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더 (부제 : 점원 찬열 vs 꼬마 백현)
w.녹차하임
카운터에 덩그러니 올려진 아이스크림 나무막대. 그것을 사이에 두고 두쌍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두 인영 사이에서 기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어졌다. 카운터에 까치발을 들고서야 겨우 눈이 빼꼼하니 보이는 키를 가진 꼬마 아이가 180은 훌쩍 넘어보이는 점원을 말똥말
똥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었다. 방금 막 들이닥쳤던 아이는 뛰어왔는지 숨을 색색 새고 있었다. 근처 대학교에 재학하면서 용
돈벌이로 편의점에 알바를 시작한지 며칠 안된 찬열은 현재의 상황에 난감하기도 했지만 침착하게 상황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처음
문을 열고 가게안으로 들어온 것은 이 일곱살 정도 되어보이는 꼬마아이뿐이었다. 혹시나해서 유리창 너머로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사
람이 있는지 살폈지만 그렇게 보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찬열은 다시 눈을 아이에게로 돌려 아이와 아이가 조심스레 카운터에 올
려놓았던 나무막대를 번갈아 보았다.
이 나무막대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라도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내려본 나무막대에는 별 특이한 사항은 없었다. 막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위해 손을 가까이하자 아이의 눈동자가 더욱 빛
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찬열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막대의 반대편쪽 끝에 조그마하게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
다.
-축. 하나 더!-
엄마가 쥐어준 아이스크림을 먹다 이 글씨를 발견하고 기분좋게 이곳으로 달려왔을 꼬마아이를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아이
는 자신을 향해 웃음을 짓는 찬열의 표정에 그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졌는지 베시시 웃더니 작은 입을 오물조물 움직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모양이다. 그 귀여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했던 찬열은 아이가 입을 열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아까 지었던 미소를
유지한 채. 그 모습이 확실히 그를 좋은 사람으로 인상을 심어주었는지 아이의 입이 기어코 떼어졌다.
"아, 아져씨. 아-스크림 주세여."
미숙한 발음으로도 자신에게 제 목적을 또렷하게 얘기하는 아이의 모습이 대견스럽다. 순간 웃음이 '풋'하고 터져나올 것 같았지만 손
으로 입을 막아 꾹 참았다. 찬열은 카운터를 벗어나 아이 앞으로 걸어갔다. 아이가 자신을 목이 빠져라 올려보았고 아이스크림을 더
먹을 수 있단 기대때문인지 여전히 눈을 반짝였다. '나도 어렸을때 이런 표정을 지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아이의 표정은 순
수하기 그지없었다. 적어도 찬열이 보기에는 그랬다. 아이가 자신의 키에 두배나 되는 저를 보기위해 목을 빳빳하게 세우는 것이 힘들
었는지 고개를 순간 떨어뜨렸지만 아이의 고개는 오뚜기처럼 금새 들렸다. 그 모습에 결국 웃음을 작게 터뜨린 찬열은 주저앉아 아이
와 눈높이를 마주쳤다. 절로 아이의 고개도 내려가며 편안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찬열은 그런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
었다.
"이곳엔 혼자온거니?"
"…"
사근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아이의 몸은 움찔거렸다. 떨리는 눈으로 찬열을 바라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질문을 받을거라
곤 생각도 못했는지 눈을 데그르르 굴리며 대답을 피하는 아이의 모습에 찬열은 아이 몰래 작은 한숨을 쉬었다. 부모님께 얘기는 하고
온거냐는 질문을 덧붙일까도 했지만 그러면 아이가 더 불안해할 것을 알기에 입안에서 삼켜버린 찬열은 살포시 아이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아이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아이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에 기특해하며 천천히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이름이 뭐야?"
"… 변, 백현입니다."
아이는 망설였지만 침을 꼴깍 삼킨 후 경어까지 써가며 대답했다.
"백현이구나. 형은 박찬열이라고 해. 반가워"
굳이 이름까지 밝힐 필욘 없었지만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제 이름이 흘러나왔다. 백현이 눈을 꿈뻑이며 찬열을 바라보았다.
"백현아. 아이스크림 먹고싶어?"
찬열이 웃으며 물어보니 백현이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그래, 잘왔다. 형이 아이스크림 꺼내줄게. 여기서 기다려"
찬열은 다시 백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동고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냈다. 백현의 손에 아이스크림을 쥐어주자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웃음이 얼마나 깨끗해보였는지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금새 백현은 혼자 이곳에 왔다는 것을 떠올린
찬열은 서둘러 백현에게 집에 혼자 갈 수 있겠냐는 질문을 던졌고 백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편의점을 지켜야했기에 자리
를 비울 수 없었던 터라 다행이었다. 백현은 아이스크림을 손에 꼭 쥐고 가게를 빠져나가려던 찰나 다시 몸을 틀어섰다. 백현이 가게
를 빠져나갈 때까지 주시하고 있던 찬열은 의문을 가졌지만 곧 기분좋게 웃을 수 있었다. 백현은 허리를 90도 숙이며 똑부러지는 목소
리로 말했다.
