질문을 하는지, 대체 어떤 답을 원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꽤나 연륜 가득한 상궁은 태후를 향해 고개를 좀 더 뻣뻣하게 조아렸다.
“폐하께서 내시백을 보내 지시하시길, 의복을 하나 구해놓으라 하셨사옵니다. 허나 아무도 모르게 준비하라 하셨으니 태후께서도 함구하여 주소서.”
상궁의 대답은 지민의 가슴을 한층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태후가, 또 황제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황후를 둘러싼 이 모략으로부터 그녀를 구하기 위해, 황제는 지금 발버둥을 쳐도 모자랐다. 헌데 갑자기 무슨 의복을 준비하라 시키는 게지? 그런 지민의 반응과는 판이하게 상궁의 답을 들은 태후의 입가에는 미소가 자리했다.
“암. 다물어야지. 아아, 이 태후가 황상에게 제대로 물 먹었구나.”
끝까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태후가 대명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냥 자신은 돌아서서 황제를 찾아다닐까 고민하던 지민은 하는 수 없이 독단적인 마음을 접고 그런 태후를 뒤따랐다. 문이 닳을 정도로 많이 오갔던 황제의 대명전. 태후는 사뿐한 걸음을 내딛으며 마치 처음 보는 공간인 것처럼 정국의 처소를 살폈다.
“내 아드님은 생각보다 더 치밀하고 영악한 사람이더구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지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아, 허나 모든 걸 다 아시는 황상이 여태껏 살아오면서 간과한 게 딱 하나 있더구나.”
“…….”
“황후가 생각보다 여린 사람이라는 것. 지속적으로 던진 비수를 한 번에 만회할 수 있을 거란 착각 말이야….”
활짝 열어놓은 창문에서 다시 멀어진 태후가 손마디로 벽을 스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흔들리는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한 익위사는, 그런 태후의 움직임을 좇았다. 벽을 훑던 그 손길이 멈추었다. 드넓은 대명전 가장자리. 상아색 벽 위에 화려하게 걸린, 천자가 명했다는 의복.
“이리도 미련할 수가.”
“…….”
“그렇지 않니, 익위사?”
새빨갛고 화려한, 이 황궁에서 오로지 황후만이 입을 법한 의복. 그 비단자락을 꽉 쥐며 지민을 바라본 태후가 활짝 웃었다. 황후의 의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지민은 그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皇后
列傳
윤기는 곧장 숨 돌릴 틈도 없이 황후전에 향했다. 아직도 꿈만 같다. 폐위, 참형이라니. 고고한 황후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라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이 일을 너무 가볍게 보았다. 아니, 애초에 황제를 과신하고 말았다. 누이를 홀대하면서도 쉽게 버리지 못할 것이란 착각… 그게 결국 황후와 그 집안을 사지로 내몬 것이다. 빠르게 황후전 마당으로 들어서자 문 밖에서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는 황후전 도미가 보인다. 그녀는 윤기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달려왔다.
“어찌되었습니까? 폐하께서 황후마마의 금족령을 풀어주셨습니까? 누명도 벗겨졌고요?”
도미의 간절한 물음에 윤기는 숨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상궁 앞에서조차 이런데 황후 앞에서 황제가 철저히 당신을 버렸노라, 그 소리를 어찌한단 말인가. 황후전에서는 바깥 상황을 하나도 모르고 있다.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잘 들으십시오. 황후의 명을 받은 최고상궁에게서 독을 전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리 자백한 나인 나타났습니다.”
아아…. 순식간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제 탓이다. 황후전 항아나인들을 모두 충성스럽게 길러냈다 자부할 수 있었는데, 끝끝내 황후는 배반당하고 말았다. 이건 모두 황후전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 최고상궁 제 탓인 것이다. 가여운 황후는, 대체 어찌한단 말인가.
“해서, 해서 우리마마는 어찌되신 답니까?…”
“황제가….”
윤기는 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목이 메는 것 같았다.
