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기와 밑이 술렁였다. 아궁이에 불을 때던 여인, 마당을 쓸던 사내, 잔심부름을 하던 아이까지 입이 달린 사람이라면 으레 똑같은 한 마디를 했다. 본디 말은 발이 달리지 않았으나 말을 실어 나르는 사람은 발이 있는지라, 구전(口傳)된 소문은 점차 모양새를 바꾸었다. 이는 며칠 전 사랑방을 지나쳤던 노비 한 명이 그것에 대해 떠드는 것을 몰래 엿들었기 때문이리라. 그거 아나? 몇 년 전에 죽었던 황녀가 살아있대! 커다란 기와 밑만을 들썩이던 소문은 조금씩 그 범위를 넓혔다. 조금씩, 저잣거리가 가라앉았다. 그런 사실 없이도 잘 살았건만, 어째서 황실은 그것을 숨겨야만 했을까. 황실에 대한 약간의 불신이 저잣거리 사이를 떠돌았다.
황녀(皇女)
十六
태형이 옷을 만지작거리며 식에게 투덜댔다. 제 아비가 혼인준비를 황실에 약조하라 일렀기에 어쩌면 오늘이 공주와 황궁에서의 마지막 만남일 수 있었다. 마지막 만남이 지나면, 그 다음 만남은 언제가 될지 모르기에 애써 용모를 단정히 했다. 나 이제 여기 못 올지도 모른다고, 다음이 되면 또 볼 거라고 희망찬 한 마디를 좀 더 멋있게 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나 괜찮으냐고, 그 한마디를 꺼낼 상대가 없어 식을 골랐건만, 식은 여태 똑같은 말만을 해댔다. 괜찮다마다요. 태형이 입술을 내밀며 대문을 빠져나왔다. 늘 그렇듯 저잣거리를 지나 궁으로 향할 요량이었다.
“…….”
저잣거리가 유난히 조용했다. 여전히 상가가 즐비했고, 여전히 사람이 북적였다. 그럼에도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태형이 저잣거리에 들어오며 매듭을 고쳐 매다 고개를 들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니 말수가 적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 듯 소리가 작아졌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얼핏 이야깃거리를 들어도 맥락이 잘려있으니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황실에서…,”
“무슨 얘기 중이오?”
“어머!”
태형이 이전처럼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공주와의 ‘마지막’ 만남이라는 것이 신경 쓰여 다른 것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예감이 안 좋았다. 몰래 얘기를 나누던 여인이 태형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태형의 시선은 올곧았다. 여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다렸다. 여인은 뒷걸음질 쳤다.
“아, 아무것도….”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묻지 않소.”
태형이 자리를 피하려는 여인의 팔을 붙잡으며 얼굴을 굳혔다. 미간이 좁아졌다. 태형이 들은 ‘황실’이 태형을 조금 불안하게 했다. 여인의 얼굴엔 두려움이 퍼졌다.
“아, 아니이. 그게….”
“…….”
“황실에서 예전에 죽은 황녀가,”
“…….”
“…살아있다지 뭡니까아.”
여인이 말을 마치며 태형의 팔을 뿌리쳤다. 여인이 태형의 시야에서 멀어짐에도 태형은 움직임이 없었다. 식이 태형을 보며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되련님, 무슨 일이십니까요. 태형은 대답이 없었다.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누군가에게 비밀을 고한 적이 있던가. 기억이 없다. 술을 먹어 실수를 했던가. 근래에 술은 입에도 댄 적이 없다. 태형이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공주가 있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그럼 누구란 말인가. 세상을 뒤져 소문의 근원을 찾아내야 하나.
‘근데 나 진짜 이르려는 마음 없었거든?’
‘……’
‘진짜야, 믿어.’
공주가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여럿이었다. 황제, 정국, 도화궁 나인들. 그리고, 태형. 소문의 근원을 뒤지다 보면 그것이 나에게 당도하려나. 태형이 머리를 싸맸다. 이상한 황제에게 시집가는 것보다 숨어있는 것이 낫다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던 공주가 떠올랐다. 오늘 궐에서 보는 건 마지막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이래선 나를 찾아와 달라고 말할 수가 없잖아…. 자책과 절망에 휩싸였다. 태형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김 가(家) 태형. 사법부 대사 댁 장남입니다요.”
