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 : 만개하지 못한 꽃
세계의 꽃 지음
생각해보니 나는 그의 이름도 직업도 나이도 아무것도 모른다. 옷 치수를 다 재고나면 그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 되었습니다. 아가씨”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로 가 시간이 많이 걸리나 물어봤다. 그는 아마 한 시진정도 걸릴 거라며 앉아서 기달리자며 자신의 옆자리를 내주었다. 또 기다릴 생각에 한숨을 쉬며 앉았다. 그래도 요즘엔 신문물이 들어와 빨라진 거라며 나를 다독였다.
* 한 시진 : 옛 시간개념, 약 2시간
“혹 존함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사극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를 설마 내가 할 줄이야.
“저는 영의정댁 김가의 석진입니다.”
“아.. 되게 높은 집안 분이셨구나..어쩐지...”
“그대는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저는...어.. 이름이...”
“혹 곤란하시다면 안 알려주셔도 됩니다.”
“미안합니다. 그냥 ‘주’라고 불러주세요.”
2시간 동안 할게 없다보니 대화만 하게 되었다. 덕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집안이나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온 그의 이야기, 몇 십년동안 단발령을 버티다 최근에 머리를 짧게 잘랐다는 동네 최고령자 할아버지 근황까지 그는 처음만난 나에게 이것저것 들려주었지만 나는 그에게 나의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단발령 : 1895년(고종 32) 11월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내린 명령.
“아 맞다 혹시 주변에 잘 곳 있나요?"
“빈관 같은 곳 말입니까?”
“빈관이 호텔 같은건가... 네 아무튼 그거요.”
“음... 아마 당분간 일본 순사들이 쓸 겁니다.”
“와 정말 싫다. 혹 거기 말고는 없습니까?”
“여인 혼자 지내기엔 위험 할 듯 싶은데, 괜찮으시다면 제 집에서 묵으시겠습니까?”
“집이요?”
무슨 옛날이나 지금이나 재벌들 스케일이 어마어마하다. 여기는 그의 개인적인 공간이라고 한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선물해 주셨다고
그래.. 옷도 덜컥덜컥 사주는데.....
그는 땔감이나 이불, 쌀독등 생활에 필요한 이것저것들을 알려주고 내일보자며 떠났다.
옷도 선물 받고, 집도 이렇게 좋고 왜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좋은게 좋은거다라며 합리화중이다.
계속 같이 있다 이 집에 혼자 있으려니 무섭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했다. 그 짧은 시간에 정이라도 들었나보다.
밤이 되니 더 심심했다. 여기 오기 전에는 중독자처럼 핸드폰만 쥐고 살다가 핸드폰이 없으니 죽을 맛이다. 손목에 차여진 시계는 시간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악세사리 그 이상 이하도 아니였다. 이게 찐 k - 온돌이구나 하며 몸을 지지다가 문득 내가 여기 온 이유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분명 차에 치였다. 죽었으면 죽었지 과거로 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펜과 종이를 찾다 먹과 한지가 보이길래 급히 집어 하나둘씩 써 내려갔다. 여기가 진짜 조선이라면 지금 이 시대는 일제강점기일수도 있다. 몇 십년 전에 단발령이 실시해 최근에 머리를 자랐다고 했다. 그럼 못해도 1920년인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역사를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부여잡고 길었던 하루의 끝을 마무리한다.
개화 : 만개하지 못한 꽃
“주야”
어? 오늘은 조금 일찍 왔네
김석진과 나는 어쩌다보니 매일매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찾아온 경우지만 그래도 할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차에 그의 걸음은 나에겐 하나의 기다림이 되었다. 처음엔 막막했지만 나도 나름 이 시대에 점점 적응해갔다. 성적 신경 쓸 일도 것도 없고, 인간관계 걱정할 일도 없으니 평소 앓던 편두통도 불면증도 없어졌다. 하지만 엄마 아빠는 보고 싶었다. 그 쪽 세계에선 내가 죽었을까 살았을까...
“오늘 아침에 옷 방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저번에 맡긴 옷이 다 완성 되었답니다.”
