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남자를 만났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새벽. 어느 때와 같이 갈 곳 없이 떠돌다가 보이는 공원 벤치에 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비를 맞으며 앉아 있는데 시선을 돌리다 어떤 남자랑 눈이 마주쳤다. 응..? 눈이 마주쳐? 에이, 무슨. 그래도 착각이라기엔 너무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나도 참, 무슨 생각을...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돌려 사람 하나 없는 공원을 바라봤다. 몇 분을 그러고 있었을까, 갑자기 나에게만 비가 내리지 않는 느낌에 고개를 들자 아까 공원 입구에서 내 쪽을 본 남자가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자 마주친 두 눈에 그 남자는 놀란 듯 눈이 커지더니 손에 들고 있는 검은 봉투와 우산을 떨어트렸다.
"여주야..? 진짜... 여주야....?"
운다, 남자가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그것도 알 수 없는 이름을 부르며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뚝뚝 눈물을 흘린다. 뭐야, 이 남자. 귀신을 보나? 무당인 건가.. 딱히 기는 안 느껴지는데... 살면서, 아니. 죽고 나서 무당말고는 나를 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여기 근처에는 무당집이 없는데... 이 남자 뭐지?
"정말 나 보여요? 그럼 다른 것들도 보는 건가.."
"......."
"저기요. 나 귀신이에요. 왜 내 앞에서 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시간이면 귀신 진짜 많이 돌아다니거든요?"
"......."
"나는 괜찮지만 악귀하고 괜히 눈 잘못 마추치면 그쪽만 골치 아파요. 그니까 얼른 집 가요."
처음으로 무당말고 평범한 사람을 만나서 그런가. 괜한 오지랖을 부렸다. 죽고 나서 저런 따뜻한 눈빛은 처음이라 그런가. 나를 보며 울고 있는 두 눈은 사무치게 따뜻했다. 너무 따뜻해서 잠시 할 말을 잃을 정도로. 귀신이라는 나의 말에 눈이 잠시 커졌다. 걱정이 섞인 나의 말에 무엇을 생각하는 듯 말이 없더니 처음으로 알 수 없는 이름 말고 다른 말을 내게 건넸다. 울음이 가득 섞였지만 정말 듣기 좋은 목소리로.
".... 춥지 않아요? 우리 집 갈래요?"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상하리 만큼 익숙했다. 또 이상하리 만큼 따뜻했다. 그래서 나는 그 남자를 따라갔다.
꿈속의 그녀
옷을 건네주며 갈아입고 오라는 남자의 말에 남자가 가리키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신기하게도 그 옷이 꼭, 나를 위해 준비한 옷처럼. 내 것 마냥 나에게 딱 맞았다. 죽고 나서는 처음 갈아입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저 죽고 나서 옷 처음 갈아입어요. 완전 어색하다."
"........"
"어때요, 예뻐요?"
반응이... 없네. 처음부터 답을 바라고 물은 질문은 아니었지만 장난스럽게 묻는 나의 질문에 아무 대답 없이 나를 가만히 쳐다만 보는 남자의 눈빛에 괜히 민망해졌다.
"왜 그래요?"
계속 아무 말 없이 쳐다만 보는 남자에 결국 남자 얼굴 앞에다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말하자 그제서야 정신이 드는지 나와 눈을 맞췄다. 그러다가도 자신의 앞앞, 바닥을 가리켰다. 앉으라는 말인가? 자리에 앉은 후 물어보자 아무 대답을 안 한다. 근데 그때 바로 귀 옆에서 들려오는 위이잉- 하는 큰 소리에 움찔하자 머리카락에서 조심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와... 나 누가 머리 말려주는 거 처음이에요. 기분 되게 좋다, 이거."
"... 그래요? 앞으로 자주 말려 줄게요."
자주 말려준다는 그의 말에 기분 좋은 웃음이 났다. 내가 누가 내 머리 말려주는 걸 좋아했구나. 죽고 나서 누가 머리를 말려주긴커녕 머리를 만져준 적도 없으니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
"근데 여자 옷이랑 여자 속옷은 왜 있는 거예요?"
아까부터 정말 궁금했는데 이제야 물어보네. 내 물음에 잠시 손을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바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겉으로는 안 놀란척했지만 사실 많이 놀랐다. 여자친구가 있다 그랬다. 하긴, 저 얼굴이랑 성격에 여자친구가 없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
"그럼 여자친구랑은 얼마나 됐어요?"