어느새 도달한 궐 앞에서 식이 말했다. 무언가를 듣고 난 후부터 표정이 좋지 않아진 태형 대신이었다. 명단을 보던 문지기가 대궐의 대문을 반쯤 열었다.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따라 대궐의 문이 유난히 높았다. 식이 조심히 다녀오라며 걱정이 다분히 어린 목소리를 보냈지만 태형은 듣지 못했다. 해맑게 웃던 공주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익숙한 길이었으나 군사가 붙었다. 궐 안은 대신과 나인, 황족들이 대부분 드나들었으나 이상하게 군사의 배웅을 받았다. 그것을 신경 쓸 틈도 없이, 태형이 행화궁(杏花宮)으로 향했다. 이 혼사가 끝나면 황안전(皇安殿)에 가보아야겠다고, 그리 마음먹었을 뿐이었다.
수아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은은한 향이 공간을 채웠다. 수아가 앞에 놓인 종이를 흘끗 쳐다보며 잔을 내려두었다. 일이 자신의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궐의 혼사 담당 기관에 오늘은 혼인 약조를 할 것임을 이미 고했다. 그리하여 발급된, 혼인을 약속하는 서약서였다. 태형만 와준다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분명히.
“드셨습니다.”
수아가 밖으로 향하는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곧 문이 열리고 태형이 나타날 것이었다. 수아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늦으셨네요.”
“…….”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태형은 말을 아꼈고, 수아는 그런 태형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서약만 해준다면 혼례를 올리지 않아도 내 남편일 텐데.
과정은 간단했다. 얇은 종이에 빼곡이 쓰인 서약서를 낭독하면, 지장을 찍고 혼사를 파(破)했다. 상궁이 지루한 목소리로 그럴듯한 서약서를 읽어 내려갔고, 수아가 자신의 부모 밑에 적인 자신의 이름 석 자에 붉은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손을 닦으며 태형을 바라봤다.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붉은 인주에 손을 찍은 태형이 그것을 종이와 가까이 했다. 수아는 태형을 지켜봤다.
“…이제 그 분은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제 제 지아비니까요. 태형이 멈칫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넓은 교정전(矯政殿)이 금세 고요해졌다. 대신들이 빠져나가고 석진 홀로 나랏일을 볼 때면 늘 그러했다. 석진이 용상에 앉아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화양 지방에 간 호석이 보낸 업무 보고였다. 호석은 늘 황제의 안부를 물으며 서신을 끝마쳤다. 인사말임을 알고 있는 석진이 서신을 접어 넣어두었다. 인편을 통해 황제의 안부가 전달되는 탓이기도 했다.
“폐하, 저이옵니다.”
낮은 목소리가 두드러졌다. 석진은 그가 남준인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드세요.”
석진이 대답했고, 남준은 문을 열었다. 석진의 부름에 응해 찾은 곳이었다. 어쩌다 석진의 최측근이 되었다지만, 매번 석진이 자신을 찾는 이유는 한 가지로 한정되었다. 남준이 석진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며 얼마 전 석진이 호석과 자신을 찾던 때를 떠올렸다. 그날 석진은, 황녀인 동생을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 눈동자는 결의에 차 흔들림이 없었다. 폐하의 명이었으므로 강압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 올곧음 때문에 비밀을 누설하지 않고 석진을 따른 것이었다.
“부르셨사옵니까.”
남준이 고개를 숙였다. 비밀유지를 위해 내관을 제외한 인물은 모두 교정전에서 쫓아내었다. 그것이 교정전의 고요함에 기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석진이 묘하게 웃었다.
‘얼마 전 장군으로 승격했다 들었습니다.’
호석을 향해 한 말이었다. 마침 병조의 밑에서 군사들의 훈련을 지휘하다 황제가 부른다는 말에 급히 환복한 후 온 것이었다. 남준은 호석을 흘끗거렸고, 호석은 석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폐하. 목에 긴장이 바짝 서렸다. 황녀를 지키기 위해서 우릴 불러 뭘 하겠다는 건지.
‘그 나이에 장군이라. 비상하고 출중하단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요.’
‘예?’
아, 아니, 그것은! 호석이 다소곳하게 모은 손을 풀고 석진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석진은 호석의 부정을 듣는지 마는지 말꼬리를 매정히도 잘라버렸다.
‘화양 지역에 넓은 들이 있습니다.’
‘…….’
‘곧 군사를 구한다는 방이 붙을 겁니다.’
‘…….’
‘그곳에서 군사를 키워주시겠습니까.’
