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돗가에 도착했다.
승현선배가 2학년일대를 휘어잡고 있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닌듯 하다.
선배가 조용히 구경꾼무리에게 휘적휘적 다가가자 그들은 서둘러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제 방해꾼은 가고....영배형(그냥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이 오기전까지 저 불길이 반짝반짝한 발화물질에 닿는것을
막아야 한다. 얼마 남지 않았다.
현재 이 옥상에는 벤치 몇 개, 별 도움 안될것같은 나를포함한 4명.
벤치를 뽑아다가 불길을 막아볼까? 벤치에는 아무 처리도 안 되어 있어서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위치만 잘 잡으면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시도해 보기로 했다.
"하나,둘,셋! 하면 오장육부를 뽑아낼 기세로 들어올리세요!"
"말을 해도..."
"하나, 둘..."
나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셋!"
세상에는 의외의 것이 도움이 되는 때도 있다. 학교의 부실공사가 이럴때 힘을 발휘하다니.
벤치는 생각보다 쉽게 들어올려졌다.
벤치를 함께 움직여 불길 바로 앞으로 가져다 놨다. 열기가 확 솟구친다.
"벤치를...옆으로 눕혀요."
불길을 더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옆으로 눕혔다.
"야.."
"네?"
"이 벤치는 나무로 만든 것 아니냐?"
"그렇죠."
"나무는 불에 탄다 아닌가?"
"......"
우리들은 그 길로 바로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길은 이미 벤치를 집어삼켰고, 반짝반짝한 발화물질을 타고
우리가 있는 곳 까지 단숨에 왔다.
불에타는 고통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이라고 했던가, 우리는 그렇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악의 고통 1위를
느끼며 천천히 목숨이 사그라드는것을 느꼈다......
타악-
"억!"
"넌 이 위급한 때에 무슨 멍을 그렇게 때리냐?"
우리가 불에 타죽는 상상을 좀 해봤어...역시 벤치를 저기 갖다놓는 것은 안되겠다.
"있잖아, 벤치를 저기 갖다놓는 것은..."
"안돼!"
승현선배가 왜 자기의 의견을 무시하냐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나는 죽기싫어요 라는 눈빛으로 승현선배를 바라봤다.
"왜 야려?"
못 읽으셨구나.
그때 또 가상의 여자친구(이때의 난 이렇게 믿고 있었다.)민지와 중얼중얼 거리던 대성선배가 갑자기 생각 난 듯이 물었다.
"근데 똥영배는 어디갔나?"
"선배의 능력은..."
"염동력이란다."
어차피 한번쓰면 다들 알아채는 내 능력. 학교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능력인데, 감출 필요도 없겠다 싶어 그냥 알려주었다.
"몇 kg까지 드실 수 있죠?"
"실험해봤는데..내 몸무게 까지가 한계인것 같다."
"얼만데요?"
"58kg."
도데체 무슨 계획을 짜길래 이런걸 물어보는가..싶었다. 물어보려고 입을 여는 찰나였다.
"선배, 혹시 잡을 수 없는 무언가를 들어 본 적 있나요?"
"잡을 수 없는 무언가..?"
"네, 이를테면 불이나 물 같은...."
"아하...."
난 이 아이가 나에게 무엇을 부탁할 것인지 알았다.
"걔 이름이 영배?"
승현선배는 영배형의 이름을 몰랐다. 원체 자기 관심사 빼고는 관심가지는게 없으니 당연하...지 않잖아!
그렇게나 불러제꼈는데 어떻게 모를수가 있지? 이선배 내 이름은 알까?
"그런데 말이야..."
불길을 유심히 보던 승현이 입을 열었다.
"거의 닿은것 같은데?"
내가 쓸데없는 상상을 하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노닥거리는 동안 불길은 꾸준히 전진하고 있었고 이젠 정말 타죽게 생겼다...
고 생각했을 때였다.
"마,다비켜!!!!!!!"
뒷쪽에서 누군가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왔고 곧이어 우리 위로 시꺼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 똥영배다!"
그림자따위는 신경도 안쓰는 대성선배는 영배형을 보며 실실 웃었고, 나와 두명의 승현은 햇빛때문에 눈이 부셔 실눈을
뜨고 그 그림자의 정체를 보았다.
"...물방울?"
그랬다. 그것은 정말 어디 게임에나 나올 법 한 거대한 물방울 이었고 영배형은 자기가 들 수 있는 최대한의 물을 들고 여기에 온 것이다.
불길은 그 반짝반짝 발화물질에 닿았고, 불길이 확 일어나는것이 보일 때 쯤 영배형은 그 물방울을 거침없이
사랑의 방이었던 그곳으로 던져버렸다.
"꺼..졌나?"
58kg의 물은 생각보다 많았나 보다. 많이 연소해서 불길이 처음보다는 조금 사그라졌다고 해도 그게 한 방에 꺼졌으니.
그때였다.
