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린 바람이 볼을 스쳤지만 잡힌 손목만은 뜨뜻미지근했다. 두 쌍의 발이 바삐 어딘가를 향해 뛰었다. 둘 뿐인 도화궁을 벗어난 태형과 공주였다. 태형의 뒤통수를 보며 뛰어가던 공주는 태형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지 못해 버거워했다.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지배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얼굴에 웃음기를 가득 담고 막무가내로 어딘가를 향해 가는 태형 때문에.
“어, 어디 가요!”
“내가 되게 예쁜 거 보여줄게!”
오늘 마침 도성에 현(賢)의 대대적인 축제인 성령제(成靈祭)가 열린다고 했다. 그러한 소식이 도화궁까지는 미처 닿지 못했지만, 태형이 들은 바로는 그러했다. 궐에 오는 길에 밤을 밝히기 위해 색색의 연등을 달아놓은 것을 보기도 했고. 아직 훤한 낮이라 밤을 밝히는 불빛들은 보지 못할 것이었지만 태형은 그저, 보여주고 싶었다. 이 성령제가 떠오르자마자. 구석의 방에 숨어있는 공주에게 동정인지 뭔지 모를 감정이 들자마자. 행동은 충동적이었다.
태형이 가는 곳은 대궐의 쪽문이었다. 주로 궁녀 혹은 필요한 인재를 급히 들이거나 내보낼 때, 황제가 바깥으로 잠행을 나갈 때에 사용되던 문이었다. 일전 혼사 건으로 처음 궐에 왔을 때, 전 황제와 만나 시간을 버린 것에 대한 보상으로 궐을 구경해도 되냐고 물었을 때, 궐의 담을 둘러보다 태형이 발견한 것이었다. 그때 바깥까지는 확인하지도 못한 채 공주를 만났지만. 자신을 상궁이라고 속이며 울먹이던 공주가 태형의 머릿속에 여태 선연해 위치를 잊을 수도 없었다. 태형이 어딘가에 숨어있는 쪽문을 찾아냈다. 바깥과의 경계였다.
“가.”
“…아니, 저 나가면 안 되는데…,”
“됐고. 가자, 같이.”
공주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서렸다. 태형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깥을 향해 그녀를 밀었다. 신고 있던 신이 차가운 흙바닥에 닿았다. 궐을 빠져나왔다. 그녀의 의견은 모조리 묵살했다. 민의 황제를 만나도 궐 안보단 바깥이 나을 것이라는 태형의 주장에 의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다시금 길을 따라 달렸다.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보였다. 완전한 궐 밖에 닿았다.
“어때?”
숨을 몰아쉬던 공주가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이 웃었다.
황녀(皇女)
十二
찬바람이 조금씩 부는 거리 위에는 형형색색의 연등이 줄에 매달렸다. 수십 개의 발자국 소리가 땅을 울렸고, 추위로 퍼지는 하얀 입김은 끊일 줄을 몰랐다. 어른들은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양 웃으며 먹고 사고 떠들었으며, 아이들은 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술래잡기 같은 놀이를 행했다. 모두 오라버니의 백성들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추위가 만연한 늦겨울에도 바빠 보였고, 또 행복해 보였다.
“멋있지.”
“…….”
“오늘은 밤 되면 더 멋있는데.”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궐 밖을 나온 것도 나온 것이지만 살면서 이리 많은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나, 하는 의구심에. 나의 의견을 묻는 물음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김태형 쪽으로 꺾었다. 눈이 마주쳤다.
“가 보자, 맛있는 거 사줄게.”
“…아니, 그게.”
“괜찮아. 나 있잖아.”
김태형의 웃음기 가득한 눈이 예쁘게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사실은 이 상황이 벅차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데, 평생 윗사람이라곤 아바마마와 오라버니밖에 만나지 못한 내가 이곳에 나와 ‘백성’이라 칭해지는 사람들을 신분을 감추며 섞여 들어간다는 것이 묘하게 떨리고 무서워서, 그저 그 경계 앞에서 발을 붙이고 서 있으려고만 했다. 게다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궐 밖으로 나온 것이었으니. 근데 그리 신난 얼굴로 가자고 말하는 김태형을 안 된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데다, ‘괜찮다’는 말이 무슨 이상한 술수라도 쓴 듯이 내 몸을 이끌어서 바보같이 또 이끌렸다. 그 따뜻한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바쁜 남녀노소의 틈으로 들었다. 신분을 막론하고 걷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했다. 더 이상 나란히 달리지 않음에도 꼭 잡은 손은 땀이 조금씩 배었다. 해사하게 웃으며 그 사이를 걷는 김태형에게 누군가가 말을 건넨 것은 그때였다.
