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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바람 전체글ll조회 2694l 1




 어스름한 새벽 빛깔이 조금씩 걷혔다. 국경을 지키는 나라의 군사들만이 깨어 활동하고 있는 때였다. 그런 밤과 낮과 새벽의 이치를 깨기라도 하듯 거친 말발굽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국경을 넘었다. 수에 유리하지 못한 국경의 군사는 재빠르게 궐로 보내는 봉화를 올렸다. 검은 연기가 맑은 하늘에 짙게 끼었다. 석진이 이끄는 현의 침입이었다.


 소국이던 현이 침입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민은 금세 궐로 향하는 길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봉화가 채 닿기도 전에 그들은 민의 수도로 진입했다. 전쟁의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일제히 숨거나 몸을 피했다. 그들에게 석진은 가히 악역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것을 찾으러 온 석진의 뜻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수년만의 현과 민의 전쟁이었다.


 꽤 오랫동안 고려하고 준비한 전쟁이었지만 완벽할 수는 없었다. 민의 황제인 지민에게 가까워질수록 현의 군사도 줄어갔다. 칼과 활이 난무했다. 그 과정 속에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있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었고, 민의 선제공격에 모두를 구하기 위해 굴복한 선황 또한 그랬으니.
 석진은 선두에 서서 진영을 이끌며 내내 죽은 그의 부모와 잡혀간 황녀를 떠올렸다. 그에겐 이제 남은 것이 없었다. 억지로 황후가 될 그 아이를 데려오지 못한다면 더더욱.


 난 사실 태손이 보고 싶다던 아바마마의 말도 듣고 싶었어. 아름다운 여인을 태자비로 맞아 현국의 후손도 보고 싶었어. 근데 난 그보다 네가 더 먼저였어. 널 지키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행복해지고 싶었어….



 “진격하라!”



 석진이 앞을 가로막는 민의 군사를 보며 그의 수천 군사들에게 외쳤다. 석진의 뒤를 따르는 호석 또한 그의 지시에 앞으로 나아갔다. 날카로운 화살의 촉과 칼날은 검붉은 피가 고여 흘렀다. 24년만의 전쟁은 젊은 군사들 모두에게 처음이었지만, 누군가가 죽이고 죽는 일련의 과정을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앞엔 적진이 있고, 그들을 먼저 죽여야 내가 사는 상황이므로.


 어스름한 새벽은 낮이 되고, 다시 낮이 되었다. 상황은 점점 현국의 우세로 몰렸다. 밤잠을 아끼며 싸운 까닭도, 전쟁을 오래 준비한 까닭도 있으나 민의 황제가 현에 오래 머무느라 군사가 무방비한 탓도 있었다. 석진의 군사들은 궐에 조금씩 가까워졌다.


 궐문을 지키는 군사들은 금세 소탕되었다. 석진이 싸우고 있는 틈새를 지나쳐 홀로 황제전을 향했다. 권력도 고집도 강한 인물이니 여태 황제전에 머물고 있을 것이 뻔했다. 내관과 군사의 제안을 모두 무시하곤. 내내 맑던 하늘은 눈치 없게 하필 이때에 눈을 내려줬다.













 밤낮을 쉬지 않고 걸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차디찬 겨울바람이 살을 벨 것처럼 불고, 늦겨울쯤이면 하늘에서 내리던 것이 쏟아졌다. 굵은 눈송이가 차가운 흙바닥에 쌓이기 시작했다. 앙상한 나무의 가지들과 겨울공기를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풀 더미들이 팔과 다리를 베었다. 그 따위 것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음에도.


 숲의 나무들 사이로 조금씩 민의 경계가 보였다. 전쟁 중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연기가 멀리서 피어나고, 사람들이 급히 피난을 떠나는 줄에 합류했다. 줄지어 떠나는 사람들을 가로질러 민국을 향해 갔다. 이따금씩 미처 치우지 못한 죽은 사람들을 발견할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뜨면, 김태형의 길고 큼직한 눈이 보였다.



