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없어? 나한테 궁금한 거. 물어봐. 다 대답해줄께. "
물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예를 들면, 부모님 중에 누굴 닮아서 이렇게 잘생겼는가.......
"점심은 뭐 먹을거에요?"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벌써 배고파졌어?"
빙그르 몸을 돌려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침 햇살이 진해지면서 점점 그의 머리카락을 투명하게 비췄고 하루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듯 매미 울음소리도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뽀얀 아침햇살과 매미 울음소리가 차례대로 내려 앉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계속 궁금해졌다.
별자리, 탄생석, 그런 거 믿는 성향인지. 저렇게 체격이 좋은데 운동도 잘하는지, 즐겨하는 지. 구두를 좋아하는지 운동화를 좋아하는지. 그 빛바랜 핑크색 후드티는 도대체 몇년이나 입은 건지. 사진찍는 취미는 언제부터였는지, 그렇게 잘 먹는데 먹는 거에 비해 살이 안찌는 체질인건지. 아재개그는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산 영향으로 생긴 습관인건지. 그가 키우다 무지개다리를 건내보냈다는 강아지의 이름은 무엇인지.....
모두 궁금해졌다.
나의 과거까지 보듬어줄 수 있을만큼 그를 따뜻한 남자로 만들어줬을 지난 사랑들까지도.
코드핑크 #03 ------------------------------------------
스산한 어둠 속에 천천히 안개가 깔리고 있었다. 사방이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발 끝을 가리고 있는 안개만 또렷하게 보이는게 더 무서워보였다.
"조심해."
축축하게 젖은 바닥이 불쾌했다. 맨발이라 보이지 않는 바닥을 더듬더듬 걸어가야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그가 앞서 걸어가며 내 손을 끌어 자신의 등 뒤로 붙여주었다.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은 나는 저절로 2인 2각 모션으로 걷게 되었지만 민망할 틈이 없었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등 뒤로 있는 힘껏 붙었다. 그가 토닥토닥, 나의 손 등을 잠깐 두드린 뒤 꼭 감싸쥐었다.
"음 그래, 어디 한번 와 봐라, 음 .... 다 오라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턱밑으로 무언가가 슥 다가왔다. 뾰족하고 긴 손톱, 하얗다못해 파란 손가락. 피투성이 소맷자락..... 헝크러진 검은 머리카랔사이로 사백안이 보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ㅏㅏ아아아ㅏ가각ㄱ"
파들짝 뛰어오른 그가 온 몸을 흔들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우어어어-!!!!!! 아씨.....허, 으아아아아아악!!!!!!!!!!!!"
"허억.... 허억..... 뭐야 여기.... 허어헑!!!!"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러게 그냥 수영만 하자니까요. 그렇게 겁이 많으면서 귀신의 집은 왜 들어가요?"
그가 하얗게 불태운 포즈로 기운없이 앉아있다가 퀭해진 얼굴을 들었다.
"공짜라길래..."
"아니, 아무리 공짜라도 그렇지."
"그리고 겁이 많은 게 아니라 깜짝 놀라서 그런거야"
"그게 그거지"
"아니라니까."
"겁이 많으니까 잘 놀라는거죠"
"아니라고... 겁많은 거랑 깜짝 놀라는거랑 어떻게 같아"
나는 안주를 집어들던 수저를 탁, 내려놓았다.
"검정색이나 까망색이나 그게 그거지. 발음만 다르지 같은 뜻이잖아요"
"그건 색깔 이름이잖아. 이건 ...."
"겁쟁이 맞잖아요."
그가 속이 탔는지 맥주잔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더니 살짝 달아오른 얼굴을 구기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아우.........진짜..."
