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이 석진의 뒷모습을 쫓았다. 찬바람이 두 사람의 살갗을 스쳤다. 두 사내는 기약 없이 사라진 한 여인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도화궁의 주인. 숨겨진 현(賢)국의 공주.
‘…어떤 분이십니까?’
정국이 입을 뗐다. 쓸쓸한 초겨울의 바람만 감돌던 두 사람의 공간을 메꾸기 위함이었다. 석진은 정국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주어가 없는 문장이었다. 곧이어 석진은 방금 전까지 제 여동생의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갔음을 떠올렸다. 어떤 해답을 정국에게 넘겨주어야할 지도. 석진이 그녀를 떠올리며 해사하게 웃었다.
‘나를 잘 따르는 아이.’
‘…….’
‘순진하기는 이를 데 없고.’
‘…….’
‘사람들을 못 만나봐서 그렇겠지만.’
정국은 석진의 웃음 내면에 묘한 애달픔이 자리 잡고 있음을 느꼈다. 근엄한 황태자의 면모는 한 여인의 오라비라는 지위 아래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정국은 말없이 석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분을 감추는 것이 제 일이라 하셨습니까?’
‘뭐, 그것뿐만은 아니지만 일단은.’
‘허면 제가, 만일 감추지 못하면 어찌 됩니까?’
석진이 동그란 눈으로 정국을 똑바로 쳐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침묵과 함께 맞닿았다. 정국은 손 안에 든 칼집을 더욱 세게 쥐었다. 만일 감추지 못한다면. 정국은 예고 없이 닥칠지도 모르는 미래의 상황을 염려했다.
‘부득이하게?’
‘부득이하게요.’
정국이 굳건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석진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생각에 빠진 모양새였다. 정국은 그런 석진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과 같은 세월동안 한 번도 외부인을 만나지 못한 일국 공주의 목숨이 저에게 달린 것에 대해 지레 겁을 먹은 탓이었다.
‘만일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
‘알아서 하시게.’
‘…하지만,’
정국이 석진의 대답에 말을 이어 붙였다. 말끝이 흐리었다. 대책 없는 대답이었다. 알아서 하라니. 석진은 웃음기 품은 얼굴을 유지했다.
‘이젠 그대 몫이네. 죽이든, 어떻게든 입막음 시켜서 살리든.’
‘…….’
‘이 정도면 답이 됐나?’
난 그 아이만 안전하면 되니까. 정국이 미간을 구겼다. 석진의 판단의 영위는 정국에게 크나큰 부담감이었다. 석진은 도화궁의 담벼락 쪽문으로 몸을 틀었다. 이건 뭐 어쩌란 말인지. 정국이 입을 떼려던 찰나였다.
‘…어디 있었던 것이냐?!’
‘…….’
‘내가 얼마나…,’
석진이 나인과 함께 나타난 여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정국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녀와 정국의 첫 만남이었다.
정국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자락의 기억을 고이 접어 넣었다. 뻗은 팔에 힘이 실렸다. 사흘만이었다. 정국의 걱정이 현실이 된 것은. 처음 꺼내보는 장도의 날이 서늘했다. 정국에게 칼이 겨누어진 태형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정국을 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손 떼.”
“…….”
“공주 마마한테서.”
냉랭한 한 마디였다. 침묵이 주변을 가득 휘감았다.
정국의 몫. 정국은 사명감이 가득 찼다. 여러 결말을 가진 판단이 앞섰다. 죽이든, 어떻게든 입막음 시켜서 살리든.
황녀(皇女)
四
“…어, 정국아….”
나직하게 정국을 호명했다. 이 세 사람 중 정국만이 당황한 기색을 띄지 않았다. 정국의 시선은 올곧게 김태형만을 향했다. 손에 든 검의 날이 금방이라도 목을 벨 듯 날카로웠다. 김태형은 긴장이 선 듯 고개를 든 채 목을 빳빳하게 굳혔다. 이걸 이제 뭐라고 설명해야 해. 살기를 띈 눈빛이 위협적이었다.
