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1
01. 황인준 나는 네가 부럽다. 액션 싸움에나 나올 것 같이 너를 지켜주던 그들이 부럽다. 같은 처지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비슷한 위치라 생각했다. 어쩌면 이런 내 빈약한 성격 때문에 여전히 지옥 불구덩이만도 못한 곳에서 주구장창 이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상처투성이인 나와 눈이 마주친 두 눈이 잊히지지가 않는다. 너의 주변인들이 부럽다. 나는 너를 동경한다. 초라하고 찌질한 나와 달리 당당한 너의 하루는 나의 하루와 달라서, 한때는 네가 되고 싶었다. 구원은 나를 발견하지 못한 덕에 초졸한 병신들은 나한테 달라붙었다. 먹잇감이 된 듯 물어뜯겼다. 처참히 당하는 와중에도 너를 동경했다. 서서히 청춘을 만들어가는 너를 따르고 싶었다. 나는 너를 싫어하기도 했다. 손을 내밀던 너는 애증 가득한 눈빛으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봤다. 나는 아직 여기 아래 처박혀 발버둥 치고 있는데 너는 참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네가 그곳에서도 역경을 부딪히고 있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환상이 무너지는 거 같았다. 그러나 너에겐 그들이 있다. 그 유치하고 오글거리는 소설 같은 햇살이 싫다. 너의 머리카락 위론 햇살이 비쳤다. 냉동된 물통을 내 볼에 대어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어렸던 나는 너를 이해하기도 싫었고, 부러웠으며 동경했다. 조금 더 나아진 상황에선 교복을 입던 그 시절 못지않은 사회가 반겼다. 너는 예뻤다. 성장 속에서 발견한 복합적인 감정은 눈부시게 부서져 너의 주위를 홀렸다. 성숙해져 상처도 본인의 것으로 만든 너는 그것조차 사랑했다. 너를 사랑하는 모습은 아름다웠고 교훈을 줬다. 나는 비로소 너를 좋아한다 인정했다. 나는 입가를 길게 당겨 웃었다. 과거의 기억은 미화된다고, 너를 나에게 투영해 수없이 자괴감이 들던 그날도, 티를 안 내려 붉히던 내 모습도 끝엔 네가 있었다. 상처투성이를 감춰내던 변하지 않은 내가 너처럼, 드디어 너를 따라 성숙해지려 한다. "황 작가님. 원고 수정해서 보내주세요." 고개를 돌려 날 보던 너는 안경을 벗었다. 두 눈 가득 찬 내 모습은 너를 닮아 있었다. 기억하고 있던 그 시절을, 애정 없던 그날의 나를. 추억할 수 있을 거 같다. 내가 널 사랑한다. 또 널 사랑한다, 내가. 02. 어쩌다 지성이가 악역 "아!" 본능적으로 기겁하며 의자를 뒤로 뺐다. 찝찝하고 미지근한 느낌이 들어 인상을 있는 그대로 찌푸렸다. 하지만 눈은 불쌍하게. 내 의지는 아니다. "아, 미안. 손이 미끄러져서." 기다란 손을 우아하게 펴고 쳐다도 보지 않는 지성이다. 누가 봐도 성의 없는 사과인데 준희는 눈을 감고 휴지를 들어 묵묵히 닦는다. 내가 참는다 중얼거리며 다 닦았을까.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눈동자를 위로 올려 노려본다. "뭐." 몇 초 정적이 흘렀을까 개미만한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 미안.." "크게 말해. 안 들리거든?"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미안.. 아니 그니까 내가 의지로 한 건 아니고.." 하여튼 너는 알잖아! 뻔뻔했다가 쭈글 댔다가 다시 적반하장. 충분히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크게 한숨을 내쉰 준희는 끈적한 손을 털어내고 슬며시 미소 짓는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지성을 쳐다본다. "아 뜨거워라." 영혼 없는 투였지만 더욱더 안절부절못해하는 게 보인다. 지성은 그 큰 키를 숨기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였다. 