빈 잔을 보고 따라주려던 내 손이 근처에 닿기도 전에 그가 다시 혼자서 맥주병을 들었다. 얼마 안남았던 맥주가 잔의 바닥만 적시고 끝나자 그는 맥주병을 내려놓더니, 망설임없이 그 옆에 있던 소주병으로 바꿔서 들었다. 뭐하자는거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벙떠서 쳐다보는데 그는 그대로 소주를 잔 가득 부었다. 그러더니 말릴 틈도 없이 잔에 든 소주를 한번에 다 마셔버렸다. 미쳤어, 이 사람이 술이 쎘던가? 분위기잡는 데 밖에 안다녀봐서 난 그의 정확한 주량도 모르는데. 어느정도 술이 들어갈만큼 들어간 상황이라 나조차도 조금씩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 술기운에 더 그를 놀리고 있었던 건데. 그가 다시 한 번 소주를 잔 가득 부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진짜로 한 잔을 다 마셨다. 그리고는 다 마신 빈 잔을 탁- 앞에 내려놓더니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봤다. 맨날 웃고 있던 사람이라 입을 꾹 다물고 저러니까 좀 차가워보였다.
............진짜 화났나? 어찌해야 하나 싶어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픽- 웃었다.
"겁 많은 건 너네. 너 지금 쫄았지?"
"아씨, 뭐야아- "
"너 지금 표정봐라...."
"아- 놀랐잖아요!"
"크크큭 끅끅 ㄲ....."
그가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어댔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웃음소리는 왜 또 저렇게 이상한거야.
"그만해요"
"싫은데, 끅흙흑큭 ㅋㅋㅋㅋ...."
"그만 웃어요"
"끅끅끅..."
"그만 웃으라니까"
"그러고 싶은데 웃음이 안 멈춰.... 크크끅.."
"네?"
"크크크큭 크 ㅋㅋ끅끅끄ㅡ끅......."
쿵. 그가 벌개진 얼굴로 스르륵 옆으로 쓰러졌다.
"미치겠네 진짜....."
"정신 좀 차리라고요..."
"끅끅끅 큭큭 끅...."
"지금 일부러 이러는거죠. 일부러 취한 척 하는거지!!!!!"
"아닌데... 헤헤...."
"아 진짜.........발에 힘 좀 줘봐요... 제발 ㅡㅜ"
"아 너무 웃기다아.. 끅끅..크....."
그나마 나를 집에 데려다 주다 한 잔 한게 다행이다 싶었다. 집까지 걸어서 10분 거리인데, 낑낑대며 그를 옮기고 보니 한 시간이 걸렸다. 몇 번이나 길바닥에 주저앉았던지. 겨우겨우 집에 도착하니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번 여름 휴가는 진짜.... 진짜 기억에 평생 남겠네요."
사람이 술이 들어가면 저렇게 실실거릴 줄만 알고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기도 하는 가보다. 그리고 나처럼 없던 기운이 생기기도 하고. 내가 어떻게 저 인간을 여기까지 끌고 왔는가. 기적이다. 그를 끌고 왔지만 나부터도 술기운에 어질했던 터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에어컨부터 돌리고 땀을 식히고 나니 그제야 거실 구석에 구겨져 누워있는 그를 되돌아 볼 여유가 생겼다. 나 혼자서 충분히 자리잡고 뒹굴거리던 방석 소파였는데, 그에겐 역시 좀 좁았다. 기다란 몸뚱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방석 가장자리에 거북이 머리처럼 삐죽- 나와있는 그의 다리 한쪽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욱하고 화가 치솟았다.
어짜피 취해서 기억도 못할텐데 한 대 때릴까?
"멋있으라고 몸 좋을 줄 알았지, 이렇게 힘들라고 몸 좋을 줄 알았나..."
진짜로, 다시 한 번 느꼈다. 이 사람과 있으면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이런 상황 속에 살게 되는 것 같다.
한숨을 쉬면서 보고 있자니, 그가 밤벌레처럼 몸을 동그랗게 움추리는 게 보였다. 넓은 어깨를 한껏 좁히는 폼이 에어컨 바람에 땀이 식으면서 점점 추워지는 모양이었다. 소파방석 옆에 있던 작은 무릎담요를 끌어다 그의 위로 얹어주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힘이 다 빠져서 침대가 있는 방까지 걸어갈 기운도 없었다. 그럼 기어서 가야하나? 하다가 그냥 누워버렸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있자니 이제 완전히 골아떯어졌는지, 그의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들려왔다.
