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그러니까 내가 초능력자 라는거야?"
"정확히는 이능력자. 추정하기를 S랭크."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19년 평생동안 초능력하고는 인연도 없던 사람이야. 그리고 이능력자? 허구한 날 테러나 일으키는
처치곤란의 쓰레기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야?"
"우리는 이능력자 관리국 소속의 국원이야."
"그래서? 재활용 쓰레기나 불연소 쓰레기나 쓰레기는 쓰레기 아니야?"
내가 한 말에 움찔하고 남자의 뒤에 있던 여자가 몸을 떤다. 그녀가 앞으로 나서며 내게 말한다.
"네가 우리들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잘 알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곤란해"
"네 놈들 따라서 가고 싶은 마음은 쥐뿔만도 없는데 왜 계속...악!"
이건 왠 불덩어리래?.가까스로 몸을 굴려 날아오는 불길을 피했다.방금전까지 내가 앉아있던 플라스틱 의자는 검게 그을려 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말하는 중이잖아!"
"발화능력이지. 순순히 따라오는 게 좋을거다."
남자는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뒤에 있던 여자가 나에게 사과를 하는 듯 하지만 나한테는 들리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 의자를 본다. 플라스틱이 녹아 엉겨붙은 의자는 처음의 형태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2년 전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심장에 구멍이 뚫려 죽은 어머니. 시체도 찾지 못한 아버지. 재가 되어 사라진 마을.
녹아버린 플라스틱 의자 속에 모두의 모습이 들어있었다. 찾았다. 드디어.
"너지?"
"뭐?"
"나는 아직도 기억해. 생일 케이크에 꽂은 촛불처럼 마을 곳곳에 불을 질러놓고 웃어제끼던 놈들을"
"이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는지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던 여자가 앞으로 나선다. 그런데 이미 늦은 걸 알까?
2년 전과 같은. 하지만 한결 익숙해진 느낌이 내 몸을 타고 흐른다. 빛이 오른손을 타고 흘렀고. 나는 그대로 재수없는 놈의 면상을 향해 후려쳤다.
<1>
12월의 밤 공기는 쌀쌀한 편이다. 나를 기다리고 계실 부모님이 걱정된다. 나 역시 부모님이 보고싶다. 한 달만에 집으로 돌아가는데 보고싶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지. 거기다 아들을 위해 비싸디 비싼 서부 유학을 보내주신 분들이라면 더더욱.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상 나를 보내놓고 부모님은 한달동안 난방도 제대로 하지 못 하셨을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더 크게 성공해야한다. 배리어 끝자락에 간신히 발만 걸쳐둔 32구획의 천민이 아니라. 수도 1구획의 가장 좋은
집을 사서 부모님을 모셔야지. 그리고 예쁜 여자친구도 사귀고, 결혼도 하고....아차, 일단 집에 가고 봐야지.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조금이라도 빨리 부모님을 보고 싶다. 망할 교육부. 왜 하필 5구획에 내려줘서 32구획까지 비싼 돈 주고 오게 만든거야!
"여보. 현성이는 아직 멀었어?"
"기다려 봐요. 아직 오려면 멀었지. 내일 새벽에나 도착할텐데 뭘 저리 급하누."
"교육부에는 전화 걸어봤어? 왜 애를 5구획에 내려주는 거야!"
"32구획 거주민인 우리가 참아야지 어쩌겠어요. 그나마 5구획이 교통망이 잘 되있으니까 한 3시쯤에는 오겠죠?"
"망할!"
영훈은 옆에 둔 옷을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요? 좀 있으면 애 올거 같은데?"
선희가 그 모습을 보고는 의아해서 묻는다.
"아. 마중 나가려고 그러지. 아직 17살 밖에 안 된 앤데 몬스터라도 만나면 어떻게 해? 32구획은 배리어도 쥐똥만해서 잘못했다간 큰일난단 말이야."
"하여튼.....빨리 들어와요. 밥 해둘테니까."
"알았어. 애 데리고 들어올테니까 당신도 걱정 하지 말라고."
영훈은 문을 열었다.
