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진이 종이 더미를 천천히 넘겼다. 신료들이 미혼인 황태자의 비를 더 쉬이 맞게 하기 위해 내려준 규수 명단이었다. 종이 한 장마다 이름, 거처, 생년월일, 가족관계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석진은 그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며 평정을 유지했다. 검은 글씨들을 빌미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석진의 손이 닿을 때마다 얇은 종이가 사르륵, 하는 맑은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이판 댁 장녀.”
“…….”
“형판 댁 차녀.”
석진이 그리 중얼거리며 불현 듯 헛웃음을 지었다. 여인들의 가족관계란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어차피 신료들이 제 혼인에 목매는 것은 그의 옆자리에 자신의 딸이 앉아있길 바란 까닭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여기긴 했다. 석진이 소리 나게 종이를 덮었다. 신하들은 이를 열람하며 약간이라도 혼인하고픈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명단을 내렸지만, 석진은 그런 마음이 조금도 안 들었다. 하물며 그런 비슷한 마음이라도.
‘네 의견은 전적으로 존중한다만, 태손이 보고 싶구나.’
‘중전을 다시 들이는 것은 무리인 듯 하니 얼른 비를 들이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였사옵니다.’
‘태자 저하께서 언제 비를 맞을 것인지 만 백성이 궁금해 하옵니다.’
석진이 자꾸만 똑같은 말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려는 작자들을 떠올렸다. 제 아비도 그에 포함되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왜 다들 혼인을 못 시켜 안달인지.”
“후사를 챙기는 것이 이젠 저하의 몫이 아닙니까.”
석진의 옆자리에서 석진을 지키던 내관이 느리게 대답했다. 석진이 태어날 때부터 석진의 곁을 지킬 예정이었던 황 씨였다. 석진의 스물다섯 해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묵묵히 지켜본 유일한 인물이었으며, 공주의 생존을 알고 있는 소수의 인물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석진이 황 내관의 질문스러운 대답에 입을 열었다.
“내가 후사를 안 챙긴답니까?”
“…저하께서는 황실에 여인이 없는 것이 쓸쓸하지 않사옵니까.”
“여인이 왜 없습니까? 공주도 있는데.”
“…….”
“거기다 궐에 널린 게 여인인데.”
석진이 황태자의 예를 갖추지 못한 자세를 한 채 말했다. 그럼에도 내관이 어떠한 제재를 가하지 않은 이유는 석진이 자꾸만 거론되는 혼사 이야기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석진은 주위에서 혼인을 부추기는 연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음에도 부러 황 내관의 설득 어린 말에 삐딱하게 대꾸했다. 석진의 대답에 말문이 닫힌 황 내관이 화제를 돌렸다.
“해서, 마음에 드는 규수는 못 찾으신 것이옵니까.”
“누가 그래요? 다 마음에 듭니다.”
“…….”
“신료들이 물으면 답하세요. 내가 그리 말했다고.”
매화궁의 출입은 황실 사람들을 제외하곤 황 내관과 소수의 궁녀로 철저히 제한되었다. 나라에 유일한 황태자의 안위를 위함이었는데, 이를 모르는 자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신하들이 명단 열람 이후의 석진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제 곁에 있는 황 내관을 건드릴 것이 뻔했다. 워낙 매화궁 궁녀가 석진의 사람들로 한정되어 있으니 사람을 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우쳤을 테니. 석진의 말을 들은 황 내관은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석진은 다시금 입을 뗐다.
“헌데,”
“…….”
“제가 다음에 밖에 나갔다가 운명의 상대를 만날지 어찌 알겠습니까.”
제가 운명론자라. 그렇지요? 나름대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수단이었다. 석진이 내관에게 긍정의 답을 하라는 의미를 내포한 눈빛을 보냈다. 내관이 석진의 기에 눌려 형식적인 대답을 꺼내 놓았다. 예, 저하. 하고.
“혼자 있고 싶으니 이제 나가도 됩니다.”
“예, 저하.”
“아, 운명 얘기는 안 전해도 되고.”