"진짜로 잠들었나보네...."
옆으로 몸을 돌리고 누워 그를 쳐다보았다. 흐트러진 앞머리가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한참을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짙은 눈썹이 보였다. 가지런한 속눈썹도, 곧게 뻗은 콧대도, 단정한 입술도 보였다. 늘 아기같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이마를 드러내고보니 훨씬 어른스러워보였다. 요새 흔히들 말하는- 주차가 참 잘 된 이목구비였다.
"미술관에서 일할 땐 이런 모습이었겠네... 좀 많이 봐둘 걸. 자세히."
지금이라도 많이 봐둘까, 이렇게 정신없이 자고 있을 때, 몰래... 천천히 깜빡이며 그의 얼굴을 눈 안에 담았다. 조금만 더 보고 방에 들어가서 자야지. 그런데 점점 졸리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면서 눈 안에 그가 담기는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잘잤어?"
"응....."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따뜻한 담요속에 있자니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담요에 얼굴을 부비며 대답했다. 눈을 아직 감고 있는데도 거실 안에 햇살이 들어와 있는게 느껴졌다. 슥슥- 그의 손이 내 앞머리를 훑는 것 같았다. 음....뭐지, 이 분위기는.........
반짝, 눈을 떠보니 바로 앞에 그의 얼굴이 한가득 보였다. 고개를 살짝 뒤로 빼는데 등뒤로 푹신한 등배게가 느껴졌다. 분명 그를 소파방석 위에 눕히고 내가 바닥에서 잔 거 같은데, 어느 새 우리 둘의 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내 위로 덮여있는 무릎담요까지도. 어리둥절한 표정의 나를 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거야?"
"....나도 취해가지고 잘 기억이 안나요"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빛의 속도로 눈동자를 굴리며 옷매무새를 훑는게 보여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무일도 없었거든? 걱정마세요"
"아니.... 걱정이라니...."
그가 민망한 듯이 말을 버벅거렸다.
"아쉬워서 그러지."
"미쳤어..."
나도 모르게 그에게 주먹이 나갔다. 그가 웃으며 내 주먹에 맞아주는 시늉을 했다.
"휴대폰 배터리도 다 나갔고... 집 앞이길래..."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있어야하나. 여름이라 해가 일찍 뜨기는 하지만.... 지금이 몇시지? 이러다 지각하는거 아닌가 몰라...
눈 앞에 한가득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말랑말랑해져서, 지각 좀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 어떻게 데려온거야?"
"....."
갑자기 말랑말랑하던 심장이 콱! 돌덩이로 변신하는 기분이 들었다. 미간에 힘을 확 주며 그를 째려보았다. 그가 내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급히 다른 쪽으로 바꿨다.
"아우 속... 속 쓰려.... 넌 괜찮아?"
없는 살림을 뒤져 해장국 할 만한 것들을 찾고 있는데 그가 뜬금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거실 탁자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말했다.
"우린 친구야, 그렇지?"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가. 나는 뒤돌아보기가 민망해서 찬장속에서 찾아낸 일회용 미역국을 재빨리 뜯으며 계속 요리에 집중하는 척 했다.
"하룻밤 지내도 아무일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이"
"그... 그렇죠."
"그러니까 의미부여하지말고, 심각해지지 말자고."
"뭔소리야, 거기 햇반이나 좀 렌지에 돌려줘요."
"응? 응. 햇반... 맞아 밥먹어야지 밥."
그가 햇반을 들고 우물쭈물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요리하는 거 좋아는 하는데 잘하지는 못해서. 간맞추는게 잘 안되더라고. 그래서 내 여자는 요리 잘하는 사람 만날 거야. 넌 요리잘해?"
"어쩌나... 나도 요리는 잘 못하는데. 보시다시피 인스턴트 인생이에요"
"그... 그래 뭐."
