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아, 예.”
석진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신료들은 입을 모아 석진의 즉위를 축하했다. 대다수가 석진이 대리청정에 나섰을 때 훼방만을 놓던 그 작자들이었다. 아첨하듯 한 말이었지만 석진은 그들에게 신뢰를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곧 성령제(成靈祭)가 시작된다구요.”
“그렇사옵니다, 폐하.”
“지원이 필요하겠습니다.”
현(賢)은 매년 봄이 시작되기 전 즈음 큰 제사를 열었다. 한 해의 큰 성공을 기원하며, 지난 한 해를 감사한다는 뜻에서 조상의 혼령에게 기도를 올리고, 풍년일 경우는 식량고의 남은 식량 일부분을 마을 사람들과 소비하곤 했다. 주관은 황제에게서 이루어졌다. 올해도 당연하게 사흘 정도의 기간을 두고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러한 날은 거리가 연등으로 빛났고, 날이 어두워져도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저잣거리를 떠돌았다. 가난한 이들도, 풍족한 이들도 한 해의 성령제를 기다리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올해가 풍년이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이판이 호탕하게 웃었다. 석진은 감흥없이 동조했다.
“아, 민(旻)에 공물은 잘 전달이 됐습니까.”
“그렇사옵니다, 폐하. 민의 황제가 폐하께 감사하다며 사흘 후에 방문할 것이라 전달했사옵니다.”
“…사흘이라, 너무 갑작스러운 것 아닙니까.”
“일전에 폐하께 전달했사온데…….”
“알았습니다. 맞을 준비를 하라 전하세요.”
뒤쪽에 앉아있던 신하가 멋쩍게 말했다. 얼마 전 민에게 위로 공물을 보내고 돌아온 사신이었다. 석진은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 권력의 주축을 세우던 늙은이들이 입맛을 다셨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어라 말해도 완강하기만 한 새로운 황제에게. 말이 멎자마자 한 신하가 입을 열었다. 투가 조심스러웠다.
“헌데, 폐하.”
“말씀하세요.”
“…황후 마마는 언제쯤…,”
명단을 내려준 지가 황태자 시절이었는데, 여직 소식이 없냐는 뜻이었다. 석진이 그 말을 듣곤 웃음기를 거두며 표정을 굳혔다. 신료들이 그를 보며 몸을 떨었다. 석진은 감당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
“…됐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파(破)하지요. 더 할 이야기도 없는 것 같으니.”
석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걸친 흑색의 곤룡포가 흩날렸다. 석진의 말을 받아적던 이의 붓이 멈추고, 옆에 선 내관이 석진을 따르려 애썼다. 긴 다리가 성큼성큼 신료들이 모인 자리를 벗어났다. 석진은 오늘도 무난하게 조례를 끝마쳤다고 여겼다. 석진이 자신을 따르는 내관에게 말했다.
“말한 것은 알아보았습니까.”
“예, 폐하. 순화 황제 즉위 당시에 단 둘이 장원에 급제했다 하옵니다.”
“그들은 어디 있습니까?”
“궐 어딘가에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들을 황안전에 부를까요.”
“아니오. 그냥 이곳에 부르시지요. 여기 있을 테니.”
석진이 걸음을 틀어 황제가 정사를 보는 방으로 들었다. 황 내관이 웃으며 석진을 두고 바깥으로 나갔다. 즉위식이 끝나자마자 했던 첫 황명이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문무과의 신하를 데려오라. 전 황제 즉위 때에 가장 어렵기로 소문난 과거에 가장 우수한 실적을 올린 단 두 명의 장원 급제자가 있다고 했다. 그것도 한 명은 문과, 한 명은 무과. 석진이 그들을 찾는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 뒤에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야, 괜찮아?”
“어.”
“좀 제대로 보고 말해! 괜찮냐니까?”
“아, 몇 번을 물어! 괜찮다고!”
두 사내의 목소리가 담을 넘어 들렸다. 예복을 갖춘 채 서로 티격태격하는 남준과 호석이었다. 남준이 조용히 읊조렸다. 끈질긴 새끼.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다 수학관(修學館) 시절에도 명석한 두뇌로 하는 족족 통(通)을 받고, 과거 시험에 당당히 단 둘만 급제한 유명인사이기도 했다. 어린 사내들은 이들을 ‘본받고 싶은 선진’ 중 제일으로 꼽기도 했다. 호석은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얼마 전 궐의 군사들을 지휘하는 장군으로 승격했으며, 남준은 문과 장원으로 급제해 학문을 닦으며 궐의 문서들을 총괄했다. 이따금씩 수학관에 박사로서 강연을 나가기도 했고.