 “어, 이게 뭐야.”
 “…뭐가요.”



 물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국경과 가까운 외곽 지역에서 함께 멈췄다. 김태형이 긁힌 자국이 가득한 팔과 다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 언제 이렇게 됐지….



 “다쳤잖아.”
 “됐어요. 안 아파요.”
 “내 마음은 아픈데!”



 능청스럽게 말했다. 지금 상황이랑 하나도 안 어울린데. 그럼에도 멀끔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억지로 웃는 거 다 보이는데.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천 조각을 꺼낸 김태형이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엉성하게 베인 팔다리를 둘둘 감은 김태형이 손을 다시금 꼭 잡았다. 익숙한 온기였다.



 “괜찮아.”
 “…….”
 “나는 계속 손잡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꼭 잡아, 공주야. 오라버니가 전쟁에 목숨을 잃으면 남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을 직접 듣기라도 한 듯 말했다. 자기도 나랑 별 다를 바 없으면서…. 손에 힘을 싣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아주 조금씩, 궐과, 오라버니와 가까워지는 듯 했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호랑이새끼가 나를 모시고 있었네. 침전에 있던 지민이 낮게 중얼거렸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황제전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한 사람인 석진을 향해 한 말이었다. 24년만이었다. 지민이 태어나기 한참 전에 일어난 전쟁으로부터.



 “그때 진작 황제를 죽이고 흡수했어야 했어.”
 “…….”
 “아바마마의 뜻이 있으셨을라나.”
 “…폐, 폐하.”



 지민이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지민의 앞에 있는 군사와 내관이 안절부절 못하며 지민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황제전을 오랫동안 비워 할 일이 태산인데 굳이 뭐하러 전쟁을. 전쟁에 투입될 군사들은 모두 전쟁을 지휘할 무관의 최고 장군에게 맡겼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황제전을 들락거리며 지민을 부추겼다. 전쟁이 일어났으니 몸을 피하라고. 궐의 문지기가 죽어서 궐이 뚫렸다고.



 “피하셔야 합니다, 폐하.”
 “…….”
 “눈이 내려 피하시는데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지민이 조금 열린 창틈을 바라봤다. 뿌연 하늘과 쏟아지는 눈송이가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렸다. 흰 눈이 붉은 피바람을 몰고 오는구나. 이미 군사력이 부족해 많은 이가 죽었음은 소식으로 전해들어 알았다. 하지만 지민은 몸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현국의 군사는 빠르게 궐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다. 그들은 홀로 황제전에 당도하려던 석진을 금세 따라잡았다. 황제전 바로 앞까지 피가 튀고, 활이 날아들었다. 평생 민국 안에서의 전쟁을 겪어본 적 없던 지민의 내관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제를 호위하려 황제전 앞을 지키던 군사들을 물리치고 석진이 황제전 안으로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지민이 기대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황제전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일제히 석진을 향해 전투  태세를 취했다. 석진을 향한 검 몇 자루처럼, 그의 눈에서 살의가 빛났다. 갑옷과 칼을 찬 차림새는 소복소복 쌓이는 눈과 피를 맞아 조금 젖은 채였다.



 “웬일입니까? 여기까지.”



 지민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을 붙였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우리가 약해지긴 했나봐. 벌써 여기까지.”



 지민이 비웃듯 말했다. 어떤 전쟁에 대한 대비도 무장도 하지 못했지만 그의 말투에선 겁도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 대 황제로 석진을 대할 때의 예우는 전혀 비치지 않았다. 석진이 손에 든 검자루를 꼭 쥐었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바깥과는 달리 황제전 안은 지민의 목소리만 울릴 정도로 고요했다.



 “근데 말이야.”
 “…닥쳐라.”
 “황후가 되려던 공주는 여기 없어.”
 “…….”
 “아니, 이제 없을 거야. 우리 군사가 죽였을 테니까.”



