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정체를 숨기는 일 뿐이다.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들었다. 이러한 말이 아닌 다른 말이더라도, 결말은 언제나 비슷한 축에 속했다. 그렇지 않으면 민의 공녀가 되어 폭군의 아내로 생을 마감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라고. 태어나던 순간부터 철저하게 지켜지던 일이었다. 궐에서만 쉬쉬하던 나의 생존도 성장에 따라 황실의 일부만이 알게 됐다. 궐에는 담에도 귀가 달려있다던 이야기는 나에게는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도화궁이라는 낡은 궁에서 몸을 숨기고 입을 닫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나름 철저하게.
하지만 모든 것이 숨겨지는 것이 아니며, 누군가는 의도하지 않아도 뜻하지 않게 비밀을 직면했다. 오라버니를 포함해 내 정체를 아는 소수의 사람들은 웬만하면 도화궁에 몸을 숨기길 바랐지만 열여덟 해 동안 넓은 궐 안에서 나의 범위가 좁은 도화궁에만 국한되는 것은 참혹한 일이었다. 나인들의 눈을 피해 몰래 도화궁을 벗어났다가 이따금씩 모르는 궁인들을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도화궁의 궁녀로 소속이 옮겨지거나 목숨을 빼앗기는 등 어떠한 변화를 겪었다.
‘…마마님, 연이가, 연이가 사라졌습니다!’
궁의 누군가는 아무도 모르게 그러한 일을 처리했지만 함께 넓은 궐 안에서 같은 일을 하며 동고동락했던 동료마저 그 이의 부재를 모를 리가 만무했다. 나의 주변에 맴돌던 이들은 내가 괜한 죄책감을 질까 우려해 그것을 끝까지 숨기려 들었지만 도화궁을 벗어나면 어떻게든 알게 될 일이었다. 우려한 바는 틀에 맞춰지듯 꼭 들어맞았다. 누군가의 동료이자 형제이자 자식인 존재를 세상에서 없애 버린 것이, 나에게는 지울 수 없는 죄책감으로 다가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웬만해선 조심, 또 조심을 기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넌 누구냐.”
이런 상황은,
“…….”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황녀(皇女)
二
조금만 더 인내심 있게 오라버니를 기다릴 걸. 조금만 자수를 더 하고 있을걸. 조금만 덜 필사적으로 도망칠걸. 조금만 더 빨리 나인에게 잡혀 도화궁으로 돌아갈걸. 조금만 더…….
“누구냐고 물었는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물 밀 듯 밀려왔다. 낮은 목소리는 귓가에 선연하게 와 박혔다. 차가운 궐 담에 기대앉아 치마폭을 꼭 그러쥐며 몸을 더욱 웅크렸다. 나를 오롯이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짙은 흑빛이었다. 차가운 바람결에 남자가 입은 푸른 빛 도포가 흩날렸다. 귀한 집 자제인 듯 수려한 얼굴이 나에 의해 조금 헝클어졌다. 눈가가 시렸다. 나를 찾는 나인들의 목소리는 이미 기억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말할 줄 몰라?”
오라버니가 본인이 부른 사람 이외의 ‘다른’ 외부인이 있다는 말은 해준 기억이 없다. 당황감과 긴장감이 가득 서렸다. 나를 보는 남자의 눈빛은 한겨울처럼 냉랭했고, 내게 닿는 시선은 여름 볕처럼 따가웠다. 그것은 무언의 압박을 가하며 내게 얼른 대답해보라는 의미를 내포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어쩌면 도화궁에서 이곳까지 뛰어왔을 때보다 더.
“…저기요! 여기 수상한 자ㄱ…!!”
“아, 아, 아니요! 할 줄 알아요….”
남자가 제 손을 들어 큼지막한 소리를 낸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들키면 나인들이나 오라버니나 그 곳에 왜 갔느냐는 잔소리로만 하루를 꼬박 지새울 게 뻔했지만, 그것보다는 궐 안에서 공개적으로 정체가 탄로 났을 때 삽시간으로 그것이 민의 궁 안으로 퍼질 게 더 걱정스러웠다. 그런 생각이 빠르게 스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가 길쭉한 눈매를 동그랗게 떠 보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한 나의 반응에 당황한 눈치였다.