그가 햇반 뚜껑을 휙 뜯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이거 조금만 뜯었어야 했는데;;"
"그냥 비닐로 덮고 돌려요. 어쩔수 없지 뭐."
"응...."
"그거 돌리고 국만 끓으면 되니까 좀만 기다려요"
전자렌지의 버튼을 누루고는 다시 뒤돌아 갈 줄 알았는데 그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옆에 서서 요리하는 거 감시라도 하나....... 불편해져서 식탁에 수저라도 놓아달라고 하려고 올려다보는데 그의 입술이 삐죽거리는게 보였다. .... 뭐지? 내가 잘못본건가?
"....왜요?"
"왜 이렇게 능숙한데?"
"네?"
"아무렇지 않게 왜 아침밥부터 차리는 건데?!"
"속쓰리다면서요- 집에 손님이 왔는데 속쓰리다고 하니까..."
"그럼 집에 누가 오면 무조건 다 차려줬어? 누구누구 차려줬어?!"
"뭐야 왜 갑자기."
어이가 없네?
"아니... 아니 그냥 궁금해서....뭐, 왜, 뭐,뭐,뭐,뭐, 왜 친구사인데 궁금할 수도 있지!?"
뭔가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는 그 표정에 웃음이 나는 걸 꾹 참았다. 모른척하고 즐기고 싶은 마음 반, 토닥토닥해주고 싶은 마음 반.
"요리 잘하던데..."
"응?"
"예전에 도시락 싸줬잖아요. 한강에서. 진짜 맛있었어요."
"그래?"
그가 배시시 웃음을 띄웠다.
"나는 이거... 엄마가 싸주신 반찬 몇 개 빼고는 다 인스턴트라서..."
"어유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지. 오오오... 이렇게 아침을 한상 차려먹는거 오랫만이네"
"나도 오랜만이에요. 사실 아침 잘 안먹는데. 챙겨줘야지...이 집에 처음 온 손님인데."
"정말?"
"네. 진짜인데. 저 집에 누구 잘 안데려와요. 이 집 이사오고 나서 누구 온거 처음인데."
그가 웃음을 멈추고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갸웃. 그 모습이 귀여워서 더이상 피어오르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내 웃는 모습을 보더니 그도 따라 웃음을 띄웠다.
"서로를 위해서 매일 아침손님해줘야겠네. 아니면 ...어제처럼 와서 자고 .... 아..... 그럼 동거각인가?!"
"아 진짜...!!!"
"크크큭...."
그가 신나서 수저를 들었다. 전부터 느낀 건데 그는 먹는 걸 참 좋아하고 뭐든 맛있게 잘 먹는다. 그러니 그렇게 맛집도 많이 알고 있는거겠지?
"맛있겠다아~"
우엉조림을 집어서 킁킁 냄새한번 맡고나선 오물오물 맛있게도 먹는다. 그러고보니 그는 음식먹기 전에 꼭 한번 냄새를 맡아보고 먹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또 웃음이 났다. 그와 있으면 항상 웃게 되는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채소가 뭔지 알아?"
".........."
"우엉~!"
........... 취소다. 우엉 우엉 우엉우엉 우엉~ 중얼거리며 밥을 먹는 그를 보고 있자니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밥먹을 땐 개도 안건드린다는데...."
"근데?"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학창시절 얘기를 해주셨는데... 같이 도시락 까먹던 친구를 응급실 보내셨었던 적이 있대요.... 그 말이 왜 지금 떠오르는 걸까요?"
"엉? 친구를?! 왜?!"
"열받아서 숟가락으로 친구머리를 때렸는데 숟가락이 두피에 꽂혀서요... "
"허억 살벌하네...왜 그랬대?"
"뭐... 밥을 한숟갈만 먹겠다고하고 또 퍼가고, 또 퍼가고.... 또 퍼가서..."
그러니까, 제발 적당히, 일 절만 하는게........뒷 말은 차마 못 붙이고 한숨을 쉬는데, 그가 겁먹은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고나서 오이무침을 들고는 내 앞에 들어보이며 또 물었다.