황 내관이 뒷걸음질 치며 석진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석진이 말한 것은 제 의지에 존중을 싣는 표현과 가까웠으나 실상은 명을 빙빙 둘러 내린 것이라 거부하기가 애매했다. 내관이 제 몸을 완전하게 빼내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닫히며 그 틈으로 내관의 동태를 눈으로 쫓던 석진이 모습을 감추었다. 석진의 곁에 머무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 멀리 떠나진 못한 내관이 방문 옆에 섰다. 매화궁이 고요했다. 내관은 생각했다. 어쩜 같은 피가 흐르는 남매가 저리 다를 수 있는지.
“다과상을 내 왔습니다.”
아까 전 저녁상을 치운 나인이 어느새 조그만 상을 들고 와 내관에게 말했다. 내관이 상을 든 나인을 바라봤다. 석진이 혼자 있고 싶다고 한 이후로 시간이 조금도 흐르지 않았다. 태자 저하께선 지금 혼자 있고 싶어 하시네만. 금방이라도 석진의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나인을 내관이 제지했다. 일단 의사를 물어야했다. 다과상을 들이는 것은 황실 사람들의 일과 중 하나이기도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그들의 화를 돋우지 않는 것이 아랫사람들에겐 법도나 다름없었다. 내관이 방문 너머에 있는 석진에게 말했다.
“태자 저하, 다과상을 들까요.”
“…….”
“저하?”
나인이 내관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봤다. 석진이 있을 방 안은 고요했다. 저녁상을 치운지 얼마 되지 않아 꺼리시는 건가. 내관이 석진의 호칭을 다시금 불렀다. 태자 저하. 그리고 갑작스럽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문을 열겠사옵니다.”
황 내관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동시에 나인과 내관, 두 사람의 눈이 일제히 한 곳을 향했다. 그리곤 내관의 눈이 커졌다.
“저하!”
아주 가끔씩 어린 아이처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황녀(皇女)
八
“…안 먹어.”
저녁까지 똑같은 찬을 내올 수 있는지. 그것도 죽을. 눈앞에 펼쳐진 상을 손으로 조금 밀었다. 나지막한 읊조림에 옆에 있던 정국이가 동그란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조금씩 봤다. 좀 먹으라며 나를 달래던 정국이에게 반항 아닌 반항을 감행하는 중이었다. 여태껏 안 아프다 한 번 감기 몸살로 몸져누운 것이었으니 걱정이 된 것쯤은 이해할 수 있다만, 이건 심각하게 과도한 처사였다. 나름대로 내 건강을 고려해 소금기를 뺀 밍밍한 죽에 미각의 마비가 올 지경에 이르렀다. 얼핏 보기에 반찬 투정하는 꼬마의 모습 같기도 했지만, 이건 다른 경우였다.
“공주야, 한 번만 먹자. 어?”
“…집에 안 가요?”
여태 여기 머무느라 궐 밖에서도 안 나간 김태형이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자주 오겠다’는 말과 함께 ‘와서 재밌는 얘기를 해주겠다’는 언약을 미리 지키겠다고 종일 제 경험을 늘어놓은 탓이었다.
“이거 다 먹는 거만 보고 갈게!”
“…이걸 다?”
“자, 아.”
김태형이 그릇 옆에 내려둔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허여멀건 것이 눈앞에 들이 밀어졌다. 몸을 뒤로 빼며 김태형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김태형이 얼른 먹으라는 눈짓을 했다. 내가 다 먹기 전에 먹자, 어? 툭툭 내뱉는 말은 나를 설득하려는 의도였다. 말투가 아이 같으면서도 아이를 달래듯 조심스러웠다. 얼굴에 울상을 가득 퍼트렸다. 천천히 다문 입술을 뗐다. 아.
“잘 먹네. 착하다.”
내가 이리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은 늘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나의 식사 준비 때문에 황실 사람들 중 가장 늦게 저녁상을 차려 여기 올려진 죽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음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 합리화했다. 아무 맛도 안 느껴지는 흰 죽을 꿀꺽 삼켰다. 김태형이 제 치아가 다 드러나도록 웃었다. 그리고 또 시작이었다. 심장 고동 소리.
“옛날에, 동생이 밥 안 먹으면 이렇게 했다?”
“…….”
“아, 예쁘다, 하고. 어머니가 그냥 두라고 그랬는데 그러면 안 먹었거든. 이러면 먹었어!”
“…….”
“지금은 기억도 못 해. 바보들.”