“근데 우리 왜 부르시는지 알아?”
“낸들 알겠냐. 나도 직접 뵈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야, 혹시 그건 아니겠지.”
“뭔데?”
“폐하께서 남색(男色)이시라…,”
“아, 입! 입!”
남준이 말이 많은 호석의 입가를 손으로 툭툭 쳤다. 호석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남준의 옆에 붙었다. 바쁜 걸음이 교정전(矯政殿)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궁인들이 하는 얘기론 엄청난 미남이라고 했다.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으나 지나갈 때마다 꽃바람이 부는 외모라고. 그것이 요즘 떠도는 황제의 남색 소문에 일조했었다. 자꾸만 황후를 맞지 않는 황제가 수상하여 퍼지는 소문이었다.
인물이 훤한 사내 둘이 교정전으로 들었다. 황제가 문 너머에 계시다는 소리에 숨을 몰아쉬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용안(龍顔)을 직접 보는 것은 예에 어긋나긴 하였으나 가히 궁금하기도 했다. 꽃바람이 부는 외모.
“왔으면 드세요.”
안에서 그람자로 두 인영을 본 석진이 말을 꺼냈다. 목소리를 듣곤 흠칫 놀란 호석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굳게 닫힌 문이 열리고, 호석과 남준이 황제에 즉위한 석진을 마주했다.
“문무과 장원에 급제했다 들었는데, 진정입니까?”
“예, 폐하.”
“고개를 들어도 됩니다. 나의 사람들이니, 문제 있겠습니까.”
석진이 온화하게 웃었고, 호석과 남준이 숙인 고개를 조심스럽게 들었다. 고운 얼굴을 마주한 두 사내가 숨을 빠르게 들이켰다. 가슴께가 턱 막혔다. 꽃바람이 부는 외모는 거짓이 아니었구나, 를 생각하면서.
“아, 말은 이것이 편하니 낮추란 말은 마세요.”
“…….”
“또한 여기서 하는 얘기는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
“목에 칼이 들어올까 발설했다고 한들, 제 칼을 받게 될 겁니다. 아셨습니까.”
“…예, 폐하.”
남준과 호석이 입을 맞추어 말했다. 웃으며 한 말에 공포가 서렸다. 석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 아십니까.”
“…무엇을 말이옵니까, 폐하.”
“이 나라에 숨겨진 황녀가 있다는 것.”
석진이 운을 뗐다. 고개를 든 채 석진을 바라보던 호석과 남준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석진이 정국에게 숨겨진 황녀에 대해 소개할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남준이 먼저 말했다. 무슨 말이시옵니까, 폐하. 석진은 다시 웃었다. 이상하게 씁쓸함이 번졌다.
“17년 전에 죽은 공주가,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예?!”
좁은 방 안이 두 사내의 목소리로 잠시 울렸다. 17년 전 죽은 공주. 황후와 함께 세상을 뜬 황실의 핏줄. 대대적으로 슬픈 기록으로 남았던 그 날은 구전(口傳)되어 아는 이들이라면 모두 아는 이야기였다. 그런 공주가, 살아 있다니. 남준과 호석이 두 눈을 끔뻑였다.
“하하, 안 믿길 만도 하지요.”
“…헌데, 그 이야기를 왜 소신에게 하시옵니까.”
호석이 물었다. 석진은 대답을 하기 위해 입술을 축였다. 황태자 시절부터 늘 생각했던 일이었다.
“지키고 싶습니다.”
“…….”
“그대들을 부른 건 그 때문입니다.”
황녀(皇女)
十一
“올 때 됐지?”
“…예.”
덮은 이불을 쭉 끌어 올리며 물었다. 옆에 앉은 정국이가 한숨을 푹 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나인들이나 상궁들이 이를 본다면 낮잠을 자는 게 황실 체통에 맞는 일이냐며 또 한바탕 혼을 낼 것이 분명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정국이가 온 이래로 여기 잘 들지도 않으니. 기다리는 것은 미시(時)*의 종이었다. 한 시진마다 울리는 그 종.