“수, 수상한 자는 아닙니다.”
말을 더듬으며 긴장감에 가득 찬 목소리를 쥐어짰다. 내 보기엔 남자 또한 궐 안에 있는 것이 상당히 수상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생각할 겨를이 남아있지 않았다. 남자는 제 입을 틀어막은 내 손을 치웠다. 입을 꾹 다문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불안감이었다.
“수상하진 않은데,”
“…….”
“누군지 말은 못 하겠다?”
“……예.”
느지막이 대답하며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요점을 짚어냈다.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럼 어떡하라구요.”
“여기 어울리는 차림은 아닌데.”
“…….”
“혹시,”
남자가 말을 멈추었다. 남자의 시선이 내 옷차림 위로 닿았다. 입술을 달싹였다. 황자라곤 하나뿐이라 알려진 황실의 상황에서 외부인이 숨겨진 황녀가 있다고 추측할 리 만무했다. 도화궁에서의 일탈에 대한 떨림은 한순간 무서운 긴장감으로 변모했다.
“…침입자?”
“예?”
“여기! 궐에 침입자ㄱ…!!”
…아씨. 속으로 중얼거리며 급하게 남자의 입을 다시금 틀어막았다. 적절한 답이랄 것 마땅한 것이 없었지만 나름대로 정상적인 대답이 남자의 머릿속에 떠오르길 기대했었다. 결국 이런 차림으론 그런 기대는 허상인 것을 깨달았지만.
“수상한 사람 아니라고 했잖아요….”
남자의 입을 막은 채 복잡한 머리를 빠르게 굴리려 애썼다. 이 난감한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명료하게 나온 해답이란,
“그럼?”
……진짜 망한 것 같다.
아바마마를 더 많이 뵙지도 못했는데.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연홍색 도포에 자수도 덜 끝냈는데. 오라버니가 태자비를 맞는 것도 못 봤는데. 울상을 지었다. 극단적인 미래를 그리며 누군가에게 보내지도 못할 편지를 썼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 끝은 암담하기만 했다.
“…마마, 어디 계십니까?!”
멀리서 나지막하게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들키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지배했다. 나도 나를 모르는 이들에게 잡혀 수상한 자라고 공위청(攻僞廳)에서 심판을 받게 될 위험을 감수하는 중이었지만, 그동안 내 정체를 들켜 숱하게 지위를 변화시킨 사람들과 같이 남자의 신변 또한 안전하리라 보장키는 힘든 것이었다. 남자가 입은 푸른 빛깔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일어선 몸을 다시 앉혔다. 남자의 새카만 두 눈동자는 그럼에도 소리가 나는 쪽을 향했다.
“찾는 게 너야?”
“……예. 그러니까 몸을 좀 숨기는 게…,”
“왜 너를 찾는데?”
남자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두 눈이 이젠 담벼락에 기대 앉아있는 나를 내려다봤다. 푸른 도포가 눈에 띌 것을 우려해 소매를 계속 끌어당김에도 남자는 꿋꿋하게 나인들이 지나가는 자리를 지켜보며 선 자리를 지켰다. 내가 당긴다고 나보다 키도 몸도 더 큰 상대가 이끌려 올 리는 없지만. 남자는 금방이라도 답변을 기다리는 듯 나를 응시했다. 무엇이라도 말을 해줘야만 남자가 내 말을 따를 것만 같았다.
“……상궁!”
“…….”
“상궁입니다! 황제 폐하 모시는….”
그래서 생각해낸 게 이거다. 이런 얼굴로, 이런 차림을 하고서.
“상궁?”
남자가 되물었다. 남자의 짙은 눈썹은 일그러진 채였다.
“그러기엔 너무 어린데.”
“…….”
“차림도…, 이상하고.”