 …뭐? 석진이 작게 반문했다. 여태 계속 도망치길 바랐지만 그런 상상은 꿈에도 못한 채 이곳으로 달려온 석진의 손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석진은 그리 여겼다. 궐 밖을 나오지도 못한 어린 애가 혼자 도망치면 얼마나 쳤겠어.


 석진은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스르륵 놓았다.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진 검이 황제전의 마루를 굴렀다. 피가 뚝뚝 흐르던 검은 금세 황제전의 바닥을 적셨다. 결국, 내 다짐을 내 손으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앞섰다. 석진이 선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민은 그런 석진을 보며 웃었다.


 전쟁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죽여라.”



 웃음기를 걷어낸 지민이 명령했다. 이리 허무하게 무너질 거면서. 약해지긴 했으나 쉽게 무너질 국가는 아니지. 명령을 받든 민의 장군이 손에 쥔 칼을 하늘 높이 들었다.


 그때 검 하나가 그 날을 가로막았다. 석진이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호석이었다.



 “다친 덴 없으십니까, 폐하.”
 “…….”



 석진이 얼핏 웃었다. 호석이 말을 마치자마자 여러 개의 칼날과 싸웠다. 말은 그리 했으나 호석 또한 성한 꼴은 아니었다. 석진이 깊은 숨을 내쉬며 바닥을 뒹굴던 검을 다시 쥐었다. 지켜주겠다는 약속은 결국 못 지켰지만, 네 몫은 내가 꼭 해낼게.


 석진이 퍽 당당한 걸음으로 황제전을 가로질렀다. 만나지 못한 동생으로 인해 가슴 한켠이 아렸지만 애써 꾹꾹 눌러 담았다. 호석은 삽시간에 몇을 죽이고선 계속 싸웠다. 지민은 다시금 느껴지는 살의에 올려둔 장검을 뽑아들었다. 한 번도 누군가를 죽이는 데 쓰지 않은, 날이 날카롭게 선 검이었다. 서롤 죽일듯이 달려 들었다.












 평화롭던 궐과 마을은 군사들로 어지러워졌다. 질서는 흐려지고 목숨은 가벼워졌다. 황제와 장군을 따라 궐까지 온 현국의 군사들은 부지런히 싸웠다. 황제가 죽으면 전쟁이 끝난다. 모두 기약 없는 끝을 향해 전쟁을 지속했다.


 화양 지역으로 군사 지원을 갔다 민국으로 온 정현 또한 그와 마찬가지였다. 운이 좋아 아직 싸울 수도, 싸울 기력도 있었다. 현국이 우세인 상황이었지만 아직 결과는 미지수였고, 누군가에게 목숨을 내놓을 처지에 놓일 수 있었으므로 멈출 수 없었다. 칼을 휘두르다 한숨을 돌린 정현이 고개를 하늘 높이 들었다. 쓰러진 인영들에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그때 봤다. 여기선 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얼굴.



 “…전정국?”



 거리가 있었지만 몇 년을 살을 부대끼며 살았으므로 모를 수가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저를 보더니 금방 놀란 토끼눈을 했다. 그리고 알았다. 정국의 옆에 있던 여인이 소문으로만 떠돌던 황녀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하기는 섣불렀으나 때가 묻지 않은 표정과 고귀한 얼굴이 황녀라는 사실에 쐐기를 박았다. 그들은 황제전 쪽으로 가고 있었다. 정현은 빠르게 적과 싸우며 소리쳤다. 길을 터라. 공주 마마다.


 모두가 다가서는 적들을 막으며 그들을 방해치 않으려 애썼다. 걸음이 뜀박질로 바뀌었다. 정국은 그의 형에게 감사의 눈짓을 보냈다. 황제전을 향했다.













 깨끗했던 칼이 피로 물든 칼과 맞닿으며 더러워졌다. 긴 검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 서로의 것을 가지기 위해. 살의와 싸움은 조금씩 그들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오래 싸우지 않았지만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호석도 점점 힘겨워졌다. 가까스로 검을 스친 살에 고통이 밀려왔다.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전투였다.