* 미시 : 오후 1시부터 3시 사이. 미시의 종은 1시를 알림.
“나 잘게!”
“…나인들께 혼나십니다.”
“또 언제 오는지 묻는 거 잊지 말고!”
대답은 듣지 못한 채 몸을 틀어 눈을 꼭 감았다. 내리 앉은 눈꺼풀 새엔 환한 대낮임에도 어둠이 가득했다. 사실 잠은 안 왔다. 잠을 잘 수밖에 없는 이유만 있었을 뿐. 늘어진 정국이의 한숨 소리와 제 자리로 돌아가는 발걸음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공주야!”
고요하게 닫혀 있기만 하던 문이 열린 것은 그 시점이었다. 늘 그러하듯 ‘공주야’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흠칫 떨었다.
“뭐야, 또 자?”
“…….”
가까워진 목소리가 조금 실망한 기색을 띄었다. 등을 돌린 채로 속눈썹이 반 밖에 안 드러날 만큼 눈을 꼭 감았다. 정확한 시각을 아는 것이 여기선 불가능하니 기다리는 시간이 올 때까지 가만히 누워 이러고 있는 방법 외엔 수가 없었다. 궐에서 가장 늦게 점심상을 받는 도화궁에서 일찍이 그것을 받고 물리기까지 했다.
“또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아닌 듯합니다.”
이유는 미시가 가까워질 쯤에 와선 종이 치면 가버리는 김태형 때문에. 허구 헌 날 내 기분은 고려도 하지 않고 접촉을 해대는 것을 끝내 스스로 이기지 못해서. 아픈 건 아닌데, 아픈 것 마냥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이상하고 낯설기만 해 결국엔 이런 방법을 택했다. 회피하기. 전 황제로 칭해지는 아바마마가 승하하신 뒤에 장례가 치러지던 날, 아침 댓바람부터 도화궁으로 달려와 나를 달랜 김태형이 떠오를 때마다 자꾸만 낯이 부끄러워지는 것도 이러한 내 행위의 동기에 일조했다. 거기에 대고 엉엉 한탄하듯 울어버린 것이 후회가 되어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두 손으로 보이지 않게 이불을 꾹 쥐었다. 말소리가 들렸다.
“…왜 요즘 맨날 자.”
“…….”
“나 보고 자주 오랬으면서, 보지도 않네.”
아니, 그건 본인이 자주 오겠다고 말해놓고…. 항변을 하려다가 참았다. 뱉는 숨에 아쉬움이 담겼다. 등 뒤로 부스럭거리는 비단결 소리가 선연했다. 몸을 일으킬 모양이었다. 정국이가 급히 말을 꺼냈다.
“…다음엔 언제 오십니까?”
“…….”
“…….”
“…내일요.”
언제쯤 이런 짓을 다시 해야 하나를 알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책이었다. 대화가 거의 없던 두 사람이 저런 말을 주고받는다는 게 좀 많이 수상하긴 하지만….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가 울리고 문이 찬바람이 스친 것 마냥 쿵 하고 빠르게 닫혔다. 방 내부에서 등을 돌린 몸을 조금 일으키며 감은 눈을 떴다. 어렴풋이 눈가로 빛이 새어들었다.
“…갔어?”
“갔습니다, 방금.”
덮은 이불을 치우며 누인 몸을 앉혔다. 나도 모르게 숨까지 참았는지 호흡이 커졌다. 베개에 의해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었다. 내가 대체 왜 이래야 해…. 내일 이 시간까지 챙겨야 할 것을 감안하니 머릿속이 까마득했다. 김태형이 나가버린 문을 멍하게 응시했다. 얼굴을 못 본지가 며칠 되었다.
그리 닫혀 있던 문이 다시 스르륵 열린 것은 그때였다.
“와, 이거 봐, 이거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김태형이었다. 나간 줄로만 알았던.
“죽을래, 너?”
“…….”
“아, 아니, 죽을래는 취소. 혼날래, 진짜?!”
“…아, 그게….”
“왜 자는 척해?”
커진 두 눈이 봄볕 아래 꽃향기를 쫓는 벌처럼 끈질기게 나를 따라 다녔다. 금세 다시 뉘이지 못하고 일으킨 몸을 뒤로 빼며 김태형과 거리를 뒀다. 마주한 얼굴을 쳐다보지 못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김태형은 이런 내 맘을 알고 몸을 붙이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오지 말까?”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그럼 뭔데, 왜 그러는데.”