하긴, 내가 생각해도 진짜 이상한 대답이긴 했다. 왜 하필 이런 때 그 단어가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다. 상궁 차림이야 궐을 조금만 걸어 다니면 알 수 있는 일인데. 말을 뱉어버렸고, 남자가 그걸 들어버린 이상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남자가 하는 말이 전부 사실이라 어떠한 반박도 못했다. 나는 다시 또 다른 거짓을 꾸며내야 했다.
“…공! 공이 커서 저는 특별하게…,”
남자의 소매를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약하게 쥐어박았다. 외부인이라고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막 뱉는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이 나이에 황실에 공이 있으면 대체 뭐가 있다고…. 말문을 막았다. 남자는 나를 보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여기요! 여기 이상한 상궁ㅇ…!!”
남자가 불현 듯 손을 들어 나인들이 지나가는 쪽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또 다시 남자의 입을 막으며 담벼락 밑으로 숨었다. 세 번째였다. 어떠한 말을 해도 이젠 먹힐 것 같지도 않아 걱정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남은 방도가 없었다.
“……비밀로, 비밀로 해주시면,”
“…….”
“그럼 안 될까요….”
남자가 입을 틀어 막힌 채 나를 바라봤다. 남자는 어떠한 저항도 않은 상태로 내 움직임을 따라 순순히 몸을 이끌었다. 목소리가 축축해졌다.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안 그럼 진짜…,”
“…….”
“나 진짜 죽어요….”
남자가 딱딱한 표정을 해 보이며 맥이 풀린 듯 온 몸에 힘을 뺐다. 조심스럽게 남자의 입을 막던 손을 떼어냈다. 남자의 시선은 올곧았다. 정적이 휩싸였다. 숨소리만이 귓가에 가득 맴돌았다.
“마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나를 찾은 듯한 목소리였다.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남자를 보이지 않게 밀어 넣으며 울상을 지은 표정을 굳혔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죄책감을 만들지 않기 위해, 내가 살기 위해, 이 공간에서 내가 사라질 때까지 남자가 미동이 없기만을 바랐다. 내겐 크나큰 악연임이 분명하니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길 바랐고.
“왜 여기 숨어 계세요!”
“…….”
“태자 저하께서 도화궁에서 기다리십니다.”
얕게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고르는 나인의 뒤를 따랐다. 내 정체를 들키느냐 마느냐는 그저 남자의 몫으로 넘겨둘 수밖에 없었다. 걸음을 옮기며 남자와 애원일지 대화일지 모를 무언가를 나눴던 공간을 돌아보았다. 남자는 말이 없었다.
“…어디 있었던 것이냐?!”
“…….”
“내가 얼마나…,”
오라버니가 한달음에 달려와 내 앞에 섰다. 두 눈동자에는 나만큼의 걱정의 빛이 서렸다. 말문이 멎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말을 굳이 끝맺지 않아도 그 입술에서 나올 말이란 귓가에 선했다. 나직하게 오라버니에게 대답했다.
“…매화궁에 가려고 했었는데.”
결국 목적지는 누구에 의해 한 자락도 눈에 담지 못했지만. 내 대답에 역정을 내듯 격양된 감정 가운데 오라버니의 짙은 한숨이 터졌다. 한숨 속에 걱정과 다행이 뒤섞였다.
“들켰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시선을 회피하며 입술을 꾹 닫았다. 미안, 벌써 들켰어…. 혀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나를 타이르는 목소리가 어린 아이를 달래듯 다정했다. 어쩌면 타이름보다 다시는 걱정될 일을 하지 말라 나를 설득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 설득에 조금씩 이 낡은 도화궁에 발목이 묶이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고.
“……미안.”
옅게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걱정을 덜기 위함이었다. 오라버니의 것이 아닌 내 머릿속에 가득 차오르는 걱정을.
“찾았으니까 됐다.”
“…….”
“다음부턴 몰래 나가고 그러지 마.”