“황후를 폐위하고… 참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세상이, 쿵- 하고 아주 거침없고 세차게 무너지는 것이었다. 도미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황후의 변명 한마디 들어보지 않고 그런 결정을 내릴 수가 있는가. 어떻게, 어떻게 황제는 이리도 매정하게 황후에게 신뢰 한자락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마음이 찢기는 고통이 느껴졌다. 황궁에 완벽히 적응하여 제 웃전인 황후를 잘 모시리라 다짐했던 도미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화, 황후. 황후마마를 참형에 처하라고요?”
“최고상궁.”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모함입니다! 우리 마마는… 그런 짓을 할 분이 아닙니다. 제가, 이 소인이 황제폐하를 뵈어야겠어요. 감히 우리 마마를 욕보인 그 나인을 보아야…,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실토하게 만들어야 마음이 풀리겠습니다! 문하시중!”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바닥을 더듬으며 일어나려는 도미를 붙잡은 윤기가 안타까운 눈빛을 했다. 저라고 왜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허나 지금 판국에 사건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허사와 다름없다. 온 대소신료들이 황궁 정문 앞에 엎드려 황후를 참형에 쳐하라 지껄이고 있다 한다. 지금에서 최선은 폐위는 고사하고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최고상궁!”
“하…….”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 되도 않는 시도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마마를, 황후마마를 피신시켜야 합니다. 황제의 병부가 쳐들어오기 전에!”
“황후마마십니다!! 이 황궁의 안주인인 고고한 분이 어째서 도망이나 쳐야 합니까!”
도미의 목소리에서는 듣기만 해도 괴로운 쇳소리가 섞여 들렸다. 최고상궁의 비통한 외침에 급박히 전하던 윤기의 말이 멎었다.
“황후께선 모르는 일입니다. 헌데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평생 높은 자리에서 좋은 것만 보고 들어야 할 우리마마가 백씨 년 따위에게 굴복하여야 합니까? 어째서 황제가, 문하시중이 마마께 이럴 수가 있어요! 도망, 하아. 도망이라 하셨습니까? 마마더러 황제가 있는 황궁을 떠나라구요? 그게 황후마마껜 죽음보다 더 잔인한 것임을 정녕 모르십니까?”
윤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평생 그리도 필부가 되고 싶다 몇 번이고 소원하면서도, 정작 제 누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그리도 두려워하는지. 허나 도미는 달랐다. 도미는 뼛속부터 황후의 사람. 황후의 희로애락을 아는 유일한 그녀의 편.
“허면, 허면 다른 방도가 있습니까? 이대로 소소를 참형시키도록 둬야 한다, 그리 말하는 것입니까?”
답답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무력한 상황이. 전장에 버려진 천애고아, 허나 권력을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리석인 착각이었던 겐가. 이 빌어먹을 연심은 도움하나 되지 않는 아주 하찮은 것일 뿐이었다. 윤기의 허탈한 자조에 최고상궁이 입술을 짓이겼다. 그녀의 눈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이 아주 찰나지만 반짝였다. 아주 무모하고, 충심 가득한 도미의 마지막 염원.
“황후마마는 이 황후전을 떠나지 않습니다.”
“최고상궁….”
“이 도미가 그리 두지 않을 것이에요.”
마침내 결의에 찬 눈을 한 도미가 무력하게 쳐져있던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덩달아 도미를 향한 윤기의 불안정한 시선이 가 닿았다. 목숨을 바쳐 황후전을 섬기는 황후만의 충성스런 도미.
“문하시중께서는 돌아가 계시지요. 머잖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입니다. 황후마마는 제가 지킵니다. 이 한 몸을 바쳐서라도.”
“대체, 대체 무얼 하려는 것입니까?!”
자신이 황후에게 상처 주는 소리를 지껄일 때마다 세차게 째려보던 도미의 눈이 싱긋 휘어졌다.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도미, 끝내 망설임 없이 윤기에게서 뒤돌아섰다. 황궁에 완벽히 적합한 빠른 종종걸음을 놀리며 대체 무슨 생각이냐는 윤기의 외침도 무시한 채, 도미는 황후가 있을 처소를 향하였다. 이미 결심은 끝이 났다. 겁나지 않았다. 허나, 두렵다. 홀로 남겨져야 할 황후가 이 거친 풍파를 견딜 것을 생각하면 자꾸만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문고리를 잡는 손이 달달 떨린다. 이미 황제가 모든 나인들을 데려간 터라 사람 한 명 없이 고요한 황후전이 최고상궁의 숨을 막았다. 도미가 눈을 꾹 감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상에 몸을 기댄 황후가 있었다. 황후가 도미를 보고는 안심하는 듯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다.