말꼬리를 흐리며 하려는 말을 머뭇거렸다. 일단 나도 모르게 손사래를 치긴 했는데, 내 알 수 없는 반응의 원인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변명할 거리를 한참 생각했다. 터질 듯 다시 타오르는 얼굴이 그것을 제지하는 건지 생각은 꽉 막혀 풀릴 줄을 몰랐다. 김태형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바, 방금 깼어요!”
“…….”
“진짜 자고 있었는데….”
결국 생각해낸 게 끝까지 잡아떼자는 작전이다. 싫어서 피하고 그런 건 아닌데. 앉힌 몸을 김태형과 멀찍이 떨어뜨리곤 세운 무릎으로 얼굴을 묻었다. 이런 때면 늘 그렇듯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을 게 분명했다. 허, 참,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김태형의 입가에서 새었다.
“원래 안 그랬잖아.”
“…요즘 피곤해서.”
“어디 아파?”
“아뇨!”
아픈 것도 아닌데. 이렇다 할 이유는 아직 나도 잘 모르니 시원하게 답을 보내지 못하고 말수를 줄였다.
“공주야, 나 봐봐.”
“…….”
“고개 들어 봐. 눈 보고 얘기해.”
“아, 아니…. 손은 대지 말고…,”
직접적인 표현은 하지 못하고 내 쪽으로 다가오는 손을 슬쩍 피했다. 눈을 보며 대화를 나누자는 것은 필히 내 거짓말을 판별하기 위한 수단이 분명했다. 나라고 거짓말을 간파당하고 싶은 건 아닌데. 게다가 온통 빨개졌을 얼굴도 김태형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고. 무릎에 감은 팔로 고개를 묻곤 눈만 빼꼼히 내밀었다. 미묘한 얼굴이었다.
“내가 잘못한 거 있어?”
“예?”
“내가 아는 건 다 미안하다고 했는데….”
“아, 아뇨!”
“…….”
“진짜 없는데….”
김태형이 내 발언에도 못 미더운 눈짓을 했다. 그럼 대체 왜 그러는데? 추궁에 질책이 섞여들었다. 말은 안 했지만 이유를 물음과 동시에 더는 피하지 말라는 의미가 와 닿는 것만 같았다. 정적이 찾아들었다. 차분한 숨소리만이 오고 갔다. 그 새카맣고 깊은 두 눈동자가 대답을 갈구했다.
“……그냥.”
“…….”
“그냥요.”
허. 김태형이 허탈한 소리를 뱉었다. 소리가 가슴께를 아프게 쿡쿡 찔렀다. 아니, 근데 진짜 모르겠는 걸 어떡하라고. 마주 하기가 힘든데 아예 안 오는 건 또 싫고. 든 고개를 다시 푹 꺾었다. 정수리에 실망한 얼굴에서 나오는 따가운 시선이 박혔다.
“공주…,”
미시(時)의 종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그것이 뎅, 뎅, 하고. 김태형이 말을 멈췄다. 가야할 시각임은 은연중에 알았다.
“……아.”
외마디의 탄성을 내지른 김태형이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늘 그러하듯 정국이와 내 눈이 움직이는 김태형을 쫓았다. 나도 모르게 말을 꺼낸 것은 김태형이 나가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았을 시점이었다.
“…내일 진짜 와요?”
한창 자는 척을 하던 때에, 정국이가 대신해서 물어준 질문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고 확신을 가지기 위함이었다. 빳빳한 고개가 내 목소리를 따라 돌아갔다. 숨을 조이는 정적에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몰라!”
“…….”
“안 가르쳐 줘!”
심술을 부리듯 소리친 김태형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참 허무하게도 문이 닫혔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식이 궁을 빠져나오는 태형을 반갑게 맞았다. 태형이 대답을 않고 가려는 길을 바삐 걸었다.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 이유는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자신을 피하는 도화궁의 주인에 있었다. 내가, 내가 황제 폐하 승하하셨을 때도 제일 먼저 찾아갔는데. 계산적인 마음은 먹고 싶지 않았지만 그리 행동하는 공주를 보면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사실은 신시(時)*에도 도화궁을 찾으려고 했었다. 얼굴을 많이 익히고, 많이 친해지라는 의도에서 자주 잡혀있는 혼사가 끝날 시각이었다. 그러지 못한 이유는 자신을 자꾸만 피하고 있는 것 같은 공주가 신경 쓰여서 였다. 이유를 물을 적에도 고개만 푹 숙이고 얼굴만 묻고 있는 게 자신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구나, 싶어서. 그런 선택을 했음에도 이유가 궁금해 미치겠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그렇다고 오지 말란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없고, 아픈 것도 아니고.