오라버니는 내가 이 도화궁을 눈을 피해 몇 번 벗어난 적이 있는 것을 모르는 듯 말했다. 진짜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곱게 뻗은 입 꼬리에 웃음이 걸렸다. 이 웃음을 짓기 전엔 물가에 내놓은 어린 아이를 바라보는 것 마냥 제 할 일도 못하고 도화궁에서 발만 구른 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 눈에 훤했다. 여섯 해의 격차 속에 열여덟 해가 지나가도록 오라버니는 언제나 나를 아이처럼 대했다.
“……이제 가야겠구나.”
말투가 잠잠해졌다. 걱정이 많은 오라버니와 여동생 사이에 오간 대화는 순식간에 황태자와 그의 동생인 황녀의 대화로 형태를 바꾸었다.
“…앞으로 매화궁에 오기 전엔 미리 전갈이라도 하거라.”
“…….”
“인사는, 알아서 하시고.”
“예, 저하.”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오라버니를 향했다. 오라버니는 아무렇지 않은 듯 옅은 웃음을 지으며 도화궁의 궐 담을 지나쳤다. 시선이 소리가 나는 쪽을 따랐다. 목소리의 주인인 사내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앳된 용모였다.
“…전정국입니다.”
“…….”
“마마.”
나흘 전 오라버니가 데려오기로 한 내 또래가 있음을 그제서야 자각했다. 내가 그를 보러 매화궁까지 뛰어간 것임을 깨달았고. 자신을 ‘정국’이라 소개한 사내가 자신의 손에 든 검붉은 칼집을 꾹 쥐었다. 어색한 기류가 돌았다. 긴장감일지 뭘지 모를 무언가에 의해 정국이 인상을 굳혔다. 나는 어찌 하지 못하고 입을 끌어올리며 그 자리에 서 쭈뼛쭈뼛 손바닥만을 펴 보였다.
…안녕, 정국아.
첫 만남이었다. 하얀 입김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씨….”
태형이 뒷목을 매만졌다. 심기가 불편했다. 것도 몹시.
‘……상궁!’
‘…….’
‘상궁입니다! 황제 폐하 모시는….’
태형이 자신을 ‘상궁’이라고 소개하던 여인을 떠올렸다. 전혀 신빙성이 없는 말이긴 했다만. 하늘빛 저고리에 연노랑 치마를 입은 앳된 얼굴이었다. 어디 있냐는 궁녀들의 목소리도 함께였다. 그녀는 뛰기엔 버거워 보이는 체구로 태형 쪽으로 뛰다 나인들의 목소리에 옆에 있는 담 너머로 숨었다. 태형은 의아했다. 왜 저런 애가 궐에 있지. 태형이 담에 기대앉은 그녀의 눈앞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넌 누구냐.’
태형은 궐을 돌아다니며 숱하게 본 궁녀들의 차림을 떠올렸다. 태형이 그녀에게 낮게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나인들을 상대로 숨바꼭질 중이라면 흔쾌히 넘어가줄 의향은 있었다만 그러기엔 그녀가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황자는 지금 황태자 저하 한 명뿐 이랬는데. 황실의 누군가라고 하기엔 당의*를 입은 것도 아니고, 궁녀도 아닌 것 같고. 태형의 물음에 그녀는 대답을 회피했다.
* 당의 : 여자들이 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 중에 하나. 궁중에서는 평상복으로 쓰임.
‘여기! 궐에 침입자ㄱ…!!’
여인이 누군지는 나인들이 호칭을 붙이지 않았으니 알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수상쩍어 보일 때마다 태형은 나인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그 표현을 대신했다. 그녀는 태형이 소리를 지를 때마다 황급히 태형의 입을 막았다. 태형은 추궁과 함께 조금의 장난기를 곁들였다. 여인이 자신의 입을 막을 것은 나름대로 예상한 행위였다.
근데 그렇다고 울리려던 건 아닌데…. 여인이 목소리에 물기를 실은 것은 태형이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그녀의 울상 또한 태형의 장난을 멈추는 데 한몫했고. 비밀로 해주시면 안 댈까여. 안 그럼 나 지짜 주거여. 태형은 비밀이 밝혀지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여인의 의도는 파악했지만 태형이 듣기에 여인의 발음은 대충 그러했다. 태형은 그에 얼굴을 굳혔다. 그녀는 태형을 보이지 않게 밀어 넣은 채 한 나인을 따라나섰다. 태형은 두 눈을 깜빡였다. 숨바꼭질이 그렇게 심각한 건가.