김태형이 다시 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듯 말했다. 틱틱 대는 가족 이야기에 정감이 실렸다. 손에 꾹 쥔 은수저는 꾸준하게 오고 가며 나에게 식사를 떠 먹였다. 그래서, 내가 하려던 말이 뭐냐면.
“아이, 예뻐.”
김태형이 큰 제 손을 들어 정돈되지 않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결국은 고작 이런 걸 따라하려고 그런 얘기를 꺼낸 거였다. 그리고 난 또 ‘고작’ 그 행동에 못 이겨 반응하고. 무의식적으로 주는 대로 받아먹던 입술을 두고 쿵쿵, 불특정하게 뛰던 박동 소리가 거세졌다. 무언가 안에서 펑, 하고 터진 기분이었다. 그 입 꼬리에 반비례하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시 타오르듯 열이 올랐다. 아, 미치겠다.
“어, 뭐지.”
“…….”
“또 얼굴이 빨간데. 아직 아프잖아, 봐봐.”
“…….”
“자, 말해. 이거 먹어야겠어, 안 먹어야겠어?”
먹어야겠지? 아직 대답도 꺼내지 않은 질문에 미리 답을 꺼내 놓은 김태형이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서 그런 거 아닌데…. 안 아프다고 얼버무리려다 마땅히 변명할 거리를 못 찾아 입술을 닫았다. 대답하기 곤란했다. 타오르는 얼굴로 김태형의 확고한 얼굴을 마주했다. 눈빛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몸이 뜨끈했다.
“뭐야, 대답 안 해?”
“…….”
“빨리 대답…,”
“먹어요!”
“…….”
“먹는다고요!”
군말 안 하고! 김태형의 손에서 숟가락을 거칠게 뺏어 들었다. 꾸역꾸역 삼켜지지 않는 것을 넘겼다. 괜한 오기였다.
석진이 방 안에 구비해둔 신을 신고 가뿐하게 창문 너머로 착지했다. 탈출은 허술했다. 주위에 사람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평소엔 잘 저지르지 않던 일탈이었다. 어릴 적에 몇 번씩 빼고는. 석진은 창을 넘어 딱딱한 땅에 발을 내딛으며 자신의 키가 전보다 훌쩍 컸음을 실감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나랏일은 아니지만 가끔은 환기가 필요했다. 요즘은 특히 더 그랬다. 시강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도 골치가 아픈데 혼사로 더 들들 볶아대니. 올바른 방법으로 매화궁을 벗어나는 것도 가능했지만 그것은 오롯이 ‘혼자’를 만들지 못했다. 꼭 다른 이가 따르는 것이 석진은 조금 불편했다.
매화궁 창문 하나 넘었다고 아직 완전한 바깥은 아닌지라 석진이 갈 곳은 한정되어 있었다. 어디 빈 궁 하나에 숨어들어 명단 열람이든 뭐든 다 때려 치고 잠이라도 잘 수 있었지만 석진은 그런 선택을 잠시 미뤄두었다. 자신이 없는 것을 알아챘을 황 내관이 충분히 예상할 만한 곳이었다. 갈 곳이 있었다. 달이 이 큰 땅덩어리에 이끌리듯, 석진 또한 당연하게.
─다 먹었다.
평소엔 시간이 여의치 못했다. 정국을 그곳에 둔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일 수도 있었다. 며칠 전에 열병을 앓았다고 전해 들었지만 쉽사리 방문하지 못했다. 모든 일이 겸사겸사 이루어졌다. 석진의 환기, 동생의 만남. 석진이 멍하게 낡은 문패를 올려다봤다. 어둠 속에서 ‘도화궁’이라 적힌 문패가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와, 진짜 다 먹었네.
그런 석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귀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말?”
정국이 공주에게 반말을 한단 말인가. 석진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해가 빠져 어둑해진 하늘 아래에서 전해지는 도화궁 불빛을 은은하게 받으며 석진이 조심스럽게 도화궁을 향해 다가갔다.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있느냐.”
석진이 늘 그렇듯 똑같은 말을 뱉었다.
“다 먹었다.”