* 신시 : 오후 3시부터 5시 사이.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도련님?”
“…….”
“도련님.”
“…….”
“도련님!”
“…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느냐?”
한창 고민에 빠져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태형에게 식이 물었다. 태형은 깜짝 놀라며 옆에서 자신을 따라다니는 식을 나무랐다.
“표정이 안 좋습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니, 무슨 일 없다. 걱정 말거라.”
“…….”
“아니, 사실은 없는 게 아니고,”
“…….”
“있어, 무슨 일.”
태형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맞아, 그게 무슨 일이 아닐 수가 없지.
사실 대충은 알았다. 공주가 태형을 피한다는 것. 황제의 장례식 이후 언제부턴가 태형이 올 적마다 잠만 자기에 장례 이후 피로가 쌓여 잠에 빠진 모양이다, 싶어 계속 기다렸다. 깰 때까지. 자신은 혼사로 인해 입궐한 입장이니 일정 시간이 되면 가야만 해 깨는 것을 못 보긴 했었지만. 근데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닌 게 못내 이상한 거다. 공통적으로 도화궁을 뜰 때마다 태형에겐 말도 안 붙이던 정국이 언제 오냐고 묻기까지 하는 것도 그렇고. 그게 수상해 나가는 척을 했다가 그제야 봤었다. 깨어있는 공주를.
“……날 자꾸 피해.”
요즘 들어서 계속. 손도 대지 말래.
“이유는 물어보셨습니까요?”
“물어봤는데 그냥이래, 그냥.”
“…혹,”
잠시 생각에 잠긴 식이 말했다. 태형은 숨을 죽이며 식이 하는 양을 쳐다봤다.
“또 무슨 사고라도 치셨습니까?!”
“에이씨, 아니거든!”
“그럼 뭐란 말입니까?”
“…자꾸 자는 척해.”
식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자는 척이요? 이상한 사람일세. 혼사를 하러 와서 자는 척을 하는 사람도 있나. 식은 당연하게 태형의 상대인 수아를 떠올렸다. 태형은 모든 것을 털어놓았음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에 제 뒷머리를 헤집기만 했다. 그냥 뭐랄까. 답답하고, 속상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요.”
“나도 몰라.”
“다음엔 언제랍니까?”
“…사흘 후에.”
“그럼 그때 다시 물어보시지요.”
태형이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주변에 여자라곤 동생이랑 어머니뿐이니 내가 뭘 알아야 말이지. 태형은 식의 말대로 사흘 후에 다시 도화궁을 찾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음엔 기필코 시간에 쫓기지 않게 미시가 아닌 신시에.
“공주 마마 계십니까.”
오라버니의 내관이 도화궁에 들었다. 황태자의 옆을 지키다가 오라버니의 즉위와 동시에 황제의 내관으로 승격한 황 내관이었다.
“어, 왔어요?”
일전에 오라버니가 찾아와 숨은 김태형을 찾으려 할 때가 마지막이었으나 그 당시엔 대면을 하지 못했으니 황 내관을 맞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마당 쪽으로 난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마당 한 가운데 선 황 내관이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라버니를 찾는 일 외에는 거의 말을 전해주러 도화궁을 찾았다.
“오늘 민(旻)의 황제가 궐에 들 터이니 방에 머물라는 황제 폐하의 전언이십니다.”
“황제가 궐엔 왜요?”
“이유는 정확히 모르오나, 일전 민의 전 황(皇)이 승하했을 때에 위로 차원에서 보낸 공물의 감사 방문인 걸로 아옵니다.”
“아, 알겠어요.”
직접적으로는 듣지 못했으나 아바마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민(旻)의 황제가 죽었다고 했다. 공물이 보내진지는 몰랐는데, 들어보니 그런 모양이고. 고개를 끄덕이곤 찬바람이 새는 창문을 닫으려 문손잡이를 잡았다. 마당을 떠나지 않은 황 내관이 말이 끝나지 않았는지 입을 다시 열었다.