“도련님, 어디 불편한 데 있으십니까?”
태형의 옆을 따라나서던 식이 물었다. 태형은 대답 없이 멋쩍게 제 볼만을 긁적였다. 어려운 문제였다.
“도련님, 혹 궐에서 무슨 일이라도…,”
“아니!”
태형이 소리쳤다. 태형의 옆에서 걷던 식은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 제 도련님에게 상태를 묻다 흠칫했다. 식은 태형에게 덧붙였다.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십니까? 태형은 그럼에도 묵묵히 가던 길을 걸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발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마님! 도련님 오셨습니다!”
식이 대문을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태형에게 익숙한 중년의 여인이 태형을 맞았다. 태형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태형을 향해 인자하게 웃었다. 태형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래, 궐에는 잘 다녀왔고?”
“…….”
“상대가 궐에 오지 않았다고 전갈 받았다. 무얼 하다 이리 늦었느냐?”
여인이 반응이 없는 제 아들을 보며 의아함을 품었다. 원치도, 의도치도 않은 혼인을 하게 한다고 마음이 상한 건가. 태형은 제 푸른색 소매를 매만지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아, 진짜 울리려던 건 아닌데….
“식아, 오다가 무슨 일 있었느냐?”
“아니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헌데 태형이 안색이 안 좋구나.”
“…….”
“궐에서 무슨 일 있었니?”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형은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든 채 제 어머니를 바라봤다. 걱정스러운 눈빛이 태형을 향했다.
“아, 아니.”
“…….”
“아닙니다. 아무 일도.”
태형이 어머니를 향해 대답했다. 태형은 아이 같은 웃음을 지었다. 궐에서 제게 울상을 지어 보이던 상궁에 대한 생각을 곱게 접은 채. 두 눈이 호선을 그리며 예쁘게 휘었다.
“…다행이구나.”
“…….”
“그래, 다시 궐에 가는 날은 언제라고 하고?”
그녀가 물었다. 식은 태형의 옆에 붙어 말없이 두 모자의 대화를 경청했다. 태형은 대답했다.
“…사흘 후라고 했습니다.”
태형의 어미와 식은 태형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바람이 찬 탓이었다. 태형은 손에서 만지작거리던 제 푸른색 소매를 놓으며 제 방으로 향했다.
…아, 여긴 어디야….
태형이 궐의 문패를 하나씩 읽어가며 중얼거렸다. 태형의 미간은 애초부터 구겨졌다. 발걸음이 느려졌다. 자신에게 길을 안내하던 궁녀를 따르려 했지만 그마저도 보이지 않아 골치였다.
이른 아침, 황제는 자신의 몸이 그리 좋지 않으니 둘이서의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며 일전에 만났던 빈영전 대신 ‘행화궁(杏花宮)’으로 오라는 전갈을 태형에게 보냈다. 태형의 상대 또한 그곳으로 불렀다고. 신분을 확인하고 대궐에 입성한 것까지는 좋았다. 아니, 궁녀를 따라나선 것도 물론 좋았다. 그 뒤에 자신에게 길을 알려주던 궁녀를 놓친 것에서부터 큰 문제였다. 주변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바빠 보인다는 것 또한 태형의 문제에 크게 일조했다. 태형은 머리가 아팠다.
“…미치겠다, 진짜.”
이런 넓은 궐 안에서 어떻게 행화궁을 찾냐고. 태형이 궐 담의 쪽문을 넘어서며 생각했다. 태형의 탄식이 궐 안을 끊임없이 울렸다.
“…어.”
태형이 궁의 낡은 문패를 읽어 내려갔다. 桃花宮. 도화궁이었다.