“마마….”
3년 전. 처음 황궁에 들어온 황후를 도미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대승상의 여식, 날 때부터 황후가 될 귀한 몸으로 키워진 여자. 허나 그래서 더없이 외롭고 고독한 여린 소녀의 복사꽃같이 핏기 없는 얼굴을 여과 없이 기억한다. 나이답지 않게 의연하고 어른스러운 황후는 처음 인사 올리는 자신의 손을 아이처럼 꽈악 잡았다.
‘나는 참 겁이 많은 사람이다. 네가, 이 황궁에 익숙하다면 나를 좀 지켜주겠니?’
그 티 없이 맑고 조심스런 황후를 향해, 3년 전 자신은 이리 말했던 것도 같다.
‘걱정마십시오. 이 도미, 황궁 그 누구보다 충심 가득한 상궁이랍니다. 이 한 몸 바쳐 마마를 어떤 풍파에서든 지키겠습니다.’
그래. 그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황후를 지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신은 유일한 사람이다. 유일한 황후의 편, 황후의 사람, 황후의 어미. 제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 귀한 사람. 어느새 여인이 되어버린 황후를 눈에 담던 도미는 심장에 묵직한 고통이 일었다.
“왜 그러고 섰느냐? 오라버니께서 뭐라 하시던?”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서있는 도미를 향해 고개 든 황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밖에서 어떤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 간 떨리게 불안하면서도 태연한 척 묻는 황후가 심장이 미어지게 안쓰러웠다. 도미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울음을 애써 삼킨 채, 미소를 지으며 황후를 향해 다가갔다.
“마마. 소인이 마마의 머리를 빗어드린 지 얼마나 되었죠?”
어울리지 않는 퍽이나 다정하고 일상적인 물음이었다. 황후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미를 본다. 그러면 도미는 빗을 가지고 황후가 기댄 침전 머리맡에 걸터앉으면서 황후의 어깨를 살짝 잡아 일으킨다.
“어찌 지금 그런 걸 묻느냐?”
“그냥… 갑자기 옛 생각이 나서.”
도미가 황후를 잘 아는 만큼, 황후역시 도미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헌데 도미가 오늘따라 자꾸만 이상하게 군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이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 냈다. 도미는 황후의 머리를 넘긴 핀을 뽑아 놓고서, 천천히 머리를 빗어넘겼다. 황후는 그 불안한 시선으로 그런 도미를 자꾸만 좇았다.
“이 황후전에 처음 오셨을 때, 악몽을 꾸셨던 것 기억하십니까?”
“아….”
자신에겐 너무도 과분하게 넓었던 황후전에서, 홀로 잠드는 첫 날. 밤새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황후는 어두운 산길을 쉴 새 없이 헤매던 악몽에서 깨어나 곧장 최고상궁 도미를 불렀다. 아닌 새벽의 부름에 놀라 달려온 도미가, 악몽을 꾸어 홀로 잠들기 무섭다는 소심한 황후의 말에 여과 없이 미소를 지었었다. 어엿한 황후인줄 알았는데 아직 여리고 앳된 그 모습에 도미는 제가 옆에 있을 테니 걱정 말라고, 그리 말했다. 그리고 그 날 밤. 도미는 황후의 검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어주었다. 놀란 것을 진정시키고 잠을 자도록. 마치 어미같은 다정한 손길에 황후는 악몽은 꾼 적 없다는 듯이 곤히 잠들었다. 지금도 그날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맘 편히 잠이나 드셨으면 좋으련만.
“참으로 잘 버텨오셨습니다. 마마도, 저도….”
“…….”
“마마. 이 무자비한 황궁에서 소인이 힘이 되셨사옵니까?”
머리를 찬찬히 빗으며 건네는 질문에, 황후는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도미를 획 째려보았다. 그러면 도미는 또 활짝 웃고 만다.