어떻게 너는 스포트라이트 전이랑 후랑 이렇게 다르냐. "우리가 만화 주인공이 아니라 배우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 "그치, 지성아. 그랬으면 돈 많이 벌었을 텐데." 미간을 좁히며 안타깝다는 말투로 말했다. 뭐야. 너 장난친 거야..?? "그걸 속냐. 멍충아." "또 속았어...." "근데 끈적하다 지성아." "손 씻어." "다시 악역으로 변한 거야? 역시 세서 0위 박지성 답다~!" 하지말라고..! 부끄러워하며 급식실을 뛰쳐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유치하게 큭큭 웃는 준희다. 우리는 만화 속 주인공이었다. (2) "아까는 솔직히 상처였어. 너도 인정하지?" "작가가 한 말인데..?" "근데 내가 상처받았잖아! 악역이면 다야?" 왜 갑자기 성격이 360도 돌아서 원작이랑 원점인 건데? 라고 따지면 지성은 말한다. 장난 반 진담 반이던 둘도 지금 서로는 진지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웃길 뿐이다. 와.. 와.. 너..! "너도 나 상처 주잖아!" 원래 아이들은 투닥대면서 화해하고 사랑한다니까(?) 넘어가기로 한다. 준희나 지성이나 어린 썸이었다. (3) 속닥대던 건 어떻게 들었는지, 답을 외치던 걸 미리 선수 쳐서 보드판에 쓴 지성이다. 지금이 만화 내용이라는 건 알지만 진심 가득 째려보는 준희였다. 이것만 맞추면 마이쭈는 우리 건데..! 아마 내용 속에 얄밉게 먹는 장면까지 들어가 있을 게 뻔했다. 당해온 짬밥이 몇 년인데. "너희가 보여주지 말았어야지?" 비꼬는 모습이 소름 끼치도록 얄미웠다. 준희는 가끔 생각한다. 박지성하고 내가 역할이 바뀌면 안 되는 걸까. 주인공이라면서 사이다도 없고 욕 나왔다. "뭐래!" 정신을 차린 준희가 보드를 뺏었다. 생각보다 스포트라이트가 빨리 끝난 덕이었다. 준희는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준희는 귀여운 거에 약했고, 고구마 투성이인 주인공에 너무 어울리는 이유였다. 그니까 내 말은... 귀여우니까 앞으로 사이다는 불필요할 거 같기도 하다. 선택은 본인이 한 것이었다. 03. 나재민을 찾습니다. 내가 널 좋아해왔다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무표정 사이로 미묘한 차이는 볼 수 있을까. 밖은 비가 왔지만 축축한 습기로 김이 서렸다. 나재민은 예전부터 비가 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산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도 우산은 통에 그대로지. 이제 나재민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끝까지 진심을 말하지 못했다. 나재민은 사라졌고, 시준희는 찾지 못할 것이다. - 넌 네 꿈도 안 쫓아봤니? 내 욕할 시간에 니 앞가림이나 신경 써. 나재민은 시준희를 처음 들었다. 정확히는, 목소리를. 날이 곤두서서 눈을 부라렸다. 엉성하게 긴 머리카락이 삐뚤빼뚤했다. 구석에 앉아 음침하게 손톱만 물어뜯던 시준희는 선생님의 질문에도 대답을 잘 하지 않던 아이였다. 나재민은 속으로 모자란 아이인가, 생각했었다. 음악실과 영어교과실 사이에서 차갑게 실랑이를 하던 모습을 보지만 않았어도. 인기척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자신의 몸집에 머리 하나는 차이나는 상대에게 기죽지도 않고 딕션 따박따박 꽂히게 말했다. 어쩌다 보니 뻘쭘하게 문 뒤에 숨은 나재민은 그 광경을 관전했다. 그리고 그건 얼마 가지 않았다. 변함없이 무섭게 노려보던 시준희의 등 뒤 스피커로 종이 쳤다. 한동안 눈싸움을 하던 셋은 시준희의 승으로 나머지 둘이 먼저 돌아갔다. 고개를 푹 숙이고 부들부들 떨더니 팍 가슴팍을 펴는 행동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적어도 우리 학교에서 시준희는 유명했다. 귀신 보는 소녀. -몰래 쳐다보니까 재밌냐? 나와. 나재민은 이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란 걸 알았다. 귀신을 보는 건 몰라도 시준희 자체가 귀신은 아닐까, 하는 터무니 없는 상상도 들었다. -일부러 본 건 아니야.