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혁은 내 전 남자친구다. 애인 사이였다고 하기 민망하게도 관계가 무지하게 나빴다. 특히, 김정우와는 악연이었다. 도와주겠다는 말로 현혹 시키고 방치했다. 그저, 김정우와 친하다는 이유로 이용당했다. 서로 필요에 의해 철저히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단단한 착각이었다.
"김정우!"
한동안 김정우는 내 부름에 무시했다. 깊게 예상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둘에게 일어난 사건을 알면서도. 김정우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으면서도. "친구라며. 넌 의리도 없니?"
한심했다. 그리고 김정우와 처음으로 나눈 다툼이었다. 명백한 내 잘못이었다. 그럼에도 현재 김정우는,
"다음부터 그놈이 연락하면, 나한테 전화해."
날 도와주려 했다.
첫사랑은 시무룩
김정우
동스청 이동혁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실들이 한곳에 비추던 색들은 조화롭게 어울리지 않았다. 이시영을 제외한 모두가 엉켜있었다. 이동혁은 내게 눈물을 보였고, 김여린은 동스청을 좋아했고. 김정우는 김여린을 좋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정우를 좋아하는 건 나였다. 오로지 나만이 모든 걸 눈치채고 있었다.
"이어줄까? 정우야~?"
이시영은 그날 이후로 놀리는데 재미 들렸다. 그럴 때마다 온몸이 덜덜 떨었다. 이유 모를 불안함과 질투심에 그 자리를 피하곤 했다. 이기적인 나는 순수하게 응원해주지 못했다. 김정우가 상처받는 게 싫으면서도 나를 너무 아껴서 우발적인 행동이 나왔다. 모순 덩어리였다.
옥상 계단은 더 이상 서로 모르던 때에 각자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 형, 왜 좋아해요?" 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곰곰이 생각하다 팔을 뒤로 꺾어 먼지 묻은 바닥 위에 두 손바닥을 댔다.
"첫사랑을 의인화하면 김정우 일거 같아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이네요."
"너는? 누구 좋아하길래 그래."
"누나가 한 말이 이해되는 날. 그때 말해줄게요."
시시한 답변을 늘어놓고 계단에서 일어서는 이동혁이었다. 종이 치는 소리에 맞춰 내려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날 보면서 자신을 생각한다고 했다. 나도 이동혁을 보면 내가 투영되어 보였다.
"아, 오늘 끝나고 분식집 가실래요?"
"안녕하세요."
꾸준히 고개를 숙여 말을 걸었다. 연락이 불편하다고 한 뒤로는 거슬리는 문자가 오지 않았다. 여린은 그것에 대해서는 만족했지만 대면이 더 어색했다. 이름처럼 마음도 여린 탓에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어서 대충 받아줬다. 금요일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누나! 안녕하세요."
헤실헤실 웃어오는 인상이 순해 보였다. 안 좋게 말하면 헤퍼 보였다. 자율 동아리라서 금요일을 제외하고도 만나는 날이 늘어날 거라는 건 잊고 있었다. "사진이나 찍어." 여린이 툭- 던진 말에 눈을 크게 뜨는 성혁이었다.
"헐.. 그거 알아요? 누나가 저한테 '안녕.' 제외하고 첫마디라는 거!!"
고작 한 살 차이인데 왜 이렇게 철없어 보일까. 외동인 여린은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 거라는 상상이 들자 헛웃음만 나왔다. "셀카나 찍을래? 사진 동아리니까." 찰칵- 카메라 너머로 쭈뼛대며 브이 하는 성혁과 손가락만 출현한 여린이 사진첩으로 들어왔다.
여린은 스청에게 다가갔다. "안녕."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받아쳤다. "안녕." 다시 소리 내어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스청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시준희."
"알아. 그냥 인사한 거잖아."
이미 여린은 과거에 고백을 한 전적이 있었다. 스청의 말이 철벽을 치기 위해 꾸며낸 말인지. 아님 순수한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을 보는 눈엔 '무(無)'의 빛이 한가득이었다.
다 들어버렸다. 이미 이용당한 경험이 있어서인가. 저들에게 상처받기 싫어서 모른 척했다. 요즘 동스청이 틈을 내어 우리 반에 오는 이유가 있었다. 저번에 이시영이 놀리는 말투로 한 말이 생각났다. 심장이 쿵 뛰었다. 불안할 때면 나오는 본능이었다. 손톱을 물어뜯는 건 습관이었다.
"그만. 그러다 상한다."
저절로 팔꿈치부터 아래로 내려갔다. 이 목소리만 들으면 내가, 내 몸이,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런 감정이 들었다. "나 하고 싶은 말 있어." 그 목소리로 어떤 부탁을 하든 나는 다 들어줄 테니까. 김정우가 이끄는 곳으로 따라갔다.
충격과 황당함이 가까운 단어일 수도 있다는걸, 여러 복합적인 감정으로 인해 그냥 다 포기해버리고 싶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엔 1분이면 충분했다.
'미안해. 정우야.'
아팠고, 망가지고 싶었다. 차라리 스스로 무너뜨리면 아무도 상처받지 않겠지. 그래도 그러지는 않았다. 이미 내 퍼즐은 잃어버렸다.
나 고백했어.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견고한 김정우의 표정을 보니 어떤 답을 듣고 왔는지 예상이 안 갔다. 거절도, 수락도 아닌 무언가가 담담하게 만들었다.
"차였어."
아니었다. 완벽한 거절을 통보받고 왔음에도 담담해 보였다.
"이상하게 슬프지는 않네."
김정우도 알고 있었다.
"걔가 동스청 좋아하는 거 알고 있어서 그런가."
나와 김정우는 같은 상황임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모두가 같았음에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이기적이라고 하기엔 어느 하나 불쌍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