완강한 발언이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이 존재했다. 호석이 다시금 손을 다소곳이 모았다. 그만큼의 경력이 없을진대, 어째서 저를 고르셨나요. 덮쳐오는 불안감과 부담감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헌데 군사와 황녀가 무슨 상관인지,’
24년 전, 민(旻)은 전쟁에서 이겼고, 황녀를 요구했다. 민은 포악한 황제의 정치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졌다. 어린 황녀가 그곳으로 간다면 포악하고 늙은 황제의 첩, 상황이 좋아진다면 황후가 되어 노리갯감으로 늙어갈 것이 뻔했다. 하지만 석진은 제 동생이 죽을 때까지 숨겨져야만 한다는 숙명이 미치도록 안타깝고 싫었다. 평생 숨겨질 거짓말은 없었다. 그것이 못내 걸렸다. 선황인 아버지는 민에게 항복했기에 그럴 수 없었다지만, 자신은 그것을 바꾸고 싶었다. 온전히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내어주고 싶었다.
‘똑똑하니 금방 알 줄 알았는데.’
석진이 얼핏 웃음기를 띄며 말했다. 사실 어렴풋이 알았다. 아니, 석진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석진의 입으로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
‘전쟁을, 준비해야겠습니다.’
민을 무너뜨리고, 무릎을 꿇려 말하고 싶었다. 황녀는 내어줄 수 없다고. 호석이 마른 침을 삼켰다. 당신이 지휘하는 군사들을 데리고, 화양으로 가세요. 호석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호석을 향했던 석진의 화살은 남준에게 돌아갔다. 문과 장원이랬던가요. 남준이 숨을 잠시 멈췄다.
‘당신은 내 곁에 머물며 바른 길을 인도해주세요.’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으나 이상하게 목소리에 슬픔이 깔렸다. 남준이 호석과 같이 고개를 숙였다.
얼마 후, 호석은 군에 자원한 군사를 궐에 소집했다. 궐에서 기초적인 훈련을 받은 병사들은 화양 지역으로 떠났다. 호석의 아래에서였다. 넓은 들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며 힘을 길렀다. 규모는 민의 땅덩어리만큼이나 컸다. 반 틈 밖에 남지 않은 현에서 뽑을 수 있는 최대치의 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준은 이따금씩 석진에게 불려 다니며 전략을 짜고, 군사들의 녹봉 등을 관리했다. 전략은 머릿수가 많아야 좋게 나오는 법이며, 전장에 나가지도 않는 사람이 어찌 좋은 전략을 내겠냐는 불평 아닌 불평을 한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비밀유지 때문이라고 했다. 전장은 자신도 겪은 적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민에서 꾸준히 사람이 오가는 상황 속에서 석진은 불신이 늘었다. 그에 남준은 입을 다물고 석진에게 귀띔을 계속했다.
“적당히는 되었다는 군요.”
화양 지역에서 호석이 키우는 군사들을 이름이었다. 옆에 접어둔 호석의 서신을 흘끗 보았다. 적당히는 이길 수 없지만, 단기간에 이만큼의 효과를 보다니. 석진이 경탄했다. 역시 홀로 무과의 장원을 딴 게 허사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부디 그것이 호석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길 바랐다.
“녹봉을 군사들의 사가로 꾸준히 보내고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렇습니까.”
모두가 석진이 계획한 일이었다. 신하들 누구의 의견도 개입되지 않았다. 그때 붙은 방에는, 녹봉과 숙식은 황실 차원으로 줄 것이니 군사 자원자를 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모두는 아니었으나 대부분 그것을 보고 군사에 자원했다. 그러므로 일은 똑똑히 해두어야 했다.
“헌데 자원자의 수가 많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언제까지고 백성의 세를 뜯을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그것 또한 압니다. 아직 얼마 안 되었지 않습니까. 기다려 보지요.”
“예, 폐하.”
석진이 용상에 앉아 눈을 감았다. 얼마 전, 동생에게 진실을 고하고 난 후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마를 짚었다.
“적당한 때가 오면, 그때…,”
말을 멎었다. 이마를 짚던 손을 떼어내고 눈을 떴다. 바깥이 시끄러웠다. 고요한 교정전의 정적이 깨어졌다. 어찌 모두 여길 벗어나라 했건만. 석진이 짜증스럽게 구석에 선 내관을 불렀다. 밖에서 소란을 피우는 누군가를 잠재울 심산이었다. 그 찰나 석진이 귀를 열었다.