“…상궁아, 이걸 좀 어떻게…,”
김태형이 내 어깨에 놓인 손을 놓곤 두 손을 들어 허공을 휘저었다. 뒤로 물러나 있으라는 살기가 가득한 눈짓에 한 발짝 물러서자 내게 간절히 도움요청을 보내는 애처로운 뒷모습이 뒤따랐다.
“어어, 그래! 정국아, 일단 얘기를 듣고…,”
“…상궁?”
위협을 가하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 어째서 공주가 ‘상궁’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느냐는 의문점 아래 지어진 표정으로 추정했다. 정국이 내게 무엇이냐는 눈짓을 했다. 김태형의 목을 겨눈 팔은 그럼에도 여태 떨림이 없었다. 살갗에 잘 다듬어진 검이 닿을 듯 말 듯 위태로웠다. 김태형의 생명에 대한 위험도가 한없이 높아졌다. 이대로 가다간 눈앞에서 죽음이라는 끔찍한 단어의 정의를 맛보게 될 것이 뻔했다. 그것은 본 적도 없었을 뿐더러 보고 싶지도 않은 광경이었다.
“일단, 칼 내려.”
“…허나,”
말문이 맺혔다.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김태형과 나 사이를 배회했다. 부러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 했다. 강압적인 말투를 써야할 때라고 생각했다.
“황명이야.”
잘 내뱉지 않았던 한 단어를 읊조렸다. 표면상으로만 공주지, 어차피 없는 사람이라 이런 갑질 따위는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것 말곤 별달리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방황하던 동공이 일순간 멈추었다. 정국이의 몸과 수직선을 타던 서늘한 칼날이 내 한 마디에 스르륵 내려갔다. 김태형은 경직된 몸에 힘을 풀었다. 이젠 김태형이 누군지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차례였다. ‘황명’이라는 허접한 단어 하나로 자신을 제압한 게 못내 안타까운지 시무룩한 표정이 나를 향했다.
“이분은, 어……,”
“…….”
“…은인! 은인이셔!”
더듬더듬 이 사람을 살려 보내줄 만한 핑계를 정국에게 설명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핑계거리가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러니까 이 분이 다치면 내 입장이 좀 난처해지지 않겠어…?”
내 정체를 들켰음에도 내가 살아있으니, 어떤 식으로 살려주든 살려준 건 살려준 거니까. 내 몇 마디에 목숨 줄이 달린 김태형은 내 말을 경청하다 정국이를 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동조의 의미였다. 그러니 살려 달라, 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겠지만. 짧은 내 변명을 들은 정국은 늘어지는 한숨을 쉬며 손에 든 칼을 칼집으로 집어넣었다. 칼집으로 들어가는 검이 차디찬 소리를 만들었다. 김태형과 나 또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면, 상궁이란 말은,”
“……어?”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아. 입술을 꼭 깨물었다. 꼭 깨문 탓에 아릿한 통증이 입술을 타고 전해졌다. 이건 외부인 앞에서 내가 공주라고 동네방네 퍼트리는 것도 아니고. 정국은 칼집으로 들어간 칼의 손잡이를 꾹 쥐었다. 다시 위협을 가할 목적이었다.
“어, 그건,”
“…….”
“…내가 원래 공이 좀 큰 상궁이잖아.”
“…….”
“……그치?”
김태형의 고개가 정국이 쪽을 향했다. 김태형의 뒤통수를 따라 정국이에게 동조하라는 표현의 몸짓을 가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정국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죠.”
꽤나 언짢은 말투였다. 사이에 선 김태형은 나와 정국이를 번갈아 보며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니까 상궁이라고 불리는 게 당연하지. 그치?”
“…아, 예.”
“…그럼 그쪽은 얼른 가보세요!”
급하게 세 사람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정국은 느리게 내 옆에 와서 섰고 김태형은 얼른 가보라는 손짓에 허둥대다 출구를 향해 뛰었다. 안도와 걱정이 뒤섞였다. 느린 한숨이 터졌다.
“…죄송합니다.”
“너 진짜…!”