"감샤합니다. 형"
지루하기만 했던 편의점 알바 중에 찾아온 동심이 그에게 색다른 순수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며칠 후 -
찬열은 볼을 긁적였다. 벌써 4일째다. 이쯤되면 데자뷰를 넘어서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의 앞에는 일곱상 정도의 아이가 서있었
다. 백현이었다. 오늘도 둘 사이에 있는 카운터 위에는 아이스크림 나무막대가 올려져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막대에는 역시 하나더라
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찬열의 이마에 식은 땀이 흐르는 듯 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감성 여린 저 아이가 혹여 실망할까 오늘도 그는
냉동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자, 행운의 아이, 변백현님."
하지만 백현의 반응이 여느때와는 달랐다. 원래라면 기분 좋은 환한 미소를 선사하며 아이스크림을 덥썩 받아들 백현이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건네주는 찬열을 뚫어져라 응시하기만 할뿐이었다. 그러나 곧 백현은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이며 미소를
지었다. 잠시였지만 확연히 눈에 띄는 변화에 찬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미 인사를 하고 밖으로 뛰어나간 아이에게 들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 날 -
"하암~"
기지개를 피며 하품을 늘어지게 뿜어낸 찬열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확인했다.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벌써 청소시간이네? 그는 이어 하품이 나올리 없는 시간에 하품을 했다는 사실 또한 알아차리고 놀라했다. 그가 이렇게 놀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란 바로 백현의 부재였다. 항상 청소시간이 다가오기 30분 전에 찾아와 나무 막대를 내밀던 백현이 오늘은
나타나지 않았다. 혹여 편의점에 오는 길에 사고라도 당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누가 유괴라도 한 것일까?
누가봐도 이상할만큼 연속적으로 당첨되던 것이 이제야 겨우 행운이 끝났다는 가장 간단하고 평범한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찬열에
머릿속에는 온갖 이상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찾아들었다.
그때 딸랑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가게안으로 들어섰다.
"아,"
찬열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럼그렇지, 오늘도 역시 백현이 찾아왔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제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등장한 백현이 엄마 뒤에 숨는가 싶더니 얼굴을 빼꼼히 내밀곤 손을 흔들어 찬열에게 인사했다. 그런 인사는 처음받아보는 찬열은 그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이내 손을 흔들며 인사에 응해주었다. 백현의 어머니는 백현에게 아이스크림을 꺼내오라고 말
했고 백현은 쪼르르 아이스크림 앞으로 달려갔다. 키가 작아 문을 여는 것도 힘들어보이는 모습에 찬열이 도와주러가려고 했지만 어느
새 다가와 말을 건네는 백현의 어머니에 의해 움직임을 멈추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찬열은 멋쩍게 웃으며 인사를 했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백현쪽으로 가있었다.
"혹시 우리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준 사람이 학생 맞나요?"
어머니의 질문에 눈이 커지며 고개는 그녀를 향해 정지했다. 당황한 찬열이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아, 저… 그게"
혹시라도 자신이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서슴없이 건네주는 것이 나쁜 영향을 끼치진 않을까 걱정했던 터라 조심스러웠다. 짧은 순간
에 살핀 그녀의 표정은 무척 인자해보였다. 그래도 지은 죄가 있어 대답을 망설이고 있던 중에 백현의 어머니는 말을 이어갔다.
"며칠전부터 아이가 나갔다 들어오면 꼭 손에 아이스크림이 쥐어졌있더라구요. 처음엔 갑자기 없어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백현의 어머니의 말씀에 찬열의 어깨가 미세하게 흠칫거렸다.
"그때는 아이를 다그쳐봐도 어디 갔다왔는지 말을 안해서 일단 넘어갔지만 그때부터 매일 같은시간만 되면 아이가 사라지는거에요."
"아… 하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상해서 안되겠다 싶었죠. 그래서 어제는 미행까지 했어요. 그런데 아이가 여길 와있지 뭐
에요. 잠시 들어갔다 나왔을 땐 역시나 손엔 아이스크림이 있었구요."
"… 죄송합니다."
찬열은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다 고개를 숙이며 사죄의 뜻을 전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첫날 우유뷰단하게 행동하는 바람에 아이의 부
모님께 큰 걱정을 끼친 것 같았다. 자신도 오늘 잠시나마 느끼지 않았던가. 아이가 눈앞에 없을때 밀려오는 불안감을.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뭐가요? 죄송할 짓이라도 한거에요?"
"괜한 제 행동때문에 아이걱정을 끼친 것 같습니다."