"오이가 무를 때렸대. 다음날 신문에 뭐라고 기사가 났을까?"
...........응급차가, 오늘 아침에 우리집 앞으로 올지도 모르겠는데?
"아, 그거 알아?"
얻어먹기만 할 수없다고 바득바득 우겨서 설겆이를 차지한 그는 기다란 다리를 적당히 구긴 채 어정쩡한 자세로 싱크대앞에서 뽀득뽀득 그릇 씼는데 온 신경을 집중.........
"김밥이랑 참깨가 싸웠는데, 김밥만 경찰서에 끌려갔대. 왜 그랬는지 알아?"
......하지 않고 계속 3절, 4절 이어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참기름이 고소해서......... 크크크크크크"
나는 이럴 때 쓰려고 언젠가 다이소에서 사온 비명지르는 닭인형을 조용히 손에 움켜쥐었다.
"근데 다음 날 참깨도 끌려갔어, 왜 그랬게? 라면이....."
"이게 뭐게요?"
"응? 왠 닭이야... 이거 그거네 비명지르는...."
나는 씨익 웃어주고는 그의 눈 앞에서 말없이 닭인형을 쳐댔다. 닭을쳐!! 닭을치라고!!!! 제발 닭을쳐!!!!!!!!!!!!!
"잘 먹었습니다~"
"덕분에 나도 아침먹고 출근하네요"
나란히 현관문을 나서자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 꼭 신혼부부같다. 그치?"
그도 같은 생각인지 나를 내려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집에 건조기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그래도 나는 집에 들렀다가 출근해야 할 것 같아."
"저 앞에 택시 많이 잡혀요, 조금만 걸어나가면..."
"지하철까진 데려다 주고 출근할께."
"시간 괜찮아요?"
"응 우리 회사는 괜찮아. 야근이랑 추가 근무가 많아서 그렇지, 출퇴근 시간 자체는 프리해"
"아는 사람 회사라고 막 낙하산처럼 구네?"
"뭐야?"
그가 정색을 하고 미간을 구겼지만 전날 술자리서 이미 그를 파악했기에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장난스레 혀를 내밀고 먼저 계단을 내려 가는데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집에 들어서서 그를 내려놓자 마자 휴대폰 충전부터 했던게 다행이다 싶었다. 사실, 충전 조금만 하고 바로 그의 휴대폰을 뒤져 그를 돌려보낼 참이었지만 -어쩌다보니 하룻밤 같이 자버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어져다. 그냥 잠만, 잠만 잔거다. 민망함에 괜히 고개를 홱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휴대폰을 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있었다.
"회사에요?"
"아니, 형님한테 전화가 와서...잠시만"
그가 휴대폰을 들고 오피스텔 건물 앞 화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통화해요, 커피 사올께."
"오키"
건물 맞은편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들고 나오는데, 그가 한 손을 번쩍 들어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그리고는 이야기가 길어지는지 화단의 나뭇가지들을 툭툭 끊어 정리하다가, 화단 끄트머리 쪽에 쭈그려 앉았다. 확실히 지금 직장이 편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미술관에서 일할 때와는 다른 느낌. 캐쥬얼한 옷도 자주입고, 색깔도 좀더 무채색에서 벗어난 모습이었다. 물론 미술관에서 칼같이 차리고 있는 모습도 멋있었던 것 같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좀 더 자세히 봐둘 걸. 다시 한 번 아쉬웠다. 어젯밤, 잠들어있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여사친을 원하지, 근데 다들 날 좋아하잖아. 그래서 여사친이 안돼.
-이렇게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사람친구가 생기면 얼마나 좋겠어.
그가 예전에 했던 말들이 눈치없이 머릿 속에 파고 들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이~이~?!"
응?
"뭐여? ........ 으이, 어뜩한댜~"
심각하게 고개를 젓던 그가 급기야는 벌떡 일어섰다.