혼잣말처럼 말하며 빈 그릇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억지로 넘긴 음식이 억지 배부름을 조성해냈다. 숨을 한꺼번에 몰아서 쉬었다. 꿋꿋하게 옆에서 내가 먹는 양을 지켜보던 김태형이 놀란 얼굴을 했다. 과장된 표현임은 확실했다.
“와, 진짜 다 먹었네.”
도화궁 나인들은 늘 바빠 거의 자리를 비웠으므로 치우지 못한 상을 옆에 밀어 두었다. 점차 어둑해진 공간을 밝히려 옆에 둔 호롱불을 켰다. 시간이 오래 흐르지 않았지만 찬 공기가 흐르는 겨울은 밤을 쉽게도 끌어당겼다.
“집에 안 가요?”
“갈 거야, 이제.”
“가요. 걱정하시겠다.”
“또 올게, 공주야!”
히죽 웃던 김태형은 그제서야 앉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오래 앉아 있던 자리가 체온에 익었다. 도포 자락의 끝이 몸의 무게 탓에 구깃해졌다. 신을 신지 않은 발이 터벅터벅 걸어 문으로 향했다. 나와 정국이의 눈이 일제히 김태형의 움직임을 따랐다. 김태형의 끝말이 왠지 마지막이 아니라는 걸 암시해주는 듯 해서 기분이 퍽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미련 없이 보낼 자신도 있었다. 근데,
─…있느냐.
운명은, 그런 미련을 전부 털어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꽤 익숙한 말소리에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옮기는 김태형을 잡았다. 이게 몇 번째일지 몰랐다. 김태형을 숨기는 일. 그 중에서도 가장 위험했다, 오라버니에게의 발각은. 그에게 처음 내 존재를 들킨 날, 오라버니가 내게 했던 말이 여직 생경했다. 들켰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리 센 힘이 아님에도 잡아끈 몸이 순순히 따라 들어왔다.
“누군데?”
“…오라버니.”
“그럼 태자 저하?”
“몰라서 물어요?”
빠르게 오가는 대화의 소리가 현저히 줄었다. 큼직한 인영이 나를 따르며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를 내뱉었다.
“와, 나 태자 저하 뵙는 거야?”
“뭘 봬요! 절대 안 돼.”
“왜?”
“…목숨 나가요.”
끝을 맺기 위해 급하게 말을 던졌다. 내 행위로 판단했을 때, 취해야 할 조치가 쉬이 인식되지 않는 건지 김태형은 눈을 둥글게 뜨고 쓸 데 없이 눈치 없는 말만 내뱉었다. 다시 병풍 뒤로 김태형을 밀어 넣을 요량이었다. 시간의 지체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기에 행동을 빨리 했다.
“또 숨어?”
“당연하죠.”
“아, 거긴 안 가!”
“…예?”
“절대!”
김태형이 내가 쥔 팔목에 힘을 실었다. 거기론 안 끌려 가겠다는 제 나름의 반항이었다. 미간을 구기곤 키가 큰 김태형을 올려다봤다. 김태형은 무슨 이유인지 나만큼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못을 뉘우쳤다고 말하려고 왔다더니, 이젠 장소까지 회피할 모양이었다.
“아, 싫어!”
“지금 가릴 때냐고요!”
“다른 데!”
투정을 부리는 아이처럼 김태형이 그리 말했다. 머리를 헝클였다. 숨을 데가 없는데…. 침실을 빠져나와 좁은 복도를 빠르게 거닐었다. 출입문 바로 옆에 위치한 의(衣)실과 오라버니가 들 침실은 피해야 했다. 침실엔 병풍 뒤 말고는 딱히 괜찮은 곳도 없으니. 욕실도 곤란하고…. 남은 곳은 단 한 곳밖에 없었다. 가장 깊숙한 안쪽 방. 불도 켜지지 않은 방 안으로 김태형을 밀었다. 궁녀 중 한명이었다면 입막음이라도 시켰겠지만, 몇 안 되는 황실 사람에게 밝혀진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수도 있는 까닭에 괜히 필사적이었다. 그를 들킨 이들은 늘 어느 순간부터 자취를 감춘 걸 기억했다.
“아니, 여긴, 공주…,”
“조용히 있어요.”