“또 폐하의 전언이 있었사온데…,”
“…또 뭔데요?”
“전 가(家)에서 사람이 입궐하였사온데, 그 분이 폐하께 정국님을 뵐 수 있냐고 여쭈었사옵니다.”
“…….”
“폐하께오서 이를 윤허하시어…,”
“저를요?”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정국이가 황 내관의 말을 듣곤 내 옆으로 한달음에 다가왔다. 동그래진 두 눈이 자신을 왜 찾냐는 물음을 던졌다. 황 내관이 잇고 있는 말은 싹둑 자른 채였다.
“그렇사옵니다. 신시에 옥란궁(玉蘭宮)으로 드십시오.”
“…근데 그게 누굽니까?”
“듣기론 정국님의 형님이라 들었사옵니다.”
“형님이요?”
고개를 숙이며 은은하게 웃어 보인 황 내관이 덧붙이는 말없이 뒤를 돌았다. 궁에 온 이래로 첫 소식을 들은 얼굴이 생소함으로 물들었다. 둘 데 없는 두 눈이 끔뻑거렸다.
“……가도 됩니까?”
“갔다 와. 민에서 사람 온다니까 난 안쪽 방에 있을게.”
열린 창문을 닫곤 예전에 김태형이 숨어들었던 안쪽 방으로 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국이의 움직임 또한 나를 따랐다. 손에서 뗄 줄 모르는 붉은 검을 꾹 쥔 채였다.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정국이를 가족이 왔으니 얼른 가보라며 등 떠밀곤 홀로 안에 들었다. 가장 안으로 드는 것은 이 궁을 쉬이 찾을 리는 없었으나 혹시 모를 불안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문이 여러 개인 좁은 복도를 가장 안쪽부터 살필 리는 없으니. 나인이 잘 들지 않는 궁이 말상대조차 없어지니 더더욱 고요해졌다.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 누웠다. 멍하게 텅 빈 천장을 응시했다.
그리고 신시의 종이 쳤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두고 간 거 있나.”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옥란궁엔 신시에 들라고 했는데 이리 다시 든 것을 보고. 누운 몸을 일으켜 앉은 자세를 유지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너.”
그리곤 내가 있는 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사흘 전처럼, 거짓말같이 김태형이 나를 바라보며 문 앞에 섰다.
“아니, 여긴 또 왜….”
“너 또 왜 여기 숨어있어.”
“…….”
“왜 자꾸 나 피하…,”
“…….”
“…근데 나 오는 거 알았어?”
김태형의 입술이 말을 멎지 않고 조잘댔다. 긴 눈매가 나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안 가르쳐 준댔으면서 내가 오는지 어떻게 알아.
“몰랐는데, 나 이번엔 진짜로 피한 거 아니에요!”
“…….”
“민에서 사람이 온다고 해가지구….”
“…….”
“그냥 숨으려고….”
김태형의 일그러진 눈매가 점점 펴졌다. 표정이 점차 나를 향한 동정을 가득 담았다. 화난 말투가 상이하게 변했다.
“…여기 아무것도 없는데.”
“…….”
“계속 이러고 있는 거야?”
방금 피한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김태형을 피한 걸 인정한 꼴이 됐지만 이미 그것은 머릿속을 떠난 지 오래인 모양이었다. 더 이상의 추궁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하루만 이러고 있으면 되는데, 뭐. 아무렇지 않은 나와는 달리 심경의 변화가 심한지 표정이 급격하게 심각해졌다. 정적이 일었다. 훌쩍 다가온 김태형이 내 눈을 마주했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몸은 뻣뻣하게 굳었고.
“……공주야.”
김태형이 입을 열어 나를 불렀다. 심각한 표정이 다시 환해졌다.
“나갈까?”
그리곤 손목을 잡았다.
-
안녕하세용?
일본에게 배구를 이겨서 넘 기쁜 선바람이에용!
글쓰기가 미숙하여 다시 슬퍼지지만..
저는 여름 휴가 갔다 왔어요! 어느 산골짜기로...
거기 가서 메모장에 틈틈히 써야지 생각했는데, 애기들 보느라 실패ㅠㅠ
다들 물조심 차조심 사람조심하시어요!
→ ♥현국 공주님 82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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