“마마, 잘 들으십시오. 이 도미, 당장 대전 앞으로 가 온 천하에 아뢸 것입니다. 백재인에게 독을 건넨 것은 내 웃전이 홀대받는 것이 화가 나 최고상궁 도미가 독단적으로 시킨 것이다. 황후께서는 이 일에 대해 한 점도 아시는 바가 없다.”
“도미야!!”
그 뒤로 이어지는 청천벽력 도미의 목소리에 황후가 놀란 두 눈을 팽창시켜 튀어나오는 외침을 삼키지 않았다. 지금, 제게 닥친 이 모든 것을 도미가 혼자 안고가려 하고 있다. 대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란 말인가. 황후의 애타는 손길이 도미의 옷자락을 간절히 쥔다.
“한 나인의 자백으로 마마를 폐위하고 참형에 처하라는 명이 떨어졌답니다.”
“…….”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키겠노라고.”
황후의 얼굴에서 넋이 달아났다. 폐위와 참형, 그리고 지키겠다는 도미의 굳건한 말.
“마마. 일각만, 눈 꾹 감고 이곳에 가만히 계세요. 허면 이 도미가 모든 것을 해결하겠습니다.”
“아니…, 안 된다. 아니 돼.”
“명심하십시오! 마마의 안위가 제 안위이고, 마마의 행복이 이 미천한 소인의 행복이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라! 대체 네가 왜 그래야 하는데? 네가 왜!!”
단호하게 제 옷자락을 그러쥐는 황후의 손을 쳐낸 도미가, 그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말했다. 황후의 공허한 맑은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차올랐다. 평소 그리도 태연하고 노련하던 도미의 얼굴이 어째서 오늘따라 한없이 초라하고 약해 보이는지 심장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를 악 물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힘을 빼면 목구멍을 타고 서러움이 한 없이 뱉어질 것 같아 그럴 수 없었다. 그런 황후를 보는 도미는, 간신히 저를 한껏 비집고 들어오는 슬픔을 떨치기 위해 손톱자국이 생길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황후의 눈물은 언제 보아도 가슴 아프고 살이 떨려서 견딜 수가 없다.
“이대로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소인만이 마마를 구할 수 있습니다. 나만이 내 주군을, 나의 웃전을 살릴 수 있어요. 이처럼 감사할 때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하아…하…, 나는… 나는….”
“잊지마소서. 마마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소인이 선택한 것이에요. 마마를 구하는 것은 그 누구의 강요도 아닌 이 도미의 선택입니다. 강해지셔야 합니다. 그 누구도 손 댈 수 없을 만큼 그 자리에, 꼿꼿히 서 계셔야 해요.”
황후의 어깨를 단단히 그러쥔 도미가 그 눈을 맞추며 똑똑히 일렀다. 황후는 그런 도미의 손을 뿌리치고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 안달을 했다. 도미가 죽으면 살 수 없다. 이 망망대해와 같은 황궁에서 대체 누굴 믿는 사는 것인데, 도미가 없는 황후전은, 도미가 없는 자신은 상상도 하기 싫은 악몽이었다. 기어코 울음이 터진다. 눈물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 입술을 타고 서러운 울음이 고요한 황후전을 울려 퍼졌다. 울어서 힘든 건 황후, 그 울음을 들어서 힘든 건 도미.
“후회… 없을 것입니다. 마마… 이 도미, 결연코 후회치 않을 것이에요….”
도미가 황후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하는 황후를 달래고, 제 스스로 흘러나오는 눈물을 삼킨다. 제 여식과도 똑같은, 제 목숨과 진배없는 황후를 살리는 길이다. 후회 같은 거, 할 리가 없다. 황후가 살아남는 것. 그거면 된 거다.
/ 황후열전
“마땅한 아이는 찾았느냐?”
“예. 이미 고질병에 걸려 희망이 없는 아이온데, 제 가족들의 생계를 평생 책임져 준다 하니 기꺼이 하겠답니다.”
“그래, 허면 되었다. 물러가라.”
