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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한 고집 내세우지 말고 아침 먹고 가. ”
“ 싫어. ”
야. 가방을 쥐고 있던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 나를 부르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도 묵묵히 운동화를 구겨신었다. …그럼 신발이라도 제대로 신고 가. 작게 한숨을 쉬던 변백현이 식탁 의자에 걸린 가방을 들어올렸다. 귀찮아. 그 말을 끝으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새벽 공기는 나름 산산했다. 구겨 신은 운동화 덕분에 새끼발가락이 빨갛게 물들을 것처럼 아팠다. 치마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창이 떴다.
별 생각 없이 보이는 카톡에 익숙한 동선을 그리듯 닫기 버튼을 눌렀다. 어느덧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내가 변백현의 톡을 확인 안한지. 작정하고 씹은건 아니였다. 단지 그냥 그랬다. 나도 모를 그 어느 순간부터 내게서 변백현은 점점 멀게만 느껴지는 남이 되어버렸다. 괜찮을거야, 괜찮을까? 하던 것들이 이제는 괜찮겠지. 로 변해버렸다. 그만큼 변백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순식간에 뚝 떨어졌다.
언제부터 날 알았다고. 어린 아이 보채는 것을 달래듯이 보내는 변백현의 톡을 보다가 아예 홀더를 잠궈 뒤집었다. 네가 톡을 보내든 말든 난 상관 안 할거니까. 학교를 향해 걷는 걸음이 빨라졌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심장 박동수가 빨라져가고, 긴장되는 것처럼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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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너 괜찮아? ”
“ 어, 어. ”
“ 아침부터 운동하고 왔냐? 무슨 식은땀이 이렇게 나. ”
대충 휴지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책상에 엎드렸다. 덥지? 선풍기 틀어줄게. 친구의 호의에 고맙다고 할 겨를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몇분이 지나지않아 시끌벅적하며 반 아이들이 들어왔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정도 식은 땀 때문에 금방 시원해졌다. 반쯤 엎드려있던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 찾는거 있냐고 묻는 친구에게 고개를 저은 뒤 가방에서 공책을 꺼냈다.
“ 오늘도? ”
“ 응. ”
“ 매번 질리지도 않냐. 그것도 아침, 점심, 저녁. 꼬박꼬박. ”
“ 그러니까. 이 닦는 것도 아니고 하루 세번. 나 같으면 3일 하는 것도 지겨울텐데. ”
꺼내든 공책을 보며 보기만해도 진저리가 난다며 내 주변에서 멀어지는 친구들을 보다가 웃음이 나왔다. 공책을 펼쳐들어 까마득하게 검은 볼펜으로 채운 하루에 세번씩 써놓았던 일기장을 하나 둘 씩 넘겼다.
「 2013년 7월 29일 월요일」
오늘도 역시나였다. 그는 매번 아침마다 내게 아침밥을 차려주었고, 나는 그것을 거부하며 억지로 발걸음을 뗀다.
그후에 그는 학교가는 길에 내게 문자를 보낸다. 점심은 꼭 챙겨먹으라고. 아침에 못 먹은거 점심 먹을때 아침것까지 다 채우라고.
「2013년 7월 30일 화요일」
짜증나는 일이 생겼다. 어젯밤 그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외박은 절대 안 하겠다고 했던 그가 왜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일까.
해답은 아침까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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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30일 화요일」
그가 이야기를 해주었다. 친구집에서 저녁까지 논다는게 깜빡하고 잠이 들어 의도치않게 외박하게 되었다고. 그 말을 하며
멋쩍게 웃던 그가 걱정했냐며 사과를 깎아주었다. 나름 심심찮은 농담을 던지면서. “ 내 사과를 받아줄래? ”
필통안에 있는 검은색 볼펜을 집어들었다. 볼펜을 딸깍이며 새하얀 종이에 검은 글자를 새겼다.
