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삼세판
上
W. 부재불명
세상은 좆같음과 후회의 연속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비교적 최근의 좆같음은 이젠 구가 된 구남친과 알바 동기가 눈이 맞았다는 거다. 물론 입도 맞았다. 그렇담 후회는? 구남친의 생일 주려고 모든 알바비를 꼴아서 조온나게 비싼 시계를 샀다. 씨발, 이것도 그냥 좆같은 거잖아. 원필은 잔뜩 취해 물미역같은 손짓으로 등을 토닥이며 남자는 많다, 지금 이 자리에만 잘생긴 남자가 넷이나 있다는 망언을 뱉었다. 술맛 떨어지게 진짜. 제형은 행사장 풍선마냥 휘적거리며 잘못된 만남을 개사해서 부르는 원필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벌써 가?"
"술맛 떨어지니까 먼저 감."
"삐진 거지, 저거."
제형의 가운데 손가락을 마지막으로 원필과 제형은 술집 밖으로 사라졌다. 영현에게 시계를 팔아넘기면 손해는 있어도 지금 당장에 자금은 괜찮을 테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제 성격상 알바 동기를 보는 순간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둘이 입 맞는 것을 봄과 동시에 이별과 퇴사를 빠르게 이루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돈도 잃고, 돈 나올 구멍도 잃었다는 거잖아.
"그 와중에 성격은 알아서 관두기까지 했어?"
"시비 걸지 마시죠, 강영현 씨."
"뭐? 강영현 씨? 강~ 영현~ 씨~?"
"고마해라, 둘 다."
영현은 애초에 제 구남친은 마음에 안 들었다면서 김원필에 빙의해 남자는 많다며 말만 하면 제 앞에 남자를 100명은 더 대령할 수 있다는 식의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취했죠. 취했네. 개가 된 강영현 씨가 제 왼쪽 팔뚝에 달라붙어 볼을 부비적거리기 시작했다. 아이고야, 난리 났다야. 오늘은 내가 먼저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제대로 들은 건 기본적으로 술이 센 성진과 술이 싫은 제형이라니. 괜스레 차오르는 분노에 손바닥으로 시원하게 까넘긴 강영현 씨의 이마빡을 연타했다. 성진은 가만히 바라보다 강영현 씨의 이마빡이 빨개지기 시작해서야 강영현을 내게서 떼어냈다. 아, 손바닥 겁나 아프네.
"아, 그럼 하루 니 과외 함 안 할래?"
"과외? 갑자기?"
"원필이 걔보다는 니가 낫지 않나?"
"아, 이 오빠가 당연한 소리를."
그럼 일단 낼 연락 주께. 강영현 씨를 챙기는 성진의 말을 끝으로 내 이별 파티는 끝이 났다. 만약 시간을 돌려서 이별 파티 날로 갈 수 있다면 파티 시작과 동시에 클래식을 간을 때려박고 과외를 하겠다는 말은 절대, 절대로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과제를 하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반짝거리는 핸드폰과 나를 번갈아본 원필은 본인 앞에 놓은 먹다 남은 쿠키를 슬쩍 내게로 밀어주었다. 동정하냐, 니. 아, 아니.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원필이 이리도 내 눈치를 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팀플 때문에 내가 빡쳐 있고, 하나는 윤도운 때문에 내가 조온나 빡쳐 있어서.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원필은 제가 과외를 채간 사실을 알고 얼굴만 봐도 금방이라도 물 것처럼 으르렁거렸었다. 물론 전혀 무섭진 않았다. 그냥 좀 거슬리는 정도? 성진과 꽤나 친근한 사이인지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어머님께서는 살갑게 맞아주셨다. 페이도 일반 과외들 치곤 센 편이었고, 과외 학생인 도운의 성적도 그리 나쁘지 않아 크게 문제될 건 없는 듯 보였다. 과외는 수요일과 금요일, 이틀 진행하는 조건이었지만 도운에게 모르는 게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사람 좋은 말을 건넸었다. 아주, 아주 큰 실수였다. 용케도 잠드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카톡이 오는데 질문들이 다 개인적이라는 거다.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고 도운은 정말 이래도 모르는 척할 거야? 라고 말하듯이 수작을 걸어댔다. 진부하게 손 크기를 재보자며 손을 맞대다 깍지를 껴 잡으려고 하거나 문제를 다 맞히면 주말에 만나달라거나 연하 남자친구는 어떻게 생각하냐 묻는 정말 뻔한 수작들을 계속해서 걸어왔고 적당히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며 잘 넘어가왔지만... 오늘은, 오늘은 윤도운이 빠져나갈 구멍을 시멘트로 다 막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금같은 금요일에 과외를 하는 것도 짜증 나는데 할 게 있다며 30분 정도 늦게 오라는 도운의 말에 더 크게 짜증이 치솟았다. 지가 갑이라 이거지. 건방진 놈. 기존 과외 시간보다 20분 정도 지나 도운의 집 앞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지만 안에서는 답이 없었다. 전화라도 해 볼까 싶어 핸드폰을 꺼내 들자 덜컥, 하고 대문이 열렸다. 집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내내 내부가 소란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손님이 왔나?