정국의 손짓에 읍을 한 내시백이 총총 걸음으로 대청전을 나섰다. 황후전 만큼이나 고요한 백야의 대청전. 그곳 안에는 소란스럽던 아까와 달리 침전에 곤히 누운 백야와, 그 옆 의자에 앉아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정국이 있었다. 이미 온갖 신경을 다 써 피곤에 질린 정국의 얼굴에는 티내지 않은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얼마나 격화된 감정을 참고 있는 것인지 제 3자로써는 알 턱이 없을 만큼.
일이 터진 후 황후를 만난 적도 없었다. 폐위와 참형, 그 엄청난 명을 내려놓고도 황제는 황후가 영원히 제 곁에 있을 걸 확신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단 둘. 이 대청전 안에는 백야와 황제 단 둘 뿐이다. 침상에 곤히 누운 백야는 독을 삼킨 것 같지 않게 평안한 얼굴이었다. 그걸 바라보는 정국의 속만 새카맣게 타들어갈 뿐이다.
한참. 침대 맡에 세워 둔 양초가 반 이상이 타들어갈 쯤이었다. 평소 지루함이라면 치를 떠는 정국이지만,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켰다. 분명 태의의 말에 따르면 목숨에는 위험이 없다 하였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깨어나지 않고 있는 것일까.
“폐하, 이제 그만 바깥일을 살피셔야 합니다. 폐하께서도 좀 쉬셔야 하고요.”
참다못한 내시백이 조심스레 들어와 정국에게 간언을 했다. 허나 정국은 아무런 대꾸 없이 한숨을 깊이 쉬며 마른얼굴을 쓸었다. 그 태도에 내시백은 다시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계획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백야에게 미안한 마음이라도 인 것일까? 황제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완벽하게 일을 설계했고, 마땅한 대역도 찾았다. 이젠 원하던 것을 모두 얻을 때가 되었는데, 그는 왜이리 불안하게 구는 것일까. 정국은 왜인지 모를 불안감에 흔들렸다. 뭔가 분명 크게 탈이 날 것만 같았다.
가장 측근에서 오랫동안 황제를 모셨지만 감을 잡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던 내시백이 하는 수 없이 다시 한 번 물러갔다. 그렇게 한결같던 정국의 기다림을 깬 것은, 그 대상인 백야의 반응이었다. 숨만 쉬던 그녀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정국이 동요하여 묻었던 고개를 든다.
“백야.”
잠긴 목소리가 백야의 의식을 더 깨우려는 듯이 이름을 불렀다. 잠깐의 정적동안 깨어날 기미를 보이던 백야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눈동자를 굴려 이곳이 대청전이고, 제 앞에 있는 사람이 황제라는 것을 자각한 순간 안심한 듯 다시 눈을 한 번 감았다.
“폐하….”
힘없고 여린 부름이 들렸다. 황제가 숨을 씹으며 찬찬히 백야의 행동을 살폈다. 독을 마신데다, 금방 깨어났지만 백야는 큰 어려움 없이 상체를 살짝 일으켜 침상에 기대었다. 허나 백야는 부러 인상을 더 찡그리며 제 머리를 짚는 시늉을 했다. 누가 봐도 안쓰러운 겉모습에 황제의 동정을 바란 것인가? 허나 정국의 얼굴만 보아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괜찮은 것이냐?”
다정하고, 또 따듯한 음성이다. 백야는 잠시 의아하다는 얼굴로 정국을 유심히 살피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예, 폐하. 소녀는 멀쩡하옵니다.”
“그래?”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녀를 걱정하시어 내내 곁을 지키신 것입니까?”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백야가 들떠 물었다. 백야에겐 이 일이 죽음의 고비가 아닌 기회였다. 태부의 말대로 불안과 걱정이 많은 대승상 쪽에서 먼저 손을 쓴 것일까? 황후는 멍청하게 제게 독을 먹였다. 총애를 못 받아 독수공방만 하다가 진정 정신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건지 백야가 보기에도 무모한 수였다. 독이라니. 우습다. 이제 황후는 비참하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정국에게서도 내쳐지겠지. 독을 삼킨 건 자신이었지만 백야는 기분이 좋았다.
“제게 독을 먹인 게 황후시지요?”