모든 말을 묵살한 채 문을 닫았다. 짧은 복도를 걸어 출입문을 빠져 나왔다. 김태형과 같이 큼직한 키가 나를 향해 섰다. 황태자인 오라버니였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
장난기 다분한 목소리가 나를 다그쳤다. 웃는 모습이 김태형과는 다르게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다.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이 또 어딘가에서 몰래 빠져나온 모양새였다. 해야 할 대답을 머릿속에서 굴렸다. 좋은 변명이 필요했다.
“…그, 청소 하느라!”
“어디서 사내 목소리가 난 것 같은데.”
헐. 오라버니가 몸을 빼 도화궁 내부를 들여다봤다. 입을 앙 다물고 오라버니의 뒤태를 응시했다. 많은 이가 들르지 않은 까닭에 소리의 샘 조절을 못한 것이 문제였다. 돌아가 봤자 달라질 것도 없었지만, 그저 불찰이 심했던 지난 나를 원망했다. 그때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침실 문에서 정국이가 빠져나왔다. 근엄한 얼굴이 황태자에게의 예를 갖추었다.
“…정국이! 정국이였는데.”
“…목소리가 되게 낮았는데. 그리고 막 반말도,”
“내가 반말 하라고 했어!”
“아냐, 근데 네 목소리가 존댓말이었다고.”
“그건, 어…. 신분 체험…?”
미쳤지, 진짜. 내가 들어도 당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오라버니의 입에서 의심이 들 만한 단서들이 족족 등장했다. 오라버니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도 못하는 거짓말을 하겠다고 말을 지어내는 게, 내겐 상당히 위험한 도전이었다. 오라버니가 안 좋은 표정으로 디딤돌 위에 올라선 오라버니가 신을 벗으려는 찰나였다.
“…근데, 이 신은 누구 것이냐?”
아, 맞다.
“…얘 거!”
급하게 옆에 선 정국이를 가리켰다. 의문을 품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지금 신고 있는 건…,”
“보, 본가에서 갖고 온 겁니다!”
정국이가 빨리 응수했다. 디딤돌에 올려 진 김태형의 신발과 정국이의 신을 번갈아 본 오라버니가 좁은 복도 위로 올라섰다. 긴장의 연속이었다. 심장께가 뻐근했다. 오라버니의 걸음을 따라 궁 안으로 들었다. 침실까지는 몇 걸음이 채 걸리지 않았다. 침실에 들어온 오라버니가 안쪽에 털썩 앉았다. 궁의 내부와 오라버니의 조합이 꽤 낯설었다.
“청소했다고 안 했어?”
“…….”
“…한 건가.”
오라버니가 주위를 휘 둘러보며 제 볼을 긁적였다. 나인들이 아직 궁 청소를 하겠다고 방문치 않은 데다 한 쪽에는 치우지 않은 저녁상까지 자리 했으니 그리 보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청소는 무슨, 사람 숨기고 있었는데. 애써 한 변명이 무색해졌다.
“덜 했어.”
“음, 근데 왜 청소를 네가 해.”
“…심심해 가지구.”
“이제 자수엔 취미 뗀 거야?”
“꼭 그런 건 아닌데….”
하하. 오라버니의 맞은편에 앉으며 멋쩍게 웃었다. 아무래도 궁색한 변명이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와 닿는 눈초리가 바늘 몇 개로 살을 찌르듯 따끔했다. 방 안 이리저리로 시선을 피했다.
“……아팠다며.”
“아, 그랬지.”
“이제 괜찮아?”
“어. 진짜 괜찮아!”
“하긴, 청소까지 했다고 했으니.”
낯빛도 나쁘진 않고. 오라버니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상한 흔적들에 대한 추궁이 멎었다. 본론은 결국 내 생존 여부나 열병의 경과 따위인 것처럼 보였다. 또 오라버니는 아플 때 찾아와 주지 못했음을 미안하다고 여길 게 뻔했다. 애써 밝은 표정을 내비췄다. 어쩌면 그것이 다행이었다. 그걸 또 미안해 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어 위험한 순간이 쉽게 찾아오지 못한 것에. 그렇게 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쿵.
“……뭐야?”
아무리 들어도 수상한 소리가 안쪽 방에서 다른 고비를 만들기 전까지는.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었다.
“뭐가 있는데?”
“뭐가?!”
“고양이가 들었나.”