─폐하, …폐하!!
익숙한 목소리였다. 누구인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어디선가 얼핏 들어본 것 같았다. 석진을 다급하게 불렀다. 석진이 내관에게 말을 잇다 말고 용상에서 일어섰다. 앞에 선 남준을 지나쳐 문을 활짝 열었다. 찬 공기가 훅 끼쳤다.
“폐, 폐하!”
태형이었다.
“멈추어라.”
태형은 군사의 벽에 가로막혀 허우적댔다. 황안전 근처에서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석진이 엄히 불렀다. 태형을 가로막던 두 군사가 행동을 멈추고 석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웃음기 가득했던 얼굴에 심각함이 만연했다.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태형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큰일났습니다!”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다. 수아를 두고 행화궁에서 빠져나와 석진을 찾았다. 인사말은 고사하고 혼인 서약의 지장조차 찍지 않은 채였다. 이상하게 군사들이 붙어 황안전을 향해 가지 못했지만 입구가 누군가에 의해 막혀있는 것으로 보아 황제가 있는 곳이 분명했다.
태형이 교정전으로 들었다. 비밀유지랍시고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 그 ‘비밀’이란 것이 없어질 지도 몰랐다. 꿋꿋이 서있는 남준이 다급해 보이는 태형을 바라봤다. 석진은 용상에 앉아 태형에게 말해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공주가…,”
석진의 나른한 눈이 크게 떠졌다. 공주가,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구석 방에 홀로 들어가 앉았다. 민에서 올 때마다 숨는 곳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모르고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단정히 빗은 머리가 흐트러졌음에도 부러 고쳐 묶지 않았다. 도화궁으로 들어오는 모든 식사도 하지 못한 채였다. 마음이 저렸다.
분명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실수였다던 커다란 은행나무 밑에서의 행위도 그렇기 때문이라고, 그리 말했다. 그런데 입궐한 이유가 혼사 때문이었다니.
궐에 대해선 나인을 통해서 들은 것이 많았다. 외부인에 비해 아는 것이 적었으나 나인의 이야기나마 듣는 것은 도화궁에서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양반가의 혼사는 보통 궐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입궐 허가자의 명단에 혼사를 이루는 자의 이름이 올라가게 된다고. 한 쌍의 남녀가 드나들어 혼사를 이루면 다음 남녀가 혼사를 이루는 식이라고. 그저 그럴듯한 궐의 남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김태형이 그 중 한 명이라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마마….”
어느 정도 혼사가 진행되었다고 했다. 머지않아 혼인 서약을 하면 입궐이 중단될 거라고 했다. 권위 있는 양반가의 혼사이니 제 아무리 황실의 공주가 끼어들어도 바꿀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모두 다 거짓말이었나. 알고도 그런 말을 한 걸까. 그게 아니래도 난 어떻게 해야만 하지.
생각에 잠긴 새에 정국이 어두운 방 안으로 들었다. 도화궁으로 식사상이 들었기 때문에 찾은 것임이 분명했다. 식음은 일찍이 전폐했다.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들었으나 한 귀로 흘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일순간 빛을 맞았다. 파묻은 고개를 조심스럽게 들었다. 방에서 가져온 것인지 불붙은 촛대가 방을 밝혔다. 불씨는 일렁이며 나와 눈높이를 맞춘 정국이를 비추었다.
“…모두가 걱정합니다.”
손대지 않은 식사상을 물렸다고 내 옆에 항상 붙어있는 정국이를 나무랐겠지. 자주 궁을 비워 아무것도 모르는 나인들이 무슨 일이냐며 정국이를 물고 늘어졌겠지. 모두가 걱정할 것을 예상해도 모든 것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걱정을 끼치지 않아도 김태형은 혼인을 치를 것이었고, 이전처럼 지내도 이미 알게 된 김태형은 결국 이곳에 발길을 끊을 것이었다. 정국이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무릎 위에 머리를 박았다.
“…조금이라도 드세요.”
고요한 방에서 별안간 유리가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살며시 들자 정국이가 내 앞을 나무 숟가락을 들이 밀었다. 직접 손을 대지 않는다면 제가 음식을 떠 먹여줄 심산인 듯 보였다. 식사를 자꾸 거르는 걸 들었는지 그릇 안엔 묽은 죽이 한 가득이었다.
“자꾸 마르십니다.”