“아이구, 대사님 댁 되련님 아닙니까!”
“아, 오랜만이오!”
“요즘 들어 왜 이리 뜸하시나 했는데, 왜 이제야 오셨수!”
“그리 됐소. 일이 있어서.”
“허면, 옆에는 정인(情人)입니까?”
판자에 이것저것을 팔던 나이든 여자가 김태형을 불렀다. 말투로 보나, 차림으로 보나 어떻게든 신분 같은 곳에서 차이가 있어 보이긴 했으나 김태형은 능숙하게 자신에게 편히 말을 건네는 여자에게 대답했다. 뭐, 저잣거리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으니 안면이 없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여자가 말하는 정인(情人)이란, 나를 일컫는 듯 했다. 추측하지 않아도 어차피 김태형의 옆에는 나뿐이니. 김태형과 내 시선이 맞부딪혔다. 쉬이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사이지만 정인까지는 아닌데. 낯가림에 의해 그리 대답하지는 못하고 김태형에게 바른 대로 말하라는 눈짓을 했다. 김태형은 들은 건지, 만 건지 그저 치아를 훤히 드러내며 웃었다.
“아, 그리 보이오?”
“이런 대낮에, 손까지 꾹 잡고 돌아다니는데 그리 안 보는 것이 이상하지요!”
“그렇소? 그럼 그렇다고 칩시다! 보기엔 어찌, 잘 어울리오?”
똑바로 말하지 못하고 대답을 흐린 발언에 미간을 구기며 옆에 선 김태형을 올려다봤다. 장난기 다분한 표정이 사실을 생각지 못하고 툭툭 말을 내뱉었다. 여자의 말에 잡힌 손을 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으나 안 그래도 커다란 손에 더 꽉 잡혀 그러지도 못했다.
“당연 하다마다! 내 평생 온 도성을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팔았는데, 이런 선남선녀는 처음이올시다!”
“그 정도요?”
“되련님을 어릴 적부터 봤다만, 왜 여자를 한 번 안 데려왔는지 알 것 같수다. 이리 고운 규수를 꽁꽁 숨겨 놓고 이제야 오시고!”
“말빨엔 역시 못 이기겠습니다. 어디, 한 번 봅시다. 진 김에 선물 하나 사줄 터이니.”
내가 쉽사리 끼어들지도 못하는 이야기가 끝났다. 나를 이리 끌고 나온 것은 저인 줄도 모르는 건지, 김태형은 내 손을 놓은 채 신이 난 듯 여자의 판자를 향해 다가갔다. 옆으로 따라 붙으려 해도 내가 괜히 그 틈에 끼어드는 기분을 지울 수도 없고, 흐지부지 말을 흐린 것도 괘씸해 큼직한 뒤태를 보며 멀뚱히 그 자리에 섰다. 맑은 겨울 낮의 하늘에 매달린 연등을 바라봤다. 무슨 날이기라도 한 듯 거리를 꾸민 모습이 신기해 이어진 풍경을 눈으로 쫓으며 그 근방을 서성였다. 김태형은 무슨 물건을 살 양인지 여태 돌아오지 않았다.
“…어!”
한 눈을 팔다 누군가와 몸이 부딪혀 중심이 기운 것은 그때였다. 외마디 탄성과 함께 크게 휘청이는 몸을 잡으려 애썼다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땅에 끄이는 치마까지 밟아버려 딱딱하고 찬 땅이 몸과 충돌했다. 고통은 천천히 찾아왔다. 아…. 얼굴을 구기고 넘어진 부위를 문지르며 부딪친 사람을 올려다봤다. 젊은 사내였다. 나만큼 적잖게 당황한 모양인지 눈동자가 동요했다.
“괜찮으십니까?”
“…아녀자가 경거망동 하십니다.”