내 한숨에 눈치를 보던 정국이 나를 향한 사과를 읊조리다 흠칫했다. 키가 훨씬 큰 정국이를 올려다보며 지른 내 한 마디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대도 별로 놀랄 만한 요소는 없었는데. 대대로 황실에 충성을 기한 무인 집안 자제라면서 이럴 땐 쫄보가 따로 없다.
“오라버니한테 이르면…,”
검지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오라버니한테 이르면 죽어, 너. 알았어? 놀란 토끼눈을 한 정국이 초조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얼마나 대단한 인사기에. 아니, 얼마나 대단한 인사가 될 거기에. 행화궁에서 다섯 번째 차를 들이킨 수아가 투덜거렸다. 가부장적 사회라고는 하나 이런 약속 장소에서 남자는 늦어도 된다는 법도는 들은 적이 없었다. 혼인해서 얼마나 큰 호사를 누리게 해 준다고. 이것만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고해서 어떻게든 혼사를 파하게 하리라고 수아는 다짐했다. 인내심의 한계를 맛본 수아는 화가 치밀었다. 자신이 만날 남자도 전에 그러했겠지만 이것은 아무래도 예의가 아니었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행화궁 내의 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 즈음이었다. 정국에게서 벗어나 궁인들에게 길을 물어물어 행화궁까지 당도한 태형이었다.
“도대체 무얼 하다 이리 늦었,”
“…중간에 길을 잃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태형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빈 찻잔이 놓인 수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행화궁에 있던 나인은 태형을 보며 찻잔에 차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수아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구겼다. 어라, 이젠 내 말까지 끊고?
“길을 잃었으면 어떻게든 길을 물으면 될 것이…,”
시선을 내리깐 수아가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내뱉는 태형의 얼굴이나 보려 고개를 들었다. 순간 수아의 말문이 멎었다. 태형은 한 사람에 의해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멎은 것이 의아해 수아의 눈치만을 봤다.
“그래서 계속 물으면서 왔는데 사정이 생겨서. 미안합니다.”
“…….”
“저기요?”
태형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곤 수아의 표정을 읽으려 애썼다. 뭐야, 갑자기. 수아는 태형의 길쭉한 눈매를 보며 두 눈을 깜빡였다.
“저기…,”
“……예, 예?!”
“기분 나쁜 거 이해해요. 미안합,”
“…아니에요!”
“…네?”
“괘, 괜찮아요.”
수아가 말을 더듬거리며 손사래를 쳤다. 태형은 그녀를 보며 제 볼을 긁적였다. 뭐가 괜찮은 거지. 하나도 안 괜찮아 보였는데. 수아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자신의 찻잔에 채워진 여섯 번째 잔을 들이켰다. 찻잔을 든 손에서 땀이 뱄다.
“김태형입니다.”
“…….”
태형이 자신의 소개와 함께 형식적으로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내렸다. 그녀는 말수가 현저히 줄었다. 자신의 소개조차 잊은 채였다. 태형은 본가에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대충 들었기에 재촉하려는 마음은 딱히 없었다. 태형이 자신의 앞에 가득 찬 찻잔을 들어 천천히 그것을 자신의 입에 대고 기울였다. 아, 뜨거. 태형이 금방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올 듯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수아는 그런 태형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뭐 묻었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
수아가 말끝을 흐리며 초조하게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냥요….”
분명 혼사를 파하고 싶었는데, 분명 그녀가 바란 혼인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그런 잡념들이 이상하게 날아가 버린 것이. 그녀가 자신이 본가에서 무수히 읽었던 이야기책들을 떠올렸다. 이야기책의 사내와 여인은 늘 운명적 만남을 겪었다. 수아는 그리 여겼다. 운명적 만남이라고. 자신이 겪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
내가 바본 줄 아나.
태형이 궐에서 집으로 오며 아버지의 부름으로 사랑방으로 갈 때까지 줄곧 떠올린 말이었다. 어쩌면 행화궁으로 들 때부터 그러했는지도 몰랐다. 태형은 자꾸만 도화궁에서 본 수상한 여자 아이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말수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친화력이 좋은 태형이 행화궁에서 수아와 대화를 적게 나눈 것도 그 때문이었다.