 칼을 휘두를 때마다 죽은 것이라 생각한 동생의 얼굴이 자꾸 아른거렸다. 그게 마지막이었으면 원하는 거나 마음껏 하게 해둘걸. 묶어두지 말걸. 후회가 섞인 잡념이 석진을 잡았다. 자신을 죽일 듯이 목을 노리는 지민을 앞에 두고도.


 그래서 잡념이 만들어낸 환상인건가, 처음엔 의심했다. 열리는 문 사이로 보이는 말간 얼굴이. 슬픔이 가득 찬 눈동자가. 아니, 난 저런 표정은 살면서 본 적이 없는데. 석진이 칼질을 멈추고 문틈으로 보이는 여인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지어진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오라버니,”



 ……네가 어째서 여기에,


 그리고 날카로운 칼날이 그를 관통했다. 고통에 찬 신음이 새어나왔다. 붉은 것이 솟았다.



 “…오라버니!!!”



 놀랄 틈도 없이 붉은 피를 토해냈다. 상처에 흐르는 그것처럼. 석진이 그의 동생을 응시하며 주저앉았다. 무릎이 땅에 닿았다. 퍼석한 그녀의 볼가가 축축해졌다. 옆에 있던 태형과 정국 또한 그것은 매한가지였다. 황제가 칼에 찔렸다고 아군에게 알릴 겨를도 없이 정국이 달려들었다. 누구도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 지키겠다고 혼인도 못하고, 손에 피 묻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우리 오빠. 그런 오라버니 없으면 나 이제 어쩌지. 걱정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녀는 볼에 흐르는 것을 닦지 못하고 석진 쪽을 주시했다. 정국은 석진의 다음으로 지민과 싸웠다.


 내가 오라버니처럼 누굴 지키지는 못했지만, 내가 해낼 수 있는 걸 할게.


 팔과 다리에 둘둘 말린 천을 푼 황녀가 그것으로 얼굴을 적시던 눈물을 닦았다. 평정을 찾지는 못했지만 무언가를 못할 처지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잃는 걸 더 이상 멍하니 보고만 있고 싶지는 않았다. 충격으로 가쁜 숨을 천천히 몰아쉬던 그녀가 함께 말을 잃은 호석의 손에 들린 검을 뺏었다. 무게가 상당해 들기가 버거웠으나 그것은 개의치 않았다.


 한참 무예를 배우긴 했지만 그간 황녀를 지키기에만 여념이 없었던 정국은 석진이나 호석의 실력보단 한참 아래였다. 지민이 지쳐가고 있긴 했지만 정국의 실력에는 비견할 만 했다. 감정이 격해져 검을 크게 휘두르는 정국의 체력만 점점 바닥이 났다. 지민은 집요하게 그 빈틈을 파고 들려 했다. 정국이 숨을 몰아쉬는 시점을 노려 칼을 들었다. 그때 지민의 품에서 피가 솟구쳤다.



 “……어.”



 자신의 상처에 저가 더 놀란 지민이 손에 묻어나오는 피를 보곤 놀란 얼굴을 했다. 칼을 꽂은 황녀가 칼자루를 놓았다. 놀란 것도 잠시, 지민의 몸이 기우뚱 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흐린 시야로 울고 있는 황녀와 현국의 황제가 보였다. 이건 지쳐 내 기가 흐려진 탓이다. 난 결국 졌네. 그래, 저런 여자를 두고 내가 어떻게 이겨.


 지민이 눈을 감았다.



 “…오라버니! 괜찮아?”
 “……다행이다.”



 석진의 앞에 주저앉은 황녀가 안절부절 못하며 석진에게 물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석진은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몸을 기댔다. 그녀의 뒤로 태형이 뛰어왔다.



 “안, 아파? 어?”
 “…좀 아프네.”
 “그럼 어쩌지…. 무슨 말이라도 해봐…….”
 “봄….”
 “…….”
 “봄…, 이었네.”