"그...그럼 우리 이제 내려갈까? 빨리 가고싶네 하하하하"
갑자기 멀뚱히 있던 승현선배가 갑자기 우리들을 끌고 내려가려고 했다. 아 좀 놔봐요!
물방울을 보고있던 양갱선배(아무리 생각해도 느낌이 이상해서 그냥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는 연소되고 있는 사랑의 방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표정이 굳어버렸다. 무엇을 생각한걸까.
그 표정은 점점 이상하게 변하더니 영배선배가 불을 끌 때쯤엔 뭉크의 절규가 되어있었다.
"그...그럼 우리 이제 내려갈까? 빨리 가고싶네 하하하하"
그리고는 갑자기 우리를 끌고 내려가려고 하는데 거기에서 나는 '당황','두려움' 이 두개의 감정을 읽었다.
불도 다 잘 꺼졌고, 이제 더이상 당황하거나 두려워 할 일도 없는데 데체 왜?
"아...진짜 불 잘 꺼놓고 이게 무슨 일이야..."
"아, 무릎아파."
"형, 나 조금만 보여주세요."
"반성문을 베끼면 어쩌냐?"
지금 이게 무슨상황인고 하니 불을 껐을 때는 이미 1교시를 훌쩍 넘긴 후였고 우리는 수업을 쨌다는 벌로 교무실에
꿇어앉아서 반성문을 쓰고 있었다.
수업일수보다 수업 안들은 날이 더 많다는 승현선배는 이미 포기한건지 부르지도 않은 듯 했다. 나도 앞으로 수업
계속 안들으면 저런 특혜를 받을 수 있을까....라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무릎이 아파서 더이상은 못있겠다.
나는 반성문에 노래가사를 적어 넣었다.
그때 '혹시 그렇게 급하게 끌고 온 게 우리 반성문 쓰게 하려고?!'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맞는 것 같기도...?
"다 적었슴다-"
"아, 벌써?"
"제가 글재주가 좀 좋거든요."
제가 노래가사 쓰는데는 좀 일가견이 있습니다요.
교무실 밖으로 나가니 혼자만 쏙 빠져나간 승현선배가 서 있었다.
"어어, 혹시 자수를 하시려고...?"
"그딴거 아니야,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그래."
"고백이라면 사양이에요."
나름 회심의 조크였는데..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인 승현선배의 눈이 나를 잡아드실것 같았다. 염통이 쫄깃해지는 기분..
"노..농담이에요..."
"방과후에 나 좀 보자."
내가 뭐 잘못했나...? 왜 저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방과후에 보자는 거지?
권지용 17세, 태어나서 처음으로 종례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소원은 전혀 원치않는 방향으로 이루어 졌다.
지금은 모두들 집,또는 기숙사에 갔을 시간. 하지만 나 권지용은 지금...
모르는 사람 몇몇과 함께 음악실에 남아 신세계를 체험하고 있다.
오늘 처음 안 사실인데, 이 학교에는 특이한 제도가 있다고 한다.
우선 학생이 죄를 지으면 경고를 주는데, 이 경고를 받으면 반성문을 쓰게 된다.
그리고 또 한번 경고를 받으면 그때는 특교라는 끔찍한 처벌을 받게된다.
빡지10장을 쓰는건데 그 빡지의 내용은
1.학교 규칙 열번씩 쓰기
2.자기가 잘못한 점 10줄 이상 쓰기. 글씨체 10pt
3.만약 자신이 선생님이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지 10줄 이상 쓰기. 글씨체 10pt
4.그리고 남는 종이에는 앞으로의 각오를 쓴다. 글씨체 10pt
이 학교는 유난히 10을 좋아한다. 지금 나는 2번까지 쓴 상태고 손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지금 반성문에 노래가사를 적어서 첫날부터 특교에 온 이 학교 최고의 병신이 되어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 끔찍한걸 하느라 승현선배를 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걸 다 쓰면 9시나 10시에 집으로 가게 될 텐데, 그때쯤이면 선배도 집에 가겠지?
별 위안안되는 위안을 하면서 나는 또 10pt의 글씨를 적어가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특교도 늦으면 부가세가 있을까....라는 시덥잖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좀 많이 어디서 들어본 듯 한...
그러니까 꽤나 저음의 동굴목소리인게, 이건...
"최승현, 너는 특교도 지각이냐? 빨리 종이 들고 가서 앉아."
그것은 양갱을 입에 물고 있는 최승현이었다.
"어디갔나 했더니 여기있었구만?"
"하하하하..."
"좀 힘들지?"
"손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네요."
"나 다할때까지 좀 기다리는게 좋겠어."
예예, 받들어 모시지요, 대성선배가 진짜로 양갱 사줬나보네.
아 잠깐!
그걸 물어봤어야 했는데!
나는 피우던 담배를 끄지도 않고 바닥에 내팽게치고 바로 나갔다.
나가니 이미 그 애는 사라져 있었다. 그새 어딜간거야?
교실에 들어가니 이미 선생은 들어와 있었다. 내 전적을 아는지라 별 말은 안하고 그냥 앉으라고만 했다.