<2>
검은 후드로 몸을 가린 일련의 무리가 32구획 입구에 나타났다.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붉은 후드를 덮어쓰고 있다.
붉은 후드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던 남색 후드를 입은 사내가 물었다.
"대장. 왜 하고 많은 곳 중에 여기 32구획을 선택한 이유가 뭐요?"
"아까 브리핑 때 뭘 들은거냐? 32구획은 이능력자 관리국 놈들이 없다시피 해서 테러의 시작으로 가장 알맞은 곳이라고 했잖아?"
"사람 많은 곳에서 하면 효과가 좋을텐데....."
"그랬다간 우리가 잡히고 말 걸? 잔말말고 시작하자. 관리국 놈들이 없으면서도 거주민이 제일 많은 32구획을 박살내면 동부의 이목이 여기로 쏠리겠지."
붉은 후드는 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넘겼다. 붉은 후드만큼이나 빨간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내려온다.
"자, 슬슬 시작해야지? 최대한 많이 부수고 많이 죽여라! 전 동부의 이목이 여기로 모이도록 해!"
"알겠습니다 대장! 다들 뭐 해? 빨리 움직여!"
붉은 후드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에 도열해 있던 검은 후드들이 32구획으로 들어간다.
소리가 전혀 나지 않으면서도 일반인들이 달리는 것보다 빨리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유령처럼 은밀하고 신속했다.
<3>
"이 놈이 슬슬 올 때가 됬는데......"
영훈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아직 불빛이나 사람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 때였다.
"어라? 저게 뭐지?"
멀리서 뭔가가 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도 영훈은 그 쪽을 향해 걸었다.
"아......"
후드를 쓴 자들이 마을을 향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영훈은 다가가는 걸 멈추고 가로수 뒤에 몸을 숨긴 채 놈들을 살폈다. 겉대중으로 훓어도 10명은 훨씬 넘어보였다.
'빨리 돌아가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해......'
영훈은 발소리를 죽인 채 살금살금 마을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뒤에서 별다른 인기척이 전해지지 않는 걸 보니 놈들이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는 못 한듯 했다. 그러나 영훈의 착각이다.
"일단 하나."
뒤에서 들려오는 탁한 목소리에 영훈은 뒤를 돌아봤다. 어느 새 가까이 다가온 붉은 후드를 입은 남자가 자신의 등판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리고 등에서부터 전해지는 화끈한 감각.
"으아아아아아아!"
참기 힘든 고통이 전신을 잠식해 간다. 영훈은 고통에 몸부림 치면서도 그들로부터 한 발짝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땅을 기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팔이 화끈해지나 싶더니 기는 것 조차 힘들어진다.
"현성아, 여보......"
눈 앞이 뜨거워지며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영훈은 눈 앞에 아른거리는 가족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꽤 오래 버티는 군."
숯덩어리가 된 영훈의 시신을 바라보던 붉은 후드가 영훈의 머리를 차며 중얼거렸다.
머리는 가볍게 목과 분리돼 한 쪽으로 멀리 날아간다.
"다들 뭐하나? 시작 안 해?"
뒤에 서 있던 검은 후드들이 마을로 진입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마을 곳곳에서 연기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이걸 보니까 꼭 촛대 같군."
"대장. 그거 설마 개그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뒤에 서 있던 남색 후드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온다.
"흥, 시끄럽다. 너도 어서가서 돕지 못해?"
"실력도 안 되는 모자란 놈은 갑니다. 가요."
남색 후드는 중얼거리며 허공에 몸을 띄웠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사람이 중력을 거스르고 하늘을 날다니!
하지만 익숙한 장면인지 붉은 후드는 그 모습을 보고서도 놀라지 않았다. 다만 날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 마디를 할 뿐이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4>
"어라?"
지금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마을이 불에 타고 있는 게 분명한 거겠지?
마을 곳곳에서 솟는 연기와 불꽃이 거짓말일리는 없으니까 분명 저 모습은 사실인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째서? 배리어 소실 경보는 들리지도 않았는데, 화재라도 생긴건가?