“…누굴 바보로 보나.”
태형이 사랑방으로 가는 걸음을 멈춰서며 중얼거렸다. 궐에서 오는 길에도 몇 번이나 똑같은 짓을 했다가 식에게 괜한 타박만 받았다. 도련님, 뭘 그렇게 중얼거리십니까! 태형이 식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식의 목소리는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식의 타박을 기억에서 지운 태형이 다시 중얼거렸다. 내가 바보야? 행화궁으로 가는 길이 급한 데다 일단 당황했으니 가라는 여인의 말에 부리나케 그곳을 빠져나와 미처 하지 못한 말이었다.
처음엔 공주 마마한테서 손 떼랬다가 다음엔 둘이서 짜고 상궁이랬다가. 사실 그 꼬마애는 처음 만날 때부터 그랬는데. 그렇게 옷 입은 상궁은 어딨고 그렇게 어린 상궁은 또 어딨어. 게다가 세상에 호위무사한테 반말 쓰는 상궁은 어딨고 황명 운운하는 상궁은 어딨어. 그 호위무사는 상궁이면 상궁인거지, 왜 굳이 자신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며 내가 한 말이나 다시 각인시키고. 태형이 느끼기에 도화궁 여자 아이와 정국은 수상한 점이 많았다. 태형은 일단 황실에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자 아이가 상궁이 아니란 것과 정국이 그녀의 호위무사라는 것은 확신했다.
“…태형이냐.”
사랑방 안에서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흘렀다. 태형의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걸음을 멈춘 태형이 그 목소리에 다시 발을 옮겼다.
“그래, 궐에 갔다 왔다고 식이한테 들었다.”
중후한 목소리가 금방 사랑방에 들어 자리에 앉은 태형을 향했다. 중년의 남자의 눈은 여전히 자신의 앞에 놓인 서책을 향했다.
“예. 궐에 들었다 왔습니다.”
“궐은 어땠느냐?”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 과거에 급제하면 드나들 곳일 수 있으니 미리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태형은 대답 없이 웃어보였다. 첫 입궐 전에 들렀을 때는 저런 말씀 안 하셨으면서. 태형이 생각했다. 태형은 그의 아버지에게 치중된 사항이 ‘입궐’이 아닌 ‘혼사’라는 것을 알았다.
“수학관 장 댁 여식은 어떠하더냐?”
“…그냥…,”
“하하.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지. 차차 나아질 테니 너무 걱정 말거라.”
“…….”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들더냐? 내 비밀로 하마.”
태형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마음에 안 든 건 아닌데, 마음에 든 것도 아니고. 온종일 도화궁 일만 떠올린 탓에 행화궁에서의 일을 마음에 둘 겨를이 없었다. 태형은 쉬이 그 질문에 대답을 꺼낼 수가 없었다. 비밀로 한 대도 저 몰래 전갈을 부쳐 그 점을 고칠 것을 알기도 한 탓이었다.
“그냥 낯설어서 그런 듯 합니다.”
“별 일이구나. 네가 사람을 낯설어하고.”
“…….”
“궁에서 별 다른 일은 없었느냐.”
“예.”
“…….”
“…헌데,”
수백 번도 읽은 서책을 꾸준하게 보던 태형의 아버지가 시선을 태형에게로 옮겼다. 태형이 자꾸만 대답을 얼버무려 온전한 대화를 잇지 못해 그의 아버지 또한 말문이 막히려던 참이었다.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춘 남자가 코에 걸친 안경을 벗곤 태형을 바라봤다. 두 사내 간의 시선의 충돌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태형이 입을 열었다.
“…황실에 공주가 있었습니까?”
남자가 태형의 말을 듣곤 의외의 눈빛을 했다. 태형이 느리게 말했다. 발설이 조심스러운 까닭이었다. 있었습니까? 태형이 연못에서의 정국의 말을 떠올렸다. 손 떼. 공주 마마한테서.
