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용이 씻으러 들어감과 동시에 나는 옷방으로 들어갔다. 쑨양의 옷이 아무렇게나 내팽겨쳐져있다. 에고, 너무 심하게 말았나? 하면서 옷을 잘 정리하는데, 옷을 펴려고 펄럭일때마다 쑨양의 채취가 아찔하다. 좋았다. 그러나 그리워하는 마음도 같이 커져갔다.
" 아, 미치겠네. 진짜. "
결국 그의 옷에 얼굴을 묻고 누웠다. 지독히도 편안했다. 괜스레 웃음이 났다.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였다.
" 아, 박태환 진짜... 큭큭. "
한심하다, 진짜.
" 야, 일어나. "
" 으...응... "
" 야, 박태환. 일어나~. "
" 아우... 좀... 자는데! "
그만 좀 자! 배고프다고! 하면서 내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기성용. 아 쫌! 하면서 신경질을 내는 날 보며 씩 웃는다. 웃음으로 넘어가려하지 말라고 신경질을 냈다.
" 하핫, 됐고. 밥 먹으러 가자. "
" 저번에 밥 해줬잖아? "
하자 녀석은 씩 웃으며 ' 언제까지 구두쇠처럼 굴거냐. ' 하면서 내 이마에 딱밤을 먹인다. 장난이었는지 정말 살짝 대고 떨어져서 전혀 아프지 않았다.
" 근처에 맛있는 스파게티 집이 생겼대. "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쑨양이랑 내가 갔던 곳은 아니겠지? 하면서 설마 했지만,
" 이름이 특이하던데. 그냥 ' 스파게티 ' 더라고. "
아, 이런 망할 예감은 왜 한 번도 틀린적이 없는지. 오랜만에 스파게티나 먹자며 신난 기성용에게 ' 거기는 싫은데. ' 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를 꽉 깨물고
" 그래, 가자. "
해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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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양은 태환이 바로 보이는 창가 쪽에 차를 세워두었다. 멍하니 태환을 바라보았다. 용케 여기에 찾아오는군, 하며 중얼거렸다. 아직 그에게 이 장소는 '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소 '가 아닌 듯 했다. 그나저나 착각일까? 그는 얼마 전보다 얼굴이 많이 창백해져 있었다. 나 때문인가? 괜히 걱정스러웠다. 표정도 별로 생기있지 않다. 그에반해 기성용은 좋아서 떠들며 스파게티를 맛있게 먹는다. 그가 떠들어 댈때마다 태환은 그저 쓴웃음만 지으며 스파게티를 깨작거린다.
저것도 뽀모도로일까? 첫 만남에서 그가 뽀모도로와 토마토가 같은 뜻인 줄 몰랐던 그의 바보같은 표정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쑨양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 어..? "
이 쪽을 바라보는 태환과 눈이 마주친 듯 했다. 차의 앞 유리엔 코팅을 매우 두텁게 해서 겉에서 볼 수 없을거라고 이 차를 처음 받을 때 들은 것 같았는데..
아, 확실히 착각은 아니었다. 분명히 그와 눈이 마주쳤고..
지금도 눈을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다.
' 쑨양! '
그의 입 모양이 읽혔다. 내가 보인다는 건가?
쑨양은 주차장을 나서기 위해 급하게 후진을 했으나, 역시 차가 너무 막혀 차도로 나갈 공간이 없다.
" 쑨양!!!! "
태환이 언제 나왔는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게 들렸다. 쑨양은 ' 젠장! ' 하고 읊조리며 핸들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클락션이 크고 길게 울렸다. ' 또 결국 이렇게 되잖아.. ' 하면서 자책했다.
" 쑨양.. 저 그쪽으로 가도 돼요? "
하지만 이미 쑨양에게 조심스레 한 발자국씩 다가가고 있는 태환이었다. 쑨양은 아직 까지 자신을 좋아해주는 듯한 그의 모습에 왠지 안심이 되긴 했지만, 그 모습을 충분히 보기힘들었다. 마음같아선 그냥 차를 박차고 나와서 먼저 한달음에 태환에게 다가가 꽉 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태환에겐 기성용이라는 자신보다 더 좋은 친구가 있었고, 자신은 어차피 일주일 후에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 아뇨, 오지 마세요. "
결국 차에 내려서 태환의 행동을 저지시켰다. 태환은 울상이었다. 다시 만날 땐 맨 먼저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하고싶었는데. 다시 날 믿어주면 안되겠냐고 묻고싶었는데. 적어도 이런 경우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 쑨양.. 아, 제발. "
" 태환, 그만 해요. 보기 안좋으니까. "
" 근데 왜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별로 좋은 추억 없을 이 곳에 왔어요? 날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어요?.. "
폭포처럼 쏟아지는 그의 슬픔어린 질문에 더 이상 답할 길이 없었다. 그냥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쑨양에게 태환은 더욱 더 다가갔다.
" 야, 박태환. 이제 그만. "
기성용의 목소리다. ' 어디가나 했더니 또 이 짓이냐? ' 하면서 태환에게 비아냥 거린다. 기성용이 태환의 어깨를 잡고 질리지도 않냐며 혀를 쯧쯧 찬다. 태환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 그래요, 태환. 질리지도 않으세요? "
' 제가 이런 사람인줄 아시면서 왜 그렇게 저한테 매달리세요? ' 하고 비수를 꽂았다. 그는 태환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 결국 땅을 쳐다보며 ' 끝났잖아요, 우리. ' 라는 말을 끝으로 쑨양은 차에 올라 타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울고있겠지? 울고있을거야.
상처받았겠지? 상처받았을거야.
나한테 정 떨어졌겠지? 그래, 그랬을거야.
이게 다행인거지? 정답인거지?
아무런 답을 내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