궁이 좁디좁아 다른 방에서 나는 소리도 선연히 들리는 게 문제였다. 안쪽 방에 조그만 창은 있었다만, 그것을 통해 고양이 따위의 짐승이 들 리는 없었다. 보나마나 김태형의 짓이었다. 조용히 있으랬더니 기어이 또 일을 친 게 분명했다.
“저 쪽 방 맞지?”
“아, 아닌데?!”
“뭐가 아냐. 너 수상해.”
눈알을 또르르 굴렸다. 수상함을 느낀 오라버니가 방 안을 비추는 초의 대를 들고 어둠 속을 향해 나아갔다. 오라버니의 옷자락을 기껏 잡았건만 어떤 말을 해도 이 걸음을 멈추지는 못할 것 같았다. 안엔 고양이 말고 커다란 사내 하나가 있겠지. 그러면…. 짧은 순간에 모든 것이 그려졌다. 오라버니의 손이 안쪽 방의 손잡이을 덥석 잡았다. 표정이 흘러내릴 듯이 축 처졌다.
─저하. 계십니까.
간만에 들어보는 황 내관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 때였다. 문을 잡은 손이 멈췄다. 정적이 일었다.
─매화궁에 드시지요.
“뭐야, 벌써 왔어.”
그리고 손에 쥔 촛대가 내게 전달되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또 하나의 고비가 넘어갔다. 문을 결국 열지 않은 채 몸을 돌린 오라버니가 짧은 복도를 걸었다. 신이 디딤돌 위에 올라 있으니 없는 척도 불가능했다. 나 갈게, 하고 짧게 인사한 오라버니가 밖으로 빠져나가며 황 내관을 향해 투덜거렸다.
─왜 벌써 왔습니까?
─이는 예의와 법도에 어긋,
─시끄럽습니다.
대화가 멀어졌다. 몸에 잔뜩 든 긴장이 스르륵 풀렸다. 오라버니가 열지 못했던 문을 급하게 열어 젖혔다. 달빛이 은은히 드는 어둠이 방 안에서 나를 반겼다. 그 안으로 호롱불을 들이밀자 방 안에 벌러덩 누운 김태형이 나를 바라봤다.
“괜찮아요?”
“…어두워.”
“태자 저하 의외로 무서운 사람이었어….”
“우리 오라버니 안 무서운데!”
가장 안쪽 방에서 김태형이 빠져 나오며 중얼거렸다. 그것이 꼭 나를 향해 하는 말 같았다. 그래서 대답했다. 하나도 무서운 사람 아니라고. 어둠에 눈이 적응된 모양인지 눈부심에 게슴츠레 떠진 눈이 나를 봤다.
“그럼 왜 숨겨?”
“그건…, 위험하니까.”
“거봐. 태자 저하한테 들키면 목숨 나간다며. 그럼 백성을 막 죽이시는 거야?!”
“무슨 소리예요, 우리 오빠 욕하지 마요!”
욱하는 성질이 순식간에 속에서 울컥 뛰쳐나왔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김태형이 허- 하고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우리 오라버니 얼마나 착한데!”
“…….”
“내 얘기도 맨날 들어 주고! 나 안 들키게 고생만 하고!”
“…….”
“옛날에 여기 있기 싫다고 했을 때도 아무 말도 안 하고 받아주고 그랬었는데, 뭐!”
아주 어릴 적엔 비밀을 궁인들 대부분이 알았다고 했다. 곧이어 다수의 사람들이 황실의 공주가 죽었다고 믿게 됐지만. 그에 따라 결정된 궁의 정착은 어리고 호기심 많은 아이가 싫어하기엔 충분한 요소였다. 그래서 한창 자랄 땐 그랬다. 내가 여기 왜 있어야 하냐고.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다고. 고생한 건 정작 오라버니였다. 태자 일을 병행하며 비밀을 숨기고, 유일하게 도화궁에 들렀다. 돌아가신 어머니나 지켜보는 눈이 많아 오지 못하는 아버지 대신. 근데 우리 오라버니가 대체 뭐가! 그리 열변을 토했다.
“알았어, 알았어.”
“…….”
“태자 저하 좋은 분이셔.”
