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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Miss You

[엔시티/정재현] I Miss You (中) | 인스티즈 

 


 

 


 


 



그와 그녀는 어색한 분위기를 호텔방에 있던 와인을 마시며 풀고있었다. 그녀는 그가 있는 방에서 잠을 잘 수 없었고 그도 그녀가 있는 방에서 일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은 추억을 회상하며 술기운에 웃음이 새어나왔고 예전과 같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너 진짜 용됐다. 그거 기억나? 같이 살기시작했을 때 너 맨날 귀 빨개졌잖아.”

“그랬나? 너는 좀 얌전해진 것 같은데?”

“나를 안다고 생각했겠지만 너는 나에대해서 하나도 몰랐거든?”

“그러네. 너는 언제봐도 새로웠어.”

“너는 진짜 나같은 여자랑 같이 살아본 거! 영광으로 알아~ 니가 어디서 나같은 여자를 만나겠어?”




그녀의 말에 그는 웃음을 멈추고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웃음기 사라진 그의 얼굴에 그녀의 웃음도 멈췄고 둘 뿐인 호텔방에 정적이 흘렀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고 그의 눈을 본 그녀의 눈은 요동치고있었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그가 그녀의 볼을 오른손으로 매만졌고 그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눈을 감고 더 다가오려는 그 순간에 그의 핸드폰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그는 감았던 눈을 뜨고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고 멈춘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냥 전화받아.”

“어...”



그는 전화를 받았고, 연착이 되어 근처 호텔에서 대기중이라는 말을 하고 짧은 통화가 끝났다. 그는 머쓱한 얼굴로 와인을 들이켰고 그녀는 그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누구야?”

“그냥... 어머니...”

“아...어머니도 잘 지내시지?”

“어, 그럭저럭...”

“그거 알아? 나는 너보다 너네 어머니가 더 보고싶었어.”

“그랬구나.”

“잘해주셨잖아.”







그녀가 그의 어머니를 처음 본 것은 동거 후 처음 돌아온 설날이었다. 지난 추석에 찾아갈 가족이 없어 홀로 자취방에서 우두커니 있던 그녀가 마음에 걸려 그는 설에 그녀를 본가에 데려갔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명절 분위기를 느껴보겠다며 거절하지 않고 그의 부모님께 드릴 선물세트와 편지까지 준비해 그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그의 집에 도착한 후에 그녀의 벌어진 입은 쉽게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가 카페알바를 시작한 지도 꽤 오래 되어서 그냥 용돈이 조금 더 필요한 평범한 집안의 아들이겠거니 했는데 부촌이라고 소문난 동네에 개인주택 앞에서 어서 들어가자는 그를 보고 오지말았어야했나, 그렇게 그녀는 생각했다. 현관문이 열리자 그녀는 쭈뼛거리며 그의 뒤에 숨어 고개를 빼꼼 내밀어 맞은편에서 환하게 웃고있는 중년의 여인과 눈을 맞췄다.

그녀가 쭈뼛거리며 준비해온 선물을 내밀자, 그의 어머니는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으며 고맙다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그녀는 여태 제가 만나왔던 수많은 어른들과는 달리,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주는 어머니가 좋아서 더 환하게 웃으며 그의 본가에 발을 들였다.

그녀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녀가 6년만에 그의 집에서 얻어먹은 설날의 떡국은 눈물나게 따뜻했고 그녀의 눈에 이유없는 눈물이 고이자 그는 휴지를 건넸고, 그의 어머니는 말 없이 고기반찬을 그녀의 숟가락에 얹어주었다. 그의 본가에서 지내는 1박2일동안 그의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고, 2년정도 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은 한참 뒤에 그에게 전해들었다.

그 설날 이후로 그녀는 한 달에 한번 정도는 그와 함께 본가에 홀로 계신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말동무가 되어드렸고, 그렇게 그녀는 가족의 온기를 조금이나마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엄마가 해준 떡국 맛은 이제 기억도 안나는데, 너희 어머니가 해줬던 떡국은 설날이 올 때마다 자꾸 생각이 나.”