 눈이 와서 여태 몰랐는데. 네가 오니까 따뜻한 게 이제야 실감이 난다. 늦겨울이었네. 봄이었다, 지금. 석진이 옅게 웃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라버니, 자면 안 돼….”
 “…….”
 “눈 좀 떠봐아…, 제발….”
 “나…,”
 “……응.”
 “약속…, 지켰어.”



 아기를 안고 매화궁으로 숨던 어린 소년의 그 약속을. 못한 줄 알았는데 했네. 지켜준다고 했잖아, 내가.


 나는 사실 태손이 보고 싶다던 아바마마마의 말도 듣고 싶었어. 아름다운 여인을 태자비로 맞아 현국의 후손도 보고 싶었어. 근데 난 그보다 네가 더 먼저였어. 네가 행복해진다면 난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어.



 “…오라버니, …죽지, 마아….”



 근데 다행이다, 내 바람대로 네가 누군가의 옆에서 행복해질 것 같아서. 오빠는 먼저 가 있을게. 너는 네 옆에 그 사람이랑 행복하게 잘 살다가 와. 괜찮아, 안 외로워. 거긴 보고 싶던 어마마마도 계신 걸. 가서 내가 얼마나 당신의 딸을 잘 지켜냈는지 말할게. 정말 괜찮아….


 내리던 눈이 조금씩 그쳤다. 제 동생에게 기대어 잠이든 석진의 얼굴은 편안해보였다. 현국의 마지막 황족인 황녀는 그를 보며 하늘이 갤 때까지 하염없이 울었다. 매화꽃이 졌다.







 현국은 민을 향해 곧 현이 승전했음을 알렸다. 몇은 황제를 따라가기 위해 자결했고, 몇은 항복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석진을 데리고 현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역사가는 이리 기록했다. 석진은 현국 역사상 가장 짧게 황좌를 지킨 황제이며, 후사 없는 가장 외롭고 비참했던 황제라고. 동시에 다음 황조를 지킨 가장 훌륭한 황제였다고.








*        *        *        *








 시간은 다시 속절없이 흘렀다. 평화가 찾아왔으나 전쟁 전후에 많은 것을 정리해야만 했고, 목숨을 잃은 자들을 기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를 포함한 유족들의 슬픔이 잦아들 쯤에 오라버니는 선황을 기리는 사당의 끝 칸에 자리를 잡았다. 위패에는 ‘매화’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오라버니는 좋은 묏자리가 많았지만 아바마마의 옆에 묻혔다. 내가 원한 바기도 했고, 오라버니도 원할 것 같으니.



 “나 이제 황제 된대.”



 차기 황제의 즉위도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먼 황족이야 있긴 했지만 이는 직계 황족이 있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황제 즉위될 때 오라버니가 이런 기분이었겠지.



 “엄하긴 했지만 그래도 난 오라버니가 밉지 않았어.”
 “…….”
 “고마워, 나 지켜줘서.”



 도화궁 문은 닫혔다. 연못도, 도화궁도 그리운 곳이었지만 이제 현국의 모든 곳을 허가 없이 내 발로 돌아다닐 수 있으니.



 “보고 싶다, 오빠.”
 “나두요, 선황폐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몸을 흠칫 떨며 뒤를 돌았다. 김태형이 히죽거리며 내 옆으로 와 손을 쥐었다.



 “인사 잘 했어?”
 “뭐, 그럭저럭.”
 “가자. 시간 다 됐대, 황제 폐하.”



 멀찍이 서 있는 궁녀와 내관들이 보였다. 안녕. 마지막 인사를 끝마치고 뒤 돌았다. 만연한 봄볕이 기분 좋게 내리쬐었다. 김태형의 입꼬리를 따라 기분 좋게 웃었다.