「2013년 7월 31일 수요일」
요즘 들어 피곤하다. 하나둘씩 잃어가기 시작하고 이제는 그가 보내는 카톡창을 보지않으면 그의 이름조차도 까먹게 되버린다.
왜 이러는 걸까, 모든게 점점 두려워진다.
온점을 찍고 나서 공책을 덮었다. 눈가가 시큰거리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눈을 비비며 다시 뜨자 그제서야 모든것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하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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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눈이 감긴다. 꾸벅꾸벅 조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건지 내가 졸때마다 나를 작게 흔들며 깨웠던 짝도 이제는 깨울 생각이 없어보이는 것 같았다. 푹 숙였던 고개를 살짝 들어 눈을 떴다. 또 다시 시야가 흐릿해졌다. 한번 더 눈을 비비자 원래상태로 돌아왔다. 안경을 맞춰야하나…. 실눈을 뜨고 시계를 봤다. 12시 25분. 점심시간까지 5분이 남았다. 빨리 일기를 쓰고 싶어졌다. 5분이 꼭 50분 같았다. 여기까지 하자는 선생님의 말씀을 끝으로 인사를 하고 종이 쳤다. 멀리 떨어져 있던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점심 이야기를 하며 교실을 빠져나갔다.
“ 밥! ”
“ 먼저 내려가있어, 금방 뒤따라갈게. ”
“ 너 또 그거 쓰려고 그러지. ”
“ 치매 있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자꾸 기록해. ”
“ 어쨌든 빨리 쓰고 내려와. 오늘 점심 겁나 쩔게 맛있음. ”
“ 응. ”
교실문을 닫고 멀어지는 친구들을 보다가 다시 공책을 펼쳤다.
「2013년 7월 31일 수요일」
시야가 흐릿해지고, 눈이 감긴다. 앞이 뿌옇게 변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눈을 비빈다.
그제서야 모든게 돌아온다. 이것 역시도 병인가보다.
볼펜을 내려놓았다. 한숨을 크게 쉬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상단바에 떠있는 카톡 모양을 빤히 쳐다보다가 홀더를 잠궜다. 변백현과 나는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였다. 내가 초등학생 6학년, 변백현이 중학생 1학년일때 우리는 처음 만났다. 변백현 엄마의 손에 이끌려 나를 내려다보며 말갛게 웃는 변백현을 처음봤다. 이제부터 네 친오빠가 될거란다. 아무렇지않게 내 오빠라고 소개하던 변백현 엄마는 얼마못가 우리 아빠의 곁을 떠났다. 지독한 싸움 끝에 서로는 서로를 버렸고, 결국 나와 변백현도 버려졌다. 그 때 내 나이는 중학생 2학년 이였고, 변백현은 3학년 이였다. 변백현 엄마가 보내주는 생활비와 우리 아빠가 보태주는 돈을 합쳐 집을 구해 살았다. 변백현은 내가 조금이라도 더 학교에 편하게 다닐수 있도록 최대한 우리 학교와 가까운 위치에 집을 구했다. 그러면서 저는 그 멀고도 먼 길을 자전거를 타고 가야해 새벽 일찍 나가야만 제 시간에 도착 할수 있었다. 아마 그 이후부터 였지 싶다. 내가 변백현을 조금 특별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
태도는 변백현 역시 달랐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근사근 거리며 느긋하고 여유롭던 변백현이 유독 내 앞에만 서면 인상을 쓰기 일쑤고, 익숙치 않은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그것 또한 어렸을때 다정다감했던 그가 내가 그를 다르게 생각했던 그 이후부터 일것이다. 모든걸 다 알면서 피하려고 하기만 하는 나와, 다 알고서 들춰내려하는 그. 덕분에 모든것이 다 삐뚤어져 버렸다. 우애좋고 사이좋던 남매사이에서 서로를 갈망하는. 그런 죄악과 최악을 넘나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