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mm - no way back
개학 둘쨋날이었다.
눅진한 피로감을 떨쳐낼 수 없는 간만의 늦은 야자. 지하철의 교복 입은 아이들 대개가 가진 고질적 스트레스였다. 하품을 쩍쩍 하고는 산지 얼마쯤 되지도 않은 주제에 손때가 탄 스마트폰을 고쳐쥐었다. 무료하고 불만 많은 대화들. 픽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구겨 넣었다.
걔는, 학교를 그만 둬버린거겠지.
나는 그 애 생각을 했다.
불쑥 학교를 쑥대밭으로 엎어놓고 사라진 그 애. 사실 그날 일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애 하나가 자퇴하고 잠적하는 일은 고작의 가십거리도 되지 못할 것이었다. 그 애는 교실의 화분같은 존재였다. 매 년 치맛폭 너풀대는 학부모 임원이 교실마다 비치해놓는, 주는대로 받아먹다 잊혀지면 말라 죽어가는.
다 죽은 누런 잎을 떨어뜨리고 나서야 그 자리에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이 상기되는.
그런 흔해빠진 교실의 화초 말이다.
담임은 걔 사정이 뭔지 짐작이나 겨우 했을까.
이상한 나라로 떨어지는 앨리스가 된 기분이 들 만큼 정신없이 창문 뒤 정경이 변화한다.
열차는 내 육신을 집으로, 내 무의식은 내 정신을 그 날의 학교로 실어 옮기고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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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방학 보총수업이 끝나갈 무렵의 권태한 어느 날이었다. 갓 수험생이 된 아이들은 부담감에 어깨를 움츠리고 책상에 고개를 처박은채였다. 그리고 고요를 절단한 것은 예리한 날의 비명소리였다. 복도 끝에서부터 교실들을 지나쳐 다른 쪽 복도 끝까지.
직선으로 날아와 꽃힌 비명소리는 몇몇 아이들의 집중을 깨트리기에 이르렀다.
하나 둘 씩 고개를 들어 창 밖을 쳐다볼 즈음 복도에서는 탁,탁 바쁜 발소리가 멀어져가고 있었고, 또 서넛의 아이들이 공부를 멈추고 복도를 주시할 즈음에는.
불안하게 토해내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긴 복도를 울렸다.
'쌤, 저. 옥상 입구쪽 화장실 바닥에요.. 피, 피가..'
웅웅대며 부딫혀 들어온 여자애의 공포에 젖은 음성은 교실에 죽은 듯 앉아있던 아이들의 눈에 불온한 호기심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교실이 웅성이고 복도에서 여러 사람 몫의 발소리가 투닥였다.
그랬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지도 알아채기 어려울만치 존재가 미미한 그 애.
모두의 관심범주 밖에 상주하던 그 애가 드디어 전교생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화장실 끝칸 벽면에 기대 쓰러진 채. 걸레짝마냥 너덜해진 손목 거죽에서 아직도 뜨거운 피를 올칵올칵 내뱉으며.
바닥에는 영화에서 본 것처럼 흥건한 핏물이 고여있었다.
방송실에서는 학생들의 동요를 막으려 급히 방송을 내보냈다.
「 아, 학생 여러분께 주의 말씀 알립니다. 현재 3학년 층 전체가 매우 소란스럽습니다. 현 상황과 무관한 모든 학생들은 교실로 돌아가 자습에 집중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시한번 알립니다. 담당 감독 선생님들께서는 학생들 자습을 인솔 부탁드리고, 학생들은 각 교실에서 자습에 힘 쓰기를 부탁드립니다. 」
나는 상황파악 못하고 재잘거리는 여자애들의 무리 뒤에서 가감없이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아, 불쌍한 도경수.
용기는 가상했지만 말이야. 네 위독을 걱정해주는 사람은 나타나주지 않았구나.
차리리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우리 비밀이 파헤쳐지는 것 보다야.
엠뷸런스 구급대에 실려나가는 도경수는 핏기 한 티끌 없었다. 송장처럼 흐물대는 그 애를 보면서 나는, 지켜질 내 명예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선 젊은 여선생이 말을 건넸다.
"이게 무슨 일이람.. 정말 걱정되는구나, 그렇지?"
"네, 그러니까요. 경수는 묵묵하고 좋은 애 같았는데."
얼른 대꾸했다. 조심스럽고 진심어린 표정을 첨부한 채.
여선생은 날숨을 길게 뱉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때, 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역겹게 느껴졌다. 바닥에 흩뿌려진 도경수의 선혈은 지는 저녁 해에 순결하게 빛났다.
그것이 도경수의, 학교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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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겠습니다.
누가 보시려나 싶지만.. 일단 올려보네요
이면적인 소년들의 시시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