"환장하겄네- "
한 손을 허리에 얹고 짝다리를 한 시시껄렁한 포즈를 취한 채로 낯선 말투를 쏟아내면서도 그는 지금 자신의 흥분한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손으로 급하게 입을 틀어 막고 그의 낯설은 모습을 계속 보고 싶었는데 눈으로만 보기엔 아까운 것 같아서 휴대폰을 급하게 찾아 들었다.
"기여, 내가 내려갈건디......"
띠링~. 그가 휴대폰 소리에 내 쪽을 쳐다보고 눈이 똥그래졌다.
"아, 형님, 제가 다시 전화할께요. 걱정마시고. "
아, 아깝다.
"뭐에요?"
"뭐가?"
"지금 사투리쓴거에요?"
"아니? 안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목소리는 또 왜 그래?"
"아니라니까."
"고향이 어디야, 그게 전라도 사투리여 아니면 충청도인가아~?"
"그만해라"
"서울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어디 사투린데에?"
"그게 왜 궁금한디 갑자기"
"아니.... 크크크... 뭔가 이상해...ㅋㅋㅋ"
"지금 놀리는 거지?"
"아니에요~ 고향이 어딘데요?"
그의 뾰루퉁한 표정이 귀여워서 소매끝을 잡고 매달려서 계속 질문을 쏟아냈다.
"어딘데? 어디서 왔어요?"
".......논산."
"아... 논산? 서울 언제 왔는데요?"
"대학 때."
"그럼 가족들은 다 거기에 아직 있어요?"
"응"
"왜 갑자기 말이 짧아졌어요? "
찌릿. 그가 입을 다물고 나를 째려봤다.
"왜에... 난 좋은데...사투리쓰는게 얼마나 매력적인데?!"
그가 의심스런 눈초리를 풀지 않은 채 계속 나를 째려봤다.
"와.... 왜 여지껏 몰랐지? 아니...전혀 사투리 안쓸 것 처럼 생겼는데 쓰니까....."
"하아... 내가 고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왜요, 계속 써요. 난 좋은데...."
휙- 앞서서 걸어가는 그를 뒤따라 총총 걸어가며 계속 웃음을 흘렸다. 그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뒤따라오는 나를 보고는 이내 걸음을 늦춰 천천히 보폭을 맞춰주었다.
"그랬구나..."
"뭐가?"
"아니, 충청도 사람들은 뭔가 점잖고, 여유롭고 그런 이미지가 있으니까..."
그는 속이 탔는지 내 손에 있는 커피를 낚아채 듯 집어가서 마셨다.
"아뜨- 뭐여 뭔...한여름에 따순 커피를..."
"푸하하하"
"그만해라"
"끄끄ㅡㄲ끄ㅡ....."
"아 뭐가 웃긴디~ "
"아니 칭찬이잖아요. 어쩜 그렇게 여유롭고 어른스러운가 했더니 충청도 사람이어서 그랬다고."
평소 안먹는 아침을 먹어서 속이 불편했는데 실컷 웃고나니 다 소화되어버렸다.
"형님한테 무슨 일 있대요?"
"밭에 두더지가 들어서 다 헤쳐놨대. 주말에 내려가서 좀 도와드려야 할 것 같아"
"아 논산에서 농사지으세요?"
"응. 귀농해서... 논산에서도 좀 변두리쪽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도와서 농사짓고 있어. "
"부모님은요?"
"우리 부모님은 공무원이시거든. 아직 일하시니까..."
"아...."
"오늘따라 질문이 많네."
그가 걸음을 멈추고 뒷짐을 지더니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 내가 그렇게 궁금해? 이제 나한테 관심이 생겼나봐?"
그러게. 신기하고 .... 오늘 따라 그가 너무 귀여웠다. 사실 어제부터 귀여웠다고 느꼈지만...
"그냥... 조금 신기해서. 이렇게 흥분할 때 마다 사투리가 나와요? 궁금해..."
그가 또 삐질까봐 말을 내뱉고 아차 싶었는데, 그는 계속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 가족들하고 말할 때만.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랑 통화할 때 심해. 부모님이 바쁘셔서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랐거든."
