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렸다.
대문 앞에서 비를 맞으며 한참을 앉아있었다.
'제 아비도 죽인 년!!!'
카랑카랑한 그 노친네 소리가 머리에서 아프게 울린다. 나는 이럴때 네 생각을 한다.
너는 아마 새로 사귄 여자친구와 있을 테지. 난 그런 너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 죄책감인지 오기인지 조금 더 버텨보지만 어질어질한 머리가 한계라고 외쳐대는 듯 했다.
비가 더 거세게 내렸다. 더이상 앉아있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버티던 것이 무색하게 훌훌 털고 일어났다.
어쩔 수 없잖아. 비가 오고 아프고 기댈 곳이 없는 난, 윤기 너를 찾으러 갈 수밖에 없는 걸.
나쁜 애가 되기로 마음을 먹자 맨발로 걷는 기분이 상쾌했다. 우산을 쓴 사람들 사이를 걷다가 우산 살에 볼이 긁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갈 곳이 있다는 그 사실이 나를 걷게 만들었다.
그러나 네 집 앞에서 나는 완벽히 뻔뻔할 수 없었다. 문 안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죄책감을 상기시켰다.
"제 죗값에 이것도 달아주세요"
습관처럼 나오는 말을 읖조리고는 초인종을 누른다.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열고 동시에 나를 보고 표정이 굳는다.
"피자왔어?!"
안에서 민윤기의 목소리가 들린다. 피자 대신 불청객을 받은 저 애의 표정이 좋지 않다.
"안녕 은솔아! 학교에서만 보고 밖에서는 처음이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밝은 척 인사를 한다. 역효과다. 표정이 금세 사나워진다.
"야, 김여주 니가 여긴 왜 와?"
"무슨 일이야?"
피자를 받으러 간 여자친구가 오지 않자 뒤따라온 민윤기가 나를 발견한다.
"야, 너 볼...!"
민윤기가 제 여자친구를 지나 내 팔을 잡고 집 안으로 들인다. 나는 당황한 듯 말을 내뱉는다.
"여자친구랑 있는지 몰랐어. 미안 잘못 온것 같네. "
"그럼 나가던가 당장"
단단히 화가 난 듯한 그 애가 내 팔에서 민윤기의 손을 거둬내고 말한다. 예상보다 사납다. 이렇게까진 안하려 했는데 묘한 심술이 난다.
"그래 난 가볼게, 둘이 좋은 시간 보내"
미련없다는 듯 몸을 돌리고 속으로 셋을 센다.
하나
둘
셋
문가로 걸어가던 나는 비틀거리고 내 허리를 민윤기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받쳐온다.
"이 몸으로 가긴 어딜가"
스크라이크. 나도 모르게 작은 웃음이 나온다.
"민윤기,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뒤에 서있는 그 애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하이톤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려 거슬린다. 알아서 처리하라는 듯이 아픈 머리를 조용히 누르자 너는 나를 힐끗 보더니 그대로 안아든다.
"야!!!!"
마침내 폭발한 그 애가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소파에 눕힌 너는 그 애의 팔을 잡고 문 밖으로 내쫓는다.
"나 지금 이렇게 가면 너 다신 안봐."
마지막 으름장. 귀엽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하고.
"미안, 못 데려다 주겠다. 오늘 우리 헤어진 거다"
생각보다 너는 냉정하게 문을 닫아버린다.
너무하네. 아마도 저 애는 나를 많이도 미워하겠구나. 불편한 마음이 조금씩 삐져나오려고 해서 눈을 감아버린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집안이 평화롭다.
비에 젖은 나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민윤기는 익숙한 듯 서랍장에서 약상자를 꺼내온다. 그 모습에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팔로 얼굴을 가렸다.
"됐어 귀찮아"
물론 가볍게 내 팔을 내려버리는 너에겐 통하지 않는다.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는데 뭐가 귀찮아"
세심한 손길로 우산살에 긁힌 내 뺨의 상처를 살펴보더니 후시딘을 바른다. 다친지도 몰랐는데 너의 손길에 갑자기 아파온다.
"윤기야, 나한테 약 발라준건 네가 처음이었다?"
"알아"
그래서 더 너를 놓치고 싶지 않나봐.
"나때문에 여자친구랑 헤어져서 어떡해?"
맘에도 없는 소리를 괜히 해본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해오는 너에 만족하면서.
"상관없어"
너는 약을 다 바르고 밴드까지 붙여준 후 약상자를 정리하려고 일어선다.
"윤기야, 나는 참 나쁜 년이야"
그 말에 나를 바라보는 네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다. 그 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이.
"근데 그런 나를 받아주는 네가 더 나빠"
한참을 가만히 서있던 너는 조용히 거실불을 끄고는 지갑을 챙겨서 나간다.
"쉬어. 죽이라도 사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