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자고 싸고, 먹고 자고 싸고. 은퇴하고서는 하나도 다른 게 없는 진부하고 평범한 일상. 여느때와 같이 카레를 먹으면서 무한도전을 다시보고 있는데 올림픽때였던가, 박태환 선수 400m 예선, 화이팅! 하고 무한도전 멤버들이 나를 응원하는 영상이 나온다. 울컥, 울음이 쏟아져 나오려 한다. 나는 이제 보잘 것 없는 전 수영선수가 되버리고 말았는데. 이제는 수영장에서 기록을 재도 그다지 좋은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이제 나는 잊혀가고 쑨양이 내 빈자리를 채우겠지. 아니, 채울 필요도 없나. 난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절망적인 생각이 내 머릿속을 온통 채우고 예선에서 실격당했을때의 기억이 나를 자괴감에 빠뜨린다. 양 손에 얼굴을 묻고 소리낼 수도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현관에서 초인종소리가 들려온다.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재촉하는 듯한 초인종 소리에 뛰어가 문을 열어줬다.
“태환, 지금..울어요?”
놀란듯이 묻는 그 음성의 주인공은 쑨양, 이제는 수영계의 스타로 떠오르게 된 그다. 짠 눈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닦아주는 쑨양의 큰 손.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가라고, 왜 찾아왔냐고 엉엉 울어제꼈다. 이런 내 반응에 적잖이 당황하고 놀랐는지, 그 거구로 어쩔 줄 몰라하고 우물쭈물거리는 꼴이 썩 보기 좋지는 않다. 울음이 점차 그치고 그에게 거실에 가 앉아있으라고 한 후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얼굴에 찬 물이 닿자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다. 아까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이불에 하이킥을 뻥뻥 차고픈 기분이었다. 쑨양은 또 얼마나 당황을 했을까. 아, 엄마 나 그냥 화장실에서 살면 안돼요..? 어떻게 거실에 나가서 쑨양과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하느냐고.. 과거의 내 자신에게 달려가 그러지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을 정도다. 아무리 은퇴를 하고 내 자신이 쓰레기같이 느껴진다고 해도 그렇지.. 쑨양한테 왜 괜한 화풀이느냐고, 왜!
“태환..또 울고 있는 거 아니죠? 괜찮은거죠?”
“아, 네..괜찮아요..금방 나갈테니까 기다려요.”
수건으로 얼굴에 있는 물기를 닦은 뒤. 후하후하, 심호흡을 하고선 문고리를 살짝 돌렸다.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마저 왜 이렇게 크게 들리는 건지. 심장이 두근두근거린다. 문을 열고 발을 한 발짝 내딛으니 문 옆의 벽에서 쪼그려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쑨양이 화들짝 놀란다. 거실에서 기다리라니까 왜 여기서 이렇게 처량하게..아, 일단 사과부터 해야겠지?
“저기..화낸 건 미안해요..일부러 찾아와 준 사람한테..”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아,내가 과일 사왔는데!”
“아..고마워요..”
주방에 가보니 식탁위에 잘 놓여있는 과일 바구니. 바나나, 사과, 딸기 등등 제철이 아닌 과일들도 잔뜩 들어있다. 쌓여있는 과일들을 보며 즐거워하던 나에게 풉- 쑨양이 나를 보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아, 너무 애같이 보인건가.. 뻘줌해진 기분에 과일들을 내려놓고 차라도 줄까요..? 하고 물어보는데 내 얹짢은 표정을 봤는지 쑨양이 갑자기 당황한 표정으로 나에게 손사래를 친다.
“아까 웃은 건 비웃음이나 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
“그냥, 태환이 귀여워서..별 뜻 없으니까 오해말아요..”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긁적거리는 쑨양. 아, 나도 기분나빴던 건 아니에요. 라고 가볍게 웃어주고는 차를 타러 찬장을 뒤진다. 쑨양은 무슨 차를 좋아할까. 얼마 전에 어머니가 가져다주신 중국 차를 타줘야하나...음...결국 고민하다가 여름이니까 시원한 아이스티를 타주기로 했다. 찬 물에 가루를 넣고 휘휘- 저은 뒤에 얼음 몇 개를 퐁당, 떨어뜨려주고 과일과 함께 쑨양에게 가져다주니 좋다고 흐흫ㅎ대는 쑨양. 이미 알고있다. 쑨양이 나를 이미 우상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단 것 쯤은.. 그래서 은연중에서 쑨양을 뿌리친 걸까. 도무지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실실 거릴때면 그냥 내 착각인가 싶기도 하지만 나와 만나고 각자의 집으로 가려 헤어질때면 표정이 싸하게 굳어가지고는 My Park.. 안 가면 안돼요..? 강아지처럼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말하는 꼴이 영 남자 사이에 우정은 아닌 것 같고...
“괜찮아요?”
“네, 맛있어요..”
“근데 무슨 일로 왔어요..?”
“그냥..태환 보고싶어서요..”
헤헿, 웃으면서 가볍게 얼굴을 붉히는데. 역시나구나, 내가 잘못 짚은 게 아니란 걸 눈치챘다. 이렇게 눈치채버린 이상 모른 척 할 수도 없고..일단은 본인에게 물어볼까? 식탁에 턱을 괴고 쑨양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쑨양.”
“왜 그래요, 태환?”
“혹시..나 좋아해요?”
들켰다는 듯이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나를 쳐다보는 쑨양.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구나. 턱을 괴고있던 손을 식탁에서 내린 뒤 쑨양을 바라보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한데 난 동성애에는 취미없어요. 그렇다고 그걸 혐오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하여튼 내가 동성애의 대상이 된다는 건 기분이 그리 썩 좋진 않네요. 이만 돌아가주실래요?”
내가 식탁을 짚고 일어나자 쑨양은 나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황급히 나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일어나려던 나는 쑨양이 내 손목을 부여잡은 바람에 중심을 잃고 쑨양의 품으로 쓰러졌고 그 기회를 놓치지않고 나를 꽉 안고는 놔주지 않는 쑨양. 아, 왜 이러는거야 진짜. 점점 이 상황에 짜증이 나려고 하는데 오른쪽 가슴쪽에서 느껴지는 심장박동소리. 이건.. 쑨양의 심장소리구나. 두근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쑨양의 심장소리를 느끼고 있으니 좋아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한 쑨양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래도 난 동성애는..
“쑨양, 이것 좀 놔줄래요..?”
“태환..내가 어떻게 할까요..어떻게 하면 당신이 날 좋아하게 만들 수 있나요?”
“...”
“지금까지 쭉 노력해왔어요. 당신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모두 알아보고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난 당신을 위한 인생을 살았어요. 뉴스로만 듣던 은퇴소식을 코치님에게 들었을 때야 실감이 났어요.
당신을 찾아가 내 마음을 고백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그래서 많이 연습한 말이 있어요.”
“...”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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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 계속 됩니다! coming 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