앉은 몸을 움츠렸다. 들어오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을 대신한 것은 일행처럼 보이는 키 큰 사내였다. 나를 야유하는 발언에 어찌 반응하지 못하고 차가운 바닥만을 딛고 멈춰 섰다. 나와 부딪친 사내는 자신의 일인 것 마냥 미간을 찌푸리는 일행을 제지했다. 난 괜찮으니 그만하시게. 그리곤 손을 내밀었다.
“제 불찰입니다. 미안합니다.”
“…….”
“이 녀석이 조금 날카로울 뿐이니 마음 푸세요.”
고운 비단결 속에 숨어있던 손이 내 앞에 펼쳐졌다. 남자의 손이 잡으라는 의미를 가득 담았다. 그리 나쁜 이로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손을 잡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낯선 이의 낯선 향과 낯선 느낌에 의해. 두 사내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아른 거렸다. 선이 생각보단 부드러운 남자가 눈을 곱게 접었다.
“…공주야!”
그 틈으로 끼어든 것은 다른 누군가도 아닌 판자에서 물건을 사겠다며 한 눈을 판 김태형이었다. 두 배 정도는 커진 눈이 나를 쫓았다. 한 달음에 바닥을 짚고 앉은 내 옆으로 달려온 김태형이 어디 다친 곳은 없냐며 내 몸을 쭉 훑었다.
“괜찮아?”
“…괜찮긴 한데,”
김태형에 의해 내민 손을 무안하게 거둔 남자와 눈을 맞췄다. 나를 바라보던 김태형이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꺾었다. 큼직한 두 눈이 나와 부딪힌 사내를 마주했다. 넘어진 채인 내 팔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아이처럼 일으킨 김태형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굽혔다.
“대신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가자, 공주야.”
김태형이 다시금 내 팔을 잡아 다른 위치로 나를 이끌었다. 손사래를 치던 남자를 한 번 돌아보며 김태형의 뒤통수를 묵묵히 쫓았다. 어정쩡한 표정이 눈에 남았다. 나와 마주하는 바람에 의해 긴 머리가 휘날리고 치마가 땅에 끌렸다. 쫓는 걸음이 버거울 때쯤에야 김태형이 걸음을 멈췄다. 나를 내려다봤다.
“다친 데 진짜 없어?”
“…없어요.”
“왜 못 일어나고 그러고 있어.”
“…….”
“놀랐어?”
물음이 퍽 다정했다. 김태형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느린 한숨을 뱉었다.
“나도 엄청 놀랐잖아.”
“놀랐어요?”
“응, 네가 거기 넘어져 있어서.”
“…왜요?”
“나도 몰라.”
“…….”
“근데 너는, 뭘 얼마나 눈을 뗐다고 그새 일이 나.”
그러게, 눈을 왜 떼요! 안 그래도 여기 처음인데. 한탄스러운 발언에 질책하듯이 반박했다. 김태형은 장난인지 아닌지 모를 웃음을 흘리며 몸을 숙였다. 도화궁 연못 옆에서의 그 날처럼 미처 털지 못한 흙을 툭툭 털어냈다. 그리곤 말했다. 미안, 미안. 내가 잘못했다.
“근데 나 거기서 너 줄 선물도 샀는데!”
“선물요?”
궁금한 눈빛을 했다. 그 판자에서 결국 고른 것이 내 것이었나. 김태형이 소맷자락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예쁘게 매듭지어져 나비를 그린 노리개였다. 내 앞으로 그것을 내밀기에 신기하게 두 손을 뻗었다. 궁중에서는 치장을 할 이유를 찾지 못해 착용해보지 못한 물건 중 하나였다. 김태형이 뿌듯하게 입을 열었다.
“내 정인 거.”
“……아!”
근데 그것은, 지난 김태형의 잘못을 되새기게 하는 데 충분한 것이었다. 받은 것을 쥐고 왜 제대로 말 안 했냐며 아프지 않게 툭툭 김태형의 팔을 쳤다. 거짓말을 아예 못하는 나와는 달리 그 말이 자연스러운 것이 더 문제였다. 태도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건 인정한다만. 입술을 깨물었다. 손에 실은 힘이 거세졌다.
