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
(부제: 君の孤独な瞳にもう一度、僕を探すことができたら
너의 고독한 눈동자에 내가 다시 한 번 비치게 된다면)
Written by Sunday
- 아무리 오랜 시간 기다린다해도 또한 평생을 바쳐 노력한다해도 내겐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 사람이란 있는 거다.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이해한다해도 완벽하다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 된다해도, 나로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사랑이 있는거다.
언제나 아름다운 주인공을 꿈꾸는 우리.
그러나 때로는 누군가의 삶에 이토록 서글픈 조연일 수 있음에… -
<에쿠니와 츠지, 냉정과 열정사이 中>
05. 이미 지난일이란 것은 알고 있다.
약속은… 우리가 행복했던 추억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오늘도 여느 때처럼 런던은, 흐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빗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쏴아, 하는 소리만 들렸다.
무심코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 투둑, 추락하다 급히 부딪힌 빗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혔다.
아무 감흥 없이 지켜보다가 꼭 제 마음 같아서 이내 두 눈을 꾹 감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아무것도 안 보일수록 제 마음은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사람 또한, 자꾸만 선명해진다.
모든 것이 캄캄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도 그는 더더욱 선명해졌다. 한 번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를 만나고 지금까지의 시간들 동안 나는 그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4년이란 시간동안 그는 내 기억 속 저편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내 기억이자 과거였고 또한 현재였다.
사람이란 살아온 날들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소중한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나는 믿고 있다.
“ 성용아, 기성용…”
그 한마디에 용대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용대는, 늘 용대밖에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이름을 발음했다.
그 세 글자에 애정을 꼭꼭 담아, 그가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그가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했다.
그는 수줍은 표정으로 아주 조금 주저하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날 그렇게 부르고는 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나는 이불만 대충 걸쳐 한 쪽 어깨가 그대로 드러난 용대의 살결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그 느낌에 흠칫했던지 귀엽게 바르르 떨었다. 새하얀 이불로 살짝 몸을 가린 그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덕분에 나는 내가 정말 짐승인가 하는 고민에 조금이나마 합리화를 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욕정하지 않는다면 그 편이 이상하다고.
그 순수하고 깨끗한 얼굴, 그리고 몸은 이상하게 남성의 정복욕을 자극했다.
용대에 대해 말하자면, 또 그 밤에 대해 얘기하자면 길고 길지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는 늘 나를 감정에 굴복당하는 소년으로 만들었다.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 마음을 참지 못 하는 감정에 막힘없는 그런 어린 소년으로 말이다.
용대는 제 손길을 느끼다 이내 곧 원래 자신이 하던 것에 집중했다.
아까부터 먼저 일어나서 뭘 하는지 궁금했던 성용이 침대 아래에 앉아 기대어 있는 용대의 어깨에 가볍게 턱을 올렸다.
그리고 용대의 시선을 따라갔다. 용대는 흰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흐릿하지만 형태가 분명한 데생에 색을 조금씩 입혀가는 중이었다.
성용은 용대 옆에 놓여있는 붓들 중 하나를 들어 파레트에 짜여 진 물감 중에 한 색을 묻혔다.
“ 성용아… 그거 알아?”
“ 음… 응?”
나른하게 되물어 보고는 붓을 용대의 그림에 댔다. 하얀 종이에 붉은 꽃들이 피어났다.
“ 이런 말…”
작은 입술로 소리를 뱉어내며 용대는 데생을 하던 연필을 내려놓고 성용처럼 붓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파레트로 손이 가는데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무슨 색을 칠할 지 고민하는 듯 했다.
그 모습에 성용은 싱긋 웃으며 붓을 잡은 용대의 손을 살포시 감싸 쥐었다. 따스했다.
성용은 천천히 잡은 손으로 파란 색을 묻혔다. 순순히 따르는 걸 보니 용대도 마음에 든 것 같다.
여전히 서로의 손이 하나인 채로 종이 위에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용대의 말은 조용하고 천천히, 그래서 조금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 피렌체의 두오모는 연인들의 성지래.”
붉은 꽃들 옆에 파란 물방울들이 맺혔다.
“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
붓을 내려놓고 성용은 감싸 쥐었던 손을 마주잡았다. 그리고 들리는 부드러운 목소리.
“ 언젠가 나와 함께 올라가주겠니?”
“ 언제?”
“ 글쎄… 한 10년 뒤쯤?”
“ 그 때도 좋지만 그 전에 가고 싶은 걸.”
“ 그럼… 좋아. 5년 뒤쯤?”
나쁘지 않아. 그 대답을 들은 용대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용대는 마주 잡은 손을 잠시 놓으며 다시 붓을 잡아들면서 말했다.
“ 그럼, 약속해주겠어?”
성실하게 붓 터치를 마무리하며 용대가 붓을 내려놓을 때쯤이었다.
“ 좋아. 약속할게.”
성용은 제 말을 마치자마자 용대의 손을 마주잡은 채, 제 대답을 듣고는 기뻐 웃는 용대에게 재빠르게 입을 맞췄다.
살짝 놀란 여린 입술에 성용은 베시시 웃으며 조심스레 혀를 넣어 부드럽게 그의 치열을 훑었다.
어쩔 줄 몰라하던 용대가 어젯밤, 즉 방금 눈 뜨기 전까지 있던 일이 생각났는지 조금씩 붉게 달아올랐다.
그 것을 느낀 성용이 저도 모르게 흥분했는지 보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당황한 용대가 살짝 밀어내려 했으나 그것도 잠시, 이내 서서히 눈을 감고 성용을 받아들였다.
서로의 입술과 혀가 만들어내는 외설적인 소리가 조용한 새벽, 방 안을 채웠다.
성용은 감은 눈을 떴다. 테라스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비는 어느새 그쳐가고 있었다.
추억, 잊혀지지 않는 기억의 조각조각들… 이미 지난 일이란 것은 알고 있다.
약속은 그 때의 행복했던 우리의 추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잊을 수가 없어.
너를 보지 못 했던 그 나날들 속에 나는 항상 고통스러웠다.
잊을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가끔이나마 네 소식이 들릴 때면 아직도 그 때 열아홉 소년처럼 떨리는 나를 어찌하면 좋을까.
나는 과거를 쫓아가도 좋은 건지 또한 미래를 믿어도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잊혀지지 않는 과거와 알 수 없는 나의 미래 사이에서, 나는 늘 맴돌았다.
너는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약속, 그 주술적인 올가미에 묶여있는 나 자신.
그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 줄 알면서도 과거에 발이 묶인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미래에도 과거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너와 함께 한 과거를… 잊지 못한다.
캐리어를 끌고 방을 나섰다. 감독님과 동료들에겐 짧게 사정이 있다고 미리 말해두었다.
체크아웃을 마쳤다. 빗소리가 점차 작아져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언제나의 런던처럼 어두웠다.
8월 13일 월요일 예정보다 빠른 시간에, 나는 조금은 충동적으로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 이번 편도 잘 부탁해요, 댓글은 저의 힘, 이란 진부한 멘트를 날리면서 비 오는 새벽에 여러분 안녕, 다음편에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