그는 짧은 회상을 마치고 씁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졌고 감정을 알수없는 표정만이 남아있었다.



“아, 맞다. 너 옛날에는 눈 찌를 것 같이 긴 머리만 하더니! 공항에서 못알아 볼 뻔한 거 알아?”


“그랬어?"

 
“머리 짧은 거 보니까 군대간다고 머리 민 날 생각난다.”

“그 까까머리 좋아하던 사람은 너밖에 없어.”

“아니 진짜 귀여웠어. 나는 막 수염같이 까슬까슬한 게, 만지면 기분 좋고 그러던데?”

“그렇게 말해도 삭발은 두번다시 안할거야.”

“아니 뭐, 그냥 짧은 머리가 좋다구. 지금 머리는 눈썹 보여서 좋다.”

“너는 머리 다시 길렀네.”

“나는 단발보다는 긴머리가 좋더라구.”

“나는 네 단발머리 몇 번 보지도 못했는데. 불공평한 거 아니야?”




그녀는 숨넘어가게 웃으며 당장 머리를 자르겠다며 가위를 찾았다. 그는 미쳤냐며 그녀를 말리다가 장난인 것을 뒤늦게 눈치채고 그녀를 따라 큰 소리로 웃었다.






[엔시티/정재현] I Miss You (中) | 인스티즈







*
*
*








친구인듯 연인인듯 동거를 계속하던 둘에게 큰 걸림돌이 굴러와 박혔다. 그는 23살의 늦은 나이에 입대를 하게된 것이었다. 입영통지서가 날아온 그 날, 그와 그녀는 둘만의 작은 보금자리인 원룸 자취방에서 파티라도 하듯이 상다리가 부러지게 한 상을 차리고 술병을 까기 시작했다. 애써 만든 안주는 줄어들지 않고 바닥에 뒹구는 술병의 갯수만 늘어나던 그 때, 그는 술김에 그의 진심을 슬쩍 내보였다.



“여주야. 나 군대가면 연애할거야?”

“음... 글쎄?”



김빠지는 그녀의 애매한 대답에, 그는 냉장고에 술병을 하나 더 집어오다 그녀의 뒤에 앉아 그녀를 품에 감싸안았다. 그녀도 그런 그를 딱히 말리거나 밀쳐내지 않고 그저 품에 안겨 갇힌 채로 그의 어깨쯤에 머리를 부볐다.




“여주야. 우리는 무슨 사이야?”

“음, 글쎄?”



장난기 가득한 그녀의 말에 그는 그녀의 귀을 살짝 깨물고 그 귀에 속삭였다. 나 아직도 너 좋아하면 안돼? 그녀는 또 웃으며 또 글쎄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무방비한 상태로 안겨있던 그녀를 간지럽혔고 그녀는 자지러지게 웃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는 그녀가 누운 그 위에 올라타 계속 그녀의 허리를 간지럽혔고 그러다 잠깐 그의 손이 멈추자,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며 사랑스럽게 미소지었다. 그는 거기서 더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녀는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밀려들어오는 달디 단 입맞춤에 순응하고 두 팔로 그를 안아 밀착시켰다. 그렇게 술김에 보낸 둘의 첫날밤은 애틋하고 달콤했다.






그 다음 날 그가 늦은 아침 눈을 떴을 때 침대 위에 그녀는 없었다. 집안 그 어디에도 그녀의 흔적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 집에 없었던 사람처럼. 그는 이제서야 제 마음을 전했다고 생각했기에, 그녀가 사라진 후에 허탈함과 원망, 후회에 절여졌다. 그녀는 그새 카페알바도 그만뒀고, 그의 전화는 차단이라도 한 건지 받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그만둔 것을 확인하고 그는 곧바로 군대에 간다며 알바를 그만뒀고, 3일정도를 술로 지새우다 4일째 되는 날 그녀가 수업을 듣는 강의실까지 찾아갔다.




그녀는 그를 마주치자 한숨을 푹 쉬고 시계를 보고 또 한번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말없이 주인에게 버려진 강아지처럼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고, 그녀는 그런 그의 손을 잡고 학교 밖으로 빠져나갔다.