“그게, 태형이 네가 세 살 적 일이니 벌써 열일곱 해 쯤 되었구나.”
“…….”
“황후 마마께서 승하하시면서 공주 마마도 같이 세상을 뜨셨지.”
“…….”
“살아 계셨다면 지금쯤 열여덟이셨을 텐데 말이다.”
태형이 눈을 빛내었다. 처음 듣는 황실의 이야기였다. 그러한 태형의 적극적인 표정을 본 남자가 인자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헌데, 태형이 네가 그걸 어찌 알았느냐?”
“…….”
“공주 마마의 혼령이라도 본 것이냐?”
경청의 의미를 담은 눈빛을 내던 태형이 길쭉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다물었다. 어, 혼령은 아니고 사람을 봤는데. 도화궁에 있던 수상한 여자 아이를 공주로 확신한 태형이 머릿속에 고운 빛의 의복을 입은 여인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당황한 표정과 울먹거리는 표정만 떠오르는 건 왜인지 몰랐다. 어째서 그리 필사적으로 자신을 죽은 목숨으로 인식하며 숨기고 살아가는지 모르겠지만,
‘……비밀로, 비밀로 해주시면,’
‘…….’
‘그럼 안 될까요….’
아무튼 신분 노출이 그리 슬픈 일이니, 뭐 어쩌겠어.
“…아니오.”
“…….”
“그냥 나인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태형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하다는 수긍의 의미였다.
“허면 궐에서는 뭘 봤느냐?”
“…그냥,”
태형이 말을 멈추었다. 이상하게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것이 말이 되냐며 자신을 타이르던 어린 꼬마애가 떠올랐다. 본 게 그거밖에 기억 안 나는데. 태형이 제 아버지의 질문에 무얼 봤다고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곤 입 꼬리를 끌어당기며 히죽 웃었다.
“날이 춥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짤막한 탄성에 정국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벌써 날이 춥다는 말만 열 번은 더 했겠다고 그리 생각했다. 덧붙여 저 죄송하다는 말까지.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날이 추우니 안으로 들어가자는 뜻이었다. 정국의 말을 묵살한 채 마당을 거닐며 필 기미가 보이는 매화나무를 바라봤다. 몸을 옮길 때마다 정국이는 끈질기게 내 뒤를 쫓았다.
“정국아.”
“예, 마마.”
“…숨바꼭질 하자.”
“……예?”
“너 술래. 빨리 눈 가려.”
정국이가 궐에 없을 당시 나인들을 떼어 놓기 위해 자주 하던 방법이었다. 정국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얼른 눈을 가리라는 재촉의 눈빛을 하자 조그만 탄성을 내지른 정국이 별 수 없이 눈을 가렸다. 아주 어릴 적 말고는 해보지 못한 놀이일 것이 분명했다.
“자, 천천히 서른까지 세!”
“…….”
“시작!”
담 쪽으로 몸을 튼 정국이의 혼잣말이 생생하게 들렸다. 하나, 둘, 셋. 조용히 웃으며 발소리를 죽이고 쪽문을 향해 달렸다. 나인들을 떼어놓기 위해 하던 행위였으니 이번에도 그 목적이 크게 바뀔 리가 없다. 나인들이 주변에 없는 것이 참 다행이라 여기며 쪽문을 통해 도화궁을 빠져나왔다. 천천히 세라는 내 말에 열을 세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도화궁 연못을 향해 달렸다. 전에 김태형이라는 외부인에게 들킨 전례도 있어 내 행동 반경이 도화궁과 도화궁 연못에서 커질 리도 없지만 일단은 날이 추우니 들어가자는 정국이의 말이 지긋지긋하기 그지없었으니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좁은 도화궁은 답답했다.
도화궁 연못가를 천천히 거닐었다. 누각까지 가서 헤엄치는 잉어들이나 볼 요량이었다. 김태형과 내가 앉았던 그 곳을 지나던 참이었다.
“어?”