"야, 윤도운. 너 문을 왜... 누구세요?"
"아, 저 도운이 친구... 도운이가 문 열어주라고 그래서요."
문을 열고 저를 맞이한 사람은 도운이 아니었다. 어디까지 건방지게 굴 생각이지. 저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억지로 눌러대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노력이 부족했던 건지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고, 꽤나 무서웠던 건지 도운의 친구는 빠른 걸음으로 도운의 방으로 들어갔다. 도운의 친구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배려심이 바닥이 난 차라 지체없이 도운의 방문을 열었다.
"윤도운."
"아, 어, 누나. 야, 지금, 지금!"
도운의 친구는 도운이 주는 신호에 맞춰 무엇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익숙한 전주가 들렸고 설마 하는 마음에 도운과 도운의 친구를 번갈아보았지만 도운은 간주에 심취해 있었고, 도운의 친구는 시선을 회피했다. 씨발, 맞구나. 고딩 시절 옆 아파트 중딩이 고백하겠다고 부르던 노래였다. 그때 이후로는 간주만 들려도, 한 소절만 들려도, 학을 떼고 싫어하던... 이승기의 내 여자라니까.
도운의 거친 후렴과 개빡친 내 자신과 그걸 지켜보는 도운의 친구까지, 이 얼마나 환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가. 눈치가 빠른 건지, 도운과 약속된 건지, 도운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도운의 친구는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아, 안 돼요. 이렇게 둘이 두고 가지 마세요. 제발요, 학생! 마음같아선 당장이라도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이틀 전 어머님께 도운의 성적이 최상위권을 차지했다며 보너스를 주셨는데 그 보너스가 아른거렸다. 그래, 얘는 보너스다...
"누나."
"어... 그래, 도운아."
"저 누나 좋아해요."
그래,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여기서 어떤 대답을 한들 내 고수익 과외는 끝이 날 것이니 최대한 도운을 달래는 방법밖엔 없었다. 머릿속에서 여러 상황을 대비해 롤플레잉을 진행했지만 끝은 텅텅 빈 지갑을 부여잡고 우는 내 자신밖에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날 왜 이렇게 예쁘게 낳아서...!
"누나가 진짜 특출나게 예쁘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진짜, 누나가 진짜 너무 좋아요."
저 산통 깨는 자식을 어쩌면 좋지? 고민의 골은 깊어져만 가는데 도운은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게 무드 없는 고백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도운아. 그, 잠깐만."
"네?"
"어, 그... 일단 선생님은 지금 누굴 만날 생각이 없고..."
도운은 세상에서 처음 차여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운이라면 정말 처음 차여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대로라면 과외는 정말 끝이다 싶어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이러려고 대학 간 건 아니었지만 대학에서 늘어난 거라곤 눈치랑 잔머리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도운아, 그, 나는 너 만나면 안 돼."
"왜 안 돼요?"
"어?"
"누나는 선생이고, 나는 학생이라서요?"
"아니, 도운아. 그게 아니라 내가 지금 나이에 고등학생 만나면,"
"개꿀이죠."
이새기가진짜사람말은좀끝까지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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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글들에 비해서 이건 상중하 세 편으로 나눠져서 업로드 될 예정이라 평소보다 양이 좀... 많죠?
아니면 어쩔 수 없지만 아무튼 그렇답니다! 입원 중에 기분 전환으로 쓴 글이라 아무래도 분위기가 좀 둥둥 뜨는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오늘도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