“너 수업은...”

“그럼 너 버리고 수업 들으러 갈까?”

“......”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고 그녀는 또 한숨을 쉬고 그를 한적한 카페로 데려갔다.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잔을 대충 주문하고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로 마주앉아 10분 정도를 말 없이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그녀였다.




“실수였어. 그러면 안되는건데 우린 선을 넘었어.”

“여주야...”

“알잖아. 몰랐다고 말하지마.”

“내가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제발... 떠나지만 말아줘...”

“재현아, 나는 무서워. 내 거지같은 인생에 너까지 끌어들이고싶지 않아.”

“그런 말 하지마.”

“네 옆에 계속 붙어있었던 건 순전히 내 욕심이었어. 미안해.”

“......”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야. 행복했으면 좋겠어 재현아. 잘지내.”




그녀는 짧은 몇마디의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일어서는 그녀의 손목을 황급히 붙잡고 가지말라며 매달렸다.




“이거 놔.”

“너 지금 어디서 지내는데? 갈 곳도 없잖아 여주야.”

“내가 알아서 잘 지낼게.”

“내 집이 아니라 ‘우리집’이잖아.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데, 나는 네가 개고생하는 꼴은 못보겠어.”

“정재현.”

“안좋아할게. 내가 노력해볼게. 집으로 돌아와 여주야.”

“......”




그녀는 눈을 두어번 깜빡이고 붙잡는 그의 손을 떼어냈다. 그는 닿았던 손이 멀어지자 상처받은 눈망울로 그녀를 올려다봤고,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조용히 다시 의자에 앉았다.



“진짜 웃기다. 집주인이 내쫓고 식충이가 비는 게 정상 아니야?”

“집주인이 미쳤나보네. 어디 나사가 하나 빠졌나봐.”




어처구니가 없어 새어나온 콧웃음이었지만, 그녀가 그렇게라도 웃으니 그는 속도 없이 그저 기쁘기만 했다.




“그래. 그래서 너는 뭘 어쩌고싶은 건데?”

“나는 이제 곧 입대야.”

“응. 알아.”

“내가 군대에 있는동안, 우리집을 지켜줘. 제대한 후에는 네가 나간다고 해도 붙잡지 않을게.”

“알겠어. 나도 내년이면 졸업이니까... 염치없지만 조금 더 신세질게.”




그는 분명 그녀에게 몸도, 마음도, 심지어 집마저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뭐가 그렇게 좋은지 예쁜 보조개가 움푹 파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밷는다고, 그녀는 웃는 얼굴로 꼬셔도 소용없다고 말하며 눈을 흘기면서도 피식피식 작은 웃음을 흘렸다.





첫번째, 그리고 두번째 동거의 시작은 모두 그가 그녀의 짐을 들어주었지만, 세번째는 그의 도움없이 조용히 시작됐다. 그가 입대하는 날까지 한 집에 살면서도 전과 같지 않게 데면데면했으며 불필요한 일상적인 말들이 오가는 법이 없었다. 작은 자취방은 둘만의 보금자리에서 그저 ‘집’으로 전락해버렸다. 편안함은 사라졌고 오묘한 간장감과 신경전만이 남았다. 그가 처음으로 불필요한 이야기를 꺼낸 건 그의 입대를 3일 남긴 밤이었다. 뒤숭숭한 기분에 잠이 오지않아 뒤척이기만 하던 그는 눈을 감은 채였지만 어쩐지 침대 위의 그녀 역시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듯한 움직임이 보였다.




“여주야.”

“......”

“자?”

“아직.”

“내일 같이 미용실 갈래?”

“왜?”

“이제 머리 밀어야지. 맨날 내 짧은 머리 보고싶다고 했었잖아.”




그녀는 시원하게 푸스스 웃으며 대답했다.



“머리 좀 자르라니까 삭발?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니야? 하여간 정재현 가끔 이상한 데서 엉뚱해.”

“충격요법이야. 삭발이라도 해서 웃겨야지 니가 내 생각할 거 아니야.”