“나 아프다, 공주야.”
“그러니까 왜 거짓말해요?”
“…이제 그 분 알았으니까 도성에 소문 다 나겠다. 이제 너 나랑 결혼해야 돼.”
“아, 진짜. 장난치지 마요!”
“장난 같아?”
김태형의 팔을 치던 손을 내렸다. 장난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 얼굴이 꽤나 진지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낯선 이에 의해 가슴께에서 내려앉은 심장은 김태형의 말이 뭐가 문제라고, 갑작스럽게 요동치기 바빴다.
석진이 멍하게 빈영전(賓寧殿)에 앉았다. 석진의 기다림이 무료할 것을 염려한 궁녀가 내온 차는 이미 차게 식었다. 찻잔에 조금도 입을 대지 않은 채였다. 빈영전에 배치된 내관이나 궁녀는 객(客)이 들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석진은 정작 미동이 없었다.
“차를 다시 내올까요?”
“…됐습니다.”
방의 한쪽에 선 내관이 석진의 차가 식은 것을 알고 물었다. 아무 생각을 안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인지 석진이 빠르게 대답했다. 차가 식든 말든, 마실 생각은 없었으니 어떻든 상관은 없었다. 석진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무려 궐에 찾아오겠다고 석진에게 선전포고한 민(旻)의 황제를. 걸치고 있던 곤룡포를 벗고 잠행을 나갈 때에나 입던 비단 두루마기를 입기까지 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사대국에 대한 예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민의 황이 늦사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약조한 시간이 이미 훌쩍 지나있었다. 백성을 다스리는 이가 약속을 이리 어겨서 되겠는가. 석진이 쓰게 읊조렸다. 새로 즉위한 황제의 첫 만남이었으나 그것이 오늘은 아닌가 보다고, 그리 생각했다. 석진이 마음속으로 천천히 다섯을 셌다. 하나, 둘, 셋, 넷…. 정사며 회의며 이것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미루고 왔으니, 다섯이 되면 안 오는 것으로 간주해 빈영전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현재 걸친 비단옷이 꽤나 답답했던 까닭도 있었고.
“폐하, 민에서 왔사옵니다.”
그러던 찰나 밖에 선 나인이 석진을 향해 소리쳤다. 마침 다섯을 세려던 찰나였다. 석진이 무덤덤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다홍색 비단옷을 입은 사내가 빈영전의 방 안으로 들었다. 석진이 굳힌 표정을 풀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빈영전에 자신의 내금위장과 함께 들어선 사내 또한 석진을 보며 웃었다. 인상이 선했다. 민(旻)에서 현(賢)까지 먼 걸음을 뗀 지민이었다.
“내가 너무 늦었습니까.”
“…아닙니다. 기다린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구석에 선 내관이 석진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어도 반의 반 시진 정도는 기다린 듯 했는데. 석진은 그러한 질문엔 언제나 그리 말했었다. 기다린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지민이 석진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현이 민(旻)국을 신경써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
“제 아비의 죽음을 함께 슬퍼해주어 고맙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다했을 뿐이지요.”
“내 다음 혼인식 때에는 아낌없이 축하를 보내 드리리다.”
지민의 말에 석진은 표정을 굳혔고 지민은 웃었다. 듣기에는 그럴싸했으나 이면엔 24년 전의 약조를 지키라는 말이 함축되어 있었다. 석진은 민의 사신이 도착했던 그 날, 황안전에서 자신의 아비와 함께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민의 태자가 황녀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간을 지체하는 것이 그리 달갑지 못하다고. 중전을 다시 들이는 것은 무리인 듯 하니 비를 들이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였사옵니다. 혼인, 혼인이라…. 석진이 생각에 잠겼다. 민의 황제가 이리 나서도 아직은 안 될 것 같은데.
“아직 미흡하여 중전의 자리를 지킬 수 없습니다.”
“내가 무어라 하였습니까. 그 때가 된다면 말입니다.”
묘한 정적이 일었다. 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가 된다면.
“…예쁜 자수네요.”
불현 듯 지민이 말했다. 갑작스러운 발언이었다. 석진이 자신의 옷에 새겨진 자수를 내려다봤다. 흰 매화꽃이었다. 하릴없이 자수만 하고 있는 도화궁 주인이 새겨준. 석진이 얼핏 웃었다.