그 말은 어떤 술수를 쓰는 것 마냥 꾹 다문 입을 열게 했다. 물 한 모금을 마시지 않아 텁텁한 입가에 정국이가 내민 나무 수저가 가까워졌다. 묽은 것을 애써 삼켰다.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넘김이 쉽지 않았다.
‘이거 다 먹는 거만 보고 갈게!’
‘…이걸 다?’
‘자, 아.’
내가 아파서 앓아누웠다가 나아갈 때쯤에도 김태형이 이리 죽을 떠먹여 줬었는데.
더 이상 떠먹이기를 포기한 것인지 수저를 내려놓은 정국이가 내 시야에서 벗어나 옆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느새 벗어둔 제 겉옷이 내 등을 따뜻하게 덮었다. 정국이는 아무 말도 없었다. 숨소리만이 작게 울렸다.
“…슬프면,”
“…….”
“우세요, 울 만큼.”
조심스럽게 뻗은 손이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엉성하게 긴 머리칼을 훑은 큰 손은 제 겉옷이 올라가있는 굽은 등을 향했다. 따뜻한 체온이 조금 마른 등을 토닥거렸다.
어렵사리 꺼낸 말임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한 순간조차 울지 않았다. 아니야, 나 안 슬퍼. 마음이 너무 안 좋을 뿐이야. 며칠간 나에게 그리 다그쳤다. 매 순간순간마다 그를 떠올리고 있으면서도.
‘울 때까지 울어.’
아바마마가 승하하셔서 울고 있을 때도 김태형이 그런 말을 했었는데.
스스로 밥을 먹이겠다고 나를 칭찬할 때도 김태형이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내 슬픔을 달래려 할 때도 김태형이 나를 토닥거렸는데…….
“…….”
정국이는 나를 여전히 토닥거렸고, 나는 그제야 서글픈 응어리가 터졌다. 하염없이 쏟아내며 깨달았다. 내가 김태형을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고.
태형은 벙쪄 있었다. 태형의 붉은 손가락은 아슬아슬하게 혼인 서약서에서 거리를 둔 채였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태형의 질문에 수아는 다른 대답을 했다. 얼마 전 도화궁으로 들어가는 태형을 봤다고 했다. 태형은 행화궁을 뛰쳐나가며 생각했다. 결국 공주가 알려진 건 자신 때문이었음을.
태형의 뒤에는 교정전 앞에서 태형을 막았던 두 군사가 따라붙었다. 태형이 도화궁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느리게 했다. 공주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향해 웃을 것 같았지만 태형은 못내 마음이 불편했다. 무슨 말을 가장 먼저 꺼내야 할까. 미안하게 됐다고, 또 내가 너에게 못할 짓을 했다고 사과를 일삼아야 할까. 아무것도 모른 척 웃으며 지장을 안 찍어 입궐 허가자에서 이름을 지우지 못했으니 또 볼 수 있다고 말할까. 고민을 반복했다. 그럴듯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퇴궐길을 안내할까요?”
궐을 돌아다닌 전적이 많으니 퇴궐길 정도야 태형이 더 잘 알고 있었겠지만, 따라 붙은 병사는 부러 태형에게 질문했다. 태형은 대답하지 않고 다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멈춰 섰다. 도화궁의 쪽문 앞이었다. 누군가 길목을 막아섰다.
“여기서부턴 출입이 제한됩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일전에 공주가 여기 오면 저주 내린다는 소문 때문에 아무도 안 온다고 했는데, 이 문지기는 어째서 둔 거지. 태형이 힘없는 입술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왜요?”
“……그건,”
“저희도 명을 받아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한 병사가 머뭇댔고, 그 옆에 있던 남자가 대답을 대신했다. 그들이 이르는 ‘명’의 근원은 병조 판서였다. 병조 판서는 수학관 장이자 수아의 아버지인 윤 씨를 대신해 그 ‘명’을 내렸다. 그 사실을 알 리 만무한 태형은 생각했다. …황제 폐하려나. 나 같이 소문을 떠벌리는 사내 따위는 공주와 어울릴 수 없다는 뜻일까. 태형은 자꾸만 스스로를 자책했다.
태형이 자신을 가로막은 두 남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발을 옮겼다. 어쩌면 혼사를 이루려 궐에 오며 공주를 만나는 파렴치한 짓보단 이게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도화궁을 등졌다. 태형이 공주가 있는 궁에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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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국 공주님들 88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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