 이제 공주라고 못 불러서 어떡하지.
 안 부르면 되지. 아, 맞다. 이거 팔찌 끊어졌어요.
 벌써?
 스칠 때 끊겼나봐. 그래서 잃어버렸어요.
 그거 끊기면 소원 이뤄지는데. 소원 이뤄졌어?
 뭐, 그런 거 같기도 하고….














 황제 즉위식은 빠르게 이뤄졌다. 민국은 결국 현국으로 흡수되었고, 황제가 도화궁에 갇혀 지내느라 정치나 현국의 상황에 무지에 배워야할 것이 많아졌다. 그 틈을 타 문무관을 책임지는 남준과 호석의 일만이 주구장창 늘어났다. 태형은 그런 황제의 옆을 지켰다.


 정국과 정현은 전쟁의 공을 인정받아 신분 승격이 이루어졌다. 이 또한 새 황제의 결정이었다. 또한 정국은 황녀가 황제가 됨에 따라 그 임무를 다해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머물며 할 일을 찾고 있다는 소문이 궐에 들렸다.


 태형을 괴롭게 했던 궐내의 ‘혼사법’은 폐지되었다. 권력독점이 우려되긴 했으나 이는 자제들의 혼인이니 그들의 선택에 맡기기로 한 것이었다. 대신, 한 자리만 빼고.



 “…늦네요.”



 이전 수아가 앉았던 자리에 앉은 은진이 옆에 선 나인에게 말을 붙였다. 별로 혼인 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하필 폐지되기 딱 전에 내가 걸려선. 우울하게 속으로 되뇌었다. 근데 심지어 늦기까지 한다. 파혼하면 폐하한테 혼나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은진을 거쳐 나왔다.



 “아, 늦었습니다. 죄송합니…, 어?”



 자리에서 짜증스럽게 일어선 은진이 열린 문을 쳐다봤다.



 “어?”



 윤기. 눈을 한참 깜빡이고 정신을 차려 봐도 윤기였다. 은진이 그토록 따라다녔던 그 민윤기.



 “너였어?”
 “…….”
 “…앉을까?”



 적막을 깬 윤기가 먼저 말을 이었다. 멍하니 선 은진이 어정쩡하게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마주앉은 윤기가 웃었다.














 “완전 예쁘다, 공주야.”
 “…폐하.”
 “아, 맞다.”



 주위에 선 궁녀와 내관의 눈총을 받으며 말했다. 나도 폐하는 좀 그런데. 그래도 법도니 다들 어찌할 바가 없다고 했다. 궁녀의 환복을 받으며 앞에 앉아 웃고 있는 김태형을 바라봤다.



 “다 했어요?”
 “응. 나 끝났대.”
 “…….”
 “아니, 끝났습니다.”
 “…….”
 “근데 우리끼리 있을 땐 이렇게 안 하면 안 돼요? 이따가는 똑바로 할게요.”



 눈치를 본 김태형이 내관이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고개를 푹 꺾었다. 아니, 무슨 황제보다 더 무서워!



 “좋으십니까, 폐하?”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도화궁에서 황안전으로 건너온 나인 중 한 명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말에 김태형 곁으로 다가갔다. 시무룩한 표정이 금세 밝아지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가도 돼요?”
 “예, 저하.”



 손을 잡은 김태형이 밖으로 나를 이끌었다. 궐내는 봄인 걸 세상에 알리는 것처럼 꽃이 폈다. 언제 추웠냐는 듯이. 그렇게 뛰면 안 된다는 궁인들의 말을 무시하고 달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긴장 안 되지?”
 “네. 긴장 돼요?”
 “아니.”



 뜀박질을 멈추고 벽 너머에 가득한 사람들을 바라봤다. 형형색색의 깃발들과 장식들이 궐을 꾸몄다. 음악소리 또한 그와 함께였다. 김태형이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궁인과 눈치를 주고받곤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얼른 와. 웃는 얼굴이 햇살을 가득 받아 밝았다.



 “부군 저하, 납시오!”