“벌써요? 대박, 그러면 잠시만 기달려주세요 얼른 채비하겠습니다!”
“네 천천히 하십시오. 그럼 저는 뭐 필요한거 없나 보겠습니다”
저번에 입었던 한복은 나름의 신식 한복이었다. 전통 한복이 아닌 촌스러운 꽃 무늬가 있는 저고리와 단색의 치마. 나는 그것들이 좋았다. 처음에는 몸을 사리기 위해 서양식 의복을 입었지만 딱 달라붙고 신축성이 없는 재질에 들숨과 날숨에 숨이 막혔다. 혼자 입기에도 불편하거니와 석진과 다닐 때는 눈에 띄기 쉽상이었다. 그와 반대로 한복은 가슴 언저리에 끈을 매기 때문에 배가 나오든 말든 걱정이 없었다. 숨쉬기도 편하고 빨래하기도 쉬워 석진에게 부탁해 한 벌 더 맞췄다.
“오라버니 덕분에 이 곳이 점점 좋아집니다”
“저도요”
“크흠, 오라버니는 왜 저에게 계속 존댓말을 하십니까?”
“혹 싫으십니까?”
“음.. 싫은 것 보다 제가 존댓말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죠”
“그럼 주는 말을 놓으십시오. 저는 이게 편합니다.”
“어떻게 저만 말을 놓습니까? 저도 염치라는 게 있는 사람입니다 안 그래도 이것저것 고마워 죽겠구만...”
“그럼...”
“가베 먹으러 갈까, 주야.”
“대박”
완전 콜이다.
그는 부끄러운 듯 도포 자락을 흩날리며 휘적휘적 걸어갔다.
이 근방에서 제일 최신식으로 보이는 이 다방엔 커피와 푹신해 보이는 카스테라를 팔고 있었다. 주위엔 하하호호하는 목소리, lp판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 그리고 오랜만에 맛보는 커피와 빵. 새삼 이렇게 소박한거에 행복하다니. 덩달아 내 기분도 하늘까지 솟아올랐다.
내가 이렇게 기쁜 건 빵순이인 내가 빵을 먹어서 그런거야.
“가베 먹어본 적 있어?”
“응 맨날 먹었어.. 살기위해서...랄까...이게 없으면 사람이 좀비가 돼....”
기분이 들떠서인지 말이 뇌를 안 거치고 그냥 나와 버린다.
“나는 처음인데”
“와 부잣집 도련님이 여태까지 뭐하고 살았대, 유학도 갔다 왔다며 일본에서 안 먹었어?”
“일본?”
“아..미안 미안 동경”
“거기서도 하고 싶은 게 없었어.”
“참... 오라버니도 나처럼 재미없게 살았네.”
“나 처음 만날 때부터 궁금한거 있었는데 물어봐도 돼?”
그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 거렸다.
“질문이라고 하기도 유치한데... 혹시 한복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어?”
“정체성을 잃기 싫었어.”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못 했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가베만 쳐다봤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그를 쳐다보는 대신 다른 곳을 보는 일 밖에 없었다.
“미안. 근데 어디보고 있는거야?”
“응? 아니, 뭔가 우리만 이방인 인 것 같아서.”
“주위 둘러봐 봐 우리 빼고 다 양복을 입고 있잖아.”
“우리가 아니라 저 사람들이 이방인이야.”
“조선에서 조선 옷을 입는 게 이상한게 이상한 거야?”
“...”
석진에게서 처음 본 얼굴이다. 항상 잔잔한 물결 같았던 그의 얼굴엔 오늘 처음으로 파동이 생겼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다.
잠시 잊고 있었다.
지금은 일제강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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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세계의 꽃 입니다.
오늘은 음악을 두 개를 준비했습니다. 일단 주인공인 '주'의 심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적적했던 마음에 바람이 불어서 신난 그 마음을요.
석진의 태도가 너무 예민한거 아니야?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 역사에 대해 예민해야 할 것 같아서 저런 대사를 넣게되었습니다 혹시 불편하셨더라면 사과드립니다...
제 글이 어떤지 모르겠네요ㅠㅠ 그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달아주시면 개인적으로 엄청 힘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