석진이 걸음을 빨리 했다. 널찍한 어깨에 걸친 비단옷을 미처 용포로 갈아입지 못한 채였다. 지민이 빈영전을 빠져 나가자마자 발걸음을 돌린 것이었다. 지민을 배웅하지 못하고 석진을 따라 나선 황 내관이 석진의 걸음을 따라잡지 못해 버거워 했다. 그들은 도화궁으로 가는 길이었다. 늘 그러하듯 공주를 만나러. 사실 지민이 자신의 비단 위에 새겨진 매화를 보며 예쁜 자수라고 할 때부터 공주 생각이 났었다. 괜한 걱정이란 건 알았지만 걱정이 많은 오라비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폐, 폐하, 체통을 지키소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황 내관이 앞서가는 석진을 향해 말했다. 천천히 걸어가도 늘 그 자리에 있을 사람이거늘, 어째서 저리 서두르시는지. 양반가의 자식, 특히 황가의 자식이 뜀박질을 하는 것이란 예에 어긋나는 행위이기도 했으나, 자신은 일단 석진을 쫓아가기가 꽤나 힘들었기에 한 말이었다. 석진의 긴 다리가 휘적휘적 한 곳을 향해 바삐 걸었다.
“…있느냐.”
궐과 통하는 쪽문을 넘은 석진이 똑같은 맥락으로 공주를 불렀다. 곧 버선발로 달려와 안길 그녀가 석진의 눈에 선연했다. 조금 늦은 감이 있더라도, 자신의 예상을 어긴 적은 거의 없었다. 가끔 연못에 있거나, 매화궁으로 찾아오겠다고 자신과 엇갈린 적을 제외하고는. 전갈이라도 하고 오라고 했는데, 별다른 말은 없었으니 곧 창문이든 문이든 활짝 열고 그 밝은 표정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주 마마, 폐하께서 납시었사옵니다.”
그럼에도 도화궁은 한없이 고요했다. 그 문이 묵묵히 닫혀 있었다.
“연못에 간 것이 아니옵니까.”
“…그런가 봅니다.”
제 아무리 동생이라고 한들 함부로 여인의 방에 들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석진이 불안감을 떨치며 몸을 돌렸다. 민의 황이 갔으니 이제 숨지 않아도 된다고 하려 했는데, 이미 퇴궐한 걸 알고 연못으로 갔나 보다. 그리 생각했다.
도화궁을 향해 들어오는 정국을 보기 전까지는.
“…오셨습니까, 폐하.”
석진의 얼굴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뜬 정국이 석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특정한 사유로 인해 입궐한 자신의 형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형님을 뵙고 오는 길이옵니다.”
옥란궁에서 만난 자신의 형, 정현은 군에 자원했다고 했다. 자원자를 받는다기에 아버지에게 그러한 결정을 하겠다고 말했고, 아버지는 대대로 칼잡이를 하던 집안에서 자란 사내가 칼을 쥐지 않고 무엇을 하겠느냐며 비록 일개 군사가 된대도 괜찮다며 그 결정을 받아 들였다고. 그리곤 정국의 이야기를 했다. 여기서 무얼 하느냐고 물었다. 정국은 차마 귀한 어떤 분을 지킨다고 말하지 못하고 황제의 곁에 있다고 했다. 내금위장의 자리가 아직 비어 있지만 거기까진 미치지 못하고 그저 그의 주변을 지키고 있다고. 그리 많은 말은 하지 못하고 안부만 주고받은 채 궁을 빠져 나왔다.
“허면, 그 아이는…,”
“…공주 마마께서 안 계십니까?”
헌데, 그 사이에 사람이 없어졌다니. 정국이 황제를 지나쳐 도화궁 안으로 들었다. 욕실과 의실의 문은 열려 있었고, 방엔 그 누구도 없었다. 석진이 정국의 뒤를 따라 궁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없었다. 있어야 할 사람이. 정국은 연못을 향해 뛰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좁진 않았으나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곳 또한 없었다.
“없습니다.”
“이 궁 나인들을 불러 모으라.”
