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린건 의도한 거였으나 오랜 시간 비를 맞은 몸은 꽤나 곤했던지, 내가 눈을 뜬 건 추적거리던 비가 멈추고 날이 많이 어두어졌을 때였다.
부엌에서 나오는 불빛과 그 곳에서 죽을 끓이고 있는 너를 가만히 바라보자 어떻게 알았는지 와서 앉으라고 한다.
"네가 끓여주는 건 싫은데"
"사온거 그냥 데우는 거니깐 잔말 말고 먹어"
그제서야 안심한 듯이 수저를 드는 내 모습에 너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다.
죽을 먹는 내 앞에 앉은 너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묻는다.
"그 할망구가 또 쫓아냈냐?"
"비 오는 날이잖아"
비 오는 날 자신의 아들을 잃은 그 여자는 빗속에서 자신의 아들의 환각을 본다. 그런 날이면 나는 대문앞에 앉아서 비가 멈출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태어남과 동시에 엄마를 죽이고 태어난 나를 그 여자는 무척이나 싫어했다. 유명한 무당에게서 본 내 사주에는 사람을 죽일 살이 두개나 있었기 때문이다. 첫번째는 엄마였고 두번째는 그 여자가 사랑한 자신의 아들이었겠지. 내가 일곱살이 되던 해, 비가 많이 쏟아지던 날 아빠는 크게 교통사고를 당했고 죽는 순간 나를 끌어안아 보호했다고 한다.
죽은 아들의 장례식에서 나를 바라보면서 그 여자는 조용히 말했다.
'내 눈에 띄지 마렴. 죽여버릴지도 모르니'
아마 자신의 아들을 죽인 나를 자신의 집에 머물 수 있게 해준것만으로도 그 여자 딴에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럼 바로 전화를 하던가"
민윤기는 불만이라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핸드폰이 꺼졌어. 말도 안되는 변명을 내 뱉는 나는 끝까지 죄책감을 숨긴다. 너한테 만큼은 하나도 잘못 한 것 없이 굴고 싶으니깐.
망할 사주를 떠올리니 얼마 먹지 않은 죽이 속을 더부룩하게 만든다. 나는 그만 수저를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 갈게"
미련없이 현관으로 향하는 나를 서둘러 따라나서며 민윤기가 묻는다.
"지금 간다고?"
"알바 가야 돼."
내 말에 시계를 한번 바라본 너는 맘에는 안들지만 어쩔수 없다는 듯이 차키를 꺼내든다.
"데려다줄게"
물론 거절이다.
"그냥 걸어갈래"
분명 맘에 안들지만 너는 두번 권하지 않는다. 김여주는 말을 들어먹는 법이 없으니깐.
너는 신발장에서 택도 안 뜯은 새 신발을 꺼낸다. 가끔 맨발로 오는 날 위해 항상 구비해놓는 신발.
"이거... 그만 사두라고 말하고 싶은데 지금도 맨발이라 할말이 없네"
너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동시에 비참하기도 하다.
"알바 끝나면 연락해. 데리러 갈테니깐"
아무렇지 않은 듯 나를 챙기는 너를 외면하며 현관문을 나선다.
"나 늦어, 기다리지마."
"늦어도 상관없어."
"...그리고 집에 들어갈거야"
민윤기가 가장 싫어하는 말. 화내지 말라고 애써 웃어보인다.
"그 망할 할망구가 내 할머니인걸 어떡해"
웃음이 통하지 않은 너는 미간을 한껏 찌푸린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떼다가 다시 다문다. 내 모든 것이 네가 불만을 가지게 만드는 구나. 이 와중에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
비가 한차례 쏟아부었음에도 카페에는 손님이 많았다.
게다가 어찌나 진상들이 많은지. 샷추가 없이 아메리카노를 진하게 해달라고 하지를 않나, 외부 음식 반입은 금지라는 내 말에도 케이크를 사들고 와서 포크를 달라고 하지를 않나.
한참을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마감시간이 20분 남았다. 10시 사십 분을 넘기고 있는 이 시간에 카페에 남아있는 사람은 저 남자 혼자다.
항상 이 시간에 와서 캐모마일 티 하나를 시키고 앉아있는 그는 10분 뒤인 50분에 자리에서 일어설 것이다. 매일 정해진 시간대로 움직이는 저 남자는 기억하지 않을래도 기억할 수 밖에 없다.