그리고 앉아서 멍하니 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었는데 엄청난 굉음이 내 귀를 때린거지.
폭팔은 사랑의 방에서 난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랑의 방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그 소리에 놀라서 한달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그 곳은 불타고 있었고 난 절규하며 주저앉았다.
하지만 양갱을 사준다는 그 말에 다시 재기했다.
그리고 이름이 뭐더라...또 까먹었다. 그 부처처럼 생긴 애가 왠 거대물방울을 들고 불을 끄러 갔는데
순간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내가 담배를 피우고 불을 껐던가...?'
옆에서 다크서클 심한애가 날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나의 세계로 빠졌다.
'꺼..껐겠지? 그래,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담배피운 경력이 일,이년도 아니고..그래 껐을거야. 아니, 분명 껐어.'
불을 껐다는 최승현과 불을 안껐다는 최승현의 싸움은 불을 안껐다는 최승현의 승리로 끝났다.
저 애를 잡는답시고 불을 끄지않고 곧바로 뛰쳐나간게 생각 나버렸기 때문에.
"그...그럼 우리 이제 내려갈까? 빨리 가고싶네 하하하하"
나는 혹시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까봐 서둘러 모두를 데리고 빠져나갔다.
그 애한테 물어볼 게 있었다는건 그 애가 반성문을 쓰러 교무실에 들어가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기다리자.....
라고 생각했는데 학주와 마주쳤다.
"야, 최승현."
"어...아, 네."
학주는 내가 무서워하는 유일한 선생. 나를 복도에 무릎꿇린 유일한 선생이다.
"너 임마, 수업빼먹고 뭐했나?"
"불을..."
"불구경을 갔다고?!"
아뇨 불을 껐는데요, 물론 내가끈건 아니지만.
"너임마, 수업뺀게 지금 몇번째인지 알아? 나도 중간에 세다가 그냥 포기했어! 지금 새학기 된 지 얼마됬다고 이래, 엉?
안되겠다. 너 오늘 마치고 특교나 가, 임마!"
기숙사에서 쫓겨나고,양갱털리고,나의 사랑의방을 내손으로 불태우고,특교까지 간다니.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인생은 가시밭길 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듯 하다.
방과후에 몰래 튀려는 강대성 놈을 잡아서 양갱5개를 기어코 얻어낸 다음에 특교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방과후에 그 놈보고 남으라고 했었는데...'
알게뭐야, 내일 말해야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문을 딱 열었는데 그 애가 앉아있더라. 인생이 무조건 가시밭길은 아닌 모양이다.
승현선배가 특교를 끝마칠때까지 기다리니 시간은 11시 반.
몸과 마음이 가장 지친다는 바로 그 11시 반이다. 고로 난 지금 흐늘흐늘 해져있다.
선배와 함께 교문을 나서는데 문득 생각난 게 있었다.
"아맞다, 선배. 오늘 왜 저보고 방과후에 남으라고 했어요?"
"아, 그건 말이야...."
선배는 답지않게 뜸을 들였다. 괜시리 나까지 긴장된다.
"그 불말이야, 내가 일으킨 것 같아."
"네?"
"내가 방화범인 것 같다."
"네?"
"내가 범인이라고."
"네?"
이 선배가 장난을 치는걸까.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왜 고해성사래?
"도데체 왜요?"
"담뱃불을 안 끄고 그냥 뛰쳐나가 버렸어."
"왜요?"
"너한테 물어볼게 있...아 맞다!"
얼씨구?
"너말이야, 기숙사 안 살지?"
"네, 맞는데요."
"그럼 집에 누구랑 살아?"
"저 혼자 살아요."
승현선배는 뒤돌아서 소리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도데체 왜 저러는 걸까.
"저기...음...얘야?"
"권지용이에요."
"그래, 지용아. 이 선배가 말이다...기숙사에서 쫓겨났어."
"알아요."
"그런데 내가 기숙사에 들어온답시고 살던 집을 처분해 버렸거든."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래서 말인데...."
갑자기 선배가 내 앞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나 너랑 같...."
"안돼!!!!!!"
"아니 왜?!"
왜냐고요? 내 촉이 말해줬어. 당신이랑 살면 내 미래가 순탄치 않다는데?
"아...음....제 집이 좀 많이 좁아요."
"상관없어."
"서,선배 부모님한테 집 하나 구해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없는데?"
"....네?"
"부모님 없어."
"...."
"2년전에 사고로 두분 다 돌아가셨어."
"...적당히 살다가 집구하면 바로 떠나세요."
왜였을까? 부모님이 없다는 말이 남일같지 않았다. 물론 나의 부모님은 서울에 멀쩡히 살아계신다.
그리고 무엇보다..
2년전에 돌아가셨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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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최승현이 권지용 집에서 사는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는데요
탑뇽이라서 그런지 왠지 수위를 넣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
뭐 그래도 정해진 내용에는 딱히 영향이 없으니까요.
그나저나 1화에 너무많은 사건들을 집어넣은듯하다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