"아 그랬구나... 부모님이 공무원이셔서?"
"응. 부모님도 은퇴하면 농사 같이 하실 건가 봐."
"그럼 형님은..."
"형님은 나보다 먼저 서울왔고 내가 따라 올라온 거지. "
"아하, 그럼 형님도 서울에서 학교 다닌 거에요?"
"응. 그리고 취업도 먼저 했는데 서울 생활이 안맞는다고 다 정리하고 내려갔어."
"근데 형님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요?."
"그런 건 아닌데... 우리 형은 뭔가 큰어른같아서..."
뭔가 그의 가족답고, 그의 형님 같아서 수긍이 갔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
"서울 생활은 잘 맞아요? 혹시 안맞아서 형님처럼 내려갈 건 아니죠?"
"응 난 여기가 아주 좋아. 밤에도 훤하니까. 나 어두운 거 되게 싫어해."
"아 진짜? 겁이 많아서 무서운게 싫은거구나?"
그가 졌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그래, 겁이 많아서 무서운 거, 깜짝 놀라는 거 다 질색이야."
그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사투리를 쓰는 시골에서 자랐고, 생각보다 겁이 많고, 어두운 걸 싫어하고...... 그가 계속 눈을 맞추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뭐가 궁금해?"
뭐가 궁금할까.
그러고보니 나는 그의 생일도 모른다. 그건 인간관계에서 기본으로 물어보는 것 중 하나인데 여지껏 모르고 있었네. 지금 물어보려니 뭔가 미안해서, 내가 나중에 능력껏 알아봐야지 싶었다. 그럼 별자리랑 탄생석 띠 같은 것도 그 때 알게 되겠네. 잘 알아뒀다가 나중에 선물 줄 일 생길 때 참고해야지.
그리고 또 뭐가 있지.
가만히 그를 훑어보았다. 적당히 큰 키, 적당히 큰 체격의 갈색머리를 한 남자가 내 앞에서 미소 짓고 있다. 가끔씩 안경을 쓰는데 운전할 때 안쓰는 거 보면 시력이 크게 나쁜 편은 아니고. 키는..... 나보다 15센티정도 큰 것 같았다. 가끔씩 높은 힐을 신으면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지니까. 발사이즈는.... 남자들 발사이즈는 신을 벗기전엔 알 수가 없다. 신발이 다 커보여서. 나중에 신 벗는 식당가면 자세히 봐야지. 좋아하는 색은..... 핑크색과 하얀색. 자주 입는 후드티도 그렇고 휴대폰 케이스를 보면 확실해. 취미는 사진찍기. 그리고 습관은 아재개그와 식탐부리기. 동물도 좋아하는 것 같고.
"더 없어? 나한테 궁금한 거. 물어봐. 다 대답해줄께. "
물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예를 들면, 부모님 중에 누굴 닮아서 이렇게 잘생겼는가.......
"점심은 뭐 먹을거에요?"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벌써 배고파졌어?"
빙그르 몸을 돌려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침 햇살이 진해지면서 점점 그의 머리카랔을 투명하게 비췄고 하루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듯 매미 울음소리도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뽀얀 아침햇살과 매미 울음소리가 차례대로 내려 앉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계속 궁금해졌다.
별자리 탄생석, 그런 거 믿는 성향인지. 저렇게 체격이 좋은데 운동도 잘하는지 즐겨하는 건지. 구두를 좋아하는지 운동화를 좋아하는지. 그 빛바랜 핑크색 후드티는 도대체 몇년이나 입은 건지. 사진찍는 취미는 언제부터였는지, 그렇게 잘 먹는데 먹는거에 비해 살이 안찌는 체질인건지. 아재개그는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산 영향으로 생긴 습관인건지. 그가 키우다 무지개다리를 건내보냈다는 강아지의 이름은 무엇인지.....
모두 궁금해졌다.
나의 과거까지 보듬어줄 수 있을만큼 그를 따뜻한 남자로 만들어줬을 지난 사랑들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