“음... 근데 하나도 안웃길 거 같아. 눈썹이 잘생겨서 아마 삭발도 잘어울릴걸?”

“와... 김여주한테 잘생겼다는 얘기 2년만에 들어보네.”

“왜? 너 잘생겼는데? 내가 얘기 안했어?”



재현이 착하지, 잘생겼지, 돈도 많지, 너랑 결혼할 여자는 아마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거야. 그렇게 덧붙이는 그녀의 말에, 그는 수많은 말들을 내뱉으려다 삼켰다. 왜 그게 네가 될거라는 가정은 없는지, 이런 나를 너는 정말 한 번도 욕심낸 적이 없었는지.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지만 대화를 이어나간다면 또다시 선을 넘을 것만 같아서, 그는 입을 닫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려 자신을 숨겼다. 그녀가 그를 쳐다보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마음을 감추듯이 이불 속에 제 몸을 감췄다.



이불 속에서 뒤척이던 그는 어스름한 새벽이 오고나서야 잠이 들었고, 그 결과로 해가 머리 꼭대기에 올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외출준비를 마친 그녀가 자고있는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려 깨웠고 눈도 다 뜨지 못한 그를 화장실에 밀어넣었다. 그는 툴툴거리며 오늘이 지나면 2년동안 만질 일 없는 조금 긴 머리에 샤워기를 갔다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자, 그녀는 헤어드라이어를 손에 쥔 채로 바닥에 앉아, 키우는 개를 부르듯이 제 앞을 툭툭 쳤다. 그는 조금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받잡고 그녀가 부르는 대로 그 앞자리에 앉았다. 앉은 키 차이 덕분에 그녀는 무릎을 꿇고 반쯤 일어서서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털며 바람을 넣었다. 위잉위잉거리는 드라이기의 소음을 배경음악삼아 그는 그녀가 머리를 만져주는대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엔시티/정재현] I Miss You (中) | 인스티즈







그의 머리가 바싹 마르고 나서, 그녀는 헤어드라이어의 코드를 뽑아버렸고 여태 보였던 웃음 중 가장 밝은 웃음을 보이며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귀여워. 강아지같아.”

“그럼 네가 키울래?”

“어디서 미인계야?”

“내가 미인계 쓰면, 넘어오나?”

“어허! 귀엽다고 다 키우면 온 세상 털복숭이 친구들 내가 다 키웠지!”




그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밉지 않게 그녀를 흘겨보고 아직 습기가 남아있는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마치 창과 방패처럼 투닥거리며 도착한 미용실에, 그는 이제야 입대를 실감하듯이 조금 굳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어느 분이 머리 하실건가요?”

“아, 저요.”

“아니요, 둘 다요.”

“네, 이 쪽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너 머리 자르게?”

“응. 너 혼자 자르면 뭔가 부끄러워할 거 같아서 특별히 의리로 같이 잘라줄게!”

“삭발...?”

“정재현 진짜 미쳤나봐ㅋㅋㅋㅋ 그 정도 의리는 없거든? 그냥 단발로 자를거야.”



그녀는 단발을 해본 적은 없는데 잘 어울릴지 모르겠다며 허리춤까지 오는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단발도 잘 어울릴꺼야. 걱정하지마.”

“보통 이럴 땐 기른 게 아깝다고 말리지않나?”

“내가 또, 보통사람은 아니지.”




둘은 마주보고 키득거리다, 각자 자리로 안내하는 직원에 의해 세 칸 정도 떨어져 각자의 거울 앞에 앉았다. 그는 아침과 엇비슷하지만 다른 소리를 내는 바리깡에,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았고, 그녀는 서걱거리는 가위 소리를 들으며 바닥으로 잘려나가는 긴 머리들을 눈으로 쫓았다. 둘의 이발은 거의 동시에 끝났고, 남은 머리카락을 털고 의자에서 일어난 둘의 눈이 마주쳤다.




“잘생긴 사람은 삭발을 해도 잘생겼네?”

“너도.”

“뭐? 잘 안들려.”