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너, 나재민이지. -넌 시준희지. 자문자답을 하는 나재민에 머리칼 사이로 어이없다는 표정이 느껴졌다. 다 알면서 또 한 번 물어보는 저 태도에 할 말을 잃은 시준희는 멍하니 쳐다봤다. - 근데 그거 알아? -? -종 쳤는데. 란 핑계로 겨우 빠져나왔다. 이게 처음 나눈 대화였다. 시준희도 나재민을 알고 있었다.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를 닮았다. 서늘한 공기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가끔 들려오는 나재민의 목소리와 평생 시달릴 미지의 목소리는 닮았다. 평소에도 나재민을 못마땅해 하던 시준희는 고의적으로 생판 모르는 애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욕을 먹든 말든 관심도 없던 시준희의 모습에 당황한 모습이 보였다. 본인의 일을 남의 일처럼 방관하는 게 그녀의 특기였다. 텅 빈 목으로 소리를 낸다는 건 어려웠다. 이런 건 학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기본 적인 거였으니까. 시준희는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사람 취급해주는 어른도 없었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나재민을 알기 전까지는 죽을 때까지 없을 줄 알았다. 심기를 건드리려 했다가 실패했다. 때문에 그가 더 증오스러웠다. 아니, 사실 감정이 헷갈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봤자 목소리의 주인이 가랑비 사이로 그를 데려갈 텐데. 그래서 시준희는 평생 찾지 못할 나재민을 찾는다. 첫 만남을 회상하며, 04. 라벤더 꽃말의 전설을 아시나요? 저는 첫눈에 반했어요. 비록, 그가 대답이 없더라도요. 기다릴 수 있었어요. 안녕하세요, 왕자님. 저는 라벨이에요. 안녕하세요, 왕자님. 저는 라벨이에요. 당신을 사랑해요. 안녕하세요, 왕자님. 저는 라벨이에요. 당신을 사랑해.. 안녕하세요, 왕자님. 저는 라벨.... ........ -뭐 읽어? "깜짝이야.. 언제 왔어?" -방금? ㅎㅎ 그래서 뭐 읽는데 "동화책.. 아니이 어린이 도서도 아니고 청소년 도서에 꽂혀있으니까 한번 읽어본 거야." -그렇구나. 근데 나 뭐라고 안 했는데. "그럼 너는 뭐 읽는데?" 메모지를 내려놓은 제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제지를 들어 보였다. "아.. 어.. 화이팅~" 괜스레 초라해진 본인의 책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동화책 도로 가져다 놓으러 간다며 건성으로 대답하고 의자를 들여놨다. 당연하게도 더 이상 물어보지 않는다. 동화책 읽고 운 것도 들키면 엄청 놀리겠지. 서둘러 붉어진 두 눈을 꾹꾹 눌렀다. 동화책인데 왜 이렇게 비극적인 거야. 씨이.. 그리고 더 눈물이 나는 이유는 왕자가 이제노를 꼭 빼어 닮았다. 외적 이미지도 모르고, 정확한 성격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건 전장에 나가 죽는다는 거 하나 밖에 없다. 하지만 이걸 제외하고 왕자의 가장 큰 특징이 있었다. 공주가 마지막에서야 알게 되는 사실, 왕자는 말을 하지 못한다. 이제 좀 말랐을까 싶어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 일어났다. 저 멀리서 고개를 푹 숙여 공부에 집중하는 뒷모습이 보였다. 붉어진 귓불 옆으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동화의 끝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슬픔에 잠긴 공주는 왕자와의 키스 후 따라 죽는다. "안녕 제노야." 그리고, "나는 김채라야." 공주와 왕자의 시체 위로는 라벤더가 자라는데, "나는 널 좋아해." 비참한 건 내가 공주가 아니라는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