손수건. 익숙한 자수가 그려진 손수건이 보였다. 그것도 연못 위에. 얼핏 전에 삼자대면을 했을 때 정국이가 도화궁 연못에 손수건을 찾으러 왔다고 하던 것을 들었다. 소지 중 누각 위에서 떨어뜨렸는데 바람에 의해 연못으로 날린 모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굳이 이런 겨울 날 나인들을 사서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낑낑 대며 손을 뻗었다. 이쯤 되면 정국이가 서른 즘 세었을 거라고 예상했다. 온 몸이 긴장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한 긴장이 풀린 것은 그때였다.
“야.”
인기척 없이 귓가에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어깨를 떨었다. 연못에 빠지지 않기 위해 갖추었던 긴장이 순간 느슨해졌다. 정국이가 벌써 왔나. 뻗은 손을 거둔 채 천천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엄마!!!!”
정국이라고 굳게 다지던 내 예상을 깨뜨린 것은 고개를 돌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어째서,
“아, 깜짝이야.”
어째서 김태형이 여기 또 있는 거지. 놀람에 연못가에 웅크린 채 몸을 허둥댔다. 김태형은 태연하게 놀란 귀만을 매만졌다. 왜 나만 보면 소리를 질러? 김태형의 얼굴에 기겁하며 앉은 몸을 일으켰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도 선연히 들렸다. 숨이 거칠어졌다.
“으악!!”
“…어어!”
내 허둥댐에 못이긴 몸이 연못 쪽으로 기운 것은 한 순간이었다. 나 못지않게 놀란 얼굴이 내 팔목을 잡아 왔다. 차가운 공기 속에 따스한 체온이 얇은 옷 사이로 전해졌다.
“조심.”
“……어!”
그리 나를 잡았는데도 왜 빠졌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깊지 않은 연못에 주저앉아 차가움도 망각한 채 눈만 끔뻑댔다. 차갑게 젖은 옷이 살갗으로 달라붙었다. 나와 함께 연못으로 돌진한 김태형은 물기를 털어내듯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입가의 물기를 닦아내며 숨을 뱉자 하얀 입김이 눈앞에 서렸다. 나와 함께 빠진 김태형은 소매로 제 얼굴을 닦아낸 후 입을 열었다.
“야.”
꽤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상궁이라고 그리 거짓을 고했음에도 왜 이젠 ‘상궁’이 아닌지 몰랐다. 길쭉한 눈매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무언가 진지하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네가 공주야?”
뭐?
“……에?”
“네가 공주냐고.”
직설적이어도 이리 직설적일 수가 없다. 미간을 구겼다. 여태 정국이랑 내가 조금 허술하긴 했다만 그래도 그걸 어떻게 알았지…. 김태형은 대답을 않음에도 자신의 특유의 웃음을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공주야.”
-
흐아 진이 다 빠진다 8ㅁ8
브금 왜 맨날 똑같냐고 물으신다면 저 브금 들으면 제 생각 나시라고ㅎ
그리구 오늘 (스승의 날이기도 하지만) 세종대왕님 탄신일이래요
이런 글도 쓸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세종대왕님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 제 사랑 951230개 드실 52분♥ ←
1214 / ♥김태형♥ / 곤잘레스 카레 / 골드빈 / 군림 / 깻잎사랑 / 꽃게 / 꽃길 / 꽃단비 / 냥군땡 / 노트북 / 뉸뉴냔냐냔 / 니케 / 다홍 / 단아한사과 / 리자몽 / 리프 / 망개똥 / 매직핸드 / 맴매때찌 / 먹고쥭자 / 미스터 / 방소 / 보고싶찐 / 봄비 / 불나방 / 비데 / 빵빠레 / 삐삐까 / 사막여우 / 싸라해 / 아망떼 / 열렬히 / 예찬 / 오월 / 우유 / 윤기 / 응캬응캬 / 이다 / 이스트팩 / 입틀막 / 정꾸야♥♥♥ / 줄라이 / 진격 / 천사소녀제티 / 체셔리어 / 쵸코두부 / 태형아뷔태해 / 현질할꺼에요 / 호비 / 화학 / 황토색
모두 잘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