“예쁜 사람은 단발을 해도 예쁘다구.”




얼른 계산하고 나가자며 뒤돌아 계산대로 걸어가는 그의 귀가 붉었다. 그의 붉어진 귀를 보며 그녀도 같이 가자고 웃으며 뒤쫓았다.



“근데 너 그러고 나갈거야? 사람들 다 쳐다볼걸?”

“아... 모자 안챙겨왔다!”

“덜렁아, 그래서 내가 하나 챙겨왔어. 짜잔!”




그녀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그가 본 적 없는 하얀 볼캡이었다. 그가 제 모자가 아니라며 놀란 눈을 하자, 그녀는 웃으며 짧게 깎인 머리 위에 볼캡을 얹었다.



“입대선물이야.”

“진짜?”

“잘 어울릴 줄 알았어.”

“이런 걸 언제 준비했어?”




그는 뜻밖의 선물에 어벙벙한 듯이 입을 벌리며 그녀를 쳐다봤지만, 기분이 좋은 듯 입꼬리는 자꾸만 올라갔다. 그녀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알바간다 한 마디를 하고 아직도 입을 벌린 채로 그 자리에 서있는 그를 두고 미용실을 빠져나갔다. 그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계산을 기다리는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어 이미 떠난 그녀의 몫까지 결제했다.





그는 입대를 축하한다며 이른 시간부터 불러낸 친구들과 함께 호프집에서 소맥을 말았다. 숟가락으로 잔을 쿵- 내리치며 소맥을 좋아하는 그녀를 생각했다.



“너는 무슨 군대를 4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가냐? 봐, 우리 다 제대할 동안 계속 뻐기더니 이제 나이 먹고 고생 좀 하겠다?”

“하하...어쩌다보니까 이렇게 됐네.”

“정재현 좋아하는 사람때문에 계속 군대 미룬 거 아니였어?”

“좋아하는 사람?”

“걔 있잖아. 김여주!”

“여주랑 사귀는 거 아니였어? 같이 산다면서.”

“아, 사귀는 건 아니고...”




그 역시 그녀와 본인이 어떤 사이인지 알지못해 뒷 말을 삼키고 목구멍에 술을 들이부었다. 동거 사실을 알고있던 친구들은 사귀지않는다는 말에 놀라 목소리가 커졌고, 동거 사실을 몰랐던 친구들은 같이 산다는 말 한마디에 목소리가 커졌다.



“헐리웃이야 뭐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순수하게 주거생활을 공유...”




당당하게 말하려했지만, 단 한 번의 실수, 그녀의 말에 의하면 선을 넘은 그 밤. 그 날의 기억과 사라진 그녀를 기다리던 기억이 뒤섞여 생각이 물드는 바람에 말이 뚝 끊겼다.




“왜 말을 하다말아? 와 진짜 켕기는 거 있나봐?”

“아무튼 그런 거 아니야. 얘는 나 절대 안만나.”

“그럼 정재현 너는?”

“뭐?”

“너도 걔를 그냥 순수한 하우스메이트로 생각하냐구.”




호기심인지 친구를 향한 걱정인지, 의도를 알 수 없는 물음에 그는 한숨을 쉬고 인정했다. 그녀를 좋아한다고.



“나는... 좋아해.”

“너 진짜 미쳤구나?”

“그건 아니지! 너 걔한테 이용당하는거야 재현아.”

“걔는 나한테 같이 살자고 한 적 없어. 내가 그랬어.”

“너 진짜 그러다 걔한테 홀려서 인생 말아먹어.”

“군대가서, 마음 접을거야. 그러기로 마음 먹었어.”




친구들이 뭐라 말을 덧붙이기 전에 그는 절반정도 차 있는 소주병을 들어 입에 붓기 시작했고, 죽으려고 환장했나며 말리는 친구들의 손에 의해 그의 입에서 푸른 병이 멀어졌다.



“여주 얘기 더 꺼내기만 해. 여기 있는 술 다 마시고 콱!”

“알겠어 알겠어. 그만하자. 그만.”