주문은 우선 마감했고 손님이 있으니 자리를 비울수는 없어 주변 정리와 기계를 닦는데 갑자기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들어온다.
이미 술 한잔 했는지 얼큰하게 붉어진 얼굴과 비틀거리는 걸음에 불길한 예감이 든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말한다.
"손님 주문은 마감됐습니다"
"뭐? 그럼 카페 문은 왜 열어놔"
아 젠장...
"저희가 매장은 11시까진데 주문은 30분 까지라서요. 죄송하지만..."
"그런게 어딨어. 주문 받으라면 받을 것이지"
역시나다. 짜증이 나지만 술취한 남자를 상대로 뭘 할 엄두가 안나 그냥 주문을 받기로 한다.
"네, 어떤 걸로 주문하시겠어요"
"뭐야!!! 주문 받을 수 있으면서 뻗대기는. 버르장머리 없이. 야 너 나 무시하냐?!!"
이미 이 남자는 거절당한 것에 빈정이 상했다. 이럴 때는 그냥 가만히 듣고 있는 것이 낫다. 차라리 주문도 하지 않고 나가기를 바라면서.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왜 남의 영업장에서 행패입니까"
"넌 또 뭐야!!"
고개를 들자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취한 남자에게 자신의 명함을 쥐어주면서.
"키아스 로펌 소속 변호사, 박지민입니다. 지금 남의 영업장에서 행패부리고 있으신 것 같아서요. 제가 직업 특성상 이런거 법대로 하는거 좋아하거든요"
"네가 뭔데 참견이야!!"
남자는 큰 소리를 치지만 아까와는 달리 주춤한 기색이 역력하다. 자신을 박지민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그 남자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가면서 말한다.
"저 이분한테 소송비용 안 받고 무료로 소송진행할 건데 손해배상금 낼 돈 있으신가 모르겠네. 참고로 실력이 좋아서 무지하게 뜯어먹을지도 몰라요"
"지..지금...뭐라는 거야..."
남자는 완전히 꼬리를 내린 듯 뒷걸음질 친다.
"아 말 드럽게 못 알아 듣네. 돈 없으면 술 처먹고 발이나 닦고 자라고. 애먼 사람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는 서둘러서 카페를 나갔다. 비틀거리던 걸음도 멀쩡해진게 어이가 없었다.
"저...고맙습니다"
뒤돌아 있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자 그 남자가 뒤를 돌아본다. 가볍게 풀린 표정이 방금 화냈던 남자라고는 안 믿겨진다.
"오지랖 좀 부려봤는데 고맙다니 다행이네요"
"정말로 감사해요."
"진짜 고마우면 주문 한 개만 더 받아주던지"
남자의 뜬금 없는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감시간을 확인하는데 다행히 케이크 포장 주문이다.
"어떤 케익이 제일 맛있어요?"
"아...오레오치즈케익이 제일 잘 나가고요, 딸기 생크림 케이크도 무난하게 많이들 사가세요"
사람들이 자주 주문하는 케이크를 추천해주는데 맘에 안 든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에이, 그런거 말고 직원찬스 좀 씁시다. 직원으로써 뭐가 제일 맛있어요?"
"...저는.. 단 거 별로 안 좋아해서 당근 케이크..."
"당근케이크 주세요"
곧바로 나온 그의 대답에 의아해서 살짝 머뭇거렸지만 확신에 찬 눈을 보고는 재빨리 당근 케이크를 포장했다. 11시까지 뒷정리하고 마감 시간을 맞추려면 조금 빠듯하다.
서둘러 포장하고 상자를 건네는데 그는 받더니 계산을 하고는 다시 카운터에 내려놓는다.
"이건 단골 카페 알바생한테 주는 선물"
"네?"
"오늘 놀랐을 것 같은데 단거 좀 먹으라고."
그러더니 자신의 얼굴을 손짓한다.
"얼굴이..좀 하얗게 질려가지고"
"아.."
괜찮다고 상자를 건네려는 순간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구로 나가버린다.
"캐모마일 티 맛있어서 주는 거니깐 그냥 먹어요"
어쩔 수 없이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저 카페정리를 한다.
'캐모마일은 그냥 시판되는 티백 넣는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