나는 서둘러 마을로 들어갔다. 무너진 집에 불타 죽은 사람들. 거기다 비명소리까지 더해 마을 안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그나마 우리집이 32구획에서도 외각에 위치한 곳이라 그런지 아직은 무사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안전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을 헤치며 집을 향해 달렸다.
"엄마! 아빠!"
나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며 소리쳤다. 어디 있는 거야! 살아 있다면 말 좀 해요! 엄마! 아빠!
"현성이니....?"
"엄마?"
부엌쪽이다! 나는 부엌문을 열었다. 그러자 차가운 바람이 내 몸을 훓고 지나간다. 왜 이렇게 차가운 거야?
"여기 위험해 엄마. 얼른 나랑 도망치자. 응?"
나는 엄마를 끌어당겼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엄마는 내가 끌어당기는 대로 힘없이 쓰러졌다.
"엄마!"
엄마의 가슴에 5백원짜리 동전만한 구멍이 뻥 뚫려있다. 거기다 손은 산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차갑다. 얼음을 만지는 것 같은 기분에 나는 몸을 살짝 떨었다.
"아들 왔어? 밥 차려놨으니까 먹고 있어. 엄마는 너무 졸리네. 아들, 엄마가 지금 너무 아파서 그런데. 엄마 좀 방에 업어다 줄래?"
"엄마! 자지 말고 일어나! 지금 밖이 장난 아니란 말야!"
"......"
"엄마? 엄마 왜 그래? 여기서 자면 감기 걸린다니까? 일어나. 한 달만에 보는 건데 계속 이렇게 나올거야?"
"......"
나는 엄마를 업었다. 무게가 장난 아니네. 나 없는 동안 뭐라도 먹었나?
"에이. 엄마 살 찐거 같다. 나 없는동안 뭘 먹은거야? 팔 좀 제대로 걸쳐봐. 자꾸 흘러내리잖아."
침실문을 열고, 엄마를 조심스레 침대에 눕힌 다음 이불을 덮어드렸다.
"잘 자 엄마."
문을 닫는데 문고리 소리가 유난히 크다. 엄마는 잠귀가 밝아서 이런 소리에도 곧 잘 일어나는데 어쩌지? 잘 때 귀찮게 한다고 호통칠게 뻔하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엄마의 잔소리를 기다렸다. 그런데 잔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엄마. 자?"
방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더. 조금 더 크게.
"엄마, 자요?"
"엄마, 자는 거야?"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엄마 곁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눈을 감고 계신다. 엄마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려본다.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다. 아무래도 엄마는 눈을 뜰 것 같지 않다.
갑자기 머리 속이 하얘지며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버지는 어디로 간 걸까, 어머니는 왜 죽은걸까?
마을은 왜 불에 타고 있는거지? 몸이 뜨겁다. 너무 뜨거워서 전신이 타 버릴것만 같아.
나는 정신을 잃었다.
<5>
"현재 피해 상황은?"
"32구획의 절반이 화재로 소실. 추정 인명피해는 3백명 정도입니다. 부상자는 그 보다 더 많을거라 생각됩니다."
"어떤 놈들이야?"
"현장에 파견된 요원들의 보고에 의하면 불꽃을 쓰는 능력자가 다수 있다고 합니다."
"인페르노(inferno)인가? 지하드(Zihard)의 정예 부대가 어째서 변방인 32구획을 잡은거지?"
"요원을 충원할까요?"
"32구획 근처에 있는 이능력자들한테 통신 걸어."
"알겠습니다."
오퍼레이터는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이능력자 관리국 동부 제 5부장 김준혁은 갑작스러운 테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가 발령받은 32구획은 평소 배리어 소실로 인한 침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위험요소가 없는 평화로운 구획이었다. 다만 가난한 하층민들이 사는 곳이라 인구가 필요 이상으로 많다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못 했다.
'젠장할 놈들. 왜 하필 32구획을......'
"지, 지부장님?"
"왜? 지금 생각중인거 안 보여?"
"그게 아니라 32구획 내에서 새로운 파동이 등장했는데요?"
"뭐?"
준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오퍼레이터가 가리키는 모니터의 레이더를 살폈다.
32구획의 에너지 집적도가 수직선을 그리며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