그는 만취 상태로 그녀가 기다리고있을 집에 가지 못하고 가위바위보에 진 친구 하나에게 질질 끌려갔다. 친구의 자취방 바닥에서 깨질듯한 머리를 붙잡고 일어나 확인한 핸드폰에는 그녀에게 온 부재중 전화가 가득했다. 그는 펄쩍 뛰며 일어나 아직 꿈나라인 친구에게 인사도 없이 현관문을 쾅 소리나게 닫고 뜀박질을 시작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헉헉대며 들어간 그의 집에 그녀는 없었고 책상 위 쪽지 하나가 놓여있었다.




재현아. 이모가 쓰러졌다는 연락이 와서 병원으로 가봐야 해. 퇴원하실 때까지 병원에서 지낼 것 같아. 내일 입대하는데 배웅 못해줘서 미안해. 우리 집은 내가 잘 지키고있을게. 잘 다녀와.



그는 그녀가 입대선물이라고 사준 흰 볼캡을 신경질적으로 벗어던지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침대를 그녀에게 양보한 뒤로 누울 일 없었던 그 자리에 오랜만에 누웠지만 푹신한 침대는 척추뼈 하나하나를 누르는 듯한 압박을 주었다. 그는 한쪽 팔로 이마를 가리고 남은 한 손으로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음성메세지는 1번...”




하루가 끝나고 하늘에 별과 달이 뜰 때까지 몇번이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입대 직전까지 그녀에게서 흔한 카톡이나 문자 메세지 하나 받을 수 없었다.










그는 훈련소에서 끝내 오지 않은 그녀의 편지를 기다렸지만 야속하게 그녀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애써 갈기갈기 찢기는 마음을 뒤로하고, 편지를 쓸 기회가 있으면 어머니를 위한 편지 한 장과 그녀를 위한 편지 한 장을 써내려갔다.



여주야나
는 잘 지내고있어. 생각보다 잘 적응하는 거 보면 군대 체질인가봐. 훈련소에서 살이 더 찐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아. 답장 안할 거 알지만 그래도 시간 나면 한 글자라도 좋으니까 편지 좀 써주라! 너 안좋아하기로 노력한다고 했는데 이러다 진짜 너를 아예 다 잊어버릴 것 같아ㅠㅠ 할 말은 많은데 시간이 부족해서 다 못쓰겠다. 나는 잘 지내고있으니까 너도 잘 지내고있어야돼!

ps. 우리 집 잘 지키고있지?




훈련소에서의 한 달 동안 야속하게도 그녀는 착실히 그의 편지를 무시했고, 그는 그런 그녀에게 상처받은 마음으로 자기 전 남몰래 눈물 한 방울 뚝뚝 흘릴 줄 알았지만 훈련소 생활은 그녀에게 잘지낸다며 보낸 편지의 내용과는 다르게 고단했기에, 취침시간 딱딱한 배게에 머리를 맞대고 눈을 감으면 졸음이 밀려왔다. 그는 그렇게 그녀에게서 정을 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눈코 뜰 새없이 지나간 4주 끝에, 수료식이었다. 같은 군복, 같은 베레모를 쓴 수많은 까까머리들이 가득찬 강당에서, 그는 스탠드에 아는 얼굴을 찾기위해 눈알을 열심히 굴려봤지만 수많은 인파 속에서 얼굴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수료식 일정이 끝나고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려 움직이는 전우들 사이에서, 그는 우두커니 서서 제 발만 바라봤다. 그의 시선 안에 구두 두 켤레가 또각또각 걸어오다 멈췄고, 고개를 들자 그의 어머니와 그녀가 있었다.



“정재현 살 쪘다면서! 거짓말이네?”

“재현아 고생 많았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아...”



제 어머니와 팔짱을 끼고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알수없는 여러가지 감정이 밀려들어와 그의 눈으로 빠져나갔다.



“야... 너 울어? 어머니 재현이가 진짜 고생했나봐요. 진짜 안우는 앤데...”

“김여주 너는 편지 한 장을 안하고 수료식에는 또 왜 왔어.”