 앞서는 등이 당당했다. 많은 이의 박수와 찬사를 받으며 자리까지 걸었다. 뒤이어 내관이 소리쳤다.



 “황제 폐하, 납시오!”



 어느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을 뗐다. 많은 이의 축하를 받으며 김태형의 옆자리에 당도했다. 원래 즉위식과 같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다 이제야 감행한 것이었다. 오라버니의 생전 말도 있고 했고. 오늘은, 혼례날이었다. 김태형와 나의.


 말간 얼굴이 행복하게 웃었다. 나도 마주보며 함께 웃었다.



 “많이 좋아해, 공주야.”
 “나두요.”
 “너보다 더.”
 “…뭐야.”
 “행복하자, 이제 우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행복할거야. 하늘이 맑았다. 아름다운 봄이었다.










*        *        *        *


끝났습니다! 행복하네요.

후기를 대비해 Q&A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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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우왕 알림 보고 깜짝 놀라서 달려왔어요ㅠㅠ!! 독특한 스토리랑 특유의 아련한 분위기가 있어서 제가 인티에서 너무 좋아했던 글인데 이렇게 완결을 보네용.. 슬프지만 너무 행복한 엔딩이에요..! 완결까지 달려오면서 너무 수고 많으셨어요ㅎㅎ혹시 차기작 계획도 있으신지 여쭤보고 싶어요!!
4년 전
독자2
헐ㄹ 알림 뜨고 놀라서 들어왔는데 정말 오랜만입니다😀 반가워요 작가님!
4년 전
독자3
단아한사과
헐랭방구 작가님 ㅠㅠㅠㅠㅠㅠㅠ 오랜만입니다 ㅠㅠㅠㅠ
울 태형이랑 황녀 결국엔 맺어져서 너무 다행인데 석진아 ㅠㅠㅠㅠㅠㅠㅠㅠ 퓨ㅠㅠㅠㅠ 동생 지켜준단 약속 지키다가 ㅠㅠㅠㅠㅠ 울 공주 ... 아니다 이제 황제폐하지 황제폐하 석진이 몫만큼 태형이랑 잘 살아야 해 ㅠㅠㅠㅠ

4년 전
독자4
세상에나... 완결이라니... ㅜㅜㅜㅜ 석진이가 이렇게 갈 줄은 ... 말도 안 돼...ㅠㅠㅠ
공주에서 황제폐하다 됐네ㅜㅜㅜ 감격스럽다
몇 년전부터 차근차근 보던 글이 완결이라는 게 저에게도 의미가 있네요 고생하셨어요 작가님

4년 전
독자5
볼 글을 찾다 마지막 글이 있는 걸 보고 어제 첫화부터 정주행해 완결까지 오게 된 독자입니다.
진짜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해피엔딩까지 제가 다 행복하네요! 감사합니다!

4년 전
독자6
황녀 첫화부터 정주행해 완결까지 하루만에 다 읽었습니다 급한 과제 제출해야하는데 한번 읽기 시작하니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더라구요 그만큼 너무 잘 읽었습니다! 석진이.....끝까지 황녀를 지키다가 가는군요 너무 마음 아팠지만 태형이랑 공주 아니 황제폐하가 잘 되어서 다행입니다ㅠㅠ
4년 전
독자7
복동이에요 7개월만에 들어와서 다시 정주행 하면서 미처 못본 화들도 다 봤어요 석진이의 죽음은 너무 안타깝지만 그래도 공주와 태형이는 해피엔딩이네요 마지막화 까지 고생많으셨어요 잘 읽었습니다!
4년 전
독자8
태형이랑 예쁘게 이어져서 다행인데 오라버니 석진이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석진이가ㅜㅜㅜㅜㅜㅜ우리석진이가 ㅜㅜㅜㅜㅜㅜㅜㅜㅜ진짜 엉엉 울었네요 정말 ㅠㅜ 작가님 수고많으셨어요 완결 해주셔서 감사해요 (하트)
4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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