그렇게 말하면서도 웃음기가 담긴 탓에, 하는 말에 신빙성이 없었다. 씩씩 거리며 차마 말에 다 담아내지 못한 감정을 눌러 담았다. 김태형은 이제 집에 갈 생각인지 좁은 복도에 혼자 발을 내딛었다. 그런 뒷모습은 불현 듯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공주야, 근데 아까 너 거짓말 연습 좀 더 해야겠더라.”
겨울바람은 찼다. 고요한 거리에 차가운 바람이 불며 백성들의 식량고에도 바람이 들었다. 널리 퍼진 영토의 백성들이 대부분 그러했다. 전엔 위험한 정치를 일삼았기 때문이었고, 지금은 나라의 힘이 몹시 약해진 까닭이었다. 그런 빈자리를 틈타 고위직의 사람들은 사사로운 욕심으로 백성들을 고통에 차게 했다. 비록 매달 들어오는 공물들이 궐의 고(庫)를 풍족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백성들은 꾸준히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들은 빠른 시일 내에 세상이 바뀌길 바랐다. 그것이 황조(皇祚)의 교체라고 할지라도.
황제의 침전에 든 황태자가 노쇠한 황제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늙은 황제가 누운 것은 고작 노화임에도 불구하고 몸이 약해지자 온갖 병이 다 들었다. 폭군이라 일컬어지던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젠 말을 하기도 힘든 지경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그의 하나 있는 아들이 묵묵히 그 옆을 지켰다. 흉측한 침이 마른 몸 이곳저곳에 놓여 있었다. 황태자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준비를, 하셔야 할 듯하옵니다.”
대궐에 머무는 어의가 맥을 짚으며 힘없이 말했다. 아무리 폭정(暴政)을 했다고 하나 황제의 죽음은 나라에 대대적으로 슬픈 일임은 확실했다. 그리고 하나 더 확실한 것은,
“때가 된 것이겠지요.”
나라의 젊은 황태자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난폭하게 궁인들을 죽이고 과도한 세금을 요구하던 황제. 그리곤 몸져 눕고 나서의 뒷일은 자신에게 모두 떠맡긴 황제. 황태자는 그런 아비를 싫어했다. 그의 나이, 스물이었다.
“…아바마마.”
유한 목소리가 잘 듣지도 못할 인물을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책임하십니다.”
모두가 엄숙한 분위기였지만 그는 정작 아무렇지 않아 하였다. 황제의 숨은 얕았다. 금방이라도 픽 끊겨버릴 것처럼.
“소자, 아바마마처럼은 살지 않으렵니다.”
황태자의 말이 멈추었다. 그의 눈에 비친 황제가 시체처럼 보였다. 황태자가 고개를 들며 뜨거운 숨을 뱉었다. 그를 제외한 모든 이는 눈을 뜰 힘조차 없는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린 상태였다. 모든 궐은 깨어있음에도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약하게 걸터 있는 맥박을 다시 짚으려 어의가 숙인 고개를 조금 들었다. 베개를 벤 황제의 고개가 힘이 빠진 모양으로 푹 꺾여 있었다.
“…폐하!”
그에 침전에 있는 모든 이가 눈물을 보였다. 황태자가 저승길의 예우를 다하려 고개를 숙였다. 곡소리가 침전을 따라 궁의 구석까지 퍼졌다. 그 소리는 늦은 밤, 잠에 들지 못하고 깨어있는 백성들에게까지 전해졌다. 멀리, 멀리, 멀리.
나라는 제게 맡기시지요, 아바마마.
민(旻) 황의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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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셨는지요!
제 이야기는 10화부터 시작입니다 8ㅁ8
그때부터 진도 엄청 빨리 뺄테니 함께 해주세요!
그리고 이는,,, 이해를 잘 못하시는 분이 계실까 하여
제가 글에서 녹여낸 도화궁 내부입니다!
바깥 테두리는 궐 내의 담이고, 안쪽 테두리는 건물이에요.
모든 사건은 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ㅎ_ㅎ
정국이를 피해서 공주랑 태형이가 숨은 곳은 건물 뒤편인데 제가 그림을 잘못 그려서 너무 좁게 됐어요ㅠㅠ
태형이가 숨은 방은 가장 안쪽 방인데요, 저긴 언젠가 공주가 씁니당ㅋㅋㅋ
제가 그렸어요 (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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