“재현아, 여주가 네 걱정 많이 했어. 요 며칠동안 엄마랑 매일 전화하면서 수료식 일정도 설명해주고...”

“아... 진짜.... 고마워. 김여주.”

“뭐야... 울지마! 너 계속 울면 너 훈련소에서 왕따 당한다고 국방부에 신고해버린다?”




그는 군복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아내고 언제 울었냐는 듯이 씩씩하게 두 여인의 손을 잡고 강당을 빠져나갔다. 그는 제 우는 얼굴을 신경쓰느라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는 오후 일정이 있어 아들의 얼굴을 몇분도 채 보지못하고 홀로 서울로 돌아가야했고, 그의 옆자리는 그녀가 지켰다. 보통의 훈련병들의 수료식을 흉내내겠다며 그녀는 예약한 숙박업소에 그를 데려가 온갖 배달음식을 먹이며 그를 즐겁게 해주려 노력했다.




“재현아 내가 콜라 두 병이나 사왔다? 내 주변에 군대 갔다온 애들이 그러는데 탄산음료가 제일 땡긴다면서? 이거 다 안마시면 내가 너 복귀 안시킬거니까 트름 나와도 다 마셔야돼!”

“또 어떤 남정네한테 주워들었어.”

“뭐, 내가 누구한테 들은 게 중요해?”

“당연하지. 내가 아직 너 좋아하니까.”

“너 나 안좋아하겠다 했잖아!”

“어. 김여주한테서 정 떼는 중이야. 안친한 동기도 한 편은 보내주는 편지를 누가 한 번도 안써줘서 아주 착실히 정 떼고있어.”

“으유... 얼른 먹기나 해.”




그는 머리를 자른 날보다 아주 조금 길어진 그녀의 단발머리 끝자락을 보며 치킨을 우걱우걱 씹어넘겼다. 열심히 음식물을 삼키는 그를 보며 그녀는 아이구 잘먹는다 우리 재현이 하면서 까슬까슬한 머리를 쓰다듬었고, 그는 그 손을 내쳤다.



“마음 줄 거 아니면 이제 이런 것도 하지마.”

“그래~ 알겠다! 미안미안. 두상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만져버렸네?”




그가 부루퉁한 얼굴로 치킨, 피자, 족발을 먹을동안 그녀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졸업논문으로 교수님한테 깨진 이야기, 알바 중 잘생긴 남자가 번호를 물어본 이야기, 배가 아파서 토익시험을 말아먹은 이야기. 그는 그녀가 남자에게 번호를 줬는지 물어보고싶었지만 그 말은 콜라와 함께 삼켜버렸다.



“진짜 세상이 핑글핑글 도는데! 응시료가 아까워서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에는 퇴실했잖아.”

“병원은 갔어?”

“어. 스트레스성 위염이래. 밥 잘 챙겨먹고 쉬라는거야. 근데 뭐 내가 꼬박꼬박 밥 챙겨먹고 쉴 시간이 어디있어? 그 뒤로 그냥 약이나 먹으면서 참고있어.”

“아무리 바빠도 밥은 잘 챙겨먹어야지.”

“사먹으면 돈이고, 해먹으면 시간이야. 나한테 둘 다 없는 거 알면서.”




먹먹하게 목이 메어 입안 가득 밀어넣은 음식물을 삼키기 힘들었다. 덩어리 채로 식도에 꾸역꾸역 밀어넣고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녀가 애초에 한 명이 먹을 수 없는 과한 양을 사왔지만 곧 체할 것 같은 느낌에 그마저도 잘 먹지 못했다.








차가 막힐 것을 예상하고 한 시간 일찍 훈련소에 복귀했다. 공터를 말없이 빙빙 돌다, 그가 그녀에게 한가지 부탁을 했다. 업혀달라고. 구두를 신어 발이 아플 그녀가 걱정되지만 남은 시간을 그녀와 걷고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녀는 제 앞에 무릎을 굽히고 내놓은 등을 폭 안아버렸다.



“나 발 하나도 안아파 재현아. 그리고 누가 보면 유난떤다고 할걸?”