"아, 그거라면 됐어요. 아이 걱정하는 마음이야 당연한거잖아요. 호호. 전 오히려 고마운걸요"
찬열의 말에 소스라치며 대답한 백현의 어머니는 찬열을 잠시 빤히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냉동고 앞에서 낑낑거리고 있
는 백현을 바라보고는 다시 찬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오랜만에 느끼는 어머니의 푸근함이 깃들어있었다.
"사실… 백현이는 계속 집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았었어요."
"네? 그게 무슨…"
"어린이집에서 무슨이유인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친구들과 싸운 적이 있어요. 그 이후부터 어린이집은 물론이고 집 밖으로 아예 나가려
고 하질 않더라구요."
"…"
"그래서 많이 놀랐어요. 처음에 집을 나간것도 그이후도 같은 시간만 되면 어딘지 모르지만 집 밖으로 나간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
었죠. 그리고 그 향하는 곳이 집에서 꽤 떨어진 이 편의점이라는 것도요."
"!"
백현에 관한 뜻밖의 이야기에 찬열은 가슴이 저밋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말에 조금 놀랐다. 백현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이곳이
집에서 가깝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꽤 떨어져 있다니… 백현이 왜 굳이 이곳까지 찾아오는지 그로썬 알수없는 노릇이지만.
"어찌됐던간에 저는 그쪽에게 참 고맙네요. 덕분에 아이가 다시 밖으로 나와 이렇게 세상과 통하고 있으니까요."
"아… 아닙니다. 제가 한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백현이가 다시 기운을 차리게되서요."
"어머, 겸손하시네요. 솔직히 얼굴이 하도 잘생겨서 콧대높을 줄 알았는데. 호호"
그녀는 찬열의 담백하고 솔직한 대답에 얄궂은 표정을 지었다. 조용하기만 했던 백현과는 사뭇 다른 그녀의 모습에 아들은 엄마를 닮
는다는 옛말은 거짓이었나 생각했지만 찬열은 고개를 저었다. 어떤 웃음을 짓던간에 그 안에 존재하는 순수함만큼은 누가봐도 두사람
이 모자지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떻게 꺼낸 것인지 어느새 백현이 아이스크림을 품에 안아들고 제 엄마 옆에 서있었다. 그녀는 백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먼저
나가있으라 말했고 백현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군말없이 나가 편의점 앞에 있는 파라솔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계산을 위해 돈을 꺼내
찬열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그의 손에는 아이스크림의 값보다 더 많이 들려있었다. 찬열이 다시 돌려주려 할 때 그녀가 그것을 막으
며 얘기했다.
"그건 이제까지 백현이가 가져갔던 아이스크림 값이에요."
"그 아이스크림은 이벤트로…"
"알고있어요. 근데 사실 그 이벤트, 기간 지났었죠? 아이가 버린 봉투를 우연히 봤어요"
"아…"
"고마워요. 우리아이의 동심을 지켜줘서."
"별말씀을요. 그런데 그것을 제하고도 돈이 남습니다."
그렇다. 그녀가 쥐어준 돈은 상당했다. 몇개 되지도 않는 아이스크림 값을 지불하고도 훨씬 웃도는 돈이었다.
"그건 고마움의 표시에요… 라고 하고 싶지만 학생 표정을 보아하니 씨알도 안먹힐 것 같네요."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돈을 다시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돈을 받지 않고 그대로 고민에 빠져들었다. 찬열이 완강히 거부하기
위해 돈을 직접 그녀의 손에 쥐어주려던 찰나 그녀가 손뼉을 치며 탄성을 내질렀다.
"음… 이걸 어쩌나? 아! 이렇게하죠"
"?"
"이건 앞으로의 아이스크림 값으로 해두죠."
"네?"
"앞으로도 우리 아이가 찾아오면 잘부탁해요. 호호"
찬열이 그에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백현의 어머니는 가게밖으로 냉큼 나가버렸다. 찬열은 급한마음에 문을 열고 그녀를 뒤쫒았지만
그녀는 찬열의 부름을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막연하게 걸어가는 그녀와 백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둘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리고 백현이 뒤돌아 찬열의 앞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찬열을 빤히 보던 백현은 훗날 여자 여럿 울릴 듯한 웃음을 베시시 날리고는 찬열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찬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저앉아 백현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왜?'하고 물어보려던 찰나 백현이 고개를 내밀어 찬열의 입
에 쪽소리를 내며 뽀뽀했다.
"내, 내일도 모레도 또 올게여!"
제 할말만 하고는 냅다 뛰어 다시 엄마 옆으로 간 백현은 엄마 손을 잡고 집을 향해 걸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찬열은 얼떨떨했다
. 그의 손이 백현이 다녀간 입을 매만졌다. 그의 입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자신의 퍼스트키스를 이리도 허무하게 일곱살 꼬마아이에게 빼앗겨버린 어느 여름날이었다.