궐에 이렇게 낡은 데도 있었나. 태형이 작게 중얼거렸다. 방금 전 까지 본 궁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궁인들조차 스산한 분위기가 싫어 한낮에도 꺼리는 공간이었다. 태형이 도화궁의 외관을 훑으며 신을 벗지 않은 채 도화궁의 마루 위로 올라섰다. 태형은 그 곳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여겼다. 이런 델 왜 방치하는 거야. 태형은 호기심이 많았다.
“……이상한데.”
태형이 의문을 품었다. 백단향*. 백단향이 났다. 사람이 살지 않는 궁 치곤 너무 선명하게.
* 백단향 : 단향과의 상록 활엽 교목. 좋은 향기가 나며 향료로 쓰임.
“…모르겠다.”
태형이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발걸음을 돌려 도화궁의 마루에서 내려왔다. 행화궁을 찾는 일이 시급했다. 당장이라도 궐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용건을 마치기 전까지는 퇴궐이 용납지 않았다. 게다가 태형의 아버지는 태형에게 여태 말을 잘 들었으니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는다고 일렀다. 태형은 부담감이 앞섰다. 마음이 불편했다.
복잡한 태형의 머릿속을 누군가 단번에 비운 것은 그 찰나였다.
“…오라버니!”
무언가가 뒤에서 태형의 허리를 휘감았다. 태형은 그러한 뜬금없는 행위와 함께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몸을 흠칫했다. 자신의 여동생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왔으면서 왜 안 불러?”
“…….”
태형이 고개를 빳빳하게 굳히며 마른 침을 삼켰다. 황제와 같은 방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태형은 허리를 단단하게 껴안은 팔에 의해 숨을 멈췄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니, 누가 대체…….
“오라버니, 왜 대답이 없…,”
“…….”
태형의 허리를 감은 작은 체구의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도화궁의 주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끌어안은 남자가 숨도 쉬지 않고 멈춰있는 것이 의아했다. 이쯤 되면 몸을 돌릴 법도 한데…. 그녀는 그녀의 낡은 도화궁을 찾아오는 유일한 사람은 제 오라비인 석진 뿐이기에 이번에도 그러리라 확신했다. 그녀가 자신의 팔에 힘을 뺐다. 눈만 이리저리 굴리던 태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굳었다.
“…으악!!”
“악!!”
여인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그 소리에 놀란 태형이 덩달아 제 목소리를 높였다. 태형이 넘어진 여인을 내려다봤다. 낯이 익었다. 얼핏 백단향이 난 것 같기도 했다.
“…어?”
“……헐.”
태형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또 다시 태형을 보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태형은 사흘 전 울 듯 말 듯 울상만 짓던 여인을 떠올렸다. 여인은 이번에도 당의도 궁녀복도 아닌 궁에 어울리지도 않는 차림을 했다. 태형은 그녀가 상궁이 아님을 벌써부터 간파했다. 태형이 웃음기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또 보네.”
“…….”
“상궁 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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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선바람입니다.
이제 우연을 만들 일이 많아지겠어요. 풀어나갈 생각하면..(까마득)
틈틈이 쓰고 틈틈이 갈아엎었는데 이정도네요 하하
제가 처음이라 그런지 분량 조절을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야기 잘 풀어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고ㅠㅅㅠ
아무튼 좋은 말씀 주신 모든 분들께 고마워요!!
여주 한복 참고사진 |
하늘빛 저고리에 연노랑 치마를 입은 앳된 얼굴이었다. |
→ 제 사랑 951230개 드실 36분♥ ←
1214 / ♥김태형♥ / 골드빈 / 군림 / 깻잎사랑 / 꽃게 / 꽃단비 / 냥군땡 / 니케 / 단아한사과 / 리자몽 / 매직핸드 / 먹고쥭자 / 미스터 / 방소 / 비데 / 삐삐까 / 사막여우 / 싸라해 / 열렬히 / 오월 / 우유 / 윤기 / 응캬응캬 / 이다 / 이스트팩 / 줄라이 / 진격 / 천사소녀제티 / 체셔리어 / 쵸코두부 / 태형아뷔태해 / 현질할꺼에요 / 호비 / 화학 / 황토색
이제 진짜 시험치고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