백야는 사실 정신을 찾은 지 꽤 되었다. 제 옆을 정국이 하루종일 지킨 것도, 자신의 곁에 대승상과 문하시중이 다녀간 것도, 황후가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백야는 이순간 그 누구보다 득의양양했다.
“황후는 참으로 미련하고, 악독하군요. 어떻게 독을 쓸 생각을….”
“…….”
“가엾습니다. 불쌍하기도 하고요.”
무례했다. 허나 백야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 황후는 자신의 발밑이었다. 그동안 아비가 대승상이라서, 마치 타고난 운명처럼 정국의 옆자리를 꿰차던 황후가 거슬려 죽을 지경이었다. 헌데 황후가 제 발로 그 자리를 걷어차다니. 꿈만 같았다. 그래서 백야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황후라는 사람이 어찌 이리 바닥을 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
“정말 소름이 끼칩니다. 황상. 아니 그렇습니까?”
허나 이번에는 황제의 대답이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실컷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던 백야가 의문스럽다, 느낄 찰나. 정국의 미소가 천천히 곤두박질친다. 마치 방금 전 다정함과 웃음이 있었나 의아할 정도로 순식간에 굳어진 안면, 그리고 느긋하게 일그러지는 천자의 고고한 얼굴. 포악하게 굳어지는 정국을 따라, 백야의 해사히 웃던 얼굴이 두려움에 한가득 내몰렸다.
“폐, 폐하… 윽.”
그리고 정말 일순간의 파문이었다. 참상에 한 발을 디딘 황제가 백야의 몸을 벽으로 단단히 밀어붙인 것은. 그리고 그 차가운 얼굴을 들이밀며 큰 손으로 백야의 목을 단단히 쥐어잡은 것은.
“백야.”
아까 전 부름과 판이하게 다른, 가시 같은 부름이 귓전을 내리꽂았다. 백야의 동그란 두 눈이 더욱 팽창될 수 없을 만큼 부풀었다. 목이 막혀 켁켁 기침을 뱉으면서 작은 손으로 제 목을 단단히 죄는 손을 떼어내려 애쓰지만, 정국은 마치 그런 자신에 가소롭다는 듯이 웃는다.
“짐이 분명 말하였을 텐데.”
“…….”
“더 이상, 네 분수에 맞지 않게 날뛰지 말라고.”
정말 죽일 것 같았다. 아아. 천자를 너무 우습게보았다. 사랑만 아는 철부지 사내가 아니었어. 그는 모든 것을 아는, 유일하고 영악한 독사 같은 황제. 황제는 백야가 태부와 손을 잡고 넘봐선 안될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고, 그녀가 황후를 낮잡아 보고 있음도 알았다. 백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제 눈 바로 앞에 있는 정국의 고고한 얼굴이 분노에 사로잡혀 소름끼칠 만큼 차갑게 물들었다.
“네게 독을 먹인 것은 황후가 아니라 짐이다.”
“…….”
“네 목숨 줄을 손 안에 쥔 것이, 짐이란 말이다.”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한 자, 한 자 때려 박는 황제의 음성. 그게 정녕 정국의 진심이었나. 백야는 곧 죽음에 이를 듯한 고지를 맛본다. 맹목적인 황제에 의해.
/ 황 후 열 전 熱 血 皇 后 /
Q&A는 다음편과 함께 가져오겠습니다! 요번화까지 작품에 관한 것,
저에 관한 것 전부 질문 받을게요!!! 편하게 해주세욥!
여러분 내용이 좀 달라진 게 보이시나요?? 이전에는 백야가 스스로
독을 삼키고 황후를 모함 -> 황제가 황후에게 누명을 씌우고 폐위와
참형이라는 벌을 내림. 고질병 걸린 아이를 하나 구해서 황후의 옷을
입힌 뒤 참형에 처한 척 하고 황후를 빼돌리려는 계획.
인 것을요!! 우선 나머지 내용도 차차 풀릴 예정입니다! 아마 다음편
도 곧 가져올 걸요..? 진짜 이렇게 떠벌려놔야 할 수 있겠더라고요ㅋㅋ
ㅋㅋㅋㅋ 항상 재밌게 봐주시고 정성스런 피드백 남겨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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