“업히라고 하면, 좀 업혀.”




그는 그녀가 떨어지기 전에 그녀의 다리를 두 팔로 감싸고 번쩍 일어나버렸다. 그녀는 내려달라고 그의 넓은 등짝을 때렸지만 그는 말 없이 그녀를 업은 채로 공터를 걸었다.



“정재현 너는 세상이 다 니 맘대로지?”

“아니. 하나도 내 맘대로 되는 게 없어.”

“너는 왜 맨날 사서 고생을 하고그래. 훈련 받느라 힘든 건 넌데 왜 니가 날 업어.”

“그냥 너 업어주려고 훈련 받은거다 생각해.”

“치... 그런 게 어딨어?”

“여기.”

“너 진짜 웃기는 애구나?”

“이제 알았어?”




말로는 서로 투닥거리며 쏘아댔지만 그는 그녀가 흔들리지 않게 팔에 힘을 주었고, 그녀는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게 그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조금은 풀어진 듯한 둘의 사이에, 그는 자대배치를 받고 이등병에서 일등병이 될 때까지, 작은 희망을 마음 속에 품고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녀가 답장을 하지 않아도 꼬박꼬박 편지를 썼고, 가끔 전화를 할 수 있는 날이면 어머니보다 그녀에게 먼저 전화를 했다. 그가 전화를 걸면, 그녀는 열 번 중 세 번은 받아주었고 그는 일곱 번 울면서도 세 번은 웃었다. 매정한 그녀였지만, 그가 휴가를 나올 때면 꼬박꼬박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렸다. 그렇게 마음을 키우지도, 버리지도 못하던 그가 결심했던대로 마음을 접은 것은 그녀가 취직을 한 이후였다. 그녀는 바쁘다며 열 번 중에 세 번은 받아주던 전화를 더이상 받아주지 않았고 그의 마음은 썩어들어갔다. 먼저 사회인이 되어버린 그녀를 향한 풋내기의 투정이라고 부정했지만 그녀에게 서운한 마음이 눈덩이를 굴리듯 불어나 겉잡을 수 없었다. 




내가 군대에서 빡빡이들과 질리도록 고생하는 것에대해 그녀는 아무 관심이 없다. 결국 우리 사이가 특별하다는 건 오롯이 다 내 착각이었다. 그래, 그녀가 바라는 대로 깔끔하게 마음을 접을 것이다. 입대 후 1년이 지나서야 그는 입으로, 머릿속으로 의미없이 하던 결심을 그제서야 실행했다. 




결심은 했지만 절절하게 연모하는 마음을 하루아침에 뚝 떼어 버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연인이 아니더라도 이제 그의 삶에서 그녀를 제외하기엔, 둘은 너무 특별했다. 제가 없으면 그녀의 삶은 더 피폐하고 외로워질 것을 알기에, 그는 마음을 접으면서도 친구, 가족이라는 관계는 끊을 수 없었다. 어느덧 군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녀에게 보낼 편지도 그냥 이유없이 계속 써내려갔다. 



그녀가 가엽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면서 제가 보낸 편지 한 장을 읽으며 조금이라도 덜 외롭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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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아이고...둘 다 너무 마음 아파요ㅠㅠㅠㅠ여주 마음 편히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행복했으면...
4년 전
독자2
여주 사정 알고 짠했는데ㅠㅠ재현이도 짠해요...
4년 전
독자3
후에에엥ㅜㅠㅠ 진짜 뭐에요ㅜ 너무 가슴 아파ㅜ 내가 이별한것처럼 아파요ㅠ
4년 전
독자4
오와 .. 필력 진짜 글이 너무 잘 읽혀요 ㅠㅠ 흐엥 슬프네요 ㅜㅠㅜㅠㅠㅠㅜ
4년 전
독자5
진짜 글이 술술 읽혀요...몰입감 장난아니에여..ㅠㅠ둘이 잘 됐음 조캣다ㅜㅜ
4년 전
독자6
필력 진짜 무슨 일인가요 최고...
4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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