내 물음에 또다시손을 멈칫한다. 뭐지? 여자친구 말만 나와도 떨리나. 자꾸 멈칫하네. 이번엔 아무 대답이 없다. 계속해서 정적만 이어졌다. 뭐야, 여자친구랑 얼마나 됐는지도 모르는 거야? 안되겠네. 여자는 이런 걸 중요하게 여긴다고요. 내가 여자친구였으면 엄청 섭섭했겠네.
"뭐예요. 여자친구 있다면서 얼마나 됐는지도 몰라요? 여자친구 섭섭하겠다."
"........"
"뭐야. 왜 계속 말이 없어요. 여자친구랑 싸웠어요? 그래서 그래요?"
"......."
"알겠어요.. 이제 여자친구 말 안 꺼낼ㄱ..."
".. 안 만난 지 좀 됐어요. 아니, 못 만난 지."
계속되는 내 물음에도 말이 없길래 아 싸웠구나. 하고 생각이 들어 기분 안 좋겠다 싶어서 그만 말하겠다고 얘기하려는데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못 만난 지 좀 됐다고? 유학이라도 갔나...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소파에 앉아 머리를 말려주는 남자를 올려다보자 자연스럽게 머리 말려주는 손으로 내 고개를 돌려 앞을 보게 했다.
"사정이 좀 있어서... 사실 아직 사귀는 게 맞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 아, 미안해요. 괜한 거 물어서..."
".. 근데, 만난 것 같아요. 여자친구."
사정이 있어서 못 만났다고, 사실 사귀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는 남자의 말에 내가 말을 잘못 꺼냈구나 생각했다. 너무나도 슬픈 목소리였기에, 사정이란 게 별로 좋지 못한 사정이라는 거쯤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얼른 사과하려 입을 열었다.
"네?"
하지만 바로 들려오는 말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난 것 같다고? 무슨 소리지. 이해가 되지 않아 바로 되묻자,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는 드라이기를 끄고는 자리에 일어섰다.
"다 말렸어요. 피곤하죠? 아, 귀신은 피곤함을 못 느끼나..."
피곤하죠? 묻고는 곧바로 자신이 실수한 것처럼 표정을 짓는 남자의 모습에 그만 풋, 하고 웃음이 났다. 귀엽다. 내 웃음소리에 나를 쳐다본 남자에게 웃으며 말했다.
"느껴요. 느끼는데, 사람보다야 많이 덜 느끼죠? 그러니까 그렇게 미안한 표정 짓지 마요. 괜히 내가 미안해지네. 머리 말려준 거 고마워요."
"아니에요.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런 건데요 뭘."
"아, 근데 나 아까부터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아까처럼 실수할까 싶어 이번엔 물어봐도 되냐고 정중하게 묻자, 내가 무엇을 물어볼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정말 아까부터 궁금했는데요.
"그쪽 이름이 뭐예요?"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알려줬네요. 내 이름은 이석민이에요."
"이석민... 이름 되게 이쁘네요. 제 이름은... 아....."
이석민. 그와 되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얼굴처럼 이름도 예쁘네. 제 이름은.. 아.... 나 내 이름이 뭔지 모르지.. 씁쓸해졌다. 사람이라면 국적, 나이 같은 거와 상관없이 누구든 가지고 있는 게 바로 이름이었으니까. 그런데 난 이름이 없다. 아니, 있었겠지. 그런데 죽으면서 잃어버렸다. 이름, 나이, 기억. 전부 다.
그래,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거잖아. 난 사람이 아니니까...
"김여주 해요. 그쪽 이름."
알고 있었지만 다시 느껴지는 씁쓸한 감정들에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데 위에서 남자의.. 아니,석민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여주? 그게 누군데요?"
"그쪽이요."
"아니, 원래 이름 주인 말이에요."
나에게 김여주 하라며 말하는 석민 씨. 알 수 없는 이름에 그게 누군지 물으니 그쪽이요. 라며당연한 듯 말하는 석민 씨다. 아니, 그 이름의 원래 주인 말이에요. 그게 누구예요?
".... 나한테 엄청 소중한 사람이요."
나에게 엄청 소중한 이름이라며 말하는 석민 씨의 표정이 어딘가 슬퍼 보였다. 엄청 소중한 사람...? 여자친구 말하는 건가... 아니면 엄마? 분명 여자 이름인 건 확실한데. 석민 씨에게 엄청 소중한 사람...
"엄청 소중한 사람이요?"
"네. 근데 이제 그거 여주 씨가 해요."
"........"
"나한테 엄청 소중한 사람."
***
음!! 사실 이 글 특유의 몽실몽실한 분위기를 제가 너무 좋아해서 계속 이어가고 싶은, 무사히 완결까지 가고 싶은 글이에요! 근데 생각보다 반응이 없어서 넘 속상ㅠㅠ 그래도...! 힘이 닿는 곳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