조곤조곤 존댓말을 고수하던 석진이 명령조로 말했다. 당혹스러움이 마음속에 휘몰아쳤다. 소수의 나인들은 금세 도화궁으로 모였다.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주의 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에 배치되어 있었기에 찾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석진이 말했다. 공주를 찾아 여기로 데려 오세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인들과 황 내관이 넓은 궐 안으로 흩어졌다. 마당에 남은 석진은 초조함을 달랬다.
“찾은 곳 어느 곳도 마마가 없사옵니다!”
“…허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이내 의심을 품은 내관이 말했다.
“폐하,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있사옵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 문이 열려 있으면 그 아이가 밖으로 나갔으려구요. 부정의 의미를 담은 투였다. 석진은 공주를 믿었다. 굳건하게.
“헌데 궐엔 마마가 없으시옵니다.”
“…….”
근데 어째서, 요즘 따라 변한 것 같은 네 행동에 의심이 생기는지. 왜 확인하고 싶게 만드는지.
“…밖으로, 나가 보세요.”
석진이 정국을 바라보며 명했다. 붉은 칼자루를 쥔 정국이 석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석진은 정국의 정수리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만일 발견할 시,
“절대 다치게 하지 말고 데려와야 할 것입니다.”
“맛있지.”
꽤 거리가 되는 저잣거리의 골목 안쪽에 나란히 앉아 거리에서 산 주먹밥을 입에 욱여넣었다. 짭조름한 맛이 혀에 감돌았다. 옆에 앉은 김태형은 손에 든 것을 어찌하지 않고 입을 우물거리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여기선 흔히 구입할 수 있는 것이며 다들 한 번씩은 먹어본 것이라고 했는데, 궐 안에서 차려진 음식상을 받아서 그런지 그런 느낌은 딱히 받지 못했다.
많은 것을 했다. 시간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사실 여긴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궐처럼 일정 시간에 종을 쳐주는 것도 아니라 지금이 몇 시인지도 잘 몰랐다. 여기 앉아 있기 전에는 예쁘게 염색된 옷감을 널어놓은 곳에서 시간을 보냈고, 그 전엔 세책방도 갔다. 김태형은 책을 어째서 반납하지 않냐며 한 씨라 불리던 남자에게 호되게 혼이 나긴 했지만. 길을 가다가 화려히 치장한 기생들도 봤고, 유생들로 보이는 사내의 무리까지 봤다. 거의 간접적으로만 접해보던 모든 것을 한 셈이었다.
“이제 갈까?”
입 안에 든 것을 삼키는 것을 본 김태형이 앉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대답을 않음에도 자연스럽게 일어선 몸이 앞서가는 김태형을 따랐다.
“어디 갈까.”
김태형의 말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 많은 시간은 아니었음에도 많은 것을 경험해 갈 곳은 꽤나 한정적이었다. 오롯이 나를 바라보는 눈에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 데나요!”
“아무 데나?”
진짜 아무 데나 간다? 내 의견을 재차 묻기에 고개를 빠르게 주억거렸다. 다시금 큼직한 뒷모습을 쫓았다. 저 나름의 배려인지 걸음걸이가 상당히 느려진 것이 눈에 띄었다. 처음 해보는 바깥 구경이 나를 대담하게 만든 지는 몰랐으나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았다. 아직 해가 완전하게 저물지 않았음에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 기생에 홀려 여인을 쫓는 사내, 넘어진 여자 아이를 도와주는 남자 아이. 풍경이 김태형의 주변으로 스쳤다.
붐비는 거리에서, 김태형이 걸음을 멈춘 것은 그때였다.
“…공주야.”
“네?”
“내 손 꼭 잡아.”
내 쪽으로 몸을 튼 김태형이 내 손을 잡고 달렸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바람에 긴 치마가 크게 돌았다. 이유를 물을 새도 없었고, 목적지를 물을 새도 없었다. 한 번은 여기서 마주친 사람들이 훅훅 지나갔다. 달음질에 찬바람이 아리게 살결을 스쳤다. 김태형은 점점 저잣거리를 벗어났다. 하늘에 매달린 연등과 시끄러운 상가가 조금씩 멀어졌다.
“왜 그러는데요!”
“방해꾼.”
오르막길에 들어선 김태형이 툭 내뱉듯 대답했다. 간략한 대답이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그것을 가쁘게 내쉬었다. 뛰는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버거운 김태형의 걸음을 겨우 따라잡을 수 있을 때쯤에서야 뜀박질이 멈췄다. 당도한 곳은 도성이 한 눈에 다 보일 법한 언덕이었다. 커다란 은행 나무가 꼭대기에 한 그루있는.
“우와.”
“신기해?”
“네, 완전.”
낮은 지붕들이 빼곡하게 박힌 도성을 훑었다. 황제인 오라버니가 다스리는 곳이었다. 외마디 감탄사가 터졌다.
“근데 왜 뛰었어요?”
“방해꾼이라니까?”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요.”
“안 말해줄 건데.”
…치사하게. 잔디가 낮게 깔린 은행나무 밑에 주저앉으며 작게 투덜댔다. 김태형은 나를 따라 옆에 주저앉았다.
“…나 어릴 때, 여기 엄청 자주 왔다?”
“진짜요?”
“은행 줍다가 어머니한테 혼나기도 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 이렇게 구경하기도 하고.”
눈 오면 눈사람도 만들고, 친한 친구들이랑 술래잡기도 하고. 김태형이 이야기를 풀어내듯 자신의 유년을 내게 읊었다. 조금 개구진 아이였던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지만, 그럼에도 김태형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것을 꿋꿋하게 들었다. 멀찍이 보이는 저 너머의 저잣거리에선 해가 기욺에 따라 연등의 불을 하나둘씩 밝혔다.
“이 앞에 내리막길에서 앞에서 만난 애들이랑 썰매 타다가 법도에 어긋난다고 혼나고.”
“…….”
“여기서 되게 재밌게 놀고 그랬어.”
“…….”
“근데, 이쪽으로 오다 보니까 그냥 생각 나서 와 봤다.”
“…….”
“요즘에는 자주 못 왔는데, 이번에 공주랑 처음 오네.”
김태형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시선이 마주 부딪혔다. 아래에 듬성듬성 자란 키작은 매화나무의 꽃잎이 바람을 타고 언덕 꼭대기로 흘러 들었다. 정적이 읾과 동시에 하늘이 조금 어두워지고 거리를 메운 연등 불빛이 거리를 메웠다. 웃던 얼굴을 조금 굳힌 김태형이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순식간에 커다란 손에 내 뒷목이 잡히고 김태형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두 입술이 맞닿았다.
(매화꽃이 흩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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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틀렸습니다.
민국 황제는 지미니였어요.
지민(旻) = 민(旻)국
(단순)
☞ ♥현국 공주님 84분♥ ☜
0806 / 1214 / ♥김태형♥ / Remiel / 곤잘레스 카레 / 골드빈 / 공주야 / 군림 / 깻잎사랑 / 꽃게 / 꽃길 / 꽃단비 / 꽃소녀 / 꽃오징어 / 꾸꾸 / 나너조아 / 냥군땡 / 노트북 / 뉸뉴냔냐냔 / 니케 / 다홍 / 단아한사과 / 됼됼 / 뜌 / 라슈라네 / 룬 / 리자몽 / 리프 / 망개똥 / 매직핸드 / 맴매때찌 / 먹고쥭자 / 미스터 / 방소 / 보고싶찐 / 복동 / 봄비 / 불나방 / 비데 / 빵빠레 / 삐삐까 / 사막여우 / 설탕파티 / 솔트말고슈가 / 슈가나라 / 싸라해 / 아망떼 / 압솔뤼 / 열렬히 / 예찬 / 오레오 / 오월 / 오징어만듀 / 온새미로 / 옮 / 우와탄 / 우유 / 유자쿠마 / 윤기 / 은갈칰 / 응캬응캬 / 이다 / 이스트팩 / 입틀막 / 정꾸야♥♥♥ / 줄라이 / 지호 / 진격 / 집수니 / 찬아찬거먹지마 / 천사소녀제티 / 체셔리어 / 초코빵 / 쵸코두부 / 커몬요 / 태형아뷔태해 / 틸다 / 피쯔아 / 하트반지 / 핫초코 / 현질할꺼에요 / 호비 / 화학 / 황토색
느리게 